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F. 뵈텔, 자유, 무정부, 관료제
자유, 무정부, 관료제
2013.12.13. / 칼 F. 뵈텔(Karl F. Boetel)
이 세상에서 번영하고, 행복과 승리, 그리고 개인이든 국가이든 간에 발전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다. 즉, 그 개인이나 국가가 자신과 자신의 추구와 관련하여 우주가 실제로 요구하는 규칙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고, 그것을 충실하고도 흔들림 없이 따를 수 있다는 점이다.
— 토머스 칼라일 (Thomas Carlyle)
정부 형태를 두고는 어리석은 자들이 다투게 하라.
어떤 것이든 가장 잘 운영되는 것이 최선이다.
— 알렉산더 포프 (Alexander Pope)
민주주의와 지식인에 대한 우리의 검토(25호)에서 우리는 대중 정부가 3세기에 걸쳐 어떻게 현대의 공무원 국가, 즉 현대적 관료 국가로 전락해 갔는지를 지켜보았다. 그 과정은 로베스피에르와 연합 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에서 시작해 반 롬푀이(Van Rompuy)와 뉴딜에 이르기까지 이어졌으며(그 사이에 상당한 사망자 수를 누적시키면서), 그 철학적 토대는 점차 붕괴했다. 고귀한 야만인들이 난동을 부리고, 백지설을 산산조각 내며, ‘인류의 의회(Parliament of Man)’의 회랑을 알몸으로 울부짖으며 질주하는 등 온갖 우스꽝스러운 은유들이 난무했다. 한편 지식인 계층은 점차 오늘날의 역할로 자리를 잡았다. 즉 공공정책을 입안하고, 세계적 리더십을 행사하며, 허용 가능한 담론의 경계를 중재하는 역할이다. 이는 국가를 실제로 운영하고, 세계를 지배하며, 사람들의 사고를 통제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혼란을 만들어냈다. 바로 관료제다. 관료제란 선거로 뽑힌 대표가 아니라 국가 관료들이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탈(脫)민주주의적 ‘통치 체계’이다(Oxford Dictionaries). 왼쪽에서 두 번째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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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도 이 대목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잠깐만요!”라고 당신은 외친다. “관료제는 분명 거대한 정부를 뜻하는데, 그걸 무정부 상태, 즉 정부가 없는 상태 옆에다 놓아두다니요.”
그렇다. 나는 그렇게 했다.
“이건 완전히 미친 짓 아닌가요?”
과연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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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실제로 그렇다고 믿는다.”
권력이 많은 사람들에게 분산되어 있는 거대 정부(아마도 별다른 쓸모도 없는 일에 시간과 돈을 대량으로 낭비하고 있을 사람들)와, 실제로 일을 해낼 수 있는 효과적인 정부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가장 효과적인 정부는, 가장 효과적인 군대가 그러하듯, 가장 위계적인 구조를 갖는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오히려 규모가 가장 작다. 위원회는 적고, 의사결정은 빠르며, 결과에 대한 개인적 책임이 분명하다.
관료제는 분명 거대 정부이지만, 그 안에서는 권력(주권, 임페리움, 혹은 ‘영향력’이라고도 불리는 것)이 얇게 퍼져 있다. 이 권력은 공급량이 고정되어 있는 자원이다(그래서 ‘절대권력’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결과 정부는 무기력해진다. (“그렇다면 왜 정부는 계속 내 간식을 압수하는 거죠?” 인내하라, 회의적인 족제비여.) 반대로 정부가 약해질수록, 주권의 작은 조각들을 떼어내기는 쉬워지고, 그만큼 정부는 외형적으로 더 커진다.
요컨대, 거대 정부는 강한 정부의 반대말이다.
국가 권력이 거의 소멸할 정도로 얇게 흩어져, 우리가 식인 바이커 갱단에 맞서 각자도생해야 하는 상태에 이르면, 우리는 무정부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정부를 관료제 옆에 배치한다. 완전한 무정부 상태를 제외하면, 가장 최악의 통치 실패 형태이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이 점에 관해서는 무정부주의자들 스스로도 내가 옳다는 점을 입증하는 데 열심인 듯하다. 이른바 ‘무정부 자본주의자’라는 준(準)우파 분파, 즉 흔히 말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무정부주의 좌파
개방 국경을 지지하는 무정부 자본주의자 브라이언 캡런(Bryan Caplan)은 스스로 쓸모 있는 역할을 맡아, 스페인 내전(1936–1939) 당시 무정부주의 노동조합 연맹인 전국노동연맹(CNT)이 카탈루냐에서 공장들을 접수해 노동자들에게 넘겼던 과정을 설명한다 —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다.
실천적 경험은, 이론적 성찰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경제학의 기본 진실을 점차 드러냈다. 즉, 노동자들이 공장을 장악하면, 그 공장은 노동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운영된다는 사실이다. 노동자가 운영하는 기업은, 노동자들이 주주이기도 한 자본주의 기업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이 사실을 — 비록 희미하게나마 — 깨닫게 되었을 때, 스페인 무정부주의자들은 두 가지 선택지 앞에 놓였다. 노동자 통제의 귀결로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귀결로서 노동자 통제를 부정하든가 하는 선택이었다. 대체로 그들은 후자의 길을 택했다.
따라서 볼로텐(Bolloten)의 『스페인 내전』(1991)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무정부 생디칼리스트들은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전국적 차원의 생산 통제와 합리화를 위한 자신들만의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 통제나 국유화에 근본적으로 반대하면서도, 생산의 전 부문을 노동조합이 관리하는 방식의 중앙집중화 — 그들이 말하는 ‘사회화’ — 를 옹호했다.
이에 대해 캡런은 이렇게 지적한다. “물론 이처럼 무시무시한 권한을 가진 조직을 ‘국가’라고 부르기를 거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 목적을 실행하려면 국가가 갖는 모든 강제 장치와 권위가 필요할 것이다.” 이는 충분히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진보주의는 언제나 모순, 위선, 그리고 거짓말 위에서 번성해 왔다. 그 절정이 바로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로도 알려진 ‘정치적 올바름’과 ‘비판이론’과 ‘변증법’이다. 이들에게 논리가 통할 것이라 기대하지 말라. 보라, 공산주의자들은 여전히 “계급도 없고, 화폐도 없고, 국가도 없는 사회 질서”(위키백과)를 떠들어대고 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어째서인지 늘, (간헐적으로 살인을 자행하고, 관료적이며, 사고를 통제하는) 국가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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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무정부주의자들에게도 인정할 만한 점이 하나 있기는 하다.
