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을 위한 야빈:민주주의,과두제,그리고 군주제

일반인을 위한 야빈(Yarvin): 민주주의, 과두제, 그리고 군주제 


그의 저작에 대한 합리적인 입문서 


더 코츠 센스(The Court's Sense), 2024년 7월 27일 


정치를 바라보는 당신의 시각은 아마도 틀렸을 것이다. 우리가 정치를 이해하는 틀이 고등학교 시민 교육 시간에 배운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정치 관념은 현실과 동떨어진 신화와 이론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러한 신화가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는 곳은 역설적이게도 보수주의자들의 머릿속이며, 이것이 그들이 반복적으로 정치적 패배를 겪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곤 한다. 


커티스 야빈(또는 멘시우스 몰드버그)의 진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그는 교과서적인 시민 윤리의 관점에서 정치를 바라보는 환상을 가차 없이 깨부순다. 그의 글은 겉으로 드러난 명분이 아니라, 현대 정치라는 거대한 기계가 실제로 내부에서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문제는 그의 글이나 말이 도무지 갈피를 잡기 어려울 만큼 불친절하다는 점이다. 특유의 장황하고 무질서한 문체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야빈의 글은 난공불락의 성벽과도 같다. 게다가 강연이나 대담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어떤가. "음...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아..." 하며 말을 고르는 모습은 마치 약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런 식의 화법에 내성이 없는 독자라면 그에게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다. 


하지만 이는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야빈은 역사를 꿰뚫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흥미롭고 독창적인 정치적 논거를 제시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온라인 우파 진영의 대다수 인물에게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의 통찰이다. 


이 글은 야빈이 던지는 핵심적인 정치적 논쟁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나갈 독립적인 연재물의 첫걸음이다. 우선 국가란 무엇인지, 그리고 정부의 세 가지 형태는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시작으로 그의 사상을 짚어보려 한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과 이데올로기에 관한 담론을 차례로 다룰 예정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고 그의 생각에 흥미가 생겼다면, 야빈의 저작들을 직접 읽어보길 권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영상 버전을 제작하며 야빈의 문장들을 발췌하고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 파커 뱅크스(Parker Banks)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정부라는 실체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야빈이 정의하는 '정부'가 무엇인지부터 짚어봐야 한다.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CEO 출신인 야빈은 정부를 복잡한 이념적 결합체로 보지 않는다. 그에게 정부란 그저 '자체적인 보안 역량을 갖춘 기업'에 불과하다. 정부가 기업의 특수한 형태라면, 그들이 생산하는 상품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이 비즈니스의 자산은 다름 아닌 사람과 영토다.” [1] 


성공적인 정부란 영토를 어떻게 개간하고 가꿀지, 그리고 구성원의 안녕을 어떻게 보장할지 정확히 아는 조직을 말한다. 아주 근본적인 차원에서 덴마크와 아이티의 운명을 가른 지점도 바로 여기다. 한쪽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국민을 보살피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로 번영하는 사회를 일궈냈다. 


국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 명쾌한 정의에는 좌우를 막론하고 대부분 동의하리라 본다. 영토를 발전시키고 국민을 보살피는 것. 참으로 훌륭한 목표다. 


따라서 정부가 이 두 가지 서비스를 성공적으로 제공한다면, 우리는 질 높은 고객 서비스를 받고 있는 셈이며 시민으로서 행복을 누리게 된다. 반면 서비스가 기대 이하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쁜 고객 서비스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결국 야빈의 관점에서 보자면, 방식이 어떠하든 결과적으로 훌륭한 고객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부가 곧 '좋은 정부'인 셈이다. 


“핵심은 정부를 그 정체성이 아니라 행위로 평가해야 한다는 점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정치가 중 한 명인 덩샤오핑은 이렇게 말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는 것 아닌가?’ 


