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아니시모프, 반동적 사유의 원칙들
반동적 사유의 원칙들
2013년 12월 13일, 마이클 아니시모프(Michael Anissimov)
1. 사람은 서로 평등하지 않다. 앞으로도 결코 평등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평등을 거부한다.
2. 우파은 옳고, 좌파는 그르다.
3. 위계질서는 기본적으로 바람직한 개념이다.
4. 전통적 성 역할은 기본적으로 바람직한 개념이다.
5. 자유지상주의는 지극히 어리석다.
6. 민주주의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결함이 있으며, 우리는 이를 폐기해야 한다.
1. 사람은 서로 평등하지 않다. 앞으로도 결코 평등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평등을 거부한다.
이것이 신반동주의(Neoreaction)·반동주의(Reaction)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다. 평등이라는 것은 거짓이다. 신반동주의와 반동적 사유는 근본적으로 평등 개념에 반대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불평등한 것을 평등하게 만들려 하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불평등이다”라고 말했다. 평등이라는 관념은 유기적 분화를 파괴하고, 인간을 획일적이고 회색빛의 덩어리로 만들어버린다.
불평등은 반드시 “우열”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물론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차이를 의미한다. 서로 다른 것은 평등하지 않다. 결코 그럴 수 없다. 평등은 실패한 이상이며, 탁월성을 파괴한다. 우리는 평등이라는 사고방식에 그야말로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율리우스 에볼라(Julius Evola) 또한 평등을 거부하고 법적 권위(authority)와 인격적·도덕적 권위(auctoritas)를 지지한다는 점을 극히 명확히 했다. 그는 ‘폐허 속의 인간(Men Among the Ruin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평등주의적 전제로부터 출발해 보자. 애초에 “불멸의 원리”라고 불리는 평등은 완전한 허튼소리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자연적 불평등에 관해서는 굳이 논평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등주의의 옹호자들은, 비록 인간이 사실상 평등하지 않다 하더라도 법적으로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불평등하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
나는 이것이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것은 “고귀한 이상”이 아니라, 절대화될 경우 논리적 모순이며, 이러한 관점이 확립된 곳에서는 퇴행과 쇠퇴만이 초래된다. […]
양 측면에서 볼 때, “다수”는 평등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평등해서도 안 된다는 점이 이성적으로 명확하다. 불평등이 사실상 참인 것은 그것이 법적으로 참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실제적인 것은 그것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평등주의 이데올로기가 “정의”라고 포장하는 상태는, 사실 더 높은 관점—인도주의적·민주주의적 수사를 넘어서는 관점—에서 보면 부정의(不正義) 상태다. 과거 키케로(Cicero)와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와 같은 논지를 전개한 바 있다. 반대로, 불평등을 인정한다는 것은 양(quantity)적인 가치를 초월하여 질(quality)적 가치을 승인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개체(individual)’와 ‘인격(person)’ 개념이 구분된다.
신반동주의/반동주의가 반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평등이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은 반동주의자도, 신반동주의자도 아니며 완전히 다른 무엇이다.
2. 우파는 옳고, 좌파는 그르다.
반동주의자들에게 이것은 공리(axiom)에 해당한다. 이 표현은 에릭 폰 퀴넬트레딘(Erik von Kuehnelt-Leddhin)에 의해 대중화되었으며, 그는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과 율리우스 에볼라(Julius Evola)와 함께 신반동주의 사상의 핵심 정전(canon)을 이루는 인물이다. 누군가 이 문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그 사람은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고, 차를 함께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반동주의자는 아니다.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 Curtis Yarvin)는 「미제스부터 칼라일로의 여정(Journey from Mises to Carlyle)」이라는 글에서 이 문구를 인용한다. 또한 「무조건적 유보에 관한 친절한 입문서(A Gentle Introduction to Unqualified Reservations)」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질서는 단순히 선이고 혼돈은 단순히 악이라는 매우 깔끔한 가치 체계를 구성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나는 이 길을 선택했다. 이 선택은 내 두개골 뒤편에 상당히 넉넉한 빈 공간을 남겨두며, 나로 하여금 스스로를 반동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게 해준다. 당신에게는 이것이 어쩌면 ‘어두운 편’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치료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기본적인 이야기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좌파는 혼돈과 무정부 상태이며, 무정부 상태가 많아질수록 분배되는 권력 또한 많아진다. 반대로 체계가 질서정연할수록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줄어든다. 바로 이러한 비대칭성 때문에, 위계적 집행 권한을 핵심으로 하는 본질적으로 질서정연한 체계를 지닌 기업과 군대는 우파 쪽에 군집하게 된다.
