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도덕의 계보』 中 로마 對 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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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좋음[탁월함]과 나쁨[저열함]’. ‘선과 악이라는 두 쌍의 대립되는 가치는 수천 년에 걸쳐서 이 지상에서 가공할 투쟁을 벌여왔다. 그리고 두 번째 가치가 오랫동안 우세를 점한 것은 분명해도, 아직도 승패가 결정되지 못한 채 투쟁이 더욱더 고조되었고 이와 함께 더욱더 깊어지고 정신적인 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분열되어 있다는 것보다도 더 높은 본성과 더 큰 정신적인 본성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표지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 오늘날까지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투쟁의 상징은 로마 대 유대, 유대 대 로마라고 불린다. 오늘날까지 이러한 투쟁, 이러한 문제 제기,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는 이러한 대립보다 더 큰 사건은 없었다.

 

로마는 유대인을 자연에 반()하는 것 자체와 같은 것으로, 즉 자신과 반대되는 괴물로 느꼈다. 로마에서 유대인은 인류 전체에 대한 증오의 죄를 지은 자들69)로 간주되었다. 인류의 구원과 미래를 귀족적 가치, 즉 로마적 가치의 무조건적인 지배에 달린 것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유대인은 로마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가? 이것을 우리는 무수한 징표에서 읽어낼 수 있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복수심의 폭발을 기록한 모든 문서 가운데서도 가장 끔찍한 것인 저 요한묵시록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덧붙여 말하지만, 증오에서 비롯되고 증오로 가득 찬 이 책에 사랑의 사도70)의 이름을 올리고 사랑에 빠진 듯 열광적인 저 복음71)을 바로 이 사도의 것으로 만든 그리스도교적 본능의 심오한 논리적 일관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아무리 많은 문헌상의 위조가 필요했다 하더라도 그 안에는 일말의 진리가 담겨 있다.72))

 

로마인들은 정녕 강하고 고귀한 자들이었다. 그들보다 더 강하고 고귀한 자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런 자들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도 없다. 그들이 남겨놓은 모든 것, 모든 비문(碑文)은 그것에 쓰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로마인들과는 반대로 유대인들은 원한으로 가득 차 있는 뛰어난 성직자적 민족이며 민중적인 도덕의 건립에서 유례없는 천재성을 발휘한 민족이다. 유사한 재능을 지닌 민족들, 예를 들어 독일인들과 중국인들을 유대인들과 비교해보면 어떤 민족이 제1급이고 어떤 민족이 제5급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로마와 유대 중 결국 어느 쪽이 승리했는가? 유대가 승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늘날 로마에서도 로마에서뿐 아니라 지구의 거의 절반에서, 다시 말해 인간이 길들여져 있거나 길들여지기를 바라는 모든 곳에서 사람들이 모든 최고의 가치의 표본으로 여기면서 머리를 숙이는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해보라. 누구나 다 알다시피 세 명의 유대인 남자와 한 명의 유대인 여자(나사렛 예수와 어부 베드로, 양탄자 짜는 자73)였던 바울,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이다.

 

대단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로마가 패배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에 고전적 이상의, 모든 사물에 대한 고귀한 가치평가 방식의 화려하면서도 무서운 부활이 일어났다. 자신[로마] 위에 세워진 저 새로운 유대화된 로마, 즉 유대 교회당의 모습을 하고 교회라 불렸던 로마74)의 압박 아래 있던 로마 자체가 마치 가사 상태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꿈틀거렸다.

 

그러나 유대는 (독일과 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이라 불리는 저 근본적으로 원한에 가득 찬 천민들의 운동 덕분에 곧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종교개혁의 필연적 결과로서 교회가 다시 부흥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고전 로마라는 묘지에 감돌던 정적조차도 다시 지배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함께 종교개혁 당시보다도 훨씬 더 결정적이고 깊은 의미에서 유대는 고전적 이상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두었다. 유럽에 존재했던 마지막 정치적 고귀함, 17세기와 18세기 프랑스의 고귀함은 민중의 원한본능 아래 붕괴되고 말았다. 일찍이 지상에서 이보다 더 큰 환호, 이보다 더 시끄러운 열광의 함성이 들린 적은 없었다!

 

이런 소란의 와중에서 실로 너무나도 엄청나고 너무나도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즉 고전적 이상 자체가 살아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전대미문의 화려함으로 인류의 눈과 양심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다수의 권리라는 원한에 찬 낡아빠진 허위적인 구호에 대항하여 그리고 인간을 저하시키고 비천하게 만들고 평균화하며 몰락하게 만들고 쇠퇴하게 만들려는 의지에 대항하여 소수의 특권이라는 가공할 만한 매혹적인 반대 구호가 예전보다 훨씬 더 강력하면서도 더 단순하게 그리고 더 집요하게 울려 퍼졌다!

 

일찍이 존재했던 인간들 가운데 가장 단독적이면서도 가장 뒤늦게 태어난 자인 나폴레옹이 다른 길로 이끄는 마지막 안내자처럼 출현한 것이다.75) 그리고 그에게서 고귀한 이상 자체가 육화된 문제로서 살아난 것이다. 이것이 어떤 종류의 문제인지를 잘 생각해보라. 비안간과 초인의 종합인 나폴레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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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Tacitus, Annals, XV. 44. TacitusHistories V. 5에서 인류를 증오하고 적대시하는 죄의 발상지는 유대 땅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한 죄를 범한 것은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인들이라고 보고 있다.

 

70) 요한을 가리킨다.

 

71) 요한복음을 가리킨다.

 

72) 니체는 여기에서 요한복음요한묵시록의 필자를 동일한 자로 보는 것은 오류라고 보고 있다. 이 점에서 니체는 문헌상의 위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시에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사랑은 결국 요한묵시록에서 표현되고 있는 증오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이 점에서 니체는 그러한 동일시에는 일말의 진리가 있다고 말한다.

 

73) 사도행전183절에 따르면, 바울은 양탄자를 짜는 사람이 아니라 텐트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74) 바티칸, 즉 로마 가톨릭을 말한다.

 

75)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나폴레옹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대적 이념과 문명을 자신의 적으로 여겼던 나폴레옹은 이러한 적의를 통해서 자신을 르네상스의 가장 탁월한 계승자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는 고대적 본질의 전체, 아마도 그것의 가장 결정적인 것, 화강암 조각 같은 것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니체, 즐거운 학문, 362.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도덕의 계보, 아카넷, 2021, 8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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