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국가관과 아비투스의 5가지 명제
국가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단순히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환각을 느끼는 것이다. 모든 정치적 의식은 근본적으로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장한 사람들, 건물, 문서, 의식들을 모아놓고, 이것이 사물, 실체, 일관성과 목적, 심지어 권리까지 갖춘 무언가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이를 "상상의 공동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는 너무 온건한 평을 남겼다. 이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다. 집단적 환각 증세, 필요한 환상, 문명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환상이다. 토마스 홉스는 이를 이해했다. 리바이어던은 괴물이다. 우리가 만든 괴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막연히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문명마다 국가관을 형성하는 방식은 다르다. 그리고 국가관의 구체적인 형태는 문명이 어떻게 행동하고, 무엇을 중시하며, 어떻게 멸망하는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다.
다음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문명 운영 체제를 파악하려는 시도이며, 향후에는 이와 관련된 영미식 사고관에 주목하려 한다. 이 둘은 '거버넌스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이 아니다. 국가가 무엇인지, 시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서로 다른 형이상학적 틀이다.
이것들은 단순한 정책 차이가 아니다. 운영 체제의 차이다. Windows와 Unix의 차이와 같다. 둘 다 작동하지만, 근본적인 구조에서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한 시스템에서 직관적인 것이 다른 시스템에서는 불가능할 수 있다.
이 부분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겠다. 첫째, 근본적인 구조적 구분, 즉 서양에서의 국가관과 이와 비롯된 아비투스의 5가지 명제와 동양에서의 대한 국가관과 이와 비롯된 아비투스의 5가지 명제이다. 이 명제들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직교한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기본 가정 수준에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다.
다음으로는 특히 영미권 사람들의 사고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영미식 사고관 원칙 10가지를 소개하려 한다. 영미권 문명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이유, 동시에 극도로 자신감 넘치면서도 완전히 미친 듯이 보이는 이유, 그리고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계속 승리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동양과 서양 두 시스템이 왜 엉뚱한지, 그리고 그게 왜 나름 괜찮은지 충분히 설명하며 이 글을 끝마치면, 나는 내 할 일을 다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당신이 한 시스템은 분명히 옳고 다른 시스템은 분명히 틀렸다고 생각하며 이 글을 읽는다면, 요점을 완전히 놓친 것이다.
그럼, 시작해보자.
- 서구 국가관과 아비투스의 5가지 명제 -
명제 1: 필멸의 경쟁자로서의 국가
서양 문명은 역사적으로 국가를 경쟁하고, 생존하고, 투쟁하고, 외부와 내부 청중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실체로 받아들여왔다.
다음 문장을 천천히 읽어보라. 국가는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정말, 정말 기이한 일이다.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문명은 국가를 기정사실, 자연스러운 사실, 그저 존재하는 무언가로 여겨왔다. 특히나 동양에서 국가는 하늘이나 산과 같다. 존재의 배경 조건일 뿐, 지속적인 운영을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서방은 "아니. 국가는 궁극적으로는 경쟁자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미국독립선언서를 다시 읽어보자. 진지하게, 지금 이 글을 읽는 것을 멈추고 미국독립선언서를 다시 정독해볼 가치가 있다.
“[...]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개혁하거나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인 것이다. 실로 인간의 심려는 오랜 역사를 가진 정부를 가볍고 일시적인 원인으로 변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과거 경험은 인간은 악폐를 참을 수 있다면 자신에게 익숙한 형태를 제거하고 바로잡기보다는 고통을 참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오랫동안에 걸친 학대와 착취가 변함없이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고 인민을 절대 전제 정치 밑에 예속시키려는 계획을 분명히 했을 때에는, 이와 같은 정부를 타도하고 미래의 안전을 위해서 새로운 보호자를 마련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이며 또한 의무인 것이다. [...]”
이것은 맹렬한 급진주의다. 1776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그것이 얼마나 기이한지 깨닫지 못한다.
