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국가관과 아비투스의 5가지 명제
- 동양 국가관과 아비투스의 5가지 명제 -
동양인들이 서양인들의 국가관을 잘 이해하지 못하듯이, 서양인들이 동양의 국가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서양인들은 국가를 기능으로 이해하지만, 동양은 국가를 존재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는 범주 오류이며, 번역 불가능성의 문제다.
명제 1: 국가의 존재론적 우선성
국가는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국가는 존재한다. 이것은 권위주의에 대한 변명이 아니다. 형이상학적 주장이다. 동양적 전통에서 국가는 시민의 합의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우주적 질서의 현현이다.
『예기(禮記)』 제42편 《대학(大學)》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心正而後身修
(심정이후 신수)
마음이 바르면 몸이 닦이고,
身修而後家齊
(신수이후 가제)
몸이 닦이면 집안이 가지런해지고,
家齊而後國治
(가제이후 국치)
집안이 다스려지면 나라가 다스려지며,
國治而後天下平
(국치이후 천하평)
나라가 다스려지면 천하가 평안해진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 프로그램이 아니다. 존재의 위계다. 개인→가족→국가→천하는 하나의 연속된 우주적 질서이며, 각 단계는 전 단계와 다음 단계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국가는 개인의 도덕적 완성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大道之行也,天下爲公
(대도지행야, 천하위공)
대도가 행해지면 천하는 공공의 것이다”
서양인은 위 문장을 미래의 유토피아로 읽는 실수를 할 가능성이 있지만, 실은 전통적 해석은 다르다. 이것은 우주적 질서의 본질적 상태를 서술한 것이다. 대도(大道)는 인간이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천하가 공공의 것임은 원초적 사실이며, 통치의 목적은 이 본래 상태를 실현하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 구절이 "천하를 공공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대도가 실현되는 곳에서는 천하가 이미 공공의 것이다"는 설명이라는 점이다. 국가는 개인들의 합의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큰 도가 실현되는 곳에서 드러난다는 것이 동양의 국가관이다.
맹자는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 下)」에서 이렇게 말한다.
齊宣王問曰: "湯放桀, 武王伐紂, 有諸?" 孟子對曰: "於傳有之." 曰: "臣弑其君, 可乎?" 曰: "賊仁者謂之賊, 賊義者謂之殘, 殘賊之人謂之一夫. 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也."
(제 선왕이 물었다: "탕왕이 걸왕을 쫓아내고, 무왕이 주왕을 쳤다는데, 그런 일이 있었는가?" 맹자가 대답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왕이 말했다: "신하가 그 군주를 시해해도 되는 것인가?" 맹자가 말했다: "인을 해치는 자를 적이라 하고, 의를 해치는 자를 잔이라 하며, 잔적한 사람을 일개 필부라 합니다. 필부 주를 처형했다는 말은 들었어도, 군주를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 上)」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벼운 존재다)
서양인들은 이것을 "국가는 뒤엎어도 되는 것"으로 읽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맹자의 논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 그는 "군주를 시해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일개 필부를 처형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법률적 구분이 아니라 존재론적 구분이다.
폭군이 천명을 잃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군주가 아니다. 그는 우주적 질서에서의 위치를 상실했으며, 따라서 그는 단지 일개 사내일 뿐이다. 교체되는 것은 체제가 아니라 대리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성→사직(국가)→군주’라는 위계이다. 서양인은 맹자의 말을 "국민 주권"으로 읽고, "보라! 맹자도 민주주의자였다!"고 섣불리 외치기 쉽다. 하지만 순서를 다시 보라. 사직(社稷)은 여전히 백성과 군주 사이에 있다. 국가는 쉽사리 제거될 수 없다. 국가는 매개이자 필수적 구조다. 군주는 교체 가능다. 왕조도 교체 가능하다. 하지만 국가 자체(사직, 즉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으로 상징되는 정치적·우주적 질서)는 영원하다. 이것은 CEO를 해고하는 것과 회사가 파산하는 것의 차이다. 존 로크는 후자를 당연하게 여기지만, 맹자는 전자만을 허용한다. 즉, 역성혁명(易姓革命)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잘못된 ‘국가의 대리인’을 교체하며 체제의 정당한 주체가 누구인가를 재확인하는 절차이다.
