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가쿠에이와 요시다 시게루보다도 훌륭했던 전후 최고의 일본 총리 이케다 하야토
가쿠에이도 요시다 시게루도 아닌 '전후 최고의 총리'는 누구인가
일본의 미래를 내다본 12인 (4)
2020년 4월 15일 (수) 구라야마 미츠루
미국을 방문하여 포토맥강을 크루즈하는 요트 위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나란히 서 있는 일본의 이케다 하야토 총리 (1961년 6월 21일, 사진: AP/아프로)
일본의 미래를 내다본 12인 (제4회) '이케다 하야토'
(구라야마 미츠루: 헌정사 연구자)
전후 최고의 총리라 하면 오랫동안 요시다 시게루가 거론되었다. 지금은 왜인지 다나카 가쿠에이가 그 자리에 있다.
이케다 하야토에 대해선 "요시다와 가쿠에이 사이의 인물" 정도의 인상에 그치지 않는가. 자칫하면 "진지한 개헌 논의를 봉인한 전후 민주주의의 완성자" 혹은 "일본인을 경제 동물로 만든 원흉"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이는 지극히 부당한 평가다.
내가 보기에, 요시다는 "이케다의 전초"에 불과하며, 가쿠에이를 칭찬하는 것은 일본인의 지적 퇴화가 극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전후 최고의 총리는 틀림없이 이케다 하야토이며, 현대 일본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알아야 할 인물 또한 이케다 하야토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평가하는가. 그 이유를 이케다의 생애를 돌아보며 설명하고자 한다.
공직 추방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장성 사무차관으로
이케다는 메이지 32년(1899년)에 태어났다. 그는 19세기 출생자로서 마지막 총리 대장이 되었다. 그의 생가는 히로시마에 위치한 양조장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이케다의 인생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육군 유년학교, 제1고등학교, 도쿄 제국대학 모든 입시에 실패하였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입시에 모두 실패한 셈이다. 교토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에 취직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엘리트 코스를 걸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는 또 다른 좌절의 시작이었다. 대장성은 전쟁 전부터 도쿄 대학 법학부 출신만 모이는 곳이었다. 교토 대학을 졸업한 이케다는 출세 경쟁에서조차 상대방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20년 동안 지방 세무서를 돌아다니며 관료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는 현장의 '비정규' 속에 들어가 일을 배웠다. 4년에 걸친 병을 앓아 출세는 더욱 늦어졌으나, 이 또한 새옹지마였다. 이러한 고생이 결국 보상받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계기는 전쟁이었다.
쇼와 16년(1941년), 이케다는 본성(本省) 주세국 국세과장으로 소환된다. 전시 체제에서 전비 마련이 최우선 과제가 되자, 세금 전문가인 이케다의 지식과 경험이 필요했던 것이다. 쇼와 20년에는 교토 대학 졸업자로서 최초로 주세국장에 임명되어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필사적으로 눈앞의 일을 처리하던 이케다도 패전 직전에는 국가와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부하이자 평생의 심복이 될 마에오 시게사부로와 함께 "미군이 상륙하면 무기를 들고 싸울 것인가…"라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패전 후 일본의 운명은 미국의 손에 쥐어졌다. 점령 정책은 가혹했고, 공직 추방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전시 하의 지도층은 모두 공직에서 추방되었으며, 대장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이는 이케다에게는 오히려 행운이었다. 그는 관료의 최고 위치인 사무차관에 올랐으며, 이는 교토 대학 출신으로서는 최초의 대장성 사무차관이었다. 평시에는 불가능했을 인사였다.
그가 모시던 장관은 이시바시 탄잔이었다. 이시바시는 전전과 전중에 강직한 언론인·경제학자로 알려져 군인과 관료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옳은 말을 계속해 온 인물이었다. 이케다는 이 인물에게서 자유주의 경제의 진수를 배우게 된다. 이시바시는 점령군에도 굴하지 않고 경제 이론을 무기로 철저하게 미군 관계자들을 논파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GHQ는 결국 이시바시를 공직에서 추방하였다.
총리 요시다 시게루는 안정된 정권을 구축하지 못하고 단명으로 퇴임했으며, 이후에는 가타야마 데츠, 아시다 히토시의 불안정한 연립 내각이 이어졌다.
일본 해체를 노리는 점령군의 손길은 대장성에도 예외가 아니었고, 이케다는 조직 방어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일본 경제의 파괴도 불사하는 GHQ를 상대하면서 이케다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가까스로 생존해 나갔다. 비유하자면 "사장 자리에 오르자마자 회사 전체가 악질 소유주에게 인수된 상황"이라 할 수 있겠다.
점령군의 무리한 요구와 싸우며 일본 경제를 지탱하다
이케다가 퇴관하기 직전, 요시다 시게루가 정권에 복귀한다. 요시다는 이케다를 주목하여 그를 중의원 선거에 출마시켰고, 그는 1위로 당선된다. 참고로 이케다는 사망할 때까지 7회 연속으로 1위 당선을 이어갔다.
