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익 종교인을 향한 불친절한 공개서한 2편
좌우익 종교인을 향한 불친절한 공개서한 2편
유대교: 금융, 디아스포라, 그리고 피해자의 역설
1. 기묘한 민족
유대인은 정의하기 어려운 집단이다. 혈통으로 규정하자니 수천 년의 디아스포라를 거치며 현지인의 피가 섞였고, 언어로 규정하자니 히브리어, 이디시어, 라디노어, 아랍어, 그리고 정착한 나라의 언어까지 제각각이다. 지역으로 규정하자니 말할 것도 없다. 유럽, 중동, 북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인도 기타 등등. 유대인 공동체는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묶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종교다. 유대교라는 신앙 공동체, 그리고 그 신앙에서 파생된 문화적 정체성. 유대인은 종교가 민족을 만들어낸 역사상 가장 선명한 사례다. 국가도 없고, 공통 언어도 없고, 단일 혈통도 없는데 수천 년 동안 하나의 집단으로 존속했다. 이것 자체가 놀라운 현상이다.
고대 이스라엘 왕국이 기원전 722년(북이스라엘)과 기원전 586년(남유다)에 각각 멸망하고,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유대인들은 본격적인 디아스포라의 삶을 시작했다. 고향 없이 떠도는 민족. 그런데 그 방랑의 시간이 역설적으로 유대교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국가 없이 신앙으로만 정체성을 유지해야 했으니, 종교적 결속이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
2. 중세 유럽의 유대인: 기독교가 만든 조건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의 삶은 구조적으로 제약되어 있었다. 그 제약의 대부분은 기독교 교리와 교회의 영향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유대인은 토지 소유가 철저히 제한되었다. 중세 봉건제 사회의 핵심은 토지를 둘러싼 기독교적 충성 서약(vassalage)이었다. 영주는 신하에게 토지를 하사하며 충성과 군 복무를 요구했는데, 유대인은 ‘이교도’ 또는 ‘그리스도를 죽인 자’로 여겨져 이 서약 체계 자체에서 배제되었다. 결과적으로 농업, 즉 당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이고 안정적인 경제 기반에서 유대인은 거의 완전히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일부 지역(예: 스페인 일부)에서 예외적으로 토지 소유가 허용된 적이 있으나, 이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대다수 유럽 국가에서는 법적으로 금지되거나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장인 길드(guild)에도 가입할 수 없었다. 중세 길드는 단순한 직업 조합이 아니라, 특정 수호 성인을 모시고 미사를 드리며 기독교적 형제애를 강조하는 종교적 공동체였다. 유대인의 참여는 이러한 종교적 성격 때문에 근본적으로 배제되었다. 따라서 직물, 금속, 가죽, 목공 등 제조업과 수공업 분야에서도 유대인은 체계적으로 소외되었다. 공직이나 관직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대인은 기독교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거의 완전히 배제된 채, 도시의 변두리나 별도의 구역(게토의 전신)에서 살아야 했다.
군 복무 역시 제한적이었다. 봉건제 하에서 군대는 토지 소유와 충성 서약으로 연결된 기사 계급의 전유물이었고, 유대인은 무기 소지나 기사 작위 취득이 금지되거나 강하게 억제되었다. 농업, 제조업, 군사 활동이라는 중세 사회의 핵심 경제·사회적 축에서 유대인이 구조적으로 밀려난 것이다.
이러한 배제 속에서 남은 실질적인 선택지는 상업과 금융, 특히 대출업(moneylending)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기독교 교리는 같은 신자 간 이자 수취를 엄격히 금지했다. 구약성경(레위기, 신명기)과 신약(누가복음 6:35)을 근거로,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자를 ‘고리대금(usury)’으로 규정하고 죄악으로 여겼다. 제3차 라테란 공의회(1179) 등에서 이 금지는 더욱 강화되었고, 위반 시 파문까지 내려졌다. 그러나 성장하는 중세 경제는 신용과 자본 대출을 필수적으로 요구했다. 성당·수도원 건설, 전쟁 비용, 무역 확대, 농민의 종자 구입 등에서 돈이 필요했지만 기독교인들은 공개적으로 이자를 받을 수 없었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편리한’ 방법이 유대인이었다. 교회와 세속 군주들은 유대인에게 기독교인에게 금지된 역할을 맡겼다. 유대교 율법(신명기 23:20-21)에서는 “형제에게는 이자를 받지 말라. 그러나 이방인에게는 받을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유대인 공동체 내부에서는 서로에게 이자를 받지 않았으나, 기독교인(이방인)에게는 합법적으로 이자를 부과할 수 있었다. 왕과 귀족들은 유대인을 보호하며 이 대출업을 장려하기도 했는데, 그 대가로 높은 세금을 징수하거나 필요 시 재산을 몰수하는 식으로 이익을 취했다(예: 영국의 유대인 재산 압류와 1290년 추방).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은 수백 년에 걸쳐 금융 분야에서 전문성과 노하우를 체계적으로 축적하게 되었다. 단순한 고리대금이 아니라, 신용 평가, 어음·환어음 거래, 환전, 국제 송금 네트워크, 복리 계산, 위험 분산 등 당시로서는 고도의 지식과 신뢰를 요구하는 기술들이었다. 유대인 상인들은 이미 디아스포라 네트워크를 통해 지중해와 유럽 전역에 연결되어 있었고, 문해율이 높았으며(탈무드 교육 전통), 가족·공동체 내에서 기술이 전수되었다. 기독교 사회가 유대인을 경제적 ‘틈새’로 몰아넣었고, 유대인들은 그 제한된 공간 안에서 생존과 번영을 위해 탁월한 능력을 개발한 것이다.
