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테리어니즘의 불모지, 슬라브 유럽

리버테리어니즘의 불모지, 슬라브 유럽


리버테리어니즘은 스스로를 보편적 진리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개인은 본래적으로 자유롭고, 국가는 그 자유를 빼앗아가는 외부적 침입자이며, 자발적 교환과 계약이 가장 자연스러운 사회 조직의 형태라는 것. 이 믿음은 단순한 정치적 선호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주장이다.


그런데 이 "보편적" 이념은 지구상에서 극히 제한된 지역에서만 실질적인 정치력을 가져본 적이 있다. 미국, 영국, 그리고 앵글로색슨 문화권의 일부 국가들. 서유럽 대륙에서조차 리버테리어니즘은 하나의 소수 사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아시아, 슬라브 동유럽, 중동, 아프리카—이 광대한 문명권들에서 리버테리어니즘은 거의 의미 있는 정치 세력을 형성한 적이 없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 지역 사람들이 아직 계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오만이다. 문명마다 자신의 역사적 경험에서 축적된 정치적 직관이 있고, 그 직관은 단순히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전제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이 글은 그 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두 문명권—슬라브 동유럽과 극동—을 다룬다. 언뜻 보면 서로 무관해 보이는 이 두 문명권이 리버테리어니즘에 대해 구조적으로 유사한 저항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공명의 깊이와 한계는 어디에 있는지를 살핀다.


리버테리어니즘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를 먼저 봐야 한다.


존 로크는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1689)에서 개인이 자연 상태에서 생명, 자유, 재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국가는 이 자연권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적 존재이며, 국가가 이 권리를 침해할 때 개인은 저항할 권리가 있다. 이것이 리버테리어니즘의 출발점이다.


이 사상이 나올 수 있었던 역사적 맥락은 매우 구체적이다. 마그나 카르타(1215)에서 시작된 영국의 코먼로 전통,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을 거치며 형성된 의회 주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섬이라는 지리적 보호막 안에서 발전시킬 수 있었던 영국의 특수한 조건. 데이비드 흄이 지적했듯이 인간의 이성은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습관과 경험에서 작동한다—리버테리어니즘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영국의 특정한 역사적 경험이 낳은 산물이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자유의 구성(The Constitution of Liberty)』(1960)에서 자유주의 전통의 두 갈래를 구분했다. 영국식 진화적 자유주의와 프랑스식 합리주의적 자유주의. 하이에크에게 건강한 자유주의는 후자가 아니라 전자였다. 추상적 이성이 사회를 설계할 수 있다는 믿음이 오히려 전체주의로 이어진다는 것. 이 구분은 중요하다. 리버테리어니즘이 앵글로색슨 세계 밖에서 뿌리내리기 어려운 이유가 단지 문화적 낯섦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전제하는 역사적 경험이 공유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리처드 파이프스(Richard Pipes)는 『러시아 혁명(The Russian Revolution)』(1990)과 『구체제 러시아(Russia Under the Old Regime)』(1974)에서 러시아 정치 문화의 구조적 특성을 분석했다. 그의 핵심 주장은 러시아에서 재산권과 법의 지배가 발전하지 못한 것이 문화적 결함이 아니라 지정학적 조건의 결과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지리는 결정적이다. 유라시아 대평원에는 자연적 방어선이 없다. 동쪽에서는 몽골과 튀르크 유목민이, 서쪽에서는 폴란드, 스웨덴, 나폴레옹, 히틀러가 반복적으로 침략했다. 영국이 해협이라는 천연 해자 덕분에 내부적으로 권력을 분산시키고 개인의 자유를 실험할 수 있었다면, 러시아는 그 사치를 누릴 수 없었다. 생존 자체가 강력한 중앙 권력을 요구했다.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 이어진 몽골의 지배—러시아인들이 타타르의 멍에(Tatarskoe Igo)라 부르는—는 이 중앙집권적 경향을 한층 강화했다. 게오르기 베르나드스키(George Vernadsky)의 『몽골과 러시아(The Mongols and Russia)』(1953)는 이 시기가 러시아 정치 구조에 남긴 흔적을 상세히 추적한다. 공국들이 몽골 칸에게 복종함으로써 생존을 보장받은 경험은 강력한 중앙 권위에 대한 복종을 생존 전략으로 내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도 같은 시기에 몽골 지배—원나라—를 경험했다는 것이다. 두 문명이 모두 몽골 제국의 일부였고, 두 나라 모두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통을 가진다. 인과관계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구조적 유사성은 무시할 수 없다.


