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시우스 몰드버그, 샘 올트먼은 횡설수설하는 바보가 아니다 [요약본]

샘 올트먼은 횡설수설하는 바보가 아니다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 · 2013년 3월 13일


요약: 샘 올트먼은 횡설수설하는 바보가 아니다. 그게 바로 무서운 점이다. 사회의 가장 지적인 엘리트들이 횡설수설대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 사회는 아마도 이미 멸망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중략)...샘 올트먼은 천재가 아니며, 분명히 미친 사람도 아니다. 그는 그냥 기업가다. 즉, 타고난 리더다. 그리고 그런 존재는—특히 지금처럼 절망적인 시대에는—코카인을 들이마시는 입자물리학자들로 가득 찬 볼리비아 감옥 하나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거나, 최소한 그래야 할 존재다.


내가 특히 섬뜩하게 느끼는 것은, 올트먼의 횡설수설하고 어리석은듯한 소리가 겉보기에는 아주 냉정하고 건전하며 이성적인 말처럼 보이고 들린다는 점이다. 직접 읽어보라. 당신도 동의하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합의된 현실과 실제 현실 사이의 단절에 있다. 실제로 우리는 타고난 리더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우리를 어디로도 이끌 수 없다. 그들은 실제 현실이 아니라 ‘합의된 현실’ 속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조이스틱은 전원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합의된 현실이 허튼소리일 때, 냉정하고 건전한 이성도 결국 허튼소리가 된다. 그리고 허튼소리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


정말 그런가? 어리석은 허튼소리가 냉정하고 건전하고 이성적인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고? 한번 시험해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의미에서 나는 1950년대보다 지금의 세상에서 사는 편을 훨씬 더 선호한다. 인터넷이 없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가속도는 느낄 수 있지만 속도는 느낄 수 없듯이, 사람들은 삶의 절대적 질보다는 매년의 ‘개선 속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하다. 그래서 세상이 절대적으로 더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쾌락의 러닝머신 위에서 멈춰 서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 대부분은 매년 삶이 더 나아지기를 원한다—그런 의미에서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 쾌락적응)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중략)...샘 올트먼이 신경 쓰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가 관심을 두는 것은 하나의 숫자다. 그는 이 숫자가 현재 약 2 정도인데, 사실은 5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숫자를 "성장"이라 부른다.


...(중략)...다시 말하지만, 이 놀라운 숫자 — 즉 GDP 성장률 — 은 20세기식 경제 통치 전통의 핵심 요소다. 


...(중략)...성장은 "GDP"라 불리는 어떤 수치의 변화를 의미한다. 오스트리아학파-중상주의(Austro-mercantilist)의 관점에서 GDP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AGDP(actual GDP, 즉 실제로 측정된 수치)이고, 다른 하나는 FGDP(fudged GDP, 즉 AGDP에 어떤 수수께끼의 보정계수를 곱한 값)이다. 20세기 경제학은 특유의 미묘하고 세련된 아이러니 감각으로, AGDP를 "명목 GDP"라 부르고 FGDP를 "실질 GDP"라 부른다.


...(중략)...AGDP를 이해해 보자. 행성의 경제 생산을 어떻게 측정하는가? 경제 주체들을 "소비자"와 "생산자"로 자의적으로 구분한다—즉, 일반 소비자와 기업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AGDP는 단순히 모든 기업이 모든 일반 소비자에게 판매한 총액이다.


...(중략)...나는 이 접근법이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성장"이라는 베일에 싸인 신비를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천박한 도시적 현실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더 많이 소비하라, 동지들!"을 의미한다. 만약 성장이 정의상 좋은 것이라면, 소비는 정의상 좋은 것이다.


...(중략)...AGDP를 어떻게 증가시키는가? 단 두 가지 방법만이 존재한다. 첫째, 소비자들에게 더 많은 달러를 주는 것이다. 둘째, 그들을 덜 검소하고 더 낭비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중략)...그러나 잠깐—왜 AGDP를 증가시켜야 하는가? 왜 더 많은 소비가 더 적은 소비보다 본질적으로 더 나은가?


