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회고록 1권 서문(3-1)

 전두환 회고록 1권


서문(3-1)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살아온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나의 삶이 평탄치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파란만장했다’거나, ‘영욕이 점철됐다’거나 하는 말들은 진부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나의 짧은 어휘력으로는 사실 이보다 더 적당한 말도 찾기 어렵다.


격동의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나에 앞섰던 전임 대통령 네 분 –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의 정치적 역정 또한 굴곡이 많기로는 나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네 분 모두 법에 정해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을 사임한 뒤 해외로 망명 갔다가 생애를 마치신 분도 있고, 임기 중 측근에게 시해를 당해 세상을 떠나신 분도 있다.


그분들 개인으로서는 불운이라고도 하겠지만, 임기를 마칠 수 없었다는 것은 그 이유가 무었이었던 간에 우리의 정치사가 그만큼 순찬치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내 뒤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등 여섯 분의 대통령이 나왔는데, 한 분은 재임 중 국회의 탄핵소추를 받은 일이 있었고, 다른 한 분은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탄핵소추를 인용함으로써 임기를 1년 가까이 남겨놓은 채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어쨌든 이제,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면 하루도 더 머물지 않고 청와대를 떠나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권력순환의 순리가 전통으로 뿌리를 내린 것이다.


내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소정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고 정부를 평화적으로 후임에게 이양한 것은 우리의 현대 정치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나는, 나에게 그러한 기회와 영광을 안겨 준 국민과 역사 앞에 감사한다.


나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능력이 모자라 하지 못한 일들은 있었지만 해야 할 일을 게을러서 하지 않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다는 의지와 충정만큼은 부족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주어진 일, 시키는 일만 하지는 않았다. 어느 자리에 가든, 없는 일도 찾아서 하고 시키지 않은 일도 만들어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그러다 보니 남이 이루지 못한 성과를 내기도 하고 업적을 쌓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리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1979년 가을부터 1980년 여름에 이르는 시기에 나의 일하는 방식이 무사안일이었고, 나의 치세가 명철보신에 투철했었다면 나의 나머지 반생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고, 나라의 모습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0.26사건의 수사를 맡게 된 때로부터 대통령이 되기까지 내가 겪었던 일들의 곡절을 명쾌히 설명한다는 것은 나로서도 어려운 일이다.


어디서 어디까지나가 나 개인의 자유의지와 결단의 결과이고, 또 어디서 어디까지가 나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 상황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가늠하기 어렵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는 국가적 위기가 초래될 수 있는 불안 요인이 가장 많았던 시기였다. 1979년 봄 나는 국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나 자신은 물론, 그때까지의 군 인사의 관례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이례적인 인사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처럼 나에게 보안사령관의 직책을 맡겨놓으시고 반 년쯤 지났을 무렵 홀연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보안사령관에 임명된 일은 그로부터 7개월 뒤에 발생한 10.26사건 발생과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그러나 대통령의 돌연한 죽음은 비상계엄령을 불러왔고, 비상계엄령 하에서 대통령 시해 사건을 수사할 합동수사본부장은 보안사령관이 맡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대통령 시해에 얽힌 진실을 파헤칠 임무를 부여받았고, 그 일은 나 개인의 운명은 물론 굮가의 운명과도 직결되는 일이었다.


나는 국가의 운명을 마주해야 했다. 역사의 진행을 시류와 대세에 맡겨둘 수만은 없었다.


나는 청년 시절 조국수호를 위해 군문에 뛰어들던 때의 초심을 되새겼다. 대의를 살펴 판단했고 내 삶의 신조가 가리키는 대로 결심했고, 내가 일하던 방식대로 행동했다.


12.12였다. 그 일은 나의 주저없는 선택이었고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


1970년대가 저물고 1980년대의 새 아침이 밝아왔으나, 시국에 드리운 어둠은 걷히지 않았다.


봄이 되면서 사북사태, 학생들의 폭력시위, 재야세력의 민중혁명 책동, 북한의 긴박한 침략 위협으로 국가의 안전과 국민생활의 안정이 위태롭게 되었다.


노동투쟁의 현장과 대학가, 거리로 쏟아져나온 군중들에게서는 국가 안위에 대한 고뇌가 보이지 않았고, 미래를 향한 담론도 형성되지 않고 있었다.


