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선악의 저편』 중 여성에 관한 글
프리드리히 니체 -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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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중략)... 이렇게 말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상당히 후하게 칭찬한 셈이니, 여기서 내가 ‘여성의 본질’에 관해 약간의 진리를 털어놓는 것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말하자면 그것이 다만 나의 진리임을 독자들은 벌써 알고 있을 것이다.
232. 여성은 독립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여성의 본질’에 대해서 남성들을 계몽시키려 하고 있다—이것이야말로 유럽의 전체적인 추악화 가운데 가장 나쁜 진보 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여성의 학문과 자기 폭로의 어리석은 시도가 무엇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가! 여자는 수줍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여자에게는 허다한 현학, 천박함, 교사, 건방진 태도, 오만, 무분별함이 숨겨져 있다—어린아이를 가르칠 때의 여자를 보라!—이런 것들은 사실 남자에 대한 공포 때문에 틀어박혀 억제되고 있던 것이다. 슬프다. 만약에 ‘여성에게 있어서의 영원한 따분함’—하기야 그것은 넘치도록 있지만!—이 주저 없이 몰려올 때면! 또 여자가 우아하며 장난스럽고, 기분 전환이나 매사 유쾌한 총명함과 기교를 잊고, 유쾌한 욕망에 대한 재치를 근본적이고 원칙적으로 잊어버리기 시작할 때면! 성스러운 아리스토파네스에 대고 맹세하건대 이제 여성들의 소리는 드높다! 여자가 남자에게 최초 또는 최후에 무엇을 요구하는가는 의학적인 징후로 확실히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한다. 여성이 오늘날처럼 학문에 종사하려는 것은 참으로 가장 나쁜 취미가 아닐까?
지금까지는 다행히도 지능 계발은 남자의 일이었고, 남자의 천분이었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기들끼리’만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여성들이 ‘여성’에 관해서 쓴 것을 읽고, 여성이 자신에 대한 계발을 원하고 있는가, 또 원할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해 상당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쓴다는 것으로 여성은 자기를 위한 새로운 화장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건대 자기를 꾸미는 것은 영원한 여성의 속성이 아닐까? 만약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여자는 그것으로 자기를 두렵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배하려는 것이다. 여자는 진리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여자에게 진리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여자에게 진리처럼 인연이 멀고, 싫고, 꺼릴 만한 것은 애당초 없다. 여자에게 가장 큰 기교는 거짓말이며, 주된 관심사는 겉모습과 아름다움이다. 우리 남자들이여, 고백하자. 우리는 여자의 바로 그러한 기술과 본능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생물에 붙어서 육체를 쉬고 싶은 것이다. 그녀들의 손, 시선, 부드러운 어리석음 아래 있을 때 우리의 엄숙함과 무게와 깊이도 하찮은 어리석음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물어보자. 일찍이 여자 스스로 여자의 머릿속에 깊이가 있고, 여자의 가슴에 정의가 있다고 인정해 본 적이 있는가? 또 지금까지 ‘여자’를 가장 경멸한 것은 여자이며, 남자들이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 아닌가? 우리는 여자가 계몽으로 인해 더 이상 수치를 드러내는 일이 계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일찍이 교회가 “여자는 교회에서 침묵하라”고 선언한 것은 여자에 대한 남자들의 배려요 아낌이었다. 또 나폴레옹이 말 많은 스탈 부인에게, “여자는 정치에 관해서는 침묵하라”고 일러준 것도 여자의 이익을 위해서였다—나는 오늘날 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여자 편이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여자에 대해 침묵하라!”
233. 여자가 ‘여자 자체’에 관해 무언가 유리한 증거라도 될까 해서 롤랑 부인이나 스탈 부인이나 조르주 상드를 끌어낸다면—그것은 본능의 부패를 나타내는 것이다. 악취미를 드러낸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굳이 더 말하지 않겠다. 남자들이 보기에는 위에서 언급한 세 사람은 우스운 ‘여자 자체’이며—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바로 그것이 여성 해방과 여성의 자치권에 대한 최고의 반대 논증이다.
