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티스톤, 감성 기반 우파의 부상
감성 기반 우파의 부상(The Rise of the Vibes-Based Right)
2025년 11월 18일, smartistone
레이건-부시 시대의 결말, 즉 로널드 레이건의 취임으로 시작해 2009년에 끝나는 약 30년의 시기를 나는 이렇게 규정하는데, 이 시기는 ‘구(舊) 보수파 핵심층’의 쇠퇴가 뒤따랐던 시기이기도 했다. 조지 W. 부시는 임기를 마치며 역대 최저인 25%의 지지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지미 카터의 28%보다도 낮은 새로운 최저치였다. 2008년의 존 매케인의 일방적 패배는 2012년 롬니의 그에 못지않게 굴욕적인 패배로 이어졌다. 2016년 역시 같은 패턴을 반복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15년 6월 16일, 도널드 트럼프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 말은 이후 미국 정치를 완전히 다시 짜놓게 된다.
나도 인정하건대, 처음엔 그를 의심했다. 그리고 나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 당시 도박사들은 그가 대선에서 이길 확률을 고작 1~2%로 평가했으며, 공화당 후보는 젭 부시나 마르코 루비오가 될 것이지만 결국 민주당의 유력 후보였던 힐러리에게 패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트럼프가 이기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쉽게 범주화하거나 한 가지 꼬리표로 규정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사생활은 그의 정치만큼이나 뒤죽박죽이거나 일관성이 없을 때가 있다. FDR처럼 그는 민간 부문을 세세하게 통제하려는 성향이 강하고, 보호무역주의 성향도 매우 강하다. 총기 권리에 대해서는 태도가 모호하며, 종교적 보수 세력을 거부하는 한편, 낙태 반대 입장을 드러내기도 했다. 초대형 복음주의 교회(megachurch) 신자 대신 트럼프는 UFC 관객층(더 세속적인 중산층·노동계층)에게 호소력을 발휘했는데, 존 매케인은 1996년에 UFC를 ‘인간 닭싸움’에 비유한 바 있다. 트럼프는 “현상 유지형 보수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된 유권자들의 좌절감을 정확히 읽어냄으로써 권력을 잡았다. 좌파가 불만 정치(grievance politics)를 구사하듯, 우파도 나름의 불만을 갖고 있지만, 좌파가 그러한 분노를 일정한 도덕적 일관성을 갖춘 틀로 조직화하는 데 반해, 우파에서는 그런 모습이 상대적으로 덜 보인다.
이는 여러 모순을 낳았다. 예컨대 2020년 BLM 시위와 ‘경찰 예산 삭감’에 반대하는 맥락에서는 법과 질서를 옹호하면서도, 정작 1월 6일 시위대에게는 예외를 두는 식이다. 물론 이 둘이 반드시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이는 1월 6일 시위대가 의사당에 진입한 데는 정당성이 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감성 이전 시대’에는 이 두 입장이 동시에 똑같이 타당한 것으로 공존한다는 것이 훨씬 덜 설득력 있게 보였을 것이다. 물론 좌파가 법을 어기는 데 낯선 것도 아니지만, 이들은 애초에 ‘법과 질서’를 지도 원칙으로 삼아본 적은 없다.
우한폐렴 시기에도 비슷한 분열이나 일관성 부족이 있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입장들을 동시에 똑같이 타당한 것으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한폐렴은 잘못 집계되어 과장되었거나, 심지어 음모라는 주장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거나 단순 과대포장된 감기 취급하던 바이러스를 두고 중국을 비난하는 입장 말이다. 또는 트럼프가 백신을 미국의 창의성과 역량의 산물이라며 칭찬해 그의 지지자들 상당수를 불쾌하게 만든 일도 있었다. 물론 우한폐렴 시기 좌파 역시 자기모순을 드러냈다. 예컨대 과학의 미덕과 무오류성을 설파하면서도, 우한폐렴 위험 요인과 관련해 비만 문제에 대해선 데이터가 명확했음에도 예외를 만들거나, 건강한 젊은층의 우한폐렴 사망률이 매우 낮다는 데이터를 무시하는 식이었다.
