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는 오로지 군자만이 할 수 있다
흔히 공학(孔學)의 적통(嫡統)이 맹학(孟學)으로 이어진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오히려 한때 이단으로 몰렸던 순학(荀學)이 공학의 적통을 이었다. 순학은 소위 '치평학(治平學)'에서 출발한 공학의 이념과 이론을 정치하게 발전시킨 결정판이었다. 맹학은 '치평학'에서 출발한 공학의 기본취지를 망각하고 소위 '수제학(修齊學)'으로 함몰된 이단에 해당한다.
맹자보다 반세기 뒤인 전국시대 말기에 조(趙)나라에서 태어난 순자는 평소 유자(儒者)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의 이런 자부심은 곧 공학을 왜곡시킨 맹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이는 평소 순자가 출세에 목을 매는 무리를 '속유(俗儒)'로 질타하면서 당시의 천박한 학문풍토를 개탄한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속유'는 예의를 높일 줄도 모르면서 입만 열면 「시」와 「서」를 떠들고, 의관을 비롯한 몸가짐 또한 속인과 다를 바 없는 자들이었다.
'속유'는 입만 열면 「시」와 「서」를 떠들면서 속인과 다름없는 자들을 말한다. 순자가 볼 때 맹자 또한 '속유'에 불과했다. 수많은 무리를 이끌고 열국을 순회하며 입으로만 「시」와 「서」를 떠들면서 厚祿(후록)을 기대하는 맹자의 행동은 속인과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순자가 '속유'를 질타한 것은 기본적으로 공학의 적통을 이은 자신과 같은 유자들을 제대로 등용치 못하는 세태에 대한 울분과 무관치 않았다.
당초 '속유'에 대한 가장 희화적인 비판은 묵가에서 나왔다. 당시 순자는 유가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묵가의 '속유'에 대한 질타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묵가의 '속유'에 대한 가장 신랄한 질타는 「묵자」「비유 하」편에 나오는 다음 대목을 들 수 있다.
"음식을 탐하지만 일하는 데에는 너무나 게으른 나머지 추위와 굶주림으로 얼어 죽을 위험에 처해 있다. 여름에는 곡식을 구걸하고, 추수가 끝나면 장례식에 따라 다니며 자식과 손자들을 데리고 가 상례를 거들고 상가 음식으로 배를 채운다. 몇 개의 장례식을 치러 주기만 하면 족히 배를 채울 수 있다. 특히 부자 집에 상례(喪禮)가 난 것을 들으면 크게 기뻐하며 외치기를, '음식과 옷을 얻을 기회가 왔다'고 한다."
'속유'에 대한 통렬한 질타가 아닐 수 없다. 이를 통해 당시 '속유'들이 밥벌이로 '상례'를 이용하고 적극 이용했음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원래 공자시대 이전부터 상례는 매우 복잡하면서도 성대하게 치러지는 것이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져 있었다. 당시 유가는 '상례'와 '제례(祭禮)'의 의식에 정통해 있었다. 능력도 모자라고 궁핍한 '속유'들이 이를 익혀 밥벌이를 한 것은 크게 탓할 일도 아니었다.
공문의 세례를 받은 자 중에는 뛰어난 자들도 적지 않았지만 능력도 없으면서 뜻만 높고 마치 자신들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 속물들이 훨씬 많았다고 보는 게 사리에 맞다. 이런 속물들에게는 아무리 고아한 '치평학'일지라도 입신을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바로 이러한 속물들로 인해 유가는 점차 백성들로부터 멀어지고 말았다. 공학의 적통을 자처한 맹자가 공자사상 중 유독 '의(義)'를 강조한 결과 공학을 대표하는 '인(仁)'개념에 이를 삽입시켜 소위 '인의(仁義)' 개념을 만들어 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아야 한다.
맹자가 '인의' 개념을 만들어낸 것은 주희가 성리학을 주창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예기」에서 「중용」편과 「대학」편을 따로 추출한 뒤 「논어」 및 「맹자」와 더불어 '사서(四書)'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맹자는 공학의 정수인 '인'을 소위 '4덕(四德)'의 한 개념으로 축소시키고, 주희는 공학의 경전인 「논어」를 '4서'의 한 과목으로 축소시킨 것이다. 공자사상을 왜곡되는데 맹자와 주희 모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셈이다.
