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아니시모프, 반동(反動)과 빈곤층
반동(反動)과 빈곤층
2014년 7월 20일, 마이클 아니시모프(Michael Anissimov)
마르크스주의자가 신반동주의자(neoreactionaries)에 대해 가하는 비판은 “저들은 한 번도 농사 일을 하며 땀을 흘려본 적이 없다”라는 문장으로 끝나곤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왜냐하면 멘시우스 몰드버그(Curtis Yarvin a.k.a. Mencius Moldbug)와 신반동주의 사상의 핵심적인 문제의식 중 하나가 바로 바이샤(Vaisya, 즉 블루칼라 노동자나 ‘미국 중남부(flyover country) 주민들')는 체계적으로 소외되는 반면, 하버드식 가치관을 가진 대학 졸업 진보층인 브라만(Brahmin)이 사회적·문화적 영향력을 독점 중이라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바이샤는 해안가의 도시형 젊은 전문직(yuppie)들에게 ‘쓰레기 백인(White Trash)’ 정도로 깔보이며 언급되는 계층이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과 당신의 지인들은 대부분 브라만일 것이다. 백인 상류층과 하류층의 극심한 분열은 찰스 머레이(Charles Murray)가 『다가오는 분열: 미국 백인 사회의 현황, 1960~2010(Coming Apart: The State of White America, 1960–2010)』에서 기술한 바 있다.
테든(Theden)은 이 차이를 더 깊이 다룬 글을 쓴 적이 있다. 몰드버그는 자신의 글에서 바이샤를 “잘못된 종류의 백인들”이라고 표현한다. 진보주의적 백인들(브라만)의 목표는 자신들이 “잘못된 백인들”이 아니라 “올바른 백인들”임을 스스로에게도, 주변 모두에게도 과시하는 데 있다. 브라만은 『백인들이 좋아하는 것들(Stuff White People Like)』이라는 사이트에서 장난스럽게 풍자되는 그 백인들이고, TED를 진지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19세기 이후의 세계는 상인 계급(merchant class)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수많은 중요한 사회 변동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러한 변화가 프랑스혁명 무렵—아마 그로부터 약 10년 뒤쯤—일어났다고 본다. 사회의 최상층을 상인 계급이 차지하는 나라를 우리는 흔히 자본주의 국가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가난한 이들, 즉 농민에게 있어 상인 계급이 지배하는 체제가 더 나은가, 아니면 과거의 귀족 계급이 지배하던 체제가 더 나은가? 브라만의 가치관은 상인 계급의 가치관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쉬는 시간이 흔한 일이었다.
쟁기질과 수확은 고된 노동이었지만, 농민은 약 8주에서 길게는 반년 가까이 일을 쉬었다. 인구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관리하는 법을 잘 알았던 교회는 자주, 그리고 의무적인 휴일을 강제했다. 결혼식, 장례식, 출산 같은 일만 있어도 축하주를 마시며 일주일을 쉬는 것이 흔했다. 떠돌이 광대나 유희적인 행사가 마을에 찾아오면, 농민은 오락을 위해 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일요일은 노동이 금지되었고, 쟁기질과 수확철이 끝나면 농민들은 충분한 휴식 기간도 가졌다. 실제로 경제학자 줄리엣 쇼어(Juliet Schor)는 임금이 특히 높았던 시기(예: 14세기 잉글랜드)에는 농민이 1년에 150일 이상 일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현대 미국 노동자는? 1년 동안 열심히 일한 뒤 받는 연간 평균 유급휴가는 겨우 8일이다.
애초에 이렇게 될 예정이 아니었다. 현대 경제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는 2030년쯤이면 선진국 사회는 충분히 부유해져서 일이 아니라 여가가 국민 삶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유명한 예측을 남겼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그 전망은 별로 희망적이지 않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일부는 19세기 노동자가 70~80시간씩 혹사당하던 것에 비해, 현대의 하루 8시간, 주 40시간 노동제가 자리를 잡은 것을 인류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증거라 말한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이미 오래전에 주 40시간제와 작별했다. 그리고 쇼어가 노동 패턴을 조사한 결과, 19세기의 극단적인 장시간 노동이야말로 인류 노동사에서 특이한 일탈이었다.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싸울 때, 그들이 바랐던 것은 새롭고 급진적인 제도가 아니라, 산업 자본가들과 전구가 등장하기 이전 조상들이 누렸던 삶을 되찾는 것이었다. 200년, 300년, 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처럼 긴 시간을 노동하지 않았다. 긴 휴일에 쉬는 것뿐만 아니라, 중세 농민은 식사도 천천히 즐겼고, 오후에는 낮잠 한 시간을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쇼어는 이렇게 적는다. “삶의 속도는 느렸고, 심지어 한가했다. 노동의 리듬도 여유로웠다. 우리 조상들은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여가는 풍부했다.”
