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게농, 《현대 세계의 위기》중 '사회적 혼란'

사회적 혼란


본 저작에서 우리는 사회적 관점에 특별한 중점을 둘 생각이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관심의 대상일 뿐이며, 근본 원리들의 비교적 먼 적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현대 세계의 재건이 이 영역에서부터 시작될 수는 없다. 실제로 만약 재건이 이러한 수준에서 시도된다면—즉, 원리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결과들로부터 거꾸로 접근한다면—그 시도는 필연적으로 실질적인 기반을 결여하게 되며, 완전히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로부터는 결코 어떤 안정된 것도 나올 수 없고, 결국 모든 작업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본질적인 진리에 대한 합의라는 절대적 전제가 간과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정치적 상황들—그 의미를 가장 넓게 확장하더라도—을 단지 한 시대의 정신 상태를 외적으로 드러내는 징후 이상으로는 결코 간주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그런 식으로 간주한다고 하더라도, 현대의 혼란이 사회 영역에 미치는 여러 양상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이미 지적했듯이, 현재 서구 세계의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자신의 본성에 따라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이것이 곧 ‘카스트(caste)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카스트란 다름 아닌 개인의 본성 자체이며, 그 본성이 수반하는 모든 특수한 소질들과 함께 각 개인을 특정한 기능의 수행에 적합하게 만드는 성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는 어떤 종류의 기능이든 간에 그것의 수행이 정당한 규율에 의해 결정되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각 개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이는 종종 그가 가장 부적합한 일일 수 있다.


공동체 안에서 그가 맡는 역할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우연’이 아니라, 우연처럼 보이는 것—곧 온갖 부수적인 환경들의 얽히고설킨 망—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 중에서 오히려 가장 적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야말로 본래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되어야 할 것인데, 그것은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본성적 차이이다.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은 인간들 사이의 본성적 차이를 부정하고, 그에 따라 모든 사회적 위계를 부정한 데 있다. 이러한 부정은 처음부터 의도적인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천적인 성격을 띠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카스트 간의 혼합이 그것들의 완전한 폐지에 앞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 개개인의 본성이 무시되기 이전에 이미 오해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와 같은 부정은 결국 근대인들에 의해 하나의 의사(擬似) 원리로 격상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평등(equality)’이라는 이름 아래 추앙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평등이라는 개념은 어디에서도 실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한데, 둘 이상의 존재가 서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모든 면에서 완전히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환상적 관념에서 파생되는 온갖 터무니없는 결과들을 지적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쉽다. 이를테면 이 평등의 이름 아래 모든 사람에게 완전히 동일한 교육을 강요하는 것, 마치 모두가 동일한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처럼 간주하고, 또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한 동일한 방법이 아무 구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여기는 식의 행태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이 과연 ‘이해’의 문제라기보다는 단지 ‘암기’의 문제가 아니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의 순전히 언어적이고 ‘서적 중심적인’ 교육 개념에서는 지성을 대신하여 기억력이 중시되고 있으며, 그 교육의 목적은 단지 기초적이고 이질적인 개념들의 축적에 불과하다. 이 과정에서 ‘질(質)’은 철저히 ‘양(量)’에 희생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우리가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현대 세계 전반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경향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금 다수성 속의 분산(dispersion in multiplicity)을 보게 된다.