이 질문에 대한 두 가지 답변이 있으며, 이는 경제의 목적에 대한 당신의 이해에 따라 달라진다. 첫 번째는 오스트리아학파가 견지하는 잘못된 입장이며, 케인지언들이 당신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을 때 내세우는 입장이다. 즉, 경제 활동의 목적이 인간 욕망의 충족이라는 믿음이다.


...(중략)...이 잘못된 입장은 우리를 FGDP의 길로 이끈다.


...(중략)...현실적으로 우리가 답하려는 질문은 "미국은 어떻게 통치되어야 하는가?"이다. 따라서 우리는 국가의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다. 주권은 보존되므로, 국가는 언제 어디서나 절대적이며 전능하다. 그러므로 국민들의 쾌락적 만족 — 실제로 그들은 국가의 노예들이다 — 은 목적이 될 수도, 되어서는 안 된다.


...(중략)... 나는 전제군주정—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현실의 형태—이 곧바로 전체주의 정부를 의미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미국 정부 역시 전제정치에 속한다. 개인적으로 미국 정부에 호의적인 입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우라늄 광산에 수용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20세기의 전형적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전체주의는 안정적이고 무력화될 수 없는 전제군주제 국가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극도로 취약하여 그 적을 억압하기 위해 비상한 조치를 취해야만 하는 정부에서 나타난다. 이것이 루이 14세와 스탈린의 차이 중 하나다. 미국 정부의 가장 큰 미덕은, 그 권력 독점이 루이 14세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그것은 내가 멍청한 블로그에 무엇을 쓰든 전혀 개의치 않아도 된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 세계의 실제 정부를 분석하고자 한다면, 그 재정 분석은 정치적 현실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정치적 현실이란 ‘시민’이 정부의 소유주가 아니라, 오히려 정부의 자산—다시 말해 노예—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적 체제에 더 가깝고 사이먼 리그리(Simon Legree)적 체제에서는 멀어진 정권을 갖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후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분석은 국가의 재정적 이해관계와 인간으로서 우리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킨다.


전제군주제 국가의 재정적 이해관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산 자산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국가의 자산은 (a) 토지와 건물, (b) 장비, 그리고 (c) 인적 재산으로 구성된다.


...(중략)...기술적 발전을 제외하고, 2013년의 미국이 1950년의 미국보다 더 가치 있는 국가인가를 묻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그것은 이렇게 묻는 것이다. 평균적인 미국인은 1950년의 조상들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었는가? 즉, 미국 정부는 자국의 인적 자본을 육성했는가, 아니면 낭비했는가?


예를 들어 보자. 이 개인—이 자산, 이 노예—은 더 근면한 노동자인가? ...(중략)... 그는 더 많은 지식을 갖추었는가? 더 도덕적이고, 신체적으로 더 건강하며, 더 현명하고 신중한가? 더 나은 아버지이자, 더 나은 어머니인가?


다시 말하지만, 그 답은 자명하다고 본다.


...(중략)... 반대로, 2013년의 미국인은 메스암페타민 중독자나 깡패, 방탕한 여성, 무가치한 신탁금 세대의 한심한 게으름뱅이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중략)... 주목할 만한 점은, 다시 한번, 당신의 이익과 당신의 정부의 이익이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해석이다. 당신은 헤로인 중독자가 되고 싶지 않다. 워싱턴도 자기 노예들이 헤로인 중독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당신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 더 많이 알고, 더 신뢰할 만하고, 더 유능한 사람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될수록, 당신은 더 가치 있는 자본 자산이 된다.


...(중략)... 우리 대부분은 해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우리는 — 어쩌면 잘못된 확신일 수도 있지만 — 이것이 결국 더 큰 쾌락적 보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적어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이 목표는 아니다. 목표는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자체다.