이러한 주관적 접근법은 정부가 실제로 쥐를 잡는지에 주목한다. 정부를 구성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선출되었는지, 혹은 조직이 어떻게 관리되는지는 묻지 않는다.” [2] 


결국 중요한 것은 결과다. 특정 통치 체제 그 자체를 목적으로 숭상해서는 안 되며, 오직 그 체제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질로만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좋은 정부를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믿기 때문이어야지, 설령 나쁜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민주주의 그 자체가 지고지순한 목적이기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분석은 모든 통치 체제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 외에 어떤 체제들이 있을까? 


플라톤의 세 가지 통치 체제 


통치 체제에 관한 플라톤의 통찰은 지난 2,500년 동안 단 한 번도 그 권위가 흔들린 적이 없다. 그는 정부의 형태를 크게 세 가지로 분류했다. 


1. 군주제: 일인에 의한 지배 


2. 과두제: 소수에 의한 지배 


3. 민주제: 다수에 의한 지배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사회는 이 세 가지 체제 중 하나가 나머지 둘을 압도하며 권력을 장악해 왔다. 이는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자코뱅 당이 주도했던 프랑스 제1공화국은 군중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른 거침없는 민주제였다면,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변모한 나폴레옹 시대는 단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된 명백한 군주제였다. 같은 시기 영국은 귀족들이 국정을 좌우했던 전형적인 과두제 국가였다. 권력은 특정 개인에게 쏠리지 않았고, 오직 귀족이라는 계급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각 체제 안에서도 세부적인 차이는 존재했겠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며 권력이 실제로 어디에 집중되어 있었는지 파악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통치 체제가 무엇인지 묻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우리에게는 '사후 확신'이라는 편리한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 수업 시간에는 우리 체제가 명백한 민주주의라고 배웠을 것이다. 국민이 투표로 대표를 선출할 권력을 가지며, 권력 분립과 헌법이 그 민주주의를 굳건히 수호하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놈 촘스키나 알렉스 존스 같은 수많은 이들은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민주주의에 살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실질적인 정치 권력이 다수가 아닌, 아주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진실은 어느 쪽일까? 


우리가 어떤 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지 알고자 할 때 마주하는 가장 큰 문제는, 이 질문을 흐리게 만드는 수많은 모순적 주장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가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명목상의 명칭에 속아서는 안 된다. 명목상으로만 따지면 북한은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이고, 영국은 왕실의 철권통치 아래 있는 국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민주제를 강하게 만드는지 살펴보고, 이를 군주제를 강하게 만드는 요인과 대조해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늘날 세 가지 통치 형태 중 과연 어느 쪽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권력의 세 가지 원천 


이러한 통치 체제들은 저마다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특정한 권력의 원천을 가지고 있다. 군주제의 권력은 단 한 사람의 리더십에서 나오며, 과두제의 권력은 기관과 제도의 힘에서 비롯된다. 마지막으로 민주제의 권력 원천은 군중의 정치적 에너지에 있다. 


군주제 


먼저 리더십에서 비롯되는 군주제의 권력부터 살펴보자. 모든 리더는 어느 정도 군주라고 볼 수 있는데, 그가 조직을 이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조직 내부의 의사결정권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사실상 군주제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 내부에서 전권에 가까운 행정력을 행사하며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행정적 리더십이 존재하는 곳은 단 두 군데뿐이다. 명확한 지휘 체계가 존재하는 군대(명령은 곧 명령이다)와, 예산·전략·인사권을 장악하여 회사의 운명을 결정짓는 CEO가 있는 기업의 세계가 바로 그곳이다. 


하지만 이러한 군주제적 구조조차 절대적인 경우는 드물다. 장군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법무관과 관료 집단의 눈치를 보아야 하며, 기업의 세계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만큼 강력한 개성을 가진 CEO는 손에 꼽을 정도다. 일론 머스크는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일 뿐,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다. 