러시아 정교회의 정치신학도 중요하다. 서유럽 가톨릭에서는 교황과 황제가 권력을 놓고 오랫동안 다투었다. 이 갈등이 역설적으로 세속 권력에 대한 제한의 씨앗이 되었다—교황이 황제를 파문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황제 권력은 절대화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는 비잔틴의 심포니아(symphonia) 원칙을 따랐다. 교회와 국가가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롭게 협력한다는 원칙. 여기서 교회는 국가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화한다. 차르의 권위는 신이 부여한 것이고 교회는 이것을 축성한다.


이 신학적 구조 안에서 국가 권력에 대한 개인의 저항은 신적 질서에 대한 저항이 된다. 리버테리어니즘의 핵심 명제—국가에 맞서는 개인의 저항권—가 신학적으로 정당화될 공간이 없는 것이다.


러시아 농촌 공동체인 미르(mir)는 19세기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미르는 토지를 공동 소유하고 주기적으로 재분배한다. 개인이 토지를 사유화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관리하고, 개인의 결정은 공동체의 합의에 종속된다.


나로드니키(Narodniks)는 바로 이 미르 전통에서 러시아 고유의 사회주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게르첸(Alexander Herzen)은 서구식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거치지 않고 미르 공동체를 기반으로 직접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이 희망은 역사적으로 실현되지 않았지만, 미르가 러시아 아비투스의 핵심—개인보다 공동체가 선행한다는 직관—을 잘 드러낸다는 점은 남는다.


이 집단주의적 아비투스는 극동의 유교적 공동체주의와 구조적으로 공명한다. 그러나 내용은 다르다.


유교의 집단주의는 위계적이다. 맹자는 인간 관계를 다섯 가지 근본 관계(五倫)—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로 설명했다. 이 관계들은 위계적이지만 쌍방향적이다. 지배자는 신하에게, 부모는 자녀에게 책임을 진다. 개인은 이 관계망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 고립된 개인은 유교적 세계관에서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러시아의 집단주의는 더 수평적이고 동시에 더 압도적이다. 미르의 집단성은 위계보다 동질성에 기반한다. 그리고 국가 권력에 대한 태도에서 러시아와 극동은 미묘하게 다른 패턴을 보인다. 러시아인들은 국가를 내면적으로 불신하면서도 표면적으로 복종하는 이중성을 가진다—부엌에서만 진실을 말하는 소위 키친 토크(kitchen talk) 문화가 이것을 보여준다. 극동아시아의 복종은 더 깊이 내면화된 경향이 있다. 유교적 위계가 도덕적 질서로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에 복종이 외부적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 덕목으로 나타난다.


슬라브 동유럽과 극동이 가장 극명하게 공명하는 지점 중 하나는 분리주의에 대한 태도다.


러시아는 체첸 전쟁을 두 차례 치렀다. 러시아는 체첸 전쟁을 두 차례 치렀다. 우크라이나의 경우는 더 복잡하고 더 노골적이다.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친러 성향의 야누코비치 정권이 무너지고 우크라이나가 EU·NATO 방향으로 방향을 틀자, 러시아는 즉각 크림반도를 합병했다. 이어 돈바스 지역의 친러 분리주의 세력을 지원하며 우크라이나 동부를 사실상의 대리전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2022년에는 전면 침공을 감행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궤도에서 벗어나려는 순간, 러시아의 중앙 권력은 그것을 전략적 위협으로 규정하고 군사력으로 응답했다. 벨라루스의 루카셴코 정권을 지속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같은 논리다. 이 모든 것이 같은 전제 위에 있다—국가의 통합성과 세력권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중국은 티베트, 신장, 홍콩, 대만에 대해 동일한 태도를 취한다. 시진핑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국가 주권과 영토 통합"은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라 중국 정치 문화의 가장 깊은 층에 닿아 있다.