...(중략)... 내가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은 150년도 더 전에 칼라일이 이미 말했던 것이다. 특히 『차티즘』에서 그렇다. 쾌락 원칙의 절정은 불멸의 "돼지 철학"이다. 간단히 말해, 칼라일은 인간과 짐승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 쾌락 효용의 극대화를 삶의 방식으로 삼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짐승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중략)... 이제 우리는 '성장'이라는 신비를 공략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경제적 쾌락주의가 그렇게 피상적이고 손쉽게 논박될 수 있는 철학이라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성장'을 그토록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가?


모든 기만과 회피를 제쳐두고 보면, 20세기 정부들이 직면한 기본적인 경제 문제는 실업이다. 실업의 원인은 단순하다. 산업 경제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경제적으로 쓸모가 없다. 그들은 생산적 자산이 아니라 부채다.


...(중략)... 예를 들어, 샘 올트먼에게 미국 경제 전반에 대한 전권이 주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의 임무는 생산을 유지하면서 비용을 절감하는 것이다. 그가 취할 방법은 다음과 같다. 부동산 중개인, 변호사, 의료 청구 사무원 등과 같은 화이트칼라 잡무를 제거하고, 인간 산업로봇을 실제 산업로봇으로 대체하며, 다른 모든 수단이 실패할 경우에는 두바이식으로 병영에 수용되고 렌틸콩만으로 연명하는 저비용 인도인 노동력으로 고비용 미국인 노동력을 대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들을 공격적이고 독재적으로 적용한다면, 최소한 10년 동안 매년 미국의 고용률을 5~10%씩 줄일 수 있으리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까? 실제로 특이점이 가까워질수록 노동의 미래는 점점 분명해진다. 아무리 먹여 살리기 저렴하더라도, 일정한 지능지수 기준 이하의 인간은 경제적으로 부담이 된다. 전통적인 비숙련 육체노동—정원 관리나 집안 청소 등—은 여전히 일부 영역에서는 생산적이다. 아마도 이런 상태는 앞으로 10년 내지 20년 정도는 더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기계가 더 똑똑해질수록—그리고 실제로 더 똑똑해진다고 가정한다면—그 기준선은 계속 높아질 것이다. 결국 고용할 가치가 있는 인간은 샘 올트먼과 그의 친구들뿐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마저도 해고될 것이다. 보편적 실업은 곧 특이점의 정의다.


이제 순수한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여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쾌락만을 추구하는 '돼지 철학자'로서의 전제군주제 국가는 매우 단순한 해답을 제시한다. 스탈린의 말처럼, "사람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 이 잉여 인간 로봇들은 낡은 실험용 쥐처럼 단순히 처분될 수 있다. 이를 '해결책 A'라고 부르자.


이제 해결책 B로 넘어가 보자.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는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일이라고? 대체 누가 일을 하고 싶어 하는가? 일은 정의상 쾌락에 반하는 것이다. 만약 일에 부정적 효용이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에 노동이 불필요해지고, 인간의 노동 없이도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문제라는 말인가? 그것은 내게 전혀 문제로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승리로 들린다.


해결책 B의 문제는, 우리가 이미 그것을 꽤 광범위하게 시도해 보았다는 데 있다. 마트에 갈 때마다 해결책 B를 볼 수 있다. "직불/신용" 버튼 옆에는 "EBT(역주: Electronic Benefit Transfer. EBT 버튼은 계산대 단말기에서 결제수단을 선택할 때, 정부 보조금을 이용해 결제하는 사람들을 위한 버튼을 가리킨다.)"라고 적힌 버튼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해결책 B 버튼이다. 미국에는 반쾌락적 노동의 비효용을 넘어, 해결책 B의 눈부신 미래로 들어간 도시들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의 이름은 "디트로이트"다.


