제임스 번햄, 경영자 혁명 1장:문제
1. 문제
1939년 9월 1일에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이 통상적인 군사적·외교적 범주만으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모든 대규모 전쟁의 모든 참전국은 예외 없이 자신들이 단순한 정복이라는 저급한 목적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정의, 신, 그리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싸운다고 설명하는 데 각별히 신경을 쓴다. 제2차 세계대전 역시 인간이 상호 살육이라는 과업에 직면할 때 그 도덕적 본성 깊은 곳에서 비롯되는 듯한 이 일반적 규칙의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반적 규칙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훈련받은 지적 관찰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관찰자들 사이에서도 이 전쟁은 평범한 전쟁이 아니라는 확신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일부 사람들은 이 전쟁을 ‘혁명’, 보다 구체적으로는 ‘사회혁명’이라고 부르며 그 차이를 설명해 왔다. 예컨대 저명한 작가 퀸시 하우(Quincy Howe)는 라디오 해설에서 그러한 해석을 거듭해서 주장했다. 그가 반복해서 말하길, 독일은 단지 국경을 넘어 놀라울 정도로 조직된 군사 기계를 파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독일의 군사 기계는 유럽 대륙의 사회 체제를 변형시키고 있는 하나의 사회혁명을 운반하는 매개체라는 것이다.
같은 요지는, 오랫동안 뉴욕 타임스의 수석 특파원으로 독일에 주재하다가 추방된 이후의 오토 톨리슈스(Otto Tolischus)가 보낸 수많은 통신 기사들에서도 제기되었다. 내가 이 두 사람을 언급하는 것은 그들의 견해가 예외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많은 다른 이들에 의해 공유되게 된 관점을 이들이 두드러지게, 그리고 일관되게 옹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자들이 말하고 써 온 바를 검토해 보면,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사회혁명이라는 주장에는 단호했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혁명인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로부터 어떤 유형의 사회가 등장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결코 명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전쟁 그 자체가 주는 압도적인 감정적 충격 때문에 역사적 판단이 왜곡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만약 지금 실제로 하나의 중대한 사회혁명이 진행되고 있다면, 전쟁은 혁명에 종속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전쟁은 궁극적으로—그리고 앞으로의 전쟁들 역시—그 혁명의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전쟁에만 분석을 한정해서는 혁명을 이해할 수 없으며, 혁명의 전개 과정 속 한 단계로서 전쟁을 이해해야 한다.
더 나아가, 이것이 혁명이라면 그 혁명에서 독일이 차지하는 역할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현대 세계는 수많은 기술적·경제적·문화적 사슬에 의해 서로 얽혀 있다. 독일 내부에서 극적으로 작동해 온 사회적 힘들은 제국의 국경선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것들이 독일에서 그렇게 충격적인 정점에 이르렀다고 해서, 다른 나라들—사실상 모든 나라들—에서는 표면 아래에서, 그리고 그리 깊지도 않은 곳에서, 꾸준히 작동해 오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일차적 관심의 대상은 미국 그 자체다. 미국이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군사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는 낡은 믿음의 오류보다도,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는 믿음의 오류가 훨씬 더 심각하다.
우리가 ‘사회혁명’이라는 말을 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결코 자명하지 않으며, 특히 사회혁명을 단순한 ‘군사적’ 또는 ‘정치적’ 혁명과 구별하려 할 때는 더욱 그렇다. 역사에 대한 특정하고 상충하는 이론들과 함께, 그 일부로서 여러 서로 다른 정의들이 시도되어 왔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이론에 미리 자신을 구속하지 않더라도, ‘사회혁명’이란 말로 지적으로 이해 가능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루는 주요 구성 요소들을 서술하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주요 구성 요소들은 세 가지인 듯하다.
첫째, 가장 중요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제도들에서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재산 관계의 체계, 경제적 생산이 이루어지는 형태, 법적 구조, 정치 조직과 정권의 유형이 모두 매우 급격하게 변형되어, 우리는 그것들을 단순히 정도가 수정된 것이 아니라 성격 자체가 달라진 것으로 부를 수밖에 없게 된다. 중세적(봉건적) 재산 관계와 경제 생산 방식, 법, 정치 조직은 모두 현대적(부르주아적 또는 자본주의적) 재산 관계와 생산 방식, 법, 정치 조직으로 대체된다. 혁명의 진행 과정에서, 옛 제도들이 말그대로 산산이 파괴되고, 새로운 사회에서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새로운 제도들이 그 자리를 대신해 발전하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둘째, 사회 제도의 변화와 더불어, 문화적 제도들과 인간이 세계와 우주 속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배적인 신념들에서도 어느 정도 병행하는 변화가 뒤따른다. 이러한 문화적 전환은 봉건 사회에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교회나 학교와 같은 제도들의 형태와 위상이 재편성된 점에서도, 그리고 르네상스 시기에 이루어진 세계관·인생관·인간관의 전면적인 변형에서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사회에서 최고 지위를 차지하고 권력과 특권의 대부분을 통제하는 집단이 변화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봉건 영주들이 봉신과 봉토를 거느리며 행사하던 사회적 지배를 대신하여, 화폐 자본과 공장, 임금노동자들을 기반으로 한 산업가와 은행가들의 사회적 지배가 등장한다.
