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티스 야빈, 클리어필: 4행정 체제
클리어 필(The Clear Pill), 5부 중 1부: 4행정 체제
2019.09.27,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
한 번의 복용으로 당신의 정치적 사고 전체가 지워질 것이다.
편집자 주: 기술자이자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라는 필명으로 블로깅을 해온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은, 기존의 주류 보수주의와는 크게 어긋난 입장 속에서 온라인 우파 진영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동시에 가장 논쟁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최근 몇 년 사이 인터넷 전반의 정치 지형이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파편화되면서, 일부 진영은 야빈이 제시한 개념들—예컨대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와 연관된 ‘레드 필(red pill)’ 은유—을 차용해 대중화했고, 그 과정에서 때로는 건전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변용하기도 했다.
이제 야빈은 새로운 에세이 연작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이에 대한 비판, 그리고 미국 사회에서 주도권을 다투는 모든 정치적 틀에 던지는 급진적 도전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성향을 막론한 모든 당파는, 기술계에서 힘과 권위를 축적해 가고 있는 이 공격 노선에 대응할 준비를 해두는 편이 바람직할 것이다. 오늘날 미국 정치가 ‘좋은 삶’을 제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긍정적으로 답한다. 그러나 야빈이 촉발하는 체제에 대한 건강한 충격, 그리고 정치적 민주주의의 본질이라 할 긴장과 논쟁이 없다면, 아무리 열광적으로 반복되는 긍정적 답변이라 하더라도 그 설득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고 우리는 강하게 의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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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전환기 이탈리아 정치학파—가에타노 모스카(Gaetano Mosca)와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를 대표 인물로 하고, 제임스 번햄(James Burnham)이 그의 최고작인 『마키아벨리언들: 자유의 옹호자들』(1940)에서 이를 정리한—는 모든 국가는 엘리트에 의해 지배되며, 그 엘리트는 환상을 통해 피지배자를 복종시킨다고 가르쳤다.
모스카는 이러한 환상을 “정치적 공식(political formulas)”이라 불렀다. 정치적 공식이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객관적으로는 체제를 안정시키는 행동을 선호하도록 만드는 모든 서사적 요소를 말한다. 고대 이집트의 농민은 파라오의 아버지, 즉 태양을 노하게 하지 않기 위해 파라오에게 복종했을지도 모른다.
정치적 공식은 무대 마술과 사촌 관계에 있다. 무대 마술은 참인 사실들을 특정한 패턴으로 제시함으로써 거짓된 이야기를 암시하고, 동시에 진짜 이야기를 가려 버린다. 정치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과 감각을 넘어선 무대 위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누구도 매개되지 않은 현실을 인식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행동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를 현실, 즉 ‘현재의 역사’로 읽는다.
여론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의견을 갖게 된다. 이야기가 의견을 만들고, 의견이 행동을 낳는다. 자, 이걸로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 책 한 권은 아꼈다. 그리고 볼테르가 말했듯이, 터무니없는 것을 믿게 만들 수 있는 자는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게도 만들 수 있다.
마키아벨리언 가설은 모든 현대 체제가 오웰식 사고 통제 체제라고 시사한다. 과연 그럴까? 우리 정부도, 이른바 ‘딥 스테이트’처럼, 트루먼 쇼에서처럼 가짜 현실의 돔 속에 사람들의 정신을 가둬 두어 피지배자를 예속시키고 있는 걸까? 와, 대단하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 다수는, 내 생각엔, 무지하거나, 미성숙하거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거나, 아니면 그냥 틀렸다. 아마 당신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진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실제로는 음모 같은 건 없다는 걸 안다—완벽한 사람은 없지만, 거의 모든 문제에서 전문가들은 그저 전문가일 뿐이다.
바로 이런 이야기가야말로 일류급 현실 돔에서 기대할 법한 서사다. 마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술사 자신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마술은 본능보다 더 치밀하게 작동함으로써 효과를 발휘한다. 관객에게 특정 유형의 생각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속아야 할 대상은 전문가와 진지한 사람들뿐이다.
정치적 무대 마술이란 인구 전체에 대한 심리 공학이다. 대부분의 공학 분야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해 불가능하다. 어쩌면 당신은 프로젝터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누구나 돔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바로 그 마술사일지도 모른다! 조심하라…
클리어 필을 복용하라
믿고 싶지 않은 어떤 생각이든 점검해 보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한 다음, 그 공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현실을 구축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실패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게 어떻게 사실일 수 있는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나는 CIA가 9·11을 일으켰다는 말을 믿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것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하나의 현실을 만들어 보려 한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다. 그러고 나면 다시 알카에다의 음모였다고 믿게 된다. 나는 O.J. 심슨이 유죄라는 것도 믿고 싶지 않다. 무죄라고 가정하고 진짜 범인을 찾아보려 하지만, 그 범인들조차 상상해 낼 수 없다.
