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랜드,자크 엘륄,케빈 카슨,루이스 멈퍼드에 대한 반동적 고찰

닉 랜드,자크 엘륄,케빈 카슨,루이스 멈퍼드에 대한 반동적 고찰

내 지인이 해외 디스코드 서버에서 나눈 흥미로운 대화 내역을 가져왔다. 지인이 해당 서버에서 랜디언(Landian), 즉 닉 랜드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는데, 그걸 보고 Zack이라는 외국인이 먼저 DM을 걸어왔다고 한다. 철학에 관심이 많은 인물로, 닉 랜드의 초기 텍스트인 「칸트, 자본, 그리고 근친상간의 금지」를 출발점으로 삼아 랜드의 자본 개념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논지를 펼친다. 자크 엘륄, 케빈 카슨, 루이스 멈퍼드를 끌어오는 방식이 단순한 아마추어 철학 토론이 아니라 상당히 정교한 수준이다. 이 대화가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랜드 비판 때문만이 아니다. 좌익 아나키즘의 분석 도구를 써서 랜드를 해부하는 구조 자체가 독특하고, 그 논점들이 인류학적 반동주의(ARx)의 시선과 교차하는 지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화 전문을 먼저 읽고 분석으로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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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전문


A: Zack / B: 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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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ell, in Nick Land's Kant, Capital, and the Prohibition of Incest, Land seems to argue that isomorphism posits an abstract pregiven from, i.e., capital, space, and time, and then the categories, for Kant, mediate encounters with otherness, and that newness is only allowed if it conforms to the old. Now, I mostly agree with this, but I think I differ very much in that it isn't capital as such, but technique itself, as Ellul highlights. Carson seems to argue the same with cultural pseudomorph, i.e., we speak of the paleotechnic and neotechnical forcing technique into the old. For example, Land talks about how capital requires the exploited other, i.e., the proletariat, to be physically excluded, i.e., in slums, and also economically included. I mostly agree with this too, but I think that this was created through subsidized neotechnics, or technique itself.


(A: 닉 랜드의 「칸트, 자본, 그리고 근친상간의 금지」에서 랜드는 동형성이 자본, 공간, 시간 같은 추상적 선험 형식을 전제하고, 칸트에게 있어 범주들은 타자성과의 만남을 매개하며, 새로움은 오직 기존의 것에 부합할 때만 허용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나는 대체로 이에 동의하지만, 핵심은 자본 그 자체가 아니라 엘륄이 강조한 기술(technique) 자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카슨도 문화적 가상(cultural pseudomorph) 개념으로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것 같다. 즉, 고(古)기술(paleotechnic)과 신기술(neotechnic)이 기술을 낡은 틀 안으로 강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랜드는 자본이 착취된 타자, 즉 프롤레타리아트를 물리적으로 배제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포함시킬 것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이 점도 대체로 동의하지만, 이 구조는 보조된 신기술, 즉 기술 자체를 통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B: Are you essentially rejecting Nick Land's notion of the irresistible agency of Capital? (A: Yes.) Does this mean you view the Landian 'Circuit of Capital' as a contingent historical error rather than an ontological destination?


(B: 당신은 본질적으로 자본의 저항 불가능한 주체성에 대한 닉 랜드의 개념을 거부하는 건가? (A: 그렇다.) 그렇다면 당신은 랜드식 '자본의 회로'를 존재론적 목적지가 아닌 우연적인 역사적 오류로 보는 건가?)


A: Have Land actually read Ellul? The Technological Society, the Technological System, and The Technological Bluff?


(A: 랜드가 실제로 엘륄을 읽은 적이 있나? 「기술 사회」, 「기술 시스템」, 그리고 「기술적 허풍」을?)


B: I see. If Land had prioritized Ellul's 'Technique,' his fatalism regarding Capital might have shifted toward a critique of technological determinism. It suggests Land might be misidentifying the symptoms of 'Technique' as the inherent traits of 'Capital'.


(B: 그렇군. 랜드가 엘륄의 '기술'을 우선시했다면, 자본에 대한 그의 숙명론은 기술 결정론 비판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을 것이다. 랜드가 '기술'의 증상들을 '자본'의 내재적 특성으로 잘못 식별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A: Indeed. Think about this: if each element has meaning or significance only within the ensemble, and any modification of an element has repercussions on the ensemble and modifies it, and any modification of the ensemble likewise affects the elements and their relationships, and there exist exclusive relationships among the elements of the system, then it is necessary to consider technique as an ensemble.


