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로빈슨, 합당한 존재가 되라: 우파의 길
합당한 존재가 되라: 우파의 길
다니엘 로빈슨 (Daniel Robinson) / 2014년 11월 14일
그대, 그 낡은 책을 들고 있는 이여. 아마도 그 책은 대학 강의를 듣는 중 교수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했을 가능성이 크다. 저술자는 생전에 백인 남성이었을 것이며, 그 또한 사망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다. 현재 그대는 무도회장 밖으로 나와 방황하고 있는 중이다. 그 무도회장 안에는 도시에서 가장 체면과 품위를 중시하는 인물들이 모여 있다. 다만, 그대 역시 그 공간이 불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을 확인하니,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던 셈이다. 현재의 모든 사태가 점차 파국으로 향하고 있으며, 그대는 이 흐름을 역전시킬 방법을 모색 중일 것이다.
이에 한 가지 요청을 제안한다. 다음 문장을 숙고하여 따라 해보기 바란다:
“우리는 권력을 가질 자격이 없다.”
유감스럽게도, 그대의 선의는 아무런 실질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필자의 선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는 극히 단순한 진실에 귀속된다. 만일 그대 혹은 필자에게 권력을 누릴 자격이 있었더라면, 이미 권력은 그대 혹은 필자의 손에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니 주의 깊게 살펴보기 바란다.
우파(The Right)가 지난 200여 년에 걸쳐 쇠락한 데에는, 문명(Civilization)의 기초를 이루는 원리를 스스로 저버린 탓이 크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정치적 정당성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좌우 간에 근본적인 분기가 존재하였다. 루이 왕(Louis) 혹은 시민 로베스피에르(Citizen Robespierre)가 법을 제정하고 범죄를 억제하며 사형을 집행할 권한을 갖는 정당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우파는 왕이 고귀한 혈통과 하느님의 은총(grace of God)을 근거로 통치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좌파는 로베스피에르가 인민 주권(the People’s sovereignty)에 기반하여 통치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동일한 주권이 루이의 목을 단두대에서 떨구게 만들었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는 『정치 헌정의 창발 원리에 대한 소론(Essay on the Generative Principle of Political Constitutions)』(1810)에서 우파의 정치철학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모든 헌정은 선험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쓰여질 수 없다는 일반적 법칙에 단 하나의 예외만이 존재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은 곧 모세(Moses)의 입법이다. 이 입법만이 유일하게—마치 조각상이 부조되듯—세부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형태로 정립되었으며, 하나의 경이로운 인물에 의해 문자 그대로 기록되었다. 그는 ‘빛이 있으라(Fiat)!’라고 선언했으며, 그의 작업은 이후 스스로나 타인에 의해 수정되거나 개선되거나 변경될 필요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와 같이, 이 입법은 모든 지성적 양심에게 명백하게 인간 권능의 경계를 넘어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직 한 차례만 예외를 허락한 이 일반 법칙에 대한 이 장엄한 예외는, 오직 그 예외를 만들어낸 자에게만 허용되었으며, 이 사실은 히브리의 위대한 입법자가 수행한 신적 사명의 존재를 역설적으로 입증한다. 인간의 그 어떤 제도도, 모든 것을 지탱하는 그 손에 의해 지지받지 않는 한, 결코 지속될 수 없다. 다시 말해, 그것이 처음부터 특별히 그분께 봉헌되어 있지 않다면 유지될 수 없다. 제도가 신적 원리에 깊이 침투될수록, 그 존속력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
다시 말해, 정치 제도는 신법(Divine laws)을 수용하는 정도에 따라 정당성을 획득한다. 가톨릭 신자인 드 메스트르(de Maistre)는 미국 종교우파의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논박할 수 있다. 계시(Revelation)와는 별도로, 신의 의지는 자연을 통해 표현된다. 따라서 이성적이고 경험적인 탐구를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이러한 법칙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자연법(natural laws)과 자연적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국가는 결코 전능하거나 전체주의적일 수 없다. 국가는 인간 본성을 자의적으로 변경할 수 없으며, 경제적 유인이나 수요-공급과 같은 경제 법칙들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할 수도 없다.
