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계몽 일어 번역가의 닉 랜드·가속주의 해설(2)
https://note.com/imuziagane/n/n8ace6af18729?magazine_key=mbd28cf65025b
■ 닉 랜드와 신반동주의 제3장
3. 닉 랜드
· 계몽의 역설
· 들뢰즈 & 가타리(Déleuze & Guattari)에 대한 경도(傾倒)
· 코스믹 호러
· 그레이트 필터 가설
· 크툴루 신화와 추상적 호러
· 죽음 충동의 철학
· CCRU라는 실천
· CCRU와 클럽 음악
· 하이퍼스티션(hyperstition)
· 사변적 실재론과 닉 랜드
· 캉탕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 레이 브라시에(Ray Brassier)
· 닉 랜드의 상하이
■ 자본주의의 외부, 아마존
【히데】
CCRU를 일본에 제대로 소개한 건, 키자와 씨가 처음인가요?
【키자와】
후기에서 썼듯이, 시인 사쿠라이(櫻井) 씨가 CCRU나 닉 랜드의 텍스트 일부를 번역해 자신의 사이트에서 소개하신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CCRU와 서브컬처(예를 들어 덥스텝)의 관계 같은 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에나가】
책 『닉 랜드와 신반동주의』(102–109쪽)에서 소개된 랜드의 초기 논문이 인상 깊었습니다. 보면 랜드는 이 시점에서, 인간 경험이 전제하는 바깥—‘물자체(物自体)’—를 자본주의의 ‘외부’와 겹쳐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자본주의의 ‘외부’라는 건 어떤 의미였죠?
【히데】
확실히 마르크스도 자본주의의 외부를 말하긴 했습니다. 다만 관점이 재생산 노동—즉 노동자의 재생산 비용은 시장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겁다는 이야기죠.
마르크스가 말하는 외부란, 자본주의가 흡수할 수 없었던 잔여 같은 것이고,
반면 닉 랜드가 말하는 외부는 무언가 정체불명의 것이 ‘도래하는 곳’이라는 느낌인데, 이 둘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지평』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
【에나가】
그런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을, 소외된 노동자―즉 괴물적이고 비인간적인 존재의 형상과 겹쳐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비유하자면, H. G. 웰스의 『타임 머신』(1895)에서 지하의 식인종 모락(Morlock) 편을 드는 태도랄까요.
예를 들면 랜드가 2014년의 「텔레오플렉시(Teleoplexy)」에서 “로봇의 반란”이나 “쇼고스적 반란”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섹션 7). 쇼고스(Shoggoth)는 러브크래프트의 1930년대 작품 『광기의 산맥에서』에 나오는 존재들로, 형태가 유동적이며 노동에 혹사당하다가 지능이 발달해 창조주에게 반기를 든 슬라임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괴물적 존재들 속에서 ‘외부’나 ‘물자체’를 발견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태도는 동시대적으로 보면 그다지 이상한 입장은 아닙니다. 중심과 주변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주변을 지지하되 중심-주변 구조 전체를 파괴할 바깥의 무엇을 찾는다는 식의 문체죠. 그런 논법은 탈구조주의적 비평 이론이나 문화연구의 전형적인 패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괴물을 찬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 또한 괴물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닉 랜드와 신반동주의』 107쪽을 간접 인용하면,
“우리 내부에 새로운 아마존을 길러내야 한다”는 말이 되겠죠.
그리고 괴물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지금 태어나고 있거나 앞으로 태어날 괴물을 인정하자—인간이 아닐지라도. 이런 식으로 분리주의를 지지하게 되는 것이죠.
【키자와】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경우처럼, 다가올 초인(Übermensch)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더 깊이 몰락해야 한다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스러운 비전을 떠올리게 합니다.
“더 나빠질수록 더 좋아진다”는 말은 가속주의(accelerationism)의 핵심 교리이기도 한데, 그 바탕에는 철저한 허무주의와 그 반작용으로서의 초인 대망론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나가】
랜드의 근저에는 분리주의가 있다고 느낍니다. 중심에서 이탈하여 주변이 되는 것 같은. 남성이라는 것이 중심을 구현한다면 페미니즘의 분리주의,
코스모폴리탄이 중심을 구현한다면 그에 대한 반대는 제3세계 민족주의적 분리주의. 들뢰즈 및 가타리라면 재영토화를 따돌리는 절대적 탈영토화(그런 것이 있다면).