이른바 “자유지상주의적 공산주의”(무정부주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CNT의 영향력이 약했던 아라곤 농촌 지역에서는, 이베리아 무정부주의 연맹(FAI)이라는 급진 분파가 노동자 통제를 건너뛰고 곧바로 중앙집중화로 뛰어들었다.
자유지상주의적 공산주의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엄격하게 고정된 규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절차는 거의 어디서나 비슷했다. 새로운 체제가 도입된 각 지역마다 CNT-FAI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는 입법권과 행정권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사법까지 관장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는 사적 거래를 폐지하고, 부유층의 토지를 집단화하는 것이었으며, 종종 빈농의 토지까지 함께 집단화했다. 농가 건물, 농기계, 가축, 운송 수단도 마찬가지였다.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이발사, 제빵사, 목수, 샌들 제작자, 의사, 치과의사, 교사, 대장장이, 재단사들 역시 집단 체계에 편입되었다. 식량과 의복, 기타 필수품의 비축분은 지역 위원회의 통제 아래 공동 창고로 집중되었고, 불에 타 쓸모없게 되지 않은 교회는 창고, 식당, 카페, 작업장, 학교, 차고, 또는 병영으로 전용되었다. 많은 공동체에서는 내부 거래를 위한 화폐가 폐지되었다.
스페인 무정부주의자들은 또한 수천 명을 살해했다. 다른 이들은 “목숨이 위태로워 도망쳤다”고 캡런은 쓴다. “그들의 토지는 거의 즉시 몰수되었다.” 혹은 LibCom.org의 터무니없는 “자유지상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이 이를 포장하듯 말하자면 이렇다.
스페인 혁명이 가장 광범위하게 전개된 곳은 농촌이었다. 무정부주의 철학은 억압받던 농민 대중의 넓은 층에 흡수되었고, 혁명의 발발은 이러한 사상을 실제로 구현할 기회를 제공했다.
다시 말해, 이 “무정부주의 철학”의 구현이란 결국 농장과 공장부터 신문사와 양조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집단화”(즉, 몰수)하고, 모든 사람의 재산을 “재분배”하는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농민들이 토지를 더 잘 활용하도록 돕겠다며 “과학적” 농업까지 도입되었다.
무엇보다도 스페인은, 조건만 맞으면 평범한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다음에 누군가 노동자들은 어리석어서 사회 운영을 맡을 수 없다고 말하거든, 스페인을 가리켜 보여주라. 문맹이 대부분이었던 노동자와 농민들이 무엇을 했는지 보여주라. 그리고 무정부주의는 가능하다고 말하라.
Infoshop.org의 무정부주의자들(“자본주의가 당신을 죽이기 전에 자본주의를 죽여라”)은 자랑스럽게 이렇게 선언한다.
혁명기 스페인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가?
그렇다.
또한 월가 점령 시위(Occupy Wall Street) 세대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무정부주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20세기 초 무정부주의의 쇠퇴(그리고 공산주의의 부상) 속에서 스페인을 “영광스러운 예외”라고 부른다. (그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본주의와 국가를 폐지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완전한 무정부 상태를 제외하면 최악의 잘못된 통치 형태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인다.)
이제 알게 되었을 것이다. “영광스러운” 무정부주의가 “올바른 조건”을 부여받아 실제로 “작동”할 때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말이다( W. H. 오든, 「스페인 1937」).
오늘은 죽음의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높이는 날,
필연적인 살인 속에서 죄책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날;
오늘은 힘을 소모하는 날,
덧없고 평평한 선전 전단과 따분한 회의에.
마지막으로, 순전히 우리의 오락을 위해 덧붙이자면, RevLeft(“혁명적 좌파의 본거지”)에 가면 신반동주의(바로 우리)에 관한 온갖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정신 나간”, “소름 끼치는”, “퇴행적” “독”, “청교도적”이며 “유사 과학적”인 “단세포 점액”이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다”는 이야기들, 거기에 “여자를 침대로 끌어들이는 점점 더 소름 끼치는 방식들”까지. 요컨대, “누굴 숙청해야 하는지는 다들 알겠지”라는 것이다.
내가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인 이유 중 하나는, 사회주의 정치 질서에서 이런 해로운 반동적 정서를 억압해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RevLeft는 스스로를 “세계 최대 규모의 좌파 포럼 커뮤니티 중 하나”라고 부르는데, 그 상징 세 가지는 피처럼 붉은 공산주의의 망치와 낫(내 기억이 맞다면 인류 역사상 가장 살인적인 이념), 그리고 무정부주의의 검은 깃발과 원 안의 A다. 이는 아마도 공산주의보다도 더 흉측하고 어리석은 유일한 대상일 것이다. 사실 RevLeft 전체를, 머리 둔한 청소년들이 내뱉는 무표정한 오리말(역주: duckspeak.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한 신어. 오리처럼 꽥꽥거리는 것을 말한다. 의미가 모호하고 매우 양면적이다. 적에게 쓰면 비난의 의미로 쓰이고, 뜻을 같이 하는 동지에게 사용하면 칭찬의 의미로 쓰인다.)의 우울한 집합체로 치부해버리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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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비들이 생산수단을 통제한다”
무정부주의 ‘우파’
“하지만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설마 아니겠지요!” 유감스럽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 역시 무정부 상태와 관료제가 서로 인접해 있음을 확인해 준다.
자유지상주의적 무정부주의는 찾기 어렵지 않다. 그중 하나의 특별한 유형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우선 2013년 『워싱턴 타임스』에 기고한 자칭 자유지상주의자 조지프 S. 디드리히(Joseph S. Diedrich)를 보자. 그의 말에 따르면, 모든 자유지상주의자는 결국 국가가 단지 “불필요한” 존재일 뿐 아니라, 그 진정한 악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먹고사는 “암성 종양”이며, “전쟁, 억압, 폭정, 불의”를 만들어내는 존재라고 믿게 된다고 한다(원문 그대로 인용).
모든 자유지상주의자 안에는, 풀려나기를 기다리는 무정부주의자가 하나씩 숨어 있다. 당신은 국가주의자이거나, 아니면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 중간은 없다.
아, 디드리히 씨, 이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국가주의자 아니면 무정부주의자, 그 사이란 없다. 화살은 반드시 오른쪽 아니면 왼쪽을 가리켜야 한다. 복고(Restoration)냐 혁명(Revolution)이냐, 통치(rule)냐 통치의 부재(no-rule)냐 — 문제는 어느 쪽이냐는 것이다. 국가입니까, 선생?
