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랜드, 재-가속주의
재-가속주의(Re-Accelerationism)
2013년 12월 10일 / 닉 랜드
스스로 해체되어 버릴 만큼 너무 흐물흐물하고 실체 없는 '논증'을 겨우 포착하기 위해 따옴표 한 쌍 안에 퍼 담아야 하는 그런 것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나는 최근 들어 그 단어를 줄곧 써왔을 것이다. 가장 최근의 경우 중 하나는 찰리 스트로스(Charlie Stross)의 블로그 포스트인데, 그것은 스스로를 "정치적 사변"이라 칭하면서 회색빛 불가지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 안에서 실제로 제대로 맞물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 자체로는 나름 흥미롭다 — 특히 그것이 다른 무언가의 징후로 받아들여진다면.
'다른 무언가'란 신반동주의와 가속주의 사이의 지하적 공모 관계다 (후자는 여기서 스트로스 식으로, 가장 최근의 좌파적 버전으로 연결된다). '신반동주의의 망치'라는 별칭을 공유하는 동료 데이비드 브린(David Brin)과 소통하면서, 스트로스는 묻는다. "데이비드, 신반동주의자들의 좌파적 등가물 — 가속주의자들을 만나본 적 있나요?" 그리고는 유혹하듯 이어간다. "두 이데올로기에 대한 제 (반쯤 농담 섞인) 해석은 이렇습니다. 군주제를 위한 트로츠키주의적 특이점주의자들!“
스트로스는 코믹-미래 소설가이므로, 극적인 여담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사실 그 이상 어떤 것도). 『싱귤래리티 스카이』에서 시간 유사 곡선 위에 얹혀 나왔을 법한, 트로츠키주의-신자유주의적 소셜 그래프의 일부를 통한 흥미로운 방랑 끝에,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영국의 혁명적 공산당이 기묘한 행로를 걸어왔다는 것뿐이다. 가속주의와의 연결고리는, 신반동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스트로스는 공연이 너무 민망해지기 전에 끝낼 줄 아는 연극적 본능을 발휘한다. "트로츠키주의적 군주론자들, 혁명적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역설적인 것들의 변방 정치의 세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래, 뭐.) 막이 내린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꽤 유쾌한 분위기였다 — 적어도 점점 격분하며 머리를 벽에 찧어대는 브린과 비교하면.
신반동주의는 바퀴에 펑크가 난 가속주의다. 덜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가속 추세가 역사적으로 보상(상쇄)된다는 인식이다. 속도 기계, 즉 산업 자본주의 곁에는 점점 더 완벽하게 균형 잡힌 감속장치가 존재하는데, 이것은 역동적 과정을 메타-정체 상태로 되돌리면서 기술경제적 추동력을 자신의 팽창 속으로 서서히 빨아들인다. 우스꽝스럽게도, 이 제동 메커니즘의 제작은 진보로 선포된다. 그것이 좌파의 위대한 작업이다. 신반동주의는 그것을 (과도한 애정 없이) 대성당이라고 명명함으로써 출현한다.
함정을 폭파시켜야 하는가 (가속주의가 옹호하듯), 아니면 폭발이 함정에 갇혀버린 것인가 (신반동주의가 진단하듯)? — 이것이 바로 탐구 중인 사이버네틱스 수수께끼의 집이다. 간략한 배경 스케치가 도움이 될 것이다.
가속주의의 발아적 촉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1972)에 나오는 "과정을 가속하라"는 촉구였다. 마르크스주의의 썩어가는 저택 안에서 흰개미처럼 작업하면서, 헤겔주의를 완전히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될 때까지 체계적으로 도려내며, 들뢰즈와 가타리는 어떤 것이 "모순으로 인해 죽었다"거나 앞으로 그럴 것이라는 제안을 맹렬히 거부했다. 자본주의는 부정으로부터 태어나지 않았으며, 부정으로 인해 소멸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죽음은 복수심에 불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형집행인 도끼로 집행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것'에 가장 가깝게 실현 가능한 근사치들은 억제적이고 안정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체계'를 그 종말로 추동하기는커녕, 그것들은 역동성을 체계성의 시뮬라크르로 늦추고, 절대적 한계로의 접근을 지체시켰다. 자본주의를 점진적으로 혼수상태에 빠뜨림으로써, 반자본주의는 그것을 자기보존적 사회구조 속으로 끌어당기고, 그것의 종말론적 함의를 억압했다.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길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파리지앵 억양의 철학적 버전, 즉 하나의 수사적 유형이며, 들뢰즈와 가타리의 경우 그것은 일종의 고차원적 풍자와 유사한 무언가가 되어, 그 신앙의 모든 중요한 교리를 조롱한다. 『자본주의와 분열증』(『안티 오이디푸스』는 그 첫 번째 권이다)의 참고문헌은 반마르크스주의 이론의 개요서로, 급진적 수정(브로델)에서 명시적 비판(비트포겔)을 거쳐 경멸적 일축(니체)에 이르기까지 망라한다. 들뢰즈-가타리의 자본주의 모델은 변증법적이 아니라 사이버네틱스적이며, 상업화("탈코드화")와 산업화("탈영토화")의 긍정적 결합으로 정의되고, 본질적으로 극단(또는 "절대적 한계")을 향해 나아가는 경향을 띤다. 자본주의는 사이버네틱스적 상승(양성 피드백)에 기반한 사회 기계의 단독적인 역사적 설치물로, 끊임없는 사회산업적 혁명의 우발적 사고로서만 부수적으로 자기 자신을 재생산한다. 자본주의에 맞서 동원되는 어떤 것도, 자본주의가 자기 자신의 현실성을 향해 스스로 지향하는 내재적 적대와 비교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속도를 내어 튀어나와, 이미 그 '내부'에서 작동 중인 종말을 향해 돌진한다. (물론, 이것은 광기다.)
