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 Grant, 대성당은 민주주의이다.

 대성당은 민주주의이다.


데이비드 그랜트(David Grant) / 2015년 7월 27일


좌파는 대성당(the Cathedral), 즉 여론을 통제하는 엘리트 기구와 동시에 민주주의, 즉 비엘리트가 주요 결정에 실질적인 발언권을 가진다고 여겨지는 체제와 연관되어 있다. 좌파들이 투표 발의안이나 대중적인 입법 제안, 즉 대중의 의사를 진정으로 표현한 움직임이 좌파의 목표를 위협할 때 얼마나 빠르게 이를 비난하기 시작하는지 지켜보는 것은 꽤 흥미롭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실 어떤 위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성당은 곧 민주주의이며, 포퓰리즘은 실제로 반(反)민주적이다. 민주주의는 항상 엘리트들이 비엘리트들을 통치하기 위한 도구였으며, 대중의 지배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첫 번째 민주정이었던 아테네를 돌아보자. 앞서 논의했듯이,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처음에는 귀족 공화정으로 통치되었다. 이러한 공화정은 "좋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자들"을 의미하는 유파트리다이(Eupatridae)라 불리는 몇몇 귀족 가문에 의해 지배되었다. 평민들은 부채와 사유 재산을 보호하는 법, 그리고 귀족들의 관직 장악을 통해 유파트리다이에 의해 억압되었다. 그러나 많은 평민들은 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에게 개혁을 요구할 수 있었다. 유파트리다이는 점진적이거나 전혀 개혁하지 않기를 선호했지만, 교활하고 카리스마 있는 귀족이 반기를 들면 대중을 결집시켜 스스로를 독재자로 세울 수 있었다.


아테네인들은 귀족들의 단결과 부분적인 개혁을 결합하여 오랫동안 독재를 피할 수 있었다. 기원전 632년, 실론이라는 인물이 독재를 장악하려 했으나 귀족들과 일반 대중에 의해 패배했다. 10년 후, 드라콘이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성문법을 제정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드라콘은 무장을 제공할 수 있는 모든 토지 소유자에게 공식적인 시민권을 부여하고, 평민과 귀족 모두에게 열려 있는 선출된 의회를 설립했다. 또한, 드라콘은 엄격하다고 여겨졌던 형벌 규정을 포함한 성문법을 제정했다. 드라콘의 많은 작업은 이전 공화정의 관행을 문서화하고 공식화하는 것에 불과했으며, 실질적으로 과두정 헌법을 확립한 셈이었다.


드라콘의 법은 한 세대 동안 평민들을 만족시켰지만, 기원전 594년에 평민들은 저명한 시인이자 성공적인 장군인 솔론을 집정관으로 선출하고 추가 개혁을 맡겼다. 솔론은 평민들의 요구 대부분을 수용했으나, 토지 재분배는 시행하지 않았다. 솔론의 주요 혁신은 재산에 따라 시민 계급을 분류하고, 유파트리다이와 평민 간의 법적 구분을 폐지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농업 노동자와 도시 장인들을 포함하는 무산 노동 계층에도 참정권을 확대했다. 솔론의 헌법은 이후 클레이스테네스의 헌법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민주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당시에는 그렇게 불리지 않았다.


개혁은 다시 약 한 세대 동안 만족스러운 상태를 유지했다. 이 시기 아테네 정치의 분열은 계급이 아닌 지리적 구분을 따라 이루어졌다. 도시 주민들은 메가클레스가 이끌었고, 농민들은 아티카 평원의 리쿠르구스가 이끌었다. 솔론의 친척이자 저명한 장군인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산악 지역 주민들을 모아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곧 축출되었지만, 메가클레스의 딸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그의 지지를 얻어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와 메가클레스 간의 갈등으로 인해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또다시 도망쳐야 했다. 이후 그는 기회를 엿보며 병력을 모았고, 기원전 546년에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 군대를 격파하고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권력을 되찾았다.


