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에볼라, 『현대 세계에 대한 반란』中 남성과 여성
남성과 여성
전통적 삶에 대한 고찰을 마무리짓기 위해, 이제 성(性)의 차원에 대해 간략히 논의하고자 한다.
이 맥락에서도 우리는 전통적 세계관 속에서는 실재가 상징에, 행위가 의례에 각각 대응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대응관계로부터 파생되는 것이 곧 남성과 여성, 즉 어느 정상적인 문명에서나 필연적으로 성립되는 양성 간의 관계를 이해하고 조절하는 원리들이다.
전통적 상징체계에서는 초자연적 원리를 ‘남성적인 것’으로, 자연과 생성의 원리를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헬레니즘 철학에서는 “그 자체로서 하나”(τὸ ἕν), 즉 완전하고 자족적인 존재를 남성적인 것으로 본다. 반대로, 분화(分化)와 타자성(他者性)의 원리, 곧 욕망과 운동의 원리는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힌두교의 상캬(Samkhya) 철학에 따르면, 감응하지 않는 영적 실체인 푸루샤(puruṣa)는 남성적 원리이며, 모든 조건지어진 형태의 능동적 기저인 프라크리티(prakṛti)는 여성적 원리다. 극동 전통에서도 이와 유사한 개념이 음양(陰陽)의 우주적 이원성으로 표현되며, 여기서 남성 원리인 양(陽)은 ‘하늘의 덕’에, 여성 원리인 음(陰)은 ‘지상의 원리’에 각각 대응된다.
이 두 원리는 그 자체로는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내가 반복적으로 전통 세계의 본질로 지목해온 창조적 형성의 질서 속에서는, 또한 그것이 역사적으로 다양한 인종과 문명의 갈등 속에서 전개되어야 했던 과정을 통해, 이 두 원리는 각각 고유한 기능을 유지한 채 하나의 종합적 구조로 통합된다.
이 자리에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다양한 신화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타락’의 서사들 이면에는 남성 원리가 여성 원리와 동일시되고, 마침내 그 여성의 존재 양식을 내면화하면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되는 사고가 숨어 있다. 본래 스스로 자족하는 원리가 자기 자신 안에 원리를 가지지 못한 존재의 법칙, 곧 ‘욕망’의 힘에 굴복할 때, 이를 ‘타락’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인간 현실의 차원에서, 다양한 전통들이 여성에 대해 경계심을 품어온 것은 바로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여성을 “죄”의 원리, 불순함과 악의 근원, 초월을 추구하는 자에게 있어 유혹이자 위험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의 방향과는 반대되는 또 다른 가능성을 고찰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두 원리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여성 원리―그 힘은 본래 원심적이다―가 일시적인 외부 대상들을 향하는 대신, ‘남성적인’ 안정성으로 향할 때 성립된다. 그 안정성 속에서 여성 원리는 자신의 불안정성과 동요에 대한 한계를 발견하게 되며, 이로 인해 여성적 가능성 전체가 내적으로 변형된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종합이다.
이러한 종합이 이루어지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여성 원리가 자신의 반대 원리로 근본적인 ‘전향’을 이루는 것이며, 동시에 남성 원리는 철저히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할 때 형이상학적 상징들에 따르면, 여성은 ‘신부’가 되며, 또한 ‘힘’ 혹은 ‘도구적 창조력’이 되어 정지된 남성의 활동성과 형상성의 원초적 원리를 받아들이는 존재가 된다. 이는 샥티(Sakti) 교의에서처럼 나타나며, 비록 서로 다른 용어로 표현되긴 하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나 신플라톤주의에서도 동일한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이 점과 관련해 탄트라-티베트 전통의 표현들을 언급한 바 있다. 그 표현들에서 ‘홀을 지닌 자’인 남성은 정지해 있으며, 냉정하고, 광명으로 충만한 존재로 그려진다. 반면 그를 감싸며 축으로 삼는 샥티의 본질은 흔들리는 불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야말로 인간의 성(性)에 대한 전통적 가르침의 기초를 이룬다.
이 규범은 카스트 제도의 원리를 따르며, 동시에 다르마(dharma)와 박티(bhakti)―또는 피데스(fides)―라는 두 개의 근본 원리를 강조한다. 곧 자기 존재 안에 근원을 가진 본성과 능동적 헌신의 원리이다.
