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슈펭글러, 유불도의 시간관·역사관
시간에 대한 물음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토로했던 그 유명한 난감함으로부터 출발한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묻지 않으면 나는 안다. 그러나 누군가 물어오면 나는 모른다." 이 역설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다. 시간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직접 바라볼 수 없는 것, 물고기가 물을 인식하지 못하듯 우리가 늘 그 속에 잠겨 있기 때문에 대상화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문명마다, 사상가마다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사실이야말로 철학적으로 의미심장하다. 서양 근대의 주류 시간관(균질하고 측정 가능하며 진보를 향해 일방적으로 흐르는 선형적 시간)은 결코 유일한 답이 아니었다. 20세기에 들어와 하이데거와 슈펭글러는 각자의 방식으로 이 주류적 시간관을 해체하고자 했다. 그 해체의 방향이 우연찮게도 동양의 시간관·역사관과 맞닿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비교해보면, 근접성은 표면에 그치고 심층에서는 다시 갈라진다. 이 글은 그 근접과 단절의 지형도를 그리는 작업이다. 단, 이 작업은 어느 전통이 더 우월한가를 가리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 전통이 시간과 역사에 대해 어떻게 바라봤는지 그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냄으로써 시간이라는 문제 자체의 깊이를 더하려는 것이다.
유교의 시간관을 이해하는 열쇠는 『논어』의 한 구절에 있다. 공자는 냇가에 서서 말했다. "흘러가는 것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쉬지 않는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서자여사부, 불사주야))." 이 짧은 탄식 안에 유교적 시간관의 핵심이 압축되어 있다.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공자가 이 탄식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결론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부단한 자기 수양과 전승의 의무다.
유교의 시간은 기본적으로 세대적(generational)이다. 시간의 기본 단위는 시계의 초침이 아니라 아버지에서 아들로,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인간적 연쇄다. 『중용』이 강조하는 것은 이 연쇄의 지속성이다. "어짊이란 사람다움을 말하는데, 친족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가장 크다(仁者人也, 親親爲大(인자인야, 친친위대))" 여기서 인간다움은 고립된 개인의 속성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실현되는 것이다. 그 관계는 공간적일 뿐 아니라 시간적이다.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 현재와 과거, 나와 조상이 하나의 연속된 시간 안에 함께 있다.
이 때문에 유교의 역사관은 순환론처럼 보이지만 단순한 순환이 아니다. 맹자가 정식화한 왕도론(王道論)에서 역사는 도덕적 긴장의 리듬을 따른다. 덕(德)이 있는 자가 천명(天命)을 받아 왕이 되고, 덕을 잃으면 천명이 옮겨간다. 탕왕이 걸왕을 정벌하고 무왕이 주왕을 정벌한 것은 역사의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하늘의 도덕적 원리가 작동한 결과다. 그러므로 유교의 역사 시간은 도덕적 방향성을 가진다. 그것은 맹목적 순환이 아니라 도덕적 원리가 실현되는 장으로서의 시간이다.
중요한 것은 이 역사적 시간 안에서 과거가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요순(堯舜)의 시대는 수천 년 전의 일이지만 유교적 시간관에서 그것은 현재적으로 살아있다. 맹자가 "나 역시 성인들을 사사하고 싶다"고 말할 때, 수천 년의 시간적 거리는 정신적 의미에서 사라진다. 과거의 성왕들은 단순히 기억 속의 인물이 아니라 현재의 도덕적 모범으로서 시간을 초월해 존재한다. 이것이 유교적 시간의 독특함이다. 과거는 완료된 것이 아니라 현재 안에서 살아 활동하는 것이다.
불교의 시간관은 유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점을 가진다. 불교는 자아의 고정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구사론(俱舍論, Abhidharmakośa)』이 정식화한 찰나멸(刹那滅) 이론은 존재가 매 순간 생멸한다고 본다. 존재는 실체가 아니라 과정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연속성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찰나들의 연속을 통해 구성되는 인식론적 착각에 가깝다.