이 단순한 정치적 역사의 이면에는 가문과 후원 네트워크가 얽혀 있었다. 실론은 메가라의 참주 테아그네스의 사위였으며, 그의 패배 이유 중 하나는 아테네인들이 메가라인을 극도로 증오했고, 메가라의 지배를 받는 것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자신의 가족 연줄을 통해 산악 지역 주민들을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였으며,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은 기원전 490년 아테네인들이 페르시아를 물리쳐 그들의 복귀 시도를 좌절시킬 때까지 아테네 내에서 지지 세력을 유지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 이후 가장 강력한 두 가문은 알크마이오니다이와 필라이다이였다.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거래했던 메가클레스는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 출신으로, 실론의 반란을 진압했던 집정관의 이름을 딴 인물이었다.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은 극도로 부유하고 평판이 좋았지만, 다른 귀족들과 경쟁할 때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메가클레스가 실론의 군대와 싸우던 중, 아테나 신전에 피신한 사람들에게 무사히 떠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들을 자신의 권력 아래 두자마자 처형해 버렸다. 이 신성모독 행위로 인해 메가클레스와 그의 가문은 더럽혀졌고, 즉시 추방당했다.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은 돌아오는 것을 허락받았으나, 반복되는 추방의 위협은 여전히 존재했다. 이는 메가클레스와 페이시스트라토스 사이의 갈등 원인이 되었다. 헤로도토스가 점잖게 표현했듯이,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의 조상 저주를 의식하여 메가클레스의 딸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관례에 따르지 않은 방식으로 그녀와 잠자리를 했다." 이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권력을 유지하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자녀까지 저주로 더럽혀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현명한 선택이었다.


메가클레스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은 대체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독재 체제에 순응했다. 그러나 514년 히파르코스의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히피아스에 의해 추방되었다.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은 아테네로 돌아가기 위해 델포이의 사제들에게 뇌물을 주어 스파르타가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을 전복하도록 유도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지도 아래,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은 이사고라스가 이끄는 다른 귀족 가문들과 권력을 두고 경쟁했다. 이사고라스는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아 과두정을 세우고자 했으나, 클레이스테네스는 민중에게 호소하여 최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독재가 유행에서 벗어난 상황에서 그는 민주주의를 고안했다. 이에 맞서 이사고라스는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의 조상 저주를 내세워 이를 저지하려 했으며, 스파르타도 클레이스테네스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아테네 민중은 클레이스테네스의 아이디어에 매료되어 저항했고, 결국 스파르타는 패배하고, 이사고라스는 추방되었으며,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의 적들은 학살당했다.


클레이스테네스가 아테네 헌법에 가한 주요 개혁은 지역 간의 경쟁을 없애기 위해 아테네의 10개 부족을 재구성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추방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는 모든 저명한 인물들을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과 마찬가지로 추방 위협에 놓이게 했다. 광범위한 참정권과 추첨으로 선출된 여러 관직 제도는 경쟁 귀족 가문들이 권력을 축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은 자신의 후원 네트워크에 의존할 수 있었지만, 다른 귀족들은 야심찬 평민들과 경쟁해야 했다. 이 평민들은 자신들을 민중의 친구로 내세운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의 동맹자가 되었다. 이로써 민주주의는 한 사람의 독재가 아니라, 한 가문의 독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은 약 15년 동안 아테네를 독점적으로 지배했으나, 필라이다이 가문의 지도자인 밀티아데스가 아테네에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밀티아데스의 삼촌(이름 또한 밀티아데스)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후원을 받아 트라키아 케르소네소스의 참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그의 삼촌과 형제가 사망하자 이 밀티아데스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는 페르시아의 지배하에서 참주로 계속 통치했으며, 다리우스의 스키타이 원정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기원전 499년에 이오니아 반란에 가담했고, 다리우스가 통제를 재확립하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테네로 왔지만, 외부인에 가까운 존재이자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과 연관된 전 참주라는 점에서 전망이 좋지 않았다.


밀티아데스가 자신을 추천할 만한 자격으로 가져온 것은 재산, 광범위한 군사 경험, 그리고 페르시아에 대한 강렬한 반대였다.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은 아테네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이오니아 반란을 지지했으며, 이는 페르시아를 분노하게 했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는 아테네에 대한 징벌적 원정을 시작했고, 히피아스를 복위시키려는 부수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히피아스는 페르시아를 동행하며 자문 역할을 했다. 밀티아데스는 그의 자질 덕분에 장군직을 맡게 되었고, 페르시아에 대한 그의 친숙함은 마라톤 전투의 두 번째 승리를 이끄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이후 페르시아가 점령한 에게해 섬들에 대한 원정을 지휘했으나, 감염된 상처로 인해 사망했다.


밀티아데스의 짧은 아테네 체류는 도시의 권력 균형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민주주의가 설립된 이후 처음으로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에 대한 심각한 반대가 나타났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이미 사망했으며, 새 지도자인 또 다른 메가클레스는 페르시아와의 공모 혐의로 비난받아 큰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는 기원전 480년대 동안 누구도 최고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게 하였고, 외부 세력이 이를 차지할 기회를 제공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후계자인 아리스타이데스는 귀족파를 형성했고, 평민 출신의 천재 테미스토클레스는 민주파를 결성했다. 이 두 정당은 그 후 한 세기 동안 아테네 정치의 두 축을 이루었다. 민주파가 대체로 우위를 점했는데, 테미스토클레스는 제2차 페르시아 전쟁 직전에 아리스타이데스를 추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귀족파도 때때로 힘을 발휘했다.