서양은 당연히 다른 국가들과 경쟁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가 없다는 생각과도 경쟁하고 있다. 이전 버전의 자기 자신과도 경쟁하고 있다. 가상적인 대안 체제와도 경쟁하고 있다. 자신의 가치, 효과, 그리고 존재할 권리를 입증해야 하는 영구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이것이 바로 서구 역사가 정치 체제의 실험장인 이유다. 왕국, 공화국, 제국, 신권정치, 입헌군주제, 파시스트 실험, 공산주의 프로젝트 등 모두 일시적인 해결책일 뿐이며,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 대체될 수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1989년 『The National Interest』지에 「The End of History?」라는 논문을 발표했고, 이후 1992년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인류 정치 발전의 ‘최종 단계’라고 주장했다. 자유민주주의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더 이상 경쟁이 없다고 말이다. 후쿠야마는 완전히 틀렸다. 왜냐하면 그는 서구 시스템의 본질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서구 시스템은 외부 경쟁자가 사라지면 즉시 자기 자신과 경쟁하기 시작한다. 소련이 붕괴되자마자 미국은 "역사의 종말"을 축하하는 대신, 즉시 내부 문화 전쟁, 정치적 양극화, 그리고 제도적 정당성에 대한 위기로 돌입했다.
이것은 버그가 아니다. 시스템이 설계된 그대로 작동하는 것일 뿐이다.
동양인들은 역사를 돌아보며 하나의 연속된 문명이 서로 다른 행정 체계를 통해 표현되었다고 본다. 유럽인들은 역사를 돌아보며 완전히 다른 문명들이 우연히 같은 지역에 자리 잡고 때로는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던 일련의 문명이라고 본다.
이는 역사적 해석에서 사소한 차이가 아니다. "국가"라는 단어의 의미 자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서양인에게 국가는 기능, 즉 어떤 일을 하는 존재다. 다른 대부분의 문명에서 국가는 실체, 즉 그저 존재하는 존재다.
명제 2: 시민-국가 이원론
서구권의 시민들은(이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자유로운 사람이지 신민이 아니라는 구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공동 운명체로서 국가에 묶여 있다고 이해하지만, 통치가 자신들과는 별개이며 언제든지 동맹이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이것이 서구 정치 의식의 핵심에 있는 인지적 속임수다. 우리는 국가이지만, 국가는 우리가 아니다.
이건 정말 정신분열적이고 정말 훌륭한 내용이라 자세히 설명해보겠다.
서구 시민은 주권이 궁극적으로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은 곧 국가다. 국가의 정통성은 그와 그의 동료 시민들에게서 나온다. 하지만 정부, 즉 실제 통치 기구, 총과 의사봉, 그리고 관료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존재다. 그들은 별개의 존재다. 그들은 고용인이자 서비스 제공자이며, 잠재적인 적이다.
미국 수정 헌법 제2조를 상기해 보자.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State)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국민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 (A well regulated Militia, being necessary to the security of a free State, the right of the people to keep and bear Arms, shall not be infringed.)“
이것은 대정부 무력에 대한 헌법적 보장이다. 시민에게 자신의 정부에 대항하여 무장할 수 있는 권리를 명시적으로 부여하는 것이다.
토마스 제퍼슨은 이를 더욱 명확하게 표현했다.
”자유라는 나무는 때때로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를 마심으로써 원기왕성해져야 한다. 이는 자유의 근본 속성이자 거름이기도 하다. (The tree of liberty must be refreshed from time to time with the blood of patriots and tyrants. It is its natural manure.)“
이것은 주기적인 폭력적 혁명을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으로 옹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구에서 "시민적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는 이유다. 통치자와 피지배자가 구조적 긴장 관계, 심지어 잠재적 적대감에 놓여 있다는 상투적인 가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국가는 시민에 의해, 시민으로부터 제지되어야 한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구성하는 국가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제임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논문 제51호에서 이를 명확히 했다.
