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드버그, 신관방주의와 대중지배체제의 에스컬레이터
신관방주의(Neocameralism)와 대중지배체제(massarchy)의 에스컬레이터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 Curtis Yarvin) · 2007년 12월 20일
새로운 형태의 정부가 현재 시행되고 있는 형태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역사상 존재했던 어떤 정부 형태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은 그보다도 훨씬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가 단지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예 해결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정부 형태의 혁신은 가능하다. 역사 속의 정부가 언제나 피지배자들에게 “정부는 혁신될 수 있다”는 믿음을 장려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왜 거의 아무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는지를 꽤 직접적으로 설명해준다. 물론 이 사실이 그 명제를 참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참일 수 있는 방식을 하나 암시하긴 한다.
분명히, 정부의 혁신이라는 생각 자체가 두려움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다면, 정부에 대해 생각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이는 보수주의가 정신장애 수준에 이른 경우라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태도와 맞서 논쟁할 수 없고, 그럴 의지도 없다. 스스로의 신념과 편견 바깥에서 사고할 수 없다면, 정상적이고 문명화된 담론을 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오늘 글은, 다소 귀티 나는 신조어 제목에도 불구하고, 내 블로그에서 늘 다루는 우리의 단골 주제—민주주의—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대해서만큼은 보수주의자다. 민주주의를 좋아하고, 그것을 보존하고 싶어 하며, 신성하고 고결하고 선한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물론, 아마 실제로 그렇기도 할 것이다. 결국 처칠(Churchill)조차—역사적으로 결코 전형적인 민주주의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음에도—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민주주의는 가능한 모든 정부 형태 중에서 최악이다. 다만 다른 모든 정부 형태보다는 낫다.”
물론 처칠은 매일 스카치 위스키를 1/5병씩 들이켰다. 어쩌면 그는 취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틀렸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틀렸으면서 동시에 거짓말도 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너무 거짓말을 하고, 너무 틀리고, 너무 취해 있었기에 오히려 옳은 말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아르메니아인이었을지도. 어쩌면…
지미 클리프(Jimmy Cliff)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The Harder They Come)’에서 말했듯, 이런 문제를 누가 알겠는가? 그렇다면 왜 우리가 몇 분 정도 시간을 들여 이 문제를 실제로 생각해보지 않겠는가? (나는 처칠만큼이나 신뢰하지 않는 구글 애널리틱스에 따르면, 내 블로그의 페이지당 평균 체류 시간은 4분이다. 이는 평균 독자가 나보다 빠르게 읽거나, 아니면 많은 이들이 ‘흠’ 하고는 훑어보고 넘어가거나, 혹은 둘 다라는 뜻이다.)
놀랍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정부 형태 Y가 현재의 X보다 우월함을 보이는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다. 먼저 Y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그림을 제시한 뒤, Y가 X로 타락해 내려가는 ‘극악한 에스컬레이터(escalator)’를 제시하면 된다. ‘극악한 에스컬레이터’란,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의 연쇄를 의미하는데, 각각의 사건은 어떤 방식으로든 악질적—광기 어린, 사기적인, 저능한, 야만적인, 약탈적, 정신병적, 혹은 그 밖의 불쾌한—특성을 지니며, 이를 통해 한 체제가 다른 체제로 변한다. 여러 개의 악이 모인다고 선이 될 수는 없으므로, X는 Y보다 더 극악무도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Y는 X보다 우월하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큰 범주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인간의 모든 사안에서 온갖 불쾌한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나치즘이나 공산주의가 악질적이었다는 데조차 동의하지 못한다면, 비가 올 때마다 뇌에 물이 차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을 열어둔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내 블로그의 독자들은 무비판적인 사람들로 보이지 않는다.
또한 위 절차는 나로서는 다소 지나치게 직설적이다. 정치적 뜨거운 감자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논증을 더 모듈화하기 위해서, 나는 보통 Y가 Z로 타락할 수 있고, Z가 X와 동등하다는 방식을 선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일련의 불쾌한 단계를 거쳐 신관방주의가 대중지배체제(massarchy)라 불리는 체제로 타락할 수 있음을 보이는 것으로 시작하겠다. 대중지배체제는 물론 여기서 말하는 Z에 해당한다. 그러나 우리의 흥미를 망치지 않기 위해 지금 이 단계에서 그에 대해 더 논하지는 않겠다.
극악한 에스컬레이터를 이루는 각 단계는 필연적일 필요도 없고, 심지어 그럴듯할 필요조차 없다. 필요한 것은 그 단계들이 바람직하지 않은, 즉 극악스러워야 한다는 점뿐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전제한 공리적 가정은 단 하나이다. “불쾌함은 전체순서를 따른다”—즉 B가 A보다 더 불쾌하고, C가 B보다 더 불쾌하다면, C는 A보다도 더 불쾌하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쾌함의 정의 자체가 다르다—좋게 말해도 그렇다. 그런 경우 당신의 불쾌함을 챙겨, 다른 곳을 클릭해주시기 바란다.
예컨대, 극악스러운 단계가 물리적으로 절대 불가능하더라도 우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는 사고실험에 외계인을 등장시키면 그만이다. 그들이 큰 은빛 원반을 타고 날아와 온갖 것들을 마구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으면 된다.
