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그에 대한 회의론(懷疑論)에 관한 신반동주의적 비평
전통과 그에 대한 회의론(懷疑論)에 관한 신반동주의적 비평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과거? 아련한 낭만. 전통? 포근한 질서.” 그러나 임건순이라는 한 동양철학자가 그 기억을 꺼내 들고, 차갑게 해부한다. 임건순 씨가 드러내는 것은 진보도 보수도 애써 덮어온 장면들이다. 이것은 특정 진영의 신화를 공격하는 글이 아니다. 이것은 과거를 미화하려는 모든 진영에 대한 잔혹한 반박이다. 그리고 임건순 씨가 내놓는 결론은 이렇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하는것은 절대로 과거로 돌아가선 안되기 때문.”
하지만, 과거를 부정한 뒤 임건순 씨가 세우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이 바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다.
임건순 씨는 이렇게 글을 시작한다.
내가 기억하던 남조선의 좋았던 옛날. 정이 넘치고 인심이 넉넉해 너무 살기 좋았던 우리의 과거
과연 좋았던 옛날이었을까? 그 첫 문장을 읽는 순간부터 나는 코웃음을 짓게 된다. 임건순 씨가 꺼내 놓은 첫 문장은 단순한 개인적 추억이라기보다, 사람들이 흔히 공유하던 ‘좋았던 옛 시절’이라는 신화를 일부러 비꼰 것이다. 그리고 임건순 씨는 그 신화를 곧장 뒤집어, 그 시절에 숨겨져 있던 잔혹한 현실을 펼쳐 보인다.
임건순 씨는 첫 번째 예시를 이렇게 적는다.
얼마나 컸나보자며 동네에서 툭하면 남의 집 자식 바지, 팬티 내려서 성기 보는 어른들.
전통적 시골의 ‘정’은 무엇이었나? 아이의 신체는 사유물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장난감이었다. 임건순 씨는 이 한 문장에서 전통의 가면을 벗겨냈다.
다음으로 임건순 씨는 이렇게 쓴다.
효도니 우애니 하면서 열심히 사는 형제들 집안 가족들이 기생해서 영혼까지 털어먹던 모습.
효도, 우애. 좌우를 가리지 않고 오래도록 미덕으로 여겨져 온 가치다. 그러나 임건순 씨는 이 단어들이 실제 생활 속에서는 종종 부당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쓰였다고 지적한다. 겉으로는 서로 돕고 정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실하게 사는 사람을 ‘가족’이라는 이유로 갉아먹는 일이 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정신지체 있는 여자아이, 누구 씬지도 모를 애를 배어서 만삭의 몸으로 동네를 활보하는 모습.
표면적으로는 충격적인 광경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단순한 가해·피해로는 설명하기 힘든 당시의 구조가 있다. 결혼하지 못한 총각에게 공동체가 무심히 그 여자를 ‘붙여 주었을’ 가능성도 있고, 혹은 생활을 돌볼 사람이 없어 방치된 채로 그런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 장면이 그 시대를 단순한 “정 많고 따뜻한 공동체”로만 기억하는 것에 균열을 낸다는 점이다. 그것은 특정 이념의 비판 레토릭으로 소비하기보다는, 당시 공동체가 갖고 있던 책임과 방치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서자라며 첩실이라면서 친아버지 제사인데도 당에 못 올라오게 하고 마당에서 거적 깔고 절하게 하던 모습. 무슨 놈의 예법이 그리 반인륜적인지.
제사는 무엇인가? 외형상으로는 신성한 가문의 의례다. 그러나 임건순 씨가 묘사하는 장면을 보라. 이 장면은 바로 전통이라는 체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당이라는 공간은 단순히 제례를 올리는 중앙 공간이라기보단 사회적 경계선이다. 그 경계 위에서, 누가 인간으로 취급되고 누가 배제되는지가 결정된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자와 바깥에 남겨질 자를 구분하는 의례의 무대다. 거적 위에 무릎을 꿇린 채, 사람은 공간이 아니라 위계를 체험한다. 전통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이고, 그 도구는 때로 이처럼 차갑게 사람을 구분한다. “서자”와 “적자”라는 낙인이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법과 의례의 기계를 통해 유지된다는 사실. 그것이 바로 이 장면이 보여주는 정치적 현실이다. 과거를 미화하는 자들은 이 경계선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경계선이야말로 전통이 체제의 힘을 드러내는 장소다.
동네에서 구걸 하러 댕기던 상이군인들. -어머니가 어떤 할아버지께 하소연 하시던 모습이 떠오름 울면서. 자꾸 이렇게 오시면 저는 밥을 굶어야한다고. 안타까운 마음에 상몇번 차려 드렸더니 계속 오셔서
상이군인은 체제가 버린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체제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진 사람이다. 전쟁 직후의 빈곤한 국가가 그들을 충분히 부양하지 못한 것은, 어떤 음모나 도덕적 실패라기보다 신생 국가가 가진 한계였다. 임건순 씨가 묘사한 장면에서, 어머니의 눈물은 한 개인의 선의가 버티기 어려운 현실을 보여준다. 이때 비판의 초점은 상이군인에게 향하거나, 정부를 “실패한 체제”로 몰아세우는 데 있지 않다. 그저 막연하게 ‘좋았던 시절’이라는 신화가 덮고 있던 구체적 현실을 다시 보게 만드는 것에 있다.