신반동주의 철학(neoreactionary philosophy)은 이러한 종교적 갈등의 가능성을 회피하기 위해 단순히 “자연 혹은 자연의 신(Nature or Nature’s God)”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 한계들은 그것의 궁극적 원인이 신(God)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러한 진리를 부정하는 길 위에 정치적 실패와 혼란이 포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789년 프랑스 국민의회(French National Assembly)가 채택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of the Citizen)』 제3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모든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Nation)에게 존재한다. 어떠한 기관이나 개인도 국민으로부터 직접 유래하지 않은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두 관점 중 어느 쪽이 현대 보수주의자의 철학에 더 가까운가? 가장 열성적인 기독교계 공화당원조차도 여전히 ‘우리 국민(We the People)’이라는 일반 의지를 구현한다고 주장하는 문서에 충성을 맹세한다. 이는 그를 자코뱅파(Jacobin)의 이념적 친족으로 만든다. 혁명적 이념에 대한 엄격한 충실함만으로도 극우주의자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파의 역사 전체가 얼마나 철저한 실패로 점철되어 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에서 율리우스 에볼라(Julius Evola),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에 이르기까지 걸출한 사상가들이 존재했음에도, 역사의 흐름은 한 방향으로만—좌파적 방향으로만—흘러왔다.
우파는 그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 어떠한 전략들을 시도해왔는가?
19세기와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반동 세력(reactionary forces)은 여전히 교회나 군대와 같은 제도들을 장악하고 있었다. 성 비오 10세 교황(Pope St. Pius X)은 교회 내부의 전복적 흐름에 맞서기 위해 근대주의 반대 서약(Oath Against Modernism)을 제정하였다. 그보다 수십 년 전에는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 공작이 제국 간 협력을 조성하여 자신들을 전복하려는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여러 국가에서, 기독교 군주제들의 연합(이후 프랑스도 여기에 가세함)은 종교 권위에 기반한 공동 전선을 형성하여 혁명적 열기를 억제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억제는 오래가지 않았다.
과학에 대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과학’이야말로 ‘종교와 반동 세력’에 대한 ‘사회 진보(Social Progress)’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이념적 주장을 결코 효과적으로 반박하지 못하였다. 복고(Restoration)라는 기획은 한편으로는 고조되는 민족주의(nationalism)에, 다른 한편으로는 재차 발생하는 자유주의적 반란에 의해 압도당하였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세력 블록들로 나뉘었고, 이 전쟁은 낡은 정치 질서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20세기에 들어, 우파는 좌파의 방식을 본떠 동일한 규칙 안에서 싸우기를 시도하였다. 그렇기에 문화적·정치적으로 철저히 패배한 결과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의 우리 중 다수는, 과거 기독교 유럽에서나, 혹은 완전히 이질적인 대륙 위에서나, 그다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은 티파티(Tea Party)가 인종차별적이고 극단적 자본주의자들로 가득 찼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은 그들이 익히 아는 적이다. 그러나 드 메스트르나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의 우파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전통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그 전통이 구현되었던 옛 세계만큼이나 낯설게 느껴진다.
좌파(Left)의 목표는 자유(liberty), 평등(equality), 그리고 박애(fraternity)이다. 좌파의 전술은 이러한 자유·평등·박애의 실현을 촉진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혁명(revolution)은 좌파의 전술이다. 그것은 좌파적 자유의 실현에 장애가 되는 기존의 제약들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폭군보다는 무엇이든 나은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파가 질서를 개선하고자 하는 입장이라면, 그것을 파괴하려는 자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과연 이치에 맞는 일인가?