이 구조는 유대인에게 양면성을 가져왔다. 한편으로는 경제적 생존 수단을 제공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고리대금업자’라는 사회적 낙인과 대중의 원망, 때로는 폭력과 추방의 대상이 되게 만들었다. 중세 유럽의 유대인 역사는 기독교가 만든 제약 조건 속에서 강제된 전문화의 역사이기도 하다.
3. 미움받는 이유의 아이러니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이 금융업, 특히 대출업을 하게 된 것은 기독교 사회가 그들을 그 자리로 밀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사실이 유대인 혐오의 가장 강력한 근거로 작용했다. “돈을 밝힌다, 교활하다, 기독교인을 착취한다”는 비난의 대부분은 기독교 교리가 만들어낸 구조적 조건의 직접적인 산물이었다.
기독교 교리는 같은 신자 간 이자 수취를 ‘고리대금(usury)’으로 규정하고 강력히 금지했다. 제3차·제4차 라테란 공의회 등을 통해 이 금지는 교회법으로 강화되었고, 이를 어기는 기독교인은 파문이나 사회적 제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 경제는 성장하면서 신용과 자본 대출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전쟁 비용, 성당 건설, 무역 확대, 농민의 종자나 도구 구입, 귀족의 사치와 정치 활동 등에서 돈이 돌지 않으면 사회 자체가 마비되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와 세속 권력은 유대인을 ‘대리 고리대금업자’로 활용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 공동체 내부에서는 이자를 받지 않았으나, 이방인(기독교인)에게는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유대율법 해석을 근거로 이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수백 년 동안 금융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았지만, 동시에 ‘착취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 아이러니는 명확했다. 기독교 사회가 유대인을 다른 직업에서 배제하고 금융이라는 좁은 틈새로 몰아넣은 뒤, 그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 노력한 것을 두고 “유대인은 본래 돈을 밝히는 민족”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채무자가 채권자를 미워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다. 특히 중세처럼 불확실성이 크고, 수확 실패나 전쟁으로 빚을 갚기 어려운 시대에는 더욱 그랬다. 농민이나 소귀족이 유대인 대출업자에게 땅이나 가축,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린 후, 이자와 함께 원금을 갚아야 하는 순간 생기는 불쾌감과 분노는 자연스럽게 돈을 빌려준 ‘유대인’에게로 향했다. 게다가 이자율은 상당히 높았다. 위험 부담(채무 불이행, 폭력적 약탈, 왕의 갑작스러운 세금 징수 등)이 컸기 때문이다. 프랑스 등지에서는 연 43%가 ‘합리적’으로 여겨졌고, 때로는 80%를 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높은 이자는 빚을 더 빨리 불려 채무자를 압박했고, 일부 유대인 대출업자들은 담보를 강하게 집행하거나, 빚을 조기 회수하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 경제적 원한에 기독교 신학이 강력한 종교적 명분을 덧씌웠다. 유대인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민족(deicide, 신살자)”이라는 신학적 죄목을 영원히 짊어지고 있었다. 교회 설교와 성경 해석을 통해 유대인은 ‘그리스도의 적’으로 묘사되었고, 경제적 착취 행위는 단순한 개인적 원한이 아니라 ‘반기독교적 음모’로 재해석되었다. 이렇게 경제적 불만과 종교적 증오가 결합하면서 유대인 혐오는 더욱 강력하고 지속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결국 유대인은 유럽 사회에서 가장 효율적인 희생양(scapegoat)이 되었다. 사회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 책임이 유대인에게로 돌려졌다. 1348~1351년 흑사병(Black Death)이 유럽을 휩쓸며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사망했을 때,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풀어 전염병을 퍼뜨렸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실제로 일부 유대인 공동체는 위생 관습(예: 흐르는 물 사용) 때문에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을 수 있으나, 이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음모론으로 왜곡되었다.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지에서 수많은 유대인 공동체가 학살당했다. 바젤, 스트라스부르, 프랑크푸르트 등에서 수천 명이 산 채로 불태워지거나 학살되었다. 교황이 이러한 비난을 부정하고 유대인을 보호하려 했음에도, 지역 권력과 민중의 광기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경제가 나빠지거나 흉년이 들면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이 착취해서 그렇다”는 비난이 일었다. 정치적 불만이 쌓이면 “유대인이 왕이나 귀족 뒤에서 음모를 꾸민다”는 음모론이 유통되었다. 심지어 일부 유대인 대출업자들이 왕이나 귀족과 결탁해 높은 세금을 대리 징수하거나, 담보 집행 과정에서 과도하게 엄격하게 행동한 사례도 있었다. 이는 채무자들의 증오를 더욱 키웠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유대인들에게도 책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는 사실이다. 일부 유대인 금융업자들은 높은 이자율을 철저히 적용하고, 채무 불이행 시 담보(토지, 집, 도구)를 가차 없이 압류했다. 이는 생존을 위한 선택이기도 했지만, 때로는 과도한 이익 추구로 이어지기도 했다. 왕과 귀족들은 유대인을 ‘왕의 소’(royal sponge)로 여기고, 그들이 축적한 부를 무거운 특별세(tallage)로 착취했다. 유대인 공동체는 왕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막대한 세금을 바쳐야 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더 공격적인 대출 관행을 취하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1세가 유대인을 1290년에 추방하면서 그들의 채권을 왕이 직접 인수해 이익을 챙기는 경우도 있었다. 즉, 일부 유대인들은 구조적 강제 속에서도 ‘착취’로 비쳐질 만한 행동을 했고, 이는 반유대 정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러한 역설은 중세 유대인 역사의 핵심이다. 기독교 사회가 유대인을 금융이라는 제한된 영역으로 몰아넣어 경제를 유지하게 한 뒤, 그 역할 자체를 이유로 미워하고, 위기 때마다 희생양으로 삼았다. 경제적 원한, 종교적 편견, 그리고 실제로 일부에서 나타난 과도한 이자 추구와 강경한 채권 집행이 뒤섞여 수백 년간 지속된 유대인 혐오를 만들어냈다. 이 미움은 단순한 편견이 아니라, 구조적 조건과 인간 심리, 그리고 현실적 갈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결과물이었다.