명제 2: 최대공약수 추구
영원 속의 조화를 추구하는 동양인들이 추구하는 체계는 항상 "최대공약수"를 추구한다.
최적의 해결책도 아니고, 효용을 극대화하는 결과도 아니다. 최대공약수, 즉 모두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동양 시스템이 합의 도출에는 탁월하지만 혁신에는 어려움을 겪는 이유다. 동양 시스템은 "무엇이 조화를 유지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지 "무엇이 최상의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 문명의 핵심에는 和(와), 즉 조화의 형이상학이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사회적 규범이 아니다. 이것은 존재론적 명령이다. 쇼토쿠 태자(聖徳太子)의 17조 헌법(604년) 제1조를 보라.
“第一條
和ヲ以テ貴シト爲シ、忤フコト無キヲ宗トセヨ。
人皆黨有リ、又達有リ。
彼是ト是非トニ非ズ。
是レヲ以テ、上下一ニ論ヲ絶ツ。
故ニ、和ヲ以テ貴シトナス。
(第1条
みんなが仲良くすることを一番大切にし、対立しないことを基本としなさい。
人は誰でも自分の味方や意見があって、考え方は人それぞれ異なる。
だから、これは正しい・これは間違いだと単純には言えない。
そのため、目上と目下の間でも口論が絶えなくなることがある。
だからこそ、和(調和)をもっとも尊重すべきなのである。)
(제1조
화합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서로 어그러짐이 없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편이 있고, 또 생각이 다르다.
옳다 그르다 하는 판단은 때에 따라 달라질 뿐, 절대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위아래(상하) 사이에서도 논쟁이 끊이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화(和)를 무엇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
서양인들은 이것을 "사람들과 잘 지내라"는 평범한 조언으로 읽기 쉽다. 틀렸다. 이것은 정치신학의 근본 공리다. 和는 개인의 욕망이 집단의 리듬에 용해되어야 한다는 것, 불협화음이 존재론적 위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잠시 멈춰 和라는 글자 자체의 역사를 살펴보자. 고대 중국인들은 일본을 倭(왜)라고 불렀었다. 문제는 이 글자가 "왜소하다", "비틀어진", "난쟁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8세기경, 일본인들은 이 모욕적인 글자를 같은 발음의 和로 교체했다. 발음은 같지만 和의 의미는 "조화"이다.
이것은 단순한 PR 작업이 아니었다. 이것은 국가 정체성의 재정의였다. 和는 야마토국(大和國)의 이름에도 사용되었고, 야마토 민족 고유의 정신을 의미하는 야마토다마시(大和魂)라는 용어에도 사용되었다. 즉, "일본적인 것"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和라는 개념과 분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和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쇼토쿠의 헌법은 불교와 유교 사상을 혼합하여 천황의 절대적 권위를 강화하는 동시에, 귀족과 사제 계급 간의 관계를 공고히 했다. 和는 계급 조화의 원리다. 위와 아래가 조화를 이룰 때, 그때야 비로소 "일이 조용히 논의되고 올바른 견해가 우세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감각이 예리한 독자라면 和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和는 평등을 의미하지 않으며 위계적 조화이다. 그것은 각자가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그 위치에서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농업 사회에서 관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협력이 필수적이었던 일본의 역사에서 태어난 이 원리는, 이후 모든 사회 조직의 기반이 되었다.
和를 실천하는 과정은 효율을 극대화하는 과정이 아니라, 관계의 연속성을 보존하는 과정이다. 서로의 입장 차이를 노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덮어두는’ 기술이다. 일본 사회가 말하는 네마와시(根回し)와 현장의 공기를 읽는 것(場の空気を読む)이 바로 이 원리의 실천적 형태다.