(A: 맞다. 이렇게 생각해보라. 만약 각 요소가 앙상블 안에서만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고, 한 요소의 변형이 앙상블 전체에 파급되어 그것을 변형시키며, 앙상블의 변형이 마찬가지로 요소들과 그 관계들에 영향을 미치고, 시스템의 요소들 사이에 배타적 관계들이 존재한다면, 기술을 하나의 앙상블로 보아야 한다.)


B: Land focuses on the teleology of Capital as an intelligence from the future. Even if he hadn't deeply integrated Ellul's 'Technique,' he might argue that technique is merely the 'hardware' through which the 'software' of Capital executes its self-augmentation.


(B: 랜드는 미래로부터 오는 지성으로서의 자본의 목적론에 집중한다. 설령 그가 엘륄의 '기술'을 깊이 통합하지 않았다 해도, 기술은 단지 자본이 자기 증식을 실행하는 '하드웨어'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A: Then why does capital need the state and its subsidies, as Carson demonstrates very repeatedly? And that this arose from technique itself Ellul also highlights this strongly, with a very detailed history of technique in The Technological Society.


(A: 그렇다면 왜 자본은 카슨이 매우 반복적으로 보여주듯 국가와 그 보조금을 필요로 하는가? 그리고 이것이 기술 자체로부터 발생했다는 것을 엘륄도 「기술 사회」에서 기술의 매우 상세한 역사와 함께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B: You speak of 'subsidized neotechnics' as a distortion, but what if the State itself is just a temporary skin that Capital shedding as it accelerates? Can you prove that 'Technique' has any goal other than the terminal expansion of the Capital-circuit? By separating 'Technique' from 'Capital,' aren't you clinging to a humanist dualism that Land seeks to dissolve? In a cybernetic circuit, isn't the distinction between the abstract flow of value (Capital) and the material optimization of efficiency (Technique) purely a matter of perspective, both being functions of the same self-augmenting intelligence?


(B: 당신은 '보조된 신기술'을 왜곡으로 말하는데, 만약 국가 자체가 자본이 가속하면서 벗어던지는 일시적인 껍데기에 불과하다면 어떻겠나? 당신은 '기술'이 자본 회로의 최종적 팽창 외에 다른 목표를 가진다는 걸 증명할 수 있나? '기술'을 '자본'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랜드가 해소하려는 인본주의적 이원론에 매달리는 게 아닌가? 사이버네틱 회로에서 가치의 추상적 흐름(자본)과 효율성의 물질적 최적화(기술) 사이의 구분은 순전히 관점의 문제 아닌가? 둘 다 동일한 자기 증식 지성의 기능인 것이다.)


A: I think Land misunderstood capital as technique, at least later Land, but Carson, from his analysis of Mumford, does offer other concrete examples where technique does escape this, i.e., open-source hardware RepRap and CNC multimachinery. These are techniques that lower capital outlays by orders of magnitude, enabling production outside the wage system. They do not serve capital's expansion; they undermine capital's ability to capture value. Plus, there also exist many others like LETS that bypass banks and state-issued money and do not inherently feed capital accumulation. Sure, I cannot prove that technique has an inherent goal outside horizontal structures, but you also cannot prove that it does not. I think Mumford's, Carson's, and Ellul's analyses highlight that this wasn't inevitable, but was influenced by many different factors that shaped technique into the direction it has today.


(A: 나는 랜드가, 적어도 후기 랜드는, 기술을 자본으로 오해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카슨은 멈퍼드 분석을 통해 기술이 이를 벗어나는 구체적 사례들을 제시한다. 즉, 오픈소스 하드웨어 RepRap과 CNC 다기능 기계류가 그것이다. 이것들은 자본 지출을 수십 배 낮춰서 임금 체계 바깥에서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들이다. 이것들은 자본의 팽창에 복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본이 가치를 포획하는 능력을 약화시킨다. 더불어 은행과 국가 발행 화폐를 우회하고 자본 축적을 본질적으로 먹이지 않는 LETS 같은 사례들도 많다. 물론 나는 기술이 수평적 구조 바깥에 내재적 목표를 가진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지만, 당신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멈퍼드, 카슨, 엘륄의 분석은 이것이 불가피한 게 아니었으며, 기술을 오늘날의 방향으로 형성한 여러 다른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생각한다.)