따라서 서구 사회에서 군주제적 권력은 상당히 약화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세계의 다른 지역들을 보면 그 힘이 훨씬 강력한데, 이집트가 대표적인 예이며 러시아 또한 마찬가지다. 군주제가 가진 위대한 강점이자 그것이 끊임없는 권력의 원천으로 남는 이유는, 모든 거대한 프로젝트에는 유능한 리더십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이폰? 스티브 잡스다. 원자폭탄? 오펜하이머다. 달 착륙? 베르너 폰 브라운이다. 갈리아 정복?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러시아 혁명? 블라디미르 레닌이라는 인물이다. 사례는 얼마든지 더 들 수 있겠지만, 핵심은 무언가를 완수해 내는 데 있어 리더십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특히나 어려운 시기라면 더더욱 그렇다. 


과두제 


과두제 권력의 원천은 기관이다. 기관이란 공통된 정체성을 가진 조직으로서, 일정한 규칙과 절차를 따르는 선별된 집단에 의해 운영된다. 이는 대학 교육을 받은 정책 전문가들로 구성된 정부 부처일 수도 있고, 귀족들로 구성되어 국왕을 선출하고 법안을 통과시켰던 중세 폴란드의 의회(세임, Sejm)일 수도 있다. 


핵심은 기관이란 언제나 전문성을 갖춘 소수에 의해 운영된다는 점이다. 만약 어떤 기관이 정부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다면, 그 조직을 채우고 있는 특정 계급이 인구 대다수를 지배하게 된다. 이러한 조직 모델은 특정 개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절차에 의존한다는 점 때문에 나름의 이점을 가진다. 커티스(Curtis)의 말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관료제 내에서는 모든 단계의 결정이 개인에 의해 내려지지 않으며, 프로세스에 의해 결정된다. 모든 업무는 프로세스에 따라 수행된다. 관료제 속의 관리자들은 우두머리가 아니라, 예외 상황을 처리하는 사람일 뿐이다." 


기관이 언제나 존재해 온 이유는 복잡한 일들을 단순화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든 세금 징수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작동하는 기관에 의해 수행된다. 세금을 매번 개별 사안별로 징수해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그 번거로움이 얼마나 크겠는가! 따라서 어느 정부든 그 내부에는 권력을 가진 기관이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므로, 과두제의 힘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민주제 


그렇다면 민주제의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민주제는 다수에 의한 지배이며, 따라서 그 권력은 숫자에서 나온다. 다시 말해, 민주제의 힘은 모든 사회에 존재하는 일반 시민들의 군중으로부터 비롯된다. 


군중의 힘은 그 어떤 조직의 형태를 빌려서도 스스로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조직화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는 이끌고 누군가는 따라야 함을 의미하며, 이는 결국 절차만 더 복잡해진 과두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로베르트 미헬스(Robert Michels)저작에 잘 묘사되어 있는데, 그는 노동조합이 어떻게 그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성격을 잃어가는지, 그리고 권력이 어떻게 노조 간부들에게 집중되는지를 설명했다. 


민주적 권력은 오직 공통의 이해관계로 뭉친, 조직되지 않은 거대 집단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문제는 조직되지 않은 거대한 군중은 선언문을 작성하거나 일관된 정책을 입안할 수 없다는 점인데, 그러한 일에는 조직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중이 자신의 힘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폭동 혹은 그러한 폭력의 위협뿐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민주주의 혁명들은 군중의 폭력으로 그 전형을 보여주었다. 미국 혁명 당시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은 허친슨 주지사의 저택을 파괴하고 적들에게 '타르와 깃털 형벌'을 가했으며, 프랑스 혁명에서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과 '9월 학살' 당시 '인민의 적'들이 린치를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사례를 들 수 있겠지만, 야빈(Yarvin)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를 처형한 것은 바로 민주적 권력이었다. 심지어 린치조차 근본적으로는 민주적인 권력 행사라 할 수 있다. 린치는 군중의 폭력이며, 그 군중이 '조직된' 군중이 아닌 한, 군중의 폭력은 곧 민주적 폭력이다." [3] 


