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ed Perry, 여성참정권의 폭정(暴政)

 여성참정권의 폭정(暴政) (원제: The Tyranny of Suffrage)


리드 페리(Reed Perry) / 2015년 3월 5일


"가장 심각한 불평등은 불평등한 것을 평등하게 만들려는 시도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나는 여행할 때 묘지를 방문한다. 오래된 기념비들은 그곳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집트를 방문하면서 피라미드를 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은 무덤이다. 엄청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일랜드의 고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버려진 감옥의 공동묘지나 스페인이나 버지니아의 전쟁 묘지를 찾는 사람은 훨씬 적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그곳들 역시 방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나는 전 세계의 크고 작은 묘지를 다녀왔다. 고고학적으로 그들은 중요하다. 동시에 박물관이나 공식적인 문화 전시회처럼 정돈된 공간을 벗어나 도시의 유산을 엿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묘지는 대개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필터를 거치지 않는다.


내 거주지 근처에 내가 본 적 없는 독특한 비석이 있는 묘지가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것이 유독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곳에 누가 묻혀 있는지는 모른다.


그것은 오래된 시골 묘지에 있는 낡고 작은 비석이다. 처음 보았을 때는 녹아내리는 얼음으로 인해 주변의 낙엽이 젖어 있었다. 서쪽 묘지에 있는 더 오래된 비석들 사이에서, 이 비석은 이끼로 인해 푸르스름하고 부서져가고 있었다. 읽을 수 있는 몇 마디 글귀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의 아들  

1898-1918  

전쟁"  


그것이 황량한 단순함 때문인지, 아니면 그 비석을 세운 사람들, 그들의 슬픔이 맴도는 듯한 느낌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 비석은 단지 하나의 돌로 너무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의 아들'은 그들의 유일한 아들이었을까? '우리의 아들'은 국가를 위한 그들의 헌신이었을까? '우리의 아들'은 민주주의라는 전쟁의 신에게 바쳐진 희생이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평생 동안 세금을 내며 살아갔을 것이다.  


'우리의 아들'은 '특권층'의 남성이 아니었다. 그는 가난한 소년이었다. 그의 묘비가 이를 증명한다. 그것은 거의 자갈 수준의 묘지였다. 이 비석은 교회에서 제공했을 수도 있고, 그의 슬픔에 잠긴 가족이 직접 새겼을 수도 있다. 지금은 얼음 속에 놓여 있다.  


이 사람은 어떤 위대한 명예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어쩌면 그는 바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는 어떤 비뚤어진 범죄에서 도망치다 군에 입대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알 수 없다. 내가 아는 것은 그가 전투 중에 죽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나보다 앞서 이 지역을 돌아다녔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 단어들에서 어떤 의미를 본다. 나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명예를 본다. 그것은 전쟁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을 일으킨 정치인들과 은행가들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나는 모든 인간의 이타심과 용기를 본다. 그것은 아름답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릴 때 끝없이 비극적이다.


남성들은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남성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젊음과 성인기, 평생을 희생하며 노예처럼 일한다. 가족들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주기 위해서다. 남성들은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죽음의 문턱을 넘어야 한다는 기대를 받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이는 수많은 세대에 걸쳐 지속되어 왔다.  


그런데 나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남성들이 자멸하고, 자학하며, 자신이나 모든 남성들을 세계의 모든 잘못에 대해 탓하고 있다. 어떤 불의가 있다면, 그것은 남성이나 남성 중심 사회 때문이라는 말을 듣는다.  


'우리의 아들'이 땅에 묻힌 지 2년 후, 미국에서는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었다.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세계 평화와 풍요의 새로운 시대에 들어설 것이라 믿었다. 여성적 가치가 많은 사회적 분열을 끝내고 조화로운 이해의 시대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 뒤로 금주법, 초기 경찰국가의 등장,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이 뒤따랐다. 전쟁의 희생으로 인한 남성의 감소와 모든 계층에서의 재산 상속이 가정 내 여성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여성의 영향력은 커졌다. 가장 대담하고 민족주의적인 남성들이 먼저 전장에서 죽었고, 남겨진 남성들은 덜 단호한 성향을 보였다. 이들은 페미니즘에 더 쉽게 굴복한 듯하다.