일본의 의사결정 과정인 ‘네마와시(根回し)’를 생각해 보라. 문자 그대로 "뿌리 주변"을 의미하며, 나무를 옮기기 전에 뿌리 주변의 흙을 준비하는 것을 말한다. 결정이 공식적으로 내려지기 전에, 모든 이해관계자와 비공식적으로 협의하여 합의를 구축한다. 이것은 느리며 비효율적이다. 그리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보장한다.
하지만 네마와시는 和의 표면일 뿐이다. 일본의 의의(稟議) 시스템을 보면, 제안서가 조직 계층 구조를 상향으로 이동하며 각 단계에서 도장을 받는다. 서양의 CEO가 결정을 내리고 하향 전달하는 방식과 대조적으로, 일본 시스템에서는 제안이 위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이미 상당한 합의가 형성되어 있다. 이는 주요 이해관계자들이 사전에 조율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수한 상향식 민주주의도, 순수한 하향식 권위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합의 지향적 의사결정이다. 시스템의 모든 참여자는 和를 유지하고 집단적 조화를 해치지 않을 책임을 느낀다. 반대 의견은 직접적 거부보다는 우회적 방식으로 표현되는 경향이 있다. 도장을 찍지 않거나, 추가 검토를 요청하거나, 수정을 제안하는 식으로 말이다.
결과적으로, 이 시스템은 장단점을 모두 갖는다.
- 장점: 실행 단계에서의 저항이 적고, 다양한 관점이 통합되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줄어든다.
- 단점: 의사결정이 느리고, 급진적 혁신이 어렵고, 때로는 타협으로 인해 최적보다는 무난한 결정이 나올 수 있다.
현대의 많은 일본 기업들, 특히 빠른 변화가 필요한 산업에서는 의사결정 속도를 높이기 위해 이 프로세스를 간소화하거나 수정하는 추세이나 전통적으로 이 시스템은 안정성과 점진적 개선에 유리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잠깐 정리하자면, 서양 시스템은 총 효용의 극대화를 목표로 한다. 반면 和의 시스템은 최대 격차를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자는 승자와 패자를 만들고, 후자는 최대한 패자를 만들지 않는 결정을 추구한다.
이번에는 보이지 않는 주권의 기술인 현장의 공기를 읽는 것(場の空気を読む)에 대해 설명하겠다.
서양 정치사상은 주권(sovereignty)의 위치를 찾는 데 집착해왔다. 왕에게 있는가? 의회에게 있는가? 국민에게 있는가?
이 질문 자체가 서양적 사고의 본질을 드러낸다. 권력은 어딘가에 있어야 하고, 누군가가 그것을 소유해야 하며, 그 소유자는 명시적으로 식별 가능해야 한다는 가정이다.
칼 슈미트는 1922년 저서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에서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Souverän ist, wer über den Ausnahmezustand entscheidet)”라고 정의했다. 명료하다. 단도직입적이다. 그리고 철저히 서구적이다. 그러나 만약 주권이 아무도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작동한다면? 만약 결정이 결정자 없이 일어난다면?
일본어 空気を読む(공기를 읽다)는 단순한 사회적 감수성의 표현이 아니다. 일부 문화연구자들은 이것을 일본 사회에서 비언어적 규범의 내면화된 형태로 본다.
空気(공기/분위기)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
1. 비인격성: 분위기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현장 안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느끼지만, 아무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는다. 그것은 창발적 속성이다.
2. 강제성: 그럼에도 분위기는 명령한다. 때로는 법률보다도, 명시적 규칙보다도, 이익보다도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3. 비가시성: 분위기는 명시적으로 언급될 수 없다. 그것을 말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사라진다.
4. 자기강화성: 모두가 분위기를 읽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분위기를 강화한다.