자식을 버리듯이 시골 부모집에 내팽기치고 떠남. 서울로 돈벌러 간 친엄마 보러 간다고 형과 누나, 언니 손붙잡고 쫄래쫄래 갔다가 다른 사람의 어머니가 된 모습을 마주함. 어머니는 낯선 이 대하듯이 하면서 이제와서 어쩌라고?? 이건 뭥미하는 표정. 아이는 씼을 수 없는 상처를 가지게 됨. 실제 친구들 이야기. 시골일수록 엽기적 형태와 사연의 가정이 많았음. 도시나가 망하고 이혼하고 하면 그저 무대포로 시골 부모 집에 애를 폐기처분하듯이 두고 도망
이건 한 사람의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그 시절 여러 가정에서 되풀이된 모습이었다. 시대가 만들어낸 조건 속에서 개인들의 도덕적 일탈이 집단적 현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시골집은 남겨진 아이들을 받아낸다. 도시에서의 실패는 시골로 흘러든다. 이것이 ‘정 많고 인심 좋았다’는 시절의 이면이다. 달콤한 말 뒤에는 이렇게 날카로운 현실이 숨어 있었다.
여자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어른들. 특히 과부에게. 한두달전 남편 있을때만 해도 안그랬는데 남편이 없어지니 못되게 구는
-시골 살면 성재기도 페미니스트 됨. 얼마나 여자들 깜보는 꼰대들이 많았는지 말도 못함.
임건순 씨는 이렇게 적었다. “시골 살면 성재기도 페미니스트 됨.” 그런데 생각해보자. 정말로 이 장면의 핵심이 단순히 “남자들이 나쁘다”로 끝나야만 하는가? 아니다. 그 현상은 질서가 깨질 때 드러나는 빈틈이다. 전통적 가부장제 구조는 남편이 아내와 자식을 보호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 그 보호막이 작동했다. 마을은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 남자의 권위 아래 있는 여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이 사라지자, 그 전제가 무너지고, 보호막도 함께 사라졌다. 남편이 사라지자 그 보호막도 사라지고 그 틈을 타서 약탈이 일어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구조의 해부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전통이라는 질서가 어떻게 작동했는가?” 이런 질문 말이다. 그러나 임건순 씨는 그 분석을 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선언한다. “내가 이런 걸 보고도 분노했다. 나는 이 현상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옳다.” 이것은 분석이 아니다. 이것은 도덕적 자기 위안이다. 그러나 그 감정적 결론은 질서를 해부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보다 깊은 곳을 보아야 한다. 질서의 메커니즘을.
큰집에 아들이 없는 경우 작은집에서 당연히 아들을 양자로 바쳐야함. 그걸 거부하면 온동네 사람들 손가락질에 견디질 못함. 애는 친부모랑 생이별하는데 인지능력 없는 3살 이전에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함. 온집안 식구들이 입 다물어 양부모를 친부모라고 여기고 살고. 친부모가 친부모인 줄 모르고 크며 참나.
이 장면을 보자. “큰집에 아들이 없으면 작은집에서 아들을 바친다.” 전통적 질서 속에서 개인의 선택 따위는 없다. 가족은 혈통을 유지하는 장치였고, 그 장치가 필요하다면 한 집안의 아이를 다른 집안에 넘겨주는 것은 당연한 거래였다. “거부하면 온 동네의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한다.” 공동체의 규율은 법보다 강하다. 거부란 없다. 순응만이 있다. 아이는 3살도 안 된 채 다른 집으로 옮겨지고, 모두가 입을 다문다. 그는 양부모를 친부모로 알고 자란다. 진실은 가족의 이름으로 묻힌다. 이것이 전통이다. ‘정 많던 시절’의 전통적 질서는, 개인의 권리를 묻지 않는다. 그것은 혈통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을 재배치하는 기계였다. 그리고 그 기계는, 아이의 눈물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2006~2010년 이때 아침마당 보면 어릴 적 식모로 팔려 나간 아주머니가 친부모와 재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주머니는 펑펑 우는데 부모들은 무덤덤. 그땐 다 그랬다나 참나. 사연이야 있었겠지만 지 새끼들 입던다고 팔아먹고서는. 시골에서 식모로 여자아이가 오는데 초등 3,4학년 나이 그 조막손으로 힘든 집안일 다함. 애가 처음에 집에 오면 3박4일을 울기만 했다지 서러워서. 일주일 내내 우는 경우도 있었고.
