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도덕의 계보』中 노예도덕·기독교·유대인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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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대들은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그대들은 승리하기 위해서 2000년을 필요로 한 저 사건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말인가? ··· 그렇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는 사건은 조망하고 통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승리하기 위해서 2000년을 필요로 한] 그 사건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복수와 증오, 유대적인 증오 ― 일찍이 지상에서 유례(類例)가 없던 가장 깊고 숭고한 증오, 즉 이상을 창조하고 가치를 변조하는 증오 ― 의 저 나무줄기에서 똑같이 전례가 없는 어떤 것이, 즉 하나의 새로운 사랑이, 모든 종류의 사랑 중에서 가장 깊고 숭고한 사랑이 자라난 것이다. 이것 또한 다른 어떤 줄기에서 자라날 수 있었겠는가?
··· 그러나 그러한 사랑이 복수에 대한 저 갈망을 참으로 부정하는 것으로서, 즉 유대적 증오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생겨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이다! 이러한 사랑은 저 증오의 나무줄기로부터 그것의 꽃봉오리로서, 가장 순수한 광명과 넘치는 햇빛 속에서 의기양양하게 뻗어나가는 꽃봉오리로서 자라난 것이다.
이 꽃봉오리는 저 증오의 뿌리가 모든 심오하고 사악한 것 속으로 갈수록 더 깊고 탐욕스럽게 파고들었던 것과 동일한 충동과 함께 빛으로 넘치는 드높은 왕국에서 저 증오의 목표인 승리와 약탈물, 유혹을 추구했던 것이다.
사랑의 복음의 화신인 이 나사렛의 예수.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에게 축복과 승리를 가져다준 이 ‘구세주’38) ― 그야말로 바로 가장 섬뜩하고 저항하기 어려운 형태의 유혹이자 이상을 유대적으로 혁신하는 것과 저 유대적 가치로 이끄는 유혹이며 우회로가 아니었던가?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이스라엘에 적대하는 자이자 이스라엘을 해체하는 자로 보이는 바로 이 구세주라는 우회로를 통해서만 그들의 숭고한 복수심이 궁극적으로 목표했던 것을 달성한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전체가 실제로는 자신의 복수의 도구였던 것을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것처럼 전 세계 앞에서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었던 것, 이와 함께 ‘세계 전체’가, 즉 이스라엘의 모든 적대자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바로 이 미끼를 물게 된 것,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복수 전략이자 멀리 내다보면서 지하에서 사전계획에 따라서 서서히 손을 뻗치는 복수의 은밀한 흑마술(黑魔術)이 아닌가?
다른 한편 정신이 아무리 섬세해도 이보다 더 위험한 미끼를 생각해낼 수 있을까? 유혹하고 도취시키고 마비시키고 타락하게 만드는 힘이란 면에서 ‘신성한 십자가’라는 저 상징에, ‘십자가에 매달린 신’이라는 저 전율할 만한 역설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신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잔인함의 극을 달리는 저 신비에 비견할 만한 것이 있을까?
··· 적어도 확실한 것은, 이러한 표시 아래(sub hoc signo)39) 이스라엘이 복수하고 모든 가치를 전환함으로써 모든 다른 이상, 모든 고귀한 이상에 대해서 지금까지 거듭해서 승리를 거두어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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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신은 왜 아직도 더 고귀한 이상에 대해서 떠들고 있는가! 사실을 직시하자. 민중이 승리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노예’라거나 ‘천민’이라고 불러도 좋지만 어떻든 그들 민중이 승리한 것이다.40) 그리고 이러한 승리가 유대인들에 의해서 일어났다고 한다한들 어떻단 말인가! 그들보다 더 큰 세계사적 사명을 지닌 민족은 일찍이 없었다.
‘주인’은 제거되었고 평민의 도덕이 승리했다. 이러한 승리를 [귀족의] 피에 독을 섞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이러한 승리로 인해 종족의 혼합이 일어났기 때문이다).41) 그 점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귀족의] 피에 독을 섞는 것이 성공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류의 (즉 ‘영주들’로부터의) ‘구원’은 극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모든 것은 현저하게 유대화되거나 그리스도교화되고 있으며 혹은 천민화되고 있다(어떤 표현을 사용하든 상관없다!). 이 독이 인류의 몸 구석구석까지 침투하는 것은 멈출 수 없는 것으로 보이며, 그것의 속도와 행보는 이제부터는 갈수록 더 완만하고 미묘해지며 조용해지고 신중해져도 좋겠다. 시간은 충분하다.