우주 그 자체는 군주제이자 위계 질서이다. […] 영원한 정의가 그 위에 군림하며, 전능한 힘에 의해 집행되는 영원한 정의가 있다. […] 높은 자리에 있는 고귀한 자와, 낮은 자리에 있는 비천한 자 — 이것이야말로 모든 시대와 모든 나라에서 통용되는, 전능한 창조주의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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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당신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무정부 상태입니까?
무정부 상태란 무엇인가? 그것은 통치의 부재라는 이름의, 숨 막히고 숨 가쁘며 치명적이고 살인적인 지배다. 탐욕과 고함치는 어리석음, 흐릿한 우둔함과 비열함을 인간사의 대부분에 성스럽게 봉헌하는 체제다. 그리고 산 사람의 육체와 불멸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대가로, 허접한 셔츠를 겨우 반 페니 몇 푼 더 싸게 얻는 것 — 그것이 전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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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나의 놀라운 친구들이여.
내가 지금껏 들어온 모든 ‘천년왕국(Millennium)’은 예외 없이, 그에 앞서 “악마를 천 년 동안 사슬로 묶어 가두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즉, 목과 발을 단단히 결박해 꼼짝 못 하게 만든 뒤, 그 다음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신들 역시 지난 30여 년 동안 점점 더 큰 열정을 가지고 어떤 ‘사전 조치들’을 취해 오기는 했다. 다만 그 방향은 정반대였던 듯하다. 어디에서든 끈과 결박을 발견하는 즉시 잘라내는 것, 무엇을 자르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가리지도 않은 채 말이다. 많은 이들에게 불쾌해진 오래된 규정과 족쇄, 제한들을 전면적으로 철폐하는 것이다. (그 제한들이 본래는 대체로 악마를 묶어 두기 위한 것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지금은 느슨해지고 무력해졌을 뿐이다.) 그러는 동안, 끈 하나가 끊어질 때마다 군중은 큰 소리로 외쳐댔다. “영광이여, 영광이여, 또 하나의 끈이 끊어졌다!” 그리고 당신들, 나의 놀라운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분명 이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종류의 천년왕국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베들럼(Bedlam, 광인 수용소)의 꿈속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들었을 그런 천년왕국 말이다.
광기에 대해 말이 나온 김에, 다시 한 번 순전히 우리의 오락을 위해, 무정부주의 ‘우파’를 지켜보자. 이들의 공언된 목표는, 강조하건대, 우리 모두에게 무정부 상태를 강요하는 것이다. 이들이 나 같은 무시무시한 국가주의자(statist)들 앞에서 어떻게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 드는지 말이다.
나는 실제로 왕과 귀족의 시대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 존재하며, 그것이 자유지상주의나 무정부 자본주의(ancap)의 용어와 개념을 자기 지적 도구상자에 넣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문제는, 이 현상을 한 번 인식하고 나니, 무정부 자본주의자들을 일반 대중으로 삼는 거의 모든 포럼과 웹사이트에서 이것이 도처에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공포스럽다!
이건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마치 연쇄살인 아동성범죄자가 지역 리틀리그 팀의 감독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같다.
그래서? 그냥 그에게 비침해성의 공리(Non-Aggression Principle)를 가르치면 되지 않겠는가, 여러분. 어쨌든, 과거에 연쇄살인과 아동 성범죄를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리틀리그 팀에 대한 폭력의 개시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니까 말이다(Libertarian News). 그리고 연쇄살인 아동성범죄자들에게 가해지는 “제한”이야말로, 그들이 저지를 수 있는 그 어떤 행위보다도 “시장과 자유에 대해 훨씬 더 큰 범죄”라는 사실도 잊지 말자(Caplan). 이게 바로 기본적인 무정부 자본주의 이론 아니겠는가, 여러분! 대체 뭐냐, 국가주의자들이냐? 세상에.
이것은 관용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비유적으로 말해, 쇠스랑과 횃불의 문제다. […]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신반동주의는 받아들여지는가? 그저 레딧의 무정부 자본주의자들과 함께 가는 또 하나의 동행자에 불과한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여기에 속할 수 없을 것 같다. 반대로 그렇지 않다면, 이 ‘신반동주의’는 명백한 위협이며, 정면으로 맞서야 할 대상이다.
솔직히 족제비들조차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는 것 같다. 이런, 우리를 당신들의 무정부 상태에 대한 “위협”으로 봐 주다니 영광이군요. 우리가 뭐, 거기에 질서를 좀 부과해 보려고 할지도 모르겠죠 — 그러면 동네 분위기는 완전히 망가질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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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비라고 했나요? 제가 바로 족제비입니다.”
이 날카로운 질문에 대한 저자의 반응은, 광기를 한층 더 덧씌우는 데 성공한다. 질문은 이렇다. “만약 무정부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고도로 종교적이고, 강하게 분리되며, 매우 전통적인 사회로 귀결된다면, 그래도 당신은 무정부 자본주의자인가요? 그 결과가 정치적 올바름과 맞지 않는다면, 자본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될까요?”
그것이 무정부 자본주의의 진정한 구현 방식이라면, 나는 즉시 빨갱이로 돌아설 것이다.
즉, 그는 자유지상주의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한에서만 ‘자유지상주의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인가? 어디 보자… 아, 그렇지. 공산주의자다. 참 쉽다.
자유지상주의자가 지닌 공산주의적 성향, 그리고 전반적인 거대 정부 성향은, 그가 “인종주의”라는 딱지에서 족제비처럼 몸을 비틀며 빠져나오려 할 때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일은 그가 정기적으로 해내야 하는 과제다. 자유시장, 계약권, 작은 정부는 — 그 이전의 ‘주(州)의 권리’가 그러했듯 — “백인 우월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요즘 유행하는 완곡어법”으로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를 “더러운 깜둥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23호).
(다른 소식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의견 일치를 보였다. 랜드 폴은 흑인을 혐오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자.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인종주의”에 반대한다. 여기서 “인종주의”란, 백인이 다른 누구보다 유리해지는 모든 통계적 격차를 포함한다. 그것이 사회적이든, 정치적이든, 생물학적이든, 혹은 그 밖의 무엇이든 말이다. (예컨대 어떤 대학을 두고 “너무 백인 중심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명백한 “반(反)인종주의”다. 반면 통계적으로 그 대학이 백인을 차별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면, 그것은 “미친 짓”이며 “다양성”에 대한 “위협”이 되므로 폭동을 일으켜야 한다. NBA를 두고 “너무 흑인 중심적이다”라고 하면 노골적인 “인종주의”가 되지만, NBA 팀이 “너무 백인 중심적이다”라고 하면 분명한 “반인종주의”가 된다. 기타 등등.) 따라서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다. 국가가 흑인을 백인으로 ‘바꿀’ 수 있을 만큼의 권력 — 그리고 단 한 치도 그 이상은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제한된 정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매트 즈볼린스키(Matt Zwolinski)의 「기본소득에 대한 자유지상주의적 논증」(2013)이다. 젊은 즈볼린스키는 UC 샌디에이고의 철학 교수이자, 대학 법·철학 연구소의 공동 소장이며, ‘피를 흘리는 심장 자유지상주의자(Bleeding Heart Libertarians)’의 창립자다. 이 기묘한 주장을 펼치기에 이보다 적합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즈볼린스키는 자유지상주의가 “재산권”이라는 이름으로, 백인들의 재산을 재분배해야 한다고 밝혀냈다. 이유는 뭐냐고? 음, 노예제–집단폭행–식민주의에 대한 가짜 역사 같은 것들이다.
