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다이라 사다노부의 간세이 개혁이 신자유주의 탈피였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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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다이라 사다노부의 ‘간세이 개혁(寛政の改革)’이 ‘신자유주의 탈피’였던 이유
— ‘재정 건전화, 민영화, 대기업 우대, 지방 소외’를 추진한 타누마 오키츠구
2025년 10월 8일 13:00, 나카노 타케시(中野 剛志)
편견에 흐려지는 인간의 시선
10월 4일, 자민당 총재 선거가 치러졌다. 지난해에도 그랬듯이, 총재 선거 기간 동안 사람들은 각 후보자의 정책이나 인물상에 대해, 대중매체와 SNS에서 제멋대로 논평을 쏟아냈다. 그러나 인간을 올바르게 평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타인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조차 불확실하다.
자신보다 뛰어난 인물을 오해한 끝에 깎아내리기도 하고, 반대로 경박하고 경솔한 인물을 마치 위대한 지도자인 양 치켜세우기도 한다. SNS는 매일같이 그런 인물평으로 넘쳐난다.
왜 이렇게 인물 평가가 어려운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눈이 다양한 편향에 의해 흐려지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보라”라고 말하긴 쉽지만, 실제로 인간의 관찰은 특정한 사상이나 편견이라는 주관을 통과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인식론 철학과 심리학이 이미 밝힌 바와 같다.
사람은 자신의 사상과 가치관이라는 렌즈를 통해 타인을 평가한다. 그렇다면 인물평에 비쳐 나오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사상과 가치관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깎아내리거나 조롱하는 자는, 결국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셈이다.
이처럼 인물 평가는 본래 매우 어려운 일인데, 그것이 역사적 인물에 관한 것이라면 난이도는 한층 더 높아진다. 역사적 인물에 관한 사료는 양 자체가 제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료조차 기록자 자신의 사상과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어서, 정보가 정확한지조차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자신도, 현재 우리가 가진 사상과 가치관이라는 렌즈를 통하여 사료를 읽어내고 만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E. H. Carr)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듯이, “현재의 눈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는 과거를 바라볼 수도 없고, 과거를 이해하는 데 성공할 수도 없다.” 또한 “역사가란 그가 속한 시대의 인간이며, 인간 존재라는 조건으로 인해 그 시대에 매여 있다.”
다만 카는,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이 “역사적 객관적 사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주관의 산물이다”라는 극단적 입장으로 치닫는 것을 엄격히 경계한다. 역사가의 주관과 역사적 사실의 객관이 상호작용하며, 다시 말해 역사를 ‘해석’하는 것 자체가 역사학의 과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곧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해도 좋다. 카는 그렇게 설파하고 있다.
진정한 재정규율파는 사다노부가 아니라 타누마였다
역사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가, 과거와 능숙하게 대화할 수 있는가. 이를 시험하기에 적합한 소재가 바로 마츠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와, 그의 라이벌인 타누마 오키츠구(田沼意次)일 것이다.
타누마 오키츠구에 대해서는 최근, 화폐경제를 잘 이해하고 상업을 중시하며, 적극적 재정 운용을 통해 호황을 이끌어낸 경제통이었다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반면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의 평가는 썩 좋지 않다. 타누마가 초래한 사회적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간세이 개혁’을 시행했으나, 이는 검약령·풍속규제령·출판통제령 등을 통해 도시의 소비생활을 억제하는 내용이었고, 또 재정 재건을 우선시한 탓에 경기 침체를 불러왔다는 이미지가 따라붙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분명해지는 것은, 이러한 타누마나 사다노부에 대한 현대적 평가는 그들의 실제 모습이라기보다 오히려 우리 현대인의 사상과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이다.
예컨대, 타누마는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 吉宗)의 ‘교호 개혁(享保の改革)’이 추진한 재정 건전화 기조를 적극 재정 기조로 전환하고 경제 중시 정책을 펼쳤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의 타누마는 요시무네의 재정 건전화 노선을 계승하여 오히려 더 엄격한 검약령을 내리고 있었다.