이 개념을 정치신학적으로 확장하면, 분위기는 “의인화할 수 없는 주권”의 모델이 된다. 이는 학문적 용어로 직접 쓰인 전례는 없지만, 문화적 메타포로서 제시할 여지가 있다.
서양 정치철학의 기초는 사회계약이다. 홉스, 로크, 루소 등 모두 명시적 계약을 상정했다. 이 전통의 신학적 기반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기독교의 로고스(λόγος) 중심 세계관이다.
반면 동양 전통에서는 최고의 이해는 말해지지 않는 것이라 여겨졌다. 도덕경에서 노자가 말했듯,
“道可道非常道
(도가도비상도)
도(道)라고 말해지는 도는 참다운 도(道)가 아니다.“
분위기를 읽는다는 것은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집단적 의지를 감지하고 조율하는 능력이다. 이는 초자연적 통찰이 아니라, 고도로 훈련된 사회적 감각이다.
서양의 의사결정은 뉴턴 역학처럼 작동한다. 충돌과 결과, 힘의 계산. 분위기의 세계는 양자역학적이다. 관찰되는 순간 붕괴한다. “공식 입장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분위기를 깨뜨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앞서 설명한 일본 기업문화의 네마와시와 의의는 이를 제도화한 형태라고 볼 수 있겠다. 결정은 명시적 선택이 아니라 점진적 수렴 과정으로 나타난다. 회의는 침묵, 끄덕임, 간접적 동의로 이루어진다. 결정은 한 사람의 의지로가 아니라, 암묵적으로 이뤄진다.
명제 3: 보편적 희생
동양에서 희생은 결코 어떤 한 사람에 의해 감당되어서는 안 되며, 모두가 함께 희생하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서구의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정말로 생소한 것을 접하게 된다.
서양인은 주로 이런 식으로 말한다. "90%를 구하기 위해 10%를 희생한다면 수학적으로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동양인이라면 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10%를 희생한다면, 전체의 통일성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혼자서 100%를 희생하는 것보다 모두가 각자 1%씩 희생하는 것이 낫습니다.“
다시금 和 문화에 대해 상기해보자.
서양의 정치 체계는 기본적으로 이해관계의 충돌을 전제로 삼는다. 각 집단의 요구와 이익을 서로 대비시키고, 그 중에서 누구의 요구가 우선될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승자와 패자가 갈린다. 시스템은 그저 전진한다. 파레토 개선적이다.
和의 체계는 전혀 다른 게임을 한다. 명시적 패자를 최대한 만들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실질적 이해 차이는 존재하며, 다만 그것이 '패배'라는 언어로 표현되지 않을 뿐이다. 결정은 구성원 누구에게도 최대한 '패배'가 선언되지 않도록 조정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족이 아니라 수용가능성이다. 즉, 각자가 마지막으로 체면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지점까지 조정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和 체계 안에서의 일본의 경제안정화 정책 사례를 살펴보자. 버블경제가 붕괴한 뒤 하시모토 류타로는 1996년 총리가 되어 금융 개혁(금융 빅뱅)을 추진했다. 외환 규제 완화, 증권 수수료 자유화, 금융지주회사 합법화 등 야심찬 개혁이었다. 그러나 개혁 착수 직후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했고, 홋카이도다쿠쇼쿠 은행, 산요증권, 야마이치증권 등 대형 금융기관들이 연이어 파산하면서 단기적으로는 격렬한 혼란을 겪었다.