자유지상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약속 가운데 하나는 사적 재산권의 거의 불가침성에 대한 신념이다. 그러나 이 신념이 곧바로 기존의 재산권 분배 역시 불가침으로 여겨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기존의 분배는 여러 면에서, 보상 없는 절도와 폭력이라는 과거의 행위들이 낳은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정말 웃지 못할 전개로, 자유지상주의는 — 어디 보자 — 대규모 재산 재분배, 인종적 집단주의, 영토회복주의, 보복주의, 전반적인 정체성 정치 등등과 완전히 양립 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논증은 직접 보지 않으면 믿기 어렵다. 우선, 정교한 궤변을 통해 백인들의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책임 소재는 본질을 흐리는 미끼일 뿐이다. 우리는 흔히 “그 일을 저지른 건 우리가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역사적 불의의 문제를 회피하려 한다. 그렇다면 자유지상주의는 어떻게 A가 B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해 C를 처벌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대답은 물론, C를 처벌하는 것은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 원리에 대한 그럴듯한 해석들에 따르면, C로부터 B에게 자원을 재분배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 만약 A가 B에게서 훔친 재산을 C에게 유증했다면, C가 완전히 무고하게 행동했다 하더라도 B는 C에 대해 명백한 권리를 가진다. 요컨대,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누릴 자격이 없는 방식으로 불의의 이익을 얻었느냐에 있다. 그러한 이익의 수령은 일종의 무과실 책임 범죄로 이해될 수 있다.
게다가 내 논증을 너무 깊이 생각하지도 말라. 그건 당신이 둔감해서 그렇다.
이른바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역사적 불의를 사고하는 데 있어 자유지상주의자들을 불필요하게 둔감하게 만들곤 한다. 우리는 종종 “행위하는 것은 개인뿐이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집단은 없고 개인만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집단은 존재하며, 중요하다. 개인은 세대를 거쳐 경제적·문화적·기타의 이점과 불이익을 전달하는 가족에 속해 있다. 개인은 인종적,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을 지니며, 이러한 정체성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의도적으로든 비의도적으로든, 개인과 제도가 그를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이 두 가지 정체성을 함께 놓고 보면, 한 세대에서 개인에게 가해진 불의가 이후 세대의 다른 개인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특정 집단에 대한 체계적 불의는, 이후 세대의 그 집단 구성원들에게 체계적인 효과를 남길 수 있다.
그러나 즈볼린스키 씨, 가족이 세대를 거쳐 유전자를 전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능·성실성·공격성과 같은 높은 유전성을 지닌 행동 특성에서의 인종적 차이가 이러한 “체계적 효과”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아, 잠깐. 잊어버렸다. 사실은 “인종주의적”이므로, 진보적 평등주의 이념과 맞지 않으면 (지어낸 “허용 가능한 담론의 경계” 바깥에서는) 금기다. 그리고 그것을 말하려 드는 사람은 누구든 파괴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대꾸하지 말라. 당신들은 모두 백인이고, 백인은 돈이 많으니까.
“과거는 복잡하니 그냥 새로 시작하자”라는 접근이 철학적으로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그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 우리 집단적 역사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난장판에서 정상에 오른 사람이라면, 그 말이 지극히 편리하게 들린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진보주의적 라디오 진행자 톰 하트만(Thom Hartmann)은 다음과 같이 썼지만, 다소 핵심을 빗나갔다.
우리는 론 폴·랜드 폴 부자(父子)가 극우 인종주의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다. 그들은 자유지상주의자이며, 자유지상주의는 인종주의라는 철권 위에 씌워진 벨벳 장갑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능한다. 5세기 동안 한 대륙을 지배해 온 뿌리 깊은 인종·경제 계급이 있다면, 그들은 이미 확고한 권력과 부의 지렛대를 갖고 있다. 그들은 세대를 거듭하며, 그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할 것이다.
[…]
그리고 이제 등장한 정치 철학이 있다. 자유지상주의다. 모든 것이 괜찮고, 모든 것이 평등하며, 정부는 꺼져야 한다고 말하는 사상이다.
그들은 백인 가정의 평균 자산, 아니 정확히 말해 백인 가정의 중위 순자산이 11만 729달러이고, 흑인 가정은 4,955달러인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한다.
하지만 하트만 씨, 백인의 평균 IQ는 100이고 흑인의 평균 IQ는 85다. 이 논쟁의 여지조차 없는 과학적 사실이 관찰되는 불평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아, 맞다. 2천만 명의 대학 공산주의자들이 “평등”을 외치며 고함치는 소리 때문에 내 말이 들리지 않겠지.
우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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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자유’라고 했나? 그렇다면 난 이미 먹어버렸어. 전혀 미안하지도 않고.”
자유지상주의식 인종 재분배는 기괴하고 웃지 못할 만큼 우스꽝스럽다 — 정말로 그렇다 — 하지만 새로운 현상조차 아니다. 머레이 로스바드(Murray Rothbard) 본인이 직접 편집한 『리버테리언 포럼』 1969년호를 보자.
예를 들어 A가 B의 말을 훔쳤다고 하자. 그다음 C가 나타나 A에게서 그 말을 가져간다. 그렇다면 C를 도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도둑에게서 물건을 훔쳤다고 해서 범죄자라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C는 미덕 있는 몰수 행위를 수행한 것이다. 그는 도둑 A가 침략 범죄로 얻은 과실을 박탈했고, 최소한 그 말을 무고한 ‘사적’ 영역으로 되돌려놓아 ‘범죄적’ 영역에서 빼냈다. C는 고귀한 일을 했으며 칭찬받아 마땅하다. 물론 그 말을 원래 피해자인 B에게 돌려주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그 말은 도둑이자 범죄자인 A의 손에 있는 것보다 C의 손에 있는 편이 훨씬 더 정의롭다.