20세기 20년대의 플래퍼(역자 주 – Flapper. 플래퍼는 192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등장한 젊은 여성들의 새로운 문화적 아이콘으로, 짧은 머리와 드레스, 자유분방한 태도로 전통적 여성상을 거부하며 독립성과 자기 표현을 강조했다. 그들은 흡연과 음주를 즐기고, 금기에 도전하며 성적 자유를 추구했으며, 여성 참정권과 사회적 진출 확대 등 당시 변화하는 사회적 흐름을 상징했다.)들은 남성들이 일하며 얻은 부로 금박을 입힌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고, 참호에서 고군분투하여 쟁취한 부를 만끽했다. 매년 하늘로 치솟는 고층 건물들은 남성들에 의해 설계되고 세워졌다. 자동차와 전화기, 그리고 여성들의 일상을 덜어줄 가전제품 역시 남성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여성들이 성적 행동의 결과를 제거할 수 있게 한 피임법 역시 남성들의 발명품이었다. 인류의 남성 절반이 여성의 부상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곧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남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우게 될 짐이 되었다.  


'권리 투쟁'은 끝없는 축하의 장으로 변모했고, 이는 '메리 타일러 무어'에서 '섹스 앤 더 시티', 그리고 현재의 '걸스'에 이르기까지 안락한 사무직과 세련된 도시 생활을 찬미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해방'이라는 이름의 야외 파티는 소비의 과잉, 광고, 결과 없는 성적 방종, 그리고 이혼 소송이나 차별 소송을 훨씬 넘어선 법적 우대를 특징으로 하는 여성 호화 시대를 열었다. 투표소와 가정에서 시작된 페미니즘의 돌풍은 미국 생활의 모든 면을 왜곡시켰고, 궁극적으로 미국 경찰국가의 악성 성장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현대의 백인 여성 생활 방식은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안락한 형태를 띤다. 서구 여성만큼 호사스러운 대우를 받는 인구 통계 집단은 없다. 그러나 이들은 가장 많이 억압을 호소하고, 자신과 관계된 남성들을 폄하하며, 자신의 문명적 상황을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페미니스트는 끊임없는 불만을 제기하며, 결코 만족하거나 예의 바르지 않은 상태로 타락했다. 이들은 성스러운 맹세를 어기고, 남성적 기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에서 모욕을 찾으며 불만을 제기한다.


남성적인 모든 것은 거세되어야 한다. 신성하고 순결한 모든 것은 모독당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여성을 위한 것" 혹은 "평등한 권리를 위해"라는 명분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아들'은 이러한 "평등"이라는 거창한 말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세계 대전에서 리버럴 이념을 위해 희생된 남성들은 한순간에 잊혀지며, 나르시시즘적 권력 판타지에 집착하는 방탕한 여성들의 욕망을 위해 식초 속의 파리처럼 취급당했다.  


남성은 "악"으로 여겨지지만, 페미니스트는 남성이 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남성의 직장은 "여성 혐오적"이라면서도 그곳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남성의 작업물은 "편견에 찬" 혹은 "불공정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같은 작업에 대한 공은 차지하고 싶어 한다.  


문화혁명은 성별 간 전쟁의 아마겟돈이었다. 그것은 가부장제의 종말이었고, 불과 10년 만에 전개된 극적인 붕괴로, 선의로만 움직였으나 비참하게도 잘못 인도된 세대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처음부터 여성의 권력을 상상해낸 것은 남성들이었으며, 이를 통해 자신들에게 이익을 줄 것이라 믿었다. 1960년대에는 이러한 상상이 '자유로운 사랑'과 같은 값싼 아이디어와 쉬운 성관계로 축소되었으며, 이는 곧 문화적으로 소속감을 잃은 'X세대'를 낳았다. 이는 결국 가정에서 아버지가 사라지고, 가정의 기능이 팽창하는 정부에 위탁되는 국가로 이어졌다.