··· 이러한 목표에 비추어볼 때 교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연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교회 없이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까? Quaeritur[이 점이야말로 우리가 문제 삼아야만 하는 것이다]. 교회는 저 독의 침투를 촉진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하고 저지하는 것 같다. 그런데 바로 이 점 때문에 교회가 아직도 유용할 수도 있다.
··· 교회는 사람들을 유혹하기보다는 오히려 소외시키고 있다. ··· 교회가 없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자유로운 정신이 될 것인가? 우리에게 거슬리는 것은 교회이지 그것의 독이 아니다. ··· 교회를 도외시한다면, 우리 역시 그것의 독을 사랑하는 것이다. ···”
이것이 어느 ‘자유로운 정신’42)이, [위에서 보듯이] 자기 자신을 충분히 드러냈던 한 정직한 동물이, 더 나아가 한 민주주의자가 내 말에 덧붙인 에필로그이다. 그는 그때까지는[에필로그를 덧붙이기 전까지는]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내가 침묵하자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시점에서 침묵해야 할 점이 많다.
38) 니체는 『안티크리스트』에서 예수의 참된 정신과 제도화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보고, 제도화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고안해낸 사람을 바울이라고 여겼다. 니체는 예수의 진정한 정신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첫째로 예수를 구세주로 보는 바울과 제도화된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반대로 예수는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으며 서로 동등하다고 믿었다. 또한 예수는 모든 싸움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을 시기하거나 적대시하는 마음을 버릴 것을 가르쳤다. 심지어 예수는 악에도 저항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애초부터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가르쳤으며, 그 결과 얻어지는 평화, 온유함, 모든 사람을 형제처럼 사랑하는 상태에서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을 발견하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예수는 완전한 행복이 죽어서 가는 ‘하느님 나라’ 내지 천국에 있다고 보지 않고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고 보았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는 것이다.
둘째로 이 점에서 니체는 예수가 위대한 상징주의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오직 내적 실재만을 실재로서, 즉 ‘진리’로서 간주했고, 자연적인 것, 시간적인 것, 공간적인 것, 역사적인 것은 모두 상징으로서만, 즉 비유를 위한 수단으로만 이해했다. 예를 들어 위에서 본 것처럼 ‘하느님 나라’ 내지 ‘천국’이라는 것은 마음의 한 상태일 뿐이며 ‘지상을 넘어서’ 존재하는 특정한 공간적인 차원이나 ‘죽음 후에’ 오는 특정한 시간적인 차원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리고 ‘신의 아들’, ‘아버지인 신’, ‘천국’은 모두 어떤 심리적 상태를 가리키는 상징일 분이다. ‘신의 아들’이라는 말은 모든 사물이 성스럽게 총체적으로 변용되는 더없는 행복의 마음 상태로 진입하는 사건을 상징하고 있으며, ‘아버지인 신’이라는 말은 이러한 마음 상태 자체, 즉 영원과 완성의 느낌을 상징하고 있다.
셋째로 ‘기쁜 소식을 가져온 자’인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택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모든 중상과 탄압에 대해서 저항하지 않았고 분노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권리를 변호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사랑했다. 예수가 인류에게 남긴 것은 특정한 교리 체계가 아니라 이러한 삶의 모습이었다.
니체는 예수의 죽음 이후에 득세하게 된 실제의 그리스도교는 바울에 의해서 정립된 것이라고 보면서 예수와 대비해서 바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첫째로 바울은 예수와는 정반대 유형의 인물이었으며, 증오와 증오의 환상과 증오의 냉혹한 논리를 만들어내는 데 천재였다. 바울이 자신이 품고 있던 증오의 희생물로 삼은 자가 예수였다. 예수의 삶과 모범, 가르침과 죽음, 그리고 복음 전체를 바울은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바울은 사회의 지배층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서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교리를 만들어냈다. 예수를 이렇게 이용하기 위해서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했고 예수를 보통 인간이 아닌 구세주로 격상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예수 이전의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구세주인 예수의 출현을 위한 전사(前史)로 보이도록 왜곡했다. 즉 구약성서의 모든 예언자가 ‘구세주’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만들었다.
둘째로 바울은 존재 전체의 중심을 존재의 배후로, 즉 내세의 피안 세계로 옮겨놓아 버렸다. 이와 함께 그는 예수의 부활을 날조했다.