이 찰나의 시간과 함께 불교는 인간적 역사를 압도하는 광대한 시간 스케일을 제시한다. 겁(劫, kalpa)의 개념이 그것이다. 불교 우주론에서 하나의 겁은 수십억 년에 해당한다. 이 우주적 시간의 스케일 앞에서 인간의 역사(왕조의 흥망, 민족의 성쇠)는 무한히 작은 것이 된다. 『법화경(法華經)』에서 영원한 시간을 묘사하는 방식(먼 과거의 무수한 겁, 먼 미래의 무수한 겁)은 선형적이고 측정 가능한 인간적 시간 경험을 근본적으로 해체한다.
그러나 불교의 시간론에서 가장 독특한 것은 이 두 극단(찰나와 겁)사이의 긴장이 아니라, 그 긴장이 해소되는 방식이다. 선불교(禪佛敎)의 돈오(頓悟)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이루어지는 점진적 깨달음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적 연속성을 벗어나는 순간적 사건이다. 혜능(慧能)이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깨달음은 과거의 수행이 축적되어 미래의 어느 시점에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시간의 흐름을 꿰뚫고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불교의 시간관은 단일하지 않다. 그것은 다층적이다. 찰나의 시간, 인간적 역사의 시간, 겁의 우주적 시간, 그리고 깨달음의 무시간적 순간이 동시에 작동한다. 이 다층성은 서양적 시간관의 단일한 선형적 흐름과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를 이룬다.
도가의 시간관은 자연에 대한 관찰로부터 시작한다. 『도덕경』 제16장에서 노자는 말한다. "만물이 함께 일어나지만, 나는 그것들이 돌아옴을 본다(萬物並作, 吾以觀復(만물병작, 오이관복))." 돌아온다는 것, 복(復)의 개념이 핵심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순환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가의 순환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다. 계절은 순환하지만 올해의 봄은 작년의 봄과 동일하지 않다. 장자(莊子)는 이것을 나비 꿈의 이야기로 포착한다. "내가 나비를 꿈꾸는 인간인가, 인간을 꿈꾸는 나비인가?" 이 물음은 자아와 비자아의 경계, 주체와 객체의 구분, 인간의 시간과 자연의 시간 사이의 경계를 모두 문제시한다.
도가의 시간관에서 인간은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변화의 일부다. 그것은 참여자의 시간이지 관찰자의 시간이 아니다. 『장자』 「제물론(齊物論)」에서 묘사되는 이상적 경지—만물과 하나가 되는 것(天地與我並生, 萬物與我爲一(천지여아병생, 만물여아위일))—는 역사적 시간의 외부에 서서 그것을 조망하려는 태도와 정반대다. 도가의 시간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몸으로 함께 흐르는 것이다.
이 세 전통(유교, 불교, 도가)은 물론 단일하지 않으며 서로 긴장을 이루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공유하는 것이 하나 있다. 시간이란 외부에서 조망하고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지는 것이라는 감각이다. 주체와 시간의 관계가 분리가 아니라 내속(內屬)의 관계를 이룬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시간관·역사관은 선형적 시간관에 대한 반란이라고 볼 수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1927년 출간한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은 20세기 철학에서 가장 급진적인 시간론 중 하나다. 하이데거가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론(시간을 운동의 수(數)로 보는 관점)을 거쳐 뉴턴 물리학에서 완성된 객관적 시간관이다. 이 전통 안에서 시간은 외부에 독립적으로 흐르며, 균질한 순간들의 연속이고, 수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크기다.
하이데거는 이것이 시간의 비본래적 이해라고 주장한다. 시간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본래적 시간성으로부터 도피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본래적 시간성은 객관적으로 흐르는 외부적 시간이 아니라 현존재(Dasein)가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다.
하이데거의 시간 구조는 세 계기로 이루어진다. 기재성(Gewesenheit)—내가 선택하지 않은 채 이미 특정 역사, 언어, 문화 안에 던져져 있다는 사실성. 현재—지금 세계 안에서 관심을 가지고 행위하는 것. 기투(Entwurf)—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던지는 것. 그러나 이 세 계기 가운데 하이데거에게 가장 근본적인 것은 미래다. 정확히는 죽음을 향한 존재(SeinzumTode)로서의 미래.