또한 타누마 오키츠구는 각 업계에서 ‘가부나카마’(株仲間, 동업조합)를 폭넓게 인정하고, 시장 독점에 따른 가격 조작까지 허용했는데, 이는 가부나카마로부터 거둬들이는 금전으로 막부의 세입을 늘리기 위한 조치였다.
아울러 신규 사업을 일으켜 조세 수입을 확대하기 위해 대상인(大商人)들에게 사업을 위탁 발주하고, 그들이 수수료를 취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이른바 ‘중간 착취(中抜き)’다.
또 타누마는 막부의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다이묘들에게 대규모 토목 공사를 맡기는 ‘국부신’(国普請)을 부활시켜 부담을 지방에 전가했으며, 다이묘에게 지급하던 대여금도 중단했다.
요컨대 타누마가 추진한 정책은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면, 재정 건전화, 민영화, 대기업 우대, 그리고 지방의 희생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타누마 정치 아래에서는 재정 건전화 노선 속에서 관리들이 세수 확대로 출세하려 하였기에 조세 징수가 더욱 강화되었고, 대상인들의 ‘중간 착취’ 비즈니스도 횡행하였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세금과 수수료 부담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또한 농촌에서 대도시로 인구가 빠져나가면서 지방의 쇠퇴와 인구 감소가 심화되었고, 에도(江戸)로의 일극 집중이 진행되었다. 급격히 인구가 유입된 에도에서는 노동 공급이 과잉되어 실업자와 부랑자가 급증했다. 반면 일부 대상인들은 가부나카마의 독점, 민영화, 그리고 ‘중간 착취’ 비즈니스 덕분에 번영을 누렸다. 격차 확대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거품 경제가 만들어낸 허상의 성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타누마 오키츠구의 경제정책이 성공한 것으로 평가되는가. 그것은 부유해진 대상인들이 사치스러운 소비를 일삼으며 거품 경제(버블 경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버블 경제 속에서 사람들의 금전 감각은 흐트러지고, “저녁을 넘겨 돈을 갖고 있지 않는다”는 식의 낭비 풍조가 만연했다. 또한 이 버블의 흐름을 타고, 츠타야 주자부로(蔦屋重三郎) 등이 황표지본, 재롱서(洒落本), 광가본(狂歌本), 니시키에(錦絵) 판매를 확대하며 출판업을 크게 발전시켰고, 가와라반(瓦版)이 여론을 크게 움직이게 되었다. 이른바 미디어 산업의 탄생이었다.
쇼군의 측근으로 출세한 타누마는 자신의 노선을 유지하기 위해 측근 집단을 형성하여 쇼군에게 접근하고, 막부 운영을 장악했다. 또 타누마 시대가 뇌물 정치로 알려진 것은, 대상인들이 민영화와 ‘중간 착취(中抜き)’ 비즈니스를 통해 얻는 이권을 지키기 위해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행위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타누마 오키츠구의 경제정책이란 재정 건전화를 위해 민영화, 대기업·대도시 우대, 세금·수수료 징수 강화, 지방의 희생을 통해 막부의 수입을 늘리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농촌의 쇠퇴, 격차 확대, 지방 인구 감소와 에도(江戸)로의 일극 집중이 일어나고, 서민의 저축률은 하락했다. 정치 역시 측근 집단의 전횡과 뇌물의 만연으로 크게 부패하였다.
이처럼 타누마가 추진한 정책 노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이 1980년대 이후 40년에 걸쳐 추진해온 신자유주의 노선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낳은 결과 또한 거의 동일하다.
타누마가 오랫동안 높게 평가되어온 이유도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그 평가에는 현대인의 신자유주의적 사상과 가치관이 투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타누마 정치의 개조를 시도한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의 평가가 낮게 내려져 온 것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사다노부의 ‘간세이 개혁’은 말하자면 신자유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주자학에 대한 오해’가 불러온 사다노부의 저평가
마츠다이라 사다노부가 낮은 평가를 받아온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사다노부는 주자학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했으나, 현대에는 주자학에 대한 오해가 심각하게 퍼져 있으며, 바로 그 오해가 사다노부에 대한 저평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지점이야말로 이 책의 핵심 주제이며, 저자 오바 가즈오가 진가를 발휘하는 부분이다.
