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익 종교인을 향한 불친절한 공개서한 3편
좌우익 종교인을 향한 불친절한 공개서한 3편
이슬람: 황금기의 기억과 극단화의 구조
1. 시작하며: 가장 오해받는 종교
이슬람만큼 서구 담론에서 극단적으로 재단되는 종교도 드물다. 한쪽에서는 테러리즘과 동의어처럼 취급하고, 다른 쪽에서는 비판 자체를 이슬람 혐오로 몰아붙인다. 양쪽 모두 이슬람이라는 현상의 복잡성을 놓치고 있다.
이슬람은 7세기 아라비아반도에서 탄생했다. 무함마드가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고 선언한 이후, 이 종교는 놀라운 속도로 확산되었다. 100년도 안 되어 이베리아반도에서 중앙아시아까지 펼쳐졌다. 역사상 이렇게 빠르게 확산된 종교 운동은 거의 없다. 그 확산의 원동력이 순수한 신앙의 힘이었는지, 군사적 정복의 힘이었는지 — 아마도 둘 다였을 것이다.
그리고 초기 이슬람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 이미지와 많이 달랐다.
2. 황금기: 세계의 지식 중심이었던 이슬람
9세기에서 13세기, 아바스 왕조 치하의 바그다드는 당시 세계 최고의 지식 중심지였다. 유럽이 암흑시대라 불리는 시기에 이슬람 문명권은 눈부신 지적 황금기를 누렸다.
번역 운동(Translation Movement)이 그 시작이었다. 아랍 학자들이 그리스어, 시리아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고대 문헌들을 아랍어로 번역했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유클리드, 히포크라테스 등의 유럽이 잊어버린 고대 지식이 이슬람 문명권에서 보존되고 발전했다. 훗날 르네상스 시기 유럽이 이 지식들을 다시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 상당 부분이 아랍어 번역본을 통해서였다.
수학에서는 대수학(Algebra)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랍어 알자브르(aljabr)에서 왔다. 알콰리즈미가 체계화한 대수학은 이후 수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천문학에서는 오늘날 별 이름의 상당수가 아랍어 기원이다. 알데바란, 알타이르, 베텔게우스 — 이 단어들이 아랍 천문학자들의 유산이다. 의학에서는 이븐 시나(아비센나)의 의학정전이 유럽 의과대학에서 17세기까지 교재로 사용되었다.
더 놀라운 것은 지적 개방성이다. 당시 이슬람 문명권에서는 무신론에 가까운 주장도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이슬람 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이성으로 증명하려는 시도와 함께, 이성이 계시보다 우선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토론했다. 물론 한계는 있었지만,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는 중세 유럽과는 결이 달랐다.
이러한 개방성은 무타질라(Mu'tazila) 학파에서 두드러졌다. 이들은 8~10세기 바그다드에서 활동하며, 인간의 이성('aql)을 강조해 도덕적 선악을 이성으로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의 정의(正義)는 계시 이전에 이성으로 파악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계시의 역할을 보완하거나 때로는 재해석하게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
신의 존재를 이성으로 증명하려는 대표적 시도는 이븐 시나(Avicenna, 980–1037)의 '진실한 자들의 증명(Proof of the Truthful, burhān al-ṣiddīqīn)'이다. 그는 '필연적 존재(wājib al-wujūd)' 개념을 통해, 우연적 존재들( contingent beings)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원인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신이라고 논증했다. 이는 순수 이성적·형이상학적 증명으로, 그리스 철학과 이슬람 신학을 결합한 전형적 사례였다.
이성과 계시의 관계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토론은 알 가잘리(Al-Ghazali, 1058–1111)와 이븐 루슈드(Ibn Rushd, Averroes, 1126–1198) 사이에서 벌어졌다. 알 가잘리는 《철학자들의 모순(The Incoherence of the Philosophers)》에서 이븐 시나 등의 철학자들이 인과율과 세계의 영원성을 주장하며 계시를 위협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성이 한계가 있으며, 궁극적으로 신의 전능성과 계시가 우선한다고 보았다.
반면 이븐 루슈드는 《모순의 모순(The Incoherence of the Incoherence)》과 《결정적 논고(The Decisive Treatise)》에서 강력히 반박하며 “진리는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다(truth does not contradict truth)”고 선언했다. 그는 코란 자체가 철학적 성찰을 권유한다고 해석하며, 철학적 증명(demonstrative reasoning)을 할 수 있는 자들은 모호한 계시 구절을 이성에 맞게 해석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성은 계시와 조화될 뿐 아니라, 계시의 참된 의미를 밝히는 최고의 도구라는 입장이었다.
무신론에 가까운 극단적 자유사상도 논의되었다. 시리아의 시인 알 마아리(Al-Ma'arri, 973–1057)는 종교를 비판하며 예언과 계시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시를 썼다. 그는 “종교는 사람들을 속이는 수많은 옛 이야기들”이라고 비아냥거리며, 채식주의와 반출생주의(antinatalism)까지 결합한 비관적 합리주의를 펼쳤다. 그의 작품 《필요한 불필요(Luzūmiyyāt)》는 당시에도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나, 공개적으로 유포되고 토론될 수 있었다.
또 다른 자유사상가로는 이븐 알 라완디(Ibn al-Rawandi)와 아부 바크르 알 라지(Abū Bakr al-Razi, 865–925)가 있다. 알 라지는 예언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인간 이성이 선악과 진리를 판단하는 데 충분하다고 보았으며, 모든 종교를 비판했다. 이들은 “철학자들의 자유사상(freethinkers)”으로 불리며, 이슬람 세계 내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았지만, 철학적 논쟁의 일부로 남아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토론들은 종종 정치적·신학적 긴장으로 이어졌고, 알 가잘리 이후 아슈아리파(Ash'arism)가 주류가 되면서 이성의 역할이 축소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중세 유럽처럼 체계적 종교재판이나 대규모 화형이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철학자들이 궁정이나 학술 모임에서 공개적으로 논쟁할 수 있었던 점은 이슬람 황금기의 지적 활력을 보여준다. 이 개방성은 그리스 철학 번역 운동과 더불어 과학·의학 발전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3. 황금기의 종말: 몽골과 그 이후
1258년 2월, 훌라구 칸(Hulagu Khan)이 이끄는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함락했다. 아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의 마지막 칼리프 알무스타심(al-Musta'sim)은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고, 도시 전체가 약탈과 파괴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당시 세계 최대의 지식 중심지였던 지혜의 집(Bayt al-Hikmah)을 포함한 수많은 도서관과 학술 기관이 불타거나 약탈당했다. 생존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티그리스강(Tigris River)이 버려진 책들의 잉크로 검게 물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다소 문학적 과장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만큼 막대한 문명적 손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수십만 권에 달하는 철학서, 과학서, 의학서, 고대 그리스-페르시아 번역본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면서, 아바스 왕조 500년의 지적 유산이 크게 훼손되었다.