그러나 순자는 맹자와 마찬가지로 공자를 역대 성왕인 우ㆍ탕ㆍ문ㆍ무에 비유하면서 자신이 공학의 적통임을 자처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전형적인 유가에 해당한다. 「순자」「유효(儒效)」편에 나오는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그 증거이다.
"군주가 속인(俗人)을 등용하면 만승지국(萬乘之國: 대국을 지칭)일지라도 망하고, 속유(俗儒)를 등용하면 만승지국은 겨우 보존된다. 그러나 아유(雅儒)를 등용하면 백리지지(百里之地)라도 오래도록 보존되고, 등용한 지 3년이면 천하를 하나로 통일해 제후들을 신하로 삼을 수 있다. 만승지국에서 아유를 등용하면 국정과 제도문물이 안정돼 일조에 천하를 제패할 수 있다."
당시 순자는 공학의 적통을 이은 자신과 같은 사람을 등용해야만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맹자는 의도적으로 왕공을 낮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순자는 결코 이런 감정적인 논리를 전개하지 않았다. 진정한 군자는 천지와 동격인 까닭에 왕후(王侯)는 감히 그와 명예를 다툴 수 없다는 것이 순자가 전개한 논리였다.
순자의 논리는 맹자와 달리 극히 합리적인 이성에 기초해 있었다. 이는 그가 제자백가의 사상을 섭렵한 위에 유가사상을 새롭게 정리한 사실과 무관치 않았다. 그는 유가사상을 포함한 제자백가 사상을 집대성해 공학의 기본 이론을 완성시킨 전국시대 최후의 대유(大儒)였다. 이는 그의 예치(禮治) 사상 속에 도가의 무위(無爲)사상과 법가의 법치(法治) 사상이 모두 녹아 있다는 사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일례로 「도덕경」의 상선약수(上善若水)에 대한 탁월한 주석에 해당하는 「순자」「유좌(宥坐)」편의 다음 대목을 들 수 있다.
"공자가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자 자공이 공자에게 묻기를, '군자가 큰 강물을 보면 반드시 이를 관찰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라고 했다. 이에 공자가 대답키를, '무릇 물은 모든 생물과 두루 함께 하면서 무위(無爲)로써 하니 마치 덕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순자」「해폐(解蔽)」편에도 '무위'에 관한 뛰어난 해석이 나온다. 흔히 한비자가 「한비자」「해로(解老)」편과 「유로(喩老)」편에서 「도덕경」에 대한 최초의 주석을 가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한비자가 「해로」편과 「유로」편에서 「도덕경」에 대한 체계적인 주석을 시도한 것은 사실이나 '무위'에 대한 최초의 주석을 가한 사람은 순자였다. 한비자는 바로 순자로부터 영향을 받아 보다 체계적인 주석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는 게 옳다.
순자는 당시 학문이 가장 극성했던 제나라에 머물며 제자백가 사상을 두루 섭렵한 것은 물론 최강국인 진나라를 방문해 실상을 살피는 등 천하정세를 두루 살폈다. 수많은 제자들을 이끌고 천하를 주유하며 고오한 자세로 제후들 앞에서 왕도를 설파한 맹자와 극히 대조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순자사상이 정심(精深)한 내용으로 구성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이런 박람강기(博覽强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로 그의 경험은 맹자는 말할 것도 없고 공자 못지않게 매우 넓고도 다양했다. 이는 그의 사상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의 주장이 주관적이고 이상적인 맹자의 주장과 달리 매우 객관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모습을 띤 채 간명하면서도 정치(精緻)한 이론으로 정립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순자의 이론 중에는 경탄할 만한 게 매우 많다. 맹자에 의해 주관적인 사변론으로 추락한 공학의 이론을 다시 원래의 위치로 격상시킨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맹학이 마치 공학의 적통을 이은 것인 양 왜곡돼 왔다. 이는 기본적으로 송대에 성리학이 등장한 이래 근 1천여 년 넘게 맹학을 공학의 적통으로 선전한데 따른 것이었다. 본서는 '군자(君子)리더십'에 해당하는 '치평학'에서 출발한 공학의 적통이 맹학이 아니라 순학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원래 공자를 조종으로 하는 소위 원시유학(原始儒學)은 '치민(治民)'의 주역인 위정자의 바람직한 통치리더십인 소위 '군자리더십'을 연구하는 게 기본 목적이었다. 유학은 출발부터 바로 '통치엘리트의 리더십'을 연구하는데 그 기본취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실질적인 위정자인 군신(君臣)은 말할 것도 없고 예비 위정자인 수많은 사인(士人)들에게 공히 적용되는 리더십이기도 했다. 이를 현대의 리더십 이론을 적용해 표현하면 '군신공치(君臣共治)의 리더십'으로 표현할 수 있다.
