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와 현실주의 정치철학
리콴유와 현실주의 정치철학
리콴유(李光耀, 1923~2015)를 이해하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영어로 사고했으며 서구 자유주의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했지만, 그 언어로 서구 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했다. 그는 싱가포르를 세계에서 가장 청렴하고 효율적인 국가 중 하나로 만들었지만, 그 과정에서 반대 정치인을 명예훼손 소송으로 파산시키고 언론을 통제하고 반대자를 재판 없이 구금했다. 그는 공동체를 강조했지만 공동체의 언어를 인위적으로 설계했고, 전통을 존중한다 했지만 그에게 불편한 전통은 조용히 폐기했다.
이 역설들은 리콴유의 한계나 위선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리콴유를 20세기 정치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상가이자 실천가로 만드는 요소다. 그의 삶과 통치는 정치철학의 가장 오래된 긴장, 즉 올바른 원리와 효과적인 결과 사이의 긴장을 가장 첨예하게 구현한 사례였다.
리콴유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려면 그가 출발한 조건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1965년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강제 축출된 도시국가였다. 면적 700제곱킬로미터, 인구 180만, 천연자원 전무, 내수 시장 부재. 더욱이 중국계 75%, 말레이계 15%, 인도계 10%로 구성된 이 다민족 사회는 이미 1964년 인종 폭동을 경험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리콴유가 최우선으로 삼은 것은 생존이었다. 그에게 생존은 추상적 가치가 아니라 물리적 현실의 문제였다. 그는 훗날 이 시기를 회고하며, "싱가포르의 독립은 비극이었다"고 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상황이었고, 리콴유의 정치는 근본적으로 이 강요된 상황에 대한 응답으로 형성되었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리콴유의 이후 모든 정책과 철학이 이 출발점의 흔적을 지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위기를 가정하고 사고했고, 여유를 전제하는 사상에 본능적으로 불신을 품었다. 서구 자유주의 정치철학이 리콴유에게 공허하게 느껴진 것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이 이미 보장된 사회를 위한 철학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리콴유의 이름과 가장 자주 연결되는 개념은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s)'다. 그 핵심 명제는 다음과 같다. 개인주의와 자유권을 강조하는 서구 자유주의는 보편적 인간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서구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공동체가 개인에 선행하며, 개인의 권리는 공동체의 안정과 번영이 확보된 이후에야 완전한 의미를 가진다.
이 주장은 단순한 권위주의의 정당화인가, 아니면 진지한 철학적 도전인가. 이 질문에 대한 서구 학계의 반응은 대체로 냉소적이었다.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은 『자유로서의 발전(Development as Freedom)』(1999)에서 "아시아적 가치는 실재하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구성된 담론"이라고 비판했다. 센의 지적은 예리하다. 공자는 민본주의적 요소를 가졌고, 아시아의 불교 전통은 개인의 내면 수행을 강조한다. 아시아가 공동체주의 일색이라는 주장 자체가 과도한 단순화다.
그러나 리콴유의 아시아적 가치론을 단순히 정치적 수사로 기각하는 것도 피상적이다. 리콴유가 실제로 문제 삼은 것은 1960~70년대 이후 서구, 특히 미국에서 진행된 특정한 형태의 개인주의 팽창이었다.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이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2000)에서 상세히 기술한 미국 시민 공동체의 해체, 찰스 머레이(Charles Murray)가 『해체되는 미국(Coming Apart)』(2012)에서 분석한 하층 백인 노동계급의 가족 해체와 공동체 붕괴 등과 같은 것들은 리콴유가 서구 개인주의의 귀결로 지목한 것들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리콴유의 관찰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리콴유 자신은 아마도 이 논쟁을 메타적 수준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시아적 가치'가 철학적으로 완전히 정당화되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싱가포르라는 특수한 다민족 도시국가의 통합과 발전에 기여하는가였다. 그의 사유는 근본적으로 실용적이었다.