이런 무결성 점검은 말 그대로 실패할 수 없는 장치다. 당신을 인터넷의 온갖 잡다한 헛소리로 세뇌시키지 않는다. 돔에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지금의 현실에 그대로 머문다. 실패는 곧 대우(역주: 對偶. 논리학에서 'p이면 q이다(p→q)'라는 명제의 'q가 아니면 p가 아니다(¬q→¬p)'로, 가정과 결론의 위치를 바꾸고 각각 부정하여 얻는 명제. ex. "비가 오면(p) 땅이 젖는다(q)"라는 명제의 대우는 "땅이 젖지 않았으면(¬q) 비가 오지 않았다(¬p)"이다.)에 의한 증명이다. 즉, 당신이 원래 옳았거나, 아니면 당신의 상상력이 부족했을 뿐이다. 어느 쪽이든, 이제 스테이크 한 접시 더 먹을 시간이다.
그리고 성공은—전적으로 당신의 것이다. 누구도 당신에게 다른 무엇을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 알약은 중립적이고, 무미건조한 불신이다. 흔한 정치적 공식 전반에 두루 쓰이는 치료제일 뿐이다. 그 자체로 참이든 거짓이든 어떤 신념도 담고 있지 않다.
클리어 필은 당신이 돔 안에 있다는 말은 한다. 그러나 그 돔 바깥의 실제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당신이 그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몇 가지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라는 것—만을 말할 뿐이다. 그 사실들조차 부정하지 않는다. 이 알약은 순수한 철학으로 만들어졌으며, 제트 연료나 강철 빔 따위는 들어 있지 않다.
한번 해보라! 재미있을 것이다! 멋진 아이들은 다들 이걸 먹고 있다!
중립성의 목표
진정한 역사는 사실들의 집합이 아니다. 사실들로 만들어진 하나의 참된 이야기다.
현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동시에 유통되고 있다. 이 알약의 목적은 그 어느 것도 충족하지 못하는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는 데 있다. 따라서 그 기준을 적용한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든 믿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중립적이라는 것은, 현재의 역사를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중립성은 일종의 정치적 무신론이다. 정치적 신념이 없다는 것은 정치적 행동뿐 아니라, 이상적으로는 정치적 욕망—고대 그리스인들이 말한 티모스(thymos)—마저도 금욕한다는 뜻이다.
생산적인 정치 행동은 하나의 이야기에 속한 집단이 그 이야기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당신은 이야기 하나 없는 개인이다. 그러니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당신은 예전엔 그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인간으로서 말이다. 어느 편에 서 있었든 간에. 그건 형편없는 일이었고, 당신은 그 일을 잘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만뒀다. 이제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원할 필요조차 없다. (지원서나 연구비 제안서에 굳이 이런 태도를 강조할 필요도 없다—마키아벨리언은 무엇보다 현실주의자다.)
완벽한 중립 상태—그 누구도 완전히 도달하지는 못하는 상태—에 가까워질수록, 당신은 정치적 에너지와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당신은 어떤 특정한 대의에도 쓸모도 해악도 끼치지 않는다. 정치적 분노도, 정치적 공포도 느끼지 않는다. 문제를 일으키지도, 문제에 휘말리지도 않는다. 이런 정치적 휴가는 평생 지속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속될 수도 있다.
중립성이란, 지금 당신이 따르고 있는 어떤 서사와의 지적 이혼에 불과하다. 누군가는 여전히 당신의 새로운 기준을 충족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이야기를 충분히 믿어, 그 안에서 살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다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혼자인 것이 정말로 기분 좋다.
그리고 분명히 말하자면, 아니다. 당신은 투표도 하지 않고, 시위도 하지 않으며, 선동도 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중립적이라는 것은 모든 갈등의 모든 진영에 대해 가능한 한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만약 그 자리가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곳이라면, 지금이야말로 빠져나갈 때다.
속이 빈 버팀대
물론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했다. 시작부터 난관이다. 마키아벨리언 가설은 명백히 틀려 보인다. 이는 당연히 예상했던 바다.
보통의 독자는 20세기 체제를 두 가지로 안다. 나쁜 종류(그들의 것, 전체주의)는 마키아벨리언적 해석이 들어맞고, 좋은 종류(우리의 것, 민주주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나쁜 종류(그들)는 좋은 종류(우리)를 상대로 싸웠고, 좋은 종류(우리)는 반격하여 승리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오웰식 체제의 반대편—열린 사회이자 사상의 자유시장이다.
역사는 동화처럼 전개될 수도 있다. 20세기에 대한 이 서술, 즉 아드 우숨 델피니(ad usum delphini, 어린이를 위해 정제한 판본)는 표면적으로 그다지 의심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그 안에는 분명한 사실도 많이 담겨 있다. 내 아이들은 내가 “히틀러에 관한 오래된 책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고 비난하곤 한다. 이는 그들이 아는 것보다 더 사실에 가깝고, 덕분에 나는 그들의 체제가 우리의 최고의 이야기꾼들이 말하는 것과 대체로 비슷했다는 점에 꽤 확신을 갖게 되었다.