3. 위계질서는 기본적으로 바람직한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위계는 안정성, 질서, 방향성, 결속력 등을 촉진한다. 반동주의자들은 인간을 기계의 톱니바퀴로 전락시키는 전체주의적이고 경직된 위계에 반대한다. 파시즘에 대한 반동적 비판으로는 율리우스 에볼라의 「우익적 관점에서 바라본 파시즘(Fascism Viewed from the Right)」를 보거나, '폐허 속의 인간(Men Among the Ruins) 제4장'을 참고하면 된다. 반동적 사유와 파시즘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폐허 속의 인간 제4장을 읽지 않고서는 결코 이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자율성을 짓밟는 경직된 위계를 옹호하는 대신, 반동주의자들은 에볼라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 ‘유기적 국가(organic State)’를 지지한다:
모든 사회와 국가는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개별 인간이 그 1차적 요소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들인가? 개인주의가 상정하는 원자적 존재나 원자들의 집합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인격(person)으로서의 인간이다. 즉 서로 구별된 존재로서, 각자가 창조하고, 건설하며, 복종하고, 명령하는 가치에 기초한 사회적 위계 속에서 서로 다른 지위, 서로 다른 자유, 서로 다른 권리를 부여받은 존재들이다. 이러한 인간들로 구성될 때에만 진정한 국가, 곧 반자유주의적·반민주주의적이며 유기적인 국가를 수립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를 떠받치는 핵심 사상은, 추상적인 사회적·정치적·법적 실체보다 인격이 우선한다는 점이며, 여기서 말하는 인격이란 중성화되고 평준화된 실체, 양과 보통선거의 세계에서의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유기적 국가의 목표는 보편주의적이고 평준화된 미학이 아니라, 인격의 ‘개별화와 점진적 분화의 과정’을 촉진하는 데 있다. 어떤 사람들은 타고난 지도자이며,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모든 반동주의자가 스스로를 자연적 지도자로 상상하며, 혁명이 오면 위계의 상층부 자리를 차지할 운명이라고 공상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핵심은 사회 전체의 상층에서 하층에 이르기까지, 쾌적한 차별화와 개별화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실제로 이러한 질서는 현재보다 하층에 속하는 삶을 더 나은, 그리고 더 흥미로운 경험으로 만드는 이유들을 지니고 있지만, 이는 전혀 다른 주제다.
4. 전통적 성 역할은 기본적으로 바람직한 개념이다.
이 주제는 페미니스트들이 지나치게 격앙되어 반응하기 때문에 자세히 논하는 것이 피곤하지만, 반동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전통적 성 역할을 긍정한다. 전통 사회에서 여성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직업’에 해당할 수 있는 일들과 역할을 실제로 수행해 왔다. 모든 여성이 집에만 머무는 전업 주부였던 것도 아니며,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많은 여성들은 대단히 근면했다. 집에 머물며 옷을 만들고, 요리하고, 정원을 가꾸고, 아이를 키우는 일이 도랑을 파거나, 용접을 하거나, 하루 종일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두드리는 남성적 활동들보다 덜 ‘역량을 부여’하거나 덜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겨져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반대로 남성이 집에 머물며 아이를 키우는 선택을 할 경우, 많은 다른 남성들은 그를 낮춰 볼 것이다. 아무리 진보주의적 선전이나 재교육 캠프가 동원된다 해도 이는 바뀌지 않는다. 이는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를 통해 인간의 뇌에 깊이 각인된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세상으로 나가 남성적인 일을 수행하는 다른 남성들을 존중한다. 마찬가지로, 성별 규범에 순응하라는 압력은 남녀공학보다 여학교에서 더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성 역할 규범을 만들어내고 감시하는 주체가 남성이라는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물론 이러한 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기묘한 세계’의 거품 같은 공간을 만들어내는 사람들도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런 체계는 그다지 안정적이지 않다.
