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서구에 대한 공포증, 혹은 애증
러시아의 서구에 대한 공포증, 혹은 애증
어떤 나라의 외교 정책을 이해하려면 그 나라의 정치적 계산만 보아서는 부족하다. 더 깊은 곳, 즉 그 사회가 역사를 통해 쌓아온 감각의 층위—공포, 굴욕, 자부심, 불신—를 들여다봐야 한다. 러시아의 서구권에 대한 태도는 이 점에서 특히 복잡한 사례다. 단순한 제국주의적 팽창 욕구로 설명되지 않고, 그렇다고 순수한 피해의식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 안에는 실제로 반복된 침략의 역사가 있고, 그것이 만들어낸 과민한 위협 인식이 있으며, 그 인식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온 권력의 역사가 함께 뒤엉켜 있다.
조지 케넌(George Kennan)은 1946년 유명한 "긴 전보(Long Telegram)"에서 소련의 팽창주의를 분석하며 이렇게 썼다. 소련 지도부의 신경증적 세계관은 러시아의 오랜 불안감에서 자라난 것이라고. "러시아는 늘 자신이 더 유능하고 강력하며 조직된 외부 세계와 접촉할 때 취약하다고 느껴왔다." 케넌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이 고유한 불안감에 이론적 외피를 씌운 것이라고 보았다. 이데올로기가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진단이다.
케넌의 통찰은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그 분석을 소련이라는 틀을 넘어 더 긴 역사적 맥락에 놓을 필요가 있다. 러시아의 서구 공포증은 소비에트 혁명과 함께 생겨난 것이 아니다. 훨씬 오래된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 뿌리는 지리와 종교와 반복된 외침(外侵)의 경험이 뒤섞인 복잡한 토양에서 자라났다.
러시아의 불안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지리다. 지도를 펼쳐보면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사실이 있다. 러시아가 세워진 땅은 자연적 방어선이 거의 없는 거대한 평원이라는 것이다. 유럽 쪽 러시아는 우랄산맥까지 물 흐르듯 이어지는 평야이고, 서쪽으로는 폴란드, 발트해, 카르파티아 산맥이 있지만 이것들이 진지한 방어선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정학자 팀 마샬(Tim Marshall)은 『지리의 힘(Prisoners of Geography)』에서 이 지점을 명확히 짚는다. 러시아는 팽창하지 않으면 침략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딜레마에 놓여 있었다.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것이 생존의 조건이었다. 이것은 러시아의 도덕적 결함을 넘어 지리적 조건이 강제한 전략적 논리다.
훗날 러시아가 자신의 전사(前史)로 받아들이게 되는 키예프 루스 시절부터 이 취약성은 생생한 현실이었다. 다만 키예프 루스는 지금의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모두가 공유하는 중세 국가로, 어느 한 나라의 직선적 조상으로 귀속시키는 것은 논쟁적이다. 동쪽에서는 페체네그와 폴로프치 같은 유목 민족이, 북쪽에서는 바이킹이, 서쪽에서는 폴란드와 헝가리가 끊임없이 위협을 가했다는 것은 사실이고, 1240년 바투 칸의 몽골군이 키예프를 초토화한 것도 사실이다.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던 대도시였던 키예프는 이 침략으로 인구의 대부분을 잃었다.
그런데 이 몽골 침략과 비슷한 시기에, 서쪽에서도 충돌이 있었다. 1240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네바 강 하구에서 스웨덴 원정대를 격퇴했고, 1242년에는 독일 기사단과 얼음 위의 전투를 벌였다. 다만 이 두 사건의 규모와 의미는 후대에 상당히 과장되었다는 점을 짚어야 한다. 특히 에이젠슈타인의 1938년 영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스탈린 정권이 나치 독일의 위협을 앞에 두고 이 사건들을 선전 목적으로 신화화한 대표적 사례다. 역사적 사실과 그것의 정치적 재구성을 구분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시기의 경험이 훗날 모스크바 공국을 거쳐 러시아 제국으로 이어지는 국가 기억 안에서 동서 양면에서 동시에 위협받는다는 도식으로 각색되고 반복 소환된 것은 사실이다. 역사적 실제와 그 실제가 어떻게 기억되고 이용되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러시아의 서구 공포증을 이해할 때 이 둘을 함께 봐야 한다.