얼마나 무식한 아동학대고 노동착취였는지 참나. 그렇게 딸들 팔아먹고 아동학대했으면서 다들 없었던 일처럼 입 다물고 있으면서 위안부 문제로 일본 욕만 오지게 함. 심봉사는 원래 눈뜨려고 딸 팔아먹은 게 아니라 새장가 가려고 딸 팔아먹은 거 아녀? 그게 민족의 유구한 전통인데도 일본만 나쁘다? 이제라도 과거 식모 문제 부모들이 참회하고 반성해야 함. 함부로 식모들 대한 악덕 XX들도 참회하고.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맨날 외세만 나쁘대나 참나. 식모 문제는 다들 없었던 것처럼 입 쑥닥고 위안부 소녀상만 전국에 설치하자? 하이고 참나.
이게 ‘정 많던 시절’인가? 아니다. 아이는 자산이고, 가난은 그 자산을 거래로 만든다. 부모는 그렇게 말했다. “그땐 다 그랬다.” “초등 3,4학년 나이의 조막손이 힘든 집안일을 다 했다.” 그것은 감상적 비극이 아니라, 가난한 전통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아이의 눈물은 시스템의 일부였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그 시스템에 대한 집단적 망각이다. 모두가 입을 다문다. 위안부 소녀상만 전국에 세운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일본이 나쁘다.” 전통의 구조 속에서 자식은 팔 수 있는 자산이었다. 그것이 ‘민족의 유구한 전통’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거래는 지우고, 외부를 욕한다. 이것이 집단적 위선이다. 그리고 이 장면이 그 위선을 드러낸다.
그리고 임건순 씨가 글에서 말하고자 한 바는 결국 이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하는 것은 절대로 과거로 돌아가선 안되기 때문.
‘돌아가선 안 된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세워야 하는가? 그 질문은 공백으로 남는다. 임건순 씨는 기괴한 과거를 찢어발기지만, 그 뒤의 설계와 그 설계를 위한 방법론은 제시하지 않는다.
임건순 씨의 글을 우리는 이미 해부했다. 과거를 찢어내듯 꺼내놓은 기억들, 그 속에 숨은 질서의 균열들을 보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 글을 읽고, 또 다른 분석을 꺼내 들었다. 디시인사이드의 어느 한 유동닉 유저인 국갤러1(116.127)이다. 그는 단순히 추억담에 공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이 글은 보수를 자처하는 한국 보수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제, 그의 비판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 시선은 단순한 조롱이 아니다. 질서를 세우지 못한 보수의 빈 껍데기를 꿰뚫는 나름의 날카로움이 있다.
주딱이 임건순이라는 페북싸개의 글을 자주 올리던데, 이 사람이 몇 시간 전에 올린 글이 매우 인상적임. 1990년대 이전의 한국 사회는 각종 이유로 야만이었다는 내용인데, 임건순 씨가 내가 알기로 40대로 알고 있는데, 저 사람이 제아무리 보수적인 척을 해도 여기서 3040남들의 한계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음.
116.127은 이렇게 말한다. “임건순은 보수적인 척을 하지만, 그의 글에서 3040 남성 보수의 한계를 느낄 수 있다.” 흥미로운 진단이다. 그가 본 것은, 스스로 보수를 자처하지만 구체적 질서에 대한 설계가 전무한 세대다. 그들은 과거를 비판할 줄은 알지만, 새로운 체계를 세우지 않는다. 그 공허함을 116.127은 감지한 것이다.
물론 본인들이 그런 시절을 겪은 트라우마를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그 시절에 지배적이었던 종교ㆍ사상계라든지 보수적인 정책을 당시 그들이 느꼈다고 하는 '야만성'에 동치시키니, 저 세대 역시 쓸 수 있는 카드가 전무함. 저들의 심리를 역설적으로 리버럴 이준석이 정말 잘 자극시킨 게 아니었나.
그렇다. 과거를 단순히 ‘야만’이라 규정하면, 그 과거 속에서 구조적 질서를 추출할 수 없다. 질서를 설계할 카드가 없어진다. 그리고 이 빈틈을 리버럴한 정치가가 파고든다. 그건 당연하다. 질서를 부정하고 남은 자는 항상 조롱당한다. 다만, 116.127의 비판은 그 무게가 가볍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 가벼운가? 116.127이 직접 비정한 질서의 기계 안에 살아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가볍다. 가난했던 시절, 부모들은 친자식을 팔아 연명했으며 남편을 잃은 과부는 약탈당했다. 그것은 “보수 정책”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호 기능이 마비된 질서의 작동의 결과였다. 질서는 추상적 카드가 아니라, 사람들의 살과 피로 이루어진 기계다. 그 기계 속에서 갈려 나간 자는, 그 기계가 어떤 것인지 안다. 제대로 된 기계를 다시 세우려면, 기계에 의한 상처를 모르는 자의 이론으로는 부족하다. 116.127 씨의 카드 놀이에는 질서가 남긴 상흔이 없다.