해결책 B는 인류 문명의 정점이 아니라, 그 파괴로 드러난다.


...(중략)... 해결책 A와 B를 제외하면, 이 문제에 대한 모든 해법은 비생산적인 인간들이 일하거나 그 비슷한 어떤 행위를 하도록 국가가 강제로 시키는 형태를 띤다. 예를 들어, 오큘러스 리프트(Oculus Rift)와 같은 기술의 등장으로 우리는 이제 ‘해결책 C’라 부를 만한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물리적 구금과 가상적 풍요를 결합한 형태다. 실물 규모의 가상 환경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는 불분명하지만, 그 안에서도 분명 ‘노동’ 혹은 그 유사한 것이 포함될 것이다. 나는 해결책 C를 특별히 섬뜩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 하지만 나 혼자만 그런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그것은 A나 B보다는 덜 소름 끼친다. 만약 그것이 제대로 실행된다면, 사람들은 지금의 비참한 현실보다 훨씬 그것을 선호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도 든다.


해결책 A, B, 그리고 C를 넘어가면, 우리는 노동시장을 왜곡하여 이러한 인간적 부담들을 겉보기에는 정상적인 생산 체제 속으로 통합하려는 해법의 영역에 들어선다. 가장 명백한 접근법인 해결책 D는, 세계 각지의 정권들이 쿠푸가 어렸던 시절부터 실행해 온 것이다 — 즉, 농민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도록, 본래는 필요하지 않은 일을 시키며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피라미드를 짓는 것처럼 말이다.


...(중략)... 정치적으로 볼 때, '일자리 창출'을 재정 지원하고 운영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경제의 다른 부분과 구별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중략)... 따라서 AGDP를 팽창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민간 부문의 자본화를 확대하여 부의 효과를 유발하는 것이다. 나아가, 자본 자산에는 부채와 주식이라는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하므로, 이를 실현하는 방법 또한 두 가지가 있다. 부채는 상환해야 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 더 다루겠다. 따라서 AGDP를 팽창시키는 차선의 방법은 민간 부문이 더 많이 차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며, 최선의 방법은 주식시장과 부동산 가격을 상승시키는 것이다.


후자(역주: 주식시장 중심의 자산 인플레이션)는 정치적 관점에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절대적으로 최상의 방식, 즉 해결책 D-1이며, 그린스펀–버냉키(Greenspan-Bernanke) 시대 미국의 번영을 떠받친 핵심 수단이었다. 요컨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실제 현실이다. 전자(역주: 부채 중심의 부동산 경기부양)는 퍽 훌륭하다는 중국이 채택한 해결책 D-2이며, 놀랍게도 앙골라에서도 실행되고 있다.


단점이 없을까? 물론 있다. 자본화는 본래 실질적 자본을 반영해야 한다. 생산적 자산의 창출 없이 자본화를 확대한다면, 이는 문제를 쌓아두는 것과 같다. 과도한 시가총액은 핵폐기물과도 같다.


...(중략)... 미국에서 AGDP 인플레이션을 통한 일자리 창출의 결과는 악명 높은 FIRE 경제(역주: Finance, Insurance, Real Estate. 금융, 보험, 부동산)다. 이는 자산 가격 인플레이션만이 유일한 소득원인 중앙계획적 체제로, 이로 인해 창출된 고용은 멕시코 이민자들이 화강암 조리대를 설치하고, 백인 여성들이 서로에게 부동산을 판매하는 일 따위로 구성된다.


...(중략)... 결국 핵심은, 비즈니스 관점에서 볼 때 미국 경제의 문제는 매우 단순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돈을 잃고 있다는 점이다. 균형을 유지하며 계속 운영되기 위해서는 매년 약 1조 2천억 달러를 차입해야 한다.


...(중략)... 적자를 내는 경제는, 적자를 내는 식당처럼 끔찍하다. 재정과는 겉보기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여러 방식으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된다.