만약 인간의 탄생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면, 하나의 존재가 남성의 육체로 혹은 여성의 육체로 ‘자각하게 되는 것’ 역시 우연일 수는 없다. 이 점에서 또한, 육체적 차이는 영적 차이의 등가물로 간주되어야 한다. 즉, 어떤 존재가 육체적으로 남성 또는 여성인 것은, 그것이 초월적 차원에서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적 구분은 영성(spirituality)과 무관한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소명과 고유한 다르마를 지시하는 표지인 것이다.
우리는 모든 전통 문명이 질서를 세우고 ‘형태’를 부여하려는 의지 위에 세워져 있음을 알고 있다. 전통적 법은 무차별적이고 균등하며 불확정적인 방향―즉, 각 구성요소들이 뒤섞여 무정형의 균질적 혼합물로 전락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각각의 요소들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며, 그 고유한 본성을 가능한 한 완전하게 표현해내도록 의도한다.
따라서 성별에 대해서도, 남성과 여성은 서로 다른 유형으로 간주된다. 남성으로 태어난 자는 남성으로서 자신을 실현해야 하며, 여성으로 태어난 자는 여성으로서 자신을 실현해야 한다. 이는 소명의 혼합이나 무분별한 뒤섞임을 극복함을 의미한다. 초월적 소명에 있어서조차, 남성과 여성은 각각 고유한 길을 따라야 하며, 그것은 서로 교환될 수 없는 것이며, 그렇게 할 경우 존재의 모순적이고 부조화적인 방식으로 전락하게 된다.
나는 이미 남성에게 특유하게 부여된 존재 방식에 대해 고찰한 바 있으며, 또한 “스스로를 원리로 삼는 존재”라는 가치에 이르는 두 주요한 경로―즉, 행위와 관조(觀照)의 길―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따라서 전사(戰士, 영웅)와 수행자(修行者)는 순수한 남성성의 두 가지 근원적 유형을 대표한다. 이에 상응하는 여성적 본성의 두 가지 유형 또한 존재한다. 여성이 자기 자신을 여성으로서 실현하고, 심지어 전사이자 수행자인 남성이 도달한 동일한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직 연인(愛人)과 어머니로서만 가능하다.
이것은 동일한 이상적 긴장감(ideal strain)의 양분(兩分)이며, 능동적 영웅성이 있는 것처럼 수동적 영웅성도 존재한다. 절대적 자기 긍정의 영웅성과 절대적 헌신의 영웅성이 있으며, 이 둘은 모두 순수함 속에서, 봉헌(奉獻)의 의미로 살아질 때 인간의 한계를 초극하고 해탈에 이르는 데 있어 찬란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러한 영웅적 기질의 분화는 남성과 여성에게 주어지는 성취의 경로에 각기 독자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여성의 경우, 전사가 순수한 행위로, 수행자가 순수한 이탈로서 ‘삶 너머의 삶’을 긍정하는 것에 상응하는 것은, 여성이 자신을 온전히 타자에게 내맡기고 철저히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행위이다. 그 타자가 연인일 경우에는 아프로디테적 유형의 여성(애인의 유형), 자식일 경우에는 데메테르적 유형의 여성(어머니의 유형)이 된다. 그녀는 이러한 헌신 속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와 기쁨, 정당성을 발견한다.
이것이 곧 전통적 여성에게 주어진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참여의 방식, 즉 형식(form)의 차원에서도, 형식을 초월한 차원에서도 철저하고 비개인적인 방식으로 살아낼 때 비로소 완성되는 박티(bhakti) 혹은 피데스(fides)의 진정한 의미다.
이 두 가지 뚜렷하고도 혼동 불가능한 방향에 따라 점점 더 단호하게 자신을 실현하고, 여성 안에 남성적인 모든 요소를, 남성 안에 여성적인 모든 요소를 제거하며, “절대적 남성”과 “절대적 여성”이라는 원형(archetype)을 구현하고자 애쓰는 것―이것이 존재의 다양한 차원에 따라 성(性)에 대해 전통이 명한 법이었다.
따라서 여성이 성스러운 위계 질서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방식은 전통적으로 간접적이고 매개된 방식뿐이었다. 인도에서 여성이 비록 고귀한 카스트에 속했더라도, 그녀 자신만의 입문(initiatic) 절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혼 이전에는 아버지를 통해서만, 결혼 이후에는 남편을 통해서만 아리야(arya), 즉 성스러운 귀족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으며, 남편은 동시에 가문의 신비적 중심, 곧 영적 가장이었다.