이제 나의 이상적 세계에서 출발해보자—수천, 가능하다면 수만 개의 신관방주의적 도시국가와 소규모 국가들, 즉 신관방주의 국가(neostate)들로 구성된 세계다. 이 신관방주의 국가들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조직은 영리 주권 기업(sovcorp)이다. 잠시 동안은 하나의 주권 기업이 하나의 신관방주의 국가에 일대일로 대응한다고 가정하자.
신관방주의의 주요 행위자들을 정확히 규정하기 위해, 주권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 기업의 대리인(agent), 그것을 집합적으로 소유하는 개인 혹은 조직들을 구독자(subscriber), 그 신관방주의 국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거주자(resident)라고 부르겠다. 주권 기업이 후원하는 2차적 기업들은 하청 기업(subcorp), 허가를 받고 운영되는 비영리 조직들은 하청 조직(suborg), 불법적으로 운영되는 조직들은 불법 조직(illorg)이라 부른다.
거주자는 두 계층으로 나누어진다. 후견인(patron)과 피후견인(dependent)이다. 피후견인은 법적 책임 능력이 없으며, 후견인의 권위 아래에 놓인다. 후견인 없는 피후견인은 존재하지 않지만, 하청 기업이나 하청 조직이 후견인의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 신관방주의 국가 자체는 자선조직이 아니지만, 진정으로 비정치적 성격의 자선행위를 굳이 금지할 이유도 없다.
일반적으로 후견인은 피후견인을 대신해 행동하기 때문에, 정치적 관점에서 피후견인 자체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주권기업(sovcorp) S를 기준으로, 정치적 의미에서 관련성이 있는 모든 개인(person) P는 ‘구독자, 대리인, 후견인’이라는 세 가지 속성을 지닌다.
예를 들어, 후견인과 구독자의 과도한 중첩은 대체로 바람직하지 않다. 한 주권기업의 후견인과 구독자가 동일한 집단일 경우, 이해충돌이 본질적으로 발생한다. 대부분 혹은 전부의 구독자에게 해가 되는 행동이, 어떤 후견인에게는 이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 가고 싶은가? 원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나중에 살펴볼지도 모른다.)
지구상의 모든 토지는 1차적 소유자를 가지는데, 그 소유자가 바로 해당 지역의 주권기업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소유자는 크고 비인격적인 기업들이다. 우리가 이들을 주권기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주권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핵심 자산에 대한 어떤 가능한 공격도, 다른 주권적 행위자가 감행할 경우 손해가 되도록 만들 수 있는 권능을 지닌다면 당신은 주권적이다. 다시 말해, 일반적 억지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주권이란 정의상 수평적 관계이다. 위계적 주권이라는 개념은 용어 자체가 모순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서 설명하겠다.)
주권기업의 사업은 폭력을 억지함으로써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다. 인간의 폭력성은 중대한 문제이며, 이를 방지하는 일은 당연히 좋은 사업이 된다. 더구나 주변에 적자가 나는 정부가 존재한다면 이는 심각한 우려의 대상이다. 적자가 나는 정부는 비정상적 의사결정 구조를 가지는 경향이 있으며, 괴상하고 위험한 행동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핵 억지력—상호확증파괴(MAD)—은 억지(deterrence) 설계 가운데 극히 작은 일부일 뿐이다. 억지(deterrence)란 상대가 어떤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예측 가능하게 손해가 되도록 만드는 것을 뜻한다. 예측 가능하게 손해가 되는 폭력은 비합리적이다. 비합리적 폭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훨씬 드물다. 오늘날 세계에서 일어나는 폭력 대부분은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반 억지력이라는 주제는 매우 복잡하며 별도의 글이 필요할 정도다. 지금은 단지, 지구상의 모든 땅이 어떤 주권 기업의 공식 소유이며, 국경에 대한 이견이 없고, 주권 기업 사이의 억지력이 절대적이라고 가정하자.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정적인 주권 기업을 구성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통치의 핵심 난제는 오래된 라틴어 수수께끼, 즉 “누가 감시자를 감시하는가?(Quis custodiet ipsos custodes?)”이다. 주식회사 모델이라는 설계는 이 핵심 문제를 해결한다. 감시자의 권한을, 각 개인이 아니라 수익 배분 비율에 따라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소유자 집단의 집합적 판단에 맡기는 방식이다.
주식회사 모델은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다. ‘입증되었다’는 표현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가장 확실하게 입증된 제도다. 그 수익 창출 능력, 낭비와 부패를 제거하는 능력을 의심한다면 차라리 국제 유대인 음모론을 믿는 편이 낫다. (그러니까, 세상 누구나 국제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지만, 국가사회주의자(National Socialist)가 되는 편이 훨씬 멋지지 않은가? 혹시 UN을 신봉한다는 이유로 고등학교에서 쫓겨난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러나 주권적 맥락에서는, 주식회사식 소유 구조와 의사결정 구조가 일반적인 하청(부차적) 기업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다.