이 사건은 전통적으로 이슬람 황금기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바그다드가 더 이상 지식과 권력의 중심이 될 수 없게 되면서, 이슬람 세계의 지적·정치적 네트워크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이 드러난다. 몽골은 이슬람 세계를 정복했지만, 결국 이슬람 문화에 ‘정복당했다’는 점이다.
훌라구가 세운 일 칸국(Ilkhanate)은 페르시아 지역을 지배했는데, 초기에는 불교와 기독교, 샤머니즘을 포용하는 다종교 정책을 폈다. 그러나 1295년 가잔 칸(Ghazan Khan)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는 이슬람을 국교로 선포하고, 많은 몽골 엘리트와 군인들이 뒤따랐다. 금의 칸국(Golden Horde)의 베르케 칸(Berke Khan)처럼 이미 일찍 이슬람으로 개종한 몽골 지도자들도 있었다. 몽골 지배자들은 점차 페르시아-이슬람 행정 체계와 문화를 받아들이며, 모스크와 마드라사 건설을 후원하기도 했다. 정복자가 피정복자의 종교와 문화를 수용한 전형적인 사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금기의 찬란했던 지적 활력은 돌아오지 않았다. 몽골 침입 이후 이슬람 세계, 특히 동부 지역(이라크·이란·중앙아시아)은 점진적으로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주요 변화는 다음과 같다.
- 제도적·물적 기반의 붕괴: 바그다드 함락으로 중앙 집권적 칼리프 체제가 사라지고, 학술 활동을 뒷받침하던 대규모 도서관과 후원 시스템이 크게 약화되었다. 지식인들의 네트워크가 단절되면서, 이전처럼 광범위한 번역·토론·혁신 활동이 어려워졌다.
- 신학적·지적 방향의 전환: 이미 알 가잘리(Al-Ghazali) 시대부터 강해지던 아슈아리파(Ash'arism)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되었다. 이성은 계시의 보조 도구로 제한되고, 신의 전능성과 계시의 우위가 더 강하게 강조되었다. 철학(falsafa)과 이성적 신학(kalam)의 자유로운 탐구보다는 피크(fiqh, 이슬람 법학)과 코란·하디스 해석에 집중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무타질라(Mu'tazila) 같은 합리주의 학파는 더욱 주변화되었다.
- 사회적·정치적 안정 추구: 반복된 침략과 혼란 속에서 종교적 정통성과 공동체 결속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는 창의적·비판적 사고보다는 전통의 엄격한 준수와 법학적 안정성을 우선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물론 이슬람 문명은 완전히 멈추지 않았다. 이후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안달루시아 잔재, 오스만 제국, 티무르 제국, 무굴 제국 등에서 여전히 과학·예술·철학 활동이 이어졌다. 이븐 할둔(Ibn Khaldun) 같은 거대한 사상가도 나왔고, 울루그 베그(Ulugh Beg)의 천문대처럼 주목할 만한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바그다드 중심의 개방적·다원적 지적 폭발과 같은 규모와 활력은 재현되지 않았다. 황금기는 하나의 시대적 정점으로 남고, 이슬람 세계는 더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방향으로 재편되어 갔다.
몽골 침입은 단순한 군사적 파괴를 넘어, 이슬람 문명의 지적 생태계 자체를 바꾸어놓은 사건이었다. 정복자들의 개종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변화를 더욱 가속화하는 촉매가 되었다. 이 보수화 경향은 이후 수세기 동안 이슬람 세계의 지적·과학적 발전 속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4.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 정복과 폭력의 이슬람
이슬람의 역사에는 황금기의 지적 유산만 있는 게 아니다. 정복과 폭력의 역사도 있다.
오스만 제국은 1299년부터 1922년까지 600년 이상 지속된 이슬람 제국이다. 그 팽창의 과정에서 수많은 피가 흘렀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동로마 제국의 종말이었다. 발칸반도 정복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학살되거나 노예가 되었다. 데브시르메 제도는 정복지의 기독교 가정에서 남자아이를 강제로 징집하여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고 군인이나 관료로 키우는 제도였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명백한 인권 침해다.
오스만 제국 후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인 학살(19151923)은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로 평가된다. 150만 명 이상의 아르메니아인이 학살되거나 사막으로 추방되어 사망했다. 이것이 종교적 이유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이슬람 정체성과 기독교 소수민족에 대한 적대감이 결합된 결과였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인도의 무굴 제국도 마찬가지다. 무굴 제국은 힌두교 문명권에 세워진 이슬람 제국이었다. 초기 황제들, 특히 악바르는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쳤고, 힌두교, 이슬람, 기독교, 조로아스터교를 넘나드는 종합적 종교 사상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우랑제브(재위 16581707) 시기에 이르러 힌두교 사원이 파괴되고, 힌두교 신자들에게 지즈야(비무슬림 세금)가 부과되었으며, 대규모 강제 개종이 이루어졌다. 힌두교와 이슬람의 갈등은 이 시기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 상처는 오늘날 인도파키스탄 분쟁으로 이어진다.
5. 이슬람 노예제: 서구 담론의 공백
노예제 하면 대부분 미국 남부의 플랜테이션 흑인 노예나 대서양 노예무역(Trans-Atlantic slave trade)을 떠올린다. 서구의 진보적 담론과 교육, 미디어에서 노예제 비판은 거의 예외 없이 이 방향으로 집중된다. 반면 이슬람 세계의 노예제는 상대적으로 크게 조명되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학술적 소홀함이 아니라, 정치적·문화적 맥락에서 의도적 외면에 가까운 현상으로 보인다.
이슬람 노예제의 역사는 7세기 이슬람 초기부터 시작해 20세기 중반까지, 무려 1300년 이상 지속되었다. 주요 경로는 사하라 횡단(Trans-Saharan), 홍해, 인도양 노예무역이었다.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북아프리카·중동·아라비아로 끌려간 노예의 수는 600만~1,800만 명 정도로 본다. 로널드 시걸(Ronald Segal)은 11.5~14백만 명, 다른 연구자들은 10~17백만 명 수준으로 추정한다. 기간으로 보면 대서양 노예무역(약 350년, 주로 16~19세기, 약 1,250만 명 수송)이 압도적으로 집중적이었던 반면, 이슬람 노예무역은 훨씬 더 길고, 지속적이며, 여러 경로로 분산되어 있었다.