4. 막스 베버(Max Weber)의 아이러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의 정신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윤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칼뱅주의(Calvinism)의 예정설(predeterminism)이 세속적 소명 의식과 금욕적 근면함을 낳았고, 그것이 자본주의 발전의 문화적 토대가 되었다는 논지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것은 놀라운 아이러니다. 중세 내내 기독교가 금융과 이자를 죄악으로 규정하고 유대인에게 떠넘겼다. 유대인은 그 일을 하며 수백 년간 혐오와 탄압을 받았다. 그런데 근대에 와서 자본주의가 문명의 핵심 동력이 되자, 그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원을 기독교에서 찾은 것이다.
탄압의 도구를 쥐어준 것도 기독교, 그 도구가 문명의 엔진이 되었을 때 공을 가져간 것도 기독교. 유대인은 그 과정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가, 자본주의가 발전하자 이번엔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비밀 세력이라는 음모론의 주인공이 되었다.
5. 근대의 탄압: 나치와 소련
중세의 유대인 혐오는 근대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근대 국민국가의 논리와 결합하여 더 조직적이고 더 효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제정 러시아에서 포그롬(погром, 유대인 학살)은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거주 제한 구역인 페일(Pale of Settlement) 안에서만 살도록 강제되었다. 혁명 이후 소련에서 초기엔 유대인 해방을 약속했지만, 스탈린 시기에 이르러 반유대주의가 국가 정책으로 부활했다. 의사들의 음모 사건(1953년)은 유대계 의사들이 소련 지도자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날조된 혐의였다. 스탈린이 죽지 않았다면 대규모 숙청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는 역사상 가장 체계적으로 수행된 집단 학살이다. 600만 명의 유대인이 산업적 방식으로 살해되었다. 가스실, 강제 노동, 기아, 총살 — 근대 관료제와 산업 기술이 대량 학살에 동원된 것이다. 이것은 중세의 포그롬과 다르다. 즉흥적인 폭력이 아니라 국가가 설계하고 실행한 절멸 계획이었다.
홀로코스트는 기독교적 반유대주의의 직접적 산물은 아니다. 나치즘은 기독교보다 인종주의적 사이비 과학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수백 년에 걸쳐 유럽 사회에 축적된 반유대 정서가 나치즘이 대중적 지지를 얻는 토양이 되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6. 유대인 정체성의 모호함: 종교냐, 혈통이냐
유대인을 ‘누가 유대인인가’라는 질문으로 정의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 유대교 전통법인 할라카(Halakha, הֲלָכָה)에 따르면, 유대인은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람, 또는 유대교로 정식 개종한 사람으로 규정된다. 이 정의 자체가 이미 종교적 기준과 혈통적 기준을 교묘하게 혼합하고 있다. 어머니를 통한 혈통(matrilineal descent)이 핵심이지만, 개종이라는 종교적 절차도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이 모호함은 디아스포라(Diaspora)의 긴 역사 속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유대인들은 2,000년 이상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며 현지인과의 혼혈과 문화적 융합을 경험했다. 그 결과, 오늘날 유대인 공동체들은 외모, 언어, 문화, 심지어 유전적으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에티오피아의 베타 이스라엘(Beta Israel)은 대표적인 사례다. 그들은 자신들을 고대 이스라엘 지파 중 하나인 단(Dan) 지파의 후손이라고 믿으며, 솔로몬 왕과 시바 여왕의 후손이라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유전자 연구에 따르면, 그들의 유전적 구성은 대부분 동아프리카(특히 암하라·티그라이계)와 가깝고, 중동 유대인과의 직접적인 유전자 흐름은 미미하다. 피부색, 언어(암하라어·티그리냐어), 전통적 관습(고대 형태의 유대교) 모두 다른 유대인 그룹과 뚜렷이 구분된다. 그럼에도 1980~90년대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을 ‘유대인’으로 인정하고 대규모 공수 작전(모세 작전, 솔로몬 작전)을 통해 이스라엘로 이주시켰다.
인도의 코친 유대인(Cochin Jews)도 마찬가지다. 케랄라 지역에 정착한 이들은 수백 년 동안 현지 말라얄람 문화와 깊이 융합되었다. 유전자 분석 결과, 그들의 ancestry는 대략 70~80%가 인도 현지인에 가깝고, 중동·유대인 유래는 20% 내외로 추정된다. 그들의 관습과 의식에는 인도 힌두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배어 있다.
가장 큰 그룹인 아슈케나지 유대인(Ashkenazi, 동유럽·중유럽계)과 세파르디 유대인(Sephardim, 이베리아반도·북아프리카계) 사이에도 유전적 차이가 분명하다.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중동 레반트 기원과 남유럽(이탈리아·그리스 등) 혼혈이 두드러지며, 특정 유전 질환(Tay-Sachs, Gaucher disease 등)의 높은 보인자 비율로도 잘 알려져 있다. 반면 세파르디 유대인은 상대적으로 중동·이베리아·북아프리카 유래가 더 강하게 남아 있으며, 전체적으로 유전적 다양성이 조금 더 크다. 미즈라히(Mizrahi, 중동·중앙아시아계) 유대인까지 포함하면, ‘유대인’이라는 범주 안에 포함된 집단들의 유전적·문화적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이처럼 다양한 그룹을 하나의 민족으로 묶어온 힘은 혈통의 순수성이라기보다는 공유된 종교적 정체성과 역사적 서사였다. 탈무드와 랍비 전통, 공동의 운명(박해와 생존), 그리고 ‘선택된 민족’이라는 의식이 디아스포라 속에서도 그들을 연결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역설이 등장한다. 종교를 버린다고 해서 유대인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19~20세기 유럽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완전히 세속화·동화되어 유대교 신앙을 포기했다. 특히 독일의 개화된 유대인 가정에서는 이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그럼에도 나치 독일은 이들을 유대인으로 규정했다.