일반적인 부차적 기업(secondary corporation)에서는 소유자의 통제권이 도전받지 않으며, 도전될 수도 없다. 적어도 주권자의 기업법 규제가 제대로 작동하는 한 그렇다. 이 기업은 주권적 보호자, 즉 후원자(sponsor)의 감독 아래 설립된다. 이것이 그것을 부차적 기업으로 만드는 조건이다.
부차적 기업의 후원자는 소유자와 이사회(Board of Directors), 이사회와 경영진 사이의 관계를 관리한다. 이상적인 후원자는 이 관계에서 어떤 부정행위도 용인하지 않으며, 기업을 어떻게 운영해야 한다는 자기 멋대로의 기괴한 발상을 개입시키지도 않는다. 소유자는 이사회를 절대적으로 통제하며, 이사회는 경영진을 절대적으로 통제한다. 끝이다.
제대로 후원받는 기업에서는, 조직 구조의 세부 형태가 어떻든 권한은 한 방향으로 흐른다. 권한의 흐름이 뒤엉켜 순환하지도 않으며, 조수처럼 방향을 바꾸지도 않고, 고장 난 하수관처럼 역류하지도 않으며, 축산 폐수 웅덩이처럼 고여서 부패하지도 않는다.
아니다. 제대로 후원받는 기업뿐 아니라, 건전한 모든 기업—원청업체이든, 하청업체이든—에서 권력은 아래로 흐르고, 이익은 위로 흐른다. 그리고 이 흐름은 어떤 방향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두 경로를 식물의 물관부(xylem)와 체관부(phloem), 인체의 동맥과 정맥, 상수도와 하수도, 기타 다양한 순환체계로 생각하면 된다.
버나드 베일린(Bernard Bailyn)이 자신의 주석 중 하나에서 지적하듯, 고전적 정치사상에서는 ‘제국 속의 제국(imperio in imperium)‘, 즉 중앙을 거부하거나 심지어 중앙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강한 내부 하위 권력을 정치적 오류로 보았다. 그리고 칸막이가 있는 사무실 안에서 일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제국 속의 제국‘이 파워포인트로 굴러가는 회사 문화 —즉 현대 기업 문화—에서도 오류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작은 문제가 하나 있다. ‘제국 속의 제국‘은 기본적으로 삼권분립이라는 개념과 거의 동일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흠.
현대 서구 기업 내부의 관리 체계는 상당히 양호하다. 적어도 현대 정부의 기준으로 보면, 내부 조직에 ’제국 속의 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절대 권한과 단일 장부 체계와 충돌하지 않는 내부 회계 관행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부차적 기업의 경우 외부 관리—즉 상위 두 계층, 주주(stockholder) → 이사회, 이사회 → 경영진 간 관계—는 반드시 주권적 후원자가 규제하거나 최소한 감독해야 한다. 예상할 수 있듯, 오늘날 외부 관리는 내부 관리만큼 건전하지 않다. 이사회는 내부 이사로 가득하고, 의결 과정은 의도적으로 불투명하며, CEO(최고경영자)와 CFO(최고 재무 관리자)는 종종 주주를 속인다. 내가 이 분야의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겉보기에는 미국의 기업법과 기업지배구조가 C 이상을 받을 수준은 아닌 것 같다. 아마 이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거의 틀림없이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부패가 적은 ‘주권적 후원자’이다. 월가에는 실제로 효과가 있는 단 하나의 규제 메커니즘이 있으며, 경영진이 투자자 이익을 따르도록 강제한다. 바로 기업 인수·합병이다. 후원자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인수·합병을 허용하는 경우와 인수·합병을 허용하지 않는 경우. 대체로 후자는 신뢰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미국은 인수·합병의 본고장이다.
그러나 주권기업의 맥락에서는, “기업 인수·합병”이라는 개념이 폭력에 가깝게 들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폭력을 완전히, 영구적으로 제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폭력을 제거하는 일은 어렵다. 혹시 제거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면, 아마 실제로 제거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주권기업의 지배구조라는 매혹적인 문제를 다시 살펴볼 가치가 있다.
요약하자면, 신관방주의적 ‘분산형 소형 주권국가 체제(patchwork)’ 행성에서 주권기업의 지배구조(governance)는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는 교차상장(cross-listing)이며, 다른 하나는 암호화 지배구조(cryptogovernance)다.
교차상장이란, 주권기업들이 서로의 2차 시장(secondary market)에 자신의 지분을 상장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때 주권기업은 가장 평판이 좋은 후원자(후견인)만을 신중히 선택하고, 후원자에게서 조금이라도 이상한 징후가 보이면 즉시 다른 후원자로 갈아탈 수 있는 백도어(backdoor)를 반드시 요구한다.
교차상장은 아마도 충분히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을 단일 방어선으로 삼기에는 위험하다. 이상적인 주권기업이라면, 반드시 일정 수준의 암호화 지배구조와 결합해야 한다.
암호화 지배구조란, 기업의 모든 형식적 의사결정이 암호학적으로 승인·검증되는 지배구조를 말한다. 후원자는 암호화 지배구조에서도 여전히 유용할 수 있지만 필수는 아니다.