단순한 "여성 참정권"이라는 아이디어가 어떻게 벌거벗은 채로 길거리에서 마약에 취해 성행위를 하는 모습이나, '레이디 가가'가 스트랩온 딜도를 착용한 채 아이들 앞에서 행진하는 모습으로 귀결되었을까? 이는 대체로 투표를 통해 이루어졌다.  


와이오밍은 유타보다 먼저 여성 참정권을 부여한 유일한 미국 주였으나, 유타의 여성들은 곧 참정권을 상실했다. 그들이 순종적인 리버럴들처럼 투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타 여성들은 도리어 순종적인 기독교인이었고, 이는 도시 정치가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여성참정권 운동가(Suffragette)들은 몰몬교 여성들이 가부장적 신앙을 배반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들은 몰몬 전통을 몰몬 여성 유권자들을 "제5열(역자 주 - fifth column. 적의 내부에서 은밀히 활동하며 적국이나 적대 세력을 위해 협력하는 집단을 뜻하는 용어. 이 용어는 스페인 내전(1936~1939) 중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지지자였던 에밀리오 몰라 장군이 처음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마드리드를 공격하기 위해 네 개의 부대를 배치했으며, 도시 내부에 잠복하고 있던 자신들의 비밀 동조자들을 "제5열"이라고 불렀다.)"로 삼아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여성들은 충성을 지켰고, 몰몬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은 지 16년 후, 공화당이 당시 리버럴 정당으로서 이를 불법으로 선언하며 그들의 "투표권"은 몰수되었다.


엄격한 몰몬교 가정주부는 미국 여성주의의 선구자가 될 운명이 아니었다. 타데우스 러셀(Thaddeus Russell)이 저서 ‘미국의 이단적 역사(A Renegade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에서 논하듯, 여성주의의 개척자는 적절하게도 매춘부들이었다. 이 여성들은 엄격한 행동 규범에서 유일하게 예외로 인정받았는데, 간통, 피임, 선정적인 의복 착용 등이 법적으로 허용된 경우가 많았다.  


서부 개척 시대의 포주들 중 다수는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수백만 달러에 해당하는 재산을 축적했으며, 이를 활용해 여론을 조성하고, 정치인을 매수하며, 법정에서 자신들의 매춘부를 변호하고, 부유한 신흥 도시의 주요 부동산을 매입했다. 예컨대 몬태나주의 수도 헬레나에서는 1800년대 후반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진 부동산 거래가 전체의 절반에 달했다. 이 여성들 대부분은 매춘부였다. 이는 더 발전된 동부 도시들에서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진보적 정치인들은 이러한 부유하고 교묘한 여성 진보주의자들을 기부자와 영향력 있는 인사들로 환영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반세기 후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에 의해 주장된 많은 정책들은 외로운 노동자들이 자신의 임금을 탕진했던 미국의 매춘 업소에서 기원했다. 현대 여성들의 많은 행동은 참정권 이전 시대에는 매춘업소를 제외한 곳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영국 제국 내에서 참정권을 가장 먼저 부여한 지역들도 남(南) 호주(South Australia)와 같은 개척지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산업화가 가정을 약화시키고, 수백만 명의 남성이 전장에서 체계적으로 전멸하면서 영미권 전역으로 스며들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50만 명 이상의 영국인이 사망했으며, 이들 대부분(99% 이상)이 남성이었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영국군의 특성을 고려하면, 전쟁으로 인해 상당한 규모의 보수적 유권자 집단이 희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끔찍한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18년, 젊은 남성들의 시신이 배로 실려 귀환하는 와중에, 리버럴 성향의 의회는 여성 참정권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처음에는 30세 이상(그리고 대학 학위를 소지한) 여성들만 영국에서 투표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 영국의 서프러제트들은 대부분 잉글랜드 출신으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출신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영국에서 가장 성가시고 신랄한 활동가들 중 하나로, 오늘날 기준으로는 "테러리스트"라 불릴 만했다. 이들은 방화, 폭탄 테러, 비방 캠페인 등으로 활동했으며, 수백 명이 투옥되었다. 하지만 전시 자유당 정부는 이들에게 사면을 부여했다. 소년들이 원하는 바는 무시되었다. 그들은 참호, 병원 침대, 그리고 묘지에서 투표하지 못하는 상태로 바빴다.  


