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체면을 세워주던 ‘천재’ 타나카 카쿠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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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체면을 세워주던 ‘천재’ 타나카 카쿠에이
이와타 아츠시(岩田温), 2016/6/18 16:50
쇼와 58년(1983년) 10월 12일, 도쿄지방법원은 타나카 카쿠에이(田中角栄)에게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그 두 달 뒤 총선에서, 니가타(新潟) 3구에서 타나카 카쿠에이는 무려 22만 761표라는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을 확정지었다. 사적인 이야기라 송구하지만, 나는 이 쇼와 58년 9월에 태어났다. 당연히 타나카 카쿠에이에 대한 기억은 없고, 나에게 타나카 카쿠에이란 책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에 불과하다.
타나카 카쿠에이라고 하면 흔히 금권정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인물이기에, 나는 그에게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그에게서 무언가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타나카 카쿠에이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된 계기는 어느 선배와의 만남이었다.
대학생이었는지 대학원생이었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시즈오카현의 한 공부 모임에 강사로 초청된 적이 있었다. 그 강연에서 사회를 맡았던 이는 와세다대학교 출신의 중소기업 사장이었다. 강연회에서는 “이와타 선생님”이라며 나를 높여 불렀지만, 2차 모임에서는 “이와타 군”이라 부르며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나라를 떠받치고 있는 건 중소기업이야.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고, 중소기업이 살아나야 일본이 살아난다.”
그는 중소기업 사장으로서의 애환을 자주 이야기했지만, 그날 밤 나에게 건넨 엄정한 지적이 지금까지도 마음에 남아 있다.
“이와타 군의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동의하지만, 너무 어렵다. 헌법도, 대동아전쟁도, 보수주의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렵단 말이야. ‘보통 사람’이라고 할 때 이와타 군은 자기 친구들을 떠올리겠지. 그게 바로 인텔리의 나쁜 습관이야.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아저씨들, 아르바이트 일자리에 나가는 아주머니들이 바로 보통 사람이야. 대학에 가지도 않았고, 책도 안 읽어. 신문 사설조차 읽기 어렵지. 그게 보통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이 대다수야.”
그의 지적은 분명 타당했지만, 그렇다면 학문은 성립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론하자, 선배는 이렇게 물었다.
“타나카 카쿠에이, 어떻게 생각해?”
솔직히 별 관심이 없다고 답하자, 선배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 그래서 아직 미숙한 거야. 왜 많은 국민이 ‘카쿠에이 선생, 카쿠에이 선생’ 하며 따랐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 우선 타나카 카쿠에이에 대해 공부해봐.”
선배의 말에는 일리가 있다고 느낀 부분도 있었고, 거기까지 말한다면 다음에는 타나카 카쿠에이 논평이라도 맞붙어 보자는 생각이 들어, 그날 이후 타나카 카쿠에이에 관한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다양한 카쿠에이 논평이 있었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역시 하야사카 시게조(早坂茂三)가 쓴 카쿠에이 논평이었다. 물론 측근이었던 하야사카가 쓴 만큼 미화된 부분도 많을 것이고, 부정적인 측면을 다루지 않은 대목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타나카 카쿠에이를 단죄할 생각으로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많은 국민이 타나카 카쿠에이를 좋아했는지 탐구하려 했기 때문에, 이른바 ‘금권정치’라 불리는 부분에는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읽어 나갔다. 많은 국민이 타나카 카쿠에이를 사랑했던 이유는, 그가 서민의 마음, 약자의 감정을 읽어내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기 때문이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서민의 ‘생활’을 중시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체면을 세워주는 데 천재적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야사카 시게조의 저술에서 몇 가지 상징적인 일화를 인용해 보자. 먼저, 선거 때 전국의 후보자들에게 현금을 전달할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관한 지도다.
“이 돈은 각별한 마음으로 건네라. 자, 받아라, 펑— 이런 기분이 너에게 티끌만큼이라도 있으면, 상대는 곧 알아챈다. 그런 식이면 백만 엔을 건네도 한 푼의 가치도 없다. 돈을 전하는 네가 머리를 조아려라(도게자(土下座)해라).”
― 『가마를 타는 사람, 메는 사람(駕籠に乗る人担ぐ人)』(쇼텐샤(祥伝社)), 70쪽
“돈을 전하는 네가 도게자해라.”
상식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지시지만, 확실히 정치인은 자존심이 강한 존재다. 그런 자존심 강한 정치인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돈을 건넨다면, 겉으론 따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불만을 품는 ‘면종복배(面従腹背)’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뜨악한 지시 같지만, 타나카 카쿠에이의 지도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이다. 카쿠에이에게 보고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하야사카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카쿠에이는 나에게 말할 것이 있으면 먼저 결론부터 말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이유는 세 가지로 제한하라 했다. 그것을 입으로 말하지 말고, 말해도 다른 일이 많아 잊어버리니 메모를 하라. 편지지 한 장에 큰 글씨로 적어라.”
