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생존의 정치경제학과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오스트리아학파, 미제스 연구소, 하이에크, 로스바드, 안캡(무정부 자본주의) 등은 찬양의 대상이라기보단 비판적 검토의 대상에 가깝다.
하이에크는 주류에 흡수된 온건파로, 로스바드는 급진적이지만 현실 정치와 괴리된 이론가로 평가받았다. 개인적으로 특히 안캡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선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군대, 치안, 국가 문제를 회피한다는 점에서 "공상"에 가깝지 아니한가.
어느 리버테리언은 "절대 60년대 로스바드를 검색하지 마"라는 농담 섞인 경고를 하기도 한다. 이는 로스바드가 한때 좌파와 협력하며 반전운동에 참여했던 이력과 국유화를 찬성했던 이력을 가리킨다. 자유지상주의 내부에서도 하이에크를 따루는 분파와 로스바드를 따르는 분파가 분열되어 있으며, 전자는 케이토 연구소 같은 주류 싱크탱크로, 후자는 미제스 연구소 같은 급진 진영으로 갈라섰다는 점이 흥미로운 지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자유지상주의는 "이론적으로는 멋있지만 국가 단위의 생존 문제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평가로 수렴할 수 있겠다.
이 지점에서 본인이 반복적으로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은 주장을 하고자 한다. 프리드리히 리스트, 알렉산더 해밀턴식 중상주의·국가자본주의가 진정한 우익 경제 모델이다.
방산, 중공업, 전략산업은 자유시장에 맡길 수 없다. 화폐, 재정, 산업정책은 국가 생존의 도구다. 일본 제국 시기의 혁신관료, 박정희식 개발국가 모델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일본제국 혁신관료들이 진정한 경제학자"라는 개인적 견해는 도발적이지만, 이는 단순한 일본제국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국가 주도 산업화에 대한 긍정이다.
이것은 단순히 규모만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 정부가 아니라 강하고 효율적인 정부를 전제로 한 우파 경제관이다. 자유시장은 평시에만 가능한 사치일 뿐, 전쟁과 국가위기 앞에서는 국가개입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다.
또다른 혹자들은 "주류경제학은 사실상 통계학이며 이제 학문으로서 경제학은 이제 퇴물"이라는 주장을 하곤한다. 이는 경제를 순수한 시장원리가 아니라 권력과 생존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민주주의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민주주의는 책임을 회피하는 정치 체제이며, 포퓰리즘과 재정 방만을 제어하지 못한다. 대중은 합리적 선택을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도덕적으로 숭고한 제도가 아니며 냉정히 말하면 현실에서는 국가를 좀먹는 절차적 장치로서 기능할 유인이 높다.
또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는 민주주의란 도저히 기능할 수 없다.
그렇다면 방금 전의 민주주의 비판은 독재에 대한 감정적 찬양인가? 아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조건부 평가다. 위기 상황에서 신속한 결정, 반대 세력의 물리적 제압, 장기 국가 전략의 강제 집행.
박정희, 전두환, 프랑코, 리콴유, 부켈레 같은 인물들이 계속 재평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자유주의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국가 단위의 생존과 성장에는 성공했다는 점에서 논의된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거버넌스 모델은 신반동주의(Neo-Reactionary)와 동아시아적 개발독재의 결합을 시사한다. 박정희를 "극우 스탈린"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었고, 전두환의 경제 정책을 높이 평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박정희에 대한 흔해빠진 비판들이다. 나는 주류 좌파와 리버테리언들의 허접하기 짝이 없는 박정희 비판을 분석하고, 역으로 이들을 비판해보고자 한다.
한국의 주류 좌파가 박정희를 공격할 때 가장 즐겨 쓰는 무기는 남로당 전력이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이들이 순간적으로 반공주의자로 변신한다는 점이다.
평소에는 반공을 냉전 잔재, 파시즘 도구, 적대적 이데올로기라 비판한다.
그러나 박정희를 비판할 때만은 “공산주의자였던 자”라는 도덕적 낙인을 찍는다.