‘의무 교육(compulsory education)’의 폐해에 관해서도 많은 것을 덧붙일 수 있겠지만, 본 저작의 구도를 유지하기 위해 이 주제에 장황하게 머물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이것이 ‘평등주의 이론(egalitarian theories)’의 하나의 구체적 결과라는 점을 부수적으로 지적하는 데에 그쳐야 한다. 이는 오늘날 무수히 많아 일일이 열거조차 불가능한 혼란의 요소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평등(equality)’이나 ‘진보(progress)’와 같은 개념들, 혹은 오늘날 대부분의 동시대인들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온갖 ‘세속적 교의(lay dogmas)’—그 대부분은 18세기 동안에 처음 정식화된 것들이다—에 직면할 때마다, 그러한 개념들이 자생적으로 등장했다는 주장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암시(suggestions)’이며, 물론 그러한 암시는 이미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회가 아니었다면 아무런 효과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근대 시대를 특징짓는 정신적 태도를 스스로 창출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유지하고 더욱 극단적인 단계로 끌고 가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만약 이러한 암시들이 사라진다면, 일반적인 정신적 방향성도 크게 전환될 가능성이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을 유지하려는 자들—심지어 혼란을 더욱 심화시키려는 자들—은 이 개념들을 끊임없이 조장하고 장려하며, 또한 모든 것이 논의 가능하다고 주장되는 이 시대에 유독 이러한 개념들만은 결코 논의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사상들을 전파하는 자들이 과연 어느 정도의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지, 또 그들이 타인을 기만함과 동시에 스스로도 자기 기만에 빠져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 이와 같은 종류의 선전에서, ‘속아넘어가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이들이 흉내 내기 어려운 일종의 확신(conviction)을 그 일에 가지고 임하기 때문이며, 그러한 확신은 주변으로 쉽게 전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적어도 그 초기 단계에서는 훨씬 더 의도적이고 계획된 유형의 활동이 전제되어야 하며, 그 방향성은 자신들이 유포하는 사상의 실질적 본질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만 설정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사상(ideas)’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경우에 그것은 매우 부정확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결코 ‘순수한 사상’이 아니며, 지성적 질서와는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차라리 ‘거짓 사상(false ideas)’이라 불릴 수 있고, 더 정확하게는 ‘의사사상(pseudo-ideas)’이라 불리는 것이 옳다. 이 사상들의 주된 목적은 감성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데 있으며, 이는 대중을 조작하는 데 가장 쉽고도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개념 그 자체보다도 그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word)’가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대적 ‘우상(idols)’들은 실상 단지 ‘단어들’에 불과하다. 여기에는 ‘언어주의(verbalism)’라 불릴 만한 기이한 현상이 작용하고 있는데, 즉, 울림 있고 인상적인 단어들이 마치 사유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대중에 대한 웅변가들의 영향력은 이 점과 관련하여 특히 특징적인데, 이는 약간만 성찰해보아도, 최면술사가 사용하는 암시의 방식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점들에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모든 진정한 위계(hierarchy)의 부정이 초래하는 결과들로 다시 돌아가 보자.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한 사람이 자신의 본성에 부합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며, 그것조차도 거의 우연처럼 일어나는 일이다. 오히려 그러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다. 나아가 더 문제적인 것은, 동일한 인물이 전혀 성격이 다른 여러 기능들을 연속적으로 수행하도록 요구받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마치 그가 자신의 소질과 적성을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바꿀 수 있기라도 하듯 말이다.


이는 극단적인 ‘전문화(specialization)’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 특히 정치 영역에서 그렇다.