사실관계로 보자면, 오늘날의 역사학자들에게 제3제국만큼 잘 알려진 시대도 드물다. 그 체제를 연구하는 현재의 학자들 가운데 그들의 선전에 감동받는 이는 거의 없다. 같은 말을 뉴딜에 대해서도 할 수 있을까! 역사는 패자를 사랑한다. 패자의 기록 보관소는 벌거벗겨져 있고, 그 비밀은 지켜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우리에 대해 무엇을 증명하는가? 무엇이든 증명하는가? 끔찍한 자들이 끔찍한 이유로 서로 싸운 적이 없었던가?
히틀러와 싸운 공로는 스탈린에게도 적어도 그만큼 돌아간다. 그가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싸웠다고 말하는 권위자는 거의 없다.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었던 것도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해내지도 못했다. 되돌아보면, 자기방어라는 주장조차 그리 강하지 않다. (만약 추축국이 세계 정복을 목표로 한 군사 계획을 갖고 있었다면—75년 전에는 많은 미국인이 믿었지만 지금은 거의 믿지 않는 이 이론대로라면—일본은 1941년에 시베리아로 진격했고, 유라시아는 그들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세울 최고의 업적이라는 말인가? 여기서 1인칭 복수를 쓰는 것 자체가 조지 오웰스럽다. 살아 있는 개인이 이런 결정을 내린 적은 없다. 살아 있는 제도들이 내렸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결과가 엇갈린 성과를 이유로, 우리는 그들의 브랜드를 영원히 숭배해야 하는가? 도무지 계산이 맞지 않는다.
현재에 대한 우리의 공통된 이야기에서 감정적 무게가 막대한 이른바 “히틀러에 빗대는 논증(역주: argumentum ad Hitlerum. 논증에서 히틀러(또는 나치)와의 연관성을 이유로 어떤 주장·사상·정책을 자동으로 잘못된 것으로 몰아가는 오류)”은 논리적 무게로는 거의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다. 패자의 사라진 제도를 아무리 이해해 보아도, 승자의 살아 있는 제도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한다. 거대한 버팀대는 속이 비어 있다. 대체로 장식물에 불과해 보인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진짜 무대 연출의 첫 작은 단면을 엿본다.
분산된 전제정의 이론과 실제
그러나 오래된 현실 인식은 여전히 설득력을 지닌다. 분명히 두 가지 유형의 체제가 존재한다. 이를 단순히 상상으로 지워 버릴 수는 없다.
보통 역사적 나치즘, 스탈린주의, 마오이즘을 떠올릴 때 우리는 전쟁기나 준(準)전시 상황에서 벌어진 대규모 잔혹 행위를 연상한다. 그러나 1960년대의 체코슬로바키아, 1930년대의 독일, 심지어 오늘날의 중국을 바라보면 그러한 잔혹 행위는 훨씬 적게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동일한 위계적 통제 구조를 목격한다. 한 사람, 혹은 소수의 팀이 국가 전체를 일방적으로 지휘하는 구조 말이다.
이러한 구조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는 분명히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체제”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중국 공산당이나 시진핑 주석과 유사한 어떤 것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 위계가 없고, 중심도 없다. 지도자도, 정치국도, 간부 조직도 없다. 어쩌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아닐지 모르지만, 군주제도 아니고 독재도 아니다.
그렇다면… 분산된 전제정(distributed despotism)일까? 탈중앙화된 오웰식 체제가 가능한가? 만약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논의는 여기서 끝난다. 직관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차라리 하나를 설계해 보자.
어쩌면 오웰식 체제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2행정 엔진과 4행정 엔진처럼 말이다. 어느 쪽도 본질적으로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다. 4행정 낙엽 송풍기는 과도하고, 2행정 자동차는 원시적이다.
아마도 4행정 체제는 분산형이고, 2행정 체제는 중앙집중형일 것이다. 하나는 파충류이고, 다른 하나는 포유류다. 하나는 물고기이고, 다른 하나는 고래다. 두 체제 모두 여론을 형성함으로써 지배한다. 2행정 체제는 이야기를 설계한다. 반면 4행정 체제에는 독재자가 없으므로 설계자도 없다. 그들의 이야기는 진화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2행정 체제는 강압적 억압에 더 의존하고, 4행정 체제는 부드러운 환상에 더 의존한다. 그러나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두 체제 모두 이 두 가지 안정화 수단을 모두 사용할 수 있고, 실제로 사용한다.
단일 서사의 국가
2행정 체제는 단일 서사의 국가다. 모든 사람은 하나의 이야기—현재에 대한 하나의 공식 서사—를 믿어야 한다.