이러한 개념에는 일정한 자의성이 존재한다. 사실 사회적·문화적 제도와 신념, 그리고 사회적 권력 관계는 항상 변화하며, 지속적인 수정의 대상이 된다. 하나의 사회 유형과 다른 사회 유형을 가르는 정확한 시간적 경계를 그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역사 속에 언제나 존재하는 변화 그 자체라기보다는, 변화의 속도이다. 어떤 시기에는 사회 변화의 속도가 다른 시기들에 비해 훨씬 더 빠르다.
역사에 대한 각자의 표방된 이론이 무엇이든 간에, 예컨대 1400년부터 1600년까지의 두 세기 동안 사회 제도와 신념, 그리고 여러 사회 집단들 사이의 상대적 권력의 변화 속도가, 1400년 이전의 여섯 세기 동안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는 점은 거의 부정하기 어렵다. 실제로 그 두 세기 동안의 총변화량은 800년부터 1400년까지의 여섯 세기 동안에 일어났던 변화보다 훨씬 더 컸다. 우리가 사회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변화 속도가 극대화되는 시기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러한 시기 이전에 지배적이었던 사회를, 그 이후에 공고화된 사회와는 서로 다른 유형의 사회로 인식한다. 역사학자들은 ‘근대’가 언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의견이 갈리지만, 중세 사회와 근대 사회를 명확히 구분한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한다.
따라서 현재 사회혁명이 진행 중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재가 사회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빠르게 나타나는 시기이며, 대략 15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지배적이었던 사회 유형에서 새롭고 상이한 사회 유형으로 이행하는 과도기라는 말과 같다. 수세기 동안 인간의 활동은 비교적 안정적인 사회적·문화적 제도의 틀 안에서 전개되며, 변화가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 기본적 틀을 바꿀 정도로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간혹, 변화가 너무도 빠르고 그 규모가 너무도 급격하여 기존의 틀 자체가 산산이 부서지고, 그 자리를 새로운 틀이 대신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 책이 다루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나는 앞서 간략히 제시한 사회혁명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하나의 전제로 삼을 것이다. 또한(이 전제를 뒷받침할 증거 없이 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가 실제로 하나의 사회혁명기, 곧 한 사회 유형에서 다른 사회 유형으로 이행하는 과도기라는 점도 전제로 삼을 것이다. 이러한 전제들의 도움을 받아, 나는 이 이행을 설명하고 그 이행이 결국 도달하게 될 사회의 유형을 예측할 수 있는 하나의 이론—내가 ‘경영자 혁명 이론(the theory of the managerial revolution)’이라 부르는 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이 책에서 다루는 유일한 문제이다.
나는 이 이론이 놀라운 개인적 혁신인 것처럼 가장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지난 몇 년 동안 강연이나 대화에서 이 이론을 제시할 때마다, 나는 흔히 “아, 그건 바로 내가 요즘 생각하고 있던 바야”라거나 “그건 내가 며칠 전에 누구에게 말했던 바로 그것이네”라는 반응을 들어왔다. 이러한 반응은 나로 하여금 이 이론을 진부하거나 하찮은 것으로 여겨 버리게 만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가능한 한 충분하고 명시적으로 이 이론을 공론 장으로 끌어내어, 공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검토되게 함으로써, 그것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증거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거부되거나 수용되거나 적절히 수정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이유가 되었다.
지난 20년 동안 이 이론의 여러 요소들은 다양한 논문과 저서들 속에 포함되어 왔으며, 나는 특정하게 어떤 하나의 저작으로부터 특별한 영향을 받았다고 지목할 수는 없지만, 전반적으로 그러한 작업들에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어서 제시될 개요에서 새로운 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은—그것이 거의 전부라 해도 좋을 정도이지만—이 이론에 부여된 명칭(이는 중요하지 않은 요소다), 그 아래에서 종합되는 서로 상이한 역사적 요인들의 수, 지금까지 그 의미를 흐려 왔던 전제들의 제거, 그리고 제시 방식이다.
마지막 점과 관련하여 한마디를 덧붙일 필요가 있다. 나는 사회 개혁의 강령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며, 내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해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내리고 있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오로지 현재의 사회적 이행기의 성격을 설명하고 그 결과를 적어도 일반적인 수준에서 예측할 수 있는 기술적 이론을 정교화하려는 시도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적어도 이 책에서만큼은, 이 이론이 지시하는 사실들이 ‘좋은지’ 혹은 ‘나쁜지’, 정의로운지 정의롭지 않은지, 바람직한지 바람직하지 않은지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현재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증거에 비추어 그 이론이 참인지 거짓인지의 문제만을 다룬다.
이러한 경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어떤 강령이나 도덕을 귀속시키게 되리라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역사·사회·정치에 관해 쓰인 글들에서 이러한 고려를 제거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이 분야들에서 우리는—어쩌면 이해할 만하게도—지식보다는 구원에 더 조급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경험은 우리에게, 참된 구원은 오직 지식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비록 이 책이 어떠한 강령도, 어떠한 도덕도 담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여기서 제시되는 이론이 참이거나 부분적으로라도 참이라면, 그 이론에 대한 이해 없이 지적이고도 타당한 강령이나 사회적 도덕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James Burnham, The Managerial Revolution: What Is Happening in the World (New York: The John Day Company, 1941),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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