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권 사고관의 구조적 해부-2
6. 동경은 굴종이 아니다: 문화 권력의 비대칭성
영미권의 여섯 번째 특징은 문화적 영향력과 정치적 종속을 분리하는 능력이다. 영미권 문화(영화, 음악, 학술 저서 등)는 전 세계적으로 동경의 대상이지만, 이것이 정치적 복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화적 매력은 정치적 저항을 무력화하는 소프트파워로 작동한다.
조셉 나이(Joseph S. Nye, Jr.)가 제시한 "소프트파워" 개념은 이를 포착한다.
"[소프트 파워]는 강압이나 금전적 지불이 아니라 매력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는 능력을 말한다. 이는 한 나라의 문화, 정치적 이상, 정책의 매력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정책이 다른 이들의 눈에 정당한 것으로 여겨질 때, 우리의 소프트 파워는 강화된다."
조셉은 소프트파워를 하드파워(군사·경제력)와 대비시킨다. 미국은 할리우드, 하버드, 재즈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는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 모방을 유도한다.
영국 제국주의는 이 논리의 선구자였다. 대영제국은 식민지 엘리트를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에 교육시켰다. 인도의 네루, 가나의 은크루마, 케냐의 케냐타는 모두 영국에서 교육받았다. 이들은 독립 투사였지만, 동시에 영국 문화를 내면화했다. 독립 후에도 영연방(Commonwealth)에 남은 것은 이 문화적 유대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순수한 매력만은 아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더 어두운 측면을 드러낸다.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주요한 상부구조적 ‘수준’을 설정하는 일이다. 하나는 흔히 ‘사적’이라고 불리는 여러 조직들의 총체인 ‘시민사회’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사회’, 즉 ‘국가’이다. 이 두 수준은 한편으로는 지배 집단이 사회 전반에 걸쳐 행사하는 ‘헤게모니’의 기능에,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와 ‘법적’ 정부를 통해 행사되는 ‘직접적 지배’ 혹은 명령의 기능에 각각 대응한다.
[...]
한 사회 집단은 정부 권력을 획득하기 전에 이미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사실상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이는 그러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주요 조건 중 하나이다). 이후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 그 집단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지만, 설사 그 권력을 확고히 손에 쥐고 있더라도 계속해서 ‘지도’해야만 한다.
그람시는 지배가 강제만이 아니라 동의(consent)를 통해 작동함을 보였다. 피지배 계급이 지배 계급의 세계관을 내면화하면, 명시적 억압이 불필요해진다. 영미권 문화의 전 세계 확산은 이러한 헤게모니의 구축이다.
프랑스는 다른 전략을 택했다. 프랑코포니(Francophonie)는 프랑스어와 문화를 확산시키는 동시에 외교적·정치적 영향력의 기반으로도 기능해 왔다. 프랑스는 독립 이후에도 아프리카 옛 식민지들에 군사적·경제적 개입을 지속해 왔고, 이른바 “프랑스아프리크(Françafrique)”는 종종 신식민주의적 관계의 사례로 비판된다. CFA 프랑 통화 체제 역시 서·중부 아프리카 여러 국가가 여전히 사용하며, 이들은 오랫동안 외환보유액의 일정 비율을 프랑스 재무부 계좌에 예치해 왔다. 이는 문화적 동경이라기보다 구조적 의존 관계로 이해하는 시각이 적지 않다.
독일의 문화정책은 또 다른 모델이다. 독일문화원(Goethe-Institut)은 독일어와 문화를 전파하는 기관으로, 전후 독일의 국제적 신뢰 회복과 과거사 반성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다. 독일은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할 때 정치적 도구화로 보이는 것을 조심스럽게 경계하며, 문화 외교의 자율성과 비정치성을 강조해 왔다.
러시아는 소프트파워 구축에 실패했다. 소련 시절 볼셰비즘의 이념적 매력은 있었지만, 문화적 흡인력은 제한적이었다. 러시아 문학과 발레는 존중받지만, 러시아어나 생활양식을 동경하는 사람은 드물다. 현대 러시아의 RT, TASS Rossiya Segodnya 등과 같은 국영 미디어는 정보전에 가깝지 소프트파워가 아니다.
중국은 소프트파워 구축을 국가 전략의 핵심으로 삼아 왔다. 그 일환으로 공자학원은 전 세계에 500곳 이상 설립되었지만, 운영 과정에서 검열(어떤 주제를 다룰 수 있는지, 어떤 관점을 교재에 담을 수 있는지, 어떤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검열), 학문적 자유 침해, 정치적 선전 의혹 등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2020년을 전후해 미국과 호주의 여러 대학이 공자학원과의 협력을 종료하거나 폐쇄 조치를 취했다. 이로 인해 중국 문화 자체의 매력보다 중국 정부의 정치적 목적이 먼저 부각되면서, 공자학원은 예상했던 소프트파워 효과를 충분히 얻지 못하고 있다.