이제 이러한 자유지상주의적 재산 이론을 국가 장치의 손에 있거나, 거기서 파생된 재산의 경우에 적용해 보자. 자유지상주의자는 국가를, ‘조세’라 불리는 절도에 기생해 살아가며 그 수익으로 살인하고 노예화하며 전반적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거대한 조직 범죄 집단으로 본다. 따라서 국가의 손에 있는 모든 재산은 도둑의 손에 있는 것이며, 가능한 한 빨리 해방되어야 한다. 그런 재산을 해방하는 사람이나 집단, 즉 국가로부터 그것을 몰수하거나 취득하는 자는 미덕 있는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며 자유의 대의에 중대한 공헌을 하는 것이다. […] 종종 탈(脫)국가화를 위한 가장 실용적인 방법은, 국가로부터 그 재산을 빼앗은 사람이나 집단에게 도덕적 소유권을 부여하는 것일 뿐이다.
“자유지상주의” 달성! 강탈, 약탈, 그리고 살인을 통해서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공산주의다.)
미국의 노예제 폐지 역시 마찬가지다. 노예들은 자유를 얻었다 —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일구었고, 따라서 홈스테드 원칙에 따라 소유할 자격이 있었던 토지와 플랜테이션은 이전 주인들의 손에 그대로 남았다. 더 나아가, 노예들이 겪은 억압에 대한 배상은 그 주인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식으로도 지불되지 않았다. 그 결과 노예제 폐지는 미완으로 남았고, 새로운 반란의 씨앗은 오늘날까지도 점점 더 증폭되어 왔다.
“주인들의 피.” 이에 대해서는 실제 노예의 증언을 보라(3호 참조).
자유도 괜찮지만, 항복 이전에 흑인들은 더 나았어. 그땐 보살핌을 받았고, 요즘처럼 싸우고 죽이는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지. 노예 시절에 흑인이 말썽을 부리거나 건방지면, 주인이 매질을 한 번 해 주면 다시 얌전히 돌아가 자기 자리에 앉아 제 분수를 알았어. 아프면 주인과 안주인이 돌봐줬고, 약이 필요하면 가게에서 사다 줬지. 돈 낼 필요도 없었어. 옷 같은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천을 짜서 만들어 그냥 줬거든. 물론 모두의 주인과 안주인이 조지 주인과 베시 부인만큼 좋지는 않았겠지만, 우리 흑인들에겐 엄마 아빠 같은 존재였어.
그러나 자유지상주의 이론이 현실 세계와 부합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실수다. “자유”, “노예제”, “역사”, “재산” — 이런 것들은 자유지상주의자에게 그저 단어일 뿐이다. 정교하지만 정지되어 있고 쓸모없는 기계로 조립되기 위한 작은 톱니와 바퀴들 말이다. 결국 자유지상주의란 인간 본성에 대한 몰이해에, 공식적 추론에 대한 거의 성도착증적이라 할 만한 집착이 결합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응용된 자폐성 사고다.
(패트리 프리드먼과 피터 틸은 자유지상주의자가 아니다. 다만 그들 스스로 아직 모를 뿐이다.)
한편 부지런한 즈볼린스키는 문명의 제1원칙 — 좋은 것을 갖고 싶다면 야만인들이 성벽을 넘어와 빼앗아 가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것(5호) — 을 “약간의 추가 현금”으로 축소시켜 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빈곤층을 돕는다고 생각할 때, 거의 보이지 않는 두 집단을 잊는다. 다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 나는 ‘피 흘리는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가장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고안된 가장 효과적인 반빈곤 정책 가운데 하나 — 즉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미국 경제로의 비교적 개방적인 이민 정책 — 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그 정당화가, 이미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의 시민들에게 약간의 추가 현금을 제공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로써 나는 앞서 언급했던, 자기파괴적인 특수 유형의 자유지상주의적 무정부주의로 돌아오게 된다. 바로 개방 국경이다. 이는 랜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폴이 아니라 아인 랜드(Ayn Rand) 말이다.
아인 랜드 연구소(AYN RAND INSTITUTE): 그녀가 어떤 질문에 분노하며 반응한 구체적 사례를 들어줄 수 있나요?
메리 앤 슈어스(MARY ANN SURES): 누군가 이민에 대한 그녀의 견해를 물었습니다. 이민이 좋은 것인지 말이죠. 그녀는 어떤 나라가 이민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에 즉각 분개했습니다. 답변 중 하나로 그녀는 이렇게 말했죠. “미국이 이민자들에게 문을 닫았다면, 오늘의 나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 그녀는 이민자들이 자신과 같을 것이라고 가정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의 길을 개척할 준비와 능력이 있고, 개인이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도움은 받아들이되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 말이죠.
오늘날에는 돈 번드릭스(Don Boudreaux)가 있다.
내가 가장 존중하는 의견을 가진 몇몇 친구들이 최근 나에게 개방 이민에 대한 지지를 재고해 보라고 도전했다. […] 그들의 우려는 이민자들이 성장하는 정치적 권력을 이용해 더 개입주의적이고 개인의 자유를 덜 존중하는 정부 정책에 표를 던질 것이라는, 보다 그럴듯한 걱정에서 나온 것이다.
[…]
이민자들의 투표 성향에 대한 우려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13년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의 두려움은 정당화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캘리포니아에 한번 방문하긴 해봤는가, 번드릭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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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여 년 동안 캘리포니아는 민주당의 확고한 텃밭이 되었다.”
이 점에서 닉 랜드(Nick Land)는 이렇게 묻는다. “미국이 ‘더 개입주의적이고 개인의 자유를 덜 존중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로 무엇이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1965년 이민·국적법 통과 이후 우리가 — 고속 가속 모드로 — 목격해 온 것과 조금이라도 닮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중앙아메리카로부터의 실제 이주가 낳은 실제 결과는, 번드릭스 씨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잠시 가정해 보자. 오늘날의 이민자들 — 최근에 도착한 이들, 그리고 더 자유화된 이민 체제 아래서 도착하게 될 이들 — 이 실제로 내 걱정 많은 친구들이 우려하듯, 미국의 경제 정책을 훨씬 더 국가 주도적인 방향으로 압도적으로 밀어붙이는 데 투표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자. 그런 변화가 매우, 매우 나쁘다는 점에 대해서는 나는 단호하고 무조건적으로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방 이민을 지지한다. 그러한 원칙을 따르는 일이 치명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근본 원칙에 대한 지지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 자신에게도,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도 말이다.
우리의 오래된 지인 브라이언 캡런(Bryan Caplan)은 이 논쟁의 한가운데에서, 문명의 제1원칙을 전형적인 자유지상주의 방식으로 전 지구적 추상 개념인 ‘행복 점수(bliss points)’의 임의적 분할로 환원한다. (이 방식의 장점은 계산에 적합하다는 점이고, 단점은 현실과 아무런 연결도 없다는 점이다.)