...(중략)... 더 나쁜 것은, 민간 부문의 부채가 너무 커져서 무한한 대출자를 상대로 빚을 내는 것조차 더 이상 시장 작동으로 간주될 수 없을 때, 우리는 다시 2008년과 같은 사태를 맞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중략)... 이 모든 것이, 단지 IQ 95 정도의 한계적인 고용 가능성을 가진 미국인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일자리를 갖지 못한다.


...(중략)... 그렇다면 다른 해결책이 있을까? 해결책 E? 혹은 F? 물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


...(중략)... 해결책 E는 우리가 지금까지 제외했던 요소, 즉 대외 무역이다. 현재 미국은 노동인구 중 37%나 달하는 끔찍한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연간 1.2조 달러를 차입하는 것 외에도 매년 6천억달러의 무역적자를 내고 있다. 즉, 미국 GDP의 약 3%에 해당한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만약 미국 정부가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처럼 외국 무역을 완전히 중단하고 항구를 폐쇄한다면, 미국 기업들의 총수입이 즉시 3% 증가하고, 따라서 고용도 그만큼 증가할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입 대체 산업은 호황을 맞고, 수출 산업은 침체를 겪겠지만, 순효과는 경기 호황이 될 것이다. 5천억 달러는 결코 무시할 금액이 아니다.


물론 쾌락적(생활 만족도) 효과는 부정적일 것이다 — 하지만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쾌락이 부족하다’는 것은 결코 우리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나은 결과도 얻을 수 있다. 수출은 유지하면서 수입만 없애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미 아시아의 무역 "파트너"들이 잘 이해하고 있는 세계 무역의 중상주의적 현실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프리드리히 리스트가 옳았다"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일까?


보복 조치로 인해 우리의 수출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가정해 보자. 그 경우, 수입은 0, 수출은 6,500억 달러가 되어, 미국 기업들의 순매출이 약 1.2조 달러 증가하게 된다. — 그것도 돈이 경제 내에서 여러 차례 재순환되며 발생하는 승수 효과(multiplier effect)는 계산에 넣지 않은 채로 말이다.


물론, 다시 한 번 생활 만족도에서는 어느 정도의 고통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지금 중국에서 사들이는 온갖 물건들을 모두 미국 내에서 생산해야 하므로, AGDP가 하룻밤 새 약 10% 증가하는 현상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역사상 유례없는 거대한 경제 호황을 의미하며, 오직 히틀러가 유사한 자급자족적 정책을 채택했던 제3제국 초기 시기 정도만이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즐거움은 줄어들겠지만, 번영은 커질 것이다.


미쳤다고 해도 좋지만, 나는 중상주의—애덤 스미스 이전까지 정치경제학의 통설에 불과했던 그것—가 또 다른 유대인 박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전(前)자유주의적 중상주의자라도 자유무역, 막대한 무역적자, 그리고 대규모 실업이 결합된 상황을 유대인 박해에 필적하는 수준의 경제적 광기로 여겼을 것이다.


...(중략)... 리스트의 말처럼, 자유무역은 강자의 무기다. 영국과 이후의 미국은 우리가 강할 때 자유무역을 채택했다. 하지만 인정하자, 우리는 더 이상 강하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무기로 스스로의 머리를 계속 내려치고 있다. 왜 그런가? 답은 간단하다. 어리석음 그 자체다.


