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번역] 닉 랜드, 암흑계몽주의 제4b장

『암흑계몽주의(暗黑啓蒙主義, The Dark Enlightenment)』


제4b장: 불쾌한 관찰들


닉 랜드 (Nick Land), 2012년 5월 3일


"흑인 가정이나 아들 둔 부모만이 십대의 안전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틸먼과 브라운, 그리고 다른 부모들은 흑인 소년을 키우는 일은 부모 역할 중 가장 스트레스가 큰 부분이라고 말한다. 단지 피부색 때문에 사회가 그들을 두려워하고 적대적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믿기 힘들다고요? 제 입장에서 하루만 살아보세요.” 브라운이 말했다.


브라운은 14세가 된 아들이 지금이 가장 위험한 나이라고 말한다. 인종 편견에 기반하여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일 때문에 늘 아이의 안전을 걱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들을 겁주고 싶지도 않고, 사람들을 뭉뚱그려 보게 만들고 싶지도 않아요. 하지만 역사적으로 우리 흑인 남성들은 범죄의 주범으로 낙인찍혀 왔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 늘 의심을 받습니다.” 브라운이 말했다.


그와 다른 부모들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지 않는 흑인 부모는 아들을 위험에 내몰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대화를 하지 않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부모는 무책임한 겁니다.”

브라운은 말했다. “저는 이 모든 상황이 우리가 인종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공개적으로, 그리고 정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라고 봅니다.”" — 그레이시 본즈 스테이플스(Gracie Bonds Staples), 스타-텔레그램(Star-Telegram)



"도심 지역에서 온 제8조 미국 저소득층 월세 지원 제도(주택 바우처) 수혜자의 유입에 지역사회가 저항할 때, 그 반응은 대부분 행동에 대한 것이다. 피부색은 그 행동에 대한 대리적인 지표일 뿐이다. 만약 도심의 흑인들이 아시아계처럼 — 아이들의 머릿속에 가능한 한 많은 지식을 밀어 넣으려 애쓰는 방식으로 — 행동한다면, 많은 미국인들이 분명히 품고 있는 저소득층 흑인들에 대해 남아있는 경계심은 사라질 것이다. 미국인들 가운데 구제불능의 인종차별주의자가 있느냐고? 물론 있다. 그들은 모든 인종에 존재하며, 우리는 모두 그런 인종차별을 비난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인종 문제는, 예의바른 대화에서는 보통 표현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 헤더 맥 도널드(Heather Mac Donald), 시티 저널(City Journal)


"“방 안에 코끼리가 있다는 얘기부터 합시다. 전 흑인이에요, 알겠죠?”

그 여성은 인종 문제로 인한 반발을 예상한다며 익명으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여 기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근처에서 흑인 소년들이 집들을 털고 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서 조지(George Zimmerman)가 트레이번 마틴(Trayvon Martin)을 의심한 것이죠.”" — 크리스 프란체스카니(Chris Francescani), 로이터(Reuters)


“요컨대 변증법은 대립물의 통일에 관한 학설로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이 변증법의 본질을 담고 있다.” 레닌은 이렇게 적고서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는 설명과 전개가 필요하다.” 즉, 더 논의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레닌주의로 승화(Aufhebung)되는 과정은 거칠게 이해하는 편이 가장 잘 파악된다. 레닌은, 성숙한 물질적 조건이나 발전된 사회적 모순이 갖춰지기를 전제로 해왔던 기존 예상과 거의 완전히 결별하고, 광범위하게 적용 가능한 혁명적 공산주의 정치를 만들어냄으로써, 변증법적 긴장은 전면적으로 그 정치화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자연의 변증법’에 대한 모든 언급은 과학의 영역을 정치적 모형에 사후적으로 종속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도 드러냈다.) 변증법은 그것이 실재하도록 만들어지는 만큼만 실재한다.


변증법은 정치적 선동에서 출발하며, 그 실천적·적대적·분파적·연합적 ‘논리’를 넘어 확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자연적 제약에 맞서,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상부구조’이며, 사회적 지배를 위한 발판으로서 가장 넓게 파악 가능한 정치 영역을 실질적으로 점유한다. 논쟁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통치의 기회가 있다.


대성당(역주: The Cathedral. 학계·언론·문화예술계·시민단체 등 진보주의 성향의 비선출 권력기구)은 이러한 교훈들을 구현한다. 그것은 레닌주의나 공산주의적 변증법을 표방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상부구조 가운데 변증법적 재구성(명시적 적대, 양극화, 이분법적 구조화, 전도(轉倒))을 피해 간 부분은 거의 없다. 학계, 언론, 심지어 순수예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과포화가 지배해 왔으며, 가장 미세한 인식의 요소들조차 갈등적 ‘사회 비판’과 평등주의적 목적론과 동일시되었다. 공산주의는 그 보편적 귀결이다.