“살아남아라”라는 명령이 중심을 구현한다면, 분리주의적 선택은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랜드의 바타유(Georges Bataille) 이론을 읽기 시작했는데, 서문부터가 “나는 죽음의 편에 있다” 같은 느낌이더군요.
【키자와】
“네놈들, 아직도 살아남고 싶다고 발버둥치고 있나?” 같은 분위기죠.
【에나가】
선동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 계보학으로부터의 이탈
【키자와】
가속주의 너머에 있는 포스트휴먼(posthuman)이라는 것은, 계보학으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히데】
그건 왜 그렇습니까?
【키자와】
프랑켄슈타인, 로봇, AI 같은 존재를 포스트휴먼이라고 본다면, 이들은 인간의 생물학적 재생산—즉 생식—과는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히데】
과연, 그렇군요.
【키자와】
“조상의 존재는 ‘삶’에 대해 초월적이다”라는 논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아주 단순한 이야기 같지만 설득력이 있고, 그렇기에 까다로운 논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계보학을 절단하는 것이 가속주의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닉 랜드는 『암흑계몽주의』의 마지막에서 돌연변이적인 ‘삶’의 존재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무한한 조상들의 계열과 기원으로부터 벗어난, 초-초월론적(超-超越論的)이고 ‘벌거벗은 삶’으로도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영화 『날씨의 아이(天気の子)』를 그런 관점에서 보고 싶습니다. 즉, 구름 위의 조상령(祖先霊)의 세계로부터의 철저한 단절,
기원에서 이어져 온 ‘부채(debt)’의 끝없는 재생산을 끊어내는 것, 신의 심판으로부터 벗어나는 결단— 이 클라이맥스를 긍정적으로 보고 싶다는 뜻입니다.
【히데】
테즈카 오사무(手塚治虫) 만화(철완 아톰)를 보면, 로봇(아톰)이 자기 창조자를 ‘아빠’라고 부르잖아요. 그런데 코가 큰 박사님(오챠노미즈 박사)은 그걸 되게 싫어합니다. 그런 식으로 보면, 박사 입장에서는 로봇은 ‘이질적 존재’니까 자기들과는 단절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자연스러운 해석일지도 모르죠.
【히데】
그런데 『날씨의 아이』에서는, 영화가 끝난 이후의 일상에서는 주인공(모리시마 호다카)과 히로인(아마노 히나)이 어차피 아이 만드는 섹스를 하게 되겠죠. 천사는 후타나리거나 무성별 두 종류라고 하던데, 히로인이 지상으로 내려온 후 아예 성기가 사라져 있다든가 하면 재밌었을 텐데 말이죠. 젠장~ 결국 평범한 애 만들기 섹스를 즐겨버리네~
【키자와】
확실히 『날씨의 아이』는 결국 마지막에 이성애 커플이 맺어지기 때문에, 계보학으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에 실패하고 재생산적 미래주의로 회수되었다— 라는 비판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이 다음에 생육하고 번성할 거잖아?” 같은 식으로. 그 점에서 이 작품의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에나가】
히데 씨 방향이라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괴물적이며 기형적인 존재가 태어나는 엔딩도 괜찮겠네요. 일본 신화로 치면 국토 창조 과정에서 태어난 히루코(ヒルコ) 같은 존재처럼요.
【히데】
아이를 낳으려는 순간, 엄청나게 큰 애벌레 같은 것이 가랑이 사이에서 튀어나와서, 주변 사람들이 “아~ 역시 무녀(巫女)를 그만두게 하면 안 됐던 거네~” 하고 납득해버리는… 그런 전개도 있겠죠.
『에로큥 실험실』(『エロきゅん実験室』, 히로와 나기 広輪凪)
【키자와】
신의 저주다….