전문가들의 ‘전문성’이 실제로는 환상에 불과하거나,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극히 협소한 범위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전문성에 대한 믿음 자체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믿음이 정치인의 직업에는 거의 적용되지 않는가? 왜 정치 영역에서는 가장 극단적인 무능조차도 거의 장애물이 되지 않는가? 이는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성찰해보면, 이러한 현상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점, 오히려 그것이 민주주의적 개념(democratic conception)의 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권력이 아래로부터 유래하며 본질적으로 다수의 의사에 기반을 둔다는 관념인데, 이 개념의 필연적 귀결은 모든 진정한 능력(competence)의 배제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능력도 최소한 일정한 상대적 우월성을 전제로 하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소수(minority)의 몫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한편으로는 민주주의 사상 아래에 놓인 궤변들(sophistries)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상이 현대의 전반적인 정신적 태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밝히기 위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두고 있는 관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논의가 어떠한 정당적 입장이나 정치적 논쟁에도 전혀 연루되지 않으리라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다른 어떤 연구 대상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비개입적이며 무관심한 태도로 바라본다.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이 주제의 배후에 놓여 있는 것들을 가능한 한 명확하게 밝혀내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오늘날 이 문제에 관하여 동시대인들이 품고 있는 온갖 환상들을 걷어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며, 아니 오히려 유일하게 필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앞서 언급한 것들과는 다소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유사한 성격을 지닌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결국 ‘암시(suggestion)’의 문제이다. 그리고 일단 어떤 것이 하나의 암시로 인식되고,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이 파악되면, 더 이상 그것은 사람들의 정신에 영향을 미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종류의 사안들을 다룰 때에는 감상적인 수사나 정당 간 논쟁 같은 것들이 아니라, 훨씬 더 냉철하고 순전히 ‘객관적’인 고찰이야말로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하며, 다만 개인적 기호의 표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반론은 몇 마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즉, 높은 것은 낮은 것으로부터 나올 수 없고, 더 큰 것은 더 작은 것으로부터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수학적 확실성이며, 어떤 것도 이에 반박할 수 없다. 또한 주목할 점은, 이와 동일한 논증이 다른 차원에 적용될 경우 유물론(materialism)에 대해서도 똑같이 제기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적 태도와 유물론적 태도는 겉으로 보기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중이 스스로 가지고 있지 않은 권력을 타인에게 부여할 수는 없다는 것은 지극히 명백한 사실이다. 참된 권력은 오직 위로부터 나올 수 있으며, 따라서—덧붙이자면—그 권력은 사회 질서 위에 존재하는 어떤 것, 즉 정신적 권위(spiritual authority)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권력의 단지 위조물에 불과하며, 어떠한 원리도 결여된 채 정당성을 가질 수 없고, 그 안에는 혼란과 무질서 외에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참된 위계 질서의 전도는 세속 권력(temporal power)이 정신적 권위로부터 독립하려 할 때 시작된다. 나아가 그것은 종국에는 정신적 권위를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키려는 시도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찬탈(usurpation)이며, 이후 일어나는 모든 다른 찬탈들을 가능하게 하는 길을 열어준다. 예를 들어 프랑스 군주제 자체가 14세기 이후로 자신을 무너뜨릴 혁명을 무의식적으로 준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언젠가 우리는 이 관점을 충분히 설명할 기회를 가질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간략히 언급하는 데 그쳐야 하겠다.


만일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단어가 ‘국민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정치 체제’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는 말이며, 어느 시대이든 사실상으로조차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다. 사람들은 종종 단어에 현혹되는 오류에 빠지기 쉽지만, 우리는 이에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사람들이 동시에 지배자이자 피지배자일 수 있다는 주장은 본질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빌리자면, 동일한 존재가 동일한 관계 속에서 동시에 ‘현실태(in act)’와 ‘가능태(in potency)’일 수는 없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두 항(terms)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지배자가 없다면 피지배자 역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그 지배자들이 불법적이고 오직 스스로의 권력 주장만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현대 세계를 지배하는 자들의 가장 교묘한 기술은 대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다스리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에 있다. 사람들은 그러한 환상이 자신을 기분 좋게 해주는 만큼 더 쉽게 그것을 믿고자 하며, 또한 애당초 그러한 믿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을 만큼 깊이 있는 사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 환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보통선거(universal suffrage)’라는 제도가 고안된 것이다. 법률은 다수의 여론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주장되지만, 간과되는 사실은 여론이라는 것이 얼마든지 쉽게 유도되고 조작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적절한 방식으로 암시(suggestion)를 주면, 여론을 이쪽 방향으로든 저쪽 방향으로든 얼마든지 유도할 수 있다.


‘여론을 제조한다(manufacturing opinion)’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 다만 덧붙여야 할 점은, 그러한 여론을 제조할 수단을 실제로 갖고 있는 자들이 항상 겉으로 드러나는 지배자들(apparent control)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마지막 지적은 왜 대부분의 주요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무능이 상대적으로 별 의미를 갖지 않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해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이른바 ‘정부 기계(machine of government)’의 작동 원리를 철저히 폭로하려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는 다만 그 무능함 자체가 앞서 말한 환상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만을 지적하는 데 그치겠다. 실제로 그것은 필수적인 조건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치인들이 ‘다수로부터 나왔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곧 다수와 동일한 모습을 띠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수가 어떤 문제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든 간에, 그 다수는 언제나 무능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왜냐하면 온전한 지식에 근거하여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매우 소수이고, 반면 그렇지 못한 자들의 수는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법은 다수가 만들어야 한다’는 사상의 오류를 보다 정확하게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이 사상은 실질적 현실과는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이론적 주장에 머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현대의 사유 속에 어떻게 뿌리를 내렸는지, 어떤 경향성과 결합되어 있으며, 또 어떤 경향성—적어도 외견상으로는—을 충족시키는지를 설명하는 일은 여전히 필요하다.