두 노예제 사이에는 중요한 구조적 차이가 존재한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주로 신대륙 플랜테이션의 농업 노동력 확보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남녀와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 단위 이동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노예 공동체가 형성되는 경우도 있었다. 생존한 노예들의 후손이 오늘날 아메리카 흑인 인구의 기반이 된 이유다.
반면 이슬람 세계의 노예제에서는 남성 노예의 거세(castration)가 체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하렘을 지키는 환관(eunuchs), 군사 노예(맘루크, Mamluks)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어린 남자아이들을 대상으로 음경과 고환을 완전히 절제하는 수술이 행해졌는데, 위생 상태가 열악했던 당시 조건에서 사망률이 극도로 높았다. 생존율은 10~30%에 불과하다는 기록이 많으며, 일부 보고서는 90% 사망률을 언급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중동으로 끌려간 수많은 남성 노예들의 유전적 후손이 현대 중동 사회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여성 노예들은 주로 성적 노동(concubines)과 가사 노동에 동원되었고, 이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 중 상당수도 생존하지 못하거나 특정 조건 하에만 인정되었다.
이슬람법(샤리아)에서는 노예 소유를 원칙적으로 허용했으나, 일부 인도적 규제를 두었다. 예를 들어 무슬림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금지되었고, 노예 해방(manumission)을 선행으로 여기는 권고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쟁 포로, 아프리카·유럽·중앙아시아·코카서스 등지에서 포획·매매된 비무슬림들이 대규모로 노예가 되었으며, 이 제도는 오스만 제국, 맘루크 술탄국, 아바스 왕조 등 이슬람 제국 전반에 걸쳐 제도적으로 운영되었다. 노예 시장은 바그다드, 카이로, 자잔지바르(Zanzibar) 등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왜 서구 진보 담론은 이슬람 노예제를 상대적으로 외면하는가?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한다. 첫째, 이슬람 혐오(Islamophobia)라는 비판을 피하려는 정치적 조심성이다.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 무슬림을 집단으로 비판하는 것은 높은 도덕적·사회적 비용을 치른다. 둘째, 유색인종·비서구 문화를 비판하는 데 대한 문화적 불편함(“noble savage”나 문화 상대주의 영향)이다. 셋째, 서구 자신의 식민지배와 대서양 노예무역에 대한 역사적 죄책감이 특정 방향(백인-서구 중심)의 비판에 에너지를 집중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조명이 심하게 불균형해졌다. 이슬람 세계에서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시점도 상당히 늦었다 — 사우디아라비아 1962년, 오만 1970년, 모리타니아 1981년(법적으로) — 그럼에도 서구 담론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러한 공백은 단순한 ‘잊힌 역사’가 아니다. 노예제는 모든 문명에 존재했던 보편적 제도였으나, 그 규모, 지속 기간, 잔인성, 그리고 현대적 함의를 논의할 때 선택적 침묵은 지적 정직성을 해친다. 버나드 루이스(Bernard Lewis) 같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이슬람 세계의 노예제는 인종적·성적 차원에서 독특한 특징을 보였으며, 그 유산은 오늘날 중동과 북아프리카 사회의 인구 구성과 사회 구조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대서양 노예무역의 참상을 축소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문명의 노예제 — 특히 13세기 넘게 지속된 이슬람 노예제 — 에 대해서도 솔직하고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선택적 분노는 진정한 역사 인식이 아니라, 이념적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6. 수니파와 시아파: 분열의 기원과 아이러니
이슬람 내부의 가장 깊고 지속적인 분열은 수니파(Sunni)와 시아파(Shia) 사이의 갈등이다. 오늘날 전 세계 무슬림의 약 85~90%가 수니파이며, 시아파는 10~15% 정도를 차지한다. 이 분열의 기원은 632년 무함마드 사후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에서 시작되었다.
수니파(‘Sunnah’ 즉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는 공동체의 합의(ijma)와 관습에 따라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무함마드의 가까운 동료였던 아부 바크르(Abu Bakr)가 첫 번째 칼리프로 선출되었다. 반면 시아파(‘Shi’at Ali’, 알리의 당파)는 무함마드의 혈통을 강조하며, 그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Ali ibn Abi Talib)만이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알리와 그의 후손들(이맘, Imam)이 신적 지침을 이어받는다는 입장이었다.
이 정치적 분쟁은 시간이 지나면서 신학적·종교적 차이로 발전했다. 결정적 전환점은 680년 카르발라 전투(Battle of Karbala)였다. 알리의 둘째 아들 후사인(Husayn)은 우마이야 왕조의 야지드 1세(Yazid I)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쿠파(Kufa)로 향했다. 그러나 카르발라(현재 이라크)에서 약 72명의 소수 일행과 함께 수천 명의 우마이야 군대에 포위되어 학살되었다. 후사인의 머리는 다마스쿠스로 보내졌고, 그의 가족은 포로가 되었다. 이 사건은 시아파에게 순교(martyrdom)와 억압받는 정의의 상징이 되었으며, 매년 아슈라(Ashura, 무하람월 10일)에 애도 의식을 통해 재현된다. 카르발라 이후 시아파는 단순한 정치 파벌을 넘어 뚜렷한 종교적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시아파의 기원에는 더 복잡한 문화적 층위가 존재한다. 7세기 중반 아랍 이슬람 군대가 사산 제국(페르시아)을 정복한 후, 수천 년 된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문명을 가진 페르시아인들이 이슬람 세계에 대규모로 편입되었다. 아랍 중심의 수니파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문화적·민족적 저항이 강했다. 알리와 후사인의 비극적 서사 — 부당한 권력에 맞서 정의를 위해 희생된 지도자 — 는 페르시아인들의 정서와 깊이 공명했다. 일부 학자들은 시아파 신학에 조로아스터교의 선악 이원론, 순교와 속죄, 중개자(이맘) 개념 등이 스며들었다고 해석한다. 사파비 왕조(Safavid, 1501~1736)가 이란을 공식적으로 12이맘 시아파(Twelver Shia)로 개종시키면서 이 혼합적 정체성은 더욱 강화되었다.
여기서 큰 아이러니가 드러난다. 아랍-이슬람의 정통에서 다소 이질적인 요소(페르시아 문화와 조로아스터교 잔재)를 흡수한 시아파가, 오늘날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강경하고 순수지향적인 근본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정점은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이었다.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는 세속적 팔레비 왕조를 타도하고, velayat-e faqih(법학자 통치)라는 신정 이론을 바탕으로 이슬람 공화국을 수립했다. 혁명은 “동도 서도 아닌, 이슬람 공화국(Neither East nor West, Islamic Republic)”을 외치며 서구와 소련 모두를 거부했다. 카르발라의 순교 정신은 혁명 동원에 적극 활용되었고, 호메이니는 샤를 ‘야지드’로, 자신과 혁명 세력을 ‘후사인’으로 비유했다. 기원이 문화적으로 ‘혼합적’인 집단이 오히려 종교적 순수성과 정통성에 더 집착하게 된 전형적인 인간 집단의 역설이다.