암호화 지배구조를 채택한 기업에서 주주에 해당하는 구독자(subscribers)는 개인 키(private key)를 이용하여 자신의 지배구조 참여 행위를 서명한다. 그들이 익명인지 여부는 기업의 규칙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미국인이라면, 유럽 기업 이름에서 자주 보이는 SA라는 글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해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익명 결사체(anonymous society)”를 의미한다. 이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면, 그럴 필요는 없다.
(불행히도, 현실 세계에서는 익명성을 갖춘 암호화 지배구조와 비슷해 보이는 것은 워싱턴의 친구들에게 “자금세탁”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밖에 나가 당장 시도하라고 권하지는 않겠다. 만약 그럴 거라면, 진짜 돈은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된다. 성공적인 반동주의자의 첫 번째 규칙: 절대로 권력자의 눈 밖에 나지 말라.)
암호학 기반의 지배구조(cryptographic government)의 장점은, (이름에 비해 실제 구현은 훨씬 쉽다—수천 줄 정도의 코드면 충분하다.) 이를 주권기업의 두 번째 방어선, 즉 암호학적으로 통제되는 군사력과 직접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암호화 무기 통제는 이미 세계 최강의 무기에 대해 허가 작동 장치(permissive action links)라는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원칙적으로는 이 개념을 소화기(小火器) 수준까지 확장하는 데 아무런 기술적 제약이 없다. 예를 들어, 메시 네트워크(역주: mesh network. 중앙 기지국에 의존하지 않고, 각 장치(노드)가 서로 직접 연결되어 동시에 송신기·수신기·중계기 역할을 수행하는 분산형 통신망)를 통해 무선으로 활성화 코드를 보내는 식이다. 그 결과, CEO에게 충성하는 군부대의 무기는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며, 반란군 부대의 무기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결과는 명백하다. 게다가 신관방주의 국가는 배신자에게 관대하게 대할 유인을 갖고 있지 않기에, 공격자가 시스템의 약점을 여러 차례 시험해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암호화 무기 통제의 문제점은, 군사용 인증 키가 무기와 가까운 곳에 보관되면, 이 체계가 실패하고 단순한 군사독재로 전락하게 된다는 점이다. 무기 보유자들이 잠금이 해제된 비암호화 무기를 몰래 모은 뒤, 예컨대 주권기업의 이사회 같은 키 보유자를 체포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단순하다. 주권기업의 이사회—또는 최고 등급의 군사 키에 대한 최종 통제권을 가진 자들—을 해당 주권기업의 신관방주의 국가 바깥에 두면 된다. 심지어 CEO 본인과 모든 하위 관료가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이사회에 충성하는 군부대는 그들을 제압할 수 있다. 그 결과 내부 군사적 안정성이 확보된다.
물론 이러한 안정성은 행성 단위의 신관방주의 분산형 소형 주권 국가 체제(patchwork)를 전제로 한다. 만약 이 체제가, 인수합병 등을 통해, 몇몇 초거대 주권기업(megasovcorps)으로 재편되면 이 구조 역시 위태로워진다.
그렇다면 신관방주의 분산형 소형 주권 국가 체제(patchwork)는 어떻게 이런 끔찍한 운명을 피하는가?
주권기업의 구독자가 연쇄적 지배구조의 국가(역주: chain state. 원래는 독립된 여러 주권기업이 경쟁해야 하나, 지분 소유·의결권·통제권이 서로 얽히고 얽혀, A기업이 B기업을 지배하고 B기업이 C기업을 지배하고 C기업이 다시 A기업을 지배하는 상태 또는 여러 주권기업이 하나의 거대한 주권기업에 묶여 사실상 거대 주권기업의 독점이 벌어진 상태의 국가.)―혹은 그러한 연쇄적 지배구조의 국가를 초래할 수 있는 의심스러운 지분 결합―을 금지하는 구독자 규약(covenant)을 설정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암호화 지배구조(cryptogovernance)에서 구독자는 절대 권력을 보유하므로, 이 규약을 강제로 지키게 만들 수는 없다. 원한다면 주권기업의 모든 지분을 구글에게 팔아버릴 수도 있다. 그 결과는? 영구적인 글로벌 구글 정권(Googocracy)이 도래하는 끔찍한 미래다. 씨발! 나는 그건 별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후견인(patron)이다. 핵심은 이렇다. 주권기업의 독점력이 약할수록, 즉 경쟁을 더 두려워할수록, 그 기업은 기본 지대(primary rents, 일종의 ‘세금’)를 더 낮게 책정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후견인이 실질적으로 다른 경쟁 주권기업으로 이동할 선택지가 없다면, 그 주권기업은 후견인에게서 더 많은 돈을 짜낼 수 있다.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독점적 신관방주의 국가라도 후견인을 ‘개인적으로’ 혹은 가학적으로 학대할 동기는 없다. 세금을 걷는 편이 훨씬 효율적인데 왜 굳이 학대를 하겠는가? 하지만 학대를 제외하면 남는 것은 과도하게 장식된 복잡한 세금 구조이고, 그것 자체가 다시 학대가 된다. 따라서 이 역시 사라질 것이다. 물론, 특정 후견인이 치안·안보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경우 학대는 보장된다.)