더 많은 변증법은 더 많은 정치화를 의미하고, 더 많은 정치화는 ‘진보’—즉 사회가 좌경화하는 것—를 뜻한다. 공적 합의의 형성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이어지며, 공적 불합의 속에도 이미 그 추진력은 배아(胚芽) 상태로 존재한다. 합의도 없고, 공개적으로 표현된 불합의도 없는 상태—다시 말해, 비변증법적(non-dialectical) 상태, 비(非)논쟁, 비정치적 다양성, 또는 정치적으로 조정되지 않은 자발적 행동 영역—에서만, 비로소 ‘경제’(그리고 더 넓게는 시민사회)라는 ‘우파적’ 피난처가 발견될 수 있다.


합의가 필요하지도 않고, 강제로 요구되지도 않을 때에는 부정적 자유(또는 ‘자유지상주의적’ 자유)가 여전히 가능하다. 그리고 변증법의 이 비-논쟁적 ‘타자’는 간단히 정식화될 수 있다(비록 자유 사회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더라도):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라.”


그러나 이 무책임하고 방임적인 명령은 정치적으로는 도저히 용인될 수 없다. 그것은 좌파적 침체, 퇴행, 혹은 탈정치화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리고 이 태도야말로 가장 먼저, 가장 강하게 공격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정반대의 극단에는 연극적 정의의 변증법적 황홀경이 놓여 있다. 여기서는 법적 절차의 논쟁 구조가 언론을 통한 공개성과 결합한다. 변증법적 열광은, 변호사·기자·지역 활동가·그리고 혁명적 상부구조의 다른 행위자들이 함께 연출하는 공개 재판 속에서 그 결정적 표현을 찾는다. 사회적 모순이 무대 위에 올려지고, 적대적 입장이 명료하게 진술되며, 해결은 제도적으로 예정된다. 이는 헤겔식 변증법을 황금시간대 TV 쇼(그리고 이제는 인터넷)처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대성당이 대중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때때로, 성급한 진보주의적 열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대성당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스스로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대성당의 행위자들이 끝없이 합리적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점점 분별력을 잃고,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무능하며, 실수를 저지르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국가가 신(神)이 될수록, 성스러운 바보(holy fool)와 같은 우매한 존재로 퇴화한다. 트레이번 마틴(Trayvon Martin) 사건을 둘러싼 미디어·정치적 쇼는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미국에서는, 다른 어떤 큰 나라와 마찬가지로, 매일 매우 많은 일이 벌어지며, 그 속에는 수없이 다양한—그리고 때로는 잘 보이지 않는—패턴들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평균적인 하루 동안 대략 3,400건의 강력범죄가 발생한다. 그 안에는 40건의 살인, 230건의 강간, 1,000건의 강도범죄, 2,100건의 폭행이 포함되며, 여기에 더해 2만5천 건의 비(非)폭력 재산범죄(주거 침입·절도)가 일어난다. 이 가운데 널리 보도되거나, 교육적·전형적·대표적 사례로 삼아 선택되는 사건은 극히 적다. 설령 언론이 ‘좋은 이야기’라는 내러티브 중심의 선별 방식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더라도, 사건의 압도적 수량 자체가 그런 선택을 강제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묻는 것은 거의 불가피하다. “왜 하필 이 사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지?”


트레이번 마틴의 죽음을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은 논쟁적이지만, 언론 보도의 동기만큼은 예외다. 그 문제에 관해서는 거의 이견이 없다. 이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가 전하려 했던 의미 — 혹은 의도된 메시지 — 는 거의 너무나도 분명했다. 백인의 인종적 편집증 때문에 미국은 흑인들에게 위험한 나라가 된다. 이것은 인종적 공포의 변증법을 반복하려는 것이었다. 즉, “너희가 느끼는 두려움 자체가 무섭다”는 메시지를 통해, 미국 사회의 상호적 악몽을 일방적인 도덕 쟁탈전을 연기하는 극장으로 바꾸어버리고, 나라의 주요 인종적 분할선 중 한쪽만 정당한 공포를 품을 수 있는 존재로 설정하는 방식이다.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악의적으로 착각에 빠진 백인 자경단원이 무고한 흑인 아이를 사살한다. 이는 흑인들이 느끼는 공포(흔히 ‘그 대화(역주: the talk. 미국 흑인 사회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반드시 해주는 생존을 위한 특별한 교육 대화를 가리키는 표현. 경찰이나 백인 사회에서 오해받지 않고 위험을 피하기 위한 행동 수칙―예컨대 경찰이 제지하면 손을 보이게 할 것, 말대꾸하지 않을 것, 후드티를 입지 않을 것 등―을 알려주는 문화적 관행을 말한다.)’로 알려진)에는 정당성을 부여하고, 백인의 공포는 살인적 정신병으로 폭로하는 구조였다.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진보주의적 의미를 지닌 서사여서, 몇 번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사실일 리 없었다.


