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 혁신관료의 철학과 그 계보

만주국 혁신관료의 철학과 그 계보

 

1931년 9월 18일 밤, 관동군 참모들이 남만주철도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 측의 소행이라 위장했을 때, 그들은 단순히 군사 작전을 개시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의 실험실을 건설할 빌미를 만들고 있었다. 이듬해 세워진 만주국 안에서 실험된 통치 기술은 공상 따위가 아니었다. 만주국은 20세기 동아시아의 가장 기이한 정치적 실험장이었으며, 그 실험의 설계자들이 바로 '혁신관료(革新官僚, 카쿠신 칸료)'였다.


이들에 대한 통념은 대개 두 가지 방향으로 오도된다. 하나는 이들을 단순한 파시스트의 아류로 보는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을 경제 근대화의 선구자로 미화하는 시각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이들의 사상적 복잡성에 접근하지 못한다. 만주국 혁신관료의 철학은 어느 하나의 '-이즘(-ism)'으로 분류되기를 거부하는 다층적 구조물이었다. 그 다층성이야말로 이들 사상의 본질이었으며, 동시에 이들이 역사적으로 그토록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글은 만주국 혁신관료의 사상적 계보를 추적하고, 그 내부 구조를 분석하며, 그것이 왜 단순한 지적 유산이 아니라 살아있는 정치적 유산으로 남아 있는지를 검토한다.


'혁신관료'라는 명칭은 1930년대 일본에서 자연스럽게 통용되기 시작한 호칭이다. 이들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을 통과한 엘리트 관료들로, 상공성, 내각기획원, 만주국 총무청을 주된 활동 무대로 삼았다. 대표적 인물로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호시노 나오키(星野直樹),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悦三郎), 미야자키 마사요시(宮崎正義), 모리 히데토(森肇), 오쿠무라 기와오(奥村喜和男) 등이 있다. 이들 중 다수는 '니키 산스케(二木三介)'라고 불린 만주국의 핵심 지배 집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역사가 재니스 미무라(Janis Mimura)는 자신의 저서 『Planning for Empire: Reform Bureaucrats and the Japanese Wartime State』(Cornell University Press, 2011)에서 이들의 이념을 '테크노파시즘(techno-fascism)'이라 개념화했다. 테크노파시즘이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융합하고, 자본의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며, 기술관료가 사회를 지배하는 권위주의적 질서를 가리킨다. 이 정의는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개념은 이들 사상의 사상적 출처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도 있다. 테크노파시즘은 결과를 기술하는 것이지, 그 결과가 어떤 사상적 흐름들의 교차로에서 탄생했는지를 해명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주국 혁신관료들의 가장 직접적인 사상적 원천은 독일 경제학, 특히 독일 역사학파(Historische Schule der Nationalökonomie)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이 도쿄제대 법학부에서 공부한 것은 영미법이 아니라 독일법이었다. 1930년대 도쿄제대의 법학 커리큘럼은 독일의 그것을 대거 이식한 것이었으며, 학생들은 애덤 스미스나 마셜보다 리스트와 슈몰러를 더 충실하게 읽었다.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의 『국민경제학의 국민적 체계(Das nationale System der politischen Ökonomie)』(1841)는 혁신관료들의 사상에 골격을 제공한 핵심 텍스트다. 리스트의 논지는 단순하지만 파괴적이었다. 자유무역은 이미 산업화를 완성한 국가(즉, 영국)에게만 유리한 이론이다. 후발 산업국은 자국 산업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국가가 전략적 부문에 개입해야 한다. 보편적 경제 법칙 같은 것은 없으며, 각 국민은 자신의 발전 단계에 맞는 경제 정책을 스스로 수립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유치산업보호론(Infant Industry Argument)'이고, 훗날 만주국 5개년 계획과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이론적 원형이 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리스트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깊은 층위에서 프로이센 관방학(Kameralwissenschaft)이 작동하고 있다. 17~18세기 프로이센에서 발달한 관방학은 단순한 재정학이나 행정학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를 하나의 경영체로 파악하고, 군주의 재정과 국력을 체계적으로 강화하는 '기술의 총체'였다. 요한 하인리히 폰 유스티(Johann Heinrich von Justi)로 대표되는 관방학의 핵심 전제는 세 가지다. 국가는 개인들의 계약이 아니라 유기적 전체다. 국가의 부강은 개인의 행복보다 선행한다. 관료는 이 목표를 실현하는 기술적 전문가다.