이 댓글에도 썼지만, 본문의 임건순 씨 글이 보수를 자처하는 3040남의 한계를 정확하게 보여준 글이라고 생각함. 뭔가 지금 상황은 페미나 민주당이 설쳐서 불만족스럽지만, 과거의 어떠한 이념과 생활상을 가져오자니 그거는 또 야만스러워서 싫다는 걸 보면, 이건 적나라하게 말해서 과거에 서러워서 지금 보상받아야겠다는 페미니즘의 남자버전이 아닌가 생각하고 그래서 임건순 씨 말을 빌리면 '망가진 체제와 사회를 후손에게 물려주지는 않고' 싶어하지만, 저 나이대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회상이 뭔지는 독자인 나도 모르겠고, 까놓고 저 글쓴 본인조차도 모를 듯.
“지금이 싫다. 과거도 싫다. 그래서 남는 건 무엇인가?” 116.127은 이렇게 묻는다. 임건순 씨의 글에서 그는 보수주의적 비전의 부재를 본다. 과거는 야만으로, 현재는 혼란으로 규정한다. 미래에 대한 설계는 없다. 그래서 남는 건 감정이다. “과거에 서러워서 지금 보상받아야겠다는 남자판 페미니즘.” 이것은 도덕적 레토릭으로는 통할지 모르나, 체제 설계의 언어로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원론적으로 과거에 '군인들(저 사람한테는 특히 부사관)이 존중받던 사회', '약자를 멸시하지 않던 사회'를 외치지만, 바로 그 자신이 생각하는 과거도 막상 군인들이 멸시받았고 약자가 멸시받았으며, 심지어 자신도 과거의 상이군경과 (저 글에서 가해자로 비춰지는 수많은) 약자들을 멸시하는 웃긴 상황이 벌어짐.
116.127은 임건순 씨의 아이러니를 지적한다. “군인을 존중하던 사회를 그리워한다”면서, 그가 회상하는 과거는 실제로 군인이 멸시받던 사회다. 이것이 바로 보수적 신화의 자기모순이다. 과거를 찬양하지만, 실제 기억은 그 찬양을 부정한다. 그리고 그 모순을 설명할 구조적 언어가 없다. 그저 감정만 남는다. 훌륭한 관찰이다. 하지만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116.127 씨가 말하는 군인을 존중하는 질서는 무엇인가? 116.127의 댓글을 아무리 뒤져도 그에 대한 답은 없다. 모순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질서를 세울 수 없다. 군인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 어떤 제도가 필요한가? 116.127은 바로 그 질문을 외면한다. 그 공허는 흘러간다. 군인은 다시 구조 속에서 사라진다. 본인 역시 모순점만 집을 순 없는 노릇이므로 짤막하게 군인을 정말로 우대하는 방법론을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은 식이 될 것이다. 첫째, 군인은 단순한 공공서비스제공자가 아니라 주권의 수호자로 재정의해야 한다. 그 지위는 명예직이 아니라 계약과 보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왕을 지키는 기사단처럼, 체제의 핵심 기계에 결속된 사람들. 둘째, 그 명예는 실질적 권한과 연결되어야 한다. 제대 후에도 행정, 치안, 지역 거버넌스에서 우선권을 갖는 구조. 총을 들었던 자가, 질서의 관리자가 된다. 셋째, 그들의 보호가 단순한 연민이 아니라 계산된 투자라는 사실을 제도화해야 한다. 이 기계가 작동할 때, 군인을 멸시하는 풍경은 사라진다. 군인은 단순한 체제의 톱니가 아니라, 체제의 기둥이 된다.
누구나 과거를 미화하거나 서럽게 생각하겠지만, 아름답든 아프든 과거에 자신과 주변에 일어난 여러 추억들을 하나의 보편적인 종교ㆍ사상으로 해석을 하고, 그 사고 체계를 후대에게 물려줘야 문명이 유지가 되는데. 주딱이 가져오는 페북싸개들(한정석, 임건순, 신영철 등)의 공통점이 '지금 ㅈ같은데, 과거를 생각해보자니 뭔가 더 ㅈ같아. 그래서 나는 지금이 어쩔 수 없이 좋아. 그런데 외국에서 어떤 사상이나 정치인을 데려오자고 하는 놈들이 있네? 저 놈들은 ㅈ같고 좋은 지금을 해치려는 나쁜 것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거임.
여기에 116.127의 핵심 진단이 있다. “문명은 과거를 하나의 종교·사상으로 해석해 후대에 물려줄 때 유지된다.” 그러나 임건순 씨와 그 부류는 그렇지 않다. 과거는 욕하면서 현재도 욕한다. 그러니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외부의 사상에 대해서는 방어적이다. “지금이 싫다. 과거는 더 싫다. 외부 사상은 위협이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보수의 공허다.
여기까지, 우리는 116.127의 비평을 하나하나 해부했다. 그는 임건순의 모순을 정확히 짚었고, 한국 보수의 공허를 날카롭게 포착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사회를 어떻게 다시 짤 것인가를 말하지 않았다. 비평만으로는 문명이 세워지지 않는다. 설계가 없다면, 그의 비평은 그냥 파편이다. 우리는 더 깊이 들어간다. 부정만으로는 질서를 만들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이제, 그 빈틈을 염두에 두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자.