왜 이렇게 민감한가. 역사적 트라우마 때문이다.


러시아의 집단 기억에 깊이 새겨진 것은 스무타(Smuta)—17세기 초 국가가 붕괴하고 외세가 침입한 혼란의 시대다. 이 시기 러시아는 폴란드에 모스크바를 점령당했고 내전이 이어졌다. 국가가 없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러시아는 뼈저리게 경험했다.


중국의 경우 1840년 아편전쟁부터 1949년까지의 이른바 '백년 굴욕'이 같은 역할을 한다. 서구 열강과 일본에 의해 분할되고 약탈된 경험은 강한 중앙 국가에 대한 열망을 만들어냈다. 毛澤東이 1949년 "중국 인민은 이제 일어섰다"고 선언했을 때 그 배경에는 이 트라우마가 있었다.


이 역사적 경험 위에서 리버테리어니즘의 자결권 원칙—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공동체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은 설득력 있는 원칙이 아니라 국가 해체의 위험한 논리로 읽힌다. 자유의 언어가 분열의 언어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슬라브 동유럽과 극동이 가장 깊이 공명하는 지점은 서구 근대화에 대한 반응의 구조다.


19세기, 두 문명권 모두 서구의 압도적인 군사적·기술적 힘 앞에서 같은 질문에 직면했다. 서구를 모방해야 하는가, 아니면 고유한 문명의 가치를 지켜야 하는가.


러시아의 서구파(Westernizers) 대 슬라보필(Slavophiles) 논쟁은 이것을 가장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벨린스키와 헤르첸이 서구의 이성주의와 개인주의를 러시아가 배워야 할 모델로 봤다면, 호먀코프와 키레예프스키는 러시아 정교회의 소보르노스트(sobornost', 공동체적 통일성)에서 서구 개인주의보다 우월한 문명적 가치를 발견했다.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논쟁—중국의 본질에 서양의 기술을 사용한다—과 이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동형이다. 장지동(張之洞)이 주창한 이 원칙은 기술은 배우되 가치는 지킨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도 마찬가지다.


모든 경우에 답은 단순한 서구화도 단순한 전통 고수도 아닌 독자적 근대화 경로의 모색으로 나왔다. 메이지 유신,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 푸틴의 주권 민주주의, 시진핑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모두 이 구조의 변형이다. 서구의 기술과 경제적 방법론을 받아들이되 자유주의적 정치 원리는 거부하는 것.


이 선택적 수용이 리버테리어니즘에게는 특히 치명적이다. 리버테리어니즘은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를 불가분의 것으로 본다—시장 경제가 작동하려면 재산권과 계약 자유, 나아가 정치적 자유가 함께 와야 한다는 것.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는 경제적 기능주의와 정치적 권위주의를 조합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며 이 전제를 반박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지는 다른 문제다.


그러나 공명에 집중하다 보면 중요한 차이들을 놓치게 된다.


러시아와 중국·한국·일본의 집단주의는 기반이 다르다. 러시아의 집단주의는 정교회적 기반—소보르노스티(собо́рность), 공동 구원, 메시아적 민족 사명—위에 세워져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러시아 민족론, 솔로비요프의 신정 국가론, 그리고 현재 러시아 공식 이데올로기의 깊은 층에는 러시아가 세계사적 사명을 가진 특별한 민족이라는 믿음이 있다.


극동의 집단주의는 이 메시아적 성격이 덜하다. 중화사상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은 있지만, 그것은 역사적 사명을 강조하는 것이라기보다 문명적 우월성을 전제하는 것에 가깝다. 한국과 일본의 집단주의는 중화 문명의 영향 아래 유교적 위계를 내면화한 것으로, 메시아적 색채가 더욱 옅다.


