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블로거의 싱가폴 참주정 비평에 대한 개인적 비평

한 블로거의 싱가폴 참주정 비평에 대한 개인적 비평


네이버 블로그를 뒤적거리다 흥미로운 을 봤기에 그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카이브 링크)


차라리 이 나라가 싱가포르마냥 참주정으로 회귀했으면 어떨지싶다.


우리나라 민주정이 민주정으로써 역기능이 잔뜩 드러나는것 같다.


중우정치나 특히 20년대 들어 민주장 우위의 사회도 구역질 나올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지만, 현 민주정을 주도하는 두 진영이 배타적으로 변하고 한쪽 정파가 정권을 잡고 일군 것들이 반대편 정파가 정권을 가져가자마자 박살내는게 무한반복되는 현상도 문제다. 이러다보니 사회나 외교안보 문화 군사 같은 분야에서의 국정도 일관되지 못하고말이다.


그리고 정치가 언제부터인지 로마시대 검투 경기장과 다를게 없어졌다. 정치에 관심가진 사람들이 저마다 지지하는 리더와 그 캠프에 후원금 내는거 보면 검투장에 탐닉한 것 같지 않나?


각자 지지하는 리더에 배팅해서 그가 상대 리더를 조져주길 바라고, 리더가 패배하면(낙선, 선거지휘 패배, 구속 등) 그 울분이 일상을 좀먹는 상황이 반복되는데, 진짜 정치가 변질돼도 이렇게 변질될수가 있나?


이러니 정치에 기빨리고 일상을 살 에너지를 허비하는줄도 모르는건지 아는건지, 정치 유튜브와 정치 커뮤니티에 탐닉하는 폐인들이 많이 양산될수밖에 없다.


차라리 리씨 가문의 실권 아래 질서있는 강소국으로 돌아가고있는 싱가포르처럼 계속 참주정치가 이뤄졌으면... 정치에 관심 안가져도 잘먹고 잘살고 풍족해하는 사람들 많을텐데 말이다.


이 블로거의 글은 솔직히 말해서 꽤 읽을 만한 데가 있다. 한국 민주정치가 검투 경기장으로 전락했다는 메타포는 단순한 우울함의 표현이 아니라, 시스템이 내지르는 신음 소리를 상당히 예민하게 포착한 것이다. 문제는 이 사람이 현상을 날카롭게 봤으면서도, 그 현상이 왜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놀라울 만큼 표피적인 수준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인류학적 반동주의(ARx)의 관점에서 이 글을 해부하면, 진단의 정확성과 원인 분석의 빈곤함이 대비되어 선명하게 드러난다. 블로거가 기술한 현상(정권 교체마다 국정이 리셋되고, 지지자들이 정치에 일상을 갈아 넣고, 결국 폐인만 양산되는 구조)은 민주주의라는 운영체제가 설계상 반드시 출력할 수밖에 없는 결과다. 이건 운용의 잘못이 아니라 소스코드 자체의 문제다.


ARx가 인간을 규정하는 방식을 먼저 짚어야 한다. 인간은 이익과 서열에 민감한 무리 동물이며, 공동체를 위한 자발적 희생보다는 사익을 위한 투쟁에 훨씬 더 능숙한 종이다. 이 본성은 교육으로 교정되지 않으며, 제도 설계로 억제될 수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는 이 억제 장치를 해제한 시스템이다. "모두의 의견이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선언은 사실상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대중의 가장 저렴한 본능을 자극하라"는 초대장과 같다. 그 결과가 검투 경기장이다. 블로거가 묘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타락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블로거가 간과한 지점이 여기에 있다. 정치가 검투 경기장처럼 됐다는 것은 "변질"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이 사회적 에너지를 처리하는 기본 메커니즘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현대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고 있다. 전쟁은 지금도 일어나고, 부족주의(Tribalism)적 감정이 그 연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가 폭력의 합법적 사용을 독점한 이후, 개인이나 집단이 내부에서 물리적으로 에너지를 방출할 경로는 많이 봉쇄됐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갈 곳을 잃은 공격 본능을 투표와 정치적 증오라는 가상 전쟁으로 유도하여, 시스템 자체에 대한 물리적 타격을 지연시킨다. NRx의 언어를 빌리면 이것이 대성당(The Cathedral)이 대중에게 제공하는 "정치적 연극"이다. 대중이 서로를 미워하며 에너지를 소진하는 동안, 실질적인 권력 구조는 가려진다. 블로거가 느끼는 구역질은 이 연극의 연출이 너무 조악해져서 관객이 무대 뒤의 먼지를 발견했을 때 나오는 생리적 반응이다.


그렇다면 ARx가 지적하는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정이 박살난다"는 현상이다. 이것은 단순히 양 진영이 배타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국가가 누군가의 영속적인 자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인에게 국가는 4~5년짜리 임차물이다. 임차인은 건물을 아끼지 않는다. 자기가 떠나기 전에 최대한 뽑아 쓰고, 다음 임차인이 잘 쓰건 말건 알 바가 아니다. 블로거가 묘사하는 "무한 반복 파괴"는 이 소유 구조의 필연적 귀결이다. 진보가 나빠서도(아, 물론 현실정치에 있어서의 진보주의는 최악의 사상이 맞다.), 보수가 약해서도 아니다. 민주주의 자체가 낮은 시간선호(time preference) 통치를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ARx는 전통과 일관된 국정을 단순한 보수적 취향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살아남은 검증된 생존 알고리즘으로 본다. 민주주의의 짧은 임기 사이클과 반복적 파괴는 이 알고리즘이 정착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결과는 문명의 외골격이 스스로를 부식시키는 자가면역질환이다. 한국의 두 진영이 서로의 업적을 파괴하는 것은 외부의 적을 향해야 할 공격성이 내부로 돌아선 것이다. 북한, 중국, 인구 소멸이라는 실존적 압박 앞에서, 한국은 내부를 향해 면역 세포를 쏘아대고 있는 중이다.