234. 부엌에서의 어리석음, 가정부로서의 여자! 그들은 가족이나 주인의 식사를 마련함에 있어서 얼마나 생각이 없었던가! 여자는 식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정부가 되고자 한다! 만일 여자가 생각을 하는 생물이라면, 이미 수천 년 동안 가정부 노릇을 했으니 가장 위대한 생리학적 사실도 발견하고 또 의료 기술도 획득했을 것이다! 서투른 가정부에 의해서—부엌에서의 완전한 이성 결핍으로써, 인류의 진화는 보다 오랫동안 늦어졌고 방해받았다. 오늘날에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이상 한창때인 여성들한테 한마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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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 ‘남자와 여자’라는 근본 문제를 잘못 생각해서, 거기에 존재하는 심각한 대립과 그들 사이에 영원히 적대시하는 긴장의 필연성을 부정하는 자가 있다. 그리고 남녀간에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교육과 평등한 요구와 의무를 꿈꾸는 자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천박한 두뇌의 전형적인 한 징후이다. 이러한 미묘한 점에 대한 그 천박—그 본능의 천박!—을 드러낸 사상가는 모두 어딘가 좀 의심스럽고, 스스로 자기의 본능을 폭로한 것이라고 보아도 된다. 이런 사람은 결국 인생의 모든 문제, 또 장래의 근본 문제에 대해 너무도 근시안적이고, 아무런 깊이에도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반해 그 정신에서나 욕망에서나 깊이를 갖고, 가혹할 줄도 알며, 엄격할 수도 있는 관용과 인내의 깊이를 가진 남자는 여성에 대해서는 오직 동양인의 방식으로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이런 사람은 여자를 소유물로서, 챙겨둬야 할 재산으로서, 또 봉사하기 위해 태어나 봉사하는 중에 자기를 완성하는 것으로서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시아의 가장 뛰어난 후계자이며 제자였는데, 그들 또한 이 점에서는 아시아의 위대한 이성과 아시아의 우월한 본능에 기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실로 그리스인은 호메로스에서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문화가 진보하고 힘이 증대해 감에 따라 여성에 대해서는 점점 엄격하게, 즉 동양적으로 되어갔다. 이것이 얼마나 필연적으로, 논리적으로, 인간적으로 바람직한 일이었던가에 대해 우리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한다.
239. 어느 시대에서도 현대처럼 여성이 남성에게 존중을 받은 적은 없었다—이것은 노인에 대한 경의를 잃어가는 동시에 민주주의의 경향과 그 근본적 취향의 발로인 것이다. 이 존경이 남용되기에 이른 것도 이상할 건 없다. 여성은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요구하는 법을 배워, 마침내는 이러한 존경을 거의 모욕이라 느끼고 권리 쟁탈을, 실로 투쟁까지도 선택하게 된다. 요컨대 여성은 품위를 잃어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취미를 잃어가고 있다. 여성은 남성을 두려워할 줄 모르게 된다. 그러나 ‘두려워하기를 잊은’ 여자란 먼저 여성다운 본능을 포기한 것이다. 남자에게 두려움을 불어넣은 것이, 다시 말해서 남자 안에 있는 ‘남성’이 이미 요구되지 않고 육성되지 않을 때 여자가 내닫는 건 당연하며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해가 안 되는 점은 바로 그것으로 해서—여자가 퇴화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현상이다. 우리는 이 점을 제대로 보아야 된다!