뉘른베르크 인종법(Nuremberg Laws, 1935)은 종교가 아닌 혈통(조부모의 종교적 소속)으로 유대인을 정의했다. 유대인 조부모가 3명 이상이면 ‘완전 유대인’, 2명이면 경우에 따라 ‘혼혈(Mischling)’로 분류되었다. 신앙을 버리고 가톨릭 신부가 된 사람, 또는 아예 무신론자가 된 사람조차도 ‘유대인’으로 낙인찍혀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들은 유대교를 포기했음에도 혈통 때문에 유대인으로 처형당했다.
반대로, 유대교를 열심히 믿는 사람이라도 유대인 어머니의 혈통이 없으면 전통적 할라카에서는 ‘유대인’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개종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이 모순적 정체성 — 종교를 믿지 않아도 유대인이 될 수 있고, 종교를 믿어도 유대인이 아닐 수 있는 상황 — 은 유대인 집단에게 기묘한 독립성과 탄력성을 부여했다. 외부 사회가 그들을 ‘민족’으로 보든 ‘종교 집단’으로 보든, 유대인들은 그 경계의 모호함 속에서 스스로를 재정의하며 수천 년을 살아남았다.
이 모호함은 오늘날에도 계속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이스라엘 귀환법(Return Law)에서 ‘유대인’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개종의 기준은 무엇인가, DNA 검사가 정체성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문제들이 그것이다. 유대인 정체성은 단순한 종교도, 순수한 혈통도 아닌, 역사와 신앙과 생존의 복잡한 교차점 위에 서 있는, 독특하고도 불확실한 정체성이다.
7. 이스라엘 건국: 역사상 유례없는 실험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은 인류 역사에서 거의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건이었다. 약 2,000년 전 로마에 의해 멸망한 고대 이스라엘 왕국(유다 왕국)의 후손들이, 수천 년에 걸친 디아스포라를 거쳐 언어, 문화, 외모, 유전자 구성까지 크게 달라진 상태로 다시 그 땅으로 돌아와 국가를 재건한 것이다. 그것도 성서에 기록된 ‘약속의 땅’이라는 종교적·역사적 서사를 강력한 근거로 삼아서.
이 과정은 단순한 ‘귀환’이 아니라, 근대 민족주의와 고대 종교 전통이 결합된 매우 이례적인 정치적 실험이었다.
시오니즘(Zionism)은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태동한 유대인 민족주의 운동이다. 계몽주의와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 유대인들은 적극적으로 동화를 시도했다. 독일에서는 ‘독일인으로서의 유대인’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인으로서의 유대인’을 자처하며 문화적·언어적 동화를 추구했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1894) 같은 반유대주의 파동과 동유럽의 반복되는 포그롬(학살) 속에서, 아무리 동화하려 해도 유대인은 결국 ‘영원한 타자’로 취급된다는 현실이 드러났다.
이러한 절망 속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 유대인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은 1896년 《유대 국가(Der Judenstaat)》를 출간하며 정치적 시오니즘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는 “유대인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유대인만의 주권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897년 제1차 시오니스트 대회에서 “공법에 의해 보장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민족의 고향을 건설한다”는 목표가 공식화되었다.
시오니즘은 처음에는 소수 운동이었으나, 20세기 들어 급속히 힘을 얻었다. 특히 홀로코스트(Shoah)는 이 논리를 비극적으로 확증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나치에 의해 학살되는 가운데, 유럽 어디에서도 유대인을 보호해 줄 국가나 사회가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많은 유대인에게 홀로코스트는 “유대인 국가가 없이는 유대인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처절한 교훈으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이 땅에는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 치하 팔레스타인 지역의 인구는 대략 40~50만 명 수준이었으며, 그중 압도적 다수는 아랍 무슬림과 아랍 기독교인들이었다. 1880년경 유대인 인구는 약 2~2.5만 명(전체의 5% 미만)에 불과했다. 1차 알리야(1882~1903)와 2차 알리야(1904~1914)를 거치며 유대인 이민이 증가했지만, 1914년 1차 세계대전 직전에도 유대인은 전체 인구의 약 8~13% 정도였다.
이곳에 사는 아랍 주민들은 자신들을 단순히 ‘아랍인’ 또는 지역별(예: 예루살렘인, 나블루스인)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현대적 의미의 ‘팔레스타인 민족(Palestinian people)’ 정체성은 20세기 초,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보다 명확한 형태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 붕괴와 영국 위임통치 아래에서, 시오니즘의 유대인 국가 건설 움직임에 대한 대응으로 지역적·정치적 정체성이 강화된 것이다.
갈등의 결정적 씨앗은 영국의 이중 약속(double promise)이었다.
1915~1916년, 영국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Henry McMahon)은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Hussein bin Ali)에게 서신을 통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아랍 반란을 지원하는 대가로 아랍인들에게 광범위한 독립을 약속했다(후세인-맥마흔 서신). 그러나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Arthur Balfour)는 유명한 벨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민족의 국가적 고향(a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을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고 공식 선언했다. 이 선언은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시했지만, 구체적인 경계나 실행 방안은 모호했다.