조슈아 커를란치크(Joshua Kurlantzick)는 『매력 공세(Charm Offensive)』에서 중국의 소프트파워 전략의 한계를 분석한다. 그는 중국의 외교가 지나치게 국가 주도적이며, 공산당의 우선순위를 반영한다는 인식 때문에 효과가 제한된다고 지적한다. 할리우드가 민간 산업인 반면, 중국 문화 산업은 당의 검열 하에 있다. 이는 자발적 동경을 유도하기 어렵게 만든다.
일본은 독특한 사례다. 전후 일본은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놓였지만, 1980년대 경제적 부상과 함께 문화적 영향력 또한 확대해 나갔다.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등은 전 세계 젊은 세대의 취향을 형성할 정도로 강한 매력을 지니게 되었고, 더글러스 맥그레이(Douglas McGray)는 2002년 글 “Gross National Cool”에서 일본의 이러한 문화적 위상을 강조했다. 그는 이 현상이 정부 주도보다는 민간 창작자들의 자발적 활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했다. 이후 일본 정부는 이 개념을 받아들여 ‘Cool Japan’ 정책으로 발전시키며 문화 외교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본은 다시 한 번 초강대국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언론에 널리 보도된 정치적·경제적 난관 속에서도 일본의 세계적 문화 영향력은 조용히 확대되어 왔다. 팝 음악에서 소비자 전자제품, 건축에서 패션, 애니메이션에서 요리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1980년대 경제 대국이었을 때보다 오늘날 오히려 문화 대국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매체 활용 능력을 바탕으로 그에 걸맞은 강력한 국가적 메시지도 투사할 수 있을까?”
한국의 한류(韓流)는 21세기 소프트파워의 새로운 모델이다. K-pop, K-드라마, K-영화는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소프트파워는 정치적 영향력으로 직접 전환되지 않는다. 한류 팬들이 한국의 외교 정책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영미권의 "동경≠굴종" 논리는 제국주의의 세련된 형태일 수 있다. 문화적 동경은 경제적·정치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제3세계 엘리트가 영어를 배우고 하버드를 꿈꾸는 것은 자발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조적 강제다. 영어 능력이 국제 노동시장에서 프리미엄을 받는 것은 영미권의 패권을 드러낸다.
7. 비효율을 근절하기 위한 비용은 비효율의 우선순위를 낮추는 데 쓰는 것이 더 좋다: 실용주의적 관용
영미권의 일곱 번째 특징은 완벽한 효율성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든 비효율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비용이 크며, 종종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따라서 영미권은 "충분히 좋은" 수준을 받아들이고, 치명적이지 않은 비효율은 용인한다.
이는 경제학의 "만족화"(satisficing) 개념과 연결된다. 허버트 사이먼(Herbert A. Simon)은 완전한 합리성이 불가능함을 지적했다.
인간의 마음이 복잡한 문제를 공식화하고 해결하는 능력은, 현실 세계에서 객관적으로 합리적인 행동(또는 그러한 객관적 합리성에 대한 합리적인 근사치)을 위해 요구되는 문제의 규모에 비해 매우 작다.
사이먼의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 개념은 최적화(optimization)가 아니라 만족화를 추구해야 함을 시사한다. 영미권의 법 체계, 관료제, 자본 시장은 모두 이 원칙을 따른다.
영미권의 관습법(common law) 체계는 완벽한 법전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대신 판례의 축적을 통해 점진적으로 발전한다. 이는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사회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형성 및 발전한 대륙법(civil law)은 정반대다. 나폴레옹 법전은 모든 법률 관계를 체계적으로 규정하려 했다.
법학자 존 헨리 메리먼(John Henry Merryman)은 『대륙법 전통(The Civil Law Tradition)』에서 대륙법(civil law)과 관습법(common law)의 근본적 차이를 설명한다. 대륙법 체계는 포괄적인 법전을 통해 명확성과 예측가능성을 제공하려 하지만, 이는 경직성의 대가를 치른다. 반면 관습법은 판례의 축적을 통해 발전하며, 애매하고 비효율적이지만 사회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미국의 정치 제도는 의도적으로 비효율적이다. 상원 필리버스터는 소수당이 입법을 무기한 지연시킬 수 있게 한다. 이는 명백히 비효율적이지만, 급진적 변화를 막는 안전장치로서 기능하며 극단적 민주주의를 방지한다. 이를 제거하려는 시도는 반복적으로 실패했는데, 제거 비용(정치적 갈등, 선례 파괴)이 크기 때문이다.