이 사상의 가장 명백한 결함은 우리가 방금 지적한 바로 그것이다. 즉, 다수의 의견은 본질적으로 무능의 표현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지능의 부족이든, 단순한 무지이든 간에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여기서 이른바 ‘대중 심리학(mass psychology)’의 몇 가지 관찰 결과를 인용할 수도 있다. 예컨대 군중을 구성하는 개개인에게서 유발된 심리적 반응들이 집합적으로 응고되어 형성되는 일종의 집단적 정신병리(psychosis)는 평균 수준조차 되지 못하며, 오히려 그 집단 안에 존재하는 가장 열등한 요소의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약간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일부 현대 철학자들은 심지어 민주주의 이론을 지적 영역(intellectual realm)에까지 도입하려 시도한 바 있다. 이들은 ‘보편적 합의(universal consent)’라 불리는 것 안에서 진리의 기준(criterion of truth)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가령 모든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동의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합의 자체만으로는 그 무엇도 입증되지 않는다. 더구나 어떤 문제든 간에 그에 대해 전혀 사고해 본 적조차 없으며 아무 의견도 없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러한 완전한 일치(unanimity)가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설령 그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는 이를 입증할 방법이 없으며, 결국 진리를 뒷받침한다고 주장되는 것은 다름 아닌 다수의 동의, 그것도 시간과 공간의 측면에서 필연적으로 매우 제한된 집단의 동의에 불과한 것이다.


이 영역에서 민주주의 이론의 파산은 더욱 명백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정치 영역에서 거의 필연적으로 개입하게 되는 감정적 영향(sentiment)을 보다 쉽게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감정적 영향은, 본래 지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능력을 지닌 사람조차도 어떤 사태를 명확히 인식하는 데에 큰 장애가 된다. 감정적 충동은 사유를 방해하며, 이러한 감정과 사유의 양립 불가능성을 악용하는 것이 정치 영역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기만적 술책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제 이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어 보자. 오늘날의 정부들이 그들의 정당성의 유일한 근거로 삼고 있는 이른바 ‘최대다수의 법칙(law of the greatest number)’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물질과 물리적 힘(brute force)의 법칙일 뿐이며, 그것은 곧 덩어리진 질량이 중력에 의해 쏟아져 내리며 그 아래 있는 모든 것을 짓이겨버리는 법칙과 동일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민주주의 개념과 유물론(materialism)이 하나로 접합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되며, 또한 이 개념이 오늘날의 정신 속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물의 정상적 질서는 완전히 전도된다. 그리고 그 결과 ‘다수성(multiplicity)’ 그 자체의 우위가 주장되는데, 이러한 우위는 사실상 물질적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에 정신적 세계(spiritual world), 그리고 더욱 분명하게는 우주적 질서(universal order)에서는 언제나 일자(一者, unity)가 위계의 정점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바로 일자야말로 모든 다수성을 산출하는 근원적 원리(principle)이기 때문이다.


일단 근원적 원리(principle)가 부정되거나 시야에서 사라지면, 거기에는 단순한 다수성(multiplicity)만이 남게 되며, 그것은 곧 물질(matter)과 동일한 것이다. 나아가 우리가 방금 언급한 ‘무게(weight)’에 대한 비유는 단순한 수사적 비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물리적 힘의 영역—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의—에서 무게란 실제로 하강하고 압축하는 경향성을 나타내며, 그것은 존재의 점점 더 심화되는 제한을 수반함과 동시에 다수성으로의 경향을 초래한다. 이 다수성은 여기서 밀도의 증가로 나타나며, 이러한 경향성은 근대 이래 인간 활동의 전개를 형성해 온 것이다.