도리스 시대의 헬라스에서도 여성은 일생 동안 어떠한 ‘권리’도 누리지 못했다. 그녀가 결혼하기 전에는 ‘감추어진 자’(κρυπτός)로서 아버지의 권한 아래 있었고, 로마에서도 유사한 영적 관념에 따라 여성은 결코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간주되지 않았다. 법적으로 그녀는 남편의 ‘딸’(filiae loco), 자녀의 ‘자매’(sororis loco)로 여겨졌다. 소녀 시절에는 부계 씨족(gens)의 우두머리이자 사제인 아버지의 권위(potestas) 아래 있었고, 결혼하면 “남편의 손아귀 안에”(in manu viri) 놓인다는 다소 노골적인 표현이 사용되었다.
여성의 종속을 규율했던 이러한 전통적 규범들은 다른 문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현대의 “자유로운 정신들”이 날카롭게 비난하듯 불의하거나 오만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여성적 본성에 적합한 유일한 영적 경로의 경계와 자연스러운 자리를 명확히 규정해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는 순수한 전통적 여성의 유형―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신적인 헌신을 실현할 수 있는 여인―에 대해 명시적으로 서술한 고대의 관점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아즈텍-나우아 전통에서는, 전사 귀족 계층에게만 주어졌던 천상의 불사(不死)의 특권을 출산 중에 사망한 어머니들 역시 공유할 수 있었다. 아즈텍인들은 이 희생을 전장에서 목숨을 바친 자들의 희생과 동등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는 전통적 힌두 여성의 유형이다. 그녀는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극단적인 관능성을 감내할 수 있는 존재였으나,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봉헌적 성격을 띤 피데스(fides)를 살아내는 여인이었다. 이 피데스 덕분에, 그녀의 육체와 인격, 의지를 에로틱한 헌신을 통해 바치는 행위는 감각의 세계를 넘어서 완전히 다른 방식과 차원의 봉헌으로 승화된다.
바로 이 피데스 때문에, 신부는 결혼한 남편을 따라 사후 세계로 함께 가기 위해 장례의 화장(火葬) 장작더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이 전통적 희생―유럽인들과 서구화된 힌두인들이 순전한 ‘야만’으로 간주한 이 풍습―에서, 과부는 죽은 남편의 시신과 함께 산 채로 불태워졌다. 이 관습은 산스크리트어로 사티(sati) 라 불리는데, 이는 동사 어근 as(존재하다)와 접두사 sat(실재, 참됨)에서 유래한 말로, 진리를 의미하는 satya 역시 여기에서 파생된다. 사티는 또한 “선물”, “충절”, “사랑”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희생은 서로 다른 성을 가진 두 존재 간의 관계가 이룰 수 있는 궁극적 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진리와 초인성의 관점에서 볼 때 절대적 관계의 징표였다. 이 맥락에서 남성은 해방적인 박티(bhakti)를 가능하게 하는 지지체의 역할을 하며, 사랑은 하나의 문이자 길이 된다.
전통적 가르침에 따르면, 남편을 따라 죽음에 이른 여성은 “천상”에 도달했고, 그녀는 남편의 존재와 동일한 실질로 변화되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육체의 소각을 통해 신적인 빛의 육체로 변모하는 그 전이(transfiguration)에 함께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는 아리아 계열의 문명들 사이에서 시신을 불태우는 의례로 상징된다. 이와 유사한 생의 단념은, 남편이나 연인이 전사했을 때 자발적으로 생을 마감하던 게르만 여성들의 경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전에 일반적으로 말해 박티의 본질이란 행위의 대상이나 수단에 대한 무관심, 다시 말해 순수한 행위와 무아적 태도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점은 힌두 전통사회와 같은 문명에서 과부의 의례적 희생―즉 사티―가 어떻게 제도화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여성이 타자에 대한 강렬하고 상호적인 인간적 열정의 유대로 인해 자신을 바치거나 심지어 희생하는 것이라면, 그 행위는 아직도 통상적 사건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오직 그녀의 헌신이 외적 동기 없이도 스스로를 유지하고 더욱 심화시킬 수 있을 때에만, 그녀는 진정으로 초월적 차원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슬람에서의 하렘 제도는 이러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기독교적 유럽에서는 여성에게 있어 오직 신에 대한 신념만이 공적인 삶을 포기하고 수도원적 은둔 생활로 들어가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으며, 그것조차도 소수의 여성만이 선택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단지 한 남성만으로도 그러한 동기를 부여할 수 있었고, 하렘이라는 은둔적 삶은 고귀한 여성이라면 누구도 비판하거나 회피하려 들지 않을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간주되었다.