이케다는 첫 당선 후 곧바로 대장대신으로 발탁되었다. 총리 요시다는 자신의 정치 과제를 일본의 독립 회복으로 정하고 외무대신을 겸임하였다. 그는 내정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여당인 자유당 통제를 위해 대의원들에게 장관 자리를 나눠주며 '장관병 환자'를 대량으로 양산했지만, 3년 반 동안 외무대신 겸임과 이케다의 대장대신 자리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패전으로 폐허가 된 일본에서, 이케다는 의식주의 확보에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대장성 사무차관에서 중의원 선거를 거쳐 곧바로 대장대신에 직행한 셈이다. 그러나 '악질 소유주'인 점령군의 존재는 여전했다. 이케다는 일본인에게 의식주를 제공하기 위해 정부가 빚을 내서라도 재정 지출을 하려 했으나, 점령군은 '균형 재정'을 명령했다. 무리한 요구를 견디며 이미 붕괴한 일본 경제를 지탱했다. 그는 인내하면서도 '1달러 360엔' 환율만큼은 확보했다. 원래는 '1달러 300엔'이 적정 환율이었지만, '엔은 360도다'라는 의미 불명의 말로 '가난한 일본에 60엔 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라며 미국을 설득해 냈다. 이는 마치 악질 상사의 무리한 요구를 견디면서 부하가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말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요시다는 쇼와 26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통해 일본의 독립을 회복했다. 이 회의를 비롯해 이케다는 여러 중요한 외교 장면에 함께했다. 요시다는 분명히 이케다를 자신의 후계자로 키우려 했다. 속설로는 '요시다 학교의 쌍벽은 이케다 하야토와 사토 에이사쿠'라고도 하지만, 이는 후대의 창작이다. 요시다는 대부분의 경우 이케다를 더 높은 위치에 두었다.
요시다가 퇴진한 후의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는 야당, 그것도 반주류파로 밀려났다. 재기에 성공한 이시바시 탄잔 내각에서는 주류파였으나, 총리 본인이 두 달 만에 병으로 퇴진하면서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서는 다시 반주류파가 되었다. 그는 고난의 시기를 맞이했고, 반주류로서의 기간은 5년에 이르렀다. 필사적으로 힘을 쌓아갔다.
정치가와 브레인의 이상적인 관계를 구현하다
기시 내각이 파벌 갈등으로 흔들리다 퇴진에 이른 쇼와 35년, 유명한 안보 투쟁으로 세상이 소란스러운 가운데, 이케다는 정권을 맡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측근들은 모두 "굳이 이런 시기에 나설 필요가 없다"고 만류했지만, 이케다는 듣지 않았다.
"아침에, 선인이 와서 말하더군."
어리석은 역사학자들은 이 선인이 누구인지를 맞추려 한다. 예를 들어, 우익 거물인 고다마 요시오가 아니겠느냐는 식으로.
이케다는 젊은 시절부터 살아 있는 학문을 좋아했다. 지방 세무서를 돌아다니며 현장의 비정규직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며 세금 공부를 했던 때부터였다. 정치인이 된 후에도 관료든 학자든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사람은 저택으로 초대해 '술의 풀코스'를 아침까지 함께하며 대등하게 토론을 나누었다.
그중에서도 이케다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인물은 전 대장성 관료이자 경제학자인 시모무라 오사무였다. 이 천재는 폐허가 된 일본을 고도 경제성장으로 이끌 비책을 구상하고 있었다. 치밀한 수식과 방대한 사실 수집에 기반한 그의 정책을 이케다는 필사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물론, 천재 시모무라의 말을 이케다가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시모무라의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은 정치인 이케다 하야토뿐이었다. 마치 오에 히로모토가 고안한, 세계사 어디에도 없었던 '막부'를 그 일부분이나마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이해하고 실현해낸 것처럼, 이케다와 시모무라의 관계는 정치가와 브레인의 이상적인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이케다의 측근 중 누구도 이케다만큼 공부하지 않았다. 이케다는 오랜 학습을 통해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것을 측근들에게 말해도 그들이 이해할 리 없었다.
"아침에, 선인이 와서 말해주더군."
그는 미래를 볼 수 있었고, 그것을 실현할 책임을 다하려 했다. 이는 모든 것을 감당할 각오를 가진 최고위층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케다가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측근들은 항상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따르게 되었다. 따르게 하는 매력과 설득력이야말로 이케다가 정치인으로서 가진 능력이었다.
경제학의 기본에 충실했던 소득 배증 계획
쇼와 35년 7월, 이케다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하여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의 주요 정책은 '소득 배증'이었다. "국민 여러분이 성실히 일하시면, 10년 안에 월급을 두 배로 만들겠습니다!"라고 공약했다. 처음에는 많은 이들이 비웃었으나, 이케다는 진지하게 호소했다. 결코 훌륭한 연설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는 대중 속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이케다의 월급 두 배 정책은 치밀한 이론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원리는 간단했고, 경제학의 기본에 충실했다.