이 두 정당은 초기에는 이념적으로 차별되지 않았다. 대신 서로 다른 경제적, 그리고 클레이스테네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던 지역적 이해관계를 대표했다. 귀족파는 주로 귀족 농민들로 구성되었고, 민주파는 도시 지역에서 지지 기반을 얻었다. 이후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뒤에야 두 정당의 차이는 뚜렷하게 구체화되었다.


페르시아와 싸우기 위해 두 정당은 차이를 잠시 접어두었으며,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아리스타이데스는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아테네 중장보병을 지휘했다. 페르시아가 퇴각한 후, 두 정당은 델로스 동맹의 창설을 지지했다. 사실, 아리스타이데스가 회원 도시들이 배 대신 돈을 기부하도록 허용하자고 제안했으며, 이를 통해 아테네는 막대한 해군을 건설하고 동맹국들이 방어력을 포기하도록 설득했다. 동맹국들이 아테네의 동맹 지배에 반발하자, 아테네는 과거의 동맹국들에 강제력을 행사했다. 귀족파와 민주파 모두 아테네 제국주의에 공모했다.


그러나 민주파는 아테네 약탈 이후 심각한 좌절을 겪었다. 이 시기에 공식적인 정부 기능은 사실상 멈추었고, 이를 틈타 귀족파가 후원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부와 개인적 관계를 이용해, 정의를 구하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방식으로 활동했으며, 이때 아테네 정부는 완전히 무력했다. 귀족파 운동의 중심은 과거 집정관들로 구성되어 살인 사건을 심리하던 고대 기관인 아레오파고스 법정이었다.


귀족파는 또한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의 성년기에 큰 이익을 얻었다. 키몬은 기원전 470년대와 460년대 대부분 동안 델로스 동맹군의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그는 특히 부와 군사적 역량이라는 점에서 아버지와 유사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가장 큰 승리는 기원전 466년 유리메돈 강에서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그는 델로스 함대를 이끌고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했으며, 이어 상륙 작전을 감행해 페르시아 육군을 격퇴했다. 곧이어 델로스 동맹과 페르시아 간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키몬은 또한 에게해 전역에 걸쳐 개인적, 가문적 관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오니아에 연락망을 두고 있었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트라키아의 왕이었다. 이러한 연줄은 키몬이 델로스 동맹을 지나치게 강압적이지 않게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새로운 제국 행정부를 창설하기보다는 기존 정부를 통해 자신의 친구들이 일하도록 할 수 있었다.


키몬은 그의 승리로 인해 엄청난 명성을 얻었으며, 아레오파고스의 후원 네트워크와 결합된 그의 영향력은 아테네가 이름만 민주주의일 뿐 실질적으로는 과두정 상태였음을 의미했다. 이는 원래 기대했던 방향과는 다른 결과였다.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은 필라이다이 가문이 도시를 지배하는 동안 한발 물러나야 했지만, 민주파를 통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키몬이 약점을 드러내자, 그들은 행동에 나섰다.


기원전 464년, 라코니아에서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여 스파르타의 많은 지역이 피해를 입었고, 이로 인해 메세니아의 헤일로타이(농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스파르타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동맹국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며, 키몬의 제안으로 아테네는 지원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아테네인들이 추가적인 반란을 조장할 것을 우려하여 키몬을 돌려보냈다.


이 시기 민주파의 지도자였던 에피알테스는 키몬의 체면 손실로 인해 생긴 기회를 붙잡았다. 에피알테스의 첫 번째 목표는 아레오파고스였다. 그는 아레오파고스 구성원들을 기소하고 그들의 권한 대부분을 박탈했다. 이후 그는 키몬을 추방하려 했고, 이 시도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에피알테스는 추가적인 개혁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당했다.


민주파의 지도권은 페리클레스가 이어받아 에피알테스의 개혁을 마무리했다. 페리클레스는 관직에 대한 재산 요건을 낮추고, 공직자들에게 보수를 지급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그는 또한 시민권을 두 명의 아테네인 부모를 둔 남성으로 제한함으로써 동맹국 출신 아내를 둔 귀족파 인물들의 자녀를 배제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귀족파의 후원 네트워크를 약화시키고, 기원전 411년까지 민주파의 우위를 확고히 다지는 데 기여했다.