미국의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은 테러 행위를 덜 자행했으며, 서부의 신생 주들이 더 많은 공식 시민을 필요로 했던 유리한 환경에서 활동했다. 또한 산업 자본가들은 참정권이 수요와 이익을 증가시킬 것이라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리버럴 진영은 여성들을 정치적 스펙트럼을 영구히 변화시킬 수 있는 엄청난 잠재적 유권자 집단으로 보았다. 페미니즘적 히스테리는 정치적 무기로 조장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여성을 선거인 명부에 추가한 깊은 영향은 과소평가될 수 없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훨씬 더 많이 투표한다. 일부 주에서는 여성 유권자가 남성보다 거의 20% 더 많으며, 전국적으로 납세자의 대다수는 여전히 남성이다. 여성 유권자를 제외하면 정치 지형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누가 투표하고 누가 그로부터 이익을 얻는지에 대한 경제학은 심층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성 참정권의 부당함은 최초의 선거부터 명확했어야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전선에서 싸우다 두 다리를 잃은 20세의 미국 군인은 아직 "투표권"이 없었지만,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고, 재산도 없으며, 집을 떠난 적도 없는 21세 여성은 투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들은 대거 투표했다. 엄청난 숫자로 투표했으며, 리버럴적으로 투표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법이다. – 깨진 가정과 새로운 법들. 페미니스트들은 법을 사랑한다.


전통적인 결혼을 해체하면서 아버지의 부재가 급증했다. "한부모 가정"이라는 폐해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페미니스트들은 "영웅적인 싱글맘"을 미화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혼란과 고통 속에 살아갈 운명에 처하더라도 상관없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독립적"이고 "권한을 부여받은" 여성들이 사무실에서 젊음을 낭비하거나, 무작위로 남자를 찾아 성적 관계를 맺으며 "경력"을 쫓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놀랍게도, 1960년대까지 흑인이 백인보다 결혼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결혼은 그들의 사회적 안전망이었으며, 노동 분업의 기초로 공동체의 제한된 자원을 보존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면서 낙태의 확산, "무과실 이혼", 위자료, 양육비와 같은 폐해를 낳았고, 흑인 가족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약 20년 후, 이 깨진 가정과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 성장하자 흑인의 수감률은 5배로 증가했다. 리버럴 이데올로기에 인질로 잡힌 흑인 가족은 페미니즘에 굴복했다. 파멸이 흑인 공동체를 뒤덮었다.  


대규모의 아버지 부재 현상이 이어졌다. 피고인들은 아버지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페미니즘은 범죄의 물결을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은 더 많은 법이 필요했다. 규제, 경찰, 감옥이 필요했다. 여성들은 이혼한 상태로 아이를 맡길 보모가 자정까지만 일하는 상황에서, 밤길을 걸어도 안전해야 했다. 그러나 페미니즘 법의 홍수는 방탕한 활동을 보호하거나 깨진 가정에서 나온 파탄난 남성들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급진적 재편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법은 남성의 삶의 모든 측면에 깊숙이 침투해야 했다. 남성의 다양한 활동이 범죄화되었다. 그들은 투표를 통해 원하는 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심지어 아이들에 대한 체벌조차 점차 불법화되었다. 여가용 마약 사용은 규제 대상이 되었고, 음주에 대한 새로운 규제도 등장했다. 남성들은 위자료 미납, 양육비 미납, 심지어 아내나 여자친구에게 소리를 질렀다는 이유로도 투옥된다. 죄책의 추정이 절차로 자리 잡으며 교도소가 가득 찼고, 가정에서 비롯되는 공동체의 질서는 파괴된 가정에 의해 가려졌다. 도덕적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강압적인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수많은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다. 학부모회(PTA) 회의, MADD(음주운전 반대 어머니 모임), "여성 권리 옹호자들"이 끝이 없어 보이는 법령의 목록을 만들어냈다.  