정치인들은 그들만의 정쟁에 매몰되어 있었고, 사회를 바르게 이끌어줘야 할 지도급 인사들도 시류에 편승하기만 했다.


불안과 혼란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나에게 무거운 짐이 하나 더 얹혀졌다. 보안사령관이 내가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하게 된 것이다.


국가적 위기의 원인을 규명하고, 나라 안팎에서 밀려오는 격랑을 가라앉혀야 하는 책무가 오롯이 나의 일이 되었다. 국내외의 체제 도전에 혼신의 힘을 다해 맞서야 했다.


1980년 봄 나라의 형편은, 대통령이 되려고 치열하게 투쟁해온 김대중 씨도 대통령 자리를 마다하고 싶다고 할 만큼 어렵고 어지러웠다.


김대중 씨는 그해 3월 26일 YWCA 초청연설에서 지지자들을 앞에 놓고 “여러분에게 솔직히 얘기한다면, 나는 다음 정권 그렇게 대단한 매력이 없습니다. 왜 첫째, 경제만 보더라도 박정희 씨가 아주 망쳐놓았습니다. 이것을 맡아놓고 수습한다는 것은 다 파먹은 김칫독에다 머리를 집어넣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4년 동안 뒤치다꺼리나 하고 나면, 그것도 내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 뒤치다꺼리를 하고 나면 4년은 끝나는 것입니다... 누가 한 4년쯤 해서 실컷 고생하고 난 뒤 그때즘 가서 내가 맡는 게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4년쯤 실컷 고생할 그 누구’가 바로 나였던 셈이다.


김대중 씨의 그 연설이 있은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은 5월 16일 밤, 원유 확보를 위해 산유국 순방에 나섰던 최규하 대통령은 국내의 긴박한 상황을 보고받고 일정을 앞당겨 귀국한 직후 “이러다가는 이 나라를 제대로 후손에게 물려줄 수나 있으려나...”라고 한탄했던 것이다. 나는 최규하 대통령 정부의 붕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5.17 시국수습방안을 건의드렸다.


그 일은 대통령의 정보참모로서의 내 직무 수행이었다. 최 대통령은 그 다음날 나의 건의안을 재가했다. ‘나라를 제대로 후손에게 물려주기’위해서는 그렇게 시국을 수습해나갈 수 밖에 없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파국적 국가 위기가 수습한 뒤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길 가운데 하나는 무거운 짐을 벗어놓고 모든 공직을 떠나는 일이었다.


그 한 가지 선택은 아마도 ‘공을 이루고 나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리’라고 한 노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랬다면 나는 대통령이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없었겠지만, 임기를 마친 뒤 ‘내란수괴’라는 주홍글씨를 달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아직도 12.12와 5.17이 내 사적인 권력 추구의 출발점이라고 단정되고 있겠지만, 나를 역사의 전면에 끌어낸 것은 시대적 상황이었다.


혼란과 갈등의 소용돌이는 누군가의 헌신과 희생을 요구한다. 비상한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비상한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순리에 따른 절차에 얽매여서, 사후의 책임 추궁과 비판을 두려워해서, 때를 놓치면 자칫 수습할 수 없는 재앙을 맞게 된다.


비상한 상황을 돌파하는 데 선두에 서는 사람은, 그 일이 성공했을 때 지도자로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치명적 상처를 입기도 한다.


역사는 그렇게 사람을 불러내 사역하고는, 또 그렇게 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역사적 인물의 등장은 ‘시대적 상황의 산물’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역사가 사용한 하나의 도구였는지도 모른다.


최규하 대통령은 10.26 직후 당신이 대통령을 맡게 된 상황과 관련해 “모든 게 숙명...하고 싶어도 그렇게 되지 않으며 하기 싫어도, 버티어도 안 할 수 없고... 역사 속에서 개인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무엇이 있는 것이지요... 그 당시 상황이 어쩌면 모두 지나가는 역사의 흐름인데... 라고”라고 측근에게 술회했다고 한다. (『월간조선』1993년 6월호)


1980년 7월 31일, 그해 봄 나라를 집어삼킬 듯 사납게 타오르던 불길이 잡힌 뒤 대통령직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나에게 뒤를 이어달라고 했을 때 최 대통령은 내가, 바로 9개월 전 당신이 가졌던 그런 심경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을까.


‘국가’, ‘역사’, ‘숙명’이런 말들이 내 머릿속의 다른 모든 상념들을 압도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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