외교 정책 면에서 민주파의 집권은 재앙에 가까웠다. 키몬이 스파르타와의 우호적 관계를 지지했던 반면, 에피알테스는 두 국가가 본질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페리클레스와 민주파는 에피알테스의 사상을 따르며 스파르타를 자극하는 여러 조치를 취했다. 아테네는 코린토스에 맞서 메가라와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킨 헤일로타이(농노)를 지원했으며, 스파르타의 오랜 적수였던 아르고스와도 연합했다. 그 결과 곧바로 제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다.


민주파는 아테네가 그리스의 더 넓은 지역을 지배할 힘이 있다고 믿었지만, 귀족파는 델로스 동맹이 아테네의 자연적 한계를 나타내며, 소규모 확장은 가능하더라도 대규모 확장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스파르타와의 이 첫 번째 엎치락뒤치락하는 갈등은 귀족파의 주장이 옳음을 증명했으며, 이후 아테네의 정책은 점차 완화되었다. 아테네가 다시 450년대와 440년대처럼 공격적으로 변한 것은 기원전 410년대 알키비아데스의 부상 이후였다.


이 한 영역에서 귀족파의 주장이 정당성을 인정받았지만, 그들은 민주파에 완전히 종속된 상태에 놓였다. 키몬은 추방에서 돌아와 스파르타와 휴전을 협상했으나 키프로스 원정을 이끌다 사망했다. 기원전 442년, 키몬의 후계자인 투키디데스(역사가와의 관계는 알려지지 않음) 또한 추방되면서 귀족파의 정치적 권력은 사실상 끝이 났다. 귀족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니키아스는 귀족파와 연합을 형성했고, 기원전 411년 잠시 동안 과두정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삼십인 정권도 귀족파에 속했다. 그러나 민주파가 주도권을 쥐었다. 최종적인 타격은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 처형으로 가해졌다. 그 이후로 귀족파는 사실상 정치적으로 소멸되었다.


아테네의 정치를 통해 민주주의에 대해 몇 가지 교훈을 도출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이론이 아닌 실제 관행에 기반한 민주주의의 정의이다. 즉, 강력한 선거 원칙과 비교적 큰 지배 계급을 가진 국가를 민주주의로 간주할 수 있다. 클레이스테네스가 민주정을 설립했을 당시, 시민은 아테네 인구의 약 50%를 차지했다. 고전기 동안 전쟁으로 인한 시민의 사망과 외국인 및 노예의 유입으로 이 비율은 약 3분의 1로 감소했다. 이는 시민이 전체 인구의 약 10%에 불과했던 과두정 도시들과는 대조적이었다. "민중의 지배"는 특정 지역 내 모든 사람들의 지배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정치 체계에 포함된 사람들만의 지배를 의미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민주주의가 국가의 공식적 구조를 넘어선 후원 네트워크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이 민주정을 도입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그들의 후원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다른 귀족 가문의 네트워크를 약화시키기 위한 도구였다. 비록 필라이다이 가문이 반격을 가하고 페르시아 전쟁으로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이 약화되었지만, 이 네트워크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실제로 페리클레스와 알키비아데스 모두 어머니를 통해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과 연관되어 있었다.


셋째, 확고히 자리 잡은 민주정에서도 가끔씩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충성된 야당이 존재한다. 아테네의 귀족파는 문제 해결에 있어 비교적 효율적이었으며, 이는 기원전 470년대와 460년대에 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귀족파는 헌법을 변경하지 않았고, 민주파가 권력을 되찾기 위해 헌법을 개정해야 했다. 귀족파가 전투적으로 변한 것은 제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과 그 이후였으며, 이는 그들의 반대파가 귀족파를 탄압할 구실을 제공했다.


포퓰리즘은 정치적 목적으로 민중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포퓰리스트는 기존 정치 체계가 비엘리트의 필요와 욕구를 충분히 충족시키지 못하며, 따라서 이를 이유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산악 지역 주민들을 결집시킨 포퓰리스트였다. 반면 클레이스테네스는 그렇지 않았다. 히피아스가 축출된 이후 그는 이사고라스가 제안한 개혁에 맞서 솔론이 마련한 민주적 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을 지지했다.


확립된 민주정 내에서 민주적 정치인은 민중에게 영합하지 않는다. 이미 문제와 우려를 해결할 수 있는 통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테네 초기 민주정에서는 그 통로가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의 후원 체계와 이를 통해 그들이 통제할 수 있었던 국가 기구였다. 개별적인 제안은 논의되어야 했고, 개별 정치인들은 여전히 서로 경쟁해야 했지만, 이 모든 것은 일종의 원형적인 "대성당" 체계 내에서 이루어졌다.