통치는 기본적으로 국가공동체의 유지와 번영을 위해 일정 수준 강제성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국가공동체의 성원인 백성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흔쾌히 동참하는 것이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일지라도 백성의 복리 구현을 구실로 행복감까지 느끼도록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행복의 구현은 백성 개개인의 자발적인 참여가 전제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판단하는 선정(善政) 하에서만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춘추시대 말기에 활약한 공자는 신분세습의 봉건귀족 대신 학덕을 닦은 '군자'만이 위정자가 되는 새로운 통치질서가 도래키를 고대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통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전체 백성의 복리와 행복의 증진에 있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으로 '군자'가 국정을 담당할 때 비로소 달성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신분과 재산, 지위 등과 하등 상관없이 오직 학덕에 의해 차별화된 군자를 대거 배출키 위해서는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전제되어야만 했다. 적절한 교육을 받은 사람 중 가장 뛰어난 인물들을 전체 백성 중에서 발탁해 정치를 맡겨야 한다는 것이 바로 공자의 생각이었다. 그가 천하유세를 끝내고 귀국한 뒤 마지막 4년 반의 짧은 시간을 제자육성에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는 공자 사후 2백여 년이 지난 전한제국 때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제도화되었다. 당시 수많은 유생들이 공학을 배우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치열하게 '군자리더십'을 연마했다. 인간의 합리적인 이지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면서 오직 학덕을 연마한 '군자'가 통치하는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갈구했던 공자의 염원이 이때에 들어와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만은 확실하다. 이때 이후 황제와 관원은 말할 것도 없고 재야의 선비와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이구동성으로 '군자'를 들먹이며 통치는 오직 '군자'만이 할 수 있다는 공자의 언명을 절대명제로 받아들였다. 이후의 역사는 바로 '진군자(眞君子)'를 둘러싼 공방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초 공자가 생각한 '진군자'는 통치엘리트로서 나라와 백성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이끌 수 있는 리더여야만 했다. '진군자'는 치국평천하의 주체로서 새로운 문화를 창달하는 주체자로서의 자각과 책임감을 지니고 죽을 때까지 이를 위해 헌신하는 인물이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진군자'가 죽는 순간까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절대명제였다. 공자가 생각한 '군자의 치평' 이상은 이런 전제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경세제민(經世濟民), 이것이 바로 위정자로서의 '진군자'가 명심해야 할 기본 임무였다.
경세제민을 구현키 위해 군자는 천하의 흥망이 마치 자신 한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책임감을 지녀야만 했다. 숭고한 뜻을 실현키 위해 평생을 두고 몸이 부서지도록 애쓰는 작업을 죽어서야 그만두는 희생정신이 기본바탕이 되어야 했다. 이는 '지행합일'을 내세운 '군자리더십'이 제일의(第一義)이기도 하다. 유가사상에 인문주의 정신이 번득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경세제민을 위해 평생을 두고 끊임없는 노력하는 '진군자'의 모습은 구도자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것이다. 공자사상의 핵심어인 '인'을 흔히 '도(道)'와 연결시켜 '인도(仁道)'로 말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후대인들이 맹자와 주희의 영향을 받아 공자의 '도'를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 해석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공자가 말한 '도'는 '천도' 및 '천리'와 같은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현세의 치국평천하에 적용되는 통치원리를 말한 것이다.