이 방식은 아멘호테프(Amenhotep)에게도, 시진핑 주석에게도 똑같이 잘 작동했다. 2행정 체제는 중앙집중적 군주제 체제와 특히 잘 맞는다. 또한 오웰식 전체주의에 대한 전형적 클리셰와도 부합한다.
단일 서사의 국가는 효율적이지만 불안정하다. 그 고질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강요받는 것을 싫어한다는 데 있다. 그 이야기가 사실일 때조차도 사람들은 종종 문제를 일으킨다!
중국에 가본 사람이라면 고전적 전체주의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집행’되는지를 직접 보았을 것이다—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말이다. 중국은 소비재를 전부 만들어낼 뿐 아니라, 장기 이식 관광의 최고 목적지이기도 하다. 설령 오프로드 바이크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른다 해도, 당신은 그 중국제 2행정 SUV를 정말로 원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연료에 오일이 섞여 있지 않으면 2행정 엔진은 과열된다. 결국 불이 붙는다. 강력한 억압을 지속적으로 실행하지 않고, 국내외에 진지한 적이 없다면, 고전적인 일당국가는 약화된다. 지나친 성공 속에서 스스로 썩어 간다. 결국에는 꽃을 든 소녀들에 의해 전복된다.
이상적인 국가는 그 서사가 100% 참인 단일 서사의 국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위험할 정도로 이상주의적인 발상이다. (그리고 그것이 체제 안정화의 기본 공리들을 무효화해 주는 것도 아니다.)
이중 서사의 국가
4행정 체제는 이중 서사의 국가다. 사람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들으면 보통 이렇게 묻는다. 이게 사실인가? 그러나 두 개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렇게 묻는다. 이 둘 중 어느 쪽이 사실인가? 꽤 영리한 속임수 아닌가? 어쩌면 우리 세계 전체가 바로 이것 위에 세워져 있는지도 모른다. 좌우파가 모두 동의하는 지점은 ‘공유된 서사’가 된다. 즉 “논쟁의 여지가 없고, 초당파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공유된 서사는 근본적 특권을 지닌다. 자연스러운 적이 없고, 자동으로 참이 된다. 여기에 새로운 관념을 주입하는 일은 쉽지 않으며, 그만큼 수익성이 있다. 이 직업을 우리는 “홍보(PR)”라고 부른다.
갈등 스펙트럼의 어느 쪽 극단이든, 중간이든, 혹은 이 공유된 서사든 간에, 단일 서사의 국가에서의 단일 극점보다 현실에 더 가깝다고 가정할 이유는 없다.
서사를 분할했다고 해서 오래된 질문—이 모든 것이 과연 사실인가?—에 답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회피했을 뿐이다. 무대 연출이다!
이는 “히틀러와 싸웠고 히틀러는 나빴으니 우리는 선하다”라고 가정하는 것보다도 더 정교하다. 이런 아주 기본적인 오류들, 혹은 심리적 착취 기법들은 우리의 정치적 운영체제 깊숙이 박혀 있다. 코드 속의 버그처럼, 똑바로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보면, 너무나도 분명해진다.
시민 코어와 정치 코어
이중 서사의 국가가 지닌 핵심적 특징은 강경한 억압에 대한 의존이 훨씬 적다는 점이다. 이는 4행정 엔진과 마찬가지로, 그 대가로 부품이 늘어나고 성능이 저하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중 서사 국가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공학적 문제는, 체제의 구성원들을 실제 민주적 권력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동시에, 활발하지만 무해한 정치적 갈등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있다.
현대의 이중 서사 민주국가는 두 개의 권력 핵을 포함한다. 하나는 시민 코어(civic core), 다른 하나는 정치 코어(political core)이다. 여기서 요령은 이렇다. 이론상으로는 정치 코어가 시민 코어보다 더 강력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민 코어가 정치 코어보다 더 강력하다.
안정적인 체제는 이 권력의 역전을 유지해야 한다. 안정이 무너지면 정치적 핵이 통제권을 장악한다. 그 순간, 엔진은 잠시나마 진짜 민주주의가 된다—그리고 곧 다른 무언가로 변하거나, 아니면 그대로 불이 붙어 폭발해 버린다. 1933년의 독일을 떠올려 보라.
그러나 이 ‘역전’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거짓이다. 정치적 핵은 지배자로 제시되고, 시민적 핵은 도구로 제시된다. 하지만 실제 권력의 흐름은 겉으로 보이는 흐름과 정반대다.
여론이 시민적 핵을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핵이 여론을 이끈다. 단일 서사의 국가는 지속적인 억압을 필요로 하고, 이중 서사의 국가는 지속적인 무대 연출을 필요로 한다. 물론 전자는 여전히 거짓말을 할 수 있고, 후자는 여전히 억압을 행사할 수 있다.