B: To be honest, since Land's perspective is rooted in metaphysical deduction, continuing this specific line of debate might not yield much further insight. That said, I find myself largely in agreement with your view. This doesn't necessarily mean I subscribe to pure optimism, but rather that the fundamental divide here stems from whether or not one trusts in the possibility of 'technological autonomy'—a premise that inevitably pushes our positions to opposite poles.


(B: 솔직히 말하면, 랜드의 관점은 형이상학적 연역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이 특정한 논쟁 라인을 계속하면 더 이상 깊은 통찰을 얻기 어려울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당신의 견해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이것이 순수한 낙관주의를 지지한다는 뜻은 아니고, 오히려 여기서의 근본적인 분열이 '기술적 자율성'의 가능성을 신뢰하느냐의 여부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이 전제가 필연적으로 우리의 입장을 반대 극으로 밀어붙인다.)


A: Look, I also don't subscribe to optimism, and neither does Carson or Ellul, but Carson just demonstrates very clearly that there is a homebrew industrial revolution currently happening, and zero-sum structures seem to be replaced by vertical structures. You can do with that information how you want to. Now, do I think we can escape capital? Probably not, but I think the idea of capital itself will need to follow how technique is going to be adapted in the future because it constitutes the milieu itself.


(A: 나도 낙관주의를 지지하지 않고, 카슨이나 엘륄도 그렇다. 하지만 카슨은 현재 홈브루(전자기기 내에서 구동되도록 제작된 사제 펌웨어)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매우 명확하게 보여주고, 제로섬 구조가 수평적 구조로 대체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정보를 가지고 어떻게 할지는 당신이 결정할 일이다. 내가 자본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마 아니다. 하지만 자본이라는 개념 자체가 기술이 미래에 어떻게 적응될지를 따라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술이 인간이 경험하는 문화적/사회적 환경(milieu) 자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B: I admit that labeling your position as 'optimism' was a bit of a misstep. It's becoming increasingly clear that those who share Kevin Carson's views lean heavily toward a form of pragmatism—one that prioritizes observable shifts in technical infrastructure over abstract theory.


(B: 당신의 입장을 '낙관주의'로 규정한 건 약간 잘못된 것임을 인정한다. 케빈 카슨의 견해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추상적 이론보다 기술 인프라의 관찰 가능한 변화를 우선시하는 일종의 실용주의 쪽으로 강하게 기울어진다는 게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


A: That's right.


(A: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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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을 시작하기 전에 Zack이 비판하는 텍스트의 내용을 먼저 짚어야 한다.


닉 랜드의 「칸트, 자본, 그리고 근친상간의 금지」의 핵심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칸트는 인간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 뇌에는 시간·공간·인과성 같은 인식의 필터가 선탑재되어 있어서, 이 필터를 통과한 것만 "현실"로 인식된다. 필터 밖의 것, 즉 물자체(das Ding an sich)는 영원히 접근 불가다.


랜드는 여기서 "이거 자본주의랑 완전히 똑같은 구조 아니냐"고 꽂는다. 자본주의도 동일한 필터링 시스템이다. 돈으로 환산 가능한 것만 현실로 인정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타자(Otherness)"로 밀어낸다. 진짜 새로운 것이 등장해도 자본의 논리에 맞게 변형되어야만 시스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 구조적 동일성을 랜드는 동형성(Isomorphism)이라고 부른다.


"근친상간의 금지"는 좀 더 도발적인 비유다. 원시 공동체의 근친상간 금지는 혈연 집단이 외부와 교환 관계를 맺도록 강제하는 장치였다. 랜드는 자본이 이와 똑같은 짓을 한다고 본다. 전통적인 '피'의 결속, 즉 공동체, 부족, 관습을 해체하고 모든 관계를 '금(화폐)'의 교환으로 재편한다. 닫힌 순환을 끊고 모든 것을 시장이라는 추상적 공간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요약하면, 자본은 칸트의 범주처럼 작동하는 선험적 필터이며, 세계를 자기 논리로만 재구성한다.


Zack은 대화 첫 발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핵심은 자본 그 자체가 아니라 엘륄이 강조한 기술(technique) 자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다."


랜드의 분석 틀 자체는 수용한다. 문제는 그 필터의 정체다. 랜드는 그것이 "자본"이라고 했지만, Zack은 더 근본적인 것이 있다고 본다. 바로 자크 엘륄(Jacques Ellul)이 말한 기술(Technique)이다.