몽골 지배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모스크바 공국이 부상했고, 이와 동시에 러시아의 역사적 자기 인식에 결정적 전환이 일어났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그 계기였다. 동방 기독교의 중심이 무너진 것이다.
이반 3세는 비잔틴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 소피아 팔레올로그와 결혼하며 모스크바가 비잔틴의 계승자임을 주장했다. 이 시기 수도승 필로페이가 이반 3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른바 '제3의 로마' 이념이 등장한다. "두 개의 로마는 무너졌고, 세 번째는 서 있으며, 네 번째는 없을 것이다." 모스크바가 세계 기독교의 마지막 보루라는 메시아적 자의식이다.
이 이념 구조는 서방과의 관계를 단순한 정치적·군사적 경쟁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서방 가톨릭은 타락한 기독교이고, 비잔틴의 계승자인 러시아만이 진정한 신앙을 보존하고 있다는 논리. 이것은 문화적 차이를 신학적 대립으로 격상시키는 효과를 냈다. 단순한 이웃 나라가 아니라 타락과 위협의 상징으로 서방을 인식하는 틀이 여기서 시작된다.
이 이념이 근거 없는 공상이 아니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가톨릭과 정교회의 분열은 실재했고, 두 문명 사이의 신학적·문화적 차이도 실질적이었다. 문제는 이 차이가 러시아 국가 이데올로기 안에서 증폭되고 과장되어, 서방의 모든 행동을 타락과 침략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인식론적 틀로 굳어졌다는 데 있다.
17세기는 러시아 서구 공포증의 결정적 형성기였다. 이반 뇌제 사후 찾아온 극심한 혼란—스무타(Сму́та, 대혼란기, 1598~1613)—는 러시아 집단 기억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혼란의 틈을 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개입했다. 폴란드 군대는 모스크바 크렘린을 점령했다. 1610년부터 1612년까지 러시아의 심장부가 서방 군대의 수중에 있었다. 미닌과 포자르스키가 이끄는 민병대가 이들을 몰아내고 로마노프 왕조를 수립한 것이 러시아 민족 서사의 핵심 장면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도 붉은 광장에 세워진 이 두 인물의 동상은 서구의 침략에 맞선 민족적 저항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스무타가 만들어낸 정치적 교훈은 간결하고 강력했다. 내부가 흔들리면 서방이 들어온다. 강한 중앙 권력만이 이것을 막는다. 이 논리는 이후 러시아 정치 문화에서 반복적으로 소환된다.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가장 편리한 역사적 레퍼런스가 바로 스무타였다.
표트르 대제(1682~1725)는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흥미롭고 가장 모순적인 인물이다. 그는 서구를 직접 돌아다니며 배웠다. 네덜란드에서 직접 배를 만들었고, 영국과 프로이센을 방문해 군사 기술을 익혔다. 귀족들에게 서구식 복장을 강요하고 수염을 자르게 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유럽식 도시로 건설했다. 러시아를 유럽 강국으로 만들려는 의지는 진지했다.
그러나 표트르의 서구화는 서구에 대한 존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서구를 이기기 위해 서구를 모방한 것이었다. 기술과 군사력은 가져오되, 개인의 자유나 권력 제한 같은 정치적 원리는 철저히 배제했다. 이것은 이후 러시아 근대화의 반복되는 구조가 된다. 서구의 도구는 취하고 서구의 가치는 거부한다.
역사학자 리처드 파이프스(Richard Pipes)는 『러시아 혁명(The Russian Revolution)』에서 이 패턴을 "가산제(patrimonialism)"라는 개념으로 분석했다. 국가가 사회를 소유물처럼 다루고, 서구식 법치나 개인권의 제도적 발전이 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러시아의 구조적 특성이다. 표트르는 이 구조를 깨뜨리지 않은 채 그 위에 서구의 외피만 덧씌웠다. 내부 논리는 그대로였다.