(내 개인적 입장은 이렇다. 우한폐렴은 실제로 존재했고 연구소 유출이라고 본다. 하지만 봉쇄와 기타 정책들은 실책이었다고 본다. ‘과학을 신뢰하라’는 권고는 검열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으며, 그 ‘과학’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상반된 증거가 제시되었을 때조차 그랬다.)
총기 권리나 정치적 올바름(wokeness)을 반대하는 것 같은 몇 가지 ‘핵심 입장’을 제외하면, 감성 기반 우파를 하나로 묶는 공통점은 그리 많지 않다. 지배적 서사나 이념적 원형도 없고, 대체로 비슷한 규모로 경쟁하는 여러 세계관이 나란히 존재할 뿐이다. 어떤 이들은 시민 참여—예컨대 투표 독려—를 강하게 지지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일종의 허무주의적 체념 상태에 머물러 있다. 종교 문제도 마찬가지다. 온라인에서는 비종교적 우파가 종교적 우파만큼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2000년대 초에서 2010년 사이에는 리버테리언이나 객관주의자(objectivist) 소수 집단을 제외하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트럼프 본인도 특별히 종교적인 인물은 아니다. 또한 ‘Catturd 우파’처럼 노골적으로 트럼프 지지를 선언하는 집단도 있는 반면, 닉 푸엔테스와 그의 ‘그로이퍼(groypers)’처럼 트럼프에 훨씬 비판적인 집단도 있다. 놀랍게도 이 ‘그로이퍼’들까지 위키백과 페이지가 있을 정도다. 이는 감성 기반 우파 내부의 규모와 다양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9·11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알카에다가 한 일인가, 아니면 모사드가 한 일인가. 혹은 이것이 통제된 폭파였는가. 이 셋 모두가 동시에 사실일 수는 없다. 원래 ‘진실추구자(truther)’들은 자기들만의 온라인 게토에 격리되어 있었지만, 트위터에서는 이 세 입장이 대체로 비슷한 비중으로 나타나고, 심지어 모두 그럴듯한 주장처럼 보인다. 특히 본래라면 비주류 음모론에 해당하는 생각들이, 대중적 영향력이 큰 계정들에 의해 증폭될 때 더욱 그렇다. 따라서 감성에만 의존해 판단하고, 서사가 끊임없이 바뀌거나 여러 상충하는 서사가 동시에 존재하며, 품질 검증 체계도 불분명한 환경에서는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우한폐렴에서 보았듯, 주류 언론의 서사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도 아니다. 혹은 실증적으로는 의심스러운데도 인기 때문에 어떤 서사에 순응해야 하는 압력이 생기기도 한다. 다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소셜미디어 전반의 문제이지, 감성 자체의 특성 때문이라고만 보기도 어렵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지지는, 오랫동안 공화당 지지층 대다수 사이에서 폭넓게 존재했다. 논쟁의 초점은 전쟁 자체가 수렁이며 거짓 정보나 불확실한 첩보에 기반해 시작되었다는 여부가 아니라, 얼마나 강경하게 할 것인가(예: “석기시대로 폭격하자” vs “폭격하고 재건하자”)의 차이였다. 그런 비판은 훨씬 나중에야 본격화되었다. 전쟁에 반대했던 고보수주의자(paleocon)들은 ‘담론의 영역’에서 소수로 주변화되어 있었고, 오늘날 트위터에서 보듯이 동등한 비중으로 대표되는 집단과는 전혀 달랐다.
감성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반동적이며, ‘지금 이 순간’에 반응하는 성격을 갖는다. 우파는 대체로—특히 감성 이후 시대에—좌파에 반대하거나 반응하는 것을 전제로 한 존재처럼 스스로를 자리매김해왔다. 2010년대에 좌파가 몸 긍정(Body Positivity)이나 ‘모든 몸은 건강하다(Health at Every Size)’ 운동을 들고 나오자, 감성 기반 우파가 그 정반대 입장을 취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스위니(Sweeney)의 청바지와 춤추는 대학 사교클럽 소속 여대생 영상은—그녀의 청바지가 몸에 딱 맞듯—이 틀에 매끄럽게 들어맞는다. 특히 트위터에서는 더욱 그렇고, ‘오프라인의 평범한 보수층’에서는 그보다는 덜하다. 하지만 ‘진보의 시계를 되돌린다’는 것은 결국 진보의 속도를 늦추는 데 그칠 뿐이다. 2010년대 후반이 되면, 더 많은 보수층이 동성 결혼이나 일부 마약의 합법화 같은 사안에 수긍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2000년대 초에는 금기시되던 입장이었다.