■ 닉 랜드와 신반동주의 제4장
4. 가속주의
· 가속주의란 무엇인가
· 좌파 가속주의와 마크 피셔(Mark Fisher)
· 우파 가속주의, 무조건적 가속주의
· 트랜스휴머니즘과 기계와의 합일
· 가속주의와 러시아 우주주의
· 로코의 바실리스크(Roko’s Basilisk)와 『매트릭스』
· 베이퍼웨이브(Vaporwave)와 가속주의
【히데】
이 장을 읽고 느낀 건데요, 좌파 가속주의가 “자본주의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정말 터무니없는 자만이고 부끄러울 정도의 착각 아닙니까. 예전 소련이 “과학은 경제를 초월한다”고 믿었던 것처럼 황당한 오만이라고 생각해요.
【키자와】
닉 랜드도 좌파 가속주의를 “NEP(신경제정책) 없는 레닌주의”라고 디스하죠.
【에나가】
닉 랜드의 「가속주의에 대한 조잡하고 빠른 입문」(『Jacobite』 2017년 5월 25일)에서도 그런 표현이 등장했어요.
【키자와】
흔한 비판으로는 테크노크라트적 레닌주의라는 점, 분석 대상이 백인에만 한정되어 있어서 백인 중심주의라는 점, 환경 문제를 무시한다는 점 등이 있죠.
【히데】
환경 문제는 진짜 심각합니다. 환경이 붕괴되면 인류든 자본주의든 뭐든 다 같이 끝나는 거니까요. 저는 그것이야말로 다가오는 종말이라고 생각해서 무섭습니다….
【에나가】
요즘엔 Dadabots처럼, ‘학습된’ 재즈나 데스메탈을 24시간 계속 생성해내는 음악 AI도 나왔죠. 인간이 사라져도 재즈와 데스메탈은 남아 있을 거예요. 다만 인프라와 환경이 멸망하기 전까지만요.
【키자와】
사람을 학습시키면 ‘약간 오류 난 인간’이 남아 있는 것처럼, 진짜 인간은 멸종했지만 약간씩 버그 난 NPC들이 약간 버그 난 삶을 계속 살아가는…. 그런 느낌이겠죠.
【히데】
그거 거의 시뮬라크르(simulacrum) 얘기잖아요.
【히데】
피터 틸이 『제로 투 원(Zero to One)』에서 말했듯이, 창업에서 타이밍이 정말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왜 지금 일본에서 가속주의가 “뜨고” 있는 걸까요? 본국(영미권) 기준으로는 몇 년 늦은 거죠?
【키자와】
가속주의가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심포지엄이 2001년이니까, 일본은 약 18년 뒤에 온 셈이죠. 본국 입장에서는 “지금 와서?” 같은 느낌일 수도 있어요.
【히데】
근데 왜 하필 지금 온 걸까요?
【키자와】
가속주의를 기반으로 한 여러 담론이 쌓여 있던 가운데, 여기에 결정적으로 트럼프의 당선이 맞물렸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시대 상황이 가속주의적 분위기와 ‘찰칵’ 하고 맞아떨어진 거죠.
【히데】
아~ 그런 맥락이군요.
【에나가】
2016년 미국 대선 이후, 기존의 정체성 정치 틀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던 노동계급 포퓰리즘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잖아요. 닉 랜드의 가속주의가 “우파”라고 불리는데, 그 비판이 전부 틀렸다고 하긴 어렵지만, 동시에 랜드의 논의는 지금의 현실을 꽤 잘 포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 아카이 고타(赤井浩太)가 고이즈미 요시유키(小泉義之)에게 전했다는, 래퍼 키츠네비(火狐)의 「27세의 리얼(27歳のリアル)」(2010) 가사 일부,
“귀사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 최첨단 기술의 중핵을 담당할 수 있는 사원으로 xvxvhfうy(御社の役に立てると思います[…]その最先端の技術の中核を担っていけるような社員にxvxvhfうy )” 이런 말은, 『닉 랜드와 신반동주의』(168쪽)에서 말하는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의 “새로운 괴물적 익명성”이라는 맥락—즉, “조금씩 버그가 난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더 잘 이해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마무리 -
다음 독서회에서는 제이미 바틀릿(Jamie Bartlett)의 『래디컬즈―세계를 다시 칠하는 〈과격한 사람들〉(ラディカルズ 世界を塗り替える〈過激な人たち〉)』과 니시타니 이타루(西谷格)의 『르포 중국 “잠입 아르바이트” 일기(ルポ中国「潜入バイト」日記)』를 다룰 예정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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