이러한 이유로, 후견인은 법치주의를 유지하고, 갑작스럽고 예측 불가한 요구를 하지 않으며, 동시에 구독자가 ‘거주자가 아닌, 개별적인 사적 투자자’임을 입증하도록 요구하는 신관방주의 국가를 선호하게 된다.
만약 주권기업이 이 제한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한다면, 법적 균열이 발생한 신관방주의 국가와 동일하게 취급되며, 결과는 즉각적인 부동산 가격 폭락이다.
(주민 모두가 아이와 짐을 싸서 탈출하지 않아도 된다. 구독자가 고통을 느끼기엔, 자산 가치 폭락만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주권기업이 가진 유일한 자본자산의 가격이 폭락하는 상황을 '경영 성과'로 포장하는 방법은 없다.)
이 규약은 사실상 독소조항 역할을 하며, 우호적이든 적대적이든 모든 형태의 인수합병을 차단한다. 적대적 공격자가 위장전술(프런트 기업)을 사용해 지분을 매입하더라도, 이러한 인수는 신관방주의 국가 내부의 법에 따라 불법이 되기 때문에, 매입 후 기업 가치가 지불한 가격보다 훨씬 낮아진다. 즉, 이 메커니즘은 외부 집행이 전혀 필요 없다. 다른 모든 효과적인 방어 장치처럼, 이 역시 억지력(deterrence)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규약의 대가는, 인수·합병을 효과적 지배구조의 보증장치로 사용할 수 없게 되는 대신, 구독자가 기업 통제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구독자들은 독립적인 대리투표자를 지명하는 방식을 선호할 것이다. 오늘날 세계 어느 기업지배구조에서도, 인수합병을 제외한 대리투표(proxy voting)가 제대로 기능하는 사례는 거의 없지만, 나는 이것이 후원자의 무능한 규제를 반영한 결과라고 본다. 대리투표는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제도이고, 기능해야만 하는 제도이며, 특히 인수합병이 차단된 상황에서는 구독자들이 이를 제대로 기능하게 하려는 강한 유인을 갖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안정적인 주권기업을 비교적 설득력 있게 구성했으며, 그 확장된 형태로 행성 단위의 분산형 소형 주권국가 체제(patchwork)도 안정적으로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인다. 아직 다 다루지 못한 사소한 허점들이 남아 있지만, 이는 내 글에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보완해주길 바란다.
이제 우리의 신관방주의 국가 중 하나—이를 뉴 프리스코(New Frisco)라고 부르자—를 고장 내어 대중지배체제(massarchy)로 변질시키려 해보자.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잠시 뒤에 드러날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단순하다. 뉴 프리스코의 주권기업 프리스코프(Friscorp)의 CEO가 이사회의 암호키를 해킹할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낸다. 그 결과, 그녀는 더 이상 CEO가 아니라 뉴 프리스코의 여왕(Queen)으로 군림하는 절대군주가 된다. 프리스코프는 곧 그녀 자신이다. 그녀는 소유권과 통제권을 단일 인물에게 통합한다. 영어권 전통에서 이 정도 권력을 행사한 지도자는—최소한—엘리자베스 1세 이후 존재하지 않았다.
여왕이 자신의 이익을 우선한다면, 실험은 여기에서 끝났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자기 자신의 주권기업의 유일한 구독자이자, 유일한 이사회다.
애초의 구독자들은 여왕의 극악한 해킹—아마 외계인이 도와줬을지도 모른다—에 의해 완전히 털려버렸고, 더는 아무런 역할도 갖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웅크린 채 울기나 하면 된다. 흑흑.
따라서 여왕이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정은, 뉴 프리스코를 새로운 구독자 집단에게 매각하고, 통상적인 기업공개(IPO) 절차를 통해 공개적으로 주식을 판매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업공개를 진행하려면, 여왕은 거의 확실하게 사임해야 한다. 그녀는 신뢰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당신이라면 그녀를 고용하겠는가? 나는 절대 아니다. 그리고 바람직하게도, 이 새로운 주권기업—정부 특유의 밋밋함을 기리기 위해 넥스트코프(Nextcorp)라고 부르자—는 새로운 암호 체계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왕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녀가 재정적 이익을 극대화하려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권력에 미친 또라이이며, 그녀 개인에게는 뉴 프리스코의 여왕으로 군림하는 절대적 쾌감을 대체할 현금 따위는 없다. 게다가, 원래부터 돈이 부족한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여왕은 또 다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 바로, 그녀의 군대를 통제하는 암호 키가 이미 노출되었다는 점이다. 그녀가 이사회를 해킹했듯, 이번에는 장군들이 그녀를 해킹한다. 그들은 암호 키 자체를 확보할 수는 없지만, 무기를 운용할 때 키 자체가 필요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무력화할 수는 있다.
군대 통제 프레임워크가 붕괴된 실패한 신관방주의 국가에 무기를 판매하려는 다른 신관방주의 국가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뉴 프리스코 장군들은 당장 필요할 만큼의 무기를 이미 확보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여왕을 체포하고 즉각 처형하기에 충분한 화력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한다. 뉴 프리스코는 점점 흉악한 방향으로 치닫는다.