하지만 폭력의 위협은 때로 폭력 그 자체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곤 한다. 시위의 본질이 바로 이것이다. 즉, 시위는 군중 폭력의 위협이다. 흥분한 1만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면, 당신은 언제든 순식간에 폭력적으로 변해 상대방을 '바이마르 공화국'식 혼란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소규모 군대를 보유한 셈이다. 근본적으로 선거 또한 마찬가지다. 선거는 어느 쪽이 더 큰 군대를 소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다시 야빈의 말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클라우제비츠가 간파했듯, 전쟁과 정치는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다. 대의 민주주의는 군대들이 집결하여 그 숫자를 확인받되, 실제로 전투를 벌이지는 않는 일종의 제한적인 내전이다.” [4] 


현재의 균형 


그렇다면 오늘날 이 세 가지 권력 중 가장 강력한 것은 무엇인가? 시위를 군중 폭력의 위협으로, 선거를 내전의 리허설로 간주하는 이 모든 생각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종류의 폭력은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이 서로 고함을 지르고 선거 결과에 분노하기도 하지만, 시위대가 누군가를 린치하거나 정부 청사를 불태운다는 발상은 우리에게 상당히 생소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혁명기 파리바이마르 공화국, 혹은 모가디슈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이는 현대 서구 사회가 매우 유순해졌기 때문에 민주적 권력의 총량이 매우 낮아졌음을 시사한다. 만약 군중이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들은 무력할 뿐이다. 실제로 수만 명의 지지자를 거리로 불러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운동들은 수없이 많았다. 


이는 민주적 에너지의 상대적으로 일시적인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런 광경을 수천 번도 더 보아왔다. 정부가 인기 없는 정책을 시행하면 즉각적으로 분노와 시위, 연설이 터져 나온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면 열기는 식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며, 한 달도 채 안 되어 모두가 처음에 가졌던 그 분노를 잊어버린다. 


군주제 또한 우리 사회에서 그리 강력한 편은 아니다. 사실상 모든 기업의 수장인 CEO나 모든 식당의 수장인 셰프의 모습에서 군주제적 리더십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기는 한다. 하지만 그 영역을 벗어나면, 우리 사회는 1인 지배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그러한 직책을 아예 없애버리거나 적어도 그 권한을 제한하는 쪽을 선호한다. 


이러한 경향은 서구 국가의 국가 원수에게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명목상으로는 대통령이나 총리가 국정을 책임지는 인물이지만, 그들의 실제 권력은 보기보다 훨씬 미미하다. 그들은 예산안(이는 입법부의 권한이다)이나 인사권(대통령은 공무원을 마음대로 해고할 수 없다)에 대해 실질적인 결정권을 갖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의 군주제적 권력은 몇몇 분야에 여전히 남아있긴 하지만, 특히 정치권에서는 실질적인 행정권과 리더십을 동시에 행사하는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대신 오늘날의 평범한 정치인들은 리더십 역량이 거의 없는 관료에 가깝다. 우리가 감히 숄츠를 슈미트에, 마크롱을 드골에, 그리고 바이든을 루스벨트(FDR)에 비견할 수 있겠는가? 


이는 군주제적 권력과 민주적 권력이 거의 완전하게 부재한 상황에서, 본질적으로 과두제적 성격을 띠는 기관의 권력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의 사고 실험을 가정해 보는 것이다. 다음 선거에서 트럼프가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하여,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행정권을 제대로 발휘해 '낙태에 대한 연방 차원의 금지'와 같은 급진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결심했다고 상상해 보자. 