이처럼 영국은 한쪽에는 아랍 독립을, 다른 한쪽에는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하며 서로 모순되는 정책을 동시에 추진했다. 전후 국제연맹은 1920년 팔레스타인을 영국 위임통치령으로 승인하면서, 위임통치 문서 서문에 벨푸어 선언을 명시적으로 포함시켰다. 이는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배신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결의(유엔 결의 181호)했으나, 아랍 측은 이를 거부했다. 1948년 5월 14일, 영국 위임통치가 종료되던 날,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이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다음 날 여러 아랍 국가들이 침공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스라엘 독립전쟁 / 나크바)이 발발했다.
이스라엘 건국은 유대인에게는 2,000년 만의 민족적 부활이자 생존의 담보였지만,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는 대규모 실향(나크바, 약 70만 명 추정)과 공동체 붕괴의 비극이었다. 한 민족의 역사적 정의가 다른 민족의 현재적 권리와 충돌한,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도 비극적인 실험 중 하나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8. 중동전쟁과 역설의 반복
이스라엘이 1948년 5월 14일 건국을 선포하자마자, 주변 아랍 국가들은 이를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선포했다. 이집트, 요르단(당시 트란스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등 아랍 연합군이 침공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스라엘 독립전쟁 / 팔레스타인에서는 나크바, ‘대재앙’으로 불림)이 발발했다. 이후 1956년 수에즈 위기, 1967년 6일 전쟁, 1973년 욤 키푸르 전쟁까지, 불과 25년 사이에 네 차례의 대규모 전쟁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매번 군사적으로 승리했다.
특히 토착 유대인들(팔레스타인 지역에 이미 정착해 있던 유대인 사회, ‘이슈브’)과 홀로코스트 생존자 및 그 후손들의 생존 의지는 극한적이었다. 그들에게 이 전쟁들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라, 국가가 멸망하면 다시는 안전한 피난처가 없을 것이라는 배수의 진이었다. 1%에 달하는 인구(약 6,000명 이상)가 전사한 1948년 전쟁에서조차 그들은 절박한 각오로 싸웠다.
1967년 6일 전쟁은 그 절정이었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가 군사적 압박을 가해오자, 이스라엘은 선제공격을 감행해 불과 6일 만에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집트로부터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를, 요르단으로부터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을,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이스라엘의 영토는 전쟁 전의 약 3배로 확대되었고, 전략적 깊이(strategic depth)를 확보했다. 그러나 이 승리는 곧바로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이기고 난 뒤의 이스라엘이 진짜 시험대에 올랐다.
홀로코스트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집단 학살을 겪은 민족의 후손들이 세운 국가가, 이제 점령지에서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에게 가하는 통치와 억압이 국제 사회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1967년 이후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그리고 처음에는 시나이, 골란)를 군사 점령下에 두었다. 그 과정에서 정착촌 건설이 본격화되었고, 수십만 명의 유대인 정착민이 점령지에 이주했다. 국제법(제4차 제네바 협약 제49조)에서는 점령국이 자국민을 점령지에 이주시키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분쟁 지역’으로 규정하며 적용을 부정했다.
비판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 가정 철거(punitive house demolitions): 테러 용의자의 가족 집을 파괴하는 정책. 이는 명백한 집단 처벌(collective punishment)로, 국제인도법상 전쟁범죄에 해당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 사람의 행위에 대해 무고한 가족 전체를 처벌하는 행위는, 과거 나치가 유대인 공동체에 가했던 집단적 보복을 연상시킨다.
- 이동 제한과 검문소: 서안지구에 수백 개의 검문소와 장벽을 설치해 팔레스타인인의 일상적 이동을 극도로 제한했다. 농지 접근, 병원 방문, 가족 방문조차 어려워졌으며, 이는 경제적·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했다.
- 민간인 사상자와 과도한 무력 사용: 작전 과정에서 민간인 희생이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때로는 불필요하게 과도한 무력이 동원되었다는 지적.
- 토지 몰수와 강제 이주: 정착촌 확대를 위한 팔레스타인 사유지 수용, 행정 철거, ‘군사 훈련 구역’ 지정 등을 통해 팔레스타인 공동체를 점진적으로 축소시키는 정책.
인권단체들(Amnesty International, Human Rights Watch 등)은 이러한 체계를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또는 인종차별적 지배 체제로 규정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유대인에게는 시민권과 정착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팔레스타인인에게는 제한된 권리와 영구적 군사 통치를 부과하는 이중 기준이 문제라는 것이다. 게다가 일부 극단적 정착민들의 폭력(방화, 폭행, ‘가격 태그’ 공격 등)에 대한 이스라엘 당국의 미온적 대응도 비판을 키웠다.
가장 쓰라린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다. 홀로코스트 피해자의 후손들이 세운 국가가, 이제 다른 민족에게 구조적으로 억압과 강제 이주, 집단 처벌을 가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 Never Again)”는 홀로코스트의 교훈이, 정작 자신들의 생존과 안보를 명분으로 삼아 비슷한 형태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물론 맥락은 다르다. 이스라엘은 주변 아랍 국가들의 반복된 멸망 위협과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들의 테러(자살 폭탄, 로켓 공격 등) 속에서 생존을 위해 강경한 안보 정책을 취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여러 차례 평화 제안(캠프 데이비드, 올름퍼트 계획 등)을 했으나 아랍 측의 거부나 내부 분열로 실패했다고 본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말한다. 생존의 공포가, 오히려 더 강한 통제와 억압의 악순환을 만들어냈다고. 탄압받은 경험이 반드시 관용과 공정을 낳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우리도 이제 강자가 되어야 한다”는 트라우마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 역설은 1편에서 보았던 기독교 사회의 패턴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오랜 박해를 받은 집단이 권력을 쥐었을 때, 이전에 당했던 고통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비슷한 구조적 폭력을 재생산하는 패턴. 중동전쟁의 승리는 이스라엘에게 안보와 영토를 주었지만, 동시에 도덕적·정치적 딜레마를 영원히 안겨주었다.