"인간의 야망은 또 다른 야망에 대항하기 위해 필요하다. 사람의 이익은 그 곳의 헌법적 권리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것이 정부의 남용을 제어 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무엇이 과연 정부인가? 단지 인간 본성에 대한 모든 숙고 중에 가장 위대한가? 인간의 부패는 어느 정도의 감찰과 불신을 요구한다. 결국에는 만일 인간이 천사라면, 정부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부의 설계 원리는 권력이 권력을 견제하도록 하는 것이다. 조화가 아니라 균형이다. 협력이 아니라 구조적 갈등이다.
이게 미친 소리처럼 들린다면, 사실 그렇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성공적인 서구 국가 모델의 기반이기도 하다.
동양의 정치 의식은 이러한 분열을 수용할 수 없다. 통치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적대감을 정부의 기본 구조에 구축한다는 생각, 즉 이러한 적대감을 정상적이고, 건강하며, 심지어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는 생각은 마치 뇌와 사지가 영구적인 냉전 상태에 놓인 신체가 건강한 신체라고 믿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중요한 건,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역동성, 빠른 적응력, 그리고 다른 체제가 따라잡기 힘든 특정한 자유를 만들어낸다. 물론 불안정, 사회적 분열, 그리고 때때로 내전이라는 부작용까지 야기한다.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명제 3: 공리주의적 희생
시민과 국가가 성과와 정당성을 두고 끊임없이 경쟁하는 이러한 구조 속에서, 서구 사회는 필연적으로 공리주의적 정책을 지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 효율성을 증명하기 위해 ‘일부’의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트롤리 딜레마가 서구에서 발상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서양의 사고방식은 수학이 도덕적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스스로 확신해 왔다. 자신의 연구를 입증할 수만 있다면, 소수를 희생시켜 다수의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비용-편익 분석이 필요하고, 효용 함수가 극대화됨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일단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즉 방안 A가 방안 B 보다 더 큰 행복, 부, 수명, 또는 어떤 지표를 사용하든 더 큰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증명하고 나면, 설령 몇몇 사람들을 해칠지언정 방안 A를 선택하는 데 거리낌이 없게 된다.
제레미 벤담은 이를 일종의 교리로서 체계화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존 스튜어트 밀은 이를 세련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핵심은 동일하다. 측정 가능하고, 비교 가능하며, 따라서 최적화할 수 있다.
이건 일부 냉혹한 측면이 있을 수 있겠으나 산업 문명이 생겨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을 생각해 보자. 18세기와 19세기에 걸쳐 수백만 에이커의 공유지가 사유화되었다. 수십만 명의 소작농과 농촌 빈민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생계 수단에서 쫓겨났다. 그들은 도시로 이주해 공장에서 일해야 했고, 종종 끔찍한 환경에서 일했다.
이것은 참혹했다. 하지만 GDP를 극적으로 증가시켰다. 산업 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결국 거의 모든 사람을 더 부유하게 만들었지만, 처음에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절대적인 재앙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의도적이었다. 계획되고, 입법화되고, 정당화되었다. 공리주의적 논리에 따라 말이다. 전체적인 생산성 향상이 개별적인 고통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현대 미국의 무역 정책도 마찬가지다. 경제학자들은 자유무역이 전체적인 부를 증가시킨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유무역은 좋은 것이다. 제조업 지역 전체가 황폐화된다는 사실,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는다는 사실은 유감스럽지만 수용 가능한 결과다. 왜냐하면 전체적으로 사회가 더 부유해지기 때문이다.
IMF와 여러 국제기구의 분석에 따르면, 2010년대 세계화의 진전은 세계 GDP를 꾸준히 끌어올렸지만, 선진국의 중하위 소득 계층은 실질소득이 정체하거나 감소하는 경험을 했다. 일부는 더 부유해졌고, 다른 일부는 정체되었다. 이것이 바로 공리주의적 계산의 현실이다. 만일 30%가 고통받더라도 70%가 이익을 얻으면, 수학적으로는 정당화된다.