대륙 유럽은 효율성을 더 추구한다. 독일 관료제는 막스 베버가 찬양한 합리성의 모델이다. 모든 절차가 명문화되고, 규칙이 일관되게 적용된다. 이는 예측가능하고 부패가 적을 가능성이 있으나, 경직적이다.
프랑스의 그랑제콜(Grandes Écoles) 시스템은 엘리트를 효율적으로 선발하고 훈련시킨다. 국립행정학교(ENA) 출신들이 정계와 관계를 지배한다. 이는 능력주의적으로 보이지만, 사회 이동성을 제한한다. 영미권의 옥스브리지와 아이비리그도 엘리트를 재생산하지만, 덜 제도화되어 있다.
스칸디나비아 모델은 효율성과 평등을 동시에 추구한다. 스웨덴의 관료제는 투명하고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높은 세금과 복지를 통해 재분배한다. 이는 영미권의 "비효율 용인"과 대륙 유럽의 "효율 추구" 사이의 제3의 길이다.
동아시아는 효율성을 강하게 추구한다. 중국의 과거제는 관료 선발을 표준화했고, 이는 제국 통치의 효율성을 높였다. 현대 중국의 일당 독재는 민주주의의 "비효율"을 피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시진핑은 "제도 우위"를 강조하며, 서구 민주주의의 정치적 교착을 비판했다.
싱가포르는 극단적 효율성 추구의 사례다. 리콴유는 "아시아적 가치"를 내세우며 권위주의적 근대화를 정당화했다. 부패 척결, 경제 계획, 사회 통제는 모두 효율성의 이름으로 수행되었다. 결과적으로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국가 중 하나가 되었지만, 개인의 자유는 일정 부분 제한된다.
한국의 발전국가 모델도 유사하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국가 주도 산업화를 효율적으로 달성했다. 재벌은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며 자원을 집중했다. 이는 "압축 성장"을 가능하게 했지만, 정경유착의 문제를 낳기도 했다.
일본 기업의 "카이젠(改善)" 관습은 지속적 개선을 추구한다. 도요타 생산 방식은 비효율을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는 과로 문화를 초래했다. 효율성 추구가 인간적 비용을 무시하는 결과다.
8. 멋지게 틀린 것은 평범하게 맞은 것보다 더 훌륭하다: 독창성의 숭배
영미권의 여덟 번째 특징은 독창성과 대담함을 정확성보다 높이 평가한다는 점이다. 실패하더라도 야심찬 시도가, 안전하지만 평범한 성공보다 존경받는다. 이는 위험 감수를 장려하고, 혁신을 촉진하는 문화적 기제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경구가 이를 포착한다.
”위험하지 않은 아이디어는 아이디어라고 불릴 가치가 없다.“
와일드에게 진정한 아이디어는 본질적으로 위험하다. 안전하고 검증된 것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상식이다. 영미권 문화는 이러한 지적 모험주의를 칭찬한다.
실리콘밸리는 이 정신의 경제적 구현이다. "빨리 실패하고 자주 실패하라"라는 말은 스타트업 문화의 모토다. 실패는 수치가 아니라 학습 과정이다. 벤처 캐피탈은 10개 투자 중 9개가 실패해도, 1개의 대박이 모든 손실을 메운다는 것을 안다.
영국의 과학 전통도 이를 보여준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발표 당시 대담한 가설이었고, 많은 증거가 부족했다. 그러나 다윈의 "만약 틀렸다면 멋진 오류였을 것"은 과학 혁명을 촉발했다. 반면 동시대의 더 신중한 연구들은 잊혔다.
미국 대학의 종신 재직권(tenure) 시스템은 이 원칙을 제도화한다. 교수는 종신 재직권을 받으면 해고될 수 없으므로, 위험한 연구를 할 수 있다. 이는 학문의 자유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독창성을 장려한다.
대륙 유럽은 다른 접근을 취한다. 독일의 학문 전통은 철저함을 강조한다. 박사 학위는 수년간의 꼼꼼한 연구를 요구한다. 이는 높은 질을 보장하지만, 대담한 가설은 억제될 수 있다.
프랑스의 그랑제콜 시스템은 엘리트를 훈련시키지만, 정해진 커리큘럼을 따른다. 국립행정학교(ENA)나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들은 뛰어나지만,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북유럽의 얀테의 법칙(Janteloven)은 영미권과는 정반대 가치관을 보여준다. 아크셀 산데모세가 1933년 소설 『도망자는 자신의 흔적을 가로지른다』(En flyktning krysser sitt spor)에서 묘사한 얀테 법칙(Janteloven)은 스칸디나비아 사회의 평등주의적 규범을 포착한다. 이 법칙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당신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우리만큼 좋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우리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얀테의 법칙은 개인의 돌출을 억제하고 공동체를 강조한다. 스칸디나비아 사회의 높은 평등주의적 특성은 이와 연결되지만, 동시에 탁월함에 대한 야망을 제한할 수 있다. 노벨상 수상자 수를 인구 대비로 보면 스칸디나비아가 높지만, 이는 주로 과학 분야이며 기업가 정신은 상대적으로 약하다.