인구가 같은 두 나라가 있다고 가정하자. 정책의 질은 0에서 10까지이며, 10이 가장 좋다. A국에서는 행복 점수(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정책)가 2에서 6 사이에 균등 분포되어 있고, B국에서는 4에서 8 사이에 균등 분포되어 있다.
민주적 경쟁은 무엇을 산출하는가? 두 나라가 독립되어 있을 때, A국의 정책 질은 4(2~6 균등분포의 중앙값), B국의 정책 질은 6(4~8 균등분포의 중앙값)이 된다. 사람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평균 정책 수준은 50%×4 + 50%×6 = 5다.
이제 국경을 개방하고 모두가 더 부유한 나라 B로 이동한다고 가정하자. 전체 분포의 중앙값은 5가 된다. 결과는 이렇다. 이민자들은 더 나은 정책 아래 살게 되고, 원주민들은 더 나쁜 정책 아래 살게 된다. 평균값(5)은 변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랜드의 결정적 평가는 다음과 같다. 캡런은 “인류 전체의 평균적 정치적 어리석음이 아닌 다른 어떤 체제 아래서 살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중대한 인권 침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캡런은, 이민자의 인종적 다양성을 극대화하면 백인 미국의 사회적 결속이 남아 있는 누더기 같은 실마리들마저 갈가리 찢어 버릴 것이며, 그와 함께 복지국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 마치 대중의 여론(그것도 백인 대중의 여론)이 아직 무언가 의미를 갖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사람들을 돌보는 것”에 투표하는 데 기꺼이 동의한다. 그것이 바로 복지국가의 핵심이다. 따라서 덴마크나 스웨덴처럼 빈곤층과 부유층이 문화적으로 매우 유사한 사회에서는, 복지국가에 대한 지지가 전반적으로 강한 경향을 보인다.
[…]
흑인 미국인들이 복지국가를 유난히 지지한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흑인 미국인의 존재가 백인의 지지를 잠식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복지국가를 더 작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민은 토착민들의 정책 선호에 대해 훨씬 더 강한 상쇄 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라틴아메리카 출신 이민자들은 미국 내 흑인보다 훨씬 더 ‘외집단’이기 때문이다. 사회 서비스를 줄이거나, “외국인 무리”에게 국적과 무관하게 동일한 접근권을 부여해야 하는 선택지 앞에서, 토착민들은 축소 쪽으로 기울 것이다. 실제로, 복지국가에 등을 돌리게 만드는 데 이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즉 (a) 아무도 돕지 않거나, (b) 출신 국가와 무관하게 모두를 돕는 것 중 하나를 강요하는 경우 말이다.
(랜드의 코멘트: “이 논증은 너무 ‘매드 맥스’ 같아서 오히려 마음에 든다. 세상을 불태워 버리면 복지국가도 같이 사라진다. 야, 기분좋다!”)
그런데 실제로 벌어질 일은, 사회적 결속은 말 그대로 산산조각 나버리는 반면, 복지국가는 계속해서 팽창한다는 것이다. 참고로 캡런의 ‘행복 점수’ 재분배 구상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다면, 미네소타를 한 번 들여다보면 된다. 그곳은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수만 명의 소말리아 ‘난민’들의 ‘행복 점수’를 끌어모아, 주 전체를 생기 넘치는 다양성의 진정한 무지개로 축복했다 — 그리고 그와 함께 폭행, 살인, 추가 살인, 또 다른 살인, 갱단 살인, 갱단 전쟁, 테러, 추가 테러, 인종 폭력, 강간, 성노예, 그리고 더 많은 성노예로 이루어진 전염병적 사태도 함께 가져왔다. 아래에 묘사된 29건의 ‘다양한 활력’ 사례도 그 일부다. 그들은 폭력과 우둔함으로 학교 시스템도 파괴하고 있는데 (미안하다, ‘자폐와 학습장애’라고 불러야겠지), 그들을 징계하는 일은 물론 인종차별로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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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런 씨는 자신을 현대판 “노예제 폐지론자(abolitionist)”라고 여긴다. 내 생각에 그는 제임스 레드패스(James Redpath)와 잘 어울린다.
나는 인류와 인권을 믿는다. 지상에서 이보다 더 신성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권리 가운데 가장 사소해 보이거나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것 하나라도 침해하는 데 동의하느니, 차라리 인종들이 지구상에서 쓸려 나가고, 국가들이 해체되며, 왕조들이 전복되고, 법과 정부, 종교와 명성이 사람들의 발에 짓밟혀 사라지게 하라!
자유지상주의적 이민 정책에 관한 마지막 발언은 타일러 코웬(Tyler Cowen)에게 맡기겠다. (자유지상주의의 자기파괴적 성향에 관한 한 진정한 최고 전문가인 닉 랜드(Nick Land)는 이를 “역사상 가장 미친 정상성의 파편 후보”라고 정확히 부른다.)
가난한 개인 5억 명이나 10억 명을 미국에 들여놓는다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파괴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래, 매우 클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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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멍청한 새 한 마리를 죽였고, 멍청한 거위를 보게 된다면 그놈도 죽일 것이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마지막 말은 403년에 활동한 로마의 기독교 시인 아우렐리우스 프루덴티우스 클레멘스(Aurelius Prudentius Clemens)에게 맡기겠다.
신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서로 적대적인 신앙을 지닌
민족들과 나라들을
하나의 제국 아래 결합하고,
모든 인간이 하나의 조화로운 통치의 유대를
받아들이도록 하기를 원하셨다.
그로부터 7년 뒤, 서고트족은 로마를 약탈했다.
자유에 대하여
“자유(liberty)”(“자유(freedom)” 등)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뜻할 수 있다.
(1) 자유란, 점잖은 사람들이 합리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고, 원하는 것을 읽으며, 야생의 유인원 같은 존재들에게 공격당할 걱정 없이 동네를 거닐 수 있는 것;
서로 물건을 사고팔고, 계약을 맺고, 거주지를 스스로 선택하며, 식단과 생업을 정하고, 자녀를 어떻게 교육할지 스스로 판단하는 것 등이다. 이는 다음과 같다[홉스, 『리바이어던』].
— 이 모든 것은 (a) 명백히 좋은 것이며, (b) 문명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좋은 정부의 산물이다(아래 참조).
또는 (2) “정치적 자유”, 즉 민주주의를 의미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다수의 바보들에게 온갖 사안에 대해 투표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좋은 정부가 아니다.