수천 명의 사람들을 해고함으로써 수백만 명에게 혜택을 주는 철도를 건설할 수도 있다.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10만 명의 직원을 고용하는 산업을 폐쇄하고, 그 자원을 더 많은 총 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에 재분배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30%의 삶을 크게 악화시키더라도 70%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는 정책이 자주 펼쳐지곤 한다.
심지어 서구 전문직-관리직 계층은 이 모든 것은 도덕적인 행동이라며 믿어 의심치 않으며 정책을 꿋꿋이 펼쳐나간다. 왜냐하면 전문직-관리직 계층이 이미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계산을 마쳤기 때문이다.
동양의 시스템은 이런 식으로만 운영될 수 없다. 아니, 그럴 수는 있지만, 그 사실을 거짓말로 덮어두어야 한다. 모두가 함께 희생하고, 짐을 나눠 지고, 우리 모두가 하나의 통일된 몸으로 이 사회에 속해 있다는 허상을 유지해야 한다. 설령 그것이 명백히 거짓일지라도, 그 허상이 유지되어야 한다.
서양의 통치자는 단지 통계에 기반한 정책을 제시할 뿐이다.
명제 4: 저항으로서의 평등
서양인들이 보편적 평등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시민이 국가와 국가 체제에 저항할 권리를 의미한다.
잠깐. 방금 전의 문장은 이 명제 4에 대한 내용 중 매우 중요한 문장이다.
미국인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라고 말할 때, 이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결과, 동등한 능력, 혹은 어떤 특정한 면에서 동등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권력에 맞서 동등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참뜻이다.
평등은 곧 무기다. 모든 시민이 권위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하는 원칙이며, 그 "아니오"가 어떤 의미를 지니게 한다. 평등은 단순히 동등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저항권의 분배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존 로크는 이를 《정부론 제2편(Second Treatise of Civil Government)》 제2장 「자연상태에 관하여(Of the State of Nature)」과 제6장 「부권에 관하여(Of Paternal Power)」에서 "자연 상태"에서의 평등으로 설명했다.
“[...] 또한 이것은 평등의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모든 권력과 관할권은 상호적이며,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가지지 않는다. [...](A state also of equality, wherein all the power and jurisdiction is reciprocal, no one having more than another …)”
“[...] 같은 종(種)과 동일한 등급으로 태어난 인간들은 자연이 부여한 동일한 조건들을 함께 지니고 있다. [...] 그러므로 그들 또한 서로 간에 지배나 복종이 없는 평등한 관계에 있어야 한다. [...] 단, 신의 분명한 의지에 의해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 위에 두었다는 명백한 선언이 없는 한, 그 누구도 타인 위에 세워질 수 없다. [...](…that creatures of the same species and rank, promiscuously born to all the same advantages of nature … should also be equal one amongst another without subordination or subjection, unless … by any manifest declaration of his will, set one above another …)”
“[...]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여전히 인간이 서로 간의 관할권이나 지배권에 있어 평등하다는 사실과 양립한다. [...] 내가 앞서 말한 평등이란 바로 그것이다. [...] 즉, 누구도 타인의 의지나 권위에 종속되지 않은 채, 각자가 자신의 자연적 자유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 yet all this consists with the Equality, which all Men are in, in respect of Jurisdiction or Dominion one over another … which was the Equality I there spoke of … being that equal Right … to his Natural Freedom, without being subjected to the will or authority of any other Man.)“
이것은 능력이나 미덕의 평등이 아니라, 권위의 부재다.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에 대한 자연스러운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더 나아갔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어디에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 평등은 원시적인 자유의 상태이며, 불평등은 부과된 것이라고 본 셈이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불평등에 저항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구의 평등에 대한 이야기가 항상 공격적으로 들리고, 갈등에 대한 것처럼 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다. "나는 너와 동등하다"는 말은 곧 "너는 나에게 명령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반드시 우리가 똑같다거나, 같은 것을 가져야 한다거나, 사회에서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우리 모두 정치 무대에서 무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자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나는 인간성 면에서 당신과 동등하기 때문에 당신이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말을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당신에게 저항할 능력이 있으며, 당신이 내 권리를 침해하려고 한다면 나는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또는 필요하다면 물리적으로라도 맞서 싸울 권리가 있습니다."