이는 이념적 일관성의 붕괴다. 공산주의가 그렇게 본질적으로 악하다면, 한국 좌파 스스로의 사상적 뿌리부터 부정해야 한다. 반대로 공산주의가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라면,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은 정치적 맥락 속에서 분석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 좌파는 둘 중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는다. 필요할 때만 반공주의를 차용하는, 전형적인 도구적 이념 사용이다.
더 우스운 지점은 경제정책 평가다.
한국 좌파는 박정희의 국가개입·계획경제 요소를 근거로, “사실상 공산주의”, “자유시장 파괴자”, “전체주의 경제”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정작 이 비판을 하는 집단의 평균적 경제관은 무엇인가?
사민주의적 재정확대, 복지국가 모델 케인즈주의적 경기부양, 제3의 길식 신자유주의 혼합형.
즉, 박정희보다 훨씬 더 시간선호를 높이고 재정 방만한 정책을 선호한다. 재정보수주의, 통화 규율, 장기 산업 전략에 대한 집착은 박정희를 비판하는 좌파들에게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이 모순이다.
박정희는 “국가가 시장을 조정했다”는 이유로 공산주의자 취급을 받지만, 박정희를 비판하는 집단은 그보다 훨씬 더 시장을 정치에 종속시키는 정책을 선호한다.
이것은 이론적 비판이 아니라 정치적 감정 표출에 가깝다.
사실은 박정희가 너무나 효과적으로 좌파들이 정치판에서 숨도 못 쉬게 한 면이 있다
이 점이 핵심이다. 박정희에 대한 한국 좌파의 과잉 혐오는, 단순한 역사 평가가 아니라 정치적 트라우마다.
박정희 체제는 한국 좌파를 “정치적 대안 세력”이 아니라 “관리·통제 및 억압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박정희를 제대로 이론적으로 비판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한국좌파들이 영미식 보수주의, 권위주의 국가 모델, 개발경제학, 비자유주의 정치철학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것은 남로당 전적 운운, 반공 코스프레 도덕적 비난 뿐이다.
아까도 적었듯, 박정희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비자유주의, 공동체주의, 권위주의적 국가관, 자유주의·계몽주의 이전의 정치 질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 주류 좌파와 리버테리언들은 공통된 한계를 가진다.
정치를 도덕 담론으로 환원한다.
국가를 중립적인 규칙의 집합체로 상상한다.
권위와 주권과 폭력을 현실과 반드시 유리시켜야만 하는 예외 상태로만 취급한다.
이런 틀로는 박정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를 “공산주의자”, “파시스트”, “독재자”라는 서로 충돌하는 딱지로 동시에 부른다.
이는 분석이 아니라 언어적 배설에 가깝다.
공산주의자는 계급·평등·해방의 관점에서만 본다.
오스트리아학파식 리버테리언은 자생적 질서·시장 윤리만 본다.
하지만 박정희는 그 어느 쪽의 질문에도 답하지 않는다.
그는, 자유를 최우선 가치로 두지 않았고, 평등을 목표로 삼지 않았으며 시장을 신성시하지도 않았다.
박정희의 정치는 형이상학이 아니라 권력의 기술이었다. 그래서 그를 평가하려면 “옳았는가” 이전에 “무엇을 했는가, 어떻게 작동했는가”를 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경제에만 집착하는 공산주의자나 오스트리아학파식 리버테리언들은 박정희의 정치관을 제대로 평론할 수 없다.
이제 군대와 전쟁에 대해 짧게 논해보자. 군대를 긍정하지 못하는 우파는 반쪽짜리다. 안보를 외주화한 자유는 허구다. 전쟁은 비극이지만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현대전도 결국 인간을 갈아 넣는 산업이다.
전쟁이 발발할 시 행동강령에 관하여 본인이 할 대답은 냉소와 솔직함이 적절히 섞인 대답 말곤 없다. "전쟁 나면 목숨을 건사해야하니 되도록 피난하는 게 정배이긴 하나 내가 안전한 곳으로 당장 튈 능력이 없긴 하다. 결국 적당히 북괴군 간부 중에 계급이 높인 놈 보이면 그놈 향해서 수류탄 여러 개 까고 걍 육탄돌격해서 산화할 것이다."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며, 민중에 의한 폭력도 결국 정치적 행위다. 문제는 '폭력의 존재'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위해 쓰는가'다.