한 여성에게 있어 오직 한 남성만을 중심으로 삶 전체를 집중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겨졌고, 그는 그를 향한 사랑이 너무도 크고 이타적이기에, 다른 여성들도 같은 감정으로 그와 연합하고 동일한 헌신으로 그에게 묶이는 것이 가능했다. 이 모든 것 속에 드러나는 것은 바로 ‘순결성’의 성격이며, 이 길에서는 그것이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남성의 사랑과 헌신을 조건으로 요구하는 사랑은 열등한 형태의 사랑으로 여겨졌다. 반대로, 진정한 남성이라면 이러한 방식의 사랑―조건적이고 상호적인―을 알 수 없으며, 그러한 사랑은 그를 여성적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는 여성이 남성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고자 하는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바로 그 자기충족적 본질을 잃게 만든다.
신화에 따르면, 위대한 산중의 수행자이자 고행자인 시바(Siva)는 자신의 신부 파르바티(Parvati)에 대한 열정을 불러일으키려 했던 카마(Kama, 사랑의 신)를 단 한 번의 시선으로 재로 만들어버렸다. 마찬가지로, 칼키 화신(Kalki-avatāra)의 전설에도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전설에서는, 한 여인을 욕망하고 사랑에 빠진 남성들이 그 열정으로 인해 여성으로 변해버려 결국 누구도 그녀를 소유할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여성의 입장에서, 진정한 위대함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스스로를 내어줄 수 있을 때 드러난다. 마치 스스로를 불태우는 불꽃처럼, 그녀는 사랑하는 이가 자신에게 헌신하지 않고, 마음을 열지 않으며, 오히려 거리를 둘수록 더 깊이 사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에게 있어 그 남성은 단순한 남편이나 연인이 아니라 ‘주인’으로 인식된다.
하렘의 정신은 질투심, 열정적인 자기중심성, 그리고 여성이 남성을 소유하려는 본능적 성향을 극복하려는 투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성은 소녀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하렘에 몸담고, 자신 외의 다른 여성들과 함께 남성의 사랑을 공유하며, 남성이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내어주지’ 않으면서도 모두를 ‘소유’하는 상황 속에서 그에게 충실할 것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비인간적’ 측면 속에는 오히려 수행적이고 신성한 요소가 깃들어 있다. 여성이 사물화된 것처럼 보이는 이 체계 속에서 그녀는 오히려 진정한 소유, 극복, 심지어 해방을 경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무조건적인 피데스 앞에서는 인간적 외양을 지닌 남성이 단지 더 높은 목적을 위한 하나의 매개에 불과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인은 자신 안에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더 높은 목표에 이를 수 있는 문을 열게 된다.
하렘의 규율이 수녀원의 규율을 모방한 것처럼, 여성의 삶을 규율하는 이슬람 법은 (감각적 삶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포함하고 때로는 극단화함으로써) 그녀를 수도적 금욕주의의 동일한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보다 덜 급진적인 형태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와 같이 첩 제도가 일종의 제도적 성격을 띠고 일부일처제의 결혼을 보완하는 합법적 장치로 존재했던 문명들에서도 유사한 여성적 태도가 자연스럽게 전제되었다. 이들 문화에서는 성적 독점주의가 일정 부분 초극되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여기서 내가 말하는 하렘이나 유사 제도는 단순히 물질적 차원에서의 것이 아니다.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전통적 이상 속에서의 하렘의 의미, 그리고 그 제도를 가능하게 했던 더 높은 가능성이다.
전통이란, 인생의 혼란한 흐름들이 올바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견고한 강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의 방향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무거운 짐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으로 체득하며, 자기 존재의 가장 전통적인 가능성을 내면의 충동(élan)을 통해 실현해나가는 자들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들’이다.
반면, 제도의 정신도 형식도 따르지 않고 맹목적으로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는 존재’라 말할 수 없다. 그들은 비록 내면의 빛은 없으나, 그 복종 덕분에 개인적 한계를 넘어서며, 자유로운 자들이 따르는 동일한 방향으로 이끌려 간다.