우리가 지금껏 임건순 씨의 글과 116.127의 비평을 해부해보며 뼈저리게 깨달은 점은 바로 이것이다. 보수를 자처하지만 설계가 없다. 과거를 부정하지만 미래도 없다. 그런데 이 문제는 임건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대, 나아가 현대 우파 전반의 구조적 결핍이다. 그 결핍을 더 넓게 짚어낸 글들이 있다. 디시인사이드에서 ‘북극곰 PolarBear’라는 고정닉을 쓰는 유저의 글들이다. 이제 우리는 범위를 넓혀 본다. 개인의 상처에서, 세대와 흐름의 공백으로. 그리고 그 공백을 신반동주의적 시선으로 해부한다.
북극곰PolarBear는 이렇게 적는다.
그들이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이고 회의회의주의자이기 때문임
현대의 우파들은 자유주의가 종교, 전통 등을 죽인지 오래이고 자유주의 자체가 소극적 자유주의도 잡아먹고 적극적 자유주의라는 이름의 국제 사회도 개입하고 복지에 사회통제도 PC로 하는 커티스 야빈이 말하는 대성당이라는 괴물이 된 시대에서 자랐음.
이런 현대의 우파들은 그저 덜 통제 받고 싶고 자유주의 바탕의 교육으로 너무나도 그 자유주의의 의심하고 회의하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교육을 잘 받아 자유주의가 사회주의라는 괴물이 된 현대사회도 까부수고 싶은 일종의 포스트포스트모더니스트가 됨.
그리고 현대의 우파들은 저걸 무너뜨리고 무슨 사회를 만들지 고민함.
그래서 기존 전통, 종교들을 보나 이미 의심과 회의라는 눈을 가진 현대의 우파들은 이런 전통과 종교를 믿을 수도 없음.
그러기에 결국 일단은 현대의 자유주의가 만든 사회주의의 괴물 처단을 생각하고 다른 부분은 상대적으로 덜 신경씀.
커티스 야빈, 피터 틸, 한스 헤르만 호페 등이 어느정도 현대의 자유주의 괴물을 죽이고 그 뒤에 만들 사회를 생각했으나 아직 그 부분에는 신경을 덜 쓰고 일단 현대의 자유주의 괴물을 죽이는데 신경 씀.
이런 점에서 현대의 우파란 자유주의라는 소설의 등장인물이며 이에 모순울 발견해서 메타픽션적인 발언을 하는 캐릭터일지도 모름. 이런 캐릭터가 굳이 또다른 소설을 쓸 이유는 없으니.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멋진 단어다. 그건 이렇게 해석된다. 모더니즘—계몽주의, 이성, 진보. 그 오래된 신화를 해체하자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했다. “보편적 진리? 그건 권력의 언어일 뿐.” 그런데 해체로 끝났나? 아니다. 해체 이후에도 질서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은 그걸 세우지 않았다.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이란, 모더니즘도 싫고 포스트모던도 싫지만 대안이 없는 상태다. “또 다른 질서를 찾고 싶지만, 이미 아무것도 믿지 못한다.” 현대 우파는 이 상태다. 전통적 질서? 믿지 않는다. 좌파적 미래? 당연히 혐오한다. 그래서? 아무것도 세우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의심한다. 단순히 질서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심이라는 도구 자체를 의심한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비판을 배웠는데, 그 결과물이 이 괴물이라니?” 그러고는 멈춘다. 이건 아름다운 아이러니다. 그들은 모두를 의심하고, 심지어 자신이 의심하는 과정조차 의심한다. 이것이 바로, ‘회의회의주의자’라는 상태다. 하지만 무엇을 세울지에 대한 언어는 없다. 그 공허가 현대 우파의 초상이다.