나는 또한 사회적 보수주의가 도덕 잣대를 들이대는 것처럼 보이면서 ‘낮은 지위’ 이미지가 되어버린 점도 중요하다고 본다. 온라인 우파 누구도 자신이 정치에 지나치게 진지하게 몰입한 사람, 혹은 ‘잔소리꾼’이나 교사 같은 인물로 보이길 원치 않는다. 특히 사소한 일에도 쉽게 발작적으로 반응하는 좌파와 비교될까 봐 그렇다. 그래서 너무 싸움판에 끼어들지 않고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강경한 반(反)워키즘(Wokeism) 입장을 취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포지션이 된다. 사회에 잘 적응해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되, 그 사회의 비판자로서 한 걸음 떨어져 보이고 싶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여성의 사회 진출을 출산율 하락의 원인이라며 비판하면서도, 정작 커리어를 쌓아갈 예쁜 사교클럽 여대생들에게는 예외를 두는 모순이 나타난다. 이 역시 설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비심판적 보수주의(non-judgmental conservatism)’라고 부르는 것이 부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내적 모순들을 조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전략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트럼프의 비종교성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첫째,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트럼프가 문화전쟁의 더 큰 전선을 싸우고 있다고 가정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비종교성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둘째, 기독교 우파는 오프라인에서 큰 존재감을 갖고 있었음에도, 2010년대 초까지 도덕적 권위의 목소리로서 위치를 잃어버렸다. 각종 스캔들과, 그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대의에 대해 책임 있는 관리자가 되지 못했다는 인식이 결합되면서 약화된 것이다. 예를 들어, T.D. 제이크스(TD Jakes)의 경우 그의 아들이 노출 혐의로 체포되었다. 또 성경 어디에 목사가 개인 전용기를 보유해야 한다고 쓰여 있는가? 이에 비해 트럼프는 도덕적 우월감을 가장하려는 태도가 전혀 없으며, 이 점이 그를 오히려 더 친근하고 ‘쿨’하게 보이게 만든다. 그가 억만장자임에도 말이다.
트럼프는 한 번도 자신을 도덕적으로 우월한 인물로 내세운 적이 없다. 그의 브랜드는 언제나 상황이 바뀌면 즉흥적으로 입장을 바꿀 수 있는 협상가의 이미지였다. 몇 달 전만 해도 트럼프가 일론 머스크에게 화를 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그를 용서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다. 사람들은 굳건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는 좋지만, 그 선을 넘으면 오히려 승리를 포기하게 되어 역효과가 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 워키즘이 2022년을 정점으로 쇠퇴한 것도, 단지 우파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것을 ‘쿨하지 않다’고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파는 2020~2021년 무렵 거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경험을 겪은 후, 이념적 순수성보다 문화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드니 스위니(Sidney Sweeney)는 말 그대로 문화의 일부이며, 따라서 반(反)워키즘이라는 더 넓은 대의 안에 포섭되거나 동원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정치에 깊이 관심이 없거나 확고한 이념적 신념을 갖지 않은 많은 일반인(normies)들조차도 워키즘을 알고 있으며, 로빈 디앤젤로(Robin DiAngelo)나 이브람 X. 켄디(Ibram X. Kendi) 같은 인물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그것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인종 문제에 관해서는 남녀노소 모두가 일종의 특정한 인식 틀이 굳어버렸고, 이에 벗어나기 어려운 상태이며, 트럼프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흑인들조차도 다양성·포용성을 설교하면서 실제 행동은 노골적인 사익 추구로 보이는 중상류층 백인 좌파의 위선을 알아본다. 2000년대 초와 비교해보면, 더 이상 금기나 금단의 지식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모두 마틴 루터 킹과 간디의 일탈, 그리고 흑인 해방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흑인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링컨에 대한 이야기까지 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지나친 외연 확장 노력은 과할 수 있다고 본다. 문화적 적합성이나 인정 욕구에 매달리다 보면, 수준을 스스로 떨어뜨리거나 비위를 맞추는 행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쿨하지 않게’ 보이더라도, 비판받아 마땅한 대상에게는 판단을 내리고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 괜찮다. 트럼프가 래퍼들을 사면한 일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했다.