여기서 기술은 스마트폰이나 증기기관 같은 물건이 아니다. 엘륄이 말하는 기술은 모든 것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최적화하려는 시스템적 충동 그 자체다. 그리고 Zack은 이 기술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앙상블(ensemble)로서의 시스템으로 본다. 대화에서 Zack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각 요소가 앙상블 안에서만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고, 한 요소의 변형이 앙상블 전체에 파급되어 그것을 변형시키며, 앙상블의 변형이 마찬가지로 요소들과 그 관계들에 영향을 미치고, 시스템의 요소들 사이에 배타적 관계들이 존재한다면, 기술을 하나의 앙상블로 보아야 한다."


기술은 고립된 도구들의 집합이 아니라 상호 규정하는 유기적 총체다. 이 논리에서 자본은 기술적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다. 인과관계가 역전되는 것이다.


다시 정리해보자. 랜드에게 자본은 단순한 경제 시스템이 아니다. 세계를 자기 논리로 재구성하는 필터 그 자체다. 무엇이든 자본의 언어로 환산되어야만 현실로 인정받고, 그렇지 못한 것은 타자로 밀려난다. 기술은 이 자본이 작동하는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Zack은 이 인과관계를 뒤집는다. 기술이 먼저다. 기술은 각 요소가 전체 앙상블과 상호 규정하는 자율적 시스템으로서, 자본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자기 논리 안으로 흡수한다. 자본은 이 기술 시스템이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해 동원하는 도구 중 하나일 뿐이다. 범인은 자본이 아니라 기술 자체다.


이건 단순한 수정이 아니다. 만약 Zack이 옳다면, 자본주의를 타파해도 기술이라는 더 근본적인 구조가 남아있는 한 착취 시스템은 형태만 바꿔서 살아남는다.


Zack은 케빈 카슨(Kevin Carson)의 문화적 가상(Cultural Pseudomorph) 개념으로 이를 보강한다. 카슨은 C4SS(Center for a Stateless Society)에서 활동하는 좌익 아나키스트다. 반국가주의와 반자본주의를 동시에 주장하는 계열로, 주류 좌파와도 주류 우파와도 다른 포지션이다. Zack이 이 인물을 끌어온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랜드 비판을 위해 좌익 아나키스트의 분석 도구를 쓰는 것이다.


가상(假晶)은 원래 지질학 용어다. 어떤 광물이 사라진 자리에 다른 광물이 채워지는데, 겉모양은 원래 결정 그대로인 상태를 가상(pseudomorph)이라 한다. 내용물은 바뀌었지만 껍데기는 그대로다. 카슨은 이걸 기술과 권력 구조에 적용한다. 혁명적인 신기술이 등장해도, 국가나 대기업 같은 낡은 권력 구조가 보조금과 규제를 동원해서 그 기술을 자기들 틀 안으로 강제 편입시킨다는 것이다.


카슨은 이 분석을 루이스 멈퍼드(Lewis Mumford)의 고기술(paleotechnic)·신기술(neotechnic) 구분에서 가져온다. 멈퍼드는 산업혁명을 석탄·증기 중심의 구기술 시대와 전기·경량 소재 중심의 신기술 시대로 구분했는데, 카슨은 이를 확장해서 신기술도 결국 구기술 시대의 권력 구조를 재생산하는 데 동원된다고 주장한다.


인터넷이 딱 이 사례다. 원래 인터넷은 완전히 분권적인 기술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구글, 메타, 아마존이라는 20세기 대기업 구조의 복사판이 디지털 공간을 지배한다. 기술은 새로워졌지만 권력의 형태는 그대로다. 껍데기만 바뀐 것이다.


랜드가 제시한 구체적 사례가 있다. 자본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다룰 때 두 가지를 동시에 한다. 물리적으로는 슬럼(slum)으로 몰아넣어 가시권 밖으로 치우고, 경제적으로는 노동력을 철저히 착취한다. 눈에는 안 보이게 치우면서 동시에 시스템 안에 묶어두는 역설적 구조다.


Zack은 이게 자본의 내재적 논리가 아니라 국가 보조를 받은 신기술이 착취 구조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배치된 결과라고 본다. 그래서 Zack은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왜 자본은 카슨이 매우 반복적으로 보여주듯 국가와 그 보조금을 필요로 하는가?"