셋째로 바울은 힘을 갖고 싶어 했으며 이에 따라 대중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가축으로 만들 수 있는 개념과 가르침과 상징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개념과 가르침과 상징 중에 영혼의 불멸이나 최후의 심판과 같은 것들만큼 좋은 수단은 없었다.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에서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신의 권력을 위탁받은 자들로 간주되는 바울을 비롯한 성직자들의 지배에 복종해야만 했다.
예수의 정신과 바울이 정립한 그리스도교의 교리 사이의 차이를 니체가 강조하고 있고 언뜻 보기에는 니체가 예수를 긍정적으로 본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심지어 니체 연구자 중 어떤 이들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 예수와 동일하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나체는 예수를 ‘숭고한 것과 병적인 것과 유치한 것이 기이하게 결합하여 있는 가장 흥미 있는 데카당’이라고 보고 있다. 니체는 예수의 정신을 생리적인 허약함으로 인해서 현실에 대한 모든 저항과 투쟁을 포기하고 내면적인 평화로 도피해 들어가려고 하는 정신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도덕의 계보』 8절에서 예수의 이념도 바울에서 보이는 유대적인 증오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정화(精華)라고 보고 있다. 예수 역시 궁극적으로는 가난한 자, 병든 자, 죄인에게 축복과 승리를 가져다준 ‘구세주’로서, 예수의 이른바 사랑의 복음에는 지상의 강력한 자들에 대한 원한이 승화된 형태로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39) in hoc signo vinces, “이 표식에 의해 그대는 승리하리라”라는 말을 빗대어 한 말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하늘에서 이 문자들로 둘러싸인 십자가를 보았다고 한다. 그는 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40)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민주주의자나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은 민중의 승리가 이미 확실해진 이 시대에는 니체가 내세우는 주인도덕이나 고귀한 이상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41) 종족의 혼합이 일어났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승리하면서 귀족계급과 평민계급의 혼인이 확산하고 두 계급의 피가 혼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귀족의 피에 독을 섞는다는 것도 귀족의 피가 평민계급의 피에 의해서 더럽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42) ‘자유로운 정신’이란 니체가 원래는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로써 어떤 사태를 특정한 이념이나 관점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정신을 가리킨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자유로운 정신은 교회를 비판하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신을 ‘자유로운’ 정신이라고 자처하고 있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그것은 그리스도교에 기원을 둔 민주주의나 사회주의 그리고 무정부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아직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정신이 아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자유로운 정신’은 니체를 향해서 이미 노예들의 승리는 기정사실이 되었기 때문에 더 고상하고 귀족적인 이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자유로운 정신’은 오늘날에는 교회가 민중의 승리를 촉진하기보다는 방해한다고 말하면서도, 이러한 방해가 오히려 자유로운 정신이 더 자유롭게 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점에서 이 ‘자유로운 정신’은 교회가 아직 유용할 수 있다고 본다. ‘자유로운 정신’은 교회와 대항하면서 자신들의 이념을 더 철저하면서도 더 일관성 있게 개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 ‘자유로운 정신’은 교회가 더 세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자유로운 정신’은 교회와 대결하면서 자신도 더 정치(精緻)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맥락은 다르지만, 니체는 『우상의 황혼』 「자연에 반(反)하는 것으로서의 도덕」 3절에서 심지어 자신의 사상이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도 교회와 그리스도교가 계속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관능의 정신화는 사랑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하나의 큰 승리다. 또 다른 승리는 우리처럼 적의를 정신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화는 사람들이 적을 갖는다는 것의 가치를 깊이 파악함으로써, 요컨대 사람들이 과거에 행하고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행동하고 생각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교회는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의 적을 섬멸하려 했다. 비도덕주의자들이자 반(反)그리스도교인인 우리는 교회의 존립을 우리에게 이로운 것으로 본다. ··· 정치에서도 적의는 이제 보다 정신적인 것이 되었고, ― 훨씬 더 현명하고 훨씬 더 사려 깊고 훨씬 더 관대하게 되었다. 거의 모든 정당이 반대당이 힘을 상실하지 않는 것이 자신을 보존하는 데 유리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 동일한 사실이 위대한 정치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이를테면 새로 건립되는 국가는 친구보다도 적을 더 필요로 한다. [다른 국가들과] 대립하는 가운데서만 그것은 자신을 필연적인 것으로 느끼게 되며 또한 대립하는 가운데서만 비로소 필연적인 것이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도덕의 계보』, 아카넷, 2021, 5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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