현대의 언어에서 긍정적 표지인 “민주주의”는 시민적 핵을 가리킨다. 우리는 모두 “정치”라는 부정적 표지로부터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 뉴스피크를 진심으로 믿는다. 권력의 흐름을 거꾸로 뒤집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에, 어쩌면 그들은 옳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역전 관계는 150년 전 베이지핫(Walter Bagehot)이 설명한 의회와 여왕의 관계와 동일하다. 유권자는 여왕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의 황제이기도 했지만, 인도 통치의 “의사결정 고리” 안에 있었던 적은 없다. 영국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무의미한 존재였던 것도 아니며, 누구나 그녀를 존중했다.
이것이 바로 하노버 왕조 체제의 합의였다. 즉, 실제 군주제를 대체하기 위해 “입헌” 군주제를 설정한 것이다. 빅토리아는 실질적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이미 세실 가문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기는 했지만)와, 상징적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다.
오늘날의 유권자들은 엘리자베스 2세가 화이트홀을 지휘하는 법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운영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올바른 공항에 착륙하기를 원할 수는 있다. 하지만 비행기를 어떻게 조종하는지는 전혀 모른다.
그렇다고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은 비행기를 장악하는 방법 또한 모르기 때문이다.
자연은 약함과 예속을 한 몸으로 결합시켜 놓았다. 자연의 법칙에 따르면, 약한 자는 오직 지배하는 척만 할 수 있다. 그들은 권력을 획득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그들은 한 번도 지배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결코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어린 군주가 왕위에 있는 곳마다, 실제로 통치하는 이는 따로 있다.
시민 코어
시민 코어란 상설 관료 조직인 공무원 집단에 더해, 다른 나라의 언론이 흔히 “시민사회”라고 부르는 영역을 합친 것이다.
여기서 “시민사회”란 국가나 공공을 섬기거나 이끄도록 설계된 모든 정당한 제도들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언론, 학계, 자선·재단 조직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임무 핵심적 기관들은, 정치적 책임성의 잠재적 영향권에서조차 벗어나 있을 때 가장 강력하고, 가장 안전하며, 가장 민주적인 곳이 된다.
정식 의미의 공무원 조직은 여러 보호 장치를 갖추고 있지만, 이론상으로는 여전히 대통령에게 위계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이 종속 관계는 형식적일 수 있다. 그러나 언론처럼 민주주의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제도에 대해 그러한 형식성조차 충분하지 않다. 전시 상황이 아니라면 정보부 같은 기관을 두는 것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전시 상황의 ‘진실부’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OWI,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CPI가 있었다.)
서구의 시민사회와 동구권의 집권당을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둘 다 정식 관료 조직 바깥에 존재하는 기관들이다. 다만 후자는 진정으로 중앙집중적이고, 전자는 분산되어 있다.
시민사회에는 단일 실패 지점이 없다. 이는 장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에 대해 눈에 띄게 불편한 세 가지 사실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이 현상들은 당분간 수수께끼로 남겨 두어야 할 것이다.
첫째, 시민사회에는 임의적 중심은 없지만, 그 명성 체계는 임의적이거나 적어도 정체된 것처럼 보인다. 명문 대학, 유력 신문 등의 위상은 거의 변하지 않는다. 이는 이 제도들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거나, 혹은 책임을 묻기 어려운 존재라는 뜻일 것이다.
둘째, 어떤 불가사의한 힘이 이 체계를 이념적으로 조율하는 듯 보인다. 조직적으로는 서로 상당히 분리되어 있음에도, 이 모든 권위 있는 기관들은 마치 마법처럼 서로 의견을 일치시킨다. 그들이 입장을 바꿀 때면, 모두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바꾼다. 우리는 하버드가 예일과 대립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2019년의 하버드가 1989년의 하버드와는 다른 편에 서 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이 힘은 중앙집중적이지 않지만, 중심처럼 작동한다. 이것이 집단적 지혜가 병적으로 높은 수준에 도달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셋째, 이 불가사의한 힘의 한 가지 경향은 효과적인 정치적 공식을 강화하는 데 있다. 시민사회는 어째서인지 시민사회를 더 강하게 만드는 생각들을 선호한다. 여전히 아이디어의 시장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참인 생각을 선호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선호는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만약 우리가 이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면, 민주주의로부터 사실상 보호된 분산형 시민사회가 어떻게, 실제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분산된 오웰식 전제정으로 변모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해결 문제들은 마지막 에세이로 미루도록 하자.
권력 밸브(The Power Valve)
시민 코어(civic core)는 명목상 자신을 지배하는 정치 코어(political core)로부터 어떻게 스스로를 보호하는가? 두 코어 사이에는 언제나 헌법적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 이 연결은 양측의 규칙을 모두 따라야 한다. 즉,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도 민주적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의회(Congress)다.
이 연결 고리의 구조는 핵심적이다. 그것은 헌법적 권력의 흐름을 역전시키는 밸브, 즉 실제 민주주의―유권자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부여하는 것―에 맞서는 ‘패배 장치’로 작동한다.