남유럽의 이탈리아는 또 다른 변주를 보여준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는 대담한 예술적 혁신의 중심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멋지게 틀린" 사람의 전형이다. 그의 수많은 프로젝트는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그의 천재성은 의심받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 이탈리아는 관료주의에 얽매여 혁신이 제약된다.
동아시아의 유교 문화는 정확성과 근면을 강조한다. "틀림"은 부끄러운 것이며, 완벽함을 추구해야 한다. 중국의 과거제는 경전 암기의 정확성을 시험했다. 독창성보다는 전통에 대한 충실함이 평가되었다.
일본의 장인 정신은 완벽을 향한 평생의 노력이다. 노령의 장인들이 아직도 자기의 기술이 부족하다고 말하곤 하는 것은 겸손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완벽주의의 문화를 반영한다. "멋지게 틀린" 것은 용인되지 않는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정답 맞히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수능은 객관식 시험이며, 모든 질문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다. 창의성은 구호로는 강조되지만, 실제 평가에서는 정확성이 우선한다. 이는 높은 학업 성취도를 낳지만, 독창적 사고를 억제할 수 있다.
중국의 ‘보통 고등학교 초생 전국 통일고시(普通高等学校招生全国统一考试)’는 더욱 극단적이다. 수억 명의 학생이 동일한 시험을 치르며, 0.1점 차이가 인생을 결정한다. "멋지게 틀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맞거나, 틀렸거나 둘 중 하나다.
최근 중국은 나름대로 혁신을 강조하며 변화를 시도한다. 텐센트, 알리바바 같은 기업은 대담한 시도를 한다. 그러나 이는 당의 통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마윈의 ANT 그룹 IPO 취소는 독창성의 한계를 보여준다. "멋지게 틀린" 것이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즉시 제재받는다.
9. 외부의 적은 이러한 가치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알려줘도 이해 못할 대상이 가장 좋다: 적의 타자화
이 명제는 영미권 정치문화가 외부의 적을 단순한 군사적 위험이 아니라 정체성·제도·규범 자체를 재강화하는 장치로 활용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적이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일수록 좋다는 전제는, 내부의 제도를 스스로 자연화하고 신성화하는 효과를 갖는다.
이 접근의 철학적 원형은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The Concept of the Political)’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정치적 행동과 동기를 구분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치적 구분은 친구와 적 사이의 구분이다.
슈미트는 정치의 본질을 “친구와 적의 구분”이라고 규정했는데, 여기서 적은 단순한 경쟁자가 아니라 존재론적 타자다.
영미권은 이 구분을 제도적·문화적 실천의 차원에서 실제로 구현해 왔다. 적을 “우리와 다른 이해구조를 가진 존재”로 설정함으로써, 내부의 분권적 질서—관습법, 지방 자치, 시민사회의 자율성—는 외부의 위협을 통해 오히려 강화된다.
영미권은 근대 초부터 국가보다 사회적 결속이 우선 형성되는 특유의 경로를 걸어왔다. 국가는 사회의 결과였고, 공동체의 정체성은 협상과 계약을 통해 생산되었다. 따라서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핵심 요인은 밖으로부터의 위협이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연방주의자 논집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 이 나라에서는 상황이 전혀 반대로 전개될 것이다. 상비군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군사적 조직은 가능한 한 오래 미뤄질 것이다. 요새가 부족하여 한 주의 국경이 다른 주에게 그대로 열려 있으면, 침입은 훨씬 쉬워진다. 인구가 많은 주는 큰 어려움 없이 인구가 적은 이웃 주들을 압도할 것이다. 정복은 쉽게 이루어지겠지만, 유지하기는 극도로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분산적이고 약탈적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약탈과 파괴는 항상 규칙 없는 병력의 이동과 함께 다닌다. 개개인이 겪는 재난이 우리의 군사적 활동을 특징짓는 주요 장면이 될 것이다.