반면 주류 수니파, 특히 걸프 지역의 왕정 국가들(사우디아라비아, UAE, 카타르 등)은 이슬람의 정통 수호자를 자처하면서도 상당히 실용적인 길을 걸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와하브파(Wahhabism)라는 엄격한 수니 해석을 국교로 삼고 샤리아를 공식 법으로 내세우면서도, 서구 석유 자본과 깊이 통합되어 부를 축적했다. UAE와 카타르는 현대적 금융·관광·기술 허브로 변모하며 글로벌 자본주의와 타협했다. 이 실용주의는 때로 종교적 엄격성과의 모순(위선)으로 비판받지만, 정치적 생존과 경제적 번영을 위한 효과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이 분열은 오늘날까지 중동 지정학의 핵심 축으로 작용한다. 이란(시아파 중심)은 헤즈볼라, 하마스, 후티 반군 등 시아파 민병대를 지원하며 ‘저항의 축’을 구축하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수니파 왕정들은 이를 견제하며 지역 패권 경쟁을 벌인다. 그러나 종교적 차이 뒤에는 민족(아랍 vs 페르시아), 권력, 자원, 이념적 경쟁이라는 더 현실적인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수니파-시아파 분열은 단순한 ‘고대의 종교 분쟁’이 아니다. 초기 정치적 선택이 문화·민족적 정체성과 만나 증폭되었고, 현대 혁명과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더해지면서 지속적인 긴장으로 이어졌다. 이 아이러니 — 혼합에서 비롯된 순수 추구, 정통을 강조하면서도 실용적으로 타협하는 모습 — 는 종교가 어떻게 역사와 권력, 인간 본성과 얽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7. 수피즘: 탄압받은 관용의 전통
이슬람 내부에도 관용과 신비주의의 전통이 있었다. 수피즘이 그것이다.
수피즘은 이슬람 신비주의다. 신과의 직접적인 영적 합일을 추구하고, 사랑과 관용을 강조한다. 루미의 시가 그 정신을 가장 잘 보여준다. 종교적 경계를 넘어선 보편적 사랑, 내면의 영적 여정은 율법의 엄격한 준수를 강조하는 정통 이슬람과는 결이 달랐다.
수피즘은 이슬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아프리카와 같은 이 지역들에서 이슬람이 확산된 것은 군사적 정복보다 수피 성자들의 영적 활동 덕분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현지 문화와 종교적 전통을 수용하면서 이슬람을 접목시켰다.
그런데 수피즘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이단으로 여겨진다. 성인 숭배, 음악과 춤을 통한 신비 체험(세마), 신과의 합일이라는 개념들이 알라의 유일성을 훼손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즘은 수피즘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수피 성지와 사당을 파괴했다. 오늘날 ISIS와 탈레반도 수피 사당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이슬람 내부에서 가장 관용적인 전통이 가장 강하게 탄압받는 아이러니다.
8. ISIS, 알카에다, 보코하람: 이슬람인가 정치 폭력인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단체들을 단순히 ‘이슬람의 변종’으로 치부할 것인가, 아니면 이슬람이라는 종교 시스템이 본질적으로 품고 있는 위험한 잠재력의 필연적 표현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 질문은 표면적으로는 이분법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복잡하고 불편한 층위를 가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이들을 이슬람의 논리적 귀결로 본다. 쿠란에는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구절들이 명확히 존재하며(예: ‘검의 장’으로 불리는 수라 9장), 초기 이슬람 역사에서 지하드(성전)는 단순한 방어적 투쟁이 아니라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선 군사적 정복과 영토 확장으로 실제로 실현되었다. ISIS는 야지디족 여성을 ‘전리품’으로 삼아 성노예화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쿠란 23:5-6절(“자신의 오른손이 소유한 것”에 대한 예외 규정)과 관련 하디스를 직접 인용했다. 그들은 야지디를 다신교도로 규정해 ‘보호민(아흘 알-키타브)’ 지위조차 부정하고, 노예제를 ‘최후의 심판이 다가오는 징조’로 포장하며 조직적으로 실행했다. 모술 박물관의 고대 유물 파괴 역시 ‘우상숭배 타파’라는 종교적 순수성 논리로 정당화되었다.
반대편에서는 이것들을 이슬람을 도구로 삼은 정치적 폭력 집단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쿠란 구절을 역사적·문맥적 맥락에서 철저히 떼어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이슬람 전통의 다수 학자 의견(이즈마)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4년 126명의 저명한 이슬람 학자들이 알-바그다디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서 ISIS의 행위를 강력히 비판했다. 야지디 여성 성노예화, 무고한 민간인 학살, 다른 수니 무슬림 집단에 대한 공격은 샤리아의 본질을 왜곡한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알카에다와 ISIS는 서로를 ‘이단(타크피르)’으로 규정하며 치열하게 공격했다. 알카에다는 ISIS를 과도한 타크피르와 무슬림 피의 무차별 살상으로 비난했고, ISIS는 알카에다를 ‘민주주의 타협’과 ‘지하드 회피’로 매도했다. 순수한 종교적 신앙이라면 왜 같은 ‘우마(이슬람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죽이는가?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권력 투쟁, 자원 장악, 정치적 헤게모니 싸움의 전형적 양상이다.
ISIS의 잔인함은 이슬람 학계 다수로부터도 ‘이슬람적이지 않다’는 판정을 받았다. 수많은 무프티와 울라마들이 테러를 ‘샤리아가 명백히 금지하는 대죄’로 규정하는 파트와를 발행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슬람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그런 극단적 해석을 구조적으로 허용한다는 사실이다. 절대적 진리를 독점적으로 주장하고, 그 진리를 위해 목숨과 도덕을 희생할 수 있다는 논리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하드 개념이 방어적·영적 의미(대(大) 지하드)에서 공격적 군사적 의미(소(小) 지하드)로 쉽게 전환될 수 있는 모호함, 타크피르(이단 선언)의 주관적 적용 가능성, ‘쿠프르(불신)’에 대한 철저한 배척 논리 — 이러한 요소들은 극단주의자들이 언제든 ‘진정한 이슬람’을 독점 선언할 여지를 준다.