당시에는 하시모토의 개혁이 실패로 평가받았다. 특히 소비세를 3%에서 5%로 인상한 긴축 정책이 경기 회복을 저해하면서 더 깊은 침체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거셌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평가가 달라진다. 하시모토의 개혁은 일본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금융 구조의 투명성을 높였으며,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和의 체계 안에서 이례적으로 빠른 구조조정이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발생한 사회적 충격이었다. 명시적 패자(파산한 금융기관의 직원들, 연쇄 부도를 맞은 기업들)가 드러났고, 이는 일본 사회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리고 이 경험은 이후 개혁의 속도를 더욱 늦추는 결과를 낳았다. 실질적인 구조조정은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의 성역없는 구조개혁(聖域なき構造改革)에서야 본격화되었지만, 다행히도 하시모토가 닦아놓은 제도적 기반 덕분에 준이치로가 개혁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후 2012년, 아베 신조가 등장했다. 그 직전 민주당 정권(2009-2012)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실업률은 5%를 넘었고, 기업 도산 건수는 연간 12,000건을 기록했다. 외교는 후텐마 기지 문제로 미일관계가 악화되었고,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대응에서 우왕좌왕하며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일본 사회가 원한 것은 급진적 개혁이 아니라 안정이었다.
아베노믹스는 양적완화, 재정확대, 성장전략이라는 '3개의 화살'로 구성되었고, 20년 넘게 일본을 괴롭힌 디플레이션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겠다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윤전기를 쌩쌩 돌려서 일본은행으로 하여금 돈을 무제한으로 찍어내게 하겠다"는 아베의 발언은 아베노믹스의 상징이 되었다.
일본은행은 2년간 통화량을 2배로 증가시켜 엔화를 약세로 만들겠다고 발표했고, 실제로 엔달러 환율이 80엔대에서 100엔대로 급락하면서 수출 기업들의 경쟁력이 회복되었다. 2013년 5월까지 주가는 55% 급등했고, 1분기에 연 3.5%의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이는 和의 체계가 추구하는 목표(명시적 패자를 만들지 않고 사회적 응집력을 유지하기)에 정확히 부합하는 성과였다. 민주당 정권의 혼란을 수습하고, 당장의 위기에서 사람들을 구했다.
일본은 GDP를 끌어올리는 것에만 전념하지 않았다. 사회적 응집력을 최적화했다.
한편 한국의 대응은 금융 부문 조정과 함께 사회적 분담 동원이 결합된 복합적 구조조정 체제로 전개되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IMF가 요구한 기업 구조조정과 금융 감시 강화 조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재벌들은 비핵심 계열사의 정리·매각과 외자 유치를 통한 자본 확충에 나섰으며, 1998년 정리해고제 도입 이후 희망퇴직·해고·임금 동결·비정규직 확대 등 노동조정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러한 조정은 1998년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제도적으로 정당화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기업과 정부는 고용 유지 노력과 실업 보호를 약속하고, 노동계는 정리해고제 수용을 받아들이는 교환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와 더불어 금 모으기 운동으로 대표되는 국민 참여 캠페인은 위기 대응을 ‘국가-기업-노동-시민이 함께 부담하는 공동의 노력’으로 표상하는 서사를 생산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외환위기의 재정·금융 위험을 완화하는 핵심 수단이 금융 구조조정과 외자 유치였음에도, 금 모으기 운동은 위기 대응 비용의 상당 부분이 가계와 노동에 전가되었음을 은폐하는 상징적 장치로 기능하였다. 즉, 위기 극복 과정은 ‘연대’라는 이름으로 서사화되었지만, 실제 비용 부담은 노동시장 유연화·임금 조정·가계 자산 동원 등을 통해 사회 하층과 개인에게 더 강하게 귀속되었다.
요컨대, 일본의 대응이 국가와 금융 부문 내부에서 제도·감독·자본 구조를 재편하는 상향식 조정이었다면, 한국의 대응은 기업 구조조정 + 노동 제도 전환 + 국민 동원이 결합된 사회적 조정 모델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 과정이 ‘공동의 희생’이라는 도덕적 정당화 담론과 실질적 비용의 비대칭적 배분이 함께 작동하는 동원형 애국주의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이는 역대 한반도 국가들의 위기 대응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되는 국가-사회 관계의 타협 구조와 정당화 방식이 드러난 사례였다.