오늘날 주자학이라고 하면 흔히, 봉건적 신분 질서의 고착을 정당화하는 경직된 이데올로기로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의 주자학은 매우 실천적인 정치사상이었다.
주자학은 인륜(인간관계)을 정치의 기초로 보고, 도의와 절의를 중시한다. 이것은 전근대적 정치사상인 반면, 사회 제도나 구조 설계를 중시하는 것이 근대적·과학적 통치라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전근대의 봉건정치뿐 아니라 근대의 자유민주정치 또한 ‘신뢰’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 이는 현대 사회과학에서는 오히려 상식에 속하며, 세계 곳곳의 실제 정치 상황을 보아도 명확하다.
요컨대, 인륜과 도의의 중요성을 설하는 주자학은 오늘날에도 타당한 사상인 것이다.
게다가 주자학은 도의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제도 설계 또한 중시했다. 이 책에서 강조하듯, 마츠다이라 사다노부는 ‘이모미(역주: 囲籾. 흉년이나 재해에 대비하기 위해, 마을 단위로 쌀을 비축해 두는 제도. 공동 저장고를 두고, 평상시에 조금씩 모아두어 위기 시에 풀어 쓰는 일종의 지역 안전망 역할을 했다.)’, ‘칠분적금(역주: 七分積金. 각 마을이나 촌락이 수입의 10할 중 7할에 해당하는 금액을 적립하도록 한 제도. 일종의 공적 비상예비금으로, 흉년·재난·빈곤구제를 위한 사회 안정 기금 역할을 했다.)’, ‘인부기쇼(역주: 人足寄場. 부랑자·무직자 등을 단순히 처벌하지 않고, 노동훈련·기술교육을 제공하는 시설. 현대적으로 말하면 ‘공공 직업훈련소 + 사회복지 교정시설’에 가까운 성격으로, 사회적 재통합을 목표로 한 제도였다.)’ 등 혁신적인 제도를 잇달아 도입해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 발상의 바탕에는 바로 주자학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다노부가 긴축재정으로 불황을 초래했다는 통설도 심각한 오해다. 실제로 그는 지방 농지 개발과 상공업 진흥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도시와 지방의 불균형이 시정되었을 뿐 아니라, 출산률 상승과 경제성장까지 이루어냈다.
평판이 좋지 않은 검약령이나 풍속통제령 역시, 과도한 소비와 이를 조장하는 상업 활동을 바로잡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점에 대한 오오바 카즈오(大場一央)의 해석이다.
‘근면과 저축을 중시하는 것이 일본인의 국민성’이라는 통념과 달리, 타누마 시대까지의 일본인은 오히려 “저녁을 넘겨 돈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는 식의 소비 성향이 강했다.
이를 바로잡고, 근면·저축을 중시하는 국민성을 서서히 형성해 간 것이 바로 사다노부의 주자학에 기반한 ‘간세이 개혁’이었다.
그리고 이 사다노부를 깊이 존경하며, 스스로도 유학을 사상적 지주로 삼았던 인물이 바로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이다. 또한 사다노부의 학문 진흥 정책 속에서 성장한 후진들은 메이지 이후, 특히 재계에서 일본의 근대화를 담당했다. 오오바 카즈오는 이러한 해석을 제시한다. 말하자면 하나의 ‘오오바 사관(大場史観)’이라 할 수 있다.
주자학의 윤리와 일본 자본주의의 정신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서 자본주의의 발흥 배경에 프로테스탄티즘이 있었다고 논한 것처럼, 일본 자본주의의 정신에는 혹시 주자학의 윤리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가설을 제기해 보고 싶어질 만큼, 이 책은 자극적이다.
그 일본 자본주의의 정신을 파괴하고, 40년에 걸쳐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위치에 군림해온 신자유주의는 이제 그 실패가 명백해졌으며, 이미 효력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비전은 아직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오오바 카즈오가 “간세이 개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마츠다이라 사다노부는 ‘미완의 명재상’으로서 사상적으로 계속 살아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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