하이데거의 죽음론은 에피쿠로스의 죽음론(죽음은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 우리가 있을 때 죽음은 없고, 죽음이 올 때 우리는 없기 때문이다.)과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킨다. 에피쿠로스에게 죽음은 경험 불가능한 것이므로 삶의 기획과 무관하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삶의 핵심 문제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강조하는 것은 죽음의 고유성이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먹어줄 수 있고, 대신 걸어줄 수 있고,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대신 고통받아줄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은 대신할 수 없다. 이 고유성이야말로 현존재를 비로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계기다.
죽음을 직면하는 것(하이데거가 선구적 결단(vorlaufende Entschlossenheit)이라 부르는 것)은 현존재로 하여금 세인(das Man)의 익명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붙잡게 한다. 평소 우리는 죽음에서 도피한다. 일상적 잡담 속에서, 소비와 오락 속에서, "언젠가는 죽겠지만 지금은 아니다"라는 막연한 확신 속에서. 그러나 죽음을 직면한 현존재는 이 도피로부터 깨어난다.
하이데거의 시간관이 단순한 개인적 실존론에 그치지 않는 것은 역사성(Geschichtlichkeit) 개념 때문이다.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특정 민족적·역사적 전통 안에 던져져 있다. 이 기재성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떠맡는 것이 본래적 역사성이다.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개념은 반복(Wiederholung)이다. 이것은 과거를 동일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열려 있었던 가능성을 현재 속에서 되살리는 것이다. 과거의 영웅적 현존재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붙잡았던 방식이 현재의 결단에 영감을 준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적 반복은 복고주의가 아니라 창조적 전승이다.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와 유교의 복고론(復古論)이 표면적으로 가장 가깝게 보인다. 둘 다 과거를 단순히 극복해야 할 것으로 보지 않고, 현재에 되살려야 할 가능성의 원천으로 본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가 있다. 하이데거의 반복에서 주체는 개인적 현존재다. 유교의 복고에서 주체는 처음부터 공동체, 왕조, 민족이다. 하이데거의 역사성은 개인적 실존에서 출발해 공동체로 확장되지만, 유교의 역사관은 공동체에서 출발해 개인이 그 안에 위치를 차지한다.
하이데거가 동양 사상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도가 사상에 깊은 친화성을 느꼈고,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와의 교류를 통해 선불교와 대화했다. 하이데거의 존재(Sein)와 노자의 도(道)는 자주 비교된다. 둘 다 개념적으로 포착되지 않는 근원적인 것이며,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고, 언어로 완전히 표현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친화성은 표면적이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자아의 위상에 있다. 하이데거는 서양 형이상학을 해체했지만 개인적 현존재라는 틀은 유지했다. 죽음을 직면하는 것도, 결단을 내리는 것도, 반복을 수행하는 것도 모두 개별적 현존재다. 이 개인성은 기독교적 실존주의의 세속화된 버전(키르케고르에서 신을 제거하고 남은 구조)으로 볼 수 있다.
불교는 이 자아 자체를 해체한다. 선불교의 돈오(頓悟)는 불안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생성하는 자아 구조 자체를 해체한다. 하이데거는 자아를 유지하면서 자아의 유한성을 직면하지만, 선불교는 직면의 주체인 자아 자체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유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유교에서 개인의 죽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가계와 관계의 연속성을 끊는 사건이기 때문이지, 그 자체로 실존론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불안(Angst)도 동양에는 낯선 개념이다. 도가의 이상적 인간(진인(眞人))은 삶과 죽음을 초연하게 바라본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노래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냉담함이 아니라 죽음을 변화의 한 계기로 받아들이는 도가적 태도의 표현이다. 도가에서 이상적 시간관의 핵심은 불안이 아니라 유(遊), 즉 자유로운 노닐음이다. 도가의 성인은 죽음을 직면함으로써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구분 자체가 가라앉는 경지에서 노닌다.