그러나 곧 드러난 것은, 유명 인사들과 ‘지역 활동가’들의 분노 장치가 보강된 언론의 선택 편향만으로는 이야기를 예정된 각본대로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두 주인공 모두 점점 할당된 역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진보 진영이 승인한 고정관념을 조금이라도 유지하려면, 강력한 편집(서사 조정)이 필요했다. 이 조치는 특히 절실했는데, 마이애미 헤럴드(Miami Herald)의 일부 사악하고, 인종차별적이며, 편견에 찌든 독자들이 ‘트레이번 마틴’과 ‘주거침입 도구’ 사이에 서사를 망가뜨릴 정신적 연결고리를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해자인 조지 지머먼(George Zimmerman)의 경우, 그의 이름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되는 듯했다. 언론이 기대한 모습은 분명했다. 덩치 크고, 창백한 얼굴에, 나치 돌격대(storm-trooper)를 닮은 인물, 가능하다면 총기에 집착하는 기독교 극우이고, 정말 잘만 걸리면 동성애 혐오와 낙태 반대 운동 경력이 있는 민병대 성향 인물이면 완벽할 터였다. 그는 처음에 이유도 불분명하게 — 아마도 언론의 무능과 서사 기획의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 ‘백인(white)’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다가 곧 ‘히스패닉계 백인(white Hispanic)’이라는, 거의 즉석에서 창조된 것으로 보이는 새로운 분류로 재규정되었고, 그 뒤로는 현실과 조금이라도 더 맞추기 위한 점점 복잡한 민족적 설명들이 덧붙여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아프리카계 페루인 (Afro-Peruvian)혈통의 증조부가 발견되는 데까지 나아갔다.


대성당의 심장부에서는 이미 머리를 감싸쥐고 고민할 시간이 한참 지나가고 있었다. 여기 위대한 ‘백인우월주의적 미국(역주: Amerikkka / Amerikkkan. 미국 극좌 진영이 미국은 KKK와 같은 백인 우월주의·인종차별 국가라는 비판을 할 때 쓰는 용어)’의 피고인이 쇼 재판을 위해 준비되고 있었고, 대통령까지 성스러운 희생자 편에 감정적으로 가세했으며, 현장 조직망도 인종 폭동 직전까지 조율되어 있었는데, 그 핵심 메시지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심지어 지루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흑인과 흑인 간의 폭력’ 사건으로 퇴락할 위험까지 생겼던 것이다. 문제는 단지 조지 지머먼에게 흑인 조상이 있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그 기준이라면, 좌파의 ‘사회구성주의적 인종 규정’에 따르면 그도 그냥 ‘흑인’이 된다.) 그는 흑인들과 우호적으로 섞여 자랐고, 오랫동안 집에 “식구나 다름없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녀 둘이 있었으며, 흑인 파트너와 공동 사업까지 했고,

정식으로 등록된 민주당원이었으며, 심지어 일종의 ‘공동체 조직가’ 역할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마틴은 왜 죽었는가?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아이스티와 스키틀즈(Skittles)를 들고 있었다는 것 때문이었나(언론과 ‘지역 활동가’들이 승인한, “오바마 대통령의 아들이었다면 이랬을 것”이라는 버전), 혹은 절도를 할 곳을 물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나(KKK식 인종차별주의자 시각의 버전), 아니면 지머먼의 코를 부러뜨리고, 그를 넘어뜨리고, 위에 올라타서, 보도(步道)에 머리를 반복해서 내리쳤기 때문이었나(법정에서 판정될 버전)? 마틴은 인종차별의 희생자였는가, 작은 범죄들에 얽힌 문제아였는가, 아니면 미국 도시 붕괴 위기의 한 단면이었을까? 법적 절차가 시작되었을 때 한 가지 분명했던 점은 — 이 에피소드가 지닌 비루한 슬픔 말고는 —