또한 주목해야 할 점은, 물질은 그것이 분할하고 제한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스콜라 철학이 말하는 바의 개체화 원리(principle of individuation)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현재 다루고 있는 문제와 이전에 언급했던 개인주의(individualism)에 관한 논의 사이의 연관성을 확인하게 된다. 지금 언급한 이 경향성은 바로 그 개체화(individualizing) 경향성과 동일하며, 그것은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원초적 일자(原初的一者, original unity)로부터 이탈한 자들의 타락(Fall)으로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원리로부터 분리된 다수성—즉, 더 이상 일자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수성—은 사회적 영역에서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즉, 공동체가 단지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 개인들의 산술적 합계로만 이해되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공동체든 개인들보다 상위에 놓인 원리와의 결합을 상실한 순간, 그것은 본질상 그저 개체들의 총합 이상이 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유형의 공동체에서 작동하는 법칙은 말 그대로 최대다수의 법칙(law of the greatest number)이며,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 사상이 기반을 두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의 여지를 해소하기 위해 잠시 멈춰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현대적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논함에 있어 거의 전적으로 지성의 영역(intellectual order)에서 나타나는 그것의 양상만을 다루어 왔기에, 어떤 이들은 사회 질서(social order)에 있어서는 정반대의 현상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개인주의’라는 단어를 가장 협소한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집단성(collectivity)을 개인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상정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국가(State)의 점점 더 침투적인 역할 확대나 사회 제도(social institutions)의 복잡성 증가와 같은 현상들이 개인주의와는 정반대의 경향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집단성’이란 그 안에 포함된 개인들의 단순한 총합 이상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개인들과 진정으로 대립될 수 없다. 이는 현대적 개념에 따라 이해되는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즉, 국가도 결국은 단지 대중의 단순한 표현(representation of the masses)에 불과하며, 그 안에는 상위 원리(higher principle)가 어떤 방식으로도 반영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정의한 바에 따르면, 개인주의란 모든 초개인적 원리(supra-individual principle)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중의 총합이든, 현대적 국가 개념이든,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간에, 그것은 모두 개인주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상적 경향의 발현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회 영역에서 어떤 경향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고 해도, 그 갈등은 개인주의와 그것의 반대되는 어떤 것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오직 개인주의 자체가 취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들 사이의 내적 충돌일 뿐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이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도 훨씬 더 빈번하고 심각한 이유는, 이 다수성(multiplicity)을 통일시킬 수 있는 어떠한 원리(principle)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개인주의는 필연적으로 분열(division)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열과, 그로부터 초래되는 혼란한 상태는 전적으로 물질적 문명(material civilization)의 필연적 귀결이다. 왜냐하면 바로 물질 자체가 분열과 다수성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민주주의 사상이 낳는 한 가지 직접적인 결과를 더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엘리트 개념의 부정이다. ‘민주주의(democracy)’가 ‘귀족정(aristocracy)’에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데는 결코 우연이 없다. 왜냐하면 이 두 번째 용어는, 적어도 어원적 의미에서 보자면, 엘리트의 지배, 곧 탁월한 자들의 권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엘리트는 본질상 소수(few)일 수밖에 없으며, 그들의 권력—혹은 보다 정확히 말해 권위(authority)—는 그들의 지적 우월성(intellectual superiority)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민주주의가 그 기반을 두고 있는 숫적 다수성(numerical strength)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다수성은 본질적으로 소수를 다수에게 희생시키려는 경향성, 다시 말해 질(質)을 양(量)에, 엘리트를 대중에게 희생시키려는 성향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엘리트(true elite)가 수행해야 하는 지도적 기능(guiding function)—그리고 그것이 존재한다면 필연적으로 수행하게 되는 바로 그 기능 자체—는 민주주의(democracy)와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평등주의 개념(egalitarian conception)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 결과 모든 위계(hierarchy)의 부정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상의 토대는 바로 “한 인간은 다른 인간과 동등하다”는 가정에 놓여 있는데, 이 동등성은 단지 숫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에 기초할 뿐이며, 실제로는 어떤 다른 면에서도 인간들 사이에 실질적 평등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무시한다.


앞서 말했듯이, 진정한 엘리트는 오직 지적 엘리트(intellectual elite)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순수한 지성(intellectuality)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만 성립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현대 세계의 실상이다. 그러나 평등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며, 아무리 평준화(leveling)를 시도하더라도 인간 사이의 차이는 결코 완전히 제거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점에서 나타나는 모순된 논리(illogic)로 인해 결국 가짜 엘리트(false elites)를 고안해 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가짜 엘리트들은 참된 엘리트를 대체하겠다고 주장하면서, 사실은 전적으로 상대적이고 우연적인 우월성—그리고 그것도 전적으로 물질적 차원(material order)에 속하는—에 기반하고 있다.