공문의 '군자리더십'은 이론과 실천의 결합을 의미하는 이런 '도' 개념에 입각해 있었다. 군자리더십은 기본적으로 실천에 앞서 이론적 배경이 되는 학문이 전제되어야만 했다. 학문이 전제되지 않은 행동은 선동가에 불과할 뿐이다. 공자가 '학지(學知)'를 그토록 강조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순자에 의해 가장 극적으로 강조되었다. 「논어」의 첫 편이 「학이(學而)」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순자」의 첫 편이 「권학(勸學)」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보아야 한다.
공자의 '학지'는 '선지후인(先知後仁)'의 입장에 서 있다. 역대 제왕이 당대의 최고학문을 자랑하는 대신들과 죽을 때까지 하루 3차례씩 경전에 관한 강독모임을 가진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사대부들이 출사(出仕) 여부와 상관없이 재조(在朝)와 재야(在野)를 막론하고 평생을 두고 배우기를 그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는 공학의 본령이 바로 '치평'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치평'은 높은 수준의 학덕을 익힌 '군자'에 의한 통치를 말한다. 공자사상에 나타나는 '치평'이 학덕을 익힌 군주와 신하가 함께 정사에 참여해 상호 합의하에 국정을 다루는 소위 '군신공치(君臣共治)'를 기본전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군신 모두 학덕을 연마한 '군자'인 까닭에 상호 역할상의 상하관계가 있을 뿐이지 '치평'의 학덕에 상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치평'의 이치를 탐구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면에서 그들은 대등한 동반자이자 경쟁자였다. 사대부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을 하고 제왕에게 훈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의 학덕에 대한 자부심과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신분세습의 봉건질서에 대한 철저한 부인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했다. 훗날 일반 서민 출신이 제위에 오르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는 공자 사후 2백여 년이 지난 뒤 현실로 나타났다. 그 주인공이 바로 전한제국을 세운 한고조 유방(劉邦)이었다. 그는 보위에 오른 뒤 가장 학덕을 많이 닦은 사람으로 선전되었다.
이후 왕조가 교체할 때마다 적잖은 서민 출신 황제가 나타날 때마다 유방의 선례를 좇았다. 유가의 가르침에서 볼 때 이는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진한제국이 출현한 이후 고위관직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국가변란의 경우와 같이 제한되기는 했으나 황제에 이르기까지 취임과정상의 신분상 구별은 완전히 철폐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동양의 군주정은 봉건정과 대립되는 역사적 개념으로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의 공화정에 대응하는 신권(臣權)세력과의 '군자 경쟁' 위에서 출발한 까닭에 그 내용이 질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역사문화적 고찰을 생략한 채 군주정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반응 위에서 출발한 서양의 군주정 개념을 동양의 2천여 년에 달하는 군주정에 그대로 대입시켜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공자의 '군신공치' 이념은 기본적으로 그가 군신간의 하극상으로 인한 당시의 무정부상태를 가장 효과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와중에서 찾아낸 것이다. 공자는 권신의 발호를 견제키 위해 군주권의 회복을 꾀했지만 단순히 '존군(尊君)' 차원에서 이를 도모한 것이 아니다. 군신 양측이 통치권력의 두 주축이 되어 상호 보다 나은 통치를 위한 선의의 경쟁을 벌일 것을 바라는 차원에서 군권의 회복을 도모했던 것이다.
모든 것은 경쟁이 있어야만 질적으로 향상할 수 있다. 통치 또한 마찬가지이다. 군권이 배제된 신권과 신권이 배제된 군권 모두 독단에 빠질 수밖에 없다. 양측 모두에게 학덕을 연마한 '군자'가 될 것을 강력히 주문키 위해서는 양측을 일면 경쟁하며 일면 협력하는 주역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동양은 일찍부터 '신권'세력을 통치권력의 또 하나의 주체로 상정했던 까닭에 전통적으로 관원의 인품을 중시했다. 이로 인해 관원의 직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에 상응하는 요구 수준 또한 높아졌다. 반면 법가는 유가와 달리 전적으로 행정제도와 법률구조에 중점을 두었다. 동양이 당제국 때 이미 서양의 3권분립 제도보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소위 '3성6부(三省六部)' 제도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 유가와 법가의 공이 컸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민주정'은 왜 동양의 정치사상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것일까. 이는 기본적으로 중국을 위시한 동양에서는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철인과 같이 '군자'에 의한 통치를 당연시한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은 일찍부터 통치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동양에서 가장 바람직한 위정자의 전형으로 '군자'를 상정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는 신분세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학덕을 연마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것이다. 진시황에 의해 사상 처음으로 확립된 소위 '제왕정(帝王政)'은 바로 '군자정(君子政)'의 맹아로 볼 수 있는 소위 '사인정(士人政)'의 토대 위에 나타난 것이다.