이 사건이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지머먼이 2급 살인 혐의로 기소될 무렵, ‘승인된 교훈’이 얼마나 불안할 정도로 산산이 무너졌는지를 느끼고 싶다면, 인종 문제를 과격하게 다루는 우파의 변증법적 광란을 묘사한 HBD(역주: Human Biodiversity. 인간 생물학적 다양성. 인간 집단 간 유전적·생물학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관점을 가지며 특히 지능, 성격, 범죄율, 행동 성향 등의 통계적 차이를 부분적으로 유전적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지적 흐름을 가진 집단) 블로거 oneSTDV의 이 글(역주: oneSTDV의 해당 글 링크는 https://onestdv.blogspot.com/2012/04/american-masses-and-why-i-stand-with.html 이지만 접속이 불가능한 상태다.)을 읽어보면 충분하다.


"지머먼에게 제기된 ‘혐의들’의 성격이 충격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안우파 인사들은 지머먼에게 어떤 동정도 보낼 생각이 없으며, 이 사건을 현대 좌파의 ‘무정부-폭정(역주: anarcho-tyranny. 보수주의 사상가 새뮤얼 T. 프랜시스(Samuel T. Francis)가 만든 개념으로, 국가는 정작 해야 할 기본적 치안·질서 유지 기능에는 무능하거나 손을 놓고, 시민에게는 불필요하게 과도한 규제·감시·통제를 가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즉 “무정부 상태와 폭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기형적 상황”을 비판하는 용어이다.)’적 지배의 중대한 순간으로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들에 따르면, 스페인어를 쓰는, 민주당에 등록된 메스티소(역주: mestizo. 유럽계(대개 스페인·포르투갈) +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오) 혼혈인)인 지머먼은 자신이 초래한 일을 그대로 당하고 있을 뿐이다 — 즉 흑인 군중의 분노와, 지머먼 자신이 간접적으로 떠받친 엘리트 좌파의 공조적 압력 말이다. 그의 투표 성향, 다문화적 배경, 소수 인종 청소년 멘토링 경력 때문에, 이들은 지머먼을 미국 백인에 대한 좌파의 공격을 상징하는 인물, 즉 ‘미국의 백인적 특성’을 해체하려는 전선에서 활동하는 일종의 첨병으로 본다." (볼드체 표시는 원문 그대로)


대중적 PC(정치적 올바름) 경찰들은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거대한 쇼 재판이 서사적 혼란으로 무너져 내리자, 그들은 사실 따위는 (두 번 죽여서라도) 내던지고, 메시지에 다시 초점을 맞출 때라고 판단했다. ‘제제벨(Jezebel)’은 그러한 잔소리 섞인, 어딘가 히스테릭한 어조를 가장 잘 보여준다.


"흑인들이 여전히 억압받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냐고? 흑인들이 여전히 억압받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스스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혹은 최소한 인종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죽어라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 사실 그게 우리 모두가 약속할 수 있는 최선이지), 그렇다면 당신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조건을 모두 제거한 순수한 상황에서는 피부색 같은 요소가 누구의 성공에도 아무 영향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나? 그리고 따라서, 당신이 정말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믿는다면, 현실 세계에서 극적인 인종 간 불평등을 보게 될 때 당신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누군가를 가로막는 외부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뿐이다. 예컨대… 인종주의. 맞나? 그러니 축하한다! 당신은 인종주의의 존재를 믿는 거다! 만약 당신이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고 믿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당신이 빌어먹을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방식으로,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진짜로 믿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 즉 문명적 상호작용을 위해 형식적 평등한 대우가 필요하다는 정도를 넘어, 현실에서 드러나는 성과의 실질적 불평등은 모두 억압의 명백하고도 일의적인 증거라고 믿는다는 뜻인가? 그게 정말 “당신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이라는 말인가?


적어도 제제벨(Jezebel)은 진보적 신념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 신념은 어떤 증거에 대한 감수성도, 어떤 불확실성도 전혀 스며들지 않은 채, 관련 연구가 실제로 존재하든 혹은 존재할 수 있기만 하든 그 모든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업신여기고,

자신의 도덕적 무적성에 절대적인 확신을 품고 있다. 만약 사실이 도덕적으로 틀렸다면, 그 사실이 더 나쁜 것일 뿐이다 — 그것이 곧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다. 설령 그 태도가 희망적 사고, 의도적 무지, 모욕적으로 유치한 거짓말이 뒤섞인 것이라 해도 말이다.