이 관방학의 전통이 비스마르크의 국가 주도 산업화로 이어지고, 메이지 일본이 이를 의식적으로 이식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비스마르크를 만나 헌법 제정의 노하우를 배운 것은 이 이식 과정의 상징적 장면이다. 만주국 혁신관료들은 이미 이 이식이 완성된 토양 위에서 성장했다. 그들이 독일을 참조한 것은 단순한 지적 유행이 아니라 메이지 이래 120년에 걸친 제도적 계보의 연속이었다.


독일 역사학파가 혁신관료들에게 경제적 골격을 제공했다면,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와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는 그 골격에 이데올로기적 살을 입혔다. 혁신관료들이 직접 읽고 인용한 독일 사상가 중 좀바르트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좀바르트는 자본주의를 분석하되, 영미식 자본주의와 독일식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구분했다. 그의 『상인과 영웅(Händler und Helden)』(1915)은 제1차 세계대전을 문명론적 맥락에서 재해석한다. 영국은 상인의 문명이다. 독일은 영웅의 문명이다. 이 전쟁은 계산하는 자와 헌신하는 자 사이의 전쟁이다. 이 구도는 1930년대 일본 지식인들에게 즉각적인 울림을 주었다. '영미적 상업주의 대 동아시아적 영웅주의'라는 대동아공영권의 이데올로기적 골격이 좀바르트의 이 이항대립에서 상당 부분 차용된다.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landes)』(1918~1922) 역시 결정적이다. 슈펭글러의 문명 순환론은 서구 문명의 필연적 쇠퇴를 예언한다. 일본 지식인들, 특히 교토학파는 이것을 아시아 문명의 부상에 대한 선언으로 읽었다. 그러나 혁신관료들이 슈펭글러에서 가져간 것은 비관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행동주의였다. 역사에 '황혼'이 있다면, 이제 '새벽'을 선점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혁신관료들이 참조한 또 다른 인물로는 오트마어 슈판(Othmar Spann)과 프리드리히 폰 고틀-오틸리엔펠트(Friedrich von Gottl-Ottlienfeld)가 있다. 슈판의 전체론적 경제학(Universalismus)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경제학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유기적 공동체 경제학을 주창한다. 고틀은 경제의 기술적·공학적 합리화를 강조하면서 관료와 기술자의 역할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경제 이론을 재편했다. 이들의 이름은 혁신관료들의 실제 문헌에 등장하는 레퍼런스들이다.


그러나 독일 사상이 만주국으로 직행한 것은 아니다. 중간에 일본에서의 숙성 과정이 있었다.


교토학파(京都學派)는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에서 시작해 다나베 하지메(田邊元), 고야마 이와오(高山岩男)로 이어지는 일본의 철학 전통이다. 이들은 하이데거와 헤겔을 소화하면서 일본 정신의 철학적 정당화를 시도했다. 핵심 개념은 '세계사의 철학'이다. 일본은 서구 근대를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 근대가 봉착한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사적 원리를 제시하는 주체다. 이것은 혁신관료들에게 이론적 자신감을 부여했다. 우리가 하는 것은 후진적 모방이 아니라 서구 근대의 '지양(止揚)'이라는 것.


군부 내에서는 황도파(皇道派)와 통제파(統制派)의 분열이 혁신관료들의 사상적 위치를 규정하는 데 중요하다. 황도파가 정신적·낭만적 천황주의를 내세우며 쿠데타를 선호했다면, 통제파는 국가의 합리적·기술관료적 운영을 강조했다. 혁신관료들은 대체로 통제파와 친화적이었다. 기시 노부스케로 대표되는 이들의 지향은 명확했다. 천황은 정신적 구심점으로 유지하되, 실제 국가 운영은 기술 관료가 합리적으로 장악한다. 이것은 이중 구조였다. 통치의 정당성은 신화적 권위에서 빌리되, 실질적 권력은 전문 관료가 행사한다.


이 모든 사상적 재료가 만주국이라는 공간에서 처음으로 실제 실험으로 구현된다. 만주국의 공식 이념은 '왕도낙토(王道樂土)'와 '오족협화(五族協和)'였다. 그러나 이것은 포장지였다. 실질 내용은 국가 주도의 산업화, 기술관료에 의한 계획경제, 그리고 자이바쓰를 배제하고 신흥 재벌과 협력하는 새로운 국가-자본 관계였다.


미야자키 마사요시가 설계한 만주산업개발 5개년 계획은 소련의 5개년 계획을 노골적으로 참조하되, 국유화 대신 국가 통제 하의 사기업을 활용했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생산수단의 소유권은 사적으로 두되, 경영의 방향과 자원 배분은 국가가 결정한다. 닛산의 총수 아유카와 기스케(鮎川義介)를 만주로 끌어들여 만주중공업개발주식회사(満洲重工業開発株式会社)를 창설한 것이 이 모델의 구체적 표현이었다. 이것이 훗날 일본의 케이레쓰, 한국의 재벌-국가 관계의 원형이다.