밀티아데스와 키몬이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에 도전했을 때, 그들은 포퓰리즘을 통해 이를 수행했다. 이들은 지역 아테네 정치인들이 부족했던 기술과 연줄을 제공함으로써 자신들의 위치를 강화했다. 또한, 그들과 아레오파고스는 아테네 정부의 공식 구조를 벗어나 자신들만의 대안적 "민주적 대성당"을 구축했다. 특히 키몬은 가난한 아테네 시민들이 자신의 과수원에서 과일을 가져가도록 허용한 점에서 두드러졌다. 귀족파는 효율성과 전문성을 제공하며, 헌법이 원래 그들을 무력화하려던 의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자리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결국 민주파는 국가를 강화하고 귀족파의 후원 체계를 파괴하거나 흡수해 이를 새로운, 더 강력한 "대성당"으로 통합했다.


이제 현대 서구 세계로 시선을 돌려보자. 이곳은 또 다른 "대성당"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 현대의 "대성당"과 아테네 민주주의 간의 관계는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눈에 띄는 유사점들이 존재한다. 오늘날 우리는 학계의 "사제들," 후원을 나누는 부유한 기부자들과 재단들, 주요 정당들의 정치 기구, 언론인 행세를 하는 선동적 웅변가들, 그리고 집단적인 우위를 유지하려는 국가의 강제적 기구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우리는 만연하고 파괴적인 좌파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민주정 아테네에 대한 첫 번째 관찰, 즉 강력한 선출 원칙과 큰 지배 계급이 존재했다는 점은 현대 "대성당"에도 적용된다. 선출 요소는 비교적 분명하며, 모든 기회에 강조된다. 서구 사회에서는 지도자를 선출할 권리가 주어지며(적어도 다수의 지도자를), 이를 통해 그들이 "민중"에게 책임을 진다는 논리가 전개된다. 민주 정부는 대성당이 지배하는 모든 국가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성당은 또한 매우 크다. 대학 체계를 대성당 구성원들의 주요 훈련장으로 간주할 때, 미국 인구의 40%가 대학 교육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다른 대성당 통제 국가에서는 이 비율이 낮긴 하지만 여전히 30%를 넘는다. 모든 대학 졸업생이 대성당의 적극적인 구성원은 아니라고 가정하더라도, 이는 대성당의 규모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시민 계급과 대략적으로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의 공식 구조 밖에 존재하는 후원 네트워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며, 바로 이 점이 대성당을 단순히 정부가 아닌 대성당으로 만드는 이유다. 수많은 싱크탱크, 재단, 옹호 단체, 언론 조직, 학술 기관들이 서로를 이념적으로, 물질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대성당은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과 그 경쟁자들이 운영했던 방식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마지막으로, 대성당에 반대되는 이익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여전히 대성당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에서는 종교인 우파나 토크 라디오 청취자 같은 집단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성당은 이들을 완전히 제거하기를 바라겠지만, 이들은 대성당의 적대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반발하지도 않는다. 이들이 대성당이 관리하는 체제 내에서 활동하는 한, 대성당은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대성당은 위선적인 권력 추구의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민주적 모델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대성당에 반대하지만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심각하게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다. 대성당은 곧 민주주의다. 대성당과 민주주의를 분리할 수는 없다.


한편, 포퓰리즘은 전술이나 도구, 심지어는 대성당 구조 밖에서 단독으로 권력을 얻기 위해 고안된 속임수라고 볼 수 있다. 포퓰리스트가 이후 대성당에 순응한다면, 민주주의는 유지되고, 그가 새로운 집단을 대성당에 통합한다면 오히려 강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성당 밖에서 계속 활동하는 포퓰리스트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


여기에서 두 가지 주요 교훈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민중에 대한 호소가 반드시 민주주의와 동행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물론이고 푸틴 또한 각자 자신의 국민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민주주의자였던 것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에게서 큰 변화를 기대할 필요는 없겠지만, 한 명의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나 그런 인물들의 집단이 민중 운동을 이끄는 것이 대성당에 가장 효과적으로 도전하는 방법일 수 있다.


둘째, 그리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교훈은, 대성당이 곧 민주주의라는 점이다. 만약 당신이 국민 전체가 정부에서 어떤 역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버려야 한다.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대성당을 지지하는 것이며, 대성당에 반대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는 고대 아테네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원문링크:https://archive.md/RJn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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