서양인은 이것이 경제적으로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동양인은 서양식 접근 방식이 도덕적으로 끔찍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자의 공리와 관련해서는 두 사람 모두 옳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동양 사회가 서양 관점에서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정책을 시행할 수 있는 이유다. 그들은 GDP 성장이나 총효용을 최적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응집력과 사회 구성원들 간 조화의 유지를 최적화한다.
사회적 응집력이 GDP보다 더 중요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맥락이 중요하며, 문명마다 상충되는 부분이 다르다.
명제 4: 공동 부담으로서의 평등
서구인이 "평등"을 말할 때, 그는 권리장전을 떠올린다. 동양인이 "평등"을 말할 때, 그는 품앗이를 떠올린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이것은 정치철학에서 가능한 가장 근본적인 분기점이다. 서구의 평등은 저항권의 분배이고, 동양의 평등은 희생의 분배다. 전자는 "나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고, 후자는 "우리는 함께 짐을 진다"고 말한다.
서구의 역사는 이 저항의 정치학 위에 건설되었다. 마그나 카르타부터 권리장전까지, 모든 위대한 헌법적 순간은 본질적으로 "아니오"라고 말할 권리를 제도화한 것이다. 군주에게 "아니오", 교회에게 "아니오", 다수에게 "아니오", 국가에게 "아니오". 평등은 상호 거부의 교향곡이 되었다.
동양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이것을 무작정 "덜 발전된" 것으로 본다면, 당신은 여전히 서구 진보주의적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논어 論語』 태백 (泰伯) 편에서 공자의 제자인 증자는 이렇게 말한다.
曾子曰:「士不可以不弘毅,任重而道遠。仁以為己任,不亦重乎?死而後已,不亦遠乎?」
(증자왈: "사불가이불홍의, 임중이도원. 인이위기임, 불역중호? 사이후이, 불역원호?")
증자가 말씀하셨다: "선비는 넓은 마음과 굳센 의지를 지니지 않을 수 없으니, 짊어진 짐이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仁)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어찌 무겁지 않겠는가? 죽은 뒤에야 그만두니, 어찌 멀지 않겠는가?“
증자는 개인의 영웅주의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회 조직의 기본 원리를 설명하고 있었다.
동양 사회에서 평등은 집단적 의무로 표현된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역할에 따라 짐을 진다.
논어 《안연편(顔淵篇)》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齊景公問政於孔子。孔子對曰:「君君,臣臣,父父,子子。」
(제경공문정어공자. 공자대왈: "군군, 신신, 부부, 자자.")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정명(正名, 이름을 바로잡음) 사상의 핵심이다.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 맞는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소리다.
삼강오륜(三綱五倫)도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부담과 의무를 다한다"는 공동 부담의 철학을 보여준다.
군위신강(君爲臣綱) : 신하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부위자강(父爲子綱) : 자식은 부모를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부위부강(夫爲婦綱) :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것이 근본이다.
父子有親(부자유친):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
君臣有義(군신유의):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
夫婦有別(부부유별): 부부 사이에는 구별(분별)이 있어야 한다.
長幼有序(장유유서):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朋友有信(붕우유신): 벗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서구인은 이것을 억압으로 본다. 동양인은 이것을 현실로 본다.
리콴유는 동양적 평등 개념의 가장 명료한 현대 번역자였다. 그의 HDB(Housing and Development Board) 정책을 보라.
1960년, 갓 독립한 싱가포르는 빈민굴로 가득 찼다. 서구 자본주의자라면 “시장이 해결할 것”이라 말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부르주아지를 전복하라”고 외쳤을 것이다.
리콴유는 다른 길을 택했다. 국가가 주도해 토지를 확보하고, 표준화된 공공주택을 대규모로 건설해, 국민 대부분이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단순한 자유시장도, 공산주의식 재분배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작동했다. 오늘날 싱가포르의 주택 자가소유율은 약 90%에 달한다.