여성들은 지난 40년간 페미니즘이 이뤄냈다고 주장되는 온갖 진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40년 전보다 덜 행복해졌다. 내가 대화한 한 반동주의 여성은 페미니즘이 근본적으로 정직하지 못하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페미니즘이 사실상 자녀가 없는 여성을 위한 운동이면서도, 마치 모든 여성에게 도움이 되는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여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기능하는 가족을 강하게 지지하는 규범이 사회 전반을 떠받치고, 다른 삶을 선택하고 싶은 사람들은 역류를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이는 반동주의적 입장을 공정하게 요약한 표현이다.
5. 자유지상주의는 지극히 어리석다.
많은 반동주의자들은 포스트-리버테리언(post-libertarian), 즉 더 이상 리버테리언이 아니다. 반동주의/신반동주의로 이행하는 하나의 통과의례는 자유지상주의를 포기하는 것이다. 나는 애초에 자유지상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유지상주의와 신반동주의 사이의 관계를 완전히 이해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그 관계를 이해하고 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개인적 자유를 공리로 삼으며, 그러한 자유가 사회나 가족과 같은 전통적 구조에 미치는 부정적 외부효과를 고려하기를 거부한다. 이는 반동주의자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다.
신반동주의는 사회적 의무, 규범, 일정 수준의 집단적 동조성·동질성 등을 중시하는 전통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신반동주의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거나, 전통적으로 사적인 영역에 속했던 분야에서 국가를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자유지상주의적 요소를 일부 공유하지만, 자유지상주의 전체를 수용하지는 않는다.
자유지상주의가 설령 기능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구의 일부—아마도 15~20% 정도—에게만 적합할 것이다. 이들은 갤트(Galt)처럼 세상과 단절된 메타포적 요새에 틀어박힐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자유지상주의 사회가 다수의 사람들을 냉혹한 현실 속에 방치하게 된다 해도,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개의치 않는 듯 보인다. 반면 반동주의자들은 공동체, 가족, 사회적 결속을 육성하려 한다.
몇 달 전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전통주의가 옹호하는 ‘사회주의’란, 가족과 친구들이 자발적으로 서로를 돕는 것이다.” 이는 상호부조에 대한 반동주의적 입장을 잘 요약한다. 이론적으로는 자유지상주의와 양립 가능해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 살아 있는 자유지상주의의 분위기와 정신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반동주의자들은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만한 짤막한 논점으로, 트위터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유지상주의를 취하되, 기본 사회 단위를 개인이 아니라 가족으로 설정한다면 신반동주의에 상당히 가까워질 것이다.”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흥미로운 관찰이다.
6. 민주주의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결함이 있으며, 우리는 이를 폐기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재앙이었다. 이에 대한 설명으로는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Democracy: The God That Failed)’를 읽어보라. 이 책의 일부라도 읽지 않았다면 논점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최소한 일부를 읽는 것만으로도 민주주의의 실패를 다루는 진지한 학술적 논의에 접할 수 있다. 반민주적 주장을 모두 “파시즘”으로 치부해 버리는 태도는, 지적 깊이가 부족함을 드러낼 뿐이다. 적어도 스콧 알렉산더(Scott Alexander) 같은 인물은, 파시즘이라는 허수아비에 의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옹호하려는 보다 깊이 있는 논증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으로 끝이다.
여기에 “대성당(Cathedral)에 대한 반대”를 포함할까도 고민했지만, 대성당이라는 개념은 외부인에게는 그저 조악한 신조어처럼 보일 뿐이고, 나는 반동적 사유에 사전 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들도 내 글을 소화할 수 있기를 원했기 때문에 제외하기로 했다. 또한 대성당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문제는 매우 복잡한 사안이기도 하다.
나는 전제를 여섯 가지로 제한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정의적이며 포괄적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 여섯 가지 전제 모두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확실히 반동주의자이거나, 최소한 극우에 속한다. 반대로 이 가운데 하나라도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확실히 반동주의자가 아니다. 어디선가는 선을 그어야 한다. 내집단(in-group)과 외집단(out-group)을 구분하는 것 자체 또한 반동적 사유의 또 하나의 전제다.
원문 링크: https://archive.is/LpyG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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