리콴유를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측면은 아마도 그가 전통과 관계 맺는 방식일 것이다. 그는 가족 중심주의, 교육에 대한 헌신, 검약, 위계적 질서에 대한 존중과 같은 유교적 가치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강조한 유교는 선택적으로 편집된 유교였다. 과거제적 폐쇄성, 상업 경시, 혈연에 의한 부패적 연고주의 같은 전통 유교의 다른 측면들은 조용히 폐기되었다.
언어 정책이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리콴유는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이 수백 년간 유지해온 방언 전통(광둥어, 하카어, 복건어)을 억압하고 영어를 공용어로 강제했다. 화교 중학교를 폐쇄하고, 방언 TV 프로그램을 금지했다. 이것은 전통의 보존이 아니라 전통의 파괴였다. 그러나 리콴유는 이 정책이 싱가포르의 글로벌 경쟁력과 다민족 통합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보았고, 실제로 그의 판단은 경제적 결과로 증명되었다.
러셀 커크(Russell Kirk)라면 이 지점에서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했을 것이다. 커크에게 전통은 수백 년의 인간 경험이 응축된 것으로, 그 자체로 경외의 대상이다. 리콴유처럼 전통의 유용한 부분만 취사선택하는 것은 전통을 도구화하는 것이며,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가 아니라 엔지니어링이라는 비판이다. 커크의 고전 『보수의 정신(The Conservative Mind)』(1953)은 이 문제를 "처방(prescrip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오래된 제도와 관습은 그것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로 정당성을 가진다. 인간 이성이 그것을 평가하고 취사선택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근대의 오만이다.
리콴유의 응수는 아마 이랬을 것이다. 살아있는 전통은 언제나 선택과 재해석을 통해 유지된다. 커크가 존경하는 에드먼드 버크도 영국 전통의 모든 것을 보존하자고 하지 않았다. 그는 혁명적 파괴에 반대했지, 신중한 재해석에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재해석 자체가 아니라 어떤 원칙에 따라 재해석하느냐다. 리콴유의 원칙은 명확했다. 싱가포르라는 다민족 도시국가의 생존과 번영에 기여하는가.
이 논쟁에서 누가 옳은가는 단순히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리콴유의 방식이 커크의 처방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단순한 기회주의가 아니라 일관된 원칙(결과주의적 현실주의)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리콴유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 지적으로 정직했다.
법과 권력의 관계에서 리콴유의 싱가포르는 미묘하고 중요한 구분선 위에 있었다. 그것은 법의 지배(Rule of Law)와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의 구분이다.
법의 지배는 권력자도 법 앞에 굴복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영국의 코먼 로(Common Law) 전통,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권리장전이 이 원칙의 역사적 구현이다. 법에 의한 지배는 법이 존재하고 형식적으로 집행되지만, 그 법이 권력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설계되고 운용되는 상태다.
싱가포르는 후자에 더 가까웠다. 야당 정치인들에 대한 반복적인 명예훼손 소송은 법원이 독립적으로 집행했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에 유리했다. 내부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은 법적 근거를 갖추었지만, 그것이 재판 없는 구금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코먼로 전통의 인신보호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리콴유는 이 비판에 대해 결코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법치 개념이 서구적 법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이유를 실용적으로 정당화했다. 그의 논거는 이랬다. 서구의 법의 지배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을 보라. 돈 많은 자가 더 좋은 변호사를 고용하고 더 유리한 판결을 받는다. 형식적 법치는 종종 자본의 지배를 은폐하는 언어가 된다. 싱가포르가 추구한 것은 형식적 법치보다 실질적 공정성이었다.
이 주장은 일정한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실질적 공정성을 정의하는 것은 결국 리콴유 자신이기 때문이다. 법의 지배가 가진 핵심 기능은 독립적이고 예측 가능한 기준을 제공함으로써 권력자의 자의를 제한하는 것이다. 리콴유의 체제에서 그 기능은 그의 판단력과 청렴성으로 대체되었다. 이것이 리콴유 생존 시에는 탁월하게 작동했지만, 동시에 그의 후계자들에 대한 심각한 구조적 질문을 남겼다.