현대 우파는 단순한 ‘보수’가 아니다. 그들은 대성당의 교육 속에서 길러진 아이들이다. 자유주의가 종교와 전통을 죽이고 난 뒤, 그 자유주의는 자신을 절대화하며 국제적 관리 체제로 변모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있다. 소극적 자유주의를 삼켜버리고, ‘적극적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복지와 사회 통제를 PC주의라는 이름으로 수행하는 거대한 괴물. 북극곰PolarBear는 바로 이 괴물을 가리켜, 커티스 야빈이 정의한 ‘대성당(The Cathedral)’이라는 개념을 빌려 설명한다. 야빈이 말하는 대성당은 겉으로는 민주주의 체제 아래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대 서구 사회의 지식·문화·정치 네트워크가 하나의 비공식적이지만 실질적인 권력 체계로서 작동하는 것을 말한다. 야빈이 이 거대한 권력 체계를 ‘대성당’이라 부른 이유는 분명하다. 중세의 대성당이 교리를 전파하며 왕권 위에 군림했듯, 현대의 언론·대학·문화·관료 네트워크도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며 “진보주의”라는 세속적 신앙을 설교하고, 반대자를 이단처럼 배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성당 안에서 길러진 자들이 이제 대성당을 불태우려 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이런 현대의 우파들은 그저 덜 통제받고 싶어 한다.” 그들은 질서를 세우지 않는다. 회의감을 겪었기에, 전통도 믿을 수 없고, 미래 설계도 하지 못한다. 북극곰PolarBear는 이렇게 본다. “커티스 야빈, 피터 틸, 한스 헤르만 호페가 괴물을 죽이고 그 뒤 사회를 생각했지만, 현대 우파는 아직 괴물 죽이기에만 신경쓴다.” 정확한 진단이다. 그들은 괴물과 싸우는 것으로 정체성을 세운다. 새로운 소설을 쓰지 못한 채, 기존 소설의 메타 비평가로 남는다. 그리고 북극곰PolarBear는 마지막에 냉소를 지으며 비평한다. “이런 캐릭터가 굳이 또다른 소설을 쓸 이유는 없으니.” 이것이 현대 우파의 현실이다. 자유주의라는 소설 속에서, 그 소설을 까부수려 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쓰지 못하는 인물들. 문제는 단순하다. 괴물을 죽인 뒤, 무엇을 세울 것인가? 그 논의가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대성당의 그림자 속에 있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 방금 우리가 해부했던 글—“현대의 우파가 중점 사상이 없는 느낌인건”—은 2025년 6월 30일 오후 3시 41분에 쓰였다. 그런데 그보다 한 시간 남짓 앞선 시각(2025.06.30 14:29:17), 북극곰PolarBear는 또 다른 글을 남겼다. “정치적으로 우파의 문화가 크게 두 개”라는 글이다. 시간상으로는 이 글(“정치적으로 우파의 문화가 크게 두 개”)이 먼저다. 그리고 곧 이어서 작성된 다음 글에서, 그는 그 문제를 더 넓게 풀어냈다. 이제 우리는 시계를 되돌려, 북극곰PolarBear가 먼저 적어둔 이 글을 살펴본다. 여기서 그는 현대 우파를 둘로 가른다. 하나는 종교와 전통을 진짜로 믿는 집단, 다른 하나는 자유를 좇다 타락하고 회의주의로 돌아온 집단. 이 두 흐름은 어떻게 맞물려 우파를 형성하고 흔드는가? 이제, 그 글로 들어가 보자.
정치적으로 우파의 문화가 크게 두 개인듯
하나는 종교, 교권주의, 파시즘, 전통주의처럼 이전의 가치를 진짜 믿는 부류
다른 하나는 리버테리언, 미국과 유럽의 우측 지지 X세대, 대안우파처럼 전자에 반박해서 일어난 자유주의자들이 적극적 자유로 뇌절해서 미국의 리버럴이나 유럽의 사민주의자로 타락해서 패악질 하는거에 질린 회의주의자 부류
전자랑 후자는 정치적 필요에 연합하나 전자가 수도 많고 결집력이 좋기에 목소리를 차지하고 후자가 빠져나가면 좌파가 돌아오고 후자가 오면 우가 먹는 구조.
다만 전자가 계속 줄어가고 후자는 느는 시점에서도 그런 연합이 작동할지는 의문. 아마 전자는 저승에 가고 후자의 드러눕기로 그냥 웅크린 아틀라스 마냥 민주정의 붕괴 아닐지.
트럼프나 르펜 같은 인간 마저 말만 전자지 사실 후자인걸 보면 더더욱 뻔한 일인지도
북극곰PolarBear는 우파를 둘로 나눈다. “하나는 종교, 교권주의, 파시즘, 전통주의처럼 이전의 가치를 진짜 믿는 부류.” 이 부류는 남아 있는 전통적 토대다. 종교와 권위, 실제로 체계가 작동하던 시대의 잔재를 신앙처럼 붙든다. 그들은 질서를 믿는다. 그것이 완벽하든 아니든. 그리고 그는 또 다른 부류를 지목한다. “리버테리언, X세대, 대안우파처럼 전자에 반박해서 일어난 자유주의자들이 적극적 자유로 뇌절했다가, 미국의 리버럴이나 유럽의 사민주의자로 타락해서 패악질 하는거에 질린 회의주의자 부류.” 이것이 흥미롭다. 그들은 전통을 부정하며 태어났고, 그 부정의 끝에서 회의주의로 돌아왔다. 전통을 부정하면서도 새로운 질서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는 자유를 먹어치우는 괴물로 변했다.
북극곰PolarBear는 이 둘이 정치적 필요로 연합한다고 말한다. “전자가 수도 많고 결집력이 좋기에 목소리를 차지하고 후자가 빠져나가면 좌파가 돌아오고 후자가 오면 우가 먹는 구조.” 그렇다. 그것은 수학적 문제다. 전통을 믿는 자들이 구심점을 제공하고, 회의주의자들은 전략적 숫자를 제공한다. 그러나 전자가 줄고 후자가 늘어나는 시점—그 연합은 유지될 수 있는가?