산업적 정신이 군사적·귀족적 정신을 압도한 오늘날에 여성은 경제적이고 법률적인 독립을 찾아 사무원이 된다. ‘여사무원’이야말로 성립되어 가고 있는 현대 사회의 출입문에 걸린 표어이다. 이처럼 여자가 새로운 권리를 획득하고, ‘주인’이 되려 하고, 여성의 ‘진보’를 적은 깃발과 현수막을 들고 있는 동안 그 반대의 사실이 실현되고 있다. 즉 여성은 퇴보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래 유럽에서 여성의 영향력은 그 권리와 요구가 커진 데 비례해서 줄어들고 있다. ‘여성 해방’은 (비단 천박한 남자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여성으로부터 요구되고 촉진되고 있는 한에 있어서도 여성다운 본능이 점점 약화되고 둔화되어 간다는 주목할 만한 증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운동에는 어리석음, 거의 남성적인 어리석음이 있으며, 품위 있는 여성이라면—그런 여성은 언제나 합리적이지만—마음속 깊이 부끄러워해 마지않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그 영역에서야말로 가장 승산 있는 후각을 잃고 만다. 여성에게 특유한 무기를 다루는 연습을 게을리한다. 이전에는 예절 바르고 섬세하며 재치 있는 겸허를 가졌었는데, 이제는 남자 앞에 나서서 심지어는 ‘책에까지’ 손을 대려 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무언가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이상이 담겨 있는 줄 믿고, 또 뭔가 영원하고도 여성적인 것을 믿고 있는데, 여자는 잘났다는 듯이 뻔뻔스러운 행동을 해서 이 남자의 신앙을 부숴버린다. 남자는 여자를 귀엽고 별나게 야성적이면서도 마음에 드는 애완동물처럼 기르고, 보살피고, 보호하고, 너그럽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여자는 종알종알 지껄여서 그런 생각을 지워버린다. 지금까지의 사회질서에서 여자는 노예적이며 농노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또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에 격노해서 서투른 수법으로 증거들을 모아들인다(마치 노예제도가 높은 문화, 또 문화 향상의 조건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반증이라는 듯이). 만일 이러한 모든 것이 여성 본능의 붕괴요 박탈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본디 학식이 높은 암나귀 중에서도 충분히 어리석은 여성의 친구와, 여성을 타락시키는 자가 있어 여성을 설득시켜 그처럼 여성미를 벗겨버리고, 유럽의 ‘남성’, 유럽적 ‘남성미’가 앓고 있는 모든 어리석은 행동을 흉내 내게 한다. 그래서 여자를 ‘일반적 교양’에까지, 그뿐만 아니라 신문을 읽고 정치를 논하는 데까지 끌어내리려 하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저기서 자유사상가나 문학자로까지 만들려 하고 있다. 도대체 심각하고 신을 부정하는 남자에게 경건성 없는 여자가 혐오스럽고 또 우습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거의 곳곳에서 그지없이 병적인, 또 위험한 음악(독일 최신 음악)으로 여자의 신경을 오염시키고, 여자를 나날이 신경질적으로 만들고, 건강한 어린애를 낳는다는 여자의 처음이자 마지막 천직을 불가능하게 해버린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여자를 ‘교양 있게’ 하려 하고, 또 ‘나약한 성향’을 교양을 통해 강화하려 한다. 사람들이 역사가 그렇게도 절실히 가르쳐 온 것을 잊어버린 탓일까. 바로 인간의 ‘교양화’와 인간의 약화—의지력의 약화, 분열, 병은 늘 걸음을 함께해 온 것이 아니었던가. 또 세상에서 더욱 강하고, 영향력이 컸던 여자들(바로 나폴레옹의 어머니도 그러했다)은 바로 그녀들의 의지력 덕분에—학교 교사 덕분이 아니라!—남자에 대한 힘과 우월을 얻었던 게 아닌가. 여자가 존경심을, 또 때로는 공포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자연적인’ 그녀이며, 이것은 남자의 것보다도 더 자연스럽다. 그 장갑 아래 숨겨진 짐승의 발톱인 것이다. 그리고 유치한 이기주의인 것이다. 그 가르치기 어려운 성질과 내적인 야성이다. 또한 그 욕망과 덕의 이해하기 어려운 속성과 그것들의 폭넓은 활동 범위이다. 그처럼 무서우면서도 위험한 예쁜 고양이인 ‘여자’가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그녀가 어떤 생물보다도 고민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사랑을 구하고 환멸을 느끼도록 운명지워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공포와 동정, 지금까지 남자는 이 감정을 가지고 여자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도취시키면서 마음을 찢어내는 비극 속에 한 걸음 내딛고 있었다—그런데 무엇인가? 여성의 매력 상실이 시작되고 있는 건 아닌가? 여성의 지루함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오, 유럽이여! 유럽이여! 우리는 그 뿔 달린 짐승을 알고 있다! 그것은 그대에게는 언제나 그지없이 매혹적이며, 또 위험을 되풀이해 오기도 했다. 이 옛이야기가 다시 한번 ‘역사’가 될지도 모른다—이제 또 한 번 엄청난 어리석음이 그대를 지배하고, 그대를 끌고 가버릴지 모른다! 이 어리석음 밑에는 그 어떤 신도 숨을 수가 없다! 있는 것은 하나의 ‘이념’, 하나의 ‘근대 이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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