이 선택적 서구화는 흔히 동아시아의 근대화 경험과 비교된다. 메이지 유신이나 박정희 시대의 한국이 서구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서구적 가치를 선별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표면적 유사성이 있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동아시아의 경우, 서구에 대한 태도가 실용적 경쟁이었다면, 러시아의 경우는 훨씬 더 깊은 층위의 적대감과 굴욕감이 결부되어 있었다. 모방의 필요를 느끼면서도 모방한다는 사실 자체를 굴욕으로 경험하는 심리. 이것이 표트르가 만들어낸 역설이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은 서구 공포증 형성에서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강력한 효과를 남겼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도시는 화염에 휩싸였다—러시아인들이 스스로 불을 질렀다는 설도 있고 프랑스군의 방화라는 설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스무타 이후 두 번째로, 유럽의 군대가 러시아의 중심을 침범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최종적 승리는 러시아에게 양가적 유산을 남겼다. 유럽을 구한 강대국이라는 자부심과, 서구는 기회가 있으면 다시 올 수 있다는 공포. 이 두 감정이 공존했다.
그런데 진짜 트라우마는 나폴레옹이 아니라 히틀러에게서 왔다.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바르바로사 작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의 시작이었다. 소련은 이 전쟁에서 약 2,700만 명을 잃었다. 전체 인구의 약 14%다. 군인만이 아니었다. 레닌그라드는 900일 동안 포위되었고, 이 기간 동안 약 100만 명의 민간인이 기아와 추위로 죽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키예프까지, 전선이 통과한 도시마다 폐허가 남았다.
이 경험이 러시아인의 집단 의식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전쟁의 공포가 개인적 트라우마를 넘어 세대를 가로질러 전달되는 집단적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트라우마의 가해자는 서유럽 문명의 일부였다. 나치즘이 서구 근대성의 내부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것이 서구 문명 전체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만들었다.
더불어 소련은 1941년부터 독일과 싸웠지만 영국과 미국이 서유럽에 제2전선을 형성한 것은 1944년 노르망디 상륙 때였다. 소련의 시각에서는 서방이 소련과 독일이 서로를 소진시키는 것을 관망한 3년이었다. 스탈린은 처칠과 루스벨트에게 제2전선을 거듭 요구했지만 연기만 반복되었다. 이것이 "서방은 러시아가 약해지기를 바란다"는 확신에 실증적 근거처럼 작용했다.
러시아 지식인 사회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균열했다. 슬라보필(Slavophiles)과 서구파(Westernizers)의 논쟁은 단순한 학문적 토론이 아니었다. 러시아가 무엇인가, 러시아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문명 정체성의 근본 질문을 둘러싼 싸움이었다.
슬라보필—알렉세이 호먀코프, 이반 키레예프스키—의 핵심 주장은 이랬다. 러시아는 서구와 근본적으로 다른 문명이다. 서구는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로 병들었고, 가톨릭이 권위주의적으로 신앙을 왜곡했다. 반면 러시아는 정교회와 공동체(мир, 미르), 그리고 소보르노스트(соборность)—공동체적 통일성—라는 고유한 가치를 가진다. 서구를 모방하는 것은 러시아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다.
서구파—비사리온 벨린스키, 티모페이 그라노프스키—는 반대 방향을 주장했다. 러시아는 서구에 비해 후진적이다. 서구의 자유주의, 개인의 권리, 법치를 수용해야만 발전이 가능하다.
이 논쟁의 구도는 지금도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푸틴의 이데올로기는 슬라보필 전통의 현대적 버전이고, 러시아의 자유주의 반대파는 서구파의 계보를 잇는다. 알렉산드르 두긴(Alexander Dugin)의 유라시아주의는 슬라보필 사상이 지정학과 결합한 극단적 형태다. 두긴은 『제4의 정치이론(The Fourth Political Theory)』에서 서구의 자유주의를 인류 문명에 대한 최대 위협으로 규정하고, 러시아가 이에 맞서는 문명적 저항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긴의 사상이 러시아 정치 엘리트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러시아 민족주의 담론의 한 극단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극단이 오늘날 러시아 외교 정책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러시아의 서구 공포증이 단순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문화적 아비투스 수준에 새겨진 것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러시아 문학이다. 그 중심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있다.