보코하람은 또 다른 전형적인 사례다. 나이지리아 북동부에서 활동하는 이 집단의 이름 ‘보코 하람’ 자체가 “서양 교육은 금지된 것”이라는 의미다. 그들은 근대 교육, 민주주의, 세속 헌법, 서구 문명을 이슬람에 대한 근본적 적대(쿠프르)로 규정하고, 폭력적 저항을 ‘지하드’로 포장한다. 여학생 납치(치복 사건), 시장과 모스크에서의 무차별 폭탄 테러, 마을 전체를 불태우는 만행은 국제 사회의 공분을 샀다. 이들의 논리는 구조적으로 아미쉬 공동체의 극단적 폐쇄성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외부 세계(특히 서구의 세속주의와 과학 교육)를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내부 규율을 철저히 강제하며, 이탈자를 처벌하거나 제거하는 메커니즘. 다만 아미쉬가 폭력을 자제하는 반면, 보코하람은 그것을 ‘신의 명령’으로 승화시켜 대량학살의 도구로 삼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는 십자군 원정과 종교재판, 마녀사냥을 통해 비슷한 폭력 논리를 정당화한 적이 있고, 유대교 내 극단적 정착촌 운동이나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반(反)낙태 폭력도 종교적 절대주의가 어떻게 정치적·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종교라는 시스템은 본질적으로 초월적 권위를 내세워 인간의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게 만드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신의 뜻”이라는 이름 아래라면 어떤 희생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는, 세속 이념(공산주의, 파시즘) 못지않게 위험하다.
결국 ISIS, 알카에다, 보코하람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를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첫째, 이들은 이슬람 텍스트와 역사적 전통의 특정 요소를 선택적으로 강조하여 자신의 폭력을 종교적으로 포장한다. 둘째, 그럼에도 그들의 행위는 이슬람 학계 다수의 해석과 실천에서 크게 벗어나 있으며, 종종 다른 무슬림을 가장 잔인하게 죽이는 ‘무슬림 간 내전’의 성격을 띤다.
이슬람이 이런 극단주의를 ‘필연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열어두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텍스트 자체가 아니라, 그 텍스트를 해석하고 권력으로 전환하는 인간의 메커니즘에 있다. 종교가 절대적 진리를 독점하려는 순간, 폭력은 언제든 ‘신성한 의무’로 탈바꿈할 수 있다. 이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지 않고 ‘정치적 폭력’이나 ‘이슬람 왜곡’이라는 양극단적 프레임에만 매달린다면, 우리는 결코 이 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9. 이슬람 이민자의 모순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내전, 폭정, 경제적 빈곤을 피해 유럽으로 향한 이슬람 이민자와 난민들은 2015년을 정점으로 유럽 사회에 복잡하고 지속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특히 시리아 내전, 리비아 붕괴, 이라크 혼란 등에서 탈출한 수백만 명이 지중해를 건너 독일, 스웨덴, 프랑스, 영국 등으로 유입되었다. 이 이민 물결은 서구의 군사 개입(이라크 전쟁, 리비아 공습)과 직접적으로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도덕적 책임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서구가 중동의 불안정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라면, 그 결과로 발생한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도적 의무인가, 아니면 자해적 선택인가? 이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그러나 실제 유럽 현장에서 드러난 현상들은 또 다른 층위의 문제를 제기한다. 목숨의 위협을 피해 탈출한 사람들이 새로운 사회에서 현지 문화에 적응하기보다, 오히려 현지인에게 이슬람 규범을 강요하려는 시도를 보이는 경우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영국에서는 수십 개의 샤리아 위원회(Sharia councils)가 가족·이혼·상속 문제를 다루며 사실상 병렬 사법 체계를 형성했고, 오스트리아나 독일에서도 샤리아 기반 중재가 법적으로 인정되는 사례가 나왔다. 프랑스, 벨기에, 스웨덴의 일부 교외 지역에서는 “노고 존(no-go zones)” 논란이 지속되며, 경찰 진입이 어려운 병렬 사회가 형성되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여성의 히잡 착용을 강요하거나, 학교에서 성교육을 거부하고, 이슬람 비판을 ‘신성모독’으로 규정해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도 공공연히 제기되었다.
이 모순은 표면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자국에서 샤리아나 이슬람주의적 체제 때문에 목숨의 위협을 느껴 도망친 사람들이라면, 그 체제의 규범과 거리를 두는 것이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오히려 그 규범을 새로운 정착지에 이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한 가지 주요 해석은 정체성 위기(identity crisis)다. 낯선 유럽 문화 속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불안과 소외감이, 오히려 종교적·공동체적 정체성을 더 강하게 붙잡게 만든다. 특히 2세대·3세대 이민자들 사이에서 이 현상이 두드러진다. 부모 세대는 고향 문화와 유럽 문화 사이에서 실용적으로 타협하려 했지만, 서구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자녀 세대는 ‘완전한 유럽인’도, ‘완전한 중동인’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놓인다. 이 상실감과 소외가 극단적 종교 해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심리적으로는 이해 가능한 메커니즘이지만, 그 결과(탈출했던 억압적 규범을 유럽 사회에 재현하려는 시도)는 별개의 정치·사회적 문제로 이어진다.
또 다른 흥미로운 모순은 정치적 선택에서 드러난다. 중동·북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 상당수는 유럽에서 좌파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독일의 사민당(SPD)·녹색당, 프랑스의 좌파 연합, 스웨덴 사회민주당, 영국 노동당 등은 이민자 친화적 복지 정책, 다문화주의, 반차별 담론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이민자 집단 내부의 가치관은 사회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이다. 동성애를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보는 비율이 높고(많은 국가에서 70~90% 이상),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복장에 대한 규제를 지지하며, 샤리아 일부 도입을 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선택은 단순한 ‘위선’이라기보다는 현실적 이해관계의 결과다. 이민자로서 낮은 소득층에 속하고 복지 혜택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경제·복지 정책에서는 좌파를 지지하지만, 사회·문화·가족 가치에서는 전통적 이슬람 규범을 유지하려 한다. 유럽 좌파는 이러한 모순에 눈을 감는 대가로 이민자 표를 확보한다. 결과적으로 좌파는 페미니즘·LGBTQ 권리·표현의 자유 같은 전통적 가치와 충돌하는 이슬람 보수주의를 비판하기 어려워졌고, ‘이슬람 혐오’ 프레임으로 논의를 봉쇄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 모든 현상은 유럽 사회에 깊은 균열을 만들었다. 다문화주의가 실패했다는 선언(독일 메르켈, 영국 카메론, 프랑스 사르코지 등)이 나왔음에도, 통합 정책은 여전히 미흡하고, 병렬 사회와 문화적 마찰은 지속되고 있다. 탈출한 사람들이 왜 다시 그들이 피해온 체제의 그림자를 유럽에 드리우려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하지 않다. 생존을 위한 실용적 선택, 정체성의 불안정, 종교 공동체의 강한 결속력, 그리고 유럽 사회의 상대적 관용(또는 약함)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 모순은 결국 유럽 문명의 핵심 가치 — 세속주의, 개인 자유, 법치, 성평등 — 가 얼마나 취약한지, 그리고 대규모 문화적 이질성을 가진 이민을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드러낸다. 역사적 책임과 인도적 의무를 논하면서도, 수용 사회의 문화적·정치적 지속 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 모순은 앞으로도 유럽의 가장 골치 아픈 딜레마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10. 서구에서의 중동 정치에 대한 오독(誤讀)
중동의 정치 지형을 서구의 전통적인 좌우 이분법(좌파 = 진보·평등·반제국주의 vs 우파 = 보수·전통·시장주의)으로 읽으려는 시도는 근본적인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다. 중동 정치는 서구처럼 계급·경제 이념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아랍 민족주의, 종교(시아파·수니파), 부족주의, 개인 독재, 지정학적 생존 전략이 복잡하게 얽힌 독자적 논리로 작동한다. 서구 지식인과 미디어가 자국의 정치 프레임을 강제로 적용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왜곡과 오판이 발생한다.