이러한 묘사는 과도하게 그려진 것이 아니다. 다만 솔직히 말해, 그것이 오래도록 정확한 모습으로 유지되지는 못할 것이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의 안전은 국가 행동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지배 요소이다. 열렬한 자유애조차도 시간 앞에서는 그 요구에 굴복하게 된다. 전쟁에 따르는 생명과 재산의 격렬한 파괴, 끊임없는 위험 상태에서 요구되는 지속적 긴장과 불안은, 가장 자유를 사랑하는 국가들마저도 결국은 그들의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파괴할 경향이 있는 제도에 안정과 안전을 위해 의지하도록 만들 것이다. 더 큰 안전을 얻기 위해, 그들은 마침내 덜 자유로워질 위험을 감수하는 데 기꺼워지게 된다.”
외부의 위협에 대한 감각이 공동체의 행동을 조종하는 핵심 동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현 영미권의 전략적 발상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적이 우리와 같은 논리로 사고할 수 없다’는 전제를 도입함으로써, 내부 규범·제도는 설명을 넘어 신뢰의 문제가 된다. 이것이 “적의 무지가 유리하다”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
영미권의 핵심 제도적 특징은 수평 분권 구조다. 의회주의, 관습법, 지방분권, 시민사회의 힘은 중앙집권적 권위가 약할수록 더 강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중앙의 약함은 외부의 위협이 없을 때 내부 분열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영미권 정치질서가 안정되려면, 외부의 적이 단순히 강해서가 아니라 이해의 지평 자체가 다른 타자여야 한다.
이 점은 냉전 전략을 설계한 조지 케넌의 글인 ‘소련 행동의 원천(THE SOURCES OF SOVIET CONDUCT)’에서 정확히 드러난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소련 권력의 정치적 성격은 이념과 상황의 산물이다: 현재 소련 지도자들이 정치적 기원을 둔 운동으로부터 계승한 이념과, 그들이 러시아에서 거의 30년 동안 행사해 온 권력의 상황이다. 이 두 힘의 상호작용과 공식 소련 행태 결정에 있어 각각의 상대적 역할을 추적하려는 시도는 심리 분석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행태를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반드시 시도해야 한다.
[...]
역사적 배경은 이 정도로 하자.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소련 권력의 정치적 성격에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래의 이념 중 공식적으로 폐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본주의의 근본적 악성, 그 멸망의 필연성,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멸망을 돕고 권력을 장악할 의무에 대한 믿음은 유지된다. 그러나 강조점은 이제 주로 소련 체제 자체와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된 개념들, 즉 어둡고 그릇된 세계에서 유일한 진정한 사회주의 체제로서의 그 위치와 체제 내 권력 관계에 두어지고 있다.
[...]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소련에 대한 정책의 핵심 요소는 러시아의 팽창적 성향을 장기적이고 인내심 있게, 그러나 확고하고 경계하며 억제하는 것이어야 함이 분명하다. 다만 이러한 정책은 위협이나 허세, 또는 과도한 '강경함'을 과시하는 외적 제스처와 무관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크렘린은 정치적 현실에 대한 반응에서 기본적으로 유연하지만,
위신에 대한 고려를 전혀 무시하지는 않는다. 거의 모든 정부와 마찬가지로,
무례하고 위협적인 제스처로 인해 현실주의적 판단이 양보를 요구할지라도
양보할 수 없는 입장에 몰릴 수 있다. 러시아 지도자들은 인간 심리를 예리하게 판단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분노와 자제력 상실이 정치적 상황에서 결코 힘의 원천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약점의 증거를 재빨리 이용한다. 이러한 이유로 러시아와의 성공적인 교섭을 위한 필수 조건은 해당 외국 정부가 항상 냉정하고 침착함을 유지하며,
러시아 정책에 대한 요구를 러시아의 위신에 지나치게 해를 끼치지 않는
수용의 길을 열어두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
미국이 가까운 미래에 소련 정권과 정치적 친밀감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미국은 정치 무대에서 소련을 파트너가 아닌 경쟁자로 계속 간주해야 한다. 소련의 정책은 평화와 안정에 대한 추상적인 애정이나 사회주의 세계와 자본주의 세계의 영구적 공존 가능성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 모든 경쟁적 영향력과 경쟁적 권력의 분열과 약화를 향한 신중하고 지속적인 압박을 반영할 것임을 계속 예상해야 한다.
이에 상응하는 사실은 러시아가 서구 세계 전반과 달리 여전히 훨씬 약한 입장에 있으며, 소련 정책은 매우 유연하며, 소련 사회에는 결국 그 자체의 총체적 잠재력을 약화시킬 결함이 내재되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만으로도 미국은 합리적인 확신을 가지고 확고한 봉쇄 정책을 추진할 근거가 된다. 이 정책은 평화롭고 안정된 세계의 이익을 침해하려는 징후를 보일 때마다 변함없는 대응력으로 러시아에 맞서도록 설계된 것이다.
소련은 영미권의 제도적·정치적 논리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된다. 이 해석은 단순한 선전이 아니라, 내부 제도를 외부 위협에 맞서 정당화하는 효과를 갖는다.