이론상 관료는 행정부의 일부이며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이 1885년에 이미 지적했듯이, “우리 현행 정부의 실제 형태는 단순히 의회 우위의 체계”다. 20세기의 강력한 대통령들―윌슨, 프랭클린 D. 루스벨트(FDR), 린든 B. 존슨(LBJ)―은 의회를 압박할 방법을 찾아냈지만, 그것은 언제나 젊고 성장 중이던 시민 코어와의 동맹 속에서만 가능했다.
관료, 즉 실제 정부는 입법부에 속해 있다. 그것은 의회에 보고한다. 말 그대로 의회에 보고한다. 누가 백악관 앞에서 증언하는가? 누가 실제 예산을 그곳에서 정하는가?
백악관은 워싱턴 D.C. 전역에 걸쳐 수천 개의 직위를 임명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기관이든 임명직 인사 없이도 완벽하게 작동한다. 물론 어느 기관도 이를 인정하려 들지는 않는다.
재직 중인 임명직 인사들은 실제 문제를 일으킬 수는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문제 많은 대통령에게 PR 문제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임명직 인사가 기관으로 하여금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만들 수는 없다. 반면, 의회를 위해서라면 기관은 기꺼이 몸을 비틀어가며 복종한다.
임시직에 불과하고, 자신이 ‘지휘하는’ 영구 직원들을 해고할 수도, 재조직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책임자”로 군림하기란 어렵다. 이 희극적 상황은 불문 헌법의 핵심적 안전장치다. 대통령직은 여전히 진정으로 민주적인 기관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대통령 선거에는 실제로 관심을 가진다.
의회는 그렇지 않다. 이론상으로는 임시적인 기관이지만, 실제로는 영구적인 존재다. 다시 말해, 책임지지 않는 시민 코어와 민주적인 정치 코어를 잇는 연결 고리는 책임지지 않으면서도 민주적이어야 한다. 의회는 이 조건에 완벽히 부합한다.
하원은 1938년 이후 현역 재선율이 80%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고, 상원은 1980년 이후 60% 아래로 내려간 적이 없다. 일반적인 수치는 각각 90% 이상, 80% 이상이다. 연공서열과 각종 규칙들은 이 제도적 틈새를 손쉽게 막아버린다.
그러나 이론상 유권자들은 하원 전체를 손쉽게, 상원도 비교적 쉽게 교체할 수 있다. 규칙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론적으로는 그들이 만족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럼에도 의회의 평균 지지율은 20%를 밑돈다. 이 변환이 일단 성취되고 나면, 무엇이든 가능해진다.
의회는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권력의 결절점이다. 의회는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권력을 위임한다. 입법자들은 실제로 국사(國士)가 아니다. 그들은 카토(Cato)나 키케로(Cicero)처럼 공공선을 둘러싼 비전을 토론하지 않는다. 가끔 카메라 앞에서 보좌관이 써준 연설문을 읽을 뿐이다. 그들의 진짜 일은 모금과 PR이다.
실제 업무는 보좌진이 처리하지만, 보좌진조차 법안을 직접 쓰지는 않는다. 의회의 입법 입력원은 두 가지뿐이다. 활동가와 로비스트다. 활동가는 권력을 위해 오고, 로비스트는 돈을 위해 온다.
활동가는 민주당원이고, 로비스트는 창녀다. 둘 중 어느 쪽이든, 어떤 보좌관이 필요로 하는 ‘문구’든 기꺼이 써줄 준비가 되어 있다.
의회는 워싱턴을 관리한다. 활동가 권력과 기업 권력을 관료제 자체와 조율하면서, 언론의 영감, 학계의 판단, 자선재단의 후원에 따라 움직인다. 이 실제 헌법은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워싱턴 D.C.는 사실상 행정부조차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부 제국(‘국내 정책’)은 백악관이 사라진다 해도, 혼란의 원천 하나가 없어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거의 변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외부 제국(‘국가 안보’)은 예측 불가능한 외부 행위자들에 대응해야 하므로 중앙적 대응이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의 신탁, 즉 최종 결정을 내려주는 원천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국가안보회의(NSC)는 아마존에서 매직 8볼(역주: Magic 8 Ball. 운세를 보거나 조언을 받기 위한, 거대한 당구공처럼 생긴 플라스틱 구. 예-아니요로 대답할수 있는 질문을 하고, 뒤집으면 대답이 돌아온다.) 하나를 주문해도 될 것이다. “예”, “아니오”, “답변 불명확 — 나중에 다시 질문하시오.” 이 실용적 지혜의 팔란티르가 결단의 책상에 볼트로 고정되기만 하면, ‘글로벌 리더십’의 절차는 아무런 방해 없이 계속될 수 있다.