찰머스 존슨은 『MITI and the Japanese Miracle』에서 전시 관료들이 만주에서 연마한 기획 기술이 전후 통산성으로 이어지는 제도적 연속성을 논증한다. 그는 통산성의 '황금 시대'가 1935~1955년이라는 부서 내부의 자부심 어린 자기 규정을 인용하며, 이 황금 시대의 전반부가 전시 계획경제의 시대임을 지적한다. 만주는 일종의 예행연습이었다.


기시 노부스케는 이 실험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1936년 만주국 산업부 차장으로 부임한 그는 호시노 나오키(星野直樹)로부터 산업 경제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아 댐 건설, 전력선 부설, 알루미늄 산업 창설, 광업 확장을 포함하는 야심찬 산업화 계획을 실행했다. 그의 관료 통치 철학의 핵심은 명확했다. 이데올로기보다 실적, 정치보다 기술, 원칙보다 결과.


혁신관료들의 사상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요소 중 하나는 소련에 대한 태도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적으로 규정하면서도, 소련의 계획경제 기법을 열성적으로 학습했다. 1928년 시작된 소련의 제1차 5개년 계획은 일본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단순히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가 산업화를 실현하는 가장 강력한 모델로 주목된 것이다.


혁신관료들 중 일부(특히 모리 히데토와 오쿠무라 기와오)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직접 흡수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분석 방법론을 수용하면서도, 계급투쟁의 결론 대신 국가 주도의 자본주의적 발전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이것은 기이한 절충이지만, 지적으로는 일관된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실재하지만, 그 해결은 계급투쟁이 아니라 국가에 의한 합리적 조율로 이루어진다.


나아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 역시 혁신관료들의 시선을 끌었다. 자유주의 경제의 본산인 미국에서조차 국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국가 개입주의를 정당화하는 논거로 활용되었다. 혁신관료들은 이렇게 마르크스주의, 소련식 계획경제, 뉴딜, 독일 국가사회주의 경제 이론을 동시에 참조하면서, 그 어느 것도 아닌 독자적 합성물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 계보를 서양 사상으로만 설명하면 무언가 놓치게 된다. 만주국 혁신관료들의 국가관에는 동아시아 자체의 오래된 전통이 구조적으로 공명하고 있다. 그것은 법가(法家)의 부국강병론이다.


상앙(商鞅)의 진나라 개혁(농업과 전쟁에 모든 자원을 집중하고, 귀족의 세습적 특권을 해체하고, 국가의 합리적 통제를 극대화하는 정책)은 2천 년의 시간을 건너 만주국 계획경제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한비자(韓非子)의 술(術)·법(法)·세(勢) 삼위일체론도 마찬가지다. 지도자는 법으로 행동의 기준을 세우고, 술로 신하를 통제하며, 세—즉 권력의 위치적 우위—로 전체를 장악한다. 이것은 기시 노부스케의 관료 통치론, 나아가 박정희의 실제 통치 방식과 구조적으로 일치한다.


물론 혁신관료들이 법가를 의식적으로 학습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그러나 법가적 국가관은 동아시아 유교 질서 안에 내재된 잠재적 코드였다. 위기의 시대에, 부국강병이 지상 과제가 될 때, 그 코드는 자연스럽게 활성화된다. 혁신관료들은 독일 사상이라는 외래 문법으로 동아시아의 오래된 문장을 다시 쓴 것인지도 모른다.


이 모든 층위를 통과하면, 만주국 혁신관료의 사상에 대한 하나의 핵심 명제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은 이념이 아니라 도구였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목적 합리적 사상 운용술'이었다.


혁신관료들의 실용주의는 피상적 기회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 원칙은 단 하나였다. 민족 국가의 부강이라는 목적 앞에서, 수단은 어디서든 빌릴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분석 도구, 소련의 계획 기술, 독일의 국가론, 미국의 경영 기법—이 모든 것이 목적을 위한 재료였다. 그들이 배격한 것은 어떤 특정 이론이 아니라 이론적 순수성에 대한 집착 그 자체였다.


이 특성이 영미권 연구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영미권의 지적 전통은 사상을 이즘(ism)으로 분류하는 데 익숙하다. 파시즘인가, 국가자본주의인가, 권위주의적 근대화인가. 그러나 혁신관료들의 사상은 이 분류 체계의 어떤 칸에도 깔끔하게 들어가지 않는다. 그것은 이즘(ism)이라기보다는 방법론이었기 때문이다.