블로거가 싱가포르를 끌어온 것은 직관적으로는 옳은 선택이다. 그러나 왜 싱가포르인지에 대한 이해가 치명적으로 얕다.


"정치에 관심 안 가져도 잘 먹고 잘 사는" 상태를 이상향으로 설정하는 것, 이것이 핵심적인 오류다. ARx의 언어로 말하면, 이것은 주인을 잘 만난 가축의 소망과 다를 바 없다. 잘 관리되는 축사는 가축에게 안락할 수 있다. 그러나 ARx가 지향하는 것은 가축의 안락함이 아니다.


싱가포르 모델의 본질은 안락함이 아니다. 리콴유가 구축한 것은 "말레이시아로부터의 추방"이라는 실존적 사멸의 위기가 만들어낸 인류학적 적응 기제다. 아무것도 없는 도시국가가 생존하기 위해 강제한 극한의 효율, 냉혹한 엘리트주의, 그리고 주권의 명확한 소유 구조. 이것이 싱가포르다. NRx의 용어를 빌리면 이것이 포멀리즘(formalism)이다. 책임지는 주권자가 존재하고, 그 주권자가 국가를 장기 자산으로 소유하며 관리할 때, 비로소 "무한 반복적인 파괴"가 멈춘다.


블로거는 이 냉혹한 구조는 생략한 채 안정된 결과값만 부러워하고 있다. 이것은 요리사의 손재주는 무시하고 공짜로 요리를 먹고 싶다는 태도와 같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이 블로거는 싱가포르를 "편한 나라"로 보지만, 싱가포르는 생존을 위해 안락함을 착취한 나라다. 그 안락함의 대가가 무엇인지(언론 통제, 반대 세력의 봉쇄, 냉정한 능력주의의 패자가 감수해야 할 배제)를 직시하지 않는 것은 ARx 관점에서 매우 감상적인 태도다.


여기서 NRx가 제시하는 패치워크(Patchwork) 논의도 잠깐 언급할 만하다. 수많은 작은 주권 국가들이 경쟁하게 만들어 시민이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들면 이사 가는 구조. 이것은 기술적으로 우수한 설계일 수 있다. 그러나 ARx는 여기서 NRx와 갈라진다. 인간은 서비스를 구매하는 고객이 아니다. 인간은 혈연, 지리, 역사라는 끈적한 유대에 묶인 무리 동물이다. 국가를 기업으로 추상화하는 설계는 이 부족주의적 본능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ARx가 지향하는 유기적 국가는 효율적 기업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DNA 수준에서 공동 운명체임을 자각하는 초(超)-유기체에 가깝다.


정리하면, 이 블로거의 글은 정직한 관찰의 기록이지만, ARx 기준으로는 수박 겉핥기식 회의주의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맞는 것부터 짚자. 민주정이 검투 경기장이 됐다는 진단, 정치 폐인이 양산된다는 관찰, 국정의 일관성이 파괴된다는 지적. 이것들은 모두 ARx와 정확히 공명한다. 현상을 보는 눈은 있다.


그러나 원인 분석이 빠져 있다. "좌파가 너무 세다", "보수가 약하다"는 프레임은 민주주의라는 시스템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다. ARx가 지목하는 것은 진영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통치 기술 자체다. 이 기술은 인간의 단기 이익 추구와 부족주의적 본능을 증폭시키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구조적 취약점이다.


싱가포르 동경도 절반만 맞다. 방향은 맞지만 이유가 틀렸다. "잘 먹고 잘 사는" 안락함이 목표라면, 그것은 ARx가 경계하는 가축화(domestication)의 다른 이름이다. 진정한 목표는 안락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극한의 효율이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주권의 명확한 소유와 장기 전략이다.


블로거가 느끼는 구역질은 민주주의라는 종교의 신비가 깨지고 있다는 신호다. 대중이 정치를 성스러운 권리가 아니라 천박한 검투 경기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순간, 냉정한 현실주의가 파고들 틈이 생긴다. 이 거부 반응이 임계점을 넘는 순간 무엇이 일어나느냐가 문제인데, ARx의 예측은 비관적이다. 대부분의 대중은 구역질을 느끼고도 그럴싸해보이는 리더를 찾는 방향, 즉 실속이 있는지 의심되는 검투사를 고르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쏟는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다.


그래도 이 블로거는 최소한 검투장의 관중이 스스로를 관찰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관찰이 분석으로, 분석이 시스템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려면 아직 멀었지만. 민주주의라는 유행은 지나가더라도, 질서에 대한 인간의 생물학적 갈증은 영원하다는 것만은 이 글이 본능적으로 포착해냈다. 그것만으로도 그럭저럭 읽어볼만한 글이나 아직은 정진이 필요해보인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주권(主權), 책임, 소유: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 일치의 방법론에 관하여

정치적 자유라는 이름의 버퍼(Buffer)

일본천황 황위 계승권 개정안 통과, 여성 천황 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