그러나 그 어떤 전통의 정신도 형식도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는 오직 혼란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길을 잃은 자들, 곧 ‘타락한 자들’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여성에 관한 한, 우리의 동시대 사회가 처한 현실이다.
이미 카스트 제도를 “극복”하고(이 표현은 자코뱅식 용어를 차용한 것이다), 각 인간에게 저마다의 “존엄”과 “권리”를 되돌려 주었다고 자부하는 세계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 대한 감각을 끝내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여성의 해방은 노예의 해방에 이어 도래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것은 곧 계급도 전통도 없는 인간, 즉 파리아(불가촉천민)의 찬양으로 이어졌다.
수행자와 전사의 형상조차 더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 새로운 귀족 계층의 손이 검(劍)이나 홀(笏)보다도 테니스 라켓이나 칵테일 셰이커를 들기에 더 적합해 보이는 사회, 남성성의 원형(archetype)이 권투 선수나 영화배우―혹은 한심하고 나약한 지식인, 대학 교수, 자기애적 예술가 인형, 또는 돈벌이에 찌든 은행가나 정치가―로 대체된 사회 안에서, 여성들이 자신을 위한 “개성”과 “자유”를 주장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말하는 개성과 자유는 대개 무정부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의미를 띠는 것이었다.
전통 윤리가 남성과 여성 각각에게, 자신이 가진 성적(性的) 본성을 최대한 철저히 실현하고 극단적으로 구체화할 것을 요구했던 반면, 오늘날의 새로운 “문명”은 모든 것을 평준화하고 무정형적인 상태를 지향한다. 이 문명이 나아가는 곳은 초월이 아니라, 성의 개별화와 구분조차 일어나기 이전 단계로의 후퇴다.
진정한 의미의 퇴위(abdication)가 이제는 “진보의 한 걸음”으로 포장되고 있다. 수세기의 “노예 상태”를 견딘 여성들은 이제 자기 자신이 되기를 원하며, 무엇이든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소위 페미니즘이라는 운동은 여성만의 고유한 개성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으며, 결국 남성의 개성을 모방하는 방식 외에는 여성의 개성을 구성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다시 말해, 여성의 “요구”는 근본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과, 진정한 여성으로서 존재하고 기능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오해로 인해, 현대 여성은 전통적 역할을 모욕적으로 여기고, 단지 “여성으로 대우받는 것”에 분노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잘못된 소명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반발심으로 인해, 그녀는 복수하고, “존엄”을 회복하고, “진정한 가치를” 증명하며, 남성의 세계에서 남성과 경쟁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가 맞서려 했던 남성은 진정한 남성이 아니었고, 오직 표준화되고 합리화된 사회가 만들어낸 인형일 뿐이었다. 이미 그 사회는 분화된 것, 질적인 것에 대한 인식 자체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와 같은 문명에서는 정당한 특권이 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자기 본성에 부합하는 전통적 소명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지키려 하지 않는 여성들은(설령 가장 낮은 수준에서라도. 왜냐하면 성적으로 충만하게 실현된 여성은 결코 남성을 모방하거나 시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자신들 또한 현대 사회가 요구하고 소중히 여기는 능력들, 즉 물질적이고 지적인 기능들을 남성과 동일하게 보유하고 있음을 쉽게 증명해 보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남성은 이러한 흐름을 무책임하게 방조했고, 나아가 여성들을 거리와 사무실, 학교, 공장, 그리고 현대 사회와 문화의 “오염된” 모든 교차점으로 떠밀기까지 했다.
이로써, 마지막 평준화의 밀어붙이기가 완결된 것이다.