그리고 그렇다, 또 하나의 해결책 F도 있다. 해결책 F는 우리가 결국 마주해야 할 현실, 즉 기술 제한이다. 사실 해결책 E는 해결책 F의 특수한 경우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해외 수입품은 생산 기술의 일종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의 관점에서 보면, 중국 노동자에 의한 생산과 로봇에 의한 생산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두 경우 모두 미국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는 생산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기술 제한이 실현될 수 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엄청나게 강력한 도구가 무능하고 부패한 지배자들에 의해 휘둘리는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보호무역을 구상할 때도 같은 문제가 존재한다. 이 두 가지 도구가 초래할 가장 명백한 결과는, 노골적인 약탈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기득권의 방어에 불과하다. 그 결과 보호무역은 나쁜 평판을 얻게 되었고, 기술 제한은 정책적 논의의 지평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문제는 도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휘두르는 자에게 있다. 미 정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며 교체되어야 함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처럼 무능하지 않고 실제로 이러한 도구를 다룰 수 있는 무언가로 대체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전면적인 기술 제한이나, 중세적 정체 상태, 저해상도의 아이패드, 구글 글래스 금지 따위가 아니다. 내가 말하는 해결책 F는 현대 산업이 쓸모없게 만들어버린 비숙련 인력에 대한 시장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고안된 표적형 기술 통제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들을 '죽여서 장기 매매용 고기'로 팔 만큼 정치적으로 잔혹하지 않기에, 그 대신 이들이 인간으로서—가능한 한 인간다운 방식으로—생존할 수 있는 방편을 제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의 영혼에 유익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반숙련 노동의 두 형태는 (a) 장인직과 (b) 농업이다. 과거에 존재하던 이들 직업에 대한 수요와 비교하면, 두 형태 모두 사실상 소멸되었다. 미국에 증조부모가 장인이나 농부였거나 둘 다였던 사람들이 얼마나 있으며, 그 가운데 약물중독자·폭력배 등은 얼마나 되는가?


하나의 표적형 기술 제한을 예로 들어보자. 플라스틱 장난감 금지다. 내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진다면, 그 장난감은 미국에서, 미국인들이 수공구를 사용해 나무로 만든 것이어야 한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a) 자녀를 위해 장난감을 구입해야 하는 부모들에게 재정적 부담이 늘어나 장난감 예산을 높여야 한다는 부정적 영향. (b) 더 이상 형형색색의 중국산 플라스틱 쓰레기로 장난감 상자가 채워지지 않게 된 아이들에게 쾌락적 만족의 감소라는 부정적 영향. (c) 중국 경제에 대한 부정적 영향—그러나 그 나라는 우리 나라가 아니므로 신경 쓸 이유가 없다. (d) 깎는 법만 알면 누구든 일할 수 있는 미국 목재 장난감 산업의 대규모 경제적 호황.


이러한 결과들을 고려하면서 어떻게 (d)가 (a), (b), (c)의 합보다 훨씬 크다는 내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예로 농업 노동을 들어보자. 산업적 농업 기술을 금지하기만 하면, 임의로 노동 수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오늘날 미국의 모든 빈민가 주민들은 유기농 슬로푸드 장인으로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허튼소리지만, 10번가의 좀비라도 젖소 정도는 짤 수 있다. 물론 그들에게는 노동의 대가를 지급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들이 일하지 않는 데에도 돈을 지불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우리에게, 그리고 그들에게 더 나은 일인가? 대체 뭐 하는 것인가, 미국?


이것이 비현실적인가? 물론 비현실적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합의된 현실과 완전히 불일치하며, 전적으로 기이하게 보일 정도다. 샘 올트먼조차 이를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 특히 부유한 이들은 사회적으로 잘 통합되어 있으며, 합의된 현실, 즉 완전한 허튼소리로 가득한 플라톤의 동굴 속에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실제 현실에서 나의 해결책 E와 F가 명백하고 자명한 선택이라고 단언한다. (물론 해결책 D의 부채 폭탄을 안전하게 해체할 방법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것은 다른 글에서 다룰 문제다.) 이 간극이 언젠가 메워질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20세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거의 확실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미친 이유에서든, 나는 여전히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는 충동을 느낀다. 아마 단지 내가 괴짜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원문 링크: 
https://www.unqualified-reservations.org/2013/03/sam-altman-is-not-blithering-idiot/


번역본 전문 링크: https://natsuken00.blogspot.com/2025/10/blog-post_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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