세 가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첫째, 공무원 집단의 부하 직원들이 해당 명령을 수행하는 데 있어 거센 저항을 보일 것이다. 그들은 해고될 수 없는 신분이기에 대통령의 의지를 관철하도록 압력을 가하기가 매우 어렵다. 게다가 대부분의 공무원은 민주당에 투표하는 성향을 띠고 있다. 이는 마치 외출 금지를 시킬 권한도 없으면서 십 대 자녀에게 파티에 가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둘째, 법무부가 이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며 위헌 소송을 제기할 것이다. 연방 대법원은 해당 행정명령에 대해 전면적인 위헌 판결을 내릴 것이고, 이제 정부 내 두 부처 간의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문제는 대법원이 대통령보다 훨씬 더 강력한 권한을 쥐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자신의 부하 직원들로부터 미움을 사고 있는 대통령의 경우, 공무원들은 위헌적인 명령을 수행해야 할 의무를 전혀 느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언론은 국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대졸 고학력자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여성의 권리와 사법 체계에 대한 이러한 폭거에 강력히 항의할 것이다. 모든 주요 도시와 대학 학부에서는 시위가 일어날 것이다. 여론은 결국 언론과 대학의 흐름을 따르기 마련이기에, 이 모든 상황은 대중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증거 A, 증거 B가 이를 방증한다. 


요약하자면, 미국의 모든 기관이 그 행정명령에 도전할 것이며, 승리는 분명 그들의 몫일 것이다. 이 사고 실험은 기관의 권력이 행정권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기관들이 정부를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교육하며, 여론의 방향을 조종하기 때문이다(야빈은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동명의 저서인 『여론(Public Opinion)』을 읽어볼 것을 권하기도 한다). 


대성당(The Cathedral) 


이러한 기관 권력의 우위는 야빈의 사상 중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그는 이를 "대성당(The Cathedral)"이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2008년의 거대한 권력의 중심은 바로 대성당(The Cathedral)이다. 대성당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바로 공인된 대학들과 기성 언론이다. 대학은 공공 정책을 수립하고, 언론은 여론을 인도한다. 다시 말해, 대학이 결정을 내리면 언론은 그에 대한 '제조된 동의(manufactured consent)'를 만들어낸다. 이는 입을 주먹으로 얻어맞는 것만큼이나 단순하고 명확한 구조다.” [5] 


“'대성당(The Cathedral)'의 미스터리는 현대 세계의 모든 정당하고 권위 있는 지적 기관들이 비록 중앙에서 통제되는 조직적 연결 고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단일한 조직 구조인 것처럼 행동한다는 점에 있다. (...) 이 구조는 항상 자기 자신과 의견을 같이한다. 더욱 당혹스러운 점은 그 교리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진화한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진화하며, 전체 구조가 일체화되어 함께 움직인다.” [6] 


모든 주요 정치 기관들은 뜻을 같이한다. 뉴욕 타임스의 생각은 하버드 대학의 생각과 일치하고, 하버드는 다시 예일 대학과 의견을 같이하며, 이들은 공무원 조직과도 큰 이견이 없다. '대성당'에 반기를 드는 기관들은 고작 학생 수 600명 정도의 '뉴 콜리지 오브 플로리다(드산티스 주지사가 개혁을 시도한 대학)'처럼 작고 미미한 곳들이나, 솔직히 수준이 낮다고 평가받는 뉴욕 포스트 같은 간행물들뿐이다. 


'대성당'의 기관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힘은 그 구성원들이 모두 동일한 계급인 인텔리겐차(intelligentsia, 지식인 계급)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이 계급은 학문적 성취에 의해 지위가 정의되며, 구성원 전원이 대학 교육을 받은 이들이다. 나아가, 현대의 인텔리겐차는 진보주의(Progressivism)라는 공통된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으며, 이는 서구의 거의 모든 기관에 스며들어 그들을 글라이히샬퉁(Gleichgeschaltet, 일체화 또는 획일화) 상태로 유지시킨다. 