만약 자본이 랜드 말대로 저항 불가능한 자율적 주체라면, 국가의 보조 없이도 스스로 굴러가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자본은 끊임없이 국가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 이 사실 자체가 자본의 자율성 테제에 균열을 낸다.


대화에서 Zack이 던진 질문 하나가 논쟁의 핵심을 찌른다.


"랜드가 실제로 엘륄을 읽은 적이 있나? 「기술 사회」, 「기술 시스템」, 「기술적 허풍」을?"


이건 단순한 도발이 아니다. 만약 랜드가 엘륄을 제대로 읽었다면, 자본에 대한 그의 숙명론은 기술 결정론 비판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달리 말하면, 랜드는 기술의 증상들을 자본의 내재적 특성으로 잘못 식별했을 수 있다.


내 지인이 말하길, 기술은 단지 자본이 자기 증식을 실행하는 하드웨어에 불과하고 자본은 그 위에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라고 랜드식으로 반박했다. 사이버네틱 회로에서 가치의 추상적 흐름(자본)과 효율성의 물질적 최적화(기술)는 결국 동일한 자기 증식 지성의 두 측면이라는 논리다.


Zack은 이 반박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본이 자율적 소프트웨어라면 국가 보조금 없이도 굴러가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엘륄은 「기술 사회」에서 기술의 발전이 국가의 개입과 보조를 통해 특정 방향으로 형성되어 왔다는 것을 상세한 역사적 분석으로 보여준다. 자본의 자율성은 국가라는 지지대 위에 세워진 허구일 수 있다.


이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여기 있다. Zack은 추상적 논쟁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 반례를 제시한다. Zack은 이렇게 말한다.


"카슨은 멈퍼드 분석을 통해 기술이 이를 벗어나는 구체적 사례들을 제시한다. 즉, 오픈소스 하드웨어 RepRap과 CNC 다기능 기계류가 그것이다. 이것들은 자본 지출을 수십 배 낮춰서 임금 체계 바깥에서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들이다."


RepRap은 오픈소스 3D 프린터 프로젝트다. 이 기계는 자기 자신의 부품 대부분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다. 공장이 필요 없고 대기업의 공급망에 종속될 필요가 없다. CNC 다기능 기계류는 디지털 제어 공작 기계들이 소형화·저가화되면서 개인이나 소규모 공동체 수준에서 공업적 생산이 가능해진 사례다. LETS(지역 교환 거래 시스템)는 국가 발행 화폐와 은행을 완전히 우회하는 지역 교환 시스템으로, 자본 축적의 논리가 작동하지 않는 교환 구조다.


Zack의 논점은 이렇다. 이 사례들은 기술이 반드시 자본의 하인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증거다. 카슨이 말하는 "홈브루 산업혁명"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기술이 자본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온 것은 불가피한 존재론적 필연이 아니라, 국가 보조금과 규제라는 역사적 우연의 산물이었다.


물론 Zack도 이것이 자본으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을 의미한다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Zack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자본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마 아니다. 하지만 자본이라는 개념 자체가 기술이 미래에 어떻게 적응될지를 따라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술이 인간이 경험하는 문화적/사회적 환경(milieu) 자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기술의 방향이 바뀌면 자본이라는 개념 자체도 그것을 따라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 지인은 Zack의 입장을 "낙관주의"로 규정하려 했다. Zack은 이를 거부한다.


"나도 낙관주의를 지지하지 않고, 카슨이나 엘륄도 그렇다."


Zack의 포지션은 낙관주의가 아니라 실용주의이다. 추상적 이론보다 기술 인프라의 관찰 가능한 변화를 우선시하는 태도. 자본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 게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기술적 변화를 냉정하게 관찰하고 그것이 함의하는 바를 추적하는 것이다. 이 실용주의는 랜드의 형이상학적 연역과 정반대 방향에 서 있다. 랜드는 자본의 자율성을 존재론적 필연으로 연역한다. Zack은 구체적 사례들로부터 귀납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 Zack의 반론 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랜드, 특히 후기 랜드는 기술과 자본을 절대 분리하지 않는다. "기술-자본(Technocapital)"이라는 복합체로 묶어서 보는 게 랜드의 핵심 시각이다. 이 기술-자본은 인간의 의지나 계획과 무관하게 자기 증식하는 자율적 과정이고, 랜드는 이걸 억제해야 할 괴물이 아니라 오히려 가속시켜야 할 탈출구로 본다.