미무라가 '테크노파시즘'이라고 부른 것의 핵심은, 서양 과학과 기술은 포용하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사유재산, 사적 이윤, 기업의 자율성)는 거부하는 분열된 수용이었다. 서양의 도구를 가져오되, 서양의 정치 철학은 거부한다. 이 분열이 혁신관료들의 사상이 가진 내적 긴장의 원천이기도 했다.


만주국 혁신관료들의 사상은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소멸하지 않았다. 그것은 여러 경로를 통해 전후 세계로 유입되었다.


가장 직접적인 경로는 일본 자체다.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으로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기소 없이 석방된 후, 1957년 총리로 취임한다. 그는 통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전후 일본의 관료 주도 경제 모델을 설계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찰머스 존슨이 분석한 MITI의 작동 방식(산업 정책을 통한 민간 기업 지도, 자원 배분의 관료적 조율, 이른바 '행정 지도(行政指導)')는 만주국 경험의 전후(戰後) 버전이었다.


한국으로의 전수는 더 직접적이었다. 박정희는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장교였다. '만주 인맥'은 그의 정치적 기반의 핵심 구성 요소였다. 박정희가 실행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재벌-국가 관계, 특정 산업에 대한 국가의 전략적 집중 지원. 이것들은 만주국 5개년 계획 모델의 한국어 번역판이었다.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가 1960년대에 만났을 때, 기시는 박정희의 발언이 자신의 만주국 시절 발언과 너무 닮아 있어 당혹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팔라듐 매거진(Palladium Magazine)이 2024년 발표한 분석 'The School That Built Asia'는 만주국 모델의 지리적 파급을 추적하면서, 중국의 만주 지역 당서기 가오디(高狄)가 만주국 설립 이념인 국가 주도적 사회 개조를 가장 충실하게 계승한 마지막 혁신관료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분석이 옳다면, 만주국 혁신관료의 유산은 일본과 한국을 넘어 중국 공산당의 지역 발전 모델에까지 스며들어 있는 셈이다.


만주국 혁신관료의 철학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그것은 독일 역사학파의 발전론, 프로이센 관방학의 국가론, 좀바르트와 슈펭글러의 반자유주의적 문명 비판, 소련 계획경제의 기법적 차용, 교토학파의 철학적 정당화, 법가적 국가관의 구조적 공명이 하나의 실천적 합성물로 녹아든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합성물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절충주의를 의식적 원칙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이념적 순수성이 국가의 부강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수단의 선택은 목적에 복무해야 한다. 이 태도는 지적으로는 냉소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천적으로는 놀라운 적응력을 낳았다. 환경이 바뀌면 이념도 교체된다. 미무라가 지적하듯, 혁신관료들은 전쟁 중에는 나치 독일의 경제 모델에서 배웠고, 전후에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동일한 기술관료적 지향을 유지했다.


이 적응력이야말로 만주국 혁신관료의 철학이 단순한 역사적 유물이 아닌 이유다. 그것은 국가 주도 발전의 가능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구현한 사례 연구다. 가능성의 측면에서, 그것은 자원이 빈곤하고 제도가 취약한 조건에서 급속한 산업화를 달성하는 기술을 보여주었다. 위험성의 측면에서, 그것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얼마나 쉽게 인간 존엄의 체계적 파괴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었다.


만주국은 1945년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소멸했다. 그러나 그것이 실험한 사상은 소멸하지 않았다. 그것은 도쿄의 통산성으로, 서울의 경제기획원으로, 그리고 아마도 그 너머까지 이동했다. 혁신관료들이 남긴 가장 지속적인 유산은 특정 정책이 아니라 하나의 사유 방식이었다. 이념보다 결과, 원칙보다 효율, 보편보다 국가. 이 사유 방식의 윤리적 함의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지만, 그것이 20세기 동아시아의 정치경제를 형성한 핵심 변수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주요 참고 문헌

Mimura, Janis A. Planning for Empire: Reform Bureaucrats and the Japanese Wartime State. Cornell University Press, 2011.


Johnson, Chalmers. MITI and the Japanese Miracle: The Growth of Industrial Policy, 1925-1975.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2.


List, Friedrich. Das nationale System der politischen Ökonomie. Cotta, 1841.


Sombart, Werner. Händler und Helden: Patriotische Besinnungen. Duncker & Humblot, 1915.


Spengler, Oswald.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 C.H. Beck, 1918-1922.


丸山眞男. 日本の思想. 岩波書店, 1961.


Cumings, Bruce.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2.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


Eckert, Carter J. Offspring of Empire: The Koch'ang Kims and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1.


Palladium Magazine. 'The School That Built Asia.' 2024.


Palladium Magazine. 'The Works of the Monster of Shōwa.'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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