그는 서구를 직접 경험한 작가였다. 독일, 프랑스, 스위스를 여행했고, 그 경험이 그에게 남긴 것은 매혹과 혐오의 복합감정이었다. 『악령(Бесы)』에서 서구 허무주의 이념을 받아들인 러시아 지식인들이 결국 파멸과 폭력으로 귀결된다는 것이 핵심 주제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장면은 서방 가톨릭적 권위주의—기적과 신비와 권위로 인간을 통제한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작가 일기(Дневник писателя)』에서 이렇게 썼다. 유럽은 러시아인에게 두 번째 조국과 같다. 유럽의 돌들조차 소중하다. 그러나 유럽은 러시아를 사랑하지 않는다. 유럽은 러시아를 알지 못하며,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 감정 구조—사랑하지만 사랑받지 못한다는 감각,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거부당한다는 경험—가 러시아 서구 공포증의 심리적 심층을 이룬다. 단순한 적대감이 아니다. 거부당한 사랑이 원망과 분노로 전환되는 구조다.
이것이 러시아의 대서구 태도에서 가장 흥미롭고 동시에 가장 비극적인 측면이다. 러시아는 서구를 증오하면서도 서구의 인정을 원한다. 유럽 문명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유럽과 다른 독자적 문명이라고 주장한다. 이 해소되지 않는 긴장이 편집증의 심리적 연료가 된다.
냉전은 이 서구 공포증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완전히 제도화된 시기였다. 1949년 NATO 창설은 소련의 시각에서 군사적 포위의 시작이었다. 서쪽 국경을 따라 군사 동맹이 형성되어 가는 것이 완충지대를 하나씩 잃는 과정으로 느껴졌다. 핵 경쟁은 이 공포를 실존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쿠바 미사일 위기(1962)는 서구와의 긴장이 문명 전체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그런데 진짜 심리적 충격은 소련 붕괴 이후에 왔다. 1991년 이후 러시아가 겪은 1990년대는 어떤 의미에서 지금 러시아의 외교 정책을 이해하는 가장 직접적인 열쇠다.
소련 해체 직후 러시아의 GDP는 약 절반으로 줄었다. 평균 수명이 급락했다. 올리가르히들이 국가 자산을 헐값에 독식했다. 사회 안전망은 사실상 붕괴했다. 이 혼돈 속에서 IMF와 세계은행의 서방 경제학자들이 처방한 '충격 요법(shock therapy)'—급진적 시장화와 민영화—은 혼란을 완화하기는커녕 악화시켰다.
러시아인들은 이 경험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서방이 러시아의 약화를 의도했다는 음모론이 퍼졌다. 이것이 실제로 의도된 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러시아 사회가 경험한 고통이 그 해석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도 나중에 인정했듯이, 충격 요법은 러시아의 실제 조건을 무시한 교조적 처방이었다.
NATO의 동진 문제도 이 시기에 겹쳤다. 1999년 폴란드·체코·헝가리, 2004년 발트 3국을 포함한 7개국이 NATO에 가입했다. 러시아의 관점에서는 완충지대가 하나씩 서방의 군사 구조 안으로 흡수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당시 조지 케넌은 이 결정에 강하게 반대했다. 1997년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그는 NATO 동진이 "비극적 실수"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냉전을 설계한 인물의 경고였던 만큼 지금도 자주 인용되는 발언이다.
그러나 케넌의 시각이 곧 정설은 아니다. 반론도 만만치 않고, 오히려 학계에서는 반론 쪽이 더 넓은 지지를 받는다.