좌파가 사회운동(social activism)이나 시위(protest) 전술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념적 결속(ideological solidarity)의 이미지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이 전술들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의 목소리로 말하는 사회'라는 인상을 조성하고, 국가가 그 공동의 의지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데 있다. 여기에는 국가의 정당성이 바로 그 공동의 의지로부터 기원한다는 암묵적 전제가 깔려 있으며, 이는 자코뱅주의(Jacobinism)의 핵심 원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물론 단기적 성과는 존재한다. 티파티(Tea Party)는 2010년 중간선거에서 자당 후보들을 당선시키는 데 있어 꽤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결국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 곧 ‘진짜 미국(Real America)’을 대변한다는 주장은 그것 스스로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다. 만일 '진짜 미국'이 ‘침묵하는 소수(Silent Minority)’가 된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고령 백인 유권자들은 공화당(GOP)에 투표하도록 겁을 먹고 몰릴 수는 있겠지만, 이 전략의 성공은 민주당 지지자들의 기권에 달려 있다. 혁명적 철학을 나침반으로 삼았다면, 그 끝자락에서 혁명의 종착점에 도달하더라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진리(Truth)와 질서(Order)의 대리자들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
놀랍게도, 우파는 혁명적 전술 교본에 수록된 거의 모든 전략을 시도해 왔지만, 정작 자기 전통을 참조하는 일은 단 한 번도 고려하지 않았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파에게 있어 정치적 정당성의 기준은 신과 자연의 법칙에의 일치이다. 훌륭한 통치자란 혼돈을 질서로 바꾸는 자이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내란 상태였던 로마 세계에 진입하여 평화와 번영, 제국의 영광을 남기고 퇴장하였기에 위대한 통치자였다. 이사벨라 여왕(Isabella)과 페르디난드 왕(Ferdinand) 또한, 점령과 분열로 찢어진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스티야(Castile)와 아라곤(Aragon)의 왕관을 통합하여 재정복된 가톨릭 스페인을 건설함으로써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성취는 지성과 의지 모두의 강인함을 요구한다. 자연법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성과, 그것에 따라 실천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정치·사회 질서를 수립하는 데 필요한 의지. 이 두 덕목을 구현한 통치자에게는 ‘천명(Mandate of Heaven)’이 부여된다.
드 메스트르(de Maistre)에게 있어, 이것이야말로 정당성의 기준이었다:
“신은 문자 그대로 왕들을 만든다. 신은 왕족(royal races)을 준비시키되, 그 기원을 가리는 안개 아래에서 그것들을 숙성시킨다. 그러한 존재들은 마침내 영광과 존엄을 머리에 이고 등장하며,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정통성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징표이다. 사실, 그들은 마치 자연스럽게, 스스로 생겨난 듯이 출현한다. 강제적 수단도 없고, 외부의 명백한 의사결정에 따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장엄한 평온(magnificent tranquility)이며, 그것을 언어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나는 이러한 기원을 묘사함에 있어 ‘정통한 찬탈(legitimate usurpation)’이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물론 그 표현이 지나치게 대담하지 않다면—시간은 이와 같은 기원을 서둘러 신성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고 만일 우파의 주장대로 그것이 참이라면, 우파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길은 권력을 가질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메테르니히(Metternich)와 그의 동맹자들은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당하고 지속 가능한 정치 질서를 확립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결국 그들은 패배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 우파는 그 시대에 자신들이 행사하던 권력에 걸맞은 자격을 결코 회복하지 못하였다.
러셀 커크(Russell Kirk), 샤를 모라스(Charles Maurras), 율리우스 에볼라(Julius Evola) 등의 지적 통찰은 그 자격을 부여하지 못했다. 경제에 집중하는 것 또한 그러하지 못했다. 티파티(Tea Party)의 대중 집회와 시위는 그 자격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서구 종교 전통의 최고 형식들을 대중주의적 후예들의 반지성주의로 대체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오직 진리에 대한 인식, 그리고 그 인식을 실제로 적용하는 것만이 우파로 하여금 권력을 감당할 수 있게 만든다.
몰드버그(Moldbug)는 그의 『Gentle Introduction』에서 우파가 권력을 감당할 자격을 갖추는 절차(Procedure)를 서술한다. 흥미롭게도, 그 내용은 우파 내 타 사상가들의 주장과도 상당히 상응한다. 『호랑이를 타고(Ride the Tiger)』에서 에볼라(Evola)는 체제 내부의 정치 참여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남아 있는 유일한 길이라 주장한다:
“상황을 정확히 인식한 후, [차별화된 인간 유형(the differentiated type)]은 오늘날 '정치(politics)'라 불리는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과 초탈의 감정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원칙은 고대에서 일컬어졌던 바와 같이 아폴리테이아(apoliteia)가 될 것이다… 나는 이미 언급한 바 있으나, 그는 오늘날 자기 존재의 진정한 본질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사상, 동기, 목표들이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한다. 그에게 도덕적 정당성과 기반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요구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경험적이고 세속적인 층위에서 단지 사실(facts)로서 주어질 뿐이다.”