휘그당원들(급진파, 공산주의자, “진보주의자” 등)이 가장 흔히 쓰는,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가장 설득력 있어 보였던 논법은, 이 두 정의를 눈 깜짝할 사이에 오가며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아무도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자유는 좋다. 왜냐하면, 뭐, 자유니까!” (정의 1a)
“그러므로 민주주의가 최고다. 민주주의가 자유를 가져다주었으니까!” (정의 2)
어차피 무정부 자본주의자들을 두들겨 패고 있는 김에(비침해성의 공리를 명백히 위반하면서), ‘보수주의자’ 벤 도메니크(Ben Domenech)를 보자. 무엇의 보수주의자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누가 자유지상주의자이고 누가 아닌지에 관해서는 전문가인 모양이다. 그는 자유지상주의가 “시민사회를 보호”하고, “더 평평하고 단순한 조세”를 촉진하며, “시민적 자유의 보장”과 “실질적 기회 균등”을 보장하는 등 온갖 훌륭한 장점을 지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실제로 존재했던 “자유지상주의 국가”의 유일한 사례는, 알고 보니 세습 군주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지 3세 국왕이 언제나 식민지에 와서 사람들을 괴롭히고 세금을 뜯어갔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실제 미국 반란의 역사에 대해 (전혀 하지 않는 것보다는) 조금 더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에릭 폰 퀴넬트-레딘의 『군중의 위협(Menace of the Herd)』(1943)도 참고할 만하다. 그리고 한스-헤르만 호페의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2001)은 충분히 사정권 안에 있다.
미국에서 완전한 민주주의가 시행된 지 채 100년도 되지 않아, 도덕적 퇴락의 지속적 심화, 가족 및 사회의 해체, 그리고 이혼, 사생아, 낙태, 범죄율의 지속적 상승이라는 형태의 문화적 붕괴가 나타났다. 차별금지 — “적극적 조치” — 법률과 차별 없는 — 다문화·평등주의 — 이민 정책의 목록이 계속 확장된 결과, 미국 사회의 구석구석은 강제적 통합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사회적 갈등과 인종적·민족적·도덕문화적 긴장과 적대감이 극적으로 증가했다.
[…]
정치경제학과 정치철학(윤리학)의 근본적 이론 통찰에 근거하여, 이하의 연구에서는 근대사에 관한 세 가지 핵심적 — 거의 신화적이라 할 — 믿음과 해석을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사적 재산과 소유 대 “공적” 재산과 행정, 그리고 기업 대 정부(국가)의 본질에 관한 기본적인 이론적 통찰에 따라, 첫째로 전통적인 세습 군주제에 대한 통설을 수정하고, 군주제와 군주제적 경험을 이례적으로 호의적으로 해석할 것을 제안한다. 요컨대 군주정은 이론적으로 ‘사유 재산으로서의 정부’로 재구성되며, 이는 정부 통치자로 하여금 미래지향성과 자본 가치 및 경제적 계산에 대한 관심을 증진시키는 체제로 설명된다. 둘째로, 동일한 이론적 논리에 따라, 민주주의와 민주적 경험은 이례적으로 부정적인 조명 아래 놓인다. 민주적 정부는 ‘공유 재산으로서의 정부’로 재구성되며, 이는 정부 통치자들로 하여금 현재지향성과 자본 가치에 대한 무시 또는 경시로 이어진다고 설명된다. 따라서 군주제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문명적 쇠퇴로 해석된다.
더 근본적이고 비정통적인 것은 세 번째 수정 제안이다.
군주제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인 초상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군주주의자가 아니며, 이하의 논의는 군주제의 옹호가 아니다. 군주제에 대한 나의 입장은 이렇다. 만약 최종적 의사결정(사법권)과 과세에 대한 강제적 영토 독점을 행사하는 기관으로서의 국가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면, 민주주의보다 군주제를 선택하는 것이 경제적·윤리적으로 더 유리하다. 그러나 이는 국가가 필수적인가, 즉 군주제와 민주주의 모두에 대한 대안이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를 열어 둔다. 역사 자체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거짓과 대안에 대한 “경험”이라는 것은 정의상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발전된 서구 세계에 관한 한, 근대사는 국가와 국가주의의 역사일 뿐이다.
행운을 빈다, 호페 씨. 우리가 민주주의가 군주제보다 실천적으로 객관적으로 더 나쁘다는 데 동의한다 하더라도, “발전된 서구 세계”는 이미 민주주의에 의해 상당히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러니 나는 당신이 이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주권의 “영토 독점”에 대한 대안을 정말로 찾아내길 바란다. 뭐라고 했던가? “무정부 자본주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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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족제비이고, 춤추는 걸 좋아한다.”
비슷하게, “진보(progress)”라는 말 역시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뜻할 수 있다는 점도 언급해 두는 편이 좋겠다.
(1) 기술·과학적 진보: 세상을 폭파시키지만 않는다면 명백히 좋은 것이다.
(2) 도덕·정치적 ‘진보’: 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뜻하는데, 앞선 의미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진보는 좋다. 왜냐하면, 뭐, 의학 같은 게 있으니까!” (정의 1)
“그러므로 민주주의가 최고다. 민주주의가 곧 진보였으니까!” (정의 2)
물론 ‘민권 운동’ 직후에 인간이 달에 착륙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을 달에 올려놓은 것은 로자 파크스가 아니라 나치 로켓 과학자들이었다. (아직도 요지가 충분히 분명하지 않다면 이렇다. 이른바 “진보주의자들” — 원두당(Roundhead), 청교도, 휘그당원, 패트리어트(Patriots), 급진파, 공화당원, 볼셰비키, 마르크스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민주당원, 혹은 요즘 그들이 뭐라고 불리든 간에 — 이 자기들 권력을 조금 더 늘리기 위해 서구 문명을 조직적으로 박살 내고 있는 동안, 동기 부여가 강하고 지능이 매우 높은 수많은 백인 남성들은 당신의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유용한 것들을 잔뜩 발명하고 있었다. 전기, 의학, 내연기관, 컴퓨터, 항공기, 그리고 흔히 흑인 발명가들의 공으로 귀속되는 모든 것들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의 거대한 거짓말이기도 하다. 아이작 뉴턴 경은 말할 것도 없이 비할 데 없는 과학적 천재였지만, 동시에 근본주의적 기독교 왕당파였고, 여왕 폐하의 이름으로 위조범들을 교수형·내장 적출·사분형에 처하는 것을 즐겼다. 반면 존 로크는 초기의 정치적 진보주의자였고, 그의 노골적인 연역 논리 남용은 결국 “인민”의 이름으로 자행된 거대한 집단 학살로 이어졌다. 여기에 “백지설”이나 “고귀한 야만인” 같은 철저히 반과학적인 교리들까지 더해졌다(25호). 그럼에도 나는 이 둘이 모두 같은 운동의 일부였으며, 물리학과 정부에 관한 전혀 무관한 이론들이 함께 “진보”했고, 이를 통틀어 “계몽주의”라 불러야 하며, 우리는 이를 통째로 삼켜야 한다는 척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계몽”이란 말은 좋은 뜻이니까. 그렇지 않은가? 뭐, 당연히.