- 바트주의(Ba'athism): 좌파처럼 보이는 독재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하페즈 → 바샤르)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은 모두 바트당(Ba'ath Party) 계열이었다. 바트주의는 미셸 아플라크(Michel Aflaq)가 창시한 이념으로, 아랍 민족주의(Pan-Arabism)와 아랍 사회주의(Arab Socialism)를 결합했다. 슬로건은 “통합(Unity), 자유(Freedom), 사회주의(Socialism)”였다. 경제적으로 국가 통제와 국유화를 강조하고, 서구 제국주의·시온주의에 반대하며 세속주의를 표방했다. 서구 좌파 기준으로는 상당히 “좌파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정치 구조는 극도로 권위주의적이었다. 일당 독재, 강력한 정보기관(무하바라트), 반대파에 대한 잔혹한 탄압, 가족·종파 중심의 권력 독점이 핵심이었다. 시리아에서는 알라위파(소수 시아파 분파)가 군부와 정권을 장악했고, 이라크에서는 사담의 티크리트 부족(Sunni Arab)이 지배했다. 사회주의적 수사는 대중 동원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 실제로는 개인 숭배와 억압 체제로 귀결되었다. 바트주의는 이념이라기보다는 아랍판 민족주의 독재에 가까웠다.
- 나세르주의(Nasserism): 반제국주의 영웅의 이중성
이집트의 가말 압둘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54–1970)는 서구 좌파에게 오랫동안 영웅적 인물로 그려졌다. 수에즈 운하 국유화(1956), 비동맹 운동 주도, 아랍 민족주의의 상징, 토지 개혁과 사회 복지 정책 등 이 모든 것이 “반제국주의·사회주의” 프레임에 잘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국내 정치에서는 철저한 권위주의자였다.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이슬람 형제단(Muslim Brotherhood)을 강력히 억압했으며, 언론을 국유화하고 반대파를 고문·투옥했다. 그의 “아랍 사회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니라, 국가 주도 개발과 대중 동원을 위한 실용적 도구였다. 종교적으로는 세속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이슬람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아랍 사회주의의 토대”로 활용하려 했다. 나세르 역시 서구 좌파가 좋아할 요소(반서구)와 싫어할 요소(독재·세속적 탄압)가 뒤섞인 전형적 중동 지도자였다.
- 카다피주의: 가장 기괴한 ‘제3의 길’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Muammar Gaddafi)는 더 극단적인 사례다. 그는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제3의 보편이론(Third Universal Theory)을 주장하며 《녹색서(The Green Book)》를 발표했다. “자마히리야(Jamahiriya, 대중국가)”라는 독특한 체제를 내세워 직접 민주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42년간 개인 독재를 유지했다.
석유 자원을 국유화해 복지 정책(무상 의료·교육, 보조금)을 펼쳤고, 부족 사회를 고려한 사회주의적 요소를 도입했다. 그러나 정치적 반대파는 공개 처형하거나 해외 암살로 제거했다. 카다피는 아프리카 민족주의, 이슬람 사회주의, 직접 민주주의를 뒤섞은 혼합물을 만들었지만, 결국 부족·가족 중심의 전제 정치로 귀결되었다. 서구에서는 때로 “반제국주의 혁명가”로, 때로는 “광기 어린 독재자”로 양극단에서 소비되었다.
- 이란 신정: 단순하지 않은 하이브리드 체제
이란의 신정(Islamic Republic of Iran)은 서구의 전통적인 좌우 이분법으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모순으로 가득한 체제다. 1979년 혁명 이후 수립된 이 체제는 벨라야트 에 파키(Velayat-e Faqih, 법학자 통치) 원칙에 따라 최고지도자(현재 알리 하메네이)가 실질적인 최종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모든 주요 결정 — 군사, 사법, 외교, 미디어 — 에서 최고지도자의 의지가 절대적 우선순위를 가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강경한 종교적 보수주의로 보인다. 이슬람법(샤리아)을 국가의 근간으로 삼아 여성의 히잡 착용을 의무화하고, 성적 도덕을 엄격히 규제하며, 표현의 자유를 크게 제한한다. 특히 동성애는 샤리아 형법에 따라 사형(교수형 또는 투석형)에 해당하는 중죄로 규정되어 있으며, 실제 처형 사례도 국제 인권 단체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런데 경제 구조에서는 상당한 사회주의적·국가 통제적 요소가 드러난다. 혁명 이후 대규모 국유화가 진행되었고, 석유·석유화학 산업을 비롯한 핵심 부문은 국가와 혁명수비대(IRGC), 종교 재단(Bonyads)이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다. 복지 정책, 가격 통제, 보조금 체계 등은 자본주의 자유시장과 거리가 멀며, 반서구·반제국주의 노선을 경제 정책에 반영해왔다. 이 때문에 일부 서구 좌파 분석가들은 이란을 ‘반제국주의 국가’ 또는 ‘이슬람 사회주의’로 규정하기도 한다.
또한 반미·반이스라엘 노선은 서구 일부 좌파 진영과 이해관계가 겹치는 지점이다. 이란은 “미국 제국주의”와 “시온주의”를 주요 적으로 규정하고, 헤즈볼라, 하마스, 후티 반군 등과 연계된 ‘저항의 축’을 구축해왔다. 이 반서구적 수사는 서구의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담론과 부분적으로 공명한다.