에볼라(Evola)의 신념은, 남아 있는 유일한 길은 오로지 진리 추구와 자기 수양에 전력을 집중하는 것뿐이라는 데 있었다. 그의 저술들을 통해 알 수 있듯, 어느 시점에서 이 ‘은밀한 엘리트(hidden elite)’가 결집하여 전통적 질서(Traditional order)의 회복에 참여하게 될 것임이 암시된다. 다만 이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불분명하며, 다만 반(反)전통 질서의 붕괴를 초래할 일종의 위기 상황이 먼저 발생해야 한다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제시된다.
에볼라가 불확실성을 전제로 했던 반면, 몰드버그(Moldbug)는 명확한 절차(Procedure)를 제시한다. 먼저, 그와 에볼라는 모두 아폴리테이아(apoliteia)가 반동주의자(reactionary)에게 바람직하다는 데 동의한다. 몰드버그는 이를 강철의 규칙(the steel rule)이라 부른다:
“강철의 규칙(steel rule)의 논리는 간단하다. 반동주의자로서, 당신은 정치 권력이 인간의 권리라고 믿지 않는다. 이와 같은 태도를 타인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당신 자신이 이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은 ‘위대한 거부(the great refusal)’를 최초로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원칙과 전술 양면에서, 수동주의자(passivist)는 정부에 영향을 미치거나, 정부를 강제하거나, 정부에 저항하려는 모든 활동—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과의 관여를 거부한다. 그는 공공 정책을 수립하려는 사고 자체에 혐오감을 느낀다…
이러한 관계를 정신적으로 명확히 하는 탁월한 방법은 ‘시민(citizen)’이라는 표현 대신 ‘신민(subject)’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불행한 우연으로 영국 제도권(British Isles)의 거주자라면, 이미 ‘subject’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배우며 자란다. 그런 경우라면, 이보다 더 굴욕적인 표현—예컨대 ‘소작농(peasant)’—으로 옮겨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조차 당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과대평가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곧 투표를 하지 않는 것(단, 체제에 의해 명백히 승인된 인물에게 경의의 의미로 투표하는 경우는 예외일 수 있다), 정당에 가입하지 않는 것,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것, 피켓을 들지 않는 것, 청원에 서명하지 않는 것 등—모든 정치적 개입의 거부를 의미한다. 단, 예외는 두 가지가 존재한다. 첫째, 개인이 권위 보유자에게 청원을 제출하는 것은 허용된다. 이는 자신과 그들 사이의 불평등을 인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둘째, 정치적 행동이 자기방어의 필요로서 수행될 수 있다. 당신이 사는 도시가 약탈자들에게 점령당했다면 복고(Restoration)는 무의미해진다. 물론 그런 일이야말로 오히려 도시가 각성할 결정적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 원칙이 정부에 적용된다는 점은 자명하나, 대학이나 언론, 기타 비국가 행위자들—즉 ‘성당(Cathedral)’의 구조를 구성하는 존재들—에 대해 적용할 때는 판단이 훨씬 더 모호해진다. 판단력의 개입은 필수적이며, 모든 사안에 대해 단일하고 최선의 해답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정치적 행동주의에 참여하는 개인들과의 접촉은 명백히 가치 있는 일일 수 있다. 그것은 #게이머게이트(#GamerGate) 사례가 보여주듯 그러하다. 여느 행동주의처럼, 게이머게이트도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티파티(Tea Party) 또한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던 바 있다. 어쩌면 그들은 잠시 동안 자신들의 공간을 해방시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공간을 지속적으로 해방 상태로 유지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들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을 유지하려면, 그들은 반드시 적을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는 것 아닌가? 바로 이 지점에서 상황은 흥미로워진다. 몰드버그(Moldbug)는 강철의 규칙(steel rule)을 일종의 선(zen)으로 묘사한다. 수십 년 전, 에볼라(Evola)는 『현대 세계에 대한 반란(Revolt Against the Modern World)』에서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천명(Mandate of Heaven)]은 무위로써 행한다(爲無爲, wei wu wei)… 단지 존재함 그 자체만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바람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 행위는 자연의 힘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 힘이 해방될 때, 평범한 인간들의 세력은—마치 바람에 휘어지는 풀잎처럼—그 아래에서 굽어지게 된다.”