우선 역사학자 마크 크라머는 "NATO를 동진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이 법적 구속력 있는 합의였다는 러시아의 주장 자체를 문서 연구를 통해 반박한다. 1990년 당시의 논의는 독일 통일 맥락에서 구동독 영토에 NATO 군대를 배치하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다른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포괄적 확장 금지 약속은 문서화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이 "약속 위반"을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보다 정치적 서사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더 근본적인 반론도 있다. NATO에 가입한 나라들—폴란드, 발트 3국, 체코—은 러시아의 위협을 추상으로 느끼지 않았다. 소련의 점령, 강제 이주, 문화 말살을 직접 경험한 나라들이었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 러시아 대사를 지낸 정치학자 마이클 맥폴은 이 점을 강조한다. 러시아가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느낌이 주권 국가들의 동맹 선택권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러시아의 불안을 인정하는 것과, 그 불안이 타국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인과관계를 뒤집어 보는 시각도 있다. NATO 동진이 러시아의 공격성을 유발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행동이 주변국들을 NATO로 밀어넣었다는 것이다. 2008년 조지아 침공, 2014년 크림 병합, 2022년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이 일련의 사건들이 수십 년간 중립을 유지해온 핀란드와 스웨덴마저 NATO로 이끌었다. 러시아가 NATO의 동진을 두려워한다면, 러시아 자신의 행동이야말로 그 동진을 가속시킨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다. 편집증이 그것이 두려워하는 결과를 스스로 만들어낸 셈이다.
케넌의 경고는 러시아의 심리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시각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러시아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NATO 동진이 실책이었다는 결론으로 자동 연결되지는 않는다. 케넌의 현실주의는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중심에 놓는 경향이 있었고, 소국들의 안보 선택권에는 충분한 무게를 두지 않았다는 비판을 함께 읽어야 한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러시아의 서구 공포증에 순전한 망상만 있는 것은 아님이 분명해진다. 폴란드군의 크렘린 점령,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 나치의 레닌그라드 포위—이것들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서구가 러시아를 공격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냉전기 NATO가 소련을 군사적으로 봉쇄하려 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비판이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근거 있는 공포가 인식의 틀 자체를 왜곡하는 편집증으로 발전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합리적 안보 정책의 기반이 되지 못한다.
편집증의 핵심 특성은 실제 위협과 과장된 위협을 구분하는 능력이 손상된다는 데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논의를 실존적 위협으로 읽는 것, EU의 우크라이나 접근을 러시아 해체 음모로 해석하는 것—이것은 실제 위협과 가상의 위협을 구분하지 못하는 과민 반응이다. 그리고 이 과민 반응이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실제 폭력으로 이어졌다.
인류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아비투스(habitus) 개념은 여기서 유용하다. 아비투스는 개인이나 집단이 역사적 경험을 통해 내면화한 지각과 행동의 구조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몸에 배어들어 자동적으로 작동한다. 러시아의 서구 공포증은 이런 의미에서 아비투스의 수준에 새겨진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이 의식적으로 조작하기 이전에, 이미 문화적으로 전달되어온 지각의 틀이다.
문제는 아비투스가 변화한 환경에 맞게 자동적으로 업데이트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13세기의 몽골 침략이나 17세기의 폴란드군 점령을 통해 형성된 위협 인식의 틀이, 21세기의 안보 환경에 그대로 적용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가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층위가 있다. 러시아의 서구 공포증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집단적 심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러시아 권력이 지속적으로 도구화해온 정치적 자원이기도 하다.
이반 뇌제의 오프리치니나(Oprichnina)는 귀족들이 서구와 내통한다는 편집증적 공포를 제도화한 공포 정치 기구였다. 스탈린의 대숙청도 유사한 논리 구조를 활용했다. 내부의 적이 외부의 적과 연결되어 있다는 논리. 이것은 반복적으로 재사용되는 권위주의적 통치의 표준 레퍼토리다.
푸틴의 러시아도 예외가 아니다. 서구의 위협을 강조하는 것은 국내 정치적으로 효용이 크다. 외부의 적이 있을 때 내부의 불만은 억눌리고, 강력한 지도자의 필요성이 정당화된다. 2007년 뮌헨 안보회의에서 푸틴이 서방을 향해 강경한 비판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은 분명 누적된 분노의 폭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내 정치적 계산도 얽혀 있었다.