그러나 가장 극명한 모순은 성(性) 관련 정책에서 나타난다. 동성애는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이면서, 성전환 수술은 1980년대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내린 파트와(fatwa)로 합법화되어 국가가 부분적으로 비용을 보조하기까지 한다. 법적으로 성별 변경이 인정되며, 이란은 오랫동안 세계에서 성전환 수술을 가장 많이 시행하는 국가 중 하나로 꼽혔다.
이 정책의 이면은 더 어둡다. 많은 게이와 레즈비언이 실제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가지지 않음에도, 동성애 혐의로 처벌받지 않기 위해 압력이나 강요를 받아 성전환 수술을 선택하는 경우가 보고되고 있다. 국제 인권 단체들은 이를 사실상 강제적 성전환으로 비판하며, 동성애를 근절하려는 체제의 도구로 기능한다고 지적한다.
이란 신정은 이렇듯 극단적 종교 보수주의, 반서구적 반제국주의, 국가주의적 경제 통제, 실용적 의료 정책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요소들이 뒤섞인 하이브리드 체제다. 서구 좌파 프레임으로는 반미·반이스라엘 노선 때문에 ‘진보적 저항 세력’으로 미화되기 쉽고, 우파 프레임으로는 종교적 억압만 강조되기 쉽다. 그러나 현실의 이란은 그 어느 쪽으로도 단순하게 환원되지 않는다.
이 모순들은 결국 체제의 본질 — 권력 유지와 이념적 생존 — 이 모든 정책의 최우선 기준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종교적 순수성과 반제국주의 수사는 대중 동원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면서도, 현실 정치와 경제적 필요에 따라 실용적으로 왜곡·조정된다. 이런 복잡한 구조 때문에 중동 정치를 서구식 좌우 스펙트럼으로 읽으려는 시도는 반복적인 오독을 낳을 수밖에 없다.
왜 서구적 오독이 반복되는가?
서구 지식인들은 중동 정치를 분석할 때 자주 다음 오류를 범한다.
- 경제·이념 중심 해석: 국가 통제 = 좌파, 세속주의 = 진보로 단순화.
- '반서구 = 진보'라는 도덕적 프레임 적용.
- 현지 맥락 무시: 민족(아랍 vs 페르시아), 종파(수니 vs 시아), 부족, 가족, 군부의 역할을 과소평가.
- 역사적 연속성 무시: 오스만 제국 붕괴 이후 식민지 경험, 냉전, 석유, 이스라엘 건국 등이 만들어낸 생존 논리를 간과.
결과적으로 중동의 독재자들은 필요에 따라 “사회주의자”, “세속주의자”, “반제국주의자”라는 라벨을 붙여 서구 여론을 조작하거나 동조자를 확보했다. 진짜 중요한 변수는 권력 유지와 집단 정체성(민족·종교·부족)이었다.
중동 정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서구의 좌우 축을 잠시 내려놓고, 민족주의 + 종교 + 권위주의 + 지정학이라는 중동 고유의 다차원 축으로 보아야 한다. 이 프레임을 무시한 채 자국의 정치적 서사를 투영하면, 정책 실패와 지적 왜곡만 반복될 뿐이다. 실제 역사 — 바트당의 몰락, 나세르의 후계자 사다트의 급선회, 카다피의 비참한 최후, 이란 신정의 지속 — 가 이 점을 가장 냉정하게 증명하고 있다.
11. 이슬람과 서구의 충돌: 누가 먼저 도발했는가
이슬람과 서구 문명의 갈등을 논할 때, 많은 사람들이 9/11 테러 이후의 ‘현대적 충돌’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 프레임 자체가 이미 교묘한 왜곡이다. 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들여다보면, 충돌의 뿌리는 이슬람의 탄생 직후부터 이어져 온 장기적 문명 간 대립이며, ‘누가 먼저 도발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시작점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극적으로 달라진다. 그런데 이슬람 측 서사에서는 언제나 서구가 가해자이고 자신들은 영원한 피해자라는 희생자 서사(victimhood narrative)가 지배적이다. 이는 불편한 역사적 사실을 체계적으로 외면한 선택적 기억이다.
먼저 가장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슬람은 7세기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현한 직후부터 공격적 확장을 시작했다. 무함마드 사후 리시둔 칼리프 시대(632~661)와 우마이야 왕조를 거치며, 이슬람 군대는 불과 수십 년 만에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이베리아 반도)까지 정복했다. 이전에 기독교가 지배하던 지역들이 속수무책으로 넘어갔다. 예루살렘은 638년에 함락되었고,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제국 수도)은 수차례 포위당했다. 이 정복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지하드라는 종교적 명령에 따라 ‘다르 알-이슬람(이슬람의 집)’을 확대하고 ‘다르 알-하르브(전쟁의 집)’를 복속시키는 과정이었다.
십자군 전쟁(1095~1291)은 이런 이슬람의 지속적 팽창에 대한 늦은 방어적 반격이었다. 11세기 셀주크 투르크의 아나톨리아 침공과 기독교 순례자에 대한 박해가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서구 기독교 세계는 이미 수백 년 동안 동방에서 밀려나고 있었던 것이다. 십자군을 ‘서구의 침략’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그 이전 400년 넘는 이슬람의 정복 역사를 지우는 편의적 역사관이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스만 투르크는 14세기 중반부터 유럽 대륙으로 진출해 발칸 반도를 정복하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켰다. 이후 빈 포위(1529년, 1683년)까지 이어진 오스만의 유럽 팽창은 기독교 유럽에게 실존적 위협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문을 두드린 이슬람 제국 그 자체였다. 이 기간 동안 수많은 기독교 공동체가 지즈야(인두세)를 내거나 개종 압력을 받으며 살아남아야 했다. 서구가 ‘제국주의’를 했다면, 오스만도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 제국주의적 정복과 지배를 행사했다.
근대에 들어서도 이슬람 측의 ‘서구 도발’ 서사는 여전히 선택적이다. 1차 세계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 영토를 분할한 사이크스-피코 협정(1916)은 흔히 중동 불안정의 원죄로 지목된다. 직선으로 그어진 인위적 국경이 부족과 종파를 무시하고 나라를 만들었다는 비판은 일정 부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오스만 제국이 전쟁에서 패배한 결과였다. 오스만이 1차 대전에서 독일 편에 서서 패한 뒤 승전국들이 전후 처리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 스스로가 수백 년 동안 중동과 발칸을 지배하며 다양한 민족·종교 집단을 억압해 온 역사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 패전국의 영토 분할은 역사적으로 드문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후 중동 사회가 스스로 안정된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종파주의·부족주의·이슬람주의로 빠져든 데 있다.