그리고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시간관·역사관은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반격이라고 볼 수 있다.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landes)』(1918~1922)은 20세기 역사철학에서 가장 도발적인 저작 중 하나다. 슈펭글러가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헤겔의 역사철학,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 계몽주의적 진보론이 공유하는 하나의 전제(인류 역사는 단일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며 그 방향의 정점에 서구 문명이 있다는 것)다.
슈펭글러는 이것을 프로빈치알리스무스(Provinzialismus), 즉 지방주의적 편협함이라고 공격한다. 서구인이 자신의 역사적 경험을 인류 보편의 역사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그의 대안은 형태학적 역사관(morphologische Geschichtsbetrachtung)이다. 역사에는 하나의 보편적 흐름이 없다. 대신 여러 문화들이 각자 독립적으로 탄생하고, 성장하고, 완숙하고, 쇠퇴한다. 마치 식물처럼.
슈펭글러는 여덟 개의 고등문화를 식별한다. 이집트, 바빌론, 인도, 중국, 그리스로마(아폴론적), 아랍(마기적), 멕시코, 그리고 서구(파우스트적) 문화. 각 문화는 약 1000년의 생애를 가지며 봄여름가을겨울의 리듬을 따라 전개된다. 문화가 청년기의 생명력을 잃고 경직될 때 문명(Zivilisation)으로 전락한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 문화의 문명화된 죽음의 단계였으며, 슈펭글러 당대의 서구는 파우스트적 문화의 같은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슈펭글러의 역사관이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폭발적으로 수용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반서구 중심주의적 복수 문화론은 서구의 보편주의에 저항해온 아시아적 자기이해와 공명했다. 실제로 1920~30년대 일본, 중국, 인도의 지식인들은 슈펭글러를 열렬히 읽었다. 일본의 경우, 슈펭글러의 서구 몰락론을 아시아 부흥론으로 번역했다. 서구가 겨울에 접어들었다면 일본은 새로운 봄을 맞이하는 문화라는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의 이데올로기적 기반 중 하나가 이 문명 교체론이었다.
슈펭글러의 역사관에는 동양적 시간관과 공명하는 요소가 여럿 있다. 문화의 생애 주기를 계절로 묘사하는 방식은 자연의 리듬과 인간 역사를 연결하는 도가적 감각과 통한다. 역사를 기계적 법칙이 아닌 유기체적 생명의 논리로 보는 관점은 유교의 유기체적 세계관과 친화적이다. 역사 이해의 방법으로 생리적 감각(physiognomisches Gefühl)—직관적 형태 인식—을 강조하는 것은 선불교의 직관주의와 공명한다.
특히 슈펭글러의 공시성(Gleichzeitigkeit) 개념은 동양적 시간관과 가장 깊이 맞닿는 지점이다. 서로 다른 문화의 동일한 발전 단계에 있는 현상들은 구조적으로 동형이라는 주장. 알렉산더 대왕과 나폴레옹, 플라톤과 괴테는 연대기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각자 문화의 동일한 형태론적 위치에 있다. 이것은 물리적 시간과 형태론적 시간을 구분한다.
이 발상은 유교의 역사 경험과 근본적으로 통한다. 요순의 시대와 공자의 시대, 공자의 시대와 현재는 연대기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도덕적 원리의 차원에서는 동형적이다. 성왕의 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형태론적으로 동일한 원리를 현재에 실현하는 것이다. 슈펭글러적 공시성과 유교적 전승의 논리 사이에는 놀라운 구조적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슈펭글러는 동양적 시간관에 근접하는 만큼 또 다른 방식으로 어긋난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문화의 모나드(Monad)적 폐쇄성이다. 슈펭글러의 각 문화는 창문 없는 모나드다. 서구 문화는 인도 문화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고, 중국 문화는 그리스 문화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문화간의 진정한 이해와 교류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동양의 역사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선불교)로 창조적으로 변형된 것, 중화 문명이 수천 년에 걸쳐 주변 문명을 흡수하고 변형시키면서 성장해온 것, 한반도와 일본이 유교와 불교를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해온 것 기타 등등. 이 모든 것은 문화간의 삼투와 혼합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생산적임을 보여준다. 동양의 역사관 안에서 문명은 닫힌 모나드가 아니라 열린 과정이다.