승리 뒤에 찾아온 것은 평화가 아니라, 끝없는 점령과 저항, 그리고 그로 인한 상호 증오의 심화였다. 피해자의 기억이 가해자의 논리로 변질될 수 있다는, 인간 역사에서 반복되는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여기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9. 유대자본 음모론: 역사적 맥락과 현실
유대인이 세계를 뒤에서 조종한다는 음모론은 근대에 들어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었다. 그 대표적인 산물이 1903년경 러시아 비밀경찰(오크라나)이 날조한 《시온 장로 의정서(The 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다. 이 문서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비밀리에 세계 지배 계획을 논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사실로 밝혀진 지 오래되었지만, 20세기 내내 극우와 극좌를 막론하고 반유대 선전에 활용되었다. 나치 독일에서도, 오늘날 일부 이슬람권과 서구 극단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성전’처럼 유통되는 텍스트다.
오늘날 이 음모론의 현대적 버전은 보다 구체적이다. 골드만삭스, JP모건, 블랙록 같은 주요 금융 기관, 할리우드 스튜디오, 뉴욕타임스·CNN 등 주류 언론,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 그리고 미국 정치 엘리트층이 유대계 네트워크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 네트워크가 미국의 대외 정책을 이스라엘의 이익에 유리하게 왜곡한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단순한 ‘음모론’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명백한 통계적·현실적 사실들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유대인 인구 비율은 약 2.4%에 불과하다. 그런데 금융계 고위직, 헤지펀드, 투자은행 파트너십에서는 그 비중이 훨씬 높다. 할리우드의 주요 스튜디오 수장과 제작자, 아카데미상 수상 감독 중 유대계 비율도 인구 비례를 크게 초과한다. 미국 최고 학술지, 아이비리그 대학 교수진, 법조계·언론계 엘리트층에서도 유대계의 과대 대표성은 두드러진다. 특히 아슈케나지 유대인(Ashkenazi)의 경우, 노벨상 수상자, 필즈상 수상자, Turing Award 수상자 등 지적 엘리트 분야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보인다.
더 직접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AIPAC(미국-이스라엘 공공정책위원회)에서 드러난다. AIPAC과 그 산하 슈퍼 PAC(United Democracy Project)는 최근 선거 주기에서 수억 달러 규모의 자금을 동원해 이스라엘 비판 성향의 의원들을 노골적으로 타깃으로 삼았다. 2024년 선거에서는 ‘스쿼드(Squad)’로 불리는 진보파 민주당 의원들(Jamaal Bowman, Cori Bush 등)을 상대로 수천만 달러를 투입해 경선에서 패배시켰다. 미국 의회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 원조와 외교적 지원이 초당적으로, 그리고 종종 미국의 다른 전략적 이익(예: 사우디와의 관계, 이란 정책의 유연성)보다 우선시되는 현상은, 단순한 ‘우방 외교’로 설명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음모론자들은 이를 “유대인 집단이 의도적으로 미국을 장악해 이스라엘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고 본다. 그러나 더 설득력 있는 관점은 역사적 누적의 결과라는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 기독교 사회가 유대인을 토지 소유·길드·군대 등 핵심 분야에서 배제하고 금융·상업이라는 좁은 틈새로 몰아넣은 것이 시작이었다. 그 안에서 수백 년 동안 신용 거래, 국제 네트워크, 자본 관리 기술을 축적한 결과, 근대 자본주의 시대에 유대인 가문과 네트워크가 상대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높은 문해율, 탈무드 전통에서 비롯된 추상적·수학적 사고력, 그리고 디아스포라를 통한 국제적 연결망이 이를 더욱 강화했다.
문제는 이 ‘성공’이 특정 분야에서 사실상 카르텔(cartel)에 가까운 영향력을 행사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할리우드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아니라 미국의 문화적·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형성하는 핵심 기관이다. 유대계가 이 분야에서 압도적 영향력을 가지는 상황에서, 기독교 전통·백인 서구 문명·전통적 가족 가치에 대한 부정적 묘사, 또는 이스라엘·유대인 관련 서사에서 보이는 일관된 편향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금융계 역시 마찬가지다. 글로벌 금융의 핵심 의사결정권에 특정 민족 집단이 과도하게 집중되면, 그 집단의 문화적·정치적 선호(이스라엘 안보 우선주의, 글로벌리즘 등)가 미국의 국가 이익을 왜곡할 위험이 커진다.
더 심각한 것은 이중 충성(dual loyalty) 문제다. 미국 유대인 엘리트 중 상당수가 이스라엘에 강한 정체성과 감정적 유대를 가지고 있으며, AIPAC 같은 조직을 통해 이를 미국 정치에 적극 투영한다. 미국 납세자의 혈세가 매년 수십억 달러 규모로 이스라엘에 지원되는 동안, 미국의 중동 정책이 때로는 워싱턴의 전략적 판단이 아닌 예루살렘의 안보 계산에 더 좌우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미국 우익 입장에서 볼 때, 명백한 주권 침해이자 국가 이익의 왜곡이다.
아이러니는 여전하다. 기독교 유럽이 중세에 유대인을 금융이라는 한정된 영역으로 몰아넣어 생존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로 형성된 자본력과 네트워크가 근대에 이르러 미국의 정치·경제·문화 엘리트층을 상당 부분 장악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이제 그 과대 대표성과 조직적 영향력이, 다시금 강한 반발과 새로운 형태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유대인 집단의 높은 지능, 교육 열의, 기업가 정신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특정 민족 집단이 핵심 국가 기관과 산업을 과도하게 지배하는 현상이 장기적으로 건전한 사회에 좋은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역사적으로 어떤 민족도 영원한 엘리트 지위를 유지한 적이 없으며, 과도한 집중은 필연적으로 반발을 낳는다. 미국 우익이 우려하는 것은 ‘유대인 음모’가 아니라, 특정 집단의 과도한 권력 집중이 미국의 주권, 문화 정체성, 그리고 진정한 국가 이익을 잠식할 가능성이다.