실질적 인간 평등에 대한 믿음을 미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미신에 대한 모욕이다. 레프리콘을 믿는 것이 근거 없을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루 깨어 있는 모든 시간 동안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인간의 불평등, 그리고 그것의 풍부한 다양성은 항상 눈앞에 펼쳐져 있다. 사람들은 성별, 민족, 신체적 매력, 체격과 형태, 근력, 건강, 민첩성, 매력, 유머, 재치, 근면성, 사교성 등 수없이 많은 특성·능력·성향에서 서로 다르며, 이 중 일부는 즉각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나고, 일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드러난다. 이 모든 것 중 극히 일부분만이라도 받아들이고, 그 유일한 가능한 결론로서 그 차이가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혹은 단지 ‘사회적 구성물’이자 억압의 지표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영지주의적 광기(Gnostic delirium)이다. 즉, 모든 증거를 넘어, 겉모습 뒤에 참되고 선한 세계가 감춰져 있다는 신념에 대한 집착이다.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 그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성장하지 않으며, 그들의 목표와 성취도 평등하지 않으며, 어떤 것으로도 그들을 평등하게 만들 수 없다. 실질적 평등은 현실과 아무 관계가 없다. 있다면 그것은 현실의 체계적 부정으로서뿐이다. 실용적 평등주의 프로그램에 가깝게 접근하려면 집단학살 규모의 폭력이 필요하며, 그보다 덜 과격한 평등화 시도가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틀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다 — 물론 어떤 이들은 유난히 기민하게 빠져나간다.


가장 분명한 예시 하나만 들어도 충분하다. 아이를 둘 이상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일란성 쌍둥이나 클론 정도는 예외로 둘 수 있겠지만). 사실, 모든 사람은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서로 다르게 태어난다. 그 차이가 실제 삶의 결과에 어떤 영향을 줄지—대부분의 경우처럼—확신 있게 예측하기 어렵다 해도, 그 차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최소한 성실하게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 성실함이나 최소한의 인지적 일관성 따위는 전혀 논점이 아니다. 제제벨의 입장은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로 보면 흠잡을 데 없을지 모르지만, 사실적으로는 의심스러울 뿐 아니라, 희극적으로 우스꽝스럽고, 엄밀히 말해 ‘광기’에 가깝다. 그 입장은 현실에 대한 부정을 극단적 교리로 만들고 있으며,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진심으로 유지할 수도, 심지어 상상할 수도 없고, 더더욱 그럴듯하게 설명하거나 변호할 수도 없다. 그것은 이해될 수 있는 신념이 아니라, 그저 선언되거나, 강요되거나, 법으로 만든 광기 혹은 권위주의적 종교처럼 복종을 요구하는 신념일 뿐이다.


이 종교의 정치적 계율은 아주 분명하다. “불평등이라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진보주의적 사회 정책을 받아들여라.” 이 계율은 일종의 ‘정언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어서, 어떠한 사실도 이를 약화시키거나, 복잡하게 만들거나, 수정할 수 없다. 만약 진보주의적 사회 정책이 실제로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해도, 그 책임은 ‘타락한’ 현실에 있다. 그것은 사회적 병폐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뜻이며, 따라서 같은 방향으로 더 강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된다. 신앙의 문제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 결국 체계적 사회 붕괴만이, 지속적 실패와 점진적 악화가 결코 전해줄 수 없던 교훈을 가르쳐 준다. (이것이 바로 초간단 버전의 거시적 사회 다윈주의이며, 문명이 종말을 맞는 방식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에서 사회적 성과의 큰 차이와 매우 강하게 상관하는 특성 때문에, 인간 생물학적 다양성(HBD) 가운데 가장 골칫거리인 것은 지능 또는 일반적인 문제 해결 능력이며, 이는 스피어만의 g 요인(역주: 영국 심리학자 찰스 스피어만(Charles Spearman)이 제안한 개념으로, 모든 인지 과제에서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일반 지능을 뜻한다. IQ 검사는 여러 하위 능력을 측정하지만, 최종 점수는 대부분 이 g 요인(g factor)과 높은 상관을 갖는다. 현대 지능 연구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핵심 개념이다.)을 측정하는 IQ로 수량화된다. 그런데 ‘통계적 상식’이나 프로파일링을 인간 생물학적 다양성의 옹호자들에게 적용하면 또 다른 중요한 특성이 즉각 드러난다. 바로 놀라울 정도로 일관된 비사회성이다. 사실 이 저주받은 ‘공동체’ 내부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지는 사실은, 인간 생물학적 변이를 스스로 공부할 만큼 고집스럽고 까다로운 사람들이 대체로 상당히 ‘사회성이 뒤떨어져’있다는 점이다. 즉 언어적 억제력 부족, 공감 능력 부족, 사회적 통합의 결여 등으로 인해 집단의 기대에 만성적으로 적응하지 못한다. 이들의 전형적인 EQ는 IQ의 제곱근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집단에는 경미한 자폐 성향이 흔하며, 덕분에 다른 사람들을 냉정하고 자연과학적인 호기심으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이지만, 그 성향이 너무 심해져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될 정도는 아니다. 이러한 특성들은 — 그들 스스로 풍부한 기술적 문헌을 근거로 상당히 유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 눈에 띄는 사회적 결과를 낳는다. 즉 고용 기회의 축소, 소득 감소, 심지어 번식 가능성의 감소 같은 결과들이다. 진보주의적 환경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풍부한 치료적 조언에도 불구하고, 이 주류 사회의 금기를 깨는 데에서 오는 불쾌함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강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제벨이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듯, 이런 현상은 구조적 억압의 신호일 수밖에 없다. 왜 주류 사회의 금기를 깨는 사람들에게는 기회가 돌아가지 않는 걸까?