슈펭글러의 운명(Schicksal) 개념도 유교의 천명론과 표면적으로 닮았지만 구조가 다르다. 유교의 천명은 도덕적이다. 덕이 있는 자가 천명을 받고 덕을 잃으면 천명이 옮겨간다. 천명은 고정된 운명이 아니라 도덕적 행위에 반응하는 역동적 원리다. 이것이 유교 역사관에 도덕적 방향성을 부여한다. 반면 슈펭글러의 운명은 비도덕적이다. 문화의 쇠퇴는 그 문화의 도덕적 실패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노화처럼 불가피한 것이다. 여기서 역사는 도덕적 의미를 잃는다.
불교의 시간관과도 비교해보면 다시 어긋난다. 불교에서 윤회의 순환은 업(業, karma)에 의해 작동한다. 업은 도덕적 행위의 축적이다. 더 중요한 것은 순환에서 벗어나는 것(해탈(解脫))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슈펭글러의 문화 생애 주기에는 해탈이 없다. 문화는 필연적으로 겨울을 맞이하고 죽는다. 이 필연성은 불교적 업의 논리도, 유교적 천명의 논리도 아닌 생물학적 결정론에 가깝다.
슈펭글러의 가장 근본적인 한계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야망 자체에 있다. 전체 역사를 조망하고 분류하고 법칙을 추출하려는 거대한 지적 의지. 그것은 정확히 그가 비판한 파우스트적 의지의 표현이다. 슈펭글러는 서구 중심주의를 해체하려 했지만, 그 해체 작업 자체가 총체적 조망이라는 서양 형이상학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동양의 역사관은 이런 종류의 총체적 조망에 대한 욕망 자체가 다르다. 유교의 역사 서술(정사(正史) 전통)은 도덕적 교훈을 위한 것이지 역사 전체를 과학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도가는 역사 자체를 인위(人爲)의 산물로 보며 회의적 거리를 둔다. 어느 쪽도 슈펭글러처럼 역사를 하나의 통일된 법칙 아래 포섭하려 하지 않는다.
앞서 살펴봤듯이 하이데거, 슈펭글러, 동양의 시간관은 모두 단순한 선형적 진보론을 거부한다. 그러나 거부의 방식과 깊이가 다르다.
하이데거는 선형적 시간을 비본래적 시간으로 규정한다. 일상적 현존재가 자신의 유한성을 회피하면서 시간을 균질한 지금들의 연속으로 경험하는 것. 본래적 시간성은 이 비본래적 시간을 극복함으로써 나타난다. 이것은 여전히 서양 형이상학의 구조(더 낮은 것에서 더 높은 것으로의 운동,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으로의 상승)를 유지한다.
슈펭글러는 선형적 진보론을 서구 지방주의의 착각으로 해체한다. 역사는 진보가 아니라 복수의 문화들이 각자의 생애 주기를 따라 전개되는 것이다. 이것은 보다 근본적인 해체처럼 보이지만, 문화의 생물학적 결정론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필연성 안에 갇힌다.
동양의 시간관은 이 두 방식과 다르다. 선형적 진보론을 극복해야 할 것 혹은 해체되어야 할 착각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동양의 시간관은 처음부터 다른 지점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선형적 진보론 자체가 극복 혹은 해체의 주요 문제로 설정될 필요가 없었다. 유교의 시간은 세대적이고 도덕적이었으며, 불교의 시간은 다층적이었고, 도가의 시간은 자연적이었다.
결국 하이데거, 슈펭글러, 동양철학 전반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결국 자아의 위상으로 귀결된다.