얼마나 놀라운 마술인가! 이 민주주의적 패배 장치는 추하지 않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누군가가 설계한 것이 아니라 진화했다. 사람들은 다른 무언가를 발명했지만, 그것은 실패했고, 죽었으며, 결국 이것으로 변했다. 달팽이의 낡은 껍질이 게의 새로운 집이 된 셈이다.
민주주의는 기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패배당해야 한다는 것이 권력의 서사다. 그리고 그 진실을 감당할 수 없는 자들은, 그들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그것을 알 자격이 없다.
그럼에도 미국 국민에게 긴급한 문제들이 당장 주의를 요구한다고 고음으로 외치는 수많은 목소리들을 떠올려 보라. 그들 중 누구도, 자신들이 잘못된 선거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정치 코어
권력 밸브는 꽤 영리한 장치다. 그러나 어떤 밸브든 한계는 있다. 그것은 여론이 시민 코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차단할 수는 있지만, 여론 자체가 어느 정도 통제되고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인구 전체가 그에 맞서 돌아서면, 밸브는 그대로 파열되고 만다. 모든 체제는 여론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 ‘여론’의 주체는 누구인가? 정치 코어를 간단히 둘러보자.
오웰이 썼듯이, 모든 사회에는 세 개의 인간적 계층이 존재한다. 이를 젠트리(gentry), 평민(commoners), 클라이언트(clients)라고 부를 수 있다. 젠트리는 도시 거주자로서 세련되고 야심찬 사람들이다. 평민은 교외 거주자로서 교육을 받았고 독립적인 사람들이다. 클라이언트는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와 룸펜프롤레타리아(lumpenproletariat)로, 교육 수준이 낮거나 혹은 타인에게 의존하는 계층이다.
클라이언트와 평민을 통제하기
로마인들은 ‘분할통치’라는 원리를 옳게 이해하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갈등 구도는 평민 대(對) 젠트리+클라이언트의 대립이다. 이 두 진영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정부관을 지닌다. 평민들은 정부를 공동 소유자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서비스 조직, 즉 국가 규모의 주택소유자협회(HOA) 같은 것으로 본다. 반면 젠트리는 정부를 영적 현상, 선을 실현하는 힘이자 삶의 목적을 부여하는 원천으로 인식한다. 클라이언트는 인도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표밭’으로, 항상 젠트리를 따른다. 시민적 코어는 젠트리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이 동맹은 정치적 코어 내부에서 그 방어 전선이 된다. 혹은 시민적 동맹은 공격에 나설 수도 있다—그럴수록 더 좋다.
이 동맹이 패배하면, 정부의 실제 작동 과정은 정치 권력에 그대로 노출된다. 압력이 낮고 일시적인 한, 밸브는 이를 견딜 수 있다. 의회와 관료제는 꽤 단단하다.
이 동맹은 인구 구성 비율에 맞춰 자기 노래를 조율해야 한다. 제1세계형 비율에서는 평민이 여전히 다수다. 제3세계형 비율에서는 평민이 안전하게 소수가 된다.
소수일 때 시민적 동맹은 이 잠재적 히틀러 유권자들을 제다이식 정신 조작으로 길들이는 데 생존이 걸려 있다. 다수일 때는 그저 단결만 유지하면 된다. 교외 지역은 마음만 먹으면 히틀러에게 투표해도 된다! 사실 그건 좀 웃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이 동맹은 교외 유권자들이 선거를 믿도록 만들 정치적 공식들을 여전히 필요로 한다. 차우셰스쿠 일가가 말해줄 수 있듯이, 민주주의는 단지 선거만의 문제가 아니다. 평민들이 무장되어 있고 전투적일 경우 이는 특히 두려운 일이다. 다행히도 그들은 전자일 뿐, 후자는 아니다.
젠트리를 통제하기
젠트리를 결속시키는 일은 겉보기보다 훨씬 중요하다. 성공한 농민 반란은 드물지만, 엘리트 반란은 흔하다. 평민과 클라이언트에게 정치는 문화적이거나 부족적 문제다. 그러나 젠트리는 진정으로 철학에 의해 지배된다.
여기에 이중서사 체제의 천재성이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하나의 완결된 철학이며, 그 선택은 이분법적이지 않다. 두 이야기는 타원의 양극이 되고, 그 내부에서 모두가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버턴 버블(Overton bubble)이다.
이 타원 안의 모든 지점은 서로 다르다. 어떤 재능과 교양 수준의 정신이든, 이 버블 안에서 진리를 영원히 탐구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최초의 질문—“이 모든 것이 사실인가?”—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완전히 설득력 있으면서도 완전히 봉쇄된 이 무해한 사상의 시장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체제 안정화 장치다. 확실히 일원적 국가에는 이런 것이 없다—열차가 제시간에 도착하든 말든. 전복당하고 있는데 효율성이 얼마나 뛰어난지 불평해봐야 소용없다.