이것이 현대판 ‘유대자본’ 논쟁의 본질적 현실이다.
10. 대안우파와 좌파의 반유대주의
21세기 들어 가장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는, 반유대주의(antisemitism)가 정치적 스펙트럼의 좌우를 가리지 않고 동시에 부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랜 기간 ‘극우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반유대주의가, 이제 우파와 좌파 양측에서 각기 다른 형태와 논리로 재등장하고 있다.
대안우파(Alt-Right)의 반유대주의는 직설적이고 민족주의적이다.
그들은 유대인을 백인(유럽계) 문명의 내부 적으로 규정한다. 백인 인구 감소, 대량 이민 장려, 다문화주의, 페미니즘, LGBTQ 운동, 전통 가족 가치의 해체 등 서구 사회의 급진적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이 유대계 엘리트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프랑크푸르트 학파(아도르노, 마르쿠제 등), 문화 마르크스주의, 할리우드와 주류 미디어의 진보적 프레임, 글로벌 금융 기관의 정책, 그리고 AIPAC을 통한 미국 정치 영향력까지 모두 하나의 연결된 프로젝트로 해석된다. 대표적인 구호인 “You will not replace us(너희는 우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백인 대체 이론(Great Replacement)과 결합되어, 유대인을 ‘백인 인종의 대체를 설계하는 설계자’로 본다. 리처드 스펜서, 케빈 맥도널드(Kevin MacDonald)의 《문화를 파괴하는 문화(The Culture of Critique)》 같은 저작들은 이 진영에서 성경처럼 읽힌다. 그들에게 유대인은 단순한 종교 집단이 아니라, 집단적 생존 전략으로서 코즈모폴리턴적 가치와 반(反)민족주의를 추진하는 민족 집단이다.
반면, 좌파의 반유대주의는 더 복잡하고 미묘하며, 도덕적 정당성을 내세운 형태로 나타난다.
그 출발점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나 이 비판은 종종 이스라엘 정부를 넘어 유대인 전체, 또는 ‘유대인 로비’로 확대된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 테러 이후 가자지구 전쟁을 계기로 이 현상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미국과 유럽 대학 캠퍼스에서 벌어진 친팔레스타인 시위에서 “From the river to the sea, Palestine will be free”(강에서 바다까지, 팔레스타인은 자유로우리라) 구호와 함께 “Zionist don’t deserve to live”, “Globalize the Intifada” 같은 노골적인 반유대적 슬로건이 등장했다. 일부 좌파 활동가들은 “이스라엘 = 유대인”, “유대인 자본 = 제국주의”라는 등식을 통해, 자본주의·식민주의·인종차별의 근본 원인으로 유대인을 지목한다.
좌파 진영 내부에서는 ‘Zionist’라는 단어를 ‘유대인’의 대용어로 사용하는 경우가 늘었고, 유대인 학생이나 교수에 대한 괴롭힘, 유대인 기업 불매 운동, 심지어 홀로코스트 교육 자체를 ‘시오니즘 선전’으로 매도하는 극단적 사례도 나타났다. 전통적 좌파의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반자본주의 프레임이 반유대주의와 쉽게 결합되는 구조를 드러낸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듯 보이는 이 두 흐름은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1. 희생양 메커니즘(Scapegoating): 복잡하고 다층적인 사회 문제를 하나의 특정 집단에게로 단순화시켜 책임을 돌린다. 대안우파는 서구 문명의 쇠퇴를, 좌파는 팔레스타인 문제와 글로벌 불평등을 모두 ‘유대인 집단’ 탓으로 돌린다.
2. 과대 대표성의 왜곡된 해석: 유대인의 금융·미디어·학계에서의 높은 성취와 영향력을 ‘의도적 지배’ 또는 ‘음모’로 재해석한다.
3. 집단 책임 논리: 개별 유대인의 행위나 특정 조직(AIPAC, 특정 미디어 기업 등)의 행동을 ‘유대인 전체’의 특성으로 일반화한다.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이 ‘고리대금업자’이자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으로 낙인찍혀 사회적 위기 때마다 희생양이 되었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심리가 21세기에도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종교적 편견과 경제적 원한이 결합했지만, 오늘날에는 우파의 민족주의와 좌파의 반식민·반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각각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양측 모두 자신들의 반유대주의를 ‘정당한 비판’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대안우파는 “인종 현실주의와 문명 수호”라고 하고, 좌파는 “인권과 반제국주의”라고 포장한다. 그러나 결국 둘 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복잡한 권력 관계를 특정 민족 집단에게 투사하며,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온 희생양 찾기 게임을 이어가고 있다.
21세기 반유대주의의 부활은 좌우 이념의 양극화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중세의 종교적 반유대주의가 근대의 인종적 반유대주의로 변형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그것은 다시 ‘문화 전쟁’과 ‘정체성 정치’의 언어로 재포장되어 사회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이 현상은 단순히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아니라, 현대 사회가 복잡한 문제를 직면했을 때 여전히 ‘쉬운 적’을 찾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인간 본성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11. 이스라엘을 둘러싼 서구의 분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은 더 이상 중동 지역의 국지적 분쟁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21세기 서구 사회 내부를 가장 깊게 갈라놓는 정치·문화적 쟁점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미국과 유럽에서 이 문제는 좌우 이념, 세대, 종교, 인종을 넘어서 강력한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
한쪽에는 강경한 이스라엘 지지론이 있다.