몰드버그(Moldbug)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접근법의 효과를 설명한다. 강철의 규칙(steel rule)은, 무엇보다도, 우파가 대성당(Cathedral)과의 소모적인 갈등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만든다. 우파가 자신을 좌파의 ‘반대편(opposition)’으로 정의하는 데 점점 더 매몰되면서, 우파 내부의 지적 응집성조차 형해화되었다. 초자본주의자인 로스바디언(Rothbardians)과 보호무역주의자인 뷰캐넌주의자(Buchananites), 민족주의적 정체성 정치 지지자들과 세계주의적 자유무역론자들, 권위주의자들과 자유지상주의자들—이러한 모든 모순들이 '우파(right-wing)'라는 하나의 범주 아래 무리하게 묶여 있다.
미안하지만,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s)들과 무정부자본주의자(ancaps)들이여—좌파는 하나의 클럽이다. 그 안에 있든가, 아니면 완전히 배제되든가, 양자택일뿐이다. 그리고 당신들이 업워디(Upworthy) 같은 매체에 등장하는 일은 거의 보지 못했다.
강철의 규칙은 자원을 해방시킨다. 행동주의(activism)는 당신을 정치 경쟁의 시간표에 묶어두며, 다음에 유행할 해시태그에 반드시 논평해야만 ‘시의적절한’ 존재로 간주된다. 반면, 수동주의(passivism)—즉, 몰드버그가 말하는 아폴리테이아(apoliteia)—는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어 진리 자체의 리듬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한다. 천 번의 리트윗보다 열 명의 사유하는 이들이 더 낫다. 우리는 ‘양’을 위해 ‘질’을 희생할 특권을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 자원들은 무엇을 위해 투입되어야 하는가? 대단히 간단하다. 합당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합당해지는가? 그것은 진리에 대한 인식과 그 적용을 통해서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길은 명확하다. 우리는 진리의 탐구에, 특히 현대성(modernity)이 부과하는 인식의 맹목성 때문에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진리들의 탐구에 헌신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몰드버그는 그가 구상한 ‘안티버시티(Antiversity)’ 개념을 소개한다. 그것은 진리를 봉사 대상으로 삼는 궁극적 기관이며, 그 사명은 옳거나, 그렇지 않다면 침묵하는 데 있다. 안티버시티의 첫 번째 과업은, 정신병적 상태에 빠진 대성당의 두뇌를 대체하는 것이다. 정치의 가장 비극적인 점은, 어느 시점에서나 지도자들이 당을 진리에 맞추는 것을 멈추고, 진리를 당에 맞추려 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으며, 어떤 체제가 그다음을 계승하든 간에 마찬가지 시대를 다시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 세대가 감당할 문제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감당해야 할 몫이 이미 충분하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우파의 승리가 좌절된 것은 섭리적(providential)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역사상 처음으로 진리 봉사기관(Truth-service)이 실효성을 갖출 수 있는 핵심 자원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인터넷이다. 정보 전달의 비용은 극소화되었고, 탐구와 조사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용이하며, 출판에 드는 비용은 사실상 무의미한 수준에 이르렀다. 기존 학계를 대체하는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수월해졌다. 다양한 측면에서, 안티버시티(Antiversity)는 칸 아카데미(Khan Academy)나 코세라(Coursera) 같은 프로젝트를 대규모화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 추측은 생략하겠다.