북극곰PolarBear는 냉소적으로 말한다. “아마 전자는 저승에 가고 후자의 드러눕기로 민주정의 붕괴 아닐지.” 이 비전은 설계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해체 이후의 잔해를 묘사한 것이다. 트럼프와 르펜조차도 사실은 “전자처럼 보이는 후자”라는 그의 말은, 우파가 자기 질서를 잃었다는 진단이다. 결론? 전통을 신앙하는 질서는 사라지고 있고, 회의주의자들의 연합은 질서를 세우지 못한다. 우파는 이제 숫자만 남았지만, 질서의 언어는 잃었다.
“정치적으로 우파의 문화가 크게 두 개” 글에 달린 댓글란은 흥미로운 사고실험의 장이다. 북극곰PolarBear가 던진 분류 ― 전통보수(전자)와 회의적 자유주의자(후자) ―를 두고 라우디러프보이가 묻는다.
전자는 전통보수고 후자는 자유주의 보수라는 건가?
북극곰PolarBear는 답한다.
후자는 자유주의 보수라기보다는 불개입주의자, 안캡, 리버테리언.
여기서 보수라는 말의 모호함이 드러난다. 보수라 부르기에는 전통과 끈이 약하고, 그러나 자유주의라 하기에는 그 자유가 이미 ‘적극적 자유’의 늪에 빠져 있다.
라우디러프보이는 낙관적 전망을 말한다.
결국 헤게모니는 전통보수가 잡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게 청년층에 더 인기 있다.
흥미롭다. 그는 헤게모니를 수적 우위와 결집력에서 찾는다. 그러나 암흑망(본 글의 필자이다)은 냉소적으로 분석한다.
전통보수라도 정말 뭐 에드먼드 버크나 러셀 커크 센세 살아계시던 시절 느낌 보수를 할지는 솔직히 회의적이고 그냥 적당히 팔레오콘 흉내내는 4chan이나 트위터 양키 대안우파 스찌질이 주류 먹을 듯.
그렇다. “전통보수”라고 불리는 세력도 실제로는 깊은 철학이 아니라 인터넷 밈과 감정적인 대안우파식 담론을 소비하는 정도일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라우디러프보이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솔직히 지금 미국 공화당 팔레오콘 정도 스탠스면 괜찮음.
이는 현실적 타협을 인정한 것으로 이상적인 전통보수는 힘들더라도, 팔레오콘 정도면 수용 가능하다는 실용주의적 입장이다. 참 좋은 의견이다. 실제로도 팔레오콘 정도면 현대 정치 기준으로 매우 훌륭한 것이 맞기 때문이다.
북극곰PolarBear도 한 마디 덧붙인다.
낙태에서의 캔자스나 오하이오 주민투표 결과를 보라. 필리스 슐래플리 같은 이들의 행보를 보라. 이미 떠진 눈을 감을 수는 없다.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야빈식으로 말하자면, “대성당은 이미 네트워크를 장악했다. 전통보수는 더 이상 교리의 공급자가 아니다.”
암흑망은 댓글 몇 줄로 보수의 역설을 찌른다.
버크도 당대에는 진보 포지션이었는데도 오늘날 보수주의 시조로 평가받는 것부터가, 우익 담론 자체가 알게 모르게 좌쪽으로 가는 모양새.
신반동주의 논객들이 말하듯, ‘크툴루는 좌편향으로 헤엄친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우익 담론 자체가, 시간이 흐르며 좌측으로 끌려간다. 신반동주의 논객들이 자주 읊조리는 그 문장처럼. “크툴루는 좌편향으로 헤엄친다.” 바로 이 패턴이다. 과거의 진보가 오늘의 보수가 되고, 오늘의 보수는 내일의 진보가 된다. 보수라 자처하는 자들은 종종 기존의 패배를 보존하는 자로 남는다. 북극곰PolarBear가 묘사한 현대 우파의 공허 ― 전통도, 새로운 질서도 세우지 못한 ― 그 상태를 암흑망은 이런 식으로 보강한다. 보수는 계속해서 후퇴하는 방어선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그 진지가 곧 새로운 진보의 전선이 된다. 그리고 대성당은 웃으며 전선을 확장한다.
암흑망은 한계를 다시금 짚는다.
거기다 요새 미국 남부 레드스테이트(MAGA)들에게조차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율리우스 에볼라(Julius Evola),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 오스왈드 모슬리(Oswald Mosley), 르네 게농(René Guénon) 급 보수주의+전통주의를 기대할 수 있을리가? 되려 이런 옛날 강경보수들 MAGA들에게 츄라이츄라이 하면 지들 입맛 안 맞다고 반찬투정할 게 뻔한데.
이게 무슨 뜻인가? 보수라 불리는 대중은, 진짜 전통의 언어를 소화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에볼라를 꺼내면? 슈펭글러를 꺼내면? 슈미트를 들이밀면? 그들은 새로운 진리를 본 듯 감탄하지 않는다. 그들은 반찬투정한다. “이건 입맛에 안 맞는다.” 이것이 오늘날 우익 문화의 한계다. 그들이 붙잡고 있는 것은 진짜 질서가 아니라, 기존 체제에 대한 불만을 잠시 결집한 상징일 뿐이다. 깊이를 요구하면 흩어진다. 대성당은 이 한계를 알고 있다. 그래서 질서를 세우는 언어는 대중으로 흘러가지 못한다. 보수의 대중층은 그저, 폼나는 보수 흉내 내면서도 진짜 전통주의 사상 앞에서는 숟가락을 놓는다. 이것이 신반동주의자들이 이런 대중을 냉소하는 이유다. 질서를 세우려는 담론은 대중을 통과하지 못하고, 대성당은 그 공백 속에서 더 강해진다.