그렇다면 Zack이 "기술이 자본보다 더 근본적이다"라고 말할 때, 그건 이미 기술-자본을 하나로 묶어서 보는 랜드의 틀 안에서는 유효한 비판이 되기 어렵다. Zack의 비판은 초기 랜드, 즉 기술-자본 복합체 개념이 완전히 정립되기 전의 랜드에게는 유효하지만, 후기 랜드에게는 표적이 엇나간다.


그러나 이것이 Zack의 논점 전체를 무효화하지는 않는다. Zack의 진짜 의의는 랜드와의 차이보다 엘륄과의 대비에 있기 때문이다. 랜드는 기술-자본 복합체를 긍정하고 가속을 주장하지만, 엘륄은 기술이 인간을 완전히 포섭한다는 점에서 비관적 중립에 선다. Zack은 엘륄 쪽에 가깝되, 거기서 더 나아가 RepRap과 LETS 같은 구체적 사례들로 기술의 방향이 역사적으로 결정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결국 Zack vs 랜드의 진짜 싸움은 "기술이냐 자본이냐"가 아니라, 기술-자본 복합체를 가속할 것이냐(랜드), 아니면 그것의 방향이 역사적 우연의 산물이며 달라질 수 있다고 볼 것이냐(Zack) 쪽에 있다.


결국 Zack의 닉 랜드에 대한 비평을 한 줄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랜드의 진단은 맞지만 처방이 틀렸다. 기술-자본은 존재론적 필연이 아니라 역사적 구성물이며, 그 방향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이미 존재한다."


앞부분의 분석이 Zack의 논점을 최대한 공정하게 해부한 것이라면, 이 파트는 다른 각도에서 같은 텍스트를 다시 읽는 시도다. 그 각도는 인류학적 반동주의(Anthropological Reactionism, ARx)다.


ARx는 인간이라는 종의 행동 패턴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 사유 체계다. 정치적 처방을 설계하기보다 인간 본성이 문명 속에서 반복적으로 어떤 패턴을 만들어내는지를 해부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 좌파가 보기 싫어하는 세상의 날 것을 기성 우파조차 꺼리는 방식으로 분석하는 사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관점에서 랜드-Zack 논쟁을 다시 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ARx의 출발점은 단순하다. 인간은 교육이나 제도로 근본부터 바뀌는 존재가 아니다. 수십만 년의 진화가 새긴 무리 동물의 본능, 즉 위계에 대한 감각, 내집단 결속, 외부에 대한 경계심, 생존 압력 앞에서의 복종 회로가 문명의 껍데기 아래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


동물 다큐멘터리를 볼 때 느끼는 그 묘한 감각이 있다. 치타가 가젤을 쫓을 때, 침팬지 무리가 경쟁자 무리를 집단적으로 제거할 때, 알파(Alpha)가 도전자를 제압하고 무리가 즉각 복종 신호를 보낼 때. 그 장면들이 불편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그게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문명이 언어와 제도로 덮어놓은 것의 밑바닥이 잠깐 보이는 순간. ARx는 그 감각을 중화하지 않고 그대로 언어로 옮기려는 사상이다.


이 전제를 깔고 나면 랜드-Zack 논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랜드의 기술-자본 테제는 ARx의 관점에서 절반만 맞다.


우선 맞은 부분은 다음과 같다. 기술-자본이 인간의 원초적 공동체 구조를 해체하고 모든 것을 추상적 교환 논리로 재편한다는 진단은 정확하다. 랜드가 "근친상간의 금지"를 통해 포착한 것, 즉 피의 결속이 금의 결속으로 전환된다는 관찰은 ARx가 "전통은 생존 압력이 만들어낸 검증된 알고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의 해체 과정을 묘사한다.


그리고 틀린 부분은 다음과 같다. 랜드는 이 기술-자본의 가속을 탈출구로 본다. 닉 랜드의 저작 ‘멜트다운’에서도 보였듯이 닉 랜드는 기존 구조를 녹여버리면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낙관적 파괴주의를 갖고 있다. ARx는 여기서 냉소한다. 기존 구조가 녹아도 인간이라는 무리 동물의 본능은 녹지 않는다. 위계는 다시 생기고, 착취는 다른 형태로 재조립되며, 새로운 피의 결속이 등장해 또 다른 배제의 논리를 만들어낸다. 가속의 끝에서 기다리는 것은 해방이 아니라 같은 패턴의 다음 사이클이다.