다시말해, 적이 영미권의 가치 체계를 이해하면 곧바로 협상·타협의 여지가 생기지만, 적이 영미권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면 영미권 내부 제도는 신성화되고, 분권적 질서가 흔들리지 않는다.
북유럽(덴마크·네덜란드·스웨덴) 지역 복지국가 모델은 높은 제도 신뢰와 강력한 국가능력을 토대로 하며, 공동체 결속이 외부 타자에 의존하지 않는 편이다. 적은 이해 불가능한 타자라기보다 협상 가능한 행위자다.
독일·프랑스 등 대륙 서유럽 등지의 계몽주의적 설계 국가 전통은 외부의 적을 문명적 타자라기보다 이성적 경쟁자로 바라본다. 슈미트적 적대성은 존재하나, 영미권처럼 “이해의 지평을 넘는 타자”는 아니다.
남유럽(이탈리아·스페인)등지에서는 가문·지역주의의 영향으로, 적은 외부 타자보다 내부 파벌의 확장에 가깝다. “타자의 무지”는 정치적 틀을 구성하지 않는다.
동유럽·발칸 지역은 제국 지배 경험과 다민족 구조 때문에, 적은 철저히 군사적·현실적 위협이다. 영미권처럼 제도 정당화 장치로 타자를 활용하는 경향은 약하다.
그리고 동아시아(한국·중국·일본) 등지에서는 유교적 문치주의 속에서 적은 ‘이해 불가능한 타자’라기보다는 법도를 무너뜨린 위반자로 규정되었다. 즉, 적이 제도를 어지럽혀 문제가 된다.
서아시아 지역과 같은 부족·종파 중심 질서에서는 적의 정체성도 주로 종파적 구분에서 온다. 영미권처럼 “이해 불가능한 타자”가 제도 정당화의 핵심 토대가 되지는 않는다.
정리하면, 영미권은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이해할 수 없는 적”을 선호한다. 내부 분권적 질서를 강화하기 위해서이다. 외부 타자가 강할수록, 내부의 갈등은 사소해진다.
또한 제도의 정당성을 재생산하는데 도움이 된다. 적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제도를 ‘설명할 필요 없는 질서’로 승격시킨다.
그리고 비공식 권력집단의 규범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언론·학계·비정부기구 등은 외부 타자를 “영미적 자유주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로 재현하며 스스로의 권위를 강화한다
10. 당장 외부 적이 존재하지 않으면 대가를 치르더라도 직접 만드는 것이 좋다: 적 창출의 전략성
“만약 소련이 내일 당장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진다 하더라도, 미국의 군산복합체는 거의 변함없이 계속 유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적을 ‘발명해내기’ 전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 경제는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을 겪게 될 것이다.”
— 조지 F. 케넌
생각해 보라. 당신이 X국에서 정부가 반란군과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 어느 쪽에 베팅하겠는가? 당연히 정부다. 왜냐하면 정의상 더 강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인원과 더 많은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부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반란은 겉보기와 다르다. 그것은 정치적 청중을 위한 환상이다. 시드니 조지 피셔(Sydney George Fisher)가 옳다면, 1783년에 승리한 것은 대륙육군(Continental Army)이 아니라 대륙육군과 영국 휘그당의 연합이었다. 그들은 크롬웰(Cromwell)의 죽음으로 붕괴된 옛 휘그 공화국을 대체할 새로운 휘그 공화국을 만들었다. 둘 중 어느 쪽도 혼자서는 이 임무를 달성할 수 없었다.
반란, 우리가 지금 "테러리즘"이라고 부르는 것도 포함하여, 일종의 극장이다. 게릴라 연극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 정치의 부속물로 존재하며, 민주정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반도 전쟁(Peninsular War(1808–1814)) 유형의 당파 캠페인은 제외하겠다. 반도 전쟁에서 게릴라가 전쟁의 보조 수단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반란의 목표는 단순히 그 지지자들의 정치적 요구가 충족될 때까지 폭력이 계속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군사적 부문은 폭력을 일으킨다. 정치적 부문은 일반적으로 폭력을 비난하면서도, 그 폭력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뿐이라고 설명한다.