자본주의 체제는 우리가 부와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이 일하도록 압박한다. 부족·공동체·대가족의 중요성이 약화된 세계에서, 부는 사회적 지위를 판단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준이 되었다.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든, 자유지상주의자·자본주의자든 모두 부·돈·분배에 집착한다. 그들은 그것이 인간 가치의 시작과 끝인 양 말하며, 돈이 단순히 생계에 필요한 것을 넘어 사회적 지위의 실체이자 자존감의 기준이라고 여긴다.
전통적 삶의 관점은 “일을 위한 일”보다 가족과 독립적 활동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 율리우스 에볼라(Julius Evola)가 ‘노동(work)’보다 행동(action)을 중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지역 공동체 질서가 부족한 자본주의 산업 체제에서는, 국가적 규모의 기업들이 점차 힘을 키워 인간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 결과, 소득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는 사회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가능한 한 오래 일하지 않을 이유가 사라진다. 이러한 과정은 일본과 한국 같은 곳에서 논리적 결말에 도달했다. 출산율은 극단적으로 낮아졌고, 기업에 다니는 사람들은 매일 하루 종일 일하거나 동료들과 시간을 보내며 살고, 많은 젊은 층은 연애 자체에 대한 관심마저 잃어버렸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엔드게임이다. 즉, 주 70시간 노동, 아이 없음, 가족 없음.
전통적이고 정상적인 사회에서는 여가뿐 아니라 개인적 공부, 활동, 취미, 탐구가 더 중시된다. 그래서 케인스와 20세기의 많은 미래학자들은 지금쯤(2000년 이후)에는 사회가 충분히 부유해져서 일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늘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지위를 위한 러닝머신”에 갇혀 있으며, 사회적 지위를 올리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강요받는다.
문제는 사회적 지위가 제로섬 게임이라는 점이다. 모두가 더 열심히 일할수록, 모두가 자신을 끌어올리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진다. 이러한 광적인 ‘사다리 오르기’는 농민의 관점과 대비된다. 농민은 자신의 신분에 맞는 안정된 삶을 추구하며, 스스로에게 만족하며 산다. 소득 극대화만을 목표로 삼기보다, 그는 삶의 좋은 것들—즉 가족, 개성 있는 작업, 자신의 노동이 직접 낳는 보상, 여가, 교류—과 같이, 실제로 행복을 가져다주는 요소들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흥미롭게도, 이런 “삶의 좋은 것들”은 최상위 상류층도 누리고 있다. 주로 상층 하류 계급(upper lower class)과 최상위 상류층이 향유하는 것들이다. 반면 중산층은 자신을 최상위 상류층에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정작 가만히 있어도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상층 하류 계급과 상층 상류 계급(upper upper class)의 이 평행 구조는 폴 퍼셀(Paul Fussell)이 『계급(Class)』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두 계급 모두 증명해야 할 것이 없고, 자신의 정체성에 만족한다.
신반동주의 내부에서는 사실 하류층과 하위 중산층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범죄, 경제, 사회질서 등 여러 논점을 추진하는 핵심 동기다. 사회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충격을 받는 사람은 가난한 이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신성시되는 특정 ‘피해 집단’만이 아니라, 빈곤층 전체다. 자유주의는 도시를 가난한 이들에게 안전한 공간으로 만드는 데 실패한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적 발상은 하버드처럼 본질적으로 안전한 환경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버드 같은 곳에서 형성된 가치관은 실제로 빈곤층 전체를 돕는 데 실용적이지도, 유익하지도 않다. 그것은 부유하고 고학력인 계층의 사회적 전제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빈곤층의 환경과는 전혀 다르다. 그곳은 물리적 힘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원문 링크: https://archive.is/dR83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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