역사는 이를 명백히 보여준다. ‘주류사회의 담론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주류사회의 금기를 깨는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왔다. 그들과 결혼하거나 사업하려 하지 않았고, 각종 모임과 정치적 자리에서 배제했으며, 비하적 낙인을 붙이고 따돌리거나 회피했다. ‘주류 사회의 담론에의 반항’은 극도로 부정적인 용어로 낙인찍히고 고정 관념화되어,

많은 불쾌한 이들이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문제를 겪고있는 사람’, 혹은 ‘사회적 능력이 다르게 발달한 사람’ 같은 좀 더 부드러운 표현으로 부르려 들기도 했다. 사람들은 때때로 그저 상대가 극도로 불쾌하다는 이유만으로 언어적, 심지어는 신체적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주류 담론에 맞서는 이들이 서로 마음을 맞추지 못한 탓에, 자신들이 겪는 구조적 억압에 함께 대응할 수도 없었고, 또 그들과 비슷한 처지일 수 있는 자연스러운 동맹— 이를테면 냉소주의자들, 허구를 파헤치는 사람들, 주류에 늘 반기를 드는 이들, 혹은 투렛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과 손을 잡을 기회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주류 담론에 대한 도전은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이 그 ‘해방’에 일정한 도움을 줄 가능성은 커 보인다…


존 더비셔(John Derbyshire)의 악명 높은 에세이 「그 대화: 비(非)흑인 버전(The Talk: Nonblack Version)」을 떠올려 보라. 우선 그 글이 보여주는 지칠 줄 모르는 ‘비사회성)’에 주목하고, 사회성과 객관적 이성(reason) 사이의 부적 상관관계에 유의해보라. 더비셔가 다른 곳에서 지적하듯,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을 집단 정체성과 분리해서 보지 못하며, 집단에 대한 통계적 일반화를 개별 사례—심지어 자기 자신—에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다. 이성적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지만 사회적으로는 피할 수 없는, 즉 집단 정체성을 실체화하는 경향은 심리적으로 지극히 정상적이며—어쩌면 ‘인간적’이기도 하다. 그 결과, 구체적 정보가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호하고 특정하지 않은 통계 정보가 자기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잘못 수용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사회성이 뒤떨어지고, EQ가 낮고, 순수 이성 중심의 분석 관점에서 보면, 이런 사고는 단순히 잘못된 것이다. 어떤 개인이 특정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평균적으로 어떤 특성을 가진 집단에 속해 있느냐는 사실은 그 개인에게 아무런 관련성도 없다. 개인에 대한 직접적이고 확정적인 정보는 그 개인이 속한 집단들에 대한 간접적이고 확정적이지 않은(확률적) 정보에 의해 전혀 보강되지 않는다. 예컨대, 어떤 사람의 검사 결과를 알고 있다면, 그가 속한 집단의 평균치나 그에 기반한 통계적 추정은 그 개인에 대해 추가적인 통찰을 전혀 제공하지 못한다. 아슈케나지 유대인(Ashkenazi Jewish)임에도 멍청하다면, 그는 아슈케나지 유대인이기 때문에 덜 멍청한 것이 아니다. 노년의 중국계 수녀들은 보통 살인자가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만약 살인을 저지른 어떤 사람이 우연히 노년의 중국계 수녀라 해도, 그녀는 그렇지 않은 살인자보다 더 살인자답지도, 덜 살인자답지도 않다. 이 모든 것은 — 적어도 주류 사회가 기피하는 ‘문제적 인물들’에게는 지극히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전혀 자명하지 않다. 부분적으로는 이성적 지능 자체가 인간에게 드문 비정상적 특성이기 때문이며, 또 부분적으로는 사회적 ‘지능’이라는 것이 곧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맞추는 능력, 즉 비이성적 집단 감정, 제한된 정보, 편견, 고정관념, 자기 주변에서 본 몇 가지 사례만으로 세상을 설명하려 드는 습관에 따라 작동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성적 사고를 하기 귀찮아해서 지름길을 택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반화를 들었을 때 방어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오히려 합리적이다. 그 일반화가 실체화되거나 구체적 인식을 무시하거나 대체해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누구든 자신이 특정 집단의 정체성으로 미리 규정될 것을 예상하면, 그 집단과 그것이 어떻게 인지되는지에 대해 더 강한 심리적 이해관계를 갖게 된다. 따라서 어떤 일반적 평가가 아무리 객관적 절차를 거쳐 내려졌다 해도, 보통 상황에서는—심지어 아주 약한 연관성만 있어도— 그 평가는 즉각적으로 개인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사회적 공감 따위 없는 차가운 이성’은 “평균값이라는 것은 애초에 당신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다”라고 완강하게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 메시지가 대체로 받아들여질 일은 없다. 인간의 사회적 ‘지능’은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겉보기에는 교양 있어 보이는 논객들조차 기초적인 통계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가장 충격적인 오류를 반복해서 드러내곤 한다. 그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끄러움은 애초에 그런 용도로 설계된 감정이 아니며, 오히려 거의 정반대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과학적·확률적 의미에서 고정관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성의 기능적 전제 조건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서 우둔함의 유일한 대안은 곧 사회적으로 기피되는 ‘주류 담론에 맞서는 것에서 기인한 불쾌함’이기 때문이다.