민병대에 대한 논의도 이와 연결된다. 자유지상주의적 민병대는 재산권을 지키지만, 이슬람 무자헤딘 같은 민병대는 종교적·정치적 목적을 추구한다. 혹자들은 "민병대가 재산권을 지켜야지, 파괴하면 그건 걍 도적떼나 정규군"이라는 구분하곤 하는데, 이는 폭력의 정당성을 재산권에서 찾는 자유지상주의적 관점을 보여준다.
화폐와 재정에 대해서도 논해보자. 혹자들은 "현금은 장기적으로 가치가 떨어지기에" 저축보다는 투자가 필요하다는 주장, "저축 기반 사회가 유지됐다면 이렇게까지 타락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탄식, "돈을 찍어 중산층의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결국 다들 다른 길로 눈을 돌리게 된다. 처음엔 투자, 그다음엔 비합법적 사업"라는 날카로운 진단을 했었다.
돈에 대해 편집증적으로 집착함으로써 문명이 타락해서 자멸하는 걸 보면 자본윤리가 중요하다는 통찰은 필요하다. 단순히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윤리적 제약이 필요하다 것이다.
돈이 무언가를 이룰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가 됐기에, 뭐 어떻게 돈 벌든 상관은 없다면 그걸 남들도 당연하게 봐야 한다는 문화가 자리 잡을까 봐 걱정이라는 우려는, OnlyFans와 같은 플랫폼에서 자신의 나체 사진과 영상을 판매하는 온라인 창녀들을 '크리에이터'라 부르는 서구 사회의 타락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만하다.
재정보수주의의 쇠퇴는 모두가 인정하는 현실일 수밖에 없다. 부동산 버블이나 주식 버블 같은 게 재정보수주의에게 치명타를 날렸다. 자산 거품이 건전재정 논리를 무력화시켰다. 혹자는 "조 맨친이 나름 재정보수주의에 대한 최후의 보루였지 않았나"라는 아쉬움을 토로했는데, 이는 미국 민주당 내 마지막 재정보수주의자의 퇴장을 의미했다.
재정보수주의도 건전한 화폐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확고하다. 결국 적극재정이 답이라 하는데, 그럼 남아있는 저축사회의 가능성도 사라진다. 적극재정이 단기적으론 기술발전에 도움돼도, 카르텔이 형성되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예산 낭비가 심해진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한국 인터넷 커뮤에서의 권위주의 우파 담론에 관하여 돈키호테들이나 다름없는 윤어게인단들이 죄다 독점하니 본 필자같은 사람은 고립된 힙스터에 지나지 않게 되니 이에 대해 자조하게 된다. 이데올로기의 깊고 보편적인 층위를 들여다볼 능력은 안되고, 국내 정치의 지엽적인 이슈에만 치중하는 전형적 보수호소인들이 온라인 우파 담론을 장악한 현실에 대해서는 안타까울 따름이다. 설령 윤어게인 담론에 가두리 양식당하듯 갇히지 않을지언정, 대부분의 우파 권위주의 담론은 트럼피즘의 피상적 겉핥기, 더러는 반서방 권위주의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로 귀결되곤 한다. 혹자는 윤석열이 권위주의자까지는 아닐지언정 오히려 윤석열 지지자들이 더 권위주의자다"라는 날카로운 지적을 남겼다.
또한 효율적인 거버넌스 모델을 보인 해외 우파 지도자들이 막상 한국에서 정치하면 한국의 보편적 정서와는 동떨어져 있기에 이들의 진가를 몰라보고 무조건적으로 비난을 퍼부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절대로 흰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은 변화하는 현실에 대응할 생각은 없이 언제까지고 여전할지 절대 장담할 수 없는 불안정한 우리 주변의 정치 모델에 안주하려하고 있다.
당신이 믿고 있는 신념은 다음 국면에서도 기능할 수 있는가? 지금 당신들을 움직이게 하는 매커니즘이 지정학적 대변혁 이후에도 유효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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