이제 장군들이 실질적 권력자가 된다. 뉴 프리스코는 고전적 의미의 군사 독재체제로 변모한다. 이 시점에 이르면, 후견인들이 뉴 프리스코를 떠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지며, 설령 떠나더라도 자산을 전부 가지고 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이론적으로는, 고전적 군사독재체제에서도 일상적 사회생활과 경제 활동이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António de Oliveira Salazar) 치하의 포르투갈,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치하의 스페인, 그리고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íaz) 시기의 멕시코가 모두 좋은 사례이다. 군사독재는 신관방주의와 비교적 가까운 지배 형태이며, 만약 안정적인 군사독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상당히 만족스러운 체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군사독재는 안정적인 체제가 아니다. 문제는, 장군들은 병사들이 자신들을 따르는 동안에만 통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도대체 어떤 장군들이 통치할 것인가?
군사독재와 신관방주의의 차이는, 군사독재는 비공식적 체제라는 데 있다. 병사들이 누구를 따를지 아는 유일한 방법은, 실제로 쿠데타를 일으켜보고 그 결과를 지켜보는 것뿐이다. 이처럼 권력의 모호성은 추악한 방식으로 고개를 든다.
따라서 장군들이 자신들의 최선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그들은 여왕이 했어야 했던 일을 하며, 빠져나올 수 있을 때 빠져나와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주식을 발행해 새로운 구독자 구조를 재편해야 하며, 아마 계급에 비례하여 군 전체 구성원에게 주식을 배분하면 될 것이다. 이후 군 내부 구성원은 그 지분을—아마도 시간이 지나며 점진적으로—매각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신관방주의 체제는 다시 정상화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마도 무지하거나, 고집이 세거나, 그 밖의 이유일 것이다. 이런 조건들은 군대에서 흔히 관찰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극악한 비정상 상태는 계속된다.
장군들은 결국 차선책을 선택한다. 자신들의 군사독재를 과두제(oligarchy)로 전환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 정부는 과두제의 적확한 예이다.
과두제란 비공식적 정부 체제로서, 군사독재가 확대되어 국가의 모든 영향력 있는 개인들까지 포함하는 형태다. 군인들이 통치하게 되면, 군인과 행정관료의 구분이 사라진다.
과두적 주권 구조는 잠재적 지도자들에게 ‘체제 내부에 남아 있는 편이 성공 가능성이 더 높다’는 인식을 심어 작동한다. 어떠한 일당제도, 본질적으로는 과두제라고 할 수 있다.
현대적 형태의 과두제는 대체로 단일한 지도자가 아닌, 위원회·평의회·의회가 정점에 서 있는 위계적 피라미드 구조를 띤다. 모든 정부가 그렇듯, 과두제 역시 권력과 금전의 형태로 ‘이익’을 분배한다. 사람에 따라 권력을 선호하는 이도 있고, 돈을 선호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적어도 과두제 안에서는, 돈으로 권력을 산다는 것은 단순한 거래가 아니다. 언제나 훨씬 복잡한 과정이 개입한다.
과두제 내부에서 사람들은 늘 자기 위치를 두고 경쟁한다. 과두제 내부의 비공식적인 개인 간의 갈등은 때로 독기 어린 수준으로 치달을 수 있지만,
적어도 이러한 갈등은 대중정치의 깃발 흔드는 선동과는 다른, 말 그대로 사내정치(office politics)의 범주에 머문다. 따라서 과두제 또한 삶을 살고 직장에서 일하기에 충분히 만족스러운 체제가 될 수 있다.
오늘날의 모든 정부는—싱가포르, 홍콩, 두바이처럼 준(準) 신관방주의 국가들이든, 미국과 유럽처럼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이든—크고 작은 과두제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즉, 형식상 의사결정권이 없거나, 혹은 형식적 직위가 그들의 실제 영향력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다수의 인물들이 국가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서구 관료 체제는 “정치적 정부”와 “초당파적·비정파적 정부” 사이에 실질적 구별이 존재한다는 일종의 환상 속에서 작동한다. 이 환상 덕분에, 선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상시 관료들이 국정을 운영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국가 구조에 형식적으로 속하지도 않은 비정부기구(NGO)들까지
사실상 행정에 관여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이 ‘정치적 관료가 실제 결정을 내리고, 비정파적 관료는 단지 기술적으로 집행만 한다’는 허구적 장면 연출을 유지하기만 한다면, 현행 서구 모델은 대중지배체제의 정치적 장점과
과두제의 행정적 장점을 일정 부분 결합하는 효과를 얻는다.
하지만 과두제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결국 대중지배체제가 등장하게 된다. 과두제 단계에 돌입하면, 뉴 프리스코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 권력 기반—형식적 절차가 무너졌지만 원래대로라면 구독자 기반이 되었을—이 빠르고 통제 불가능한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음이 명백해진다. 따라서 후견인들 역시 권력 다툼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그들 역시 그 자리에 있고, 그들이 다른 누구보다 더 고결할 이유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대중지배체제(massarchy)란,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이 대중—또는 최소한 그 일부 집단—의 충성을 통해 정당성을 확인받는 모든 형태의 정부 체제를 말한다. 정치 권력은 언제나 위계적이며, 정치 지도자와 파벌은 언제나 결정적 지지 기반을 조직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한다. 로마 공화정의 몰락은 그라쿠스 형제 시대의 대중지배체제의 부상과 함께 시작되었다.