더비셔의 글이 주목할 만한 이유는, 그 글이 누가 보아도 ‘사회적으로 기피될 만큼’ 반사회적이라는 점을 명확히 드러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반박문들이 횡설수설에 가까운 혼란을 보였음에도, 그렇게 평가받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흑인 가정의 그 대화(The Talk)’와 이에 대한 ‘존 더비셔의 흑인이 아닌 이들을 위한 그 대화 (Counter-Talk)’가 공유하는 특징 중 하나는 은밀한 사적 대화를 가장하면서도, 사실은 사람들이 듣도록 꾸며진 연극적 구조이다. 두 경우 모두, 부모가 아이에게 어쩔 수 없이 들려줘야 한다고 설정된 메시지를 더 넓은 사회적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그 교훈은, 아이들에게 위험한 세계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 행동을 통해서든, 행동하지 않음으로써든 — 누구인지 겨냥하고 있다.


이 형식 자체가 본질적으로 조작하기 쉽기 때문에, ‘원본’인 흑인 가정에서의 그 대화(The Talk)조차도 패러디하기 쉬운 표적이 된다. 그러나 원본에서는, 고의적으로 순진함(또는 무지)을 연기함으로써 괴로움과 진정성이 섞인 어조를 만들어낸다. “아들아, 이건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말이야…” (“왜, 도대체 왜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하는 걸까?”) 반면 존 더비셔의 그 대화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진다. 그 작은 가족 드라마에 ‘인류학의 체계적 조사’라는 임상적으로 반사회적 담론이 결합된다. 여기서 인구집단은 더 이상 법적·정치적 소통 주체가 아니라, 측정 가능한 특성을 지닌 생물학적·지리적 집단처럼 다뤄진다. 이 담론은 ‘순진함’을 조롱하고, 그에 따라 사회성이라는 기준 자체를 비웃는다. 합의도, 상냥함도 아무 의미가 없다. 정밀하게, 때로는 과도하게 집적된 통계는 그저 말해야 할 것을 말할 뿐이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문제가 있는 쪽은 우리일 뿐이다.