이 설계의 아름다움은, 적어도 악마의 관점에서는, 전혀 조정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분산되어 있다. "명령과 통제"가 없다. 정치인과 테러리스트가 좋은 친구일 때 종종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반란 설계에서는 둘 다 서로의 행동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며, 어떤 범죄적 연결도 없다. 그들은 심지어 그 노력을 협력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반란군과 정치인은 가치 체계를 공유할 필요도 없다. 예를 들어, 아이만 알자와히리(Ayman al-Zawahiri)가 미국 진보주의자들과 어떤 가치를 공유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나는 셰이크 알자와히리가 원하는 대로 정부를 만들 경우 어떤 정부가 될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진보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누구의 중간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그러나 셰이크 알자와히리(Sheikh al-Zawahiri)가 2006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승리를 무자헤딘의 공으로 돌렸을 때, 그는 객관적으로 옳았다. 민주당은 이라크가 미국 군대(모두가 알다시피 공화당 소속)가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이 될 것이라는 그들의 예측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에 승리했다. 무자헤딘이 없었다면, 누가 이라크를 수렁으로 만들었겠는가? 외계인인가?
적절한 피드백 루프를 만들려면 정치인의 노력이 반란군을 도와야 하고, 반란군의 노력이 정치인을 도와야 한다. 알자와히리 효과—이는 정확히 유일한 사례는 아니다—는 후자의 좋은 예다. 전자는 우리가 반군국주의(antimilitarism)라고 부를 수 있는 휘그 정치의 경향에 의해 제공된다.
반군국주의는 "무장 투쟁"을 그것의 반대자들을 반대함으로써 돕는다. 모든 것이 동등하다면, 어떤 전문 군사력도 비전문적 상대를 물리칠 것이다. 마치 NBA 팀이 주니어 여자 농구 팀을 물리치는 것처럼. 반군국주의의 효과는 정치적, 군사적 경기장을 조정하여 반란군이 동등하거나 심지어 더 큰 승리 가능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반군국주의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전쟁은 종종 "비대칭"이라고 묘사된다. 이 용어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진정한 "비대칭" 전쟁은 한쪽이 다른 쪽보다 훨씬 강한 갈등일 것이다. 명백한 이유로, 이것은 드문 일이다. 현대의 비대칭 전쟁은 한쪽의 힘이 주로 군사적이고, 다른 쪽의 힘이 주로 정치적인 전쟁이다. 물론 이것은 정치적, 군사적 측면이 적어도 명목상 같은 정부의 일부일 때만 작동하므로 모든 비대칭 전쟁은 내전이다—비록 외국 군인이 외국 영토에서 싸울지라도.
반군국주의는 어떻게 그것을 수행하는가? 전쟁에서는 항상 그렇듯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하우 경(Lord Howe)의 경우, 매우 의도적인 군사적 무능력처럼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군사적 오판은 하우 경의 경우처럼 군사 지도부 수준에서 발생할 수 있으며, 매크나마라(McNamara)와 같은 민군 관계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 민간 지도자들이 단순히 항복할 수도 있다, 프랑스령 알제리의 경우처럼.
그러나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접근법은 전쟁의 규칙을 변경하는 것이다. 전쟁은 잔인하다. 당신이 외계인이라면, 이 잔인함에 반대하는 사람이 그것을 개선하거나 적어도 시도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a) 어느 쪽이 덜 잔인한지 결정하여 그 쪽을 지지하거나 (b) 잔인한 행동에 대한 동기를 최소화하는 전쟁 규칙을 홍보하거나 (c)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결과로 전쟁이 가능한 한 빨리 끝나도록 장려하는 것이다.
현대 진보주의는 이 행동들과 전혀 닮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그들의 정반대와 닮았다. 그것은 분명히 잔인함에 반대하는 동기에 의해 움직이지만, 그 행동들은 그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 계산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그것은 반군국주의다.
예를 들어, 현대 미국 군대는 역사상 어떤 군사력보다도 변호사 대 군인 비율이 가장 높다. 그것은 심지어 사소한 공격에서도 법적 의견을 요청하는 것을 일상적인 측면으로 삼는다. 전투의 열기 속에서 내린 판단에 대해 자신의 군인을 재판하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으며, 이는 하우 경에게는 완전히 미친 짓으로 보일 것이다. (여기에는 그 결과에 대한 개인적인 서사가 있다.) 한편, 적들은 가장 야만적인 고문을 즐긴다. 그리고 진보주의자는 어느 쪽을 선호하는가? 아니면, 그의 객관적인 행동이 어느 쪽을 지지하는가?
이렇게 전쟁의 규칙을 조정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뛰어난 방법이다.
21세기의 반군국주의자는 1960년대의 조잡한 선배들처럼 반군국주의를 공개적으로 지지할 필요가 없다. (톰 헤이든(Tom Hayden)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모두 이제 베트콩이다.") 오늘날 누구나 마우스를 클릭하면 NLF(National Liberation Front,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가 NVA(North Vietnamese Army, 북베트남군)였고 NVA가 냉혈한 살인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당시에는 이 지식이 논란의 여지가 있었고 얻기 어려웠다. 이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이제 알카에다다"라는 말은 단순히 성립하지 않으며, 그런 말을 듣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다.