집단적 트라우마와 그것의 정치적 도구화를 분리해서 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러시아 민중이 역사를 통해 형성한 서구에 대한 불신과 공포는 이해할 수 있고 어느 정도는 역사적 근거도 있다. 그러나 그 공포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증폭시켜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는 데 사용해온 것은 러시아 국가 권력이다. 피해자로서의 러시아와 가해자로서의 러시아 국가는 동일하지 않다.
러시아의 역사적 트라우마가 도구화되는 것은 러시아 내부만의 일이 아니다. 서구 대안우파 진영 일부도 이 트라우마를 열렬히 소비한다. 러시아가 "서구 자유주의 패권에 맞서는 문명적 저항"의 상징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두긴의 유라시아주의, 전통적 가치 수호, 반세계화 레토릭이 서구 대안우파의 정치적 욕구와 맞아떨어지고, 러시아의 역사적 피해 서사는 그 프레임을 정당화하는 재료로 소비된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역설이 있다. 이들이 러시아의 트라우마를 옹호하는 논리 구조는, 그들이 평소 좌파를 향해 가장 강하게 비판하는 피해자 정체성 정치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역사적 피해를 근거로 현재의 행동을 정당화한다는 논리가 똑같다. 다만 누가 피해자냐에 따라 태도가 달라질 뿐이다. 이 모순은 결국 러시아의 트라우마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편의에 따라 선택적으로 소비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러시아 국가 권력이 내부 통치를 위해 트라우마를 증폭시키고, 서구 대안우파가 자신들의 문화 전쟁을 위해 그것을 재활용하는 구조. 이 두 소비 사이에서 러시아의 역사적 고통은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아니라 각자의 목적에 맞게 편집된 서사로 납작해진다. 트라우마의 역사적 실재성과 그것의 정치적 도구화를 분리해서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마지막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건드린 그 심리적 핵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러시아의 서구 공포증에서 가장 비극적인 측면은 그것이 순수한 적대감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랜 역사 속에서 러시아는 서구에 인정받기를 원했다. 표트르 대제가 유럽 강국의 반열에 서고자 한 것도, 차이콥스키와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가 유럽 문화의 중심에서 인정받으려 한 것도, 소련이 냉전 종식 후 서방과의 통합을 진지하게 고민한 것도—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는 유럽 문명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반복적으로 거부당했다. 유럽은 러시아를 끝내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리적으로는 유럽이지만 문화적으로는 경계 밖에 놓인 존재. 이 거부의 경험이 자부심과 굴욕이 뒤엉킨 분노로 발전했고, 그 분노가 서구 자체를 거부하는 형태로 표출되었다.
이것은 러시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정받기를 원하다가 거부당한 존재가 그 욕구 자체를 부정하면서 공격성을 띠게 되는 심리 구조는 개인에게서도 집단에게서도 반복된다. 문제는 이 심리가 핵무기를 가진 국가의 외교 정책에 구현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이 될 수 있는가이다.
러시아의 서구 공포증은 이해해야 한다. 그 역사적 뿌리를 무시하거나 단순히 악의로 환원하면 현실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해가 용인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트라우마의 역사가 있다고 해서 현재의 폭력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과거의 침략을 당한 경험이 현재의 침략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것—이것이 러시아에게, 그리고 러시아를 지켜보는 우리에게 동시에 요청되는 윤리적 명확성이다.
조지 케넌의 긴 전보가 나온 지 80여년이 지났다. 그가 분석한 러시아의 신경증적 세계관은 지금도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더 깊어졌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공포가 현재를 규정할 때, 그 사회는 거울 앞에 서 있는 것과 같다. 거울 속 과거의 상처를 보면서 현재의 외부 세계를 읽는다. 거울이 현실을 대체한다. 그 거울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군대가 움직이고 외교가 작동할 때, 역사의 트라우마는 새로운 트라우마를 낳는다.
러시아가 거울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다만 그 가능성은, 역설적이게도, 러시아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오래전에 건드린 그 질문—우리는 왜 인정받기를 원하며, 왜 그토록 두려운가—에 정직하게 마주서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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