LessWrong의 “합리주의자” 엘리에저 유드코프스키(Eliezer Yudkowsky)가 바로 이 동일한 오류에 빠지는 모습을, 테크크런치의 기획 공격 기사 「괴짜들을 위한 군주제: 신반동주의자의 부상」(2013)에 대한 그의 논평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신반동주의 음모의 일부가 아니다. 우리는 명시적으로, 그리고 그 이름 그대로 계몽주의를 지지해 왔다.
[…]
민주주의에는 많은 알려진 결함들이 있으며, 인간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더 나은 방식이 발견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은 귀족정이 아닐 것이다. 이는 마치 일반상대성이론 이후의 중력 이론이 뉴턴 역학일 수 없는 것과 같다. 진보의 래칫은 예측 불가능하게 돌아가지만, 뒤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이에 대해 칼라일 클럽의 순회 편집자는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유드코프스키가 이렇게 종교적인 줄 몰랐다. 그의 “진보의 래칫”, 즉 “진보”, 즉 “휘그식 역사관”은 (기독교적) 신의 섭리의 한 형태다.
아, 하지만 그는 이것을 과학™으로 치장했다. 귀족정은 뉴턴 역학과 같다는 것이다. 왜냐고? 음… 음… 우리가 통제 실험으로 민주주의가 귀족정보다 낫다는 걸 증명했기 때문이라고? 아니지, 그런 일은 일어난 적이 없다. 기술 발전(수많은 바보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수십억 가지 다른 요인이 있다.
그러니 이건 그냥 유사과학이겠지. 얼마나 비이성적인가!
(『래디쉬』 매거진의 공식 표정은, 언제나 그렇듯, 비웃음이다.)
『고등교육 연대기』(2012)에서 과학 저널리스트 존 “과학 금지” 호건(John “Ban Science” Horgan)은, “급증하는 부·건강·자유·평화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통해 학생들에게 “사회적 진보”에 대한 신앙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의 진부한 “사실들”(예: “20세기 초 이후 기대수명이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지난 200년간 평균 생활수준이 급등했다” 등)은 생략하겠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민주주의를 뜻한다. (“대표를 선출하는 것” 말이다.) 다만 이번에는 약간의 양념이 더 들어간다. “표현과 신념의 자유, 결사와 조직의 권리, 법치, 그리고 국가의 간섭 없는 개인적 자율성.” 솔직히 말해 이것들은 꽤 훌륭하게 들린다. 그래서 독자에게 제안한다. 미국이라는 나라 — 정치적 올바름과 도덕 교육, 결과의 불균형과 반인종주의, 사회정의와 도시 청소년, 끝없는 법률과 전사 경찰의 나라 — 에서 이 네 가지 구체적 자유에 대해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말이다.
평화의 신화는 아래에서 반박하겠다.
부와 건강에 관해서는, 유드코프스키의 동료 합리주의자인 로빈 핸슨(Robin Hanson)이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물론 지난 한 세기 남짓 동안 많은 지표가 개선되어 왔고, 이는 앞으로도 어느 정도 상승할 것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것이, 현대판 케네디의 정치적 프로젝트에 동참함으로써 “빈곤·질병·폭정·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학생들이 “유토피아적 환상”으로 여기는 것이 경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영역에서의 긍정적 최근 추세는 그런 정치 운동들에 의해 초래된 것이 거의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주로 산업혁명으로 우리가 부유해진 결과였으며, 정치 운동들은 오히려 평균적으로 그 과정을 억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버드의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역시 『백지설(The Blank Slate)』(2003)에서 이 함정에 빠진다. 일종의 신앙 고백이다.
여러 결함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는 지금까지 우리 비참한 종이 고안해 낸 대규모 사회 조직 형태 중 가장 나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어떤 대안보다도 더 많은 안락과 자유, 더 큰 예술적·과학적 활력, 더 길고 안전한 삶, 더 적은 질병과 오염을 제공한다. 현대 민주국가에서는 기근이 발생하지 않으며, 서로 전쟁을 벌이는 일도 거의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발이나 배로 투표하듯, 전 세계에서 이 나라들을 가장 선호한다.
참 놀랍지 않은가. 수많은 바보들에게 자신들이 선택한 바보 정치인을 뽑게 해 주는 것만으로 이렇게 많은 좋은 것들을 얻었다니 말이다. 예컨대 “자유”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야만인들에게 기습당할 걱정 없이 대도시를 걸어 다닐 자유는 아니다(아래 참조). 우리는 시민권 운동에 항복하면서, 그런 자유는 영영 포기했고, 대신 이 맛있는 정치적 자유를 얻었다.
“예술적 활력”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의 대담한 『검은 사각형』(1915)이나 잭슨 폴록의 영감 넘치는 『가을 리듬』(1950)을… 내가 오래전 어딘가에서 파낸 어떤 쓰레기 작품과 한번 비교해 보라.
https://radishmag.wordpress.com/wp-content/uploads/2013/12/3-9-modern-art.jpg
아니면 그가 영화와 텔레비전을 말한 것일까? 참으로 놀라운 기술이긴 하다.
핑커 씨, 이 문제에 대해 단 몇 초라도 생각해 본 사람으로서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안락함, 안전, 기대수명, 질병 통제, 기근 예방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콩고민주공화국 같은 오늘날의 비(非)현대적 민주국가들은 리히텐슈타인이나 싱가포르 같은 현대적 비민주국가들에 비해 눈에 띄게 열등하다. (그리고 배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의 선택도 대체로 이를 뒷받침한다.) 마치 우리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 투표가 아니라 기술적 진보인 것처럼 보인다.
핑커 씨의 목록 가운데에서, (a) 사실이라고 할 수 있고, (b) 어떤 형태로든 대중 정부에 그럴듯하게 귀속시킬 수 있는 것은 다음 하나뿐이다. 바로 “자유”다. 다시 말해, 또다시 정치적 자유다. 즉, 민주주의가 최고의 체제인 이유는, 민주주의가 무엇보다도 많은 민주주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아하지 않은가?
원문 링크: https://radishmag.wordpress.com/2013/12/13/anarcho-tyranny/#liberty-anarchy-bureau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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