감성 기반 보수주의의 한 가지 특징은, 훨씬 더 지위 지향적이고 개인주의적이라는 점이다. 내부 집단에서 자신의 지위를 극대화하려는 욕구 때문에, 입장을 번복하거나 서로 모순되는 주장들을 취하며, 가장 최신의 ‘분위기 흐름’을 타거나 앞서가기 위해 성급하게 태도를 바꾸기도 한다. 정보가 충분하지 않아 시기상조임에도 말이다. 트럼프는 보통 무엇을 해도 지지층의 비난을 피하는 인물이지만, 이런 흐름에서는 그마저도 안전하지 않다. 최근 사례로, 지난 7월 많은 트위터의 ‘대형 계정’들이 트럼프의 이란 공격을 강하게 비난했다가, 며칠 뒤 휴전 협상이 시작되자마자 이 모든 비난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것을 들 수 있다. 그 뒤로 약 4개월간은 ‘상대적인 평화’가 이어졌는데, 중동의 낮은 기준으로 보자면 이는 서로 미사일을 쏘지 않고 있다는 정도의 의미다.
엡스타인 사건도 마찬가지다. 여름에는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 심지어 트럼프가 엡스타인에 공모했거나 그를 비호하고 있다는 비난까지 이어졌지만, 이런 분노는 시간이 지나며 잦아들었고, 대신 찰리 커크에 대한 조의 표명 같은 전혀 다른 이슈들이 관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하나, 종교적 우파가 얼마나 영향력을 잃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트럼프가 노년층의 대마초 사용을 지지한다고 밝혔을 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20~30년 전만 해도 이런 발언은 배신으로 간주되어 공화당 주류가 일제히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지금의 공화당은 전통적 도덕성 유지보다는 문화적 관련성을 유지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더 이상 ‘시대에 뒤처진 고지식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감성 문화는 스스로를 지나치게 진지하게 만들지 않기 때문에, 좌파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수치심’을 무디게 만들었다. “인종차별주의자”, “반유대주의자”, “파시스트” 같은 낙인은 이제 예전만큼 잘 먹히지 않으며, 큰 의미도 갖지 않는다. 반성하거나 물러서는 대신, 우파는 이런 비난에 “그래서 뭐?”라고 되받아치며 판을 뒤집어버렸다. 히틀러나 파시즘은 이제 거의 농담 혹은 밈(meme)이 되어버렸는데, 그 이유는 이런 낙인들이 너무 남발되어 의미를 잃었고, 대중도 둔감해졌기 때문이다. 모두가 인종차별주의자이거나 파시스트라면, 그 단어는 더 이상 아무 구별력을 전달하지 못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트럼프 또한 수없이 히틀러에 비유되거나 나치즘과 동일시되어 왔다. 하지만 이런 낙인은 힐러리 클린턴, 조지 W. 부시, 심지어 오바마에게까지 적용되었다. 솔직히 말해, 이제는 좀 더 새로운 발상이 필요하다고 본다. 히틀러는 악의 대표 아이콘으로 너무 오래 써먹어서 진부해졌다. 예컨대 칭기즈 칸이나 아틸라(Atilla) 같은 인물도 있다. 그들도 그 시대에는 충분히 끔찍한 존재였다.
감성 기반 시대는 정치 지형을 훨씬 더 다양하게 만들었다. 앞서 말했듯, 감성 기반 시대 이전—트럼프 이전, 특히 일론이 트위터를 인수하고 리브랜딩(Rebranding)하기 이전—의 보수주의는 훨씬 더 획일적이었다. 주류 보수주의가 있었고, 그 뒤를 멀찍이 따라가는 고보수주의와 리버테리언이 있었을 뿐, 그 외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군주제 지지자, ‘based’한 기독교 민족주의자, 중도 성향 유전자결정론자(hereditarians), 그리고 AI와의 일체감을 추구하는 미래주의자들이 서로 뒤섞여 있다. 이제는 감성조차 반도체 칩 위에서 존재할 수 있는 시대다.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지금이 훨씬 더 흥미로운 시대다.
원문 링크: https://greyenlightenment.com/2025/11/18/the-rise-of-the-vibes-based-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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