이 진영의 핵심 동력은 기독교 시오니즘(Christian Zionism)이다. 미국 복음주의 개신교(특히 남침례교, 오순절파, 독립 교회)에서 가장 강력하게 나타나는 이 사상은,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을 성서 예언의 직접적인 성취로 해석한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땅’으로 유대인이 돌아온 것이 종말론적 과정의 일부이며, 예루살렘 통일과 제3성전 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길 것이라는 믿음이다. 미국에서만 약 2,000만~4,000만 명으로 추정되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이 신학적 관점에서 이스라엘을 ‘신의 선택 받은 민족’의 국가로 보고,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신앙의 의무로 여긴다.
이와 함께 홀로코스트 도덕론이 강력한 세속적 근거를 제공한다. “Never Again(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이라는 슬로건 아래, 서구 사회 특히 미국과 독일은 홀로코스트의 역사적 죄책감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생존권과 안보를 특별히 보호해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을 강조한다. 미국 의회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 원조(연간 약 38억 달러)가 초당적으로 통과되는 배경에는 이러한 종교적 열정과 역사적 죄책감의 결합이 자리 잡고 있다.
반대편에는 점점 더 커지는 회의론과 비판론이 있다.
이 진영은 주로 진보 좌파, 젊은 세대, 그리고 일부 고전적 보수주의자들로 구성된다. 그들은 “왜 21세기 서구 국가들이 중동의 오래된 종교·민족 분쟁에 이토록 깊이 개입하고, 막대한 혈세를 투입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특히 2023년 10월 7일 이후 가자지구 전쟁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사망, 병원과 학교 폭격, 인도적 위기 상황을 두고 “이스라엘의 자위권을 넘어선 집단 처벌과 과도한 무력 사용”이라는 강한 비판을 제기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서안지구 정착촌 확대를 국제법 위반으로 보고, 팔레스타인인의 자결권과 국가 건설 권리를 강조한다. 일부 급진적 목소리는 “이스라엘은 식민주의 프로젝트”이며, 서구가 이를 지원하는 것은 ‘신제국주의’의 연장이라고 주장한다. 대학 캠퍼스와 젊은 좌파 사이에서는 “Zionism is racism(시오니즘은 인종차별이다)”이라는 구호가 다시 유행하고 있으며, BDS 운동(Boycott, Divestment, Sanctions)도 지속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분열의 본질은 서구 사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아브라함계 종교들의 정치적 충돌이다.
기독교 문명권(특히 그중에서도 복음주의 세력)이 유대교 국가(이스라엘)를 강하게 지지하며, 이슬람 세계와 대립하는 구도가 명확해졌다. 한편으로는 세속화된 진보 좌파가 팔레스타인-이슬람 진영에 더 가까운 입장을 취하면서, 서구 내부의 문화 전쟁이 중동 갈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결과적으로 미국 민주당은 젊은 진보층과 전통적 유대인·복음주의 지지층 사이에서 심각한 균열을 경험하고 있으며, 유럽에서는 프랑스, 영국, 독일 등지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둘러싼 대규모 시위와 폭력 사태가 반복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유대인 학교와 시너고그에 대한 공격이 증가했고, 영국 노동당 내부에서는 ‘반유대주의’ 논란이 당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커졌다.
이 갈등은 더 이상 먼 중동 땅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서구 사회의 정체성, 가치관, 종교적 신념, 세대 간 갈등이 한데 뒤엉킨 내부의 문화 전쟁이다.
기독교 시오니즘은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이 서구 문명의 도덕적 의무”라고 말하고, 진보 좌파는 “팔레스타인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서구의 위선”이라고 외친다. 양측 모두 자신들의 입장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구 사회의 단합은 점점 더 약화되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는 이제 단순한 외교 문제가 아니라, 서구 문명 내부의 깊은 분열을 드러내는 거울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거울은 점점 더 선명하고, 날카롭게 서구 사회를 비추고 있다.
12. 피해자의 역설: 패턴의 완성
유대인의 역사는 하나의 일관된 역설을 보여준다.
탄압받는 소수 → 구조적 조건에 의해 특정 역할에 집중 → 그 역할이 혐오의 근거가 됨 → 대규모 학살 → 국가 건국 → 자신들이 탄압받던 방식으로 타자를 탄압 → 다시 혐오의 대상이 됨.
이것은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1편에서 기독교의 역사에서 본 패턴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탄압받은 경험은 공감 능력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생존 본능과 결합하면 오히려 더 강한 탄압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인류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이 패턴은 특정 종교나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생존 본능이 결합했을 때 나타나는 구조적 결과에 가깝다.
3편에서는 이슬람으로 넘어간다. 황금기를 거쳐 극단화로 향한 이슬람의 궤적, 그리고 그 안에서 작동하는 동일한 구조적 패턴을 추적한다.
- 참고문헌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 기독교적 금욕주의와 소명 의식이 자본주의 발전의 문화적 토대가 되었다는 논지. 기독교가 근대 경제 질서를 만들어낸 방식을 분석하며, 유대인을 금융업에 가둔 기독교가 자본주의의 공을 가져간 아이러니를 이해하는 배경이 된다.
아서 쾨슬러, 『제13지파(The Thirteenth Tribe)』 — 아슈케나지 유대인의 상당수가 셈족의 후손이 아니라 중세 카자르 왕국의 개종자들에서 유래했다는 논쟁적 주장을 펼친 저작. 유대인의 혈통적 정체성이 얼마나 복잡하고 불확정적인지를 보여주는 출발점.
슐로모 산드, 『만들어진 유대인(The Invention of the Jewish People)』 — 유대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역사학적으로 추적한 저작. 종교가 민족을 만들어낸 사례로서의 유대인 정체성을 분석한다.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 반유대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그것이 근대 전체주의로 이어지는 과정을 분석. 유대인 혐오가 어떻게 구조적으로 생산되고 정치적으로 동원되었는지를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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