한때 가족이나 교회가 다스리던 영역이었던 문제들에 대해 대규모 투옥이 해결책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 헌법 제13조 수정안에 따라, 죄수는 여전히 법적으로 "노예"로 간주된다. 이는 미국에 오늘날 존재하는 노예의 수가 남부 농장 사회의 전성기보다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한 번도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 여성들을 만나본 적이 없다. 분명히 그들은 존재하는 것 같다.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스스로를 자유지상주의자라고 밝힌 사람들 중 약 3분의 1이 여성이라고 한다. 이는 나에게는 놀라운 사실이다. 하지만 보수주의와 제한된 정부에 대한 신념은 점점 "거의 전적으로 백인 남성의 현상"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페미니즘 자체가 강제로 강요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퍼지는 밈이나 이념적, 종교적 광기가 아니라, 국가의 폭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법적 체제였다. 페미니즘은 점점 더 강압적인 단계를 거치며 현대 미국의 교도소 산업 복합체로 정점에 이르렀다. 이 교도소들은 아버지가 없는 남성들로 불균형적으로 가득 차 있다. 나는 그들을 "혁명의 아이들"이라고 부른다.  


그 외의 많은 죄수(노예)들은 도덕적 간섭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법의 광풍 속에서 잡혔다. 이는 탈가부장적 체제에서 여성을 위협할 수 있는 남성 행동들을 대상으로 한 포괄적인 단속이었다.  


물론, 이러한 법들 중 다수는 60년 전에는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당시에는 이러한 법들이 필요 없었던 것인가? 수백만 명의 남성들이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뻔뻔한 범죄자가 된 것인가? 아니면 여기에 어떤 원인이 있었던 것인가?


법은 입법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고들 한다. 이 입법자들은 유권자들에 의해 선출된다. 그런데 유권자들은 주로 여성들이다. 여성들이 직접 결과를 설계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정부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원이 된다. 그렇다면 여성 유권자는 누구인가? 남성보다 더 많은 표를 행사하며 선거를 지배하는 이 유권자는 누구인가? 여성 참정권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자.  


여성들은 투표할 때 무엇을 하는가? 여성들은 모성 본능에 따라 투표하는가? 아니면 투표소에서 독신 여성처럼 행동하며 또래 집단으로부터의 인정 욕구를 따르는가?  


여성들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여성들은 남성보다 오래 살기 때문에 노년층일 가능성이 더 높다. 여성들은 복지 혜택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리고 여성들은 합리적 논거보다 감정적 논거에 따라 판단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점은 여성들이 집단 합의에 더 순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즉, 여성들은 남성보다 또래 압력(peer-pressure)에 더 취약하다.  


남성들은 대개 자신을 개인적인 성취를 통해 정의하려는 경향이 있다. 반면 여성들은 자신을 관계와 네트워크를 통해 정의한다.