리콴유 체제의 또 다른 핵심 축은 철저한 능력주의 엘리트주의다. 싱가포르의 공무원 급여 체계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며, 이것은 의도적인 정책 선택이었다. 리콴유는 공직자가 시장에서 받을 수 있는 급여에 준하는 보수를 받지 못하면 부패한다고 보았다. 부패를 도덕적 설교가 아니라 인센티브 설계로 막겠다는 발상이다.
이 접근법은 효과적이었다. 국제투명성기구의 부패인식지수에서 싱가포르는 일관되게 세계 최상위권을 유지한다. 공직 청렴도는 실제로 높다. 이것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측정 가능한 성과다.
그러나 이 엘리트주의는 특정한 형태의 인간 본성론을 전제한다. 올바른 사람을 선발하고 적절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면 좋은 통치가 가능하다는 믿음 말이다. 러셀 커크였다면 이 지점에서 보수주의의 가장 오래된 통찰로 반격할 것이다. 권력은 올바른 사람도 부패시킨다. 이것이 인류가 수천 년의 경험으로 학습한 교훈이다. 리콴유의 체제는 리콴유가 있을 때는 작동하지만, 그것은 체제의 성공이 아니라 인물의 성공이다. 진정한 체제란 인물이 나빠도 작동해야 한다.
이 비판은 예리하지만 리콴유도 이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인민행동당 내부에 제도적 선발 메커니즘을 구축했고, 지도부 교체를 비교적 질서있게 관리했다. 물론 그 메커니즘이 진정으로 독립적이었는지, 아니면 리콴유의 의중을 반영하는 것이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의 아들 리셴룽이 총리직을 이어받은 사실은 이 엘리트주의가 능력주의의 언어를 입은 가산제(patrimonialism)와 어느 지점에서 만나는지에 대한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리콴유의 정치철학을 관통하는 가장 깊은 층위는 결과주의다. 그에게 통치의 정당성은 초월적 질서나 역사적 전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과(performance)에서 온다. 이것을 학자들은 흔히 '실적 정당성(performance legitimacy)'이라 부른다.
이 개념의 장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구체적이고 측정 가능하며, 통치자에게 지속적인 책임을 부과한다. 리콴유는 실제로 이 기준에 의해 자신을 평가했다. 1인당 GDP, 부패지수, 교육 성취도, 주거 보급률 등은 추상적 가치가 아니라 검증 가능한 수치다.
그러나 결과주의는 치명적인 취약성을 안고 있다. 러셀 커크의 비판이 여기서 가장 예리해진다. 결과에 의해 정당화되는 체제는 결과가 나빠질 때 아무런 내적 저항 자원을 가지지 못한다. 초월적 질서나 오래된 전통에 기반한 체제는 성과가 나쁠 때도 다른 정당성의 원천을 가진다. 역사가 되었건, 종교가 되었건, 민족적 유대가 되었건. 그러나 실적 정당성만을 가진 체제에서 성과의 하락은 곧 체제의 정당성 위기다.
싱가포르의 미래에 대한 가장 진지한 우려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 리콴유가 구축한 체제는 놀랍도록 효율적이었지만, 그 효율성의 상당 부분은 제도보다는 인물에 의존했다. 제도는 인물 없이도 작동해야 한다. 이것이 제도주의(institutionalism)의 핵심 통찰이다. 더글러스 노스(Douglass North)가 『제도, 제도 변화, 경제적 성과(Institutions, Institutional Change and Economic Performance)』(1990)에서 강조했듯, 장기적으로 번영하는 사회는 특정 지도자의 탁월성이 아니라 인물에 독립적인 제도적 인센티브 구조에 의존한다.
이 모든 논의를 관통하는 가장 거대한 아이러니는 이것이다. 리콴유가 달성한 것들(낮은 범죄율, 강한 가족 제도, 공동체적 유대, 교육에 대한 헌신, 도덕적 규율)은 서구 보수주의자들이 서구에서 보존하거나 회복하고 싶어 하는 것들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1960~70년대 서구가 반문화 혁명으로 흔들릴 때, 싱가포르는 그 파고를 막았다. 러셀 커크가 그토록 개탄한 가족의 해체, 도덕적 상대주의의 만연, 공동체의 원자화와 같은 것들이 싱가포르에서는 현저히 덜 진행되었다.