대전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 1달러 360엔의 고정환율제이다. 60엔의 핸디캡을 받아 수출에 유리했다. 당시에는 고정환율제였기 때문에, 미국이 달러를 발행하면 '1달러=360엔'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도 엔화를 발행하게 된다. 자동적인 리플레이션 정책이었다. 점령기 동안 모든 불합리함을 견디며 '1달러=360엔'을 인정받은 의미가 살아난 것이다. 미국 시장은 일본 제품으로 점령된다.
둘째, 정부가 일본은행이 공정 금리를 올리지 않도록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했다. 금리가 오르지 않는다는 안정감은 인플레이션 기대를 일으켰다. 쉽게 말해, 금리가 낮아 기업들이 자금을 쉽게 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순환 구조를 확립했다.
(1) 기업이 돈을 빌려 투자한다.
↓ 적극적으로 투자하므로 상품의 품질이 향상된다.
(2) 소비자가 좋은 상품을 구매하므로 기업이 수익을 낸다.
↓ 기업이 수익을 내면서 여유가 생긴다.
↓ 급여가 오른다.
↓ 개인에게도 여유가 생긴다.
(3) 저축을 한다.
↓ 안정감이 생기고, 인생 설계를 할 수 있다.
(4) 저축이 가능해지면서 안심하고 물건을 산다.
↓ 소비가 증가한다.
(1)로 돌아간다.
경제 성장률이 7%에 미치지 못하면 소득 배증은 불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최고 13%에 도달했다. 사람들의 생활은 급속히 풍요로워졌다.
정권 운영은 안정적이고, 의석률도 사상 최고
전임 기시 내각 시기에는 안보 투쟁의 폭풍이 휘몰아쳐, 일시적으로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자위대의 출동까지 검토될 정도였다. 암살 사건까지 발생하며 불온한 시대였다. 그러나 이케다는 어지러운 민심을 정치에서 경제로 돌려놓았다. "일하면, 급여가 오른다!" 이케다 시대에는 주목할 만한 정치적 투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 상황에 치를 떤 것은 소련이었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 세계 패권을 다투며, 일본에서도 혁명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안보 투쟁 역시 그 일환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시위가 아닌 직장으로 향하게 되면, 혁명은커녕 폭동조차 일어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케다의 소득 배증 정책은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니라, 하나의 안보 정책이었다.
이케다 시대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로 세계 대전, 미소 간 핵 전쟁의 위기마저 있었다. 이때 이케다는 즉시 미국을 지지했다. 대통령이 민주당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좋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대만, 한국, 동남아시아(특히 태국), 호주, 프랑스 등 자유주의 진영 국가들과의 우호 관계도 심화되었다.
정권 운영은 안정적이었고, 자민당의 의석률은 단독으로 64%에 달했다. 이는 사상 최고 의석률이었다. 헌법 개정을 봉인하면서도 헌법 해석은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이케다 내각 시절, 내각 법제국의 헌법 해석은 "핵무장도 집단적 자위권 행사도 합헌"이었다. 자위대에 사상 최고 예산이 배정된 것도 이케다 시대였다.
은퇴 후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
이케다는 경제 전망이 어긋날 때마다 "공약 위반"이라며 언론의 비난을 받았지만, 최고 권력자가 언론에 비난받는 것은 건강한 민주주의가 기능하고 있다는 증거라며 개의치 않았다. 진정한 의미의 공약 위반은 "10년 안에 소득을 두 배로"라는 약속이었다. 이 약속은 7년 만에 달성되었다.
그러나 신은 이케다에게 긴 생명을 허락하지 않았다. 쇼와 39년, 도쿄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그는 은퇴했다. 암에 걸린 상태였다. 7년째에 소득 배증이 달성되었을 때, 이케다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그는 쇼와 40년에 세상을 떠났다.
생전의 이케다는 교육과 헌법 개정을 하고 싶어 했던 듯하다. 은퇴 후에는 비서 이토 마사야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청년 교육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케다는 "나는 자위대에 전차도 대포도 군함도 비행기도 갖추게 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국민이 스스로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만약 국민이 애국심을 가진다면, 헌법도 자연스럽게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총리직을 그만두면 그런 교육을 하고 싶었다.
이토는 이케다의 업적을 세 가지로 꼽는다. 첫째는 말할 것도 없이 고도 경제 성장을 통해 일본을 세계 경제 대국으로 끌어올린 것. 둘째는 미국 일변도가 아닌 세계적 정책을 가진 것. 셋째는 안보 투쟁 후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대화를 통한 의회 정치의 기반을 지킨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케다의 공적이 있다. 일본인 누구나 나아가야 할 길을 잃었을 때, 그들에게 희망을 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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