사실 '대성당'이라는 개념은 지난 세기 동안 진보주의가 거둔 놀라운 성공을 가장 잘 설명해 준다. 진보주의가 멈추지 않고 세대를 거듭하며 영토를 넓혀온 것은, 사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기관들과 가장 세련된 주류 계층이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지금부터 20년 뒤 워싱턴의 정책이 어떠할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 정책들은 이른바 '정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대신 지금 하버드나 예일, 버클리에서 가르치는 아이디어들이 정책으로 구현된 모습일 뿐이다. 


물론 약간의 시차는 존재한다. 특정한 '밈(memes)'이 체제 전반에 스며들고, 노련하고 보수적인 공무원들이 은퇴한 자리를 더 젊고 열성적인 이들이 채우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간격은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80년 전은커녕 40년 전의 평범한 유권자 기준에서 보더라도, 지금의 워싱턴은 이미 심각하게 제정신이 아니다. 당신의 기준이 아무리 진보적이라 할지라도, 40년 뒤의 워싱턴이 지금처럼 미친 것처럼 보이지 않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안타깝게도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7] 


사회의 가장 똑똑하고 잘 교육받은 이들이 모인 인텔리겐차 내부라면, 당연히 다양한 사상이 공존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왜 유독 진보주의를 중심으로 이토록 견고한 이데올로기적 획일성이 나타나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진보주의가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며, 권력은 언제나 매력적이기 마련이다. 야빈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현대 서구 사회에서 자라면서 당신은 전근대나 비서구 사회의 모든 이들이 (...)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통치 이론에 믿음을 두었다고 배웠을 것이다. 왕권신수설, 교황의 사도 전승, 역사의 마르크스주의적 진화 같은 것들 말이다. 


왜 이런 터무니없는 이론들이 득세했을까? 그것이 말이 되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 비상식이 진실을 이기는가? 바로 정치 권력이 그 비상식의 편에 서 있을 때다. 이를 권력에 의한 왜곡이라 부르자. 


자, 이제 묻겠다. 열린 마음을 가진 진보주의자인 당신은 왜 자신의 통치 이론이 권력 왜곡의 또 다른 산물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직접 발명한 것도 아니고 여느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수용했을 뿐인 그 이론 말이다.” 


권력에 의한 왜곡이 가진 진짜 문제는 그것이 나쁜 아이디어를 장려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나쁜 아이디어는 필연적으로 나쁜 결과를 낳는다. 결국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더욱 기괴한 해석을 내놓거나 노골적인 거짓말을 보태게 되는데, 이런 악순환은 체제 전체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형편없는 통치 


하지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커티스 야빈이 대성당과 진보적 신념에 반대하는 이유가 그가 광적인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의 반대는 훨씬 실무적인 관점에서 비롯된다. 그는 그저 지금의 통치 기관들이 무능하며,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패스트푸드는 정부를 설명하기에 아주 적절한 비유다. 흔히 주권 법인(정부)을 관리하는 일이 패스트푸드 체인을 운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 


하지만 맥도날드 옆에 '캘미트(Calmeat, 캘리포니아 주정부 운영 식당)'가 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맥도날드를 택할 것이다. 물론 현실에 캘미트 같은 건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캘리포니아주가 패스트푸점이든 무엇이든 식당을 운영하는 게 적절하다고 보는 곳이 아니니까. '주정부 버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아무리 열린 마음을 가진 진보주의자라 해도, 만약 캘미트가 존재한다면 그 맛이 끔찍하거나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쌀 것이라는 점, 혹은 아마 둘 다일 것이라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결국 우리는 '좋은 정부'가 다스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캘리포니아는 지구상 영토의 90%보다 더 나은 통치를 받는 곳이다. 그런데도 이곳 정부가 제대로 된 버거 하나 구워내지 못할 것임은 자명하다.” [8] 


이것이 바로 서구 사회가 겪고 있는 온갖 문제들에 대한 야빈의 핵심적인 진단이다.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정부 부채부터 치솟는 범죄율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현상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에 취해버린 무책임한 정부가 내보내는 위험 신호들인 셈이다. 