칼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1932)’에서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자유주의적 중립성(neutrality)이 도덕적·경제적 논리에 정치적 결정을 환원시켜, 본래의 정치적 긴장과 적대(敵對)의 영역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자유주의적 평등이 정치적 갈등을 탈정치화하는 경향을 갖는다는 의미였다. 평등 담론은 지배의 정당성을 거부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인간의 형제애에 대한 기분 좋은 원칙은 아니다. 도덕 철학으로 위장한 전쟁 수행 교리라고 볼 수 있겠다.
명제 5: 불연속성을 특징으로 함
서양인들은 국가의 형태는 시민들에 의해 자유롭게 변화될 수 있으며, 단절과 불연속을 추구하게 된다고 본다.
서구는 사실 불연속성을 숭배한다. 서양인들은 혁명을 사랑하고, 깔끔한 결별을 사랑한다. 그들은 원년을 사랑한다.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사랑한다.
프랑스 혁명은 새로운 달력을 만들었다. 진지하게, 프랑스 혁명 지도부는 시간 자체를 재설정했다. 1792년 9월 22일은 공화력 원년 방데미에르(Vendémiaire) 1일이 되었다. 과거는 지워졌다. 역사는 다시 시작되었다. 이것은 수사학이 아니었다. 그들은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조셉 드 메스트르는 이러한 경향의 광기를 보았다. 조셉 드 메스트르는 『프랑스에 대한 고찰』(Considérations sur la France, 1797)에서 “프랑스 혁명은 악의 원천이며, 그것이 낳은 모든 것은 사악하다(La Révolution française est le fléau de Dieu et tout ce qu’elle a produit est mal).”라고 단언했다.
미국인들은 공화국을 세운 혁명을 겪었다. 그다음에는 헌법 질서를 근본적으로 재편한 남북전쟁을 겪었다. 그리고 시민과 국가의 관계를 완전히 바꿔놓은 뉴딜 정책을 겪었다. 그리고 흑인 민권 운동으로 다시 한번 그 관계를 바꿔놓았다. 이 모든 과정에서도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는 늘 그래왔듯 여전히 "미국"이며, 여전히 "헌법" 아래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볼 수는 없다. 1780년, 1870년, 1940년, 그리고 2025년의 미국은 같은 로고를 달고 있는 4개의 서로 다른 정치 체제다. 이 네 개의 미국이 "따르고 있는" 헌법은 마치 네 개의 서로 다른 문서인 것처럼 해석이 너무 달라서 서로 이해할 수 없다.
브루스 애커맨은 『We the People: Foundations』(1991)에서 “헌법적 순간(constitutional moment)”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평상시의 정치 절차를 넘어 국민이 헌법적 합의를 재구성하는 시기를 지칭했다. 그는 세 가지를 확인했다. 건국, 재건, 뉴딜. 하지만 그는 요점을 놓쳤다. 이러한 "순간들"은 예외가 아니다. 그것들이 규칙이다. 서구 시스템은 주기적인 재창조를 위해 설계되었다.
서구는 이를 정상적인 것으로 여긴다. 혼돈에 빠지지 않고 정치 체제를 완전히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은 건강, 활력, 문명 발전의 신호로 여겨진다.
서구는 의도적으로 단절을 추구한다. 서구는 불연속성을 긍정적인 선(善)으로 추구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연속성은 정체이고, 정체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조지프 슘페터는 이를 "창조적 파괴"라고 불렀고, 경제에 적용했다. 하지만 슘페터는 이것이 서구 문명 전체의 운영 원리라는 것까지는 깨닫지 못했다. 서양은 경제에서만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서양은 정치 체제, 사회 구조, 문화적 규범까지 창조적으로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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