"좌파 가속주의"에 대한 상세한 음미는 다른 기회의 농담거리다. "현대 제동 메커니즘 내의 반체제 분파를 대표하여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사태가 훨씬 더 빠르게 전진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래, 어쩌면 우리가 뭔가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지도 … 만약 이것이 '어딘가로 향한다면' 점점 더 흥미로워질 수밖에 없다. (스트로스가 그 점에서는 옳다.)
신반동주의는 훨씬 더 강한 추동력과 그에 수반하는 다양성을 지닌다.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환원한다면, 그것은 좌파보다도 더 좌파적인 날개를 포함하는데, 왜냐하면 그 날개는 대성당이 근대성의 광기를 충분한 강도로 멈추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이 괴물을 사슬에서 풀어놓고 이제 그것을 멈출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그 특유의 고발일 것이다.
극우(이런 의미에서)에는 신반동주의적 재(再)-가속주의가 자리하는데, 다시 말해 그것은 감속장치에 대한, 혹은 식별 가능한 제도적 발전으로서의 '진보적' 정체에 대한 비판 — 대성당에 대한 비판이다. 이 관점에서, 대성당은 자본주의의 취소라는 자신의 창발적 기능으로부터 목적론적 정의를 획득한다: 대성당이 되어야 하는 것은 역사적 일차 과정의 다소 정확한 부정으로서, 그리하여 대성당은 — 그것이 기생하는 점점 더 광범위하게 펼쳐진 청산 중인 사회와 함께 — 전이성 사이버네틱스 메가시스템, 즉 초(超)-사회적 함정을 구성한다. 노골적이고 성숙한 이데올로기적 화신으로서의 '진보'는 역사를 정지 상태로 이끌기 위해 요구되는 반(反)-추세(趨勢)다. 기술-상업적 특이점으로의 가속을 막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보라, 그러면 대성당이 바로 그것이 될 것이다.
자기조직화하는 보상 장치들 — 혹은 음성 피드백 조립체들 — 은 불규칙적으로 발전한다. 그것들은 '헌팅'이라 불리는 전형적인 행동을 통해 균형을 추구하는데, 이는 과잉 조정과 재조정을 반복하여 특유의 파동 형태 패턴을 생성하고, 폭주하는 역동성을 억제하되 변동성을 산출한다. 충분히 조잡한 대성당의 헌팅 행동은 '좌파 특이점'의 계기들을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역동적 '복고(復古)'들을) 생성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억제적 조정이 시스템 붕괴(와 재부팅)로 과잉 조정될 때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 진동들조차도, 전이성 메가시스템에 내재적인 것으로서, 대성당화의 전반적 기울기가 지속되는 한, 그것들이 교란하는 전이성 초시스템의 내부에 머문다. 전이성 헌팅 사이클의 최악의 한계점에서 탈출을 기대하는 것은 일종의 구식 마르크스주의적 망상이다. 우리는 오직 상승하는 과정에서만 우리를 가두는 새장을 부술 수 있다.
재-가속주의적 신반동주의에게 있어, 보상되지 않은 사이버네틱스적 폭주로의 탈출이 지도적 목표다 — 이는 지능 폭발(intelligence explosion), 혹은 기술-상업적 특이점과 엄밀히 동등하다. 그 밖의 모든 것은 함정이다 (결정적인, 시스템 역학적 필연성에 의해). 군주들이 이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결코 명백하지는 않다.
원문 링크: https://archive.md/LGW3m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