이 성취는 ‘주택을 권리로 선언’한 결과가 아니다. 국가와 시민이 함께 짐을 나눈 결과다. 부유한 싱가포르인은 더 높은 세금을 내고, 저소득층은 공공주택을 보조받으며, 모든 국민은 중앙적립기금(CPF)을 통해 자신의 주택과 노후를 스스로 준비한다. 정부는 제도를 설계하고, 시민은 그 틀 안에서 자신의 몫을 다한다. 모두가 시스템을 지속시키기 위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서구의 언어로는 이것을 “재분배”라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싱가포르식 모델은 다르다. 그것은 ‘피해자’와 ‘수혜자’를 나누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 부담의 시스템이다. 누군가는 세금으로, 누군가는 노동과 저축으로, 누군가는 규율을 지키는 것으로 그 짐을 나눈다.
이 공동 부담의 원리는 주택에만 머물지 않았다. 모든 남성이 일정 기간 복무하는 징병제, 국민이 소득의 일정 비율을 저축해 주택·의료·노후에 사용하는 중앙적립기금(CPF), 그리고 시민 모두가 사회·경제·정신 방위에 참여하는 종합방위 개념도 있다. 모두 같은 철학을 공유한다. 싱가포르의 ‘동양적 평등’이란, 결과의 동일함이 아니라 책임의 공유를 뜻한다.
리콴유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문화와 동양 문화의 근본적인 차이 중 하나는 사회 속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위치이다. 미국 문화에서는 개인의 이익이 우선한다. 이 때문에 미국 사회는 더 공격적으로 경쟁하며, 더욱 날카롭고 높은 성과를 낸다.
반면 싱가포르에서는 사회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한다. 그렇다고 해서 싱가포르가 일자리, 상품, 서비스의 시장 경쟁에서 뒤처질 수는 없다.
한편 정부는 저소득층이 주택, 의료, 교육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도록 돕는다. 그리하여 그들의 자녀가 교육을 통해 더 평등한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동양의 작은 섬나라는 내부 갈등을 감당할 여유가 없었다. 생존은 협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협력은 모두가 자신의 몫을 지는 것을 요구한다.
명제 5: 형식적 변화, 본질적 연속성
서양의 국가는 홉스적 리바이어던(끊임없이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해야 하는 인공적 구조물)으로 이해된다. 반면, 동양의 국가는 도(道)의 정치적 현현으로 간주된다. 형태는 변하더라도, 통치의 규범적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동양적 국가관의 핵심이다.
중국 역사를 보라. 하(夏)·은(殷)·주(周)에서 명(明)·청(淸)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의 왕조가 흥망을 거듭했다. 서양의 시각에서는 불연속의 연쇄로 보이지만, 중국적 관점에서는 모두 천명(天命)의 주기적 갱신이다.
『상서(書經)』 「탕고(湯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惟皇上帝,降衷于下民。若有恆性,克綏厥猷惟后。」
(오직 상제가 백성들에게 올바른 마음을 내리신다. 덕을 지속하여 다스리는 자가 바로 임금이다.)
이 구절은 ‘천명은 덕이 있는 자에게 돌아간다’는 의미로 해석되며, 후대 유교 정치사상의 핵심 근거가 되었다. 즉, 변하는 것은 군주이지만 ‘천명’이라는 정치적 원리는 불변이다.
명에서 청으로의 교체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청은 과거제와 유교 제례를 계승하며 정복자의 정당성을 ‘덕’과 ‘문명 계승’으로 입증하려 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정통성의 흡수형 계승”이라 부른다. 정치체제의 형식은 바뀌었으나 문명의 본질은 연속된 것이다.
페르시아 문명에서도 정통성의 연속성은 놀라울 정도로 지속된다. 아케메네스(기원전 550–330), 파르티아(기원전 247–서기 224), 사산(224–651) 왕조로 이어지며, 왕들은 자신을 모두 “왕들의 왕(Shahanshah)”이라 칭했다.