Zack의 기술 앙상블 논리는 ARx의 관점에서 랜드보다 더 정확한 진단에 가깝다. 기술이 자율적 시스템으로서 자본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자기 논리로 흡수한다는 관찰은, ARx가 말하는 인류 문명의 기술-자본을 통한 수렴진화와 겹친다.


그러나 Zack의 반례들, 즉 RepRap, CNC, LETS에 대해 ARx는 회의적이다. 이 회의는 그 기술들이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다른 층위의 문제다.


Zack은 이 기술들이 자본의 포획을 벗어난다고 본다. 그런데 ARx의 시각에서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을 운용하는 인간이다. 무리 동물인 인간은 새로운 도구를 손에 쥐면 반드시 기존의 위계 강화에 사용한다. RepRap 커뮤니티 안에도 위계가 생기고, LETS 네트워크 안에도 권력 구조가 형성된다. 오픈소스 프로젝트들이 반복적으로 내부 분열과 주도권 싸움을 겪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가 보조금은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 진짜 원인은 도구가 무엇이든 간에 위계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본능적 회로 자체다.


랜드와 Zack이 공통으로 지목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중 처리, 즉 물리적으로는 슬럼에 격리하고 경제적으로는 착취하는 구조에 대해 ARx는 다음과 같이 읽는다.


이것은 자본의 논리도, 기술의 논리도 아니다. 무리 동물의 집단 운영 논리다. 어떤 무리든 내부의 위계 구조는 쓸모 있는 구성원과 쓸모가 덜한 구성원을 구분한다. 쓸모가 덜한 구성원은 눈에 안 띄게 주변부로 밀려나지만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는다. 무리의 총체적인 노동력은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패턴은 자본주의 이전에도 존재했고, 자본주의 이후에도 존재할 것이다. 자본과 기술은 이 패턴을 만들어낸 게 아니라 더 효율적으로 실행하는 도구를 제공했을 뿐이다.


따라서 랜드가 말하는 자본의 필터링도, Zack이 말하는 기술 앙상블의 자율성도, ARx의 시각에서는 더 심층적인 원인의 표면적 현상이다. 진짜 원인은 인간이라는 종이 무리 동물로서 작동하는 방식, 즉 위계를 만들고 내부를 착취하고 외부를 배제하는 본능적 회로 자체다.


랜드는 기술-자본의 가속을 통한 멜트다운을 말한다. Zack은 기술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는 실용주의를 말한다. 둘 다 어떤 의미에서는 출구를 상정한다.


ARx는 이 출구 자체를 거부한다. 정확히는, 출구를 묻는 질문 자체가 잘못 설정되어 있다고 본다.


인류 문명은 기술-자본이라는 엔진을 통해 단일한 극점을 향해 수렴진화하고 있다. 이 과정은 길고 지루하며, 문명권들은 서로를 흠모하고 증오하며 닮아간다. 소국들은 서로를 먹어치우고, 제국이 생기고, 제국은 내부에서 부패하며, 다시 찢겨나간다. 문명은 우로보로스(Ouroboros)처럼 자신을 포식하며 재생한다. 이 순환에서 도덕은 전쟁을 막지 못했고, 앞으로도 막지 못할 것이다.


이 순환에서 ARx가 주목하는 것은 탈출 가능성이 아니라 어떤 집단이 살아남는가다. 실존적 공포를 내면화하고 유기적 결속력을 유지한 집단이 다음 사이클의 유전자를 결정한다. 리버럴리즘이라는 이름의 온실이 제공하는 안락함이 만들어낸 가축화된 인간들은, 선택압력이 본격화되는 순간 가장 먼저 도태된다.


이것이 ARx가 랜드-Zack 논쟁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랜드는 기술-자본의 자율성을 정확히 포착했지만 가속을 탈출구로 오인했다. Zack은 기술의 역사적 우연성을 날카롭게 짚었지만 도구를 바꾸면 인간도 바뀐다는 암묵적 낙관을 버리지 못했다. 둘 다 현상을 날카롭게 해부했다. 그러나 둘 다 인간이라는 종의 본성이 만들어내는 패턴의 불가피성을 충분히 직시하지 못했다.


자본도, 기술도, 기술-자본도 범인이 아니다. 범인은 인간 자체다. 그리고 인간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다만 선택압력에 의해 걸러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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