흥미로운 질문은 다음과 같다. 직업군인에 비해 군사적으로 문외한인 군중이 전투에서 무력한 것이 분명한데—특히 현대 군사 체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군인이라는 직업은 결코 새로운 것도 아닌데—그렇다면 대중의 수적 규모가 왜 중요한가? 가장 큰 군중을 가진 쪽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결국 문제는 누구에게 더 많은 사단(divisions)이 있느냐로 귀결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병사들은 단순히 자신의 장군들만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체로 어떤 군중 파벌이든 개인적 연고나 연결을 갖고 있다. 따라서 군중의 규모는 곧 해당 군중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은 사단의 규모를 나타낸다. 병사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쪽에 서고 싶어 하므로, 군중의 머릿수는 일종의 셸링 포인트(역주: Schelling point. 경제학자 토머스 셸링(Thomas Schelling)이 제시한 개념으로, 서로 소통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같은 선택에 모이게 되는 지점을 뜻한다.)로 기능한다.
대중지배체제는, 거주민(이 시점에서는 ‘시민’이라 부르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의 의견이 하나 이상의 정치 파벌에 의해 포획되고 통제되는 정치 체제로 정의할 수 있다. 거주민의 의견을 포획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정치적 협력을 통해 발생하는 약탈의 가능성을 미끼로 제시하는 것이다.
특히 그러한 약탈이 권력과 부의 형태—예컨대 정부 일자리—로 분배될 때,
인간의 놀라울 정도로 유연한 자기이익 추구 능력에 따라 여론은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기울게 된다.
따라서 대중지배체제의 불가피한 결과는 대중 여론의 기묘한 구조적 왜곡이다. 이 과정에서 주민—혹은 시민—은 가장 정확한 정부에 대한 관점이나 사회적 관점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획득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데올로기를 채택하게 된다. 그 이데올로기들은 대체로 국가의 규모 확대, 재정 수입 증대, 권위 강화 등으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
대중지배체제에서는 큰 정부를 지향하는 이데올로기를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이데올로기보다도 정치적 기회주의의 자연스러운 작용을 통해 우세하게 만든다. 큰 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의 핵심 지지자라면, 그 파벌이 권력을 획득할 때 정부 관료 직위를 얻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작은 정부를 지지하는 파벌이 집권하면, 오히려 감축·해고 가능성이 커진다. 따라서 승리 확률이 동일하다면, 항상 큰 정부 지지 세력에 합류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 이 때문에 국가 확대 세력은 더욱 승리하기 쉽고, 따라서 그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 더 강하게 유도된다.
놀랍게 들릴 수 있지만, 대중지배체제는 모든 성인(成人) 시민에게
특정 정치 파벌을 지지하고, 어떤 형태로든 정부 이데올로기를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치즈를 먹거나, 심지어 치즈 감식가가 되는 것도 치즈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전혀 몰라도 가능하다. 누가 치즈를 만들어야 하고, 누가 만들면 안 되는지에 대해 의견을 가질 필요도 없다. 하지만 대중지배체제에서는 모든 사람이 치즈 장인이기를 요구받는다. 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형편없는 치즈가 나온다. 다행히도 오늘날의 많은 대중지배체제들은 대부분의 시민에게 실제로 정부에서 만든 치즈만을 강요하진 않지만, 그 결과가 어떤 모습일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대중지배체제에서는 여론을 형성하는 개인들이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대중지배체제의 미래 정치 방향은 기자와 교수가 결정하게 된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즉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사람들은 이 역할을 가장 선망하게 될 것이다.
“학계 내부 정치가 살벌한 이유는 학계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한정되어있기 때문이다.”라는 유명한 격언은 사실 상황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실제로는 학계 내부 정치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대중지배체제에서 정치적 논쟁을 할 때, 여론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가 ‘과학’이며, 이 카드는 종종 사용된다. 그러나 대중지배체제는 여론을 오염시키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과학 또한 오염시킨다. 즉 정확성과 무관하게, 국가의 역할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이어지는 관점이 승리하기 쉬운 구조가 생겨나는 것이다.
대중지배체제는 또한, 국가의 공식 조직은 아니지만 정책 결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규모 준(準)국가기관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대중지배체제 초기 단계에서는 형식상 행정관료들이 엄청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곧 다른 관료들의 질투와 경쟁을 불러일으킨다. 그 결과, 흔히 형식적인 절차적 의사결정 구조가 채택되는데, 이 과정의 실제 결과는 대체로 자신들을 ‘공정한 전문가’로 포장하는 민간단체 출신 행위자들에 의해 결정된다.
현대의 대중지배체제는 여론을 감지하는 주된 기제로 ‘여론조사’, 즉 거주민의 의견을 무작위 표본으로 추출하는 방식에 의존한다. 여론조사가 기술적으로 가능하기 전에는 보다 원시적인 방식인 정기적 선거에 의존했다.