그러나 러셀 커크는 그 결과를 승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결과가 초월적 도덕 질서나 유기적으로 성장한 전통이 아니라, 한 인간의 의지적 설계에 의해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커크에게 좋은 사회란 자라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리콴유의 싱가포르는 커크가 원하는 것을 커크가 용납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달성한 사회다.
역으로 리콴유의 시각에서 서구 보수주의자들은 이상론자였다. 그들은 서재에서 원리를 설교하면서, 정작 자신들이 보존하고 싶어 하는 것들이 현실에서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리콴유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당신들이 그토록 원하는 도덕적 질서를 나는 실제로 구현했다. 단지 당신들이 좋아하지 않는 방법으로. 그리고 당신들의 방법은 그것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 역설은 단순히 동서양의 문화 충돌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건드린다. 올바른 과정을 통해 나쁜 결과를 낳는 것과, 문제 있는 과정을 통해 좋은 결과를 낳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자명하지 않다. 그리고 그 자명하지 않음이 리콴유라는 인물이 21세기에도 여전히 논쟁적이고 여전히 중요한 이유다.
공정하게 평가하자면, 리콴유에 대한 영미권 보수주의자의 비판이 완전히 무력한 것은 아니다. 리콴유의 체제는 성과라는 단일한 기둥 위에 서 있어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그리고 그 체제의 지속성은 아직 완전히 검증되지 않았다.
싱가포르는 여전히 번영하고 있지만, 그것이 리콴유의 체제가 자기완결적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그것은 리콴유가 만든 기반 위에서 후계자들이 비교적 잘 적응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리콴유가 없는 싱가포르가 그의 유산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는지는 아직 진행 중인 질문이다.
동시에, 리콴유의 현실주의적 반론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전통이 이미 파괴된 사회, 보존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 처방론은 처방이 아니라 무처방이다. 커크의 철학은 보존할 전통이 이미 존재하는 사회를 위한 철학이며, 그런 점에서 그것은 보편적 정치철학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다. 박정희의 한국이나 리콴유의 싱가포르처럼 전통이 단절되거나 애당초 형성될 시간이 없었던 사회에서 러셀 커크의 처방론은 도구로서 근본적으로 부적합했다.
리콴유는 20세기 정치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현실주의자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성공은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포기하고 실용적 결과를 선택한 데서 나왔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유주의적 법치의 한계를 선택했고, 전통의 선택적 재구성을 택했고, 민주주의의 절차적 완전성보다 결과의 효율성을 우선했다.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는가. 이 질문에 단선적으로 답하는 것은 리콴유 자신이 경멸했을 종류의 순진함이다. 대신 리콴유의 삶이 제기하는 더 생산적인 질문들이 있다. 좋은 결과가 나쁜 과정을 소급해서 정당화할 수 있는가. 정치적 정당성은 절차에서 오는가, 결과에서 오는가. 전통이 없는 사회는 어떻게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리콴유가 죽은 이후에도, 싱가포르가 계속 번영하든 그렇지 않든, 여전히 열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열린 질문들이 리콴유를 단순한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유의 대상으로 만든다.
리콴유는 스스로를 철학자라 부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실천가라 불렀다. 그러나 그의 실천은 수천 년의 정치철학이 씨름해온 문제들을 가장 첨예한 형태로 현실화했다. 그 점에서 그는 사유를 통해서가 아니라 행동을 통해 정치철학의 핵심 질문들을 우리 앞에 다시 놓은 인물이다. 그것만으로도 리콴유는 진지한 독해를 요구한다.
참고 문헌
Russell Kirk, The Conservative Mind (1953)
Lee Kuan Yew, From Third World to First: The Singapore Story 19652000 (2000)
Amartya Sen, Development as Freedom (1999)
Robert Putnam, Bowling Alone (2000)
Charles Murray, Coming Apart (2012)
Douglass North, Institutions, Institutional Change and Economic Performance (1990)
Fareed Zakaria, "Culture Is Destiny: A Conversation with Lee Kuan Yew," Foreign Affairs (1994)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