'군주'를 '사인'과는 별개의 인물로 상정한 진제국이 무너진 뒤 사상 두 번째로 천하통일에 성공한 한제국은 군주정의 주체인 군주를 기본적으로 사인과 마찬가지로 군자의 일원으로 간주했다. 이후 이러한 전제는 수천 년 동안 하나의 불문율로 굳어졌다. 동양에서 수천 년 간에 걸쳐 군주정이 유지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요체가 바로 '군신공치'였던 것이다. '군자정'이 '군주정'과 '사인정'의 두 축에 의해 성립되어야 한다는 통념이 제도화된 것은 송대에 들어온 뒤였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동양에서 발달한 제왕정의 특징을 단순히 신분세습에 기초한 제왕의 통치에서 찾는 우를 범하고 있다. 유가사상이 유일무이한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은 이후 비록 제왕의 자리만 유일하게 혈통에 의해 이어진 것이 사실이나 여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우선 당시 태자와 세자 등의 후계자는 '군자리더십'을 가장 열심히 연마한 사람으로 간주된 점을 들 수 있다. 당시 이들 보위 후계자들은 '군자리더십'을 열심히 연마하지 않을 경우 보위승계가 부인되었다. 제왕정 하에서 유일하게 제왕의 자리만 신분세습에 의해 유지되었으나 이같이 엄격한 제한이 있었던 까닭에 수많은 왕자들은 후계자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학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중 유일하게 한 사람만이 보위에 오를 수 있었고 나머지 왕자들은 사실상 도태되는 운명에 처했다. 보위 승계에서 탈락한 왕자들은 비록 먹고사는 것에 아무런 문제는 없었으나 정무에 개입하는 것이 철저히 부인되었던 까닭에 개인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시대에 뛰어난 재주를 지녔던 조식(曹植)이 보위승계 경쟁에서 조비(曹丕)에게 밀린 후 불우한 삶을 산 것 등이 그 실례이다. 조선조 초기 동생인 성종에게 밀린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세월을 보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어떤 면에서 일반 서민의 삶만도 못한 삶을 살았던 셈이다. 한나 아렌트(H. Arendt)의 표현을 빌리면 이들 모두 '정치적 삶(bios politikos)'이 근원적으로 박탈된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치열한 경쟁을 뚫고 유일한 후계자로 낙점되어 보위에 오를지라도 결코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에 3차례씩 당대 최고의 학문을 자랑하는 신하들을 사실상 스승으로 삼고 매일 '군자리더십'에 대한 강독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는 남송대 때 신하들을 스승으로 삼아 제왕학을 학습하는 소위 '경연(經筵)'제도가 마련된 이래 간단없이 지속되었다. 당시 제왕들은 정당한 사유도 없이 이를 게을리 할 경우 이내 폭군으로 몰려 보위에서 비참하게 쫓겨날 수도 있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군주와 출사한 사대부는 말할 것도 없고 사환(仕宦)의 길에 나서지 않은 선비조차도 평생을 두고 '군자리더십'을 연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존재한데 따른 것이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군주와 신하를 막론하고 관직에 나아가 권력을 행사하는 정당성의 근거가 바로 '군자리더십'을 얼마나 제대로 배웠는지 여부에 의해 결정났던 것이다. 제왕정 하에서 군주의 자리는 군신들보다 훨씬 막중한 책무가 부여되어 있는 하나의 최고위직 관직에 불과했다. 제왕의 자리를 직책의 관점에서 '곤직(袞職)'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무한대의 책임을 지고 있는 관직이 바로 '곤직'이었던 셈이다. 이로 인해 제왕의 자리는 비록 극히 예외적으로 신분세습이 인정되기는 했으나 그 어떤 제왕일지라도 보위를 무사히 유지해 후손에게 넘겨주기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학덕 연마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었다.