― 『버리는 신이 있으면 줍는 신도 있다(捨てる神に拾う神)』(쇼텐샤), 57쪽
또한, 처음으로 니가타 3구의 선거 지원에 들어갈 때는 다음과 같은 지도가 있었다고 한다.
“거짓말을 하지 마라. 금방 들킨다. 멋들어진 말을 하려고 하지 마라. 이어지지 않는다. 젊은 네가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해라. 자신의 말로 말해라. 빌린 말은 안 된다. 크게 외치고, 땀투성이가 되어 해라. 농사짓는 분들을 얕잡아 보고 대충하지 마라. 불덩이가 되어라. 그래야 남들이 따라 불붙는다. 잔꾀로는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 『둔한 소도 뿔이 있다(鈍牛にも角がある)』(코분샤(光文社)), 145쪽
“잔꾀로는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열정이며 꾸밈없는 태도라는 뜻일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타나카 카쿠에이라는 인물은 ‘처세’에 능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었지만, 그 계산은 ‘보통 사람’을 소중히 하려는 따뜻함에서 나온 계산이었지, 결코 차가운 계산이 아니었다. 애정과 지성이 반드시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한 것이 바로 타나카 카쿠에이의 인간 장악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 특히 젊은이들에 대한 그의 애정을 보여주는 일화도 소개해두고자 한다.
어느 날, 프랑스의 유력지 『르 몽드』의 극동지국장 로베르 귈랭(Robert Guillain)이 카쿠에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자민당 본부 앞을 “미·일 안보조약(安保条約) 반대!”를 외치며 시위하는 젊은이들의 행진이 지나갔다.
귈랭이 그 젊은이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묻자, 카쿠에이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그들은 일본의 소중한 아들들입니다. 지금은 홍역을 앓고 있지만 곧 나을 것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어 가정을 꾸리고 아이가 생기고 아버지가 되면, 세상이 이상이나 이론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학에서 제대로 공부도 안 하고 마작 굳은살이나 만들고, 여자 뒤만 쫓고, 외제차 이름만 잔뜩 외우는 녀석들에 비해, 저 친구들이 훨씬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보와 가위는 쓰기 나름입니다. 쓰는 쪽이 제대로만 한다면, 저 학생들은 장차 세상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 『가마를 타는 사람, 메는 사람』138–139쪽
타나카 카쿠에이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애정을 가지고 세심히 살피면서, “보통 사람”의 “생활”을 최우선에 두는 정책을 내걸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의 미래를 결코 비관하지 않았고, 젊은 세대에 대한 기대를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무애한 태도. 매력적인 인물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나 역시 선배의 강한 권유에 따라 타나카 카쿠에이에 대해 공부하면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타나카 카쿠에이를 공부함으로써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사유할 수 있었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생활”을 중시하는 태도를 배운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타나카 카쿠에이에게도 정치적 신념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헌법 개정이다. 타나카는 요시다 시게루(吉田 茂)가 재군비를 하지 않고 경제성장에 전념한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일본국헌법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이질감을 가지고 있던 정치가 중 한 사람이었다.
카쿠에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어찌 되었든, 헌법은 어느 나라의 것이 아니라 일본의 헌법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성립된 과정에 조금이라도 의문이 있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국가에 자유가 없고, 주권이 존재하지 않을 때 헌법을 만들 수 있겠는가? 어떻나? 그런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주권을 구속하는 힘이 존재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헌법은 무효다, 이것이 내가 국회의원이 되었을 무렵부터 선배들에게서 배워온 생각이다.”
― 『타나카 카쿠에이 회상록(田中角栄回想録)』, 슈에이샤 문고(集英社文庫), 45쪽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점령이 끝나 일본이 독립을 회복했을 때 지금의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쳤어야 했다. 어쨌든, 현행 헌법에 대해 어딘가 답답함이 남아 있거나,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헌법의 성립 과정에 의문을 가진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시대 변화에 맞추어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말이야, 나의 아이들, 손자들, 다음 세대의 국민이 앞으로 오랫동안 국가의 기본법, 최고법규로서 지켜갈 수 있는 그런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략)... 헌법처럼 중요한 것은 국민 모두가 언제든 논의할 수 있도록, 항상 제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두어야 한다.”
― 『타나카 카쿠에이 회상록』, 슈에이샤 문고, 46쪽
타나카 카쿠에이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탁월한 천재였을 뿐 아니라, 동시에 헌법 개정을 주장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오늘날 타나카 카쿠에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헌법 개정론자로서의 타나카 카쿠에이는 잊혀져 있다. 그의 매력과 인간 장악술을 배우는 일은 물론 의미가 깊다. 그러나 그토록 융통성 있는 인물이면서도 헌법 개정에 관해서만큼은 일관된 신념을 지닌 정치가였다는 사실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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