동유럽 내부에서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폴란드, 체코, 헝가리는 러시아나 벨라루스와 질적으로 다르다. 폴란드의 귀족 민주주의(szlachta democracy), 체코의 후스파 전통, 헝가리의 귀족 헌정주의는 나름의 자유주의적 요소를 품고 있었다. 이 나라들이 소련 붕괴 이후 비교적 성공적으로 자유민주주의로 전환한 것은 이 역사적 유산의 덕이다. 물론 오르반의 헝가리나 PiS 이후의 폴란드에서 보듯 권위주의적 모습도 없지 않지만, 러시아나 벨라루스와는 다른 층위에 있다.


이쯤에서 솔직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리버테리어니즘이 이 문명권들에서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이 그 문명권들의 실패인가, 아니면 리버테리어니즘 자체의 한계인가.


로버트 노직은 『아나키, 국가, 유토피아(Anarchy, State, and Utopia)』(1974)에서 리버테리어니즘의 정교한 철학적 버전을 제시했다. 그의 논증은 치밀하지만 전제는 여전히 로크적이다—개인은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것. 이 전제 자체를 의심하는 시각에서 보면 노직의 논증 전체가 공중에 뜬다.


공동체주의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덕의 상실(After Virtue)』(1981)에서 현대 자유주의가 전제하는 '무연고적 자아(unencumbered self)'—어떤 공동체나 전통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순수한 개인—가 추상적 허구라고 비판했다. 인간은 항상 어떤 공동체, 전통, 서사 안에 던져져 있는 존재이며, 그 맥락 없이 의미 있는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없다는 것.


이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슬라브 동유럽과 극동의 집단주의적 아비투스는 단순히 극복해야 할 후진성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대한 다른—어쩌면 더 현실적인—통찰로 읽힐 수 있다.


물론 그 반대편의 비판도 유효하다. 집단주의적 아비투스는 실제로 개인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어왔다. 러시아의 집단 기억과 국가 신성화가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가능하게 한 정치 문화적 토양 중 하나였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중국의 유교적 위계가 공산당 권위주의의 문화적 외피로 기능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공동체주의와 실제로 작동하는 권위주의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깝다.


리버테리어니즘이 슬라브 동유럽과 극동에서 불모지인 이유는 단순히 사람들이 자유를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더 깊은 곳에 있다. 그것은 인간이 무엇인가, 사회가 왜 존재하는가,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전제의 차이다.


리버테리어니즘은 개인이 관계와 공동체보다 존재론적으로 선행한다고 전제한다. 슬라브 동유럽과 극동의 아비투스는 이와 반대다. 개인은 관계 안에서 태어나고 공동체 안에서 의미를 갖는 존재다. 이 두 전제는 양립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 두 문명권이 묘하게 공명하는 것은 바로 이 관계적 존재론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 내용과 신학적 기반은 다르지만—러시아는 정교회적이고 중국·한국·일본은 유교적이다—개인주의적 자유주의를 거부하는 구조는 동형이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두 문명이, 전혀 다른 경로를 통해, 비슷한 정치적 직관에 도달했다는 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인간 사회 조직의 어떤 근본적 패턴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리버테리어니즘의 지지자라면 이것을 보편적 자유 원칙이 아직 계몽되지 않은 지역에서 실현되지 않은 것으로 읽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서 보면, 리버테리어니즘이야말로 매우 특수한 역사적 조건이 낳은 특수한 이념이고, 그것이 보편적 진리인 척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의 지방주의(Regionalism)일 수 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쉽게 답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리버테리어니즘의 지정학적 분포가 그것의 보편성 주장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는 사실이다. 자유의 언어가 세계의 특정 구석에서만 자연스럽게 들린다면, 그 이유를 나머지 세계의 후진성에서 찾기 전에 그 언어 자체를 먼저 살펴보는 것이 정직한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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