사산 왕조의 호스로 1세(Khosrow I)는 ‘파르(Farr)’, 즉 신성한 영광을 부여받은 자로 여겨졌다. 이 개념은 조로아스터교의 크바레나흐(Khvarenah)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슬람 이후까지 정치적 정당성의 기반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왕권은 신적 질서의 현현’이라는 원리는 왕조의 교체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인도에서는 왕조나 종교가 바뀌어도 다르마(Dharma), 즉 우주적 질서와 정의의 원리는 불변으로 여겨졌다.
『마누법전(Manusmriti)』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왕이 의무에서 벗어나면 형벌이 그와 그의 친족을 함께 멸한다.”
이 구절은 왕이 다르마(정의·의무)에서 이탈할 경우 정치적 파멸을 초래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왕은 다르마를 실천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관념이 암묵적으로 내포되어 있으며, 후대 전통에서는 이를 “왕은 다르마의 실행자이자 수호자”라는 형식으로 요약한다.
무굴 황제 아크바르(Akbar, 재위 1556–1605)는 힌두적 조화 개념을 이슬람 정의론과 결합해 “술-이-쿨(Sulh-i-Kul, 보편적 평화)” 정책을 펼쳤다. 이는 왕이 종교적 조화의 보증자라는 인도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은 왕통(王統)의 연속성을 국가 정체성의 근본으로 삼는다. 천황(天皇)은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국체(國體) 그 자체로 여겨진다.
메이지 헌법(1889) 제1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第1条 大日本帝国ハ万世一系ノ天皇之ヲ統治ス
(第1条 大日本帝国は、万世一系の天皇がこれを統治する。)
제1조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
이 문구는 단절이 아니라 복고(復古)의 논리를 상징한다. 메이지 유신은 혁명이 아닌 “왕정복고(王政復古)”로 불렸으며, 새로운 체제의 정당성을 “본래의 질서로의 회귀”로 정당화했다.
1517년, 술탄 셀림 1세(Selim I)는 이집트를 정복한 뒤 칼리프의 칭호를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을 “두 성지의 수호자(Custodian of the Two Holy Mosques)”로 불렀다. 이 칭호는 훗날 사우디 국왕에게도 계승된다.
다만 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정치적 상징 조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칼리프의 공식 ‘위임’은 동시대 사료에서는 뚜렷하지 않으며, 후대 오스만 정통성 서사 속에서 강화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오스만의 통치자들은 자신을 7세기 정통 칼리프 시대의 계승자로 규정하며, 이슬람 공동체(움마, أمة, Ummah)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형태는 바뀌었지만 역할의 본질은 동일했다.
서양의 국가는 사회계약의 산물이다. 구성원은 언제든 계약을 파기하거나 재협상할 수 있다. 미국 독립혁명(1776년), 프랑스 혁명(1789년), 러시아 혁명(1917년)과 같은 서양 근대사의 전환점들은 모두 단절의 미학을 보여준다.
반면, 동양의 국가는 우주적 질서의 일부로 이해된다. 통치자는 바뀔 수 있지만, 통치의 원리는 변하지 않는다. 천명, 다르마, 파르. 이름은 달라도 본질적 구조는 비슷하다.
동양에서는 왕조의 변화가 곧 국가의 단절을 뜻하지 않는다. 명과 청은 서로 다른 왕조이지만, 동일한 문명 질서 속의 변형으로 여겨졌다.
맹자(孟子)는 말했다.
「天下之生久矣,一治一亂。」
(천하는 생긴 지 오래되어, 다스려짐과 혼란이 번갈아 온다.)
즉, 천하(天下)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울 뿐, 질서의 근본은 영속한다.
이러한 관점은 왜 동양에서 ‘혁명’보다 ‘개혁’이 선호되는지를 설명해 준다. 새로운 체제를 창조하기보다는, 본래의 조화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서양은 진보를 선호하며 동양은 복고를 선호한다. 그리고 역사는 형태는 덧없되, 본질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반복해 증명한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