라우디러프보이는 냉정하게 말한다.
마치 뭐라고 해야되지 지금 한국보수한테 박정희급 보수주의를 바라는거 같은 느낌임
물론 박정희도 좋지만 현실적으로 그럴수 있느냐 그리고 그런 사람이 존재하느냐 문제가 큼
마찬가지로 일본도 대일본제국 부활하면 좋겠지만 나는 지금 참정당정도 스탠스여도 만족임
이것은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솔직히 인정하는 언어다.
- 이상: 강력한 국가, 전통의 재건, 박정희나 대일본제국 같은 상징.
- 현실: 그러한 질서를 재현할 인물이나 환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렇게 현실적인 타협을 내놓는다. “지금은 참정당 정도 스탠스여도 만족.” 이것은 현 시대의 보수가 처한 상황을 압축한다. 전통주의의 이상향은 여전히 신화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지만, 실제 정치가 허용하는 것은 그 절반, 아니 그 그림자에 불과하다. 대성당이 여전히 굳건한 세계에서, 보수는 점점 낮은 기준선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라우디러프보이의 의견은 현실적인 보수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잘 파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암흑망은 팔레오콘(Paleocon)이라는 단어를 꺼내며, 그 구조적 제약을 짚는다.
팔레오콘 정도도 억울하게 극우 취급당한다도 문제지만, 팔레오콘이 미국급 지정학적 제반환경이 없으면 아예 못해먹는다는 것도 문제일 듯.
그렇다. 질서라는 것은 추상적 이념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환경이 받쳐줘야 질서가 뿌리내린다.
암흑망은 이어서 비판한다.
즈그 태어난 지정학적 환경 애써 모른척하면서 based한 척, 엣지한 척 이러는 애들이 팔레오콘 코스프레하는거고. 정말 하고 싶으면 환경이 받쳐주는 데서 열심히 해야하지 않나 이리 생각. (궂은 일을 마다할지는 또 모르겄다.)
야빈식으로 읽으면 이렇게 된다.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채 상징만 흉내 내는 자들.” 질서를 세우지 않고, 그저 밈을 소비하며 자신의 급진성을 연기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현실적 협상론에 대한 조언.
현실에 타협하면 그 말이 지당한데 처음부터 싯가를 높게 불러야 조금씩 낮추면서 적당히 타협을 보는 것이지, 처음부터 너무 낮게 싯가를 부르면 호구당하기 쉬워서 그런 것.
이는 정치적 현실의 아이러니를 포착한 것이다. 협상에서 초기 요구가 질서를 규정한다. 낮은 요구는 스스로의 질서를 헐값에 팔아넘기는 것이다. 결론? 암흑망은 우파 내부에서조차 질서를 세우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꼬집는다. 그들은 환경을 보지 않고, 상징만 소비하고, 협상에서는 스스로를 깎아먹는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대성당은 공허한 보수들의 모습을 보며 웃는다.
처음의 장면을 기억해보자. 임건순 씨가 말했다. “남조선의 좋았던 옛날.”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온 것은, 과거의 잔혹한 행동들의 목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 시절로 돌아가선 안 된다.” 116.127은 그것을 보며 냉소했다. “3040 보수의 한계를 보았다.” 과거를 거부하면서도, 미래의 설계도를 제시하지 못하는 보수. 여기서 시작된 논의는 북극곰PolarBear의 두 글로 확장되었다. 「정치적으로 우파의 문화가 크게 두 개」 — 전통을 신앙하는 부류와 회의주의자 부류. 「현대의 우파가 중점 사상이 없는 느낌인건」 — 대성당 속에서 길러진 이들이 아무런 설계를 제시하지 못한 채, 괴물과 싸우는 데만 몰두하는 현상. 결론은 분명하다. 비판만으로는 아무것도 세워지지 않는다. 우파는 과거의 폐허 앞에서 회의론만 늘어놓으며, 새로운 질서를 세우지 못했다. 신반동주의가 던지는 도발을 들어라. “하드 리셋(Hard Reset)을 실행하라. 대성당의 질서를 갈아엎어라. 신관방주의(Neocameralism)의 언어로 새로운 주권을 설계하라.” 이것이 우리가 여기서 발견한 흐름이다. ‘임건순의 글에 대한 비평 → 현대 보수의 철학적 공허 → 북극곰PolarBear의 구조 분석 → 새로운 질서의 요청.’ 마지막 질문은 간단하다. “우파는 무엇을 세울 것인가?” 이에 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말은 잿더미 위에서 떠도는 또 하나의 목소리일 뿐이다.
정말 탁월한 비평입니다.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