현상 유지를 비판하는 이들 대부분은, 과거의 미국에는 언론의 자유가 있었으나 최근 몇 년 사이에 탄압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완전히 공정한 언론의 자유라는 경기장이 존재한 적이 있다면, 지금 살아 있는 누구도 그 위에서 뛰어본 적은 없다. 새로워진 것은 경계선이 아니라, 그 경계를 집행해야 할 필요성이다. 이중서사 국가의 핵심 목적은, 강압이 거의 필요 없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러나…
제3의 서사 국가
어떤 제국도 영원하지 않다. 안정성 자체가 불안정성을 낳는다. 엘리트가 안정될수록, 스스로를 망칠 자유도 커진다. 역사상 어떤 엘리트도 이 유혹에 영구히 저항한 적은 없다.
엘리트의 무능이 장기간 지속되면, 오버턴 버블 내부의 모든 서사는 설득력을 잃게 된다. 환상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자 버블 바깥의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이 이야기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버블 밖의 공간은 그 안보다 훨씬 넓다. 가장 위험한 외부 서사란 (a) 완전히 사실이고, (b) 이탈한 젠트리를 겨냥하며, (c) 평민을 고양하거나 클라이언트를 폄하하는 이야기들이다. 이러한 서사 중 어느 하나라도 다음 체제의 정치적 공식이 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히틀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당황할 필요는 없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강경 억압은 여전히 사용 가능하다. 물론 이는 자유로운 사유라는 환상을 훼손한다. 하지만 효과는 매우 확실하다. 환상은 덧대어 수선할 수도 있고, 한 번 깨졌다 하더라도 다시 작동하게 만들 수 있다. 오늘날 독일인 대부분은 ‘자유에서 나쁜 생각을 뺀 상태’에 만족하고 있다.
보다 미묘하고 우아한 방식도 있다. 제3의 서사는 애초에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면 위험하지 않다. 오히려 실제로 위험한 사상들에 대한 일종의 백신으로 유용할 수도 있다. 이상적인 제3의 서사는 그냥 형편없는 이야기다. 이는 억압을 더욱 쉽게 만들어준다.
또한 버블 바깥에 존재한다고 해서 버블로부터 독립적이라는 뜻은 아니므로, 이 세 번째 이야기는 충분히 ‘형편없게’ 만들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에 음모는 없다. 우리는 단지 밈의 진화를 보고 있을 뿐이다.
제3의 서사 체제의 장기적 위험은, 두 개의 주류 서사가 하나로 합쳐지는 데 있다. 타원은 원이 되고, 4행정 엔진은 2행정 엔진이 된다. 이 체제는 2행정으로 돌아가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이든 처음은 있는 법이다.
이제 약효가 느껴지기 시작했다면
우리는 몇 가지 수수께끼를 뒤로 미뤄 두었다. 하지만 현대의 헌정 민주국가에서조차 오웰적인 사고·언어·역사의 왜곡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클리어 필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다만 완전히 틀이 짜여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체제와 매우 닮은 가상의 오웰적 체제를 하나 구성했을 뿐이며, 그것이 실제로 우리 체제와 같다는 어떠한 증거도 아직 제시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반박한다고 해서 그 기원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이슬람을 비판하면서 그 예언자를 조롱한다고 상상해 보라. C. S. 루이스가 “불버리즘(Bulverism)”이라 부른 방식은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효과가 없다. 마키아벨리적 틀은 질문의 기원을 설명할 뿐이다.
이 연재에는 앞으로 네 편의 에세이가 더 이어진다. 그중 다음 세 편은 세 가지 주요 서사—진보주의, 입헌주의, 파시즘—각각의 ‘광신도들’에게 보내는 글이다. 이 에세이들은 기소장이 아니라 개입이다. 철학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철학 자체에게 말하며, 신자라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한다.
이 글들은 어떤 전통이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 서사들은 공통의 윤리적 틀, 즉 흄(Hume)이 말한 “당위(ought)”를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객관적 분석—흄의 “사실(is)”—으로만 다룰 수 있다.
각 개입은 두 가지 성질을 입증하려 한다. 첫째, 각 철학이 스스로 주장하는 국정 운영의 처방으로서 객관적으로 비효율적이거나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점이다. 즉, 그것이 권장하는 행동의 결과가 명시적 목적과 일치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와 동시에 각 철학이 현 체제에 있어서는 하나의 정치적 공식으로서 객관적으로는 매우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이 두 명제를 모두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광신도로 남아 있기는 쉽지 않다. 세 가지 주요 정치적 공식 모두에 대한 ‘백신’을 하나의 알약에 담음으로써, 우리는 누군가의 정치적 정신 전체를 지워버릴 가능성을 얻게 된다. 마지막 에세이는, 이렇게 새하얗게 비워진 상태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다.
원문 링크: https://americanmind.org/salvo/the-clear-pill-part-1-of-5-the-four-stroke-reg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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