하이데거는 서양 형이상학의 여러 층위를 해체했지만 개인적 현존재라는 틀은 유지했다. 죽음, 불안, 결단. 이 모든 것은 개별적 현존재의 실존론적 사건이다. 슈펭글러는 개인보다 큰 단위(문화)를 역사의 주체로 설정했지만, 그 문화를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법칙화하려는 개인적 지적 주체의 욕망은 유지했다.
동양의 시간관은 처음부터 이 두 가지 모두에 다른 입장을 취했다. 유교의 시간 안에서 개인은 가계와 관계의 연결점이지 자립적 주체가 아니다. 불교의 시간 안에서 자아는 해체의 대상이다. 도가의 시간 안에서 인간은 변화의 관찰자가 아니라 변화의 일부다.
탁월한 비교철학자 프란수아 줄리앙(François Jullien)이 『시간론(Du temps)』에서 지적한 것처럼, 동양의 시간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성숙하는 것이라는 감각이다. 프랑스어의 표현을 빌리면, 서양의 시간이 "passer(지나가다)"의 시간이라면 중국의 시간은 "mûrir(익다)"의 시간이다. 시간 안에서 무언가가 무르익는다. 이 성숙의 감각이 동양적 시간 경험의 핵심이며, 그것은 하이데거의 결단도 슈펭글러의 운명도 아닌 제3의 시간성이다.
이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의 만남을 가장 진지하게 시도한 것이 20세기 초 일본의 교토학파다.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는 『순수경험의 철학(善の研究)』에서 선불교의 직접 경험과 서양 철학의 개념적 틀을 종합하려 했다. 그의 제자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는 하이데거와 선불교를 정면으로 비교하면서 공(空, śūnyatā)의 철학을 서양 허무주의의 극복으로 제시했다.
이 시도는 20세기 철학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상적 실험 중 하나다. 그러나 그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보아야 한다. 하이데거를 완전히 받아들이면 선불교가 왜곡된다. 선불교를 완전히 받아들이면 하이데거가 해소된다. 이 긴장은 해소되지 않은 채 교토학파의 철학 안에 남아 있다. 어쩌면 이 해소되지 않는 긴장이야말로 교토학파의 가장 정직한 철학적 성과일지도 모른다. 두 전통의 차이가 그만큼 근본적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시간은 죽음을 직면한 개인적 현존재의 유한한 시간이다. 슈펭글러의 시간은 운명적으로 쇠퇴하는 문화 유기체의 생물학적 시간이다. 동양의 시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지고, 세대를 넘어 전해지며, 자연과 함께 무르익는 시간이다.
이러한 세 시간관·역사관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에게 도전한다. 하이데거는 동양에게 묻는다. 죽음의 고유성을 외면하면 삶의 진지함이 어디서 오는가? 슈펭글러는 동양에게 묻는다. 자신의 문명적 특수성을 인식하지 않으면 어떻게 진정한 자기이해가 가능한가? 동양은 하이데거와 슈펭글러에게 묻는다. 조망하는 주체를 전제하는 한, 그 조망이 아무리 비판적이더라도 어떻게 시간 안으로 진정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이 물음들 사이의 번역이 완전히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이다. 번역 행위 자체가 이미 조망하는 주체와 파악되는 객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완전한 번역의 시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간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그것만으로도 이 비교의 여정은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시간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볼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살아온 전통들과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간의 윤곽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그 어렴풋한 느낌이 철학의 출발점이다.
- 참고 문헌 -
공자, 『논어(論語)』
맹자, 『맹자(孟子)』
『중용(中庸)』
노자, 『도덕경(道德經)』
장자, 『장자(莊子)』
혜능(慧能), 『육조단경(六祖壇經)』
세친(世親), 『구사론(俱舍論, Abhidharmakośa)』
『법화경(法華經, Saddharmapuṇḍarīkasūtra)』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Confessiones)』, 11권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
오스발트 슈펭글러, 『서구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landes)』 (1918~1922)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 『선의 연구(善の研究)』 (1911)
니시타니 케이지(西谷啓治), 『종교와 무(宗教と無)』 (1961)
프란수아 줄리앙(François Jullien), 『시간론(Du temps)』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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