그러나 더비셔의 글은, 상당히 호의적으로 읽든 혹은 더비셔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독자가, 그의 글에서 비판할 거리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읽든, 비판의 여지를 분명히 제공한다. 예를 들어, 글의 첫머리부터 눈에 띄는 점이 있다. “비(非)흑인 미국인(nonblack Americans)”의 인종적 대응어는 원래 ‘흑인 미국인(black Americans)’이어야 한다. 그러나 더비셔는 이 표현 대신 “미국의 흑인들(American blacks)”이라는 명사-형용사의 역순 배열을 선택한다. 이 어순 바꾸기는 금세 일관된 패턴으로 굳어진다. 그렇다면 더비셔가 “흑인 개인들(black individuals)”이 아니라 “단일 흑인(individual black)”에게 예의를 갖추라고 말한 점은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분명히 그렇다. 누군가를 “흑인(black)”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어떤 속성을 말하는 것이지만, 누군가를 “(한 명의 흑인(a black)”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을 어떤 집단적 정체성으로 규정하는 것, 즉 그가 ‘누구인가’를 말하는 방식이다. 그 효과는 미묘하지만 분명하게 위협적이며, 논리적 사고가 뛰어난 더비셔가 이를 모르고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같은 방식으로 “존 더비셔는 ‘한 명의 백인’이다(John Derbyshire is a white)”라고 말해보면 똑같이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고, 불편하게 들린다. 즉, 이런 표현은 개인을 특정 집단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해버려서 그저 그 부류를 대표하는 예시 정도로 취급해 버린다는 뜻이다.


이번 사안에서 불필요한 무례함으로까지 뻗어나간 과잉된 주장의 좀 더 지적으로 본질적인 측면은 윌리엄 살리턴(William Saletan)노아 밀먼(Noah Millman)에 의해 검토된 바 있다. 두 사람은 자유주의·보수주의라는 서로 다른 진영에 서 있음에도, 거의 비슷한 지적을 하고 있다. 두 논평가 모두 더비셔의 글에서 거시적 통계 일반화를 미시적 사회 상황에 적용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균열, 혹은 방법론적 부조화를 지적한다. 아무리 철저하게 검증된 고정관념이라 해도, 구체적 사회적 상황에서는 특정한 개인에 대한 직접적 지식보다 항상 열등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은 결코 ‘집단 전체’를 직접 겪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적 위치에 놓인 자유주의자로서, 살리턴(Saletan)은 더비셔의 “속이 뒤틀릴 정도로 역겨운 결론들”에 마치 큰 비극이라도 겪은 듯 과장되게 몸서리치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가 물러서는 이유가 그 감정적으로 위장한 반응에 모두 잠식된 것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통계적 진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건 특정 개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때 차선으로 기대어볼 수 있는 확률적 추정치일 뿐이다. 즉, ‘무지한 사람이 진짜 지식을 대신해 쓰는 허약한 대체물’이다.” 더비셔는, 흑인 필즈상 수상자가 없다는 점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 스타일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어서, 살리턴의 표현을 빌리면 “사회적 지능 대신 통계적 지능을 쓰는 수학에 빠진 괴짜”이며, “눈앞에 있는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보는 수고를 들이기보다 집단 평균 계산으로 대체하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밀먼(Millman)은, (반사회적 성향의) 사회과학적 지식이 결국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말아야 할 것’으로 뒤바꾸는 아이러니한 주객전도를 강조한다.


“‘인종 현실주의자들(race realist)’은 자신들이야말로 세상에 대해 호기심이 많고, ‘정치적 올바름’ 유형은 추한 현실을 외면한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더비셔가 자기 자녀에게 주는 조언은, 다칠 우려가 있으니 주변 세계에 너무 호기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 그것은 아이들에게는 형편없는 조언이며, 더비셔 자신의 삶에서도 결코 따르지 않았던 조언이다.”


밀먼의 결론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면 왜 내가 더비셔를 상대로 굳이 논쟁을 벌이는가? 음, 우선 그는 내 친구다. 그리고 게으르고 사회적으로 무책임한 발언이라도 단순히 규탄하는 데 그칠 게 아니라 반박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비셔의 글이 인종차별적이냐고? 물론 그렇다. 그의 요지는, 자기 아이들이 흑인을 백인과 명백히 다르게 대하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 이성적이며 도덕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종차별적’이라는 말은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기술적(descriptive) 용어다. ‘인종 현실주의자’ 진영의 사람들은 더비셔의 주요 전제가 사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그런 믿음이 ‘인종차별적’이라고 비난받는다고 해서 그들이 설득될 일은 없다 — 그리고 솔직히 말해, 그게 설득의 방식이 되어서도 안 된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더비셔의 결론이 그의 전제로부터 자동적으로 도출되지 않으며, 논의를 위해 전제를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도덕적으로 잘못된 결론임을 논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잠시 휴재…]


원문 링크: https://web.archive.org/web/20120514163626/http://thatsmags.com/shanghai/article/2159/the-dark-enlightenment-part-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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