이 점은 오늘날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구분 기준이 부(wealth)라는 사실만 보아도 명확하다. 부란 곧 순전히 외적인 우위, 그리고 전적으로 양적인 질서에 속하는 우위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우위만이 민주주의의 관점과 일치하는 유일한 ‘우월성’이며, 민주주의는 이러한 양적 동일성과 상대적 비교 위에 세워진 체제다.


덧붙이자면, 오늘날 이 상태에 반대한다고 자처하는 자들조차도 실상 이 혼란(disorder)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real remedy)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오히려 같은 방향으로 더욱 극단적으로 나아감으로써 혼란을 심화시키기조차 한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보다 높은 차원의 원리(principle of a higher order)에 호소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벌어지는 투쟁이란 결국 서로 다른 형태의 민주주의 사이의 투쟁일 뿐이다. 그것들은 단지 평등주의적 경향(egalitarian tendency)에 어느 정도 강조를 두느냐에 따라 다를 뿐이며,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개인주의의 다양한 변형들 사이의 갈등과 다를 바 없다. 요컨대, 그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의 내적 충돌에 불과하다.


이러한 몇 가지 성찰만으로도 현대 세계의 사회적 조건들이 어떠한지를 개괄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며, 동시에 혼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도 명확해진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영역이든 다른 어떤 영역이든 지성(intellectuality)의 회복이며, 그 결과로 진정한 엘리트의 재형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서구 세계에서 진정한 엘리트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명칭은 단지 흩어져 있고 고립된 몇몇 요소들에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만 아직 전개되지 않은 가능성들을 상징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들은 대부분 경향성이나 열망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하며, 그것들이 현대 세계관에 대해 반작용적으로 대응하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 결여된 것은 바로 참된 지식(true knowledge)과 전통적 자료(traditional data)이다. 그러나 이것은 즉흥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의 힘에만 의존하는 지성—특히 모든 측면에서 불리한 환경 속에 놓여 있는 지성—으로는 그것을 매우 제한적이고 불완전하게밖에 제공할 수 없다.


그 결과, 오늘날 존재하는 것은 원리와 교의(doctrinal)적 지침의 부재로 인해 종종 길을 잃는 분절된 노력들(disjointed efforts)뿐이다. 어쩌면 현대 세계는 그 분산성(dispersion) 자체를 통해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분산성은 심지어 현대에 반대하는 이들조차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의 반대자들이 여전히 ‘세속적인(profane)’ 지반에 머무는 한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영역은 현대 정신(modern mentality)이 지닌 명백한 우위를 발휘하는 고유하고 독점적인 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이 이 세속적 지반에 계속 머문다는 사실은 모든 외관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정신이 그들 위에 여전히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것이 바로, 아무리 의도가 선한 사람들일지라도 왜 그들이 “모든 것은 원리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들은 끝내 자신들의 에너지를 상대적인 영역—사회적이든 그 밖의 것이든—에 허비하고 있으며, 그런 조건 아래에서는 실질적이고 지속 가능한 어떤 것도 결코 성취될 수 없다.


반면에, 진정한 엘리트(true elite)는 이러한 영역들에 직접 개입하거나 외적인 활동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무의식적인 영향력(influence)을 통해 모든 것을 은밀히 지도하게 될 것이며, 그리고 그 영향력이 덜 가시적일수록, 그만큼 더 강력하게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암시(suggestion)의 힘만 생각해 보아도, 진정한 지성(pure intellectuality)에 기초하고, 그 본질적 특성 때문에 훨씬 더 은밀하게 작용하는 영향력의 위력이 얼마나 클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암시는 진정한 지성적 작용을 전혀 요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데, 하물며 그보다 무한히 더 높은 차원에서, 순수한 지성적 통찰에 기반한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영향력은 다수성(multiplicity)이 본질적으로 수반하는 분열(division)이나, 거짓과 환상이 지닌 내적 허약함에 의해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원적 일자(principial unity)에 집중함으로써 더욱 강화된다. 그것은 곧 진리 그 자체의 힘(strength of truth)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Guénon, René. The Crisis of the Modern World. Translated by Arthur Osborne, Marco Pallis, and Richard C. Nicholson. Hillsdale, NY: Sophia Perennis, 2001. pp. 6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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