그리고 물질주의적 현대 남성의 영적 거세(spiritual emasculation)가 조용히 여성을 헤타이라(hetaera)로서의 우위―감각에 사로잡혀 여성을 섬기는 남성들 위에 군림하는 여성의 우위, 이는 고대의 여성 지배 사회들(gynaecocratic communities)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구조―를 회복시키지 않은 곳에서는, 오히려 여성 유형 자체의 퇴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신체적 특징에까지 영향을 미쳐, 여성 본연의 가능성이 위축되고, 고유한 내면의 삶이 억압된 것이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가르송(garçonne) 유형의 여성, 즉 남자아이 같은 여자와, 천박하고 허영심에 찬 여성이다. 그녀들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내적 비상(élan)도 불가능하며, 감각성과 죄의식에 있어조차 무능한 존재가 되었다. 왜냐하면 현대 여성에게 있어 육체적 사랑의 가능성은 더 이상 흥미로운 것이 아니며, 그 대신 자신을 우상화하는 자기애적 신체 숭배, 옷을 많이 혹은 적게 걸친 채로 시선을 받는 것, 육체 단련, 댄스, 스포츠, 돈벌이 등등이 더 매력적인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 유럽은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주고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헌신, 혹은 독점적이지 않으면서도 강한 사랑의 순결성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유럽에서 신성시되던 ‘충실함’이라는 덕목은 대개 순응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유럽이 찬양해 온 사랑은 상대방의 헌신 부족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러나 여성이 한 남성에게 자신을 헌신하기에 앞서, 그 남성이 자신의 몸과 영혼에 완전히 귀속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순간, 그녀는 이미 자신의 봉헌을 “인간화”했으며, 동시에 그것을 빈약하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그녀는 여성성의 순수한 본질을 배반하기 시작했으며, 그 자리를 남성적 속성, 그것도 가장 하층에 속하는 속성―타인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 주장하고 지배하려는 자아의 오만―으로 대체한 것이다.
그 뒤로는 모든 것이, 마치 중력의 법칙처럼,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결국 여성의 자아 중심성은 갈수록 심화되고, 남성은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흥미로운 존재가 아니게 되며, 그녀는 오직 남성이 자신의 쾌락이나 허영을 얼마나 충족시켜 줄 수 있는가에만 관심을 갖게 된다. 마침내 그녀는 천박함이 수반하는 타락의 형태들에까지 빠지게 되며, 그 결과 남성적인 삶의 양식―실용주의적이고 피상적인 태도, 일과 돈, 광란의 활동, 정치―속으로 내던져진다. 그로 인해 그녀의 본성은 왜곡되고, 마침내 남성과 동일한 구렁텅이로 추락한다.
이러한 상황은 서구에서 일어난 여성 해방의 귀결에 고스란히 해당되며, 이는 지금 전염병보다도 빠르게 세계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다.
반면 전통적인 여성, 혹은 절대적 여성은, 자기 자신을 바침으로써, 타인을 위해 사는 존재로서, 한 존재에게만 오직 단순하고 순결하게 귀속되기를 원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자기 자신에게 속하게 되었으며, 자기만의 영웅성을 발휘했고, 심지어는 보통의 남성들보다도 더 고귀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 여성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고자 함으로써, 스스로를 파괴하였다.
그녀가 그토록 갈망했던 “개성(personality)”은 이제 그녀 안에 존재하던 모든 여성적 개성의 흔적마저 소멸시키고 있는 중이다.
성(性) 사이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는, 오직 물질적인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이 경우에도 마치 자성(磁性)과 같아서, 창조적 불꽃이 클수록 극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다시 말해, 남성이 진정한 남성일수록 여성은 더욱 진정한 여성이 된다.
그렇다면 자기 본성의 가장 깊은 힘들과 아무런 접촉도 없이 살아가는, 혼성적인 존재들 사이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성(性)이 단지 생리학적 차원으로 축소되어버린 이들 사이에서? 영혼 깊숙한 곳에서조차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자들, 혹은 남성적인 여성과 여성적인 남성들 사이에서? 그들은 “완전한 성 해방”을 이룩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단지 퇴행했을 뿐이다.
이러한 존재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모든 관계는 애매하고 붕괴적인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그것은 새로운 공산주의 리얼리즘 속에서 너무나 흔한, 동료적 문란함과 병리적인 ‘지적 유대감’ 같은 형태로 드러난다. 다시 말해, 현대 여성은 신경증적 복합성과 그 유사 복합성들에 의해 잠식당할 운명이며, 프로이트가 자신만의 “과학”을 세운 것도 바로 이 같은 병리적 양상 위에서였다. 그 “과학”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징후다.
이른바 “해방된 여성”의 세계가 지닌 가능성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이 세계의 전위부대, 즉 북아메리카와 러시아는 이러한 현실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매우 흥미롭고 상징적인 증거들을 산출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동시대인들이 그들의 경솔함 때문에 감히 의심조차 하지 못하는, 훨씬 더 심오한 차원의 질서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율리우스 에볼라, 『현대 세계에 대한 반란』(Julius Evola, Revolt Against the Modern World, Inner Traditions, 1995), 157~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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