여성들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을 때 보수적인 성향으로 투표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그러나 그들이 낮은 세금을 공약하거나 "가치에 강하다"고 여기는 후보에게 투표할 때, 단지 가정을 보호하려는 "모성적" 행동을 보이는 것일까? 투표하는 어머니의 방어적 태도(독신 유권자와는 대조적으로)는 호르몬 상태와 관련이 있을까? 여성의 정치적 행동에는 누구도 쉽게 논의하지 않는 성적·생물학적 요인이 더 깊이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여성의 투표 습관은 배란기일 때 변한다고 밝혀졌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성의 기분은 생리 주기에 따라 극적으로 변화할 수 있으며, 이는 식습관, 수면 패턴, 사회적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유 의지는 항상 나에게 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주제다. 내가 자유 의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생물학이나 무의식으로 사라지는 가장 명확한 경계들을 탐구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성들은 투표소에서 자유 의지가 덜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남성들은 공약에 대한 의견이나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후보를 바꿀 가능성이 훨씬 높다. 반면, 여성들은 전반적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의 정당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정당을 더 지지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미국은 "보통 선거"를 시행하지 않는다. 중범죄자나 정신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은 투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리버럴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도 모든 이가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정신적 상태에 관해서는 어디까지가 허용 범위인가?  


미국 여성의 4분의 1은 우울증, 불안, 히스테리, 양극성 장애, 정신병적 상태와 같은 문제로 정신과 약물을 복용하고 있다. 이 여성들은, 아마도, 투표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불편한 진실(hatefacts)은 여성에게 처음으로 투표권이 부여된 조건을 재검토해야 함을 시사한다. 여성들이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모호하며, 어떤 측정 가능한 통계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여성들이 정치적 권위를 가진 자리에 끼어들게 하기 위한 합리화의 서커스에 빠지게 된다.


이는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다"고 부르는 것은 명예훼손이다. 이를 "사과와 오렌지를 비교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필요한 비유일 텐데, 왜냐하면 남성과 여성이 모두 "사과"라면, 여성 사과는 거의 모든 정신적·신체적 평가에서 남성에게 지속적으로 뒤처지기 때문이다. 남자 대학 운동선수들이 여성 세계 기록을 정기적으로 깨는 것이 현실이다. 여성이 주요 연구나 과학 프로젝트에 주변적으로라도 참여했다는 사실이 뉴스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왜 남성과 여성을 동일한 정치적 지위에 두기 위해 이렇게 극단적인 노력이 이루어졌는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주장은, 평상시에는 어떤 정상적인 개인도 동의하지 않는 주장이다." – 올더스 헉슬리  


잠시 리버럴적 입장을 취해 헉슬리의 주장에서 "인간(men)"을 "사람(people)"으로 대체해 보자. 세계대전의 참혹한 상황은 "평상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서프러제트 운동이 진행된 제1차 세계대전 시기와 "리벳공 로지(Rosie the Riveter)"가 상징이 된 제2차 세계대전 시기는 분명히 평범한 시대가 아니었다. 그것은 끔찍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대였다. 이 시대는 수백만 명의, 주로 유럽 남성들이 전장에서 사라진 시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대량 학살 참호와 처형대,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첫 번째 핵 전쟁의 참상 속에서 벌어진 학살이었다. 이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처럼 여성 평등과 참정권이라는 비범한 현상은 인간 조건 중 가장 일방적이고 왜곡된 상황에서 태어났다. 이는 공포 영화나 연쇄 살인범 소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실제로 집단적인 지옥이었다. 그리고 이 지옥은 이어질 광기의 행위를 위한 출입권이었다.  


'우리의 아들'과 서구 세계 전역에서 희생된 수백만 명의 남성들의 무덤 속에는 우리가 부정당한 가부장제가 묻혀 있다. 현대 페미니스트들은 바로 그 무덤 위에서 춤춘다. 그러나 '우리의 아들'은 여전히 차가운 비석 아래에서 속삭이고 있다.  


여성 정치 우위라는 압도적인 폭정에 대한 해법이 있다. 이를 탐구하는 것은 전율을 일으키며, 실천하는 것은 더욱 짜릿하다. 이 메시지는 전통주의의 격언 속에 숨겨져 있으며, 모든 남성의 깊은 기억 속에, 무의식의 야성을 타고 전해진다.  


그것은 바로 가부장제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이다.  


다음 이야기: 가부장 해방 이론에서 계속


원문링크:https://archive.md/LOfY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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