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티스톤, 필연성과 평화주의
필연성과 평화주의
smartistone, 2016년 5월 31일 게시
몇 달 전, 닉 랜드는 두 가지 혁명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1) 기술·경제적 자기추동적 변화가 가속 곡선을 그리며 인류의 점점 더 넓은 부분을 시대에 뒤떨어지게 만든다. 자본(즉, 기술과 상업의 합성체)은 점진적으로 자율성을 획득한다. 인간에게는 새로운 조건 아래에서 시너지를 이루며 결합할 흥미로운 기회들이 점점 더 많아지지만, 그 전반적 흐름은 — 아주 점잖게 표현하자면 — “도전적”이다.
(2) 프랑스 혁명을 본보기로 한 자코뱅식 정치 폭력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리품을 노골적 강요를 통해 재분배하라는 요구의 토대를 제공한다. 근대 시대의 모든 사회·정치적 역사는 이 패턴에 부합하며, 이는 근대적 의미의 ‘민주주의’와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기본소득은 이러한 흐름의 자연스러운 종착점이다.
어쩌면 ‘대성당(역주: Cathedral. 비선출 권력기구들의 집합)’은 두 종류가 있을지도 모른다 — 사회정의/민주주의 유형(즉, 자유주의적(liberalism) 대성당)과 기술/자본주의 유형의 대성당. 전자는 명백히 해롭고, 후자는 그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자유시장, 기술적 근대성, 세계화에 대한 지지라는 점에서 민족주의나 전통의 일부 요소들과 충돌한다. 그러나 후자 역시 전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예컨대 피터 틸이 가커(Gawker)를 상대로 한 소송을 후원한 사례가 그렇다. NRx(신반동주의)는 후자를 어느 정도까지는 용인할 수 있다. NRx는 피터 틸의 사례처럼 그런 접근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그들의 기술-자유주의적 이상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기술 자본주의가 앞으로 세계를 지배할 게 거의 확실하다고 볼 때, 그 흐름에 ‘베팅’하는 일종의 생존 전략인 ‘그논(역주: Gnon. 신반동주의자들 이 사용하는 “Nature or Nature’s God”(자연 혹은 자연의 신)의 약어로, 인간이 바꿀 수 없는 자연 법칙, 현실의 질서, 필연적 구조를 상징하는 개념.)에 대한 보험’은 기술자본주의 유형의 대성당의 성공과 필연성에서 이익을 얻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예컨대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같은 기업의 주식을 매수·보유함으로써, 만약 기술자본주의 대성당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면 그러한 기업의 주주들이 일정한 권력이나 ‘가치 있는 자격’을 인정받거나, 적어도 주식을 보유하지 않았거나 기술-상업주의(techno-commercialism)에 저항한 사람들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질 가능성을 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은 이미 미국 기업 현금 보유액의 23%를 차지하고 있으며, 에너지나 원자재 같은 저숙련 산업은 고전 중이다. 타깃(Target), 월마트(Walmart), 코스트코(Costco), 스타벅스(Starbucks) 같은 대형 유통업체들은 규모는 크지만, 가능한 한 많은 상품을 판매하는 것 이상의 세속적 권력에 대한 야망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기술 기업들이 기업 지배체제(corporatocracy)의 지배자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는 매우 투기적인 전망이다. 그리고 가장 유능한 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기업 지배체제는 지금의 체제보다 나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바라는 이상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 어쩌면 목표의 절반 정도만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의 10% 혹은 0%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다. 페이스북이나 테슬라가 운영하는 정부는 내셔널리즘 같은 개념에는 무감각하겠지만, 그래도 현재 우리가 가진 비효율적이고 SJW(사회정의전사) 오염된 체제보다는 나을 것이다.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를 기다리는 태도는, 워그 프랭클린(Warg Franklin)이 말한 평화주의(pacifism)의 개념, 그리고 ‘블랙필(black pill)’의 은유와도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는 수동주의(passivism)가 명백히 옳은 것처럼 보인다. 수동주의는 무해한 동시에, 치명적이기도 하다. 권력을 어떻게 쥐어야 하는가에 관해서 말하자면, 수동주의자는 열성적으로 권력을 쟁취하려 들지 않는다. 그에게 권력이 찾아올 때 그 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권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그 권력을 가질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수동주의는 이 블로그의 공식적인 정치적 방법론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사 문제를 다루지 않으려 하고,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며, 우리가 스스로와 가까운 공동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에만 진단을 한정한다.”
워그(Warg)는 아마도 모든 NRx(신반동주의) 블로거들 중 가장 ‘평화주의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는 시사나 정부 정책에서 완전히 거리를 두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식의 ‘세상으로부터의 단절’이라는 경향은 투표를 하지도, 뉴스를 보지도 않는 알투처(Altucher)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평화주의를 해석하는 스티브 파블리나(Steve Pavlina) 같은 블로거들에게서도 나타난다.
“권한은 제한적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내린 결정의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런 현실은 달라지지 않으므로, 차라리 이에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이 취한 행동의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일부다.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면, 진정으로 무력해진다. 저항 없이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만, 그 상황을 적절히 다룰 수 있는 힘을 끌어낼 수 있다. 순간적으로는 어둠에 빠지고 싶은 유혹이 있을지라도, 스스로를 그 길로 내몰지 말라. 눈을 떴을 때, 현실을 직시하라.”
통제할 수 없는 일에 화낼 필요가 없다. 대신, 자신의 삶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그 과정에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되라. ‘이해’하는 것이 싸움의 절반, 어쩌면 그 이상을 차지한다.
https://greyenlightenment.com/2016/05/31/inevitability-and-pacif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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