사대부의 경우는 이런 기준이 더욱 엄정하게 적용되어 그 누구도 혈통에 의해 관직을 얻을 수가 없었다. 국가가 정해 놓은 일정한 시험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명문대가의 자손일지라도 고위관원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낙타바늘구멍보다 작은 관문을 뚫기 위해 어려서부터 치열하게 '군자리더십'을 연마치 않으면 안 되었다.
설령 피나는 노력 끝에 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했을지라도 이후 관직을 유지하면서 '군자리더십' 연마를 게을리 할 경우에는 결코 고위관직에 오를 수가 없었다. 직무를 수행하면서 공평성과 청렴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를 제대로 이행치 않아 독직(瀆職)에 연루될 경우 가차 없이 파면될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조차 다시는 사환의 길에 접어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군주와 사대부 모두 위정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이토록 엄중했던 것이다. 이는 서양인이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동양에서 인민들이 통치의 주체가 되는 '민주정'이 발달하지 않은 근원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두 번째로 서양식의 투표에 의한 민주정의 방법으로는 방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없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원래 시민으로 구성된 인민들이 투표에 참여해 입법과 사법, 행정 등을 담당하는 서양식의 민주정은 기본적으로 인구 10~30만 명 단위의 도시국가에서나 적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후대에 나타난 의회민주정은 봉건왕정을 대체할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마련된 것이다. 이는 직접민주정의 한계를 극복키 위해 나타난 로마의 공화정을 부활시킨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동양은 이미 기원전에 봉건질서를 무너뜨린 이후 이런 도시국가 단위의 국가체제를 유지한 적이 없다. 중국의 경우는 이미 기원전 3세기에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 방대한 영토에 관원을 파견해 다스리는 중앙집권체제를 시종 유지해 왔다. 이때 이미 수십만의 상비군이 변경에 배치되어 영토를 방어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이에 반해 서양은 18세기에 근대국가가 형성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한 번도 이런 정교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적이 없다. 서양은 고대 그리스 이래 시종 도시국가 체제를 유지한 까닭에 동양의 제왕정과 같이 중앙과 지방을 수비하는 상비군체제와 중앙에서 각 지역에 관원을 파견하는 중앙관료체제를 유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서양에서 투표제를 근간으로 한 민주정 즉 '민치'가 발달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원래 서양에서 발달한 민주정의 가장 큰 장점은 인민이 투표에 의해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사실 '투표(vote)'만큼 '인민에 의한(by the people)' 소위 민치(民治)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제도장치도 없다. 서양의 민주정은 '인민에 의한' 통치에 가장 큰 의의가 있는 만큼 '민주' 대신 '민치'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동양의 경우는 '인민에 의한'의 뜻을 구현한 서양의 '민주정'에 해당하는 통치체제가 존재한 적이 없다. 맹자가 말한 소위 '귀민경군' 사상은 인민이 주권의 주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인민의(of the people)' 소위 민주(民主)개념과 유사한 것이 사실이나 서양의 '민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인민을 위한(for the people)' 소위 위민(爲民) 개념은 고금동서를 통해 시종 존재한 것인 만큼 서양 민주정의 특징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동양 전래의 '위민' 사상이 서양보다 훨씬 철저했다고 보아야 한다.
당초 동양에서는 학덕을 연마한 군자만이 위정자가 될 수 있다는 불문율이 존재한 까닭에 서양식의 '민치' 개념이 용납될 여지가 없었다. '군치(君治)'와 '신치(臣治)' 개념은 있었어도 '민치' 개념은 존재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동양은 그 대신 수천 년 동안 '치민(治民)'의 내용 및 형식 등에 대해 줄기찬 검토를 해 왔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민치'로 상징되는 서양의 민주정은 자칫 천박한 포퓰리즘으로 타락할 경우 '폭군정' 못지않게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이는 인민의 투표가 얼마나 선동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분노한 플라톤이 군주정을 이끌고 있는 이웃나라인 스파르타의 통치체제에 눈을 돌려 「국가」를 저술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가 주장한 '철인왕(哲人王)'은 분명 동양의 '성군'에 준하는 이상적인 최고 통치권자를 의미했다.