이란의 반미 감정 역시 자주 언급되는 ‘서구 원죄’ 사례다. 1953년 CIA와 영국이 모사데크 총리를 축출한 쿠데타(Operation Ajax)는 사실이었다. 모사데크가 영국 소유의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자 서구가 개입해 팔라비 샤 왕정을 강화했다. 이 사건이 1979년 이란 혁명의 반미 정서를 부채질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도 맥락이 생략된다. 모사데크 정부는 경제 혼란과 정치적 불안정을 키웠고, 공산주의 세력(Tudeh 당)의 영향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서구는 냉전 논리로 개입했다. 더 근본적으로, 1979년 혁명 이후 세워진 이슬람 공화국은 서구의 개입을 빌미로 반세기 넘게 반미·반서구 이데올로기를 국가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아왔다. 호메이니 정권은 미국을 ‘대악마’로 규정하며 인질 사건, 테러 지원, 핵 개발, 지역 패권 투쟁을 정당화했다. 1953년 쿠데타가 있었다고 해서, 이후 이슬람 정권이 보여준 전체주의적 억압, 여성 인권 유린, 이슬람 혁명의 수출 시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슬람과 서구의 충돌에서 ‘누가 먼저 도발했는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게임이다. 중요한 것은 패턴이다. 이슬람 문명은 출현 이래 지속적으로 주변 문명을 정복하고 복속시키려는 팽창주의적 동력을 보여왔다. 쿠란과 하디스에 내재된 지하드 개념, 다르 알-이슬람 vs 다르 알-하르브의 이분법, 불신자에 대한 우월 의식은 그런 동력을 종교적으로 뒷받침한다. 반면 서구는 계몽주의, 세속화, 민주주의, 과학 기술을 통해 근대성을 이루었고, 18~19세기부터 이슬람 세계를 압도했다. 식민지 지배는 그 우위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었다.
오늘날 ISIS, 알카에다, 보코하람, 이란의 대리전, 유럽 내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서구 이슬람화’에 대한 우려까지 이어지는 현상은 단순히 ‘서구가 만든 결과’가 아니다. 이슬람 내부의 개혁 실패와, 쿠란·선지자 전통에 대한 문자주의적·극단적 해석이 허용하는 구조적 취약성이 핵심 원인 중 하나다. 서구의 정책 실책(이라크 전쟁, 리비아 개입 등)이 기름을 부은 것은 사실이지만, 불을 지핀 것은 이슬람 세계가 근대성과 세속적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는 데 실패한 데 있다.
‘서구가 극단주의를 키웠다’는 주장은 결국 책임을 전가하는 편리한 수사다. 역사적으로 이슬람은 수세기 동안 서구(기독교 세계)를 위협하고 정복하려 했으며, 현대에 들어서면서 서구의 우위 앞에서 패배와 굴욕을 느꼈다. 그 굴욕을 ‘서구 탓’으로 돌리고 영원한 피해자 서사를 유지하는 한, 진정한 화해와 개혁은 요원하다. 충돌의 본질은 단순한 ‘누가 먼저’가 아니라, 두 문명이 가진 근본적 가치관의 충돌 — 절대적 종교 진리 vs 세속적 이성, 지하드 vs 계몽, 샤리아 vs 인권 — 에 있다. 이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한, ‘대화’나 ‘이해’라는 미사여구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12. 패턴의 반복: 이슬람도 예외가 아니다
이슬람의 역사를 돌아보면 1편의 기독교, 2편의 유대교에서 본 패턴이 반복된다.
초기의 개방성과 관용 → 팽창 과정에서의 폭력 → 외부 충격(몽골 침입) 이후 보수화 → 내부 이단 탄압(수피즘) → 극단주의의 등장 → 외부와의 충돌 → 난민 발생 → 새로운 정착지에서의 갈등.
그리고 이슬람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왔다. 서구 제국주의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가해자였다. 몽골의 침략을 당하면서, 동시에 힌두교 문명권을 정복했다. 극단주의 테러의 피해자(무슬림이 ISIS의 가장 많은 희생자다)이면서, 동시에 그 테러의 온상이 이슬람 문화권이었다.
이 패턴을 보면 문제가 이슬람이라는 특정 종교에 있다기보다, 종교라는 시스템 자체가 이 패턴을 반복적으로 만들어낸다는 결론에 가까워진다. 4편에서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공통 기원인 아브라함으로 돌아가, 이 모든 것이 설계된 것인지를 묻는다.
- 참고문헌 -
버나드 루이스, 『이슬람의 위기(The Crisis of Islam)』 — 이슬람 세계가 근대화에 실패하고 극단주의로 향하게 된 역사적 경로를 분석. 이슬람 황금기의 쇠락과 서구와의 충돌 구조를 추적한다.
이븐 와라크, 『나는 왜 무슬림이 아닌가(Why I Am Not a Muslim)』 — 이슬람 내부에서 나온 비판적 시각. 쿠란의 역사적 형성 과정, 이슬람법의 폭력적 적용, 이슬람 문명의 구조적 문제를 직시하는 저작.
에르네스트 르낭, 『이슬람과 과학(L'Islamisme et la Science)』 — 이슬람이 초기 황금기의 과학적 개방성에서 어떻게 폐쇄적 근본주의로 이행했는지를 추적한 19세기의 논쟁적 강연문. 이슬람 황금기와 그 붕괴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유효한 분석 틀을 제공한다.
이븐 시나(Avicenna, 980–1037), 『치유의 서(The Book of Healing)』 중 ‘진실한 자들의 증명(Proof of the Truthful, burhān al-ṣiddīqīn)’ — 신의 존재를 순수 이성으로 증명하려는 대표적인 형이상학적 논증. 그리스 철학과 이슬람 신학을 결합한 고전적 시도.
알 가잘리(Al-Ghazali, 1058–1111), 『철학자들의 모순(The Incoherence of the Philosophers)』 — 이븐 시나 등 철학자들의 인과율, 세계의 영원성 등의 주장을 공격하며 이성의 한계와 계시의 우위를 강조한 결정적 저작.
이븐 루슈드(Ibn Rushd, Averroes, 1126–1198), 『모순의 모순(The Incoherence of the Incoherence)』과 『결정적 논고(The Decisive Treatise)』 — 알 가잘리의 비판에 대한 반박. “진리는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철학적 이성과 계시의 조화를 주장하며, 철학적 탐구의 정당성을 강력히 옹호한 작품.
알 마아리(Al-Ma'arri, 973–1057), 『필요한 불필요(Luzūmiyyāt)』 — 종교와 예언을 신랄하게 비판한 자유사상가의 대표 시집. 무신론에 가까운 회의주의와 반종교적 관점을 드러내며, 이슬람 황금기 내 지적 개방성의 한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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