그 선거에서 배출된 관료들은 여전히 존재하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명백한 이유로 인해, 그들은 여론조사가 그들의 인기를 확인해주는 기간에 한해서만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앞으로 대중지배체제에서는, 정기적으로 선출되는 정치인들은 아마 완전히 상징적 존재가 될 가능성이 크며, 유럽연합(EU)의 사례에서는 이미 상당 부분 그렇게 되어 있다. 안정적인 대중지배체제에는 여론조사만으로도 충분하고, 선거에 비해 기묘한 피드백 효과에 덜 휘둘린다. 국가는 단지 여론조사 흐름을 추적하며, 그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기만 하면 국가의 안위를 유지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대중지배체제에서는 국가가 시민들의 교육을 통제하므로, 여론 통제력을 상실할 위험은 최소화된다. 이 때문에 대중지배체제는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큰 정부 이데올로기가 작은 정부 이데올로기에 비해 항구적이고 구조적인 좌편향적 경향을 가지기 때문에 대중지배체제는 점차 질적 퇴락을 겪는다.
그리고 만약 대중지배체제가 제공하는 극도로 낮고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정부 서비스 품질의 부작용으로 인해 국가가 대중 의식을 통제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그 체제는 유일하게 더 나쁜 형태—폭정(brutarchy)—으로 타락할 수 있다.
폭정이란, 여론이 단지 ‘교육’에 의해 형성되는 차원을 넘어서,
실제로 물리적 강압에 의해 강제되는 체제를 말한다. 이 극도로 불쾌하고 불안정한 구조에서는 여론이 국가에 등을 돌리고, 국가의 세뇌 체계는 이 흐름을 되돌릴 만큼 강력하지 못하다. 주민들은 영구적인 환멸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폭력이 주민들의 실제 의견 표현을 억압하기 때문에, 브루타르키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다른 대부분의 주민들도 공유하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 그들의 집단적 의견은 은폐된 채 확인 불가능하며, 따라서 군사적 중요성도 없다. 이런 체제에서 군경(대개 상당 규모의 사복 요원을 포함하는)은 권력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무너지는 순간—
예컨대 동독 군중이 “우리가 민중이다!(Wir sind das Volk!)”라고 외쳤을 때처럼—폭정은 붕괴한다.
군사독재(militarchy)와 폭정(brutarchy)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 둘은 쉽게 혼동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 차이를 혼동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군사독재는 그 정치적 권력이 의심의 여지 없이 총구의 힘에 기반해 있으므로, 프로파간다 따위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거주민들이 무엇을 생각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 웰링턴 공작(Duke of Wellington)의 말했듯이, “천민(canailles)에게 필요한 것은 포도탄(grapeshot)이다.” (멘시우스 몰드버그의 주석: mitraille는 포도탄을 뜻한다. 기관총은 mitrailleuse로, 훨씬 뒤의 발명품이지만, 만약 공작이 이 무기를 보았다면 더욱 기뻐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반면, 폭정 체제는 군인들이 거주민들의 반정부 감정을 눈치채는 순간, 군인들은 더 이상 군중을 향해 발포하지 않고 곧바로 정권을 전복할 것임을 스스로 알고 있다. 따라서 군사독재와 폭정의 차이는 군대가 충성하는 방향이다. 군사독재에서 군대는 정권·지도자·군사평의회, 혹은 심지어 군 그 자체에 충성한다. 반면 폭정 체제에서는 군대가 ‘민중’이라는 숭배 대상에 충성하는데, 이는 평범한 군사독재가 무척이나 열심히 억제하려 드는 방향이다.
폭정이 흉악한 이유는 단순히 흉악한 일을 저지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체제 안의 누구도—심지어 명목상의 지도자조차도—이를 무력화시키고 다시 건전한 신관방주의 체제로 되돌리는 것이 극도로 어렵기 때문이다. 큰 정부 이데올로기가 작은 정부 이데올로기를 이긴다는 그 오래된 경향은, 대중지배체제에서 폭정으로 전환한다고 해서 힘을 잃지 않는다. 이들은 점점 현실과 분리된 관념으로 떠돌게 되며, 폭정 체제의 정신세계는 대중지배체제보다도 더 심하게 거짓과 망상으로 가득하게 된다. 어떠한 폭력적 격변 없이 안정적 정부로 되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대중지배체제(폭정을 포함한)의 가장 기괴한 사실은 이것이다. 대중지배체제가 주민들에게 강제하든, “교육”하든, 무엇을 통해서든
가장 먼저 주입해야 하는 왜곡된 믿음은 바로 대중지배체제가 최적의 정부 형태라는 믿음이다. 이 작업에 실패한 대중지배체제는 안정적일 수 없다.
결국 그것은 대중지배체제로 남아 있으며, 주민들은 그 체제를 종국에는 종료시킨다.
아직 우리는 이 “대중지배체제”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라면서 ‘민주주의’라고 배워온 그 정부 형태와 정확히 동일하다는 점을 논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글도 너무 길어졌다. 아마 많은 독자들은 이미 그 점을 명백하고 논쟁의 여지도 없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부디 의견을 말해주기 바란다…
원문 링크: https://www.unqualified-reservations.org/2007/12/neocameralism-and-escalator-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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