동양은 원래 이미 기원전부터 '민본(民本)'의 의미로 '민주(民主)'라는 용어를 사용해 온 바 있다. 「춘추좌전」「노양공 31년」조에 나오는 '불사민주(不似民主)'와 「노선공 2년」조에 나오는 '민지주(民之主)' 등이 바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을 만한 군주를 비롯한 위정자들을 폭넓게 지칭했던 말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위정자는 결코 '민주'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서구의 '민치주의'는 투표가 요식행위에 그칠 경우 '폭민정'으로 전락할 소지가 많은데 반해 동양의 '치민주의'는 비록 형식적 민주주의를 배제키는 했으나 오히려 실질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는데 유효하다.
동양이 투표로 상징되는 '민치'에 기초한 '민주정'을 발달시키지 않은 것은 전문적인 통치자집단을 뜻하는 '군자'의 개념이 일찍부터 정립되어 평생을 두고 '군자리더십'을 연마토록 한 불문율이 존재한데 따른 것이었다. 나아가 통치의 대상을 '사해(四海)'로 상징된 천하의 전 인민을 대상으로 한 '치국평천하' 개념을 일찍부터 상정한 까닭에 투표를 통한 '민치'의 개념이 존재치 않았던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인민의 투표'를 근간으로 한 '민주공화정'만을 인류가 발전시킨 최상의 통치체제로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서양의 역사전개에 근거한 서양식 독단일 뿐이다. 나아가 민주정은 공화정과만 어울릴 수 있다는 생각 또한 잘못이다. 현재 중국의 최고 통치권자와 러시아의 대통령은 각각 선출방식에서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크게 보아 '선출된 황제(Elected Emperor)' 및 '선출된 짜르(Elected Tsar)'로 볼 수 있다. 한국의 대통령 역시 '선출된 왕(Elected King)'으로 간주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현대 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 체제가 최근 최고위직의 경우 임기 5년에 단 한 번의 연임을 허용하는 임기제를 채택한 점이다. 그간 중국은 투표를 통해 최고통치권자를 선출하는 서양식의 민주정을 채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등 뛰어난 통치시스템을 작동시켜 왔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임기제를 채택한 것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공자가 말한 '군신공치'의 특징에 임기제를 근간으로 한 민주정의 특징을 절묘하게 절충한 경우에 해당한다. 중국의 지속적인 발전을 약속하는 청신호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반해 우리는 비록 서양식 민주정의 가장 큰 특징인 투표제를 도입해 최고통치권자를 선출해 왔지만 제6공화국 이후 5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채택한 이래 오히려 계층간ㆍ지역간ㆍ세대간 갈등이 심화되는 부작용을 겪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과거 1천여 년 넘게 유지시켜 온 군주정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데서 그 원인의 일단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형식적인 민주주의에 함몰돼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실종케 만드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차분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이 임기제까지 도입해 '포퓰리즘'으로 상징되는 투표제의 문제점을 극소화한 가운데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는 모습은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동양은 역사적으로 성군이 출현했을 때의 치세에 관해 잘 알고 있는 까닭에 서양과 달리 군주정에 대해 무조건적인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만일 서양의 민주정에 공자가 말한 '군신공치'의 특징을 가미할 경우 군주정과 공화정, 민주정의 장점을 모두 살릴 수 있는 매우 탁월한 통치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
만일 유가의 정통이 맹자가 아닌 순자로 이어졌다면 중국을 비롯한 한국과 일본 등 동양이 얼마나 달라졌을지 상상키 힘들다. 순자는 그 시대의 다른 사상가들의 사상도 참고하고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법가나 명가와 같은 다른 학파의 사상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유가경전의 연구와 전승에 다른 학자들보다 큰 역할을 수행했다. 중국사상은 물론 한국사상과 일본사상 등 동양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순자」는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서의 집필은 맹파강원 문도들의 끝없는 수학(修學) 열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집필과정에서 격려를 아끼지 않은 송산(松山) 김홍기와 소평(素平) 이인한을 비롯한 맹파강원 문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본서의 출판은 인간사랑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상재(上梓)를 쾌히 승낙한 인간사랑 여국동 사장과 편집ㆍ교열에 애쓴 홍성례 편집장을 비롯한 편집진에게도 심심한 사의를 표하고자 한다.
2006년 11월, 정릉 학오재(學吾齋)에서 저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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