임의의 수준의 반군국주의는 군사 전술을 사법 및 경찰 절차와 융합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이 볼리비아 군대에 의해 놀라운 해상 쿠데타로 침공당했다고 가정해 보자. 누가 이길 것인가? 아마도 볼리비아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볼리비아 군인들이 영국 법의 완전한 보호를 받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을 구금하는 유일한 방법은 체포하는 것이며,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있어야 기소할 수 있다. 영국에서 볼리비아인이라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물론 그들을 쏠 수는 없다. 적어도 재판과 완전한 항소 절차 없이 말이다. 포격, 공습 등과 같은 무차별 학살은 물론 문제 밖이다. 등등.
그래서 영국은 볼리비아의 한 주가 된다. 전쟁은 항상 불확실하지만, 볼리비아인들은 확실히 시도해 볼 만하다. 그들이 잃을 것은 무엇인가? 영국 감옥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야 할 몇몇 군인들뿐이다. 정확히 콜카타의 블랙홀은 아니다. 그래서 왜 안 되는가?
이것이 반군국주의가 전쟁을 일으키는 방식이다. 전쟁은 끔찍하며,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면 아무도 싸우려 하지 않는다. 반군국주의는 반군에게 그 기회를 제공한다. 이것이 피드백 루프의 다른 절반이다.
-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 열린 마음을 가진 진보주의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제5장: 세계평화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An Open Letter to Open-Minded Progressives
- Chapter 5: The Shortest Way to World Peace)
이와 같이 ‘적 창출 전략’이 단순한 음모론이 아니라 역사적·이론적 정당성이 있는 권력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는 영미권과 비슷한 식으로 외부 적을 지속적으로 필요로 한다. 푸틴 정권은 NATO의 확장을 실존적 위협으로 제시하며 권위주의를 정당화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 논리의 극단적 표현이다. 그러나 이는 영미권과 사뭇 다르다. 러시아는 적을 새롭게 만들기보다는, 실제 안보 위협을 과장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중국은 "백년국치"의 서사를 통해 서구를 적으로 규정한다. 아편전쟁부터 제국주의 침략까지의 역사는 끊임없이 상기된다. 이는 공산당 지배를 정당화한다. 중국몽 아젠다는 이 굴욕을 씻어내는 프로젝트로 제시된다.
북한은 극단적 사례다. 미국과의 적대는 정권 생존의 핵심이다. 핵무기 개발은 위협을 과장하고, 동시에 실제 위협을 만드는 과정이다. 북한은 고립을 자초하면서도, 이를 서양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북한이 위협당하고 있기 때문에 집단 자위를 위해서라며 정당화한다.
결론: 권력 분산의 역설과 적의 필연성
영미권의 사고 구조를 관통하는 근본 논리는 역설이다. 권력을 분산시키면서도 패권을 유지하고, 자기비판을 하면서도 우월성을 주장하며, 자유를 찬양하면서도 제국을 건설한다. 이 역설은 유라시아 체제의 모순과 같다기보단 정교한 권력 기술에 가깝다.
외부 적의 필요성, 선호와 우월성의 분리, 견제의 우선시, 동맹의 실용주의, 수평적 권력 분산, 문화적 헤게모니, 비효율의 용인, 대담함의 찬양, 적의 타자화, 그리고 적의 창출. 이 모든 요소는 분리된 원칙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 시스템을 이룬다.
이 시스템이 수세기 동안 작동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옳아서"라기보다는, 특정한 지정학적·제도적 조건에서 자기강화적이었기 때문이다. 비영미권이 이를 "거부"하거나 "대응"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행위주체성에 대한 영미권의 환상을 내면화한 것이다. 실제 권력 관계는 이념적 선택이 아니라 물질적 역량으로 결정된다.
패권은 도덕적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제도적 축적과 네트워크 효과 때문에 유지된다. 영어가 국제어가 된 것은 영어가 "더 나은" 언어여서가 아니라, 대영제국과 미국의 연속적 패권 때문이다. 관습법이 확산된 것은 그것이 대륙법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영국 식민지가 세계의 4분의 1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영미권의 패권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종말은 대안 체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스템 자체의 내적 모순에서 올 것이다. 영미권의 권력 분산은 정책 마비를 낳고, 적 창출은 과잉 확장을 초래하며, 불평등 심화는 사회 통합을 위협한다. 이 모순들이 축적되어 임계점에 도달할 때, 체제는 스스로 붕괴하거나 근본적으로 변형될 여지가 있다. 그때까지 영미권의 사고 구조는 세계 질서를 규정하는 지배적 논리로 남을 것이며 비영미권의 체계가 더 견고할 가능성은 영미권만큼 높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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