지금 당장은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정부의 무능은 경제와 사회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을 것이다. 버거 하나 제대로 굽지 못하는 국가에 한 문명의 존속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21세기형 군주제?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정부를 다시 유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이 난제에 대해 야빈은 매우 파격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군주제다. 그는 현대에 몇 남지 않은 군주제 옹호론자로 악명이 높으며, 그가 내세우는 논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효율적인 경영은 어떻게 달성되는가? 


우리는 아주 간단한 방법 하나를 알고 있다. 적임자를 찾아 그 사람에게 책임을 맡기는 것이다. (...) 군대에서는 이를 지휘권의 단일화라 부르고, 기업이나 그에 반대하는 비영리 단체에서는 이 개인을 CEO라고 부른다. 


개인에 의한 관리가 효과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그 개인이 얼간이라면 효과는커녕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좋은 경영을 보장하는 확실한 공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쁜 경영을 보장하는 확실한 공식은 많다. 그러니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왜 위원회에 의한 경영은 실패하는가? 


인간이 하는 그 어떤 사업이든 통제권이 분산되면 대개 실패의 길을 걷는다. 사무실 주변에서 흔히 '정치'라 불리는 현상 때문이다. 경영이 무너질 때 정치는 어김없이 고개를 든다. (...) 관리자를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려보라. (...) 각자에게는 성공을 위한 새로운 길이 열린다. 바로 상대방을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가기 마련이다. 


정부 영역을 제외한 인간의 모든 활동 분야에서, 단일한 행정권이 최적의 결과를 낸다는 사실은 이미 상식이다. 만약 피츠(Peet’s)가 스타벅스를, 사우스웨스트가 제트블루를, 혹은 인앤아웃이 맥도날드를 이기기 위해 '권력 분립'이나 '헌법', 혹은 '합의에 의한 리더십' 같은 구조를 도입하는 게 이득이었다면, 진작 누군가는 시도했을 것이다. (...) 


그렇다면 캘리포니아에 유능한 정부를 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명확하다. 세계 최고의 CEO를 찾아 그에게 예산, 정책, 인사 전반에 대한 단일 통제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조차 없다고 본다. (이 글이 쓰인 2008년 당시) 세계 최고의 CEO는 바로 스티브 잡스였다. 


당신은 어디에서 살고 싶은가? 지금의 캘리포니아인가, 아니면 '애플포니아(Applefornia)'인가? 당신의 주머니에는 무엇을 넣고 싶은가? 아이폰인가, 아니면 '캘폰(Calphone)'인가? 내 설명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9] 


야빈의 견해에 따르면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또한 미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바꾸려는 시도 자체가 황당한 과업에 불과한데, 역사적으로 민주주의가 좋은 정부를 만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언제나 대중의 폭력과 무질서라는 결말로 치달았을 뿐이다. 


야빈이 보기에 진짜 문제는 우리가 무능한 과두제 치하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결책은 제3의 통치 체제인 군주제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는 리콴유나 루스벨트(FDR), 그리고 앞서 언급한 덩샤오핑 같은 현대적 군주형 리더들을 그 예시로 자주 거론하곤 한다. 