안티버시티는 인간의 생존과 진보에 관련된 모든 주제를 포괄적으로 연구해야 하며, 대성당(Cathedral)으로부터 가치를 가진 모든 것을 탈취하고, 그 잔해는 진리를 저버린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경고하는 폐허로 남겨야 한다. 생물학에서 형이상학에 이르기까지, 진리의 탐구는 이제 학계의 손아귀로부터 강제로 탈환되고 있다.
신반동주의(neoreaction)의 삼분법(trichotomy)은 이 지점을 위한 유용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하나의 흐름은 인간 생물다양성(human biodiversity)과 부족 단위의 차별화(thedish differentiation)에 주목한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capitalism)라는 현상이 어떻게 인류의 진보를 촉진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세 번째는 종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그 이면에 존재하는 철학적 진리들을 분석한다. 향후 안티버시티가 수행해야 할 과업에는 연구 구조의 제도화, 인간적 편향과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한 견제와 균형 체계의 구축(가능하다면 동료평가(peer review)의 수준을 넘어설 것)이 포함된다.
이러한 지식이 축적된 이상, 우파의 과업은 그것을 강철의 규칙(steel rule)을 견지하며 적용하는 것이다. 권력을 쟁취하려는 시도는 좌파의 방식이며, 우파는 권력을 창조하고 투사(project)하는 쪽이다. 이는 기본적인 경제학의 원리이기도 하다. 우파가 건설하는 제도는 회복력(resiliency)과 안정적이고 번영하는 질서의 공급 능력 면에서 보다 우수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시대는 생태적 취약성, 정치적 불안정, 경제 체제의 전환 등 다층적인 위기를 안고 있다. 합당한 존재가 될 기회는 충분하다. 가정을 지탱할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하라. 지성 있는 이들이 자금을 맡기고 싶어하는 주체가 되어라. 과학과 기술 발전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네트워크를 구축하라. 위기를 견뎌내라. 지금 시리아에 있는 사람들 중 몇이나,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었기를 바라고 있겠는가?
이러한 지식은 개인적 수준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 어떤 식단이 당신의 신진대사에 더 적합한가? 그렇다면 식단을 바꿔라. 어떤 조직 구조가 자원을 더 효과적으로 배분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사업에 적용하라. 어떤 종교가 자연법과 신법에 대해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예배당으로 향하라. 죽은 백인 남성들(Dead White Men)의 저서를 읽어라—지성이 담긴 책이라면 누구의 것이든 상관없지만, 이들의 저작은 문학적 사회 정의(Literary Social Justice)의 불길 속에 휩싸이기 전에 구출할 필요가 있다.
우파는 항상 세계를 미시적 질서와 거시적 질서가 대응하는 구조로 이해해왔다. 당신이 황제는 아닐지라도, 여전히 한 가정의 아버지일 수는 있다. 당신이 전사-성인(warrior-saint)은 아닐지라도, 내면의 성스러운 전쟁(holy war)은 여전히 싸워야 할 것이다.
이 과정은 상당한 시간을 요할 것이며, 그 자체로도 충분히 중대한 과업이기에, 그 모든 것의 궁극적 목적에 대해서는 한 문장 이상 할애하지 않겠다. 바로 이것이다: 궁극적 목적은 대성당(Cathedral)보다 압도적으로 더 나은 존재가 되어, 그 영향력을 사회의 ‘최고의 두뇌와 정신들’ 위에서 대체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그들을 따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신반동주의(neoreactionary) 사상가들이 제시하기 시작한, 우파의 길이다. 이 길은 신념의 도약(leap of faith)을 요구하는가? 분명 그렇다. 우리는 실패할 수도 있다. 만일 합당한 존재가 되는 일이 쉬운 일이었다면, 좌파가 옳고 우파는 틀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0여 년 동안 좌파의 게임 규칙으로 경쟁하려 했던 전략은 실패해왔으며, 그 전략의 광기 역시 점점 더 자명해지고 있다.
행동주의는 혁명가들에게 맡겨라. 진정한 권위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우파의 몫이다.
이것은 혁명이 아니다. 바퀴를 내던지고, 땔감으로 써버려라.
이것은 승화(ascension)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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