하지만 야빈은 군주, 즉 CEO 또한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식회사의 이사회가 경영 실적이 형편없거나 CEO가 칼리굴라처럼 폭주할 때 그를 해임할 권한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군주 위에도 그를 통제할 권위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군주가 이사회를 압도해버리거나, 반대로 이사회가 군주를 꼭두각시로 만들지 않는 시스템은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 하지만 야빈은 유능한 군주만을 배출하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은 결국 '엔지니어링'의 문제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이사회의 익명성을 보장하고 암호화 기술 등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현대 기술의 힘으로 완벽한 통치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 부분은 내 생각에 야빈이 쓴 글 중 가장 취약한 지점이다. 그의 설계 전체가 여전히 이론에만 머물러 있는 데다, 상위 권력(즉, 정부)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주식회사 모델'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전제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누가 감시자를 감시하는가?"라는 문구로 널리 알려진 고전적인 '퀴스 쿠스토디에트(Quis custodiet)'의 문제다. 기업의 CEO는 국가라는 상위 권력에 종속되어 있지만, 주권을 가진 CEO인 군주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야빈은 군주가 이사회에 종속되는 구조를 만들고자 하지만, 그가 말하는 완벽한 시스템조차 내부 사람들에 의해 부패할 수 있으며, 결국 폭군이나 무능한 군주를 낳을 위험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여기서 플라톤의 정체 순환론(hierarchy of forms of government)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은 가장 훌륭한 통치 형태가 아타튀르크나 아우구스투스, 혹은 프리드리히 대왕과 같은 '선한 왕'에 의한 통치라고 썼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최악의 통치 형태 또한 왕에 의한 통치라고 지적했다. 네로처럼 권력에 미쳐버린 폭군이나, 니콜라이 2세처럼 나약하고 무능한 군주가 다스리는 경우를 말이다. 


왜 야빈을 읽어야 하는가 


나는 여전히 커티스 야빈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것이 고등학교 시민 윤리 시간에나 배울 법한 수준의 얄팍한 정치 이해도에 정면으로 맞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식의 이해가 보수주의 운동을 어떤 꼴로 만들었는지 목격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즉 '침묵하는 다수'로부터 나온다고 믿고 있다! 실제로 내가 보수주의자가 되기를 포기한 것은 야빈을 읽고 나서였다. 이 운동이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선거에서 한두 번 이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질적인 기관의 권력을 전혀 쥐고 있지 않기에, 모든 개별 쟁점에서는 계속해서 후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패배의 곤경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저 다음 선거에서 이기기만 하면 지난 100년이 넘는 패배의 역사를 뒤집고 '워우크(Woke, 깨어 있는 척하는 진보주의)'를 물리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기대를 품는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전략이 고등학교 시민 윤리 수업 수준에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줄 뿐이다. 


비록 내가 그와 의견이 다른 경우가 많을지라도(나는 로마 공화정 지지자에 가깝다), 그의 에세이와 블로그 글들을 깊이 파고들어 보기를 전적으로 추천한다. 그의 글들은 흥미로운 역사적 일화와 날카로운 정치 비평을 제공하며, 특유의 문체에 익숙해지고 나면 매우 즐겁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정치와 관련하여 내가 가장 추천하는 글들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카스트(Castes of the United States) & BDH-OV 갈등(the BDH-OV conflict) – 짧고 간결하며 입문용으로 좋다. 


형식주의자 선언(The Formalist manifesto) – 분량이 중간 이상이며, 그의 첫 번째 에세이이자 사상의 기초가 담겨 있다. 


대성당에 대한 간략한 설명(A brief explanation of the cathedral) – 중간 정도 분량의 비교적 최신작이다. 


헤로인 자유주의자와 코카인 보수주의자(Heroin liberals and cocaine conservatives) – 중간 분량이며 현시점의 정치 상황을 다루고 있다. 


롬니! 그는 형편없다!(Romney! He sucks!) – 2012년 대선에 관한 짧고 흥미로운 글이다. 


열린 마음을 가진 진보주의자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An open letter to open minded progressives) – 매우 길며, 야빈의 핵심 저서와도 같다. 


문화 전쟁에서는 오직 패배만이 있을 뿐이다(You can only lose the culture war) – 중간 분량이며, 패배할 수밖에 없는 문화 전쟁에 대해 다룬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둘 다 가짜다(Socialism and capitalism are both fake) – 중간 분량으로, 역사와 경제를 재해석한 글이다. 


원문 링크: https://copybookcourt.substack.com/p/yarvin-for-normies-democracy-oligarc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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