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주의적 무신론과 종교에 관한 고찰

“무신론도 종교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무신론자들을 조롱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겉보기에는 이 말이 그저 논리적 도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조롱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그 말 속에는 의외로 철학적으로 음미해볼 만한 직관이 숨어 있다. 그들이 무신론 안에서 무언가 낯설지 않은 구조, 익숙한 감정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직감은 대체로 옳다. 다만 그 조롱은 자기 부정으로 돌아온다. 왜냐하면 (근현대 이후) 무신론은 사실상 서구 기독교 문명의 사생아이기 때문이다.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무신론자에게 “너희도 절대 가치를 믿고 있다”고 말하며, 그들이 신을 부정하면서도 어떤 도덕률을 지키는 것을 곧 ‘신앙’의 증거로 간주한다. 그들에게는 모든 체계가 종교이며, 신을 부정하는 것조차 종교적 열정의 반영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곧 종교라는 개념 자체의 희석으로 이어진다. 신이 있는 신앙과 신 없는 합리주의를 같은 범주로 묶는 순간, 종교는 무엇이든 될 수 있게 되고,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종교를 그렇게 확장하는 행위는 기독교 자체의 정체성도 붕괴시킨다.


“무신론도 종교”라는 진단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무신론이 실제로 특정 종교의 구조를 반복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무신론은 어떤 종교와 가장 닮았는가? 이슬람교, 불교, 도교, 힌두교, 신토, 사이언톨로지... 이들 가운데 정답은 아니다. 도교나 불교는 ‘신’을 중심축에 두지 않거나, 존재 자체를 상대화한다. (특히 불교의 무아론은 ‘신’ 없는 구조적 통찰의 전형이지만, 도그마화된 신념 체계를 편집증적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힌두교나 조로아스터교는 다신론적 세계관을 갖기에, 중심적 윤리와 구원의 개념이 다층적이며, 역사보다는 순환의 세계관에 가깝다. 신토나 사이언톨로지 같은 종교는 지역적·문화적 특수성 또는 창시자의 카리스마에 의존한다. 이 역시 무신론의 냉정한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현대 무신론과 제일 닮은 종교는 바로 기독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계몽주의 이후 세속화된 기독교, 즉 모던 리버럴리즘(Modern Liberalism)과 사회주의의 철학적 조상으로서의 기독교 말이다.


기독교와 현대 무신론적 진보주의(특히 리버럴리즘과 사회주의)는 놀랍도록 유사한 구조를 공유한다.


첫째, 구속과 해방의 서사 구조는 양측 모두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원죄에 빠졌고, 회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이른다는 내러티브가 핵심이다. 이에 반해 무신론적 진보주의는 인간이 사회적·역사적 억압 속에 있으며, 계몽과 진보, 혁명을 통해 해방된다는 서사를 중심에 둔다. 


둘째, 윤리 체계의 절대성 역시 공통점이다. 기독교는 신의 계율, 즉 성서의 명령을 절대적인 도덕 기준으로 삼는다. 반면, 무신론적 진보주의는 인권, 평등, 정의와 같은 보편 윤리를 절대화하며, 마찬가지로 논쟁의 여지가 없는 도덕적 기준으로 삼는다. 


셋째, 선민 의식 또한 유사하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는데, 현대 좌익 무신론적 이데올로기들은 계몽된 시민, 깨어 있는 사람들, 혹은 해방된 노동자 계층을 의식적으로 ‘더 진보된 인간’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넷째, 역사에 대한 시간관에서도 두 체계는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 기독교는 인류의 역사를 타락에서 구속, 그리고 종말에 이르는 직선적 서사로 이해하며, 그 끝에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궁극적 심판의 이중 구조가 놓여 있다. 한편, 무신론적 진보주의는 인류가 이성·과학·정의를 통해 나아가는 진보의 과정을 상정하며, 그 결말로서 완전한 평등과 해방이 실현된 유토피아적 미래를 기대한다. 겉으로 보기엔 긍정적 이상향만을 상정하는 듯하지만, 이에 반하는 자들에겐 (SJW들에 의해) 비공식적인 ‘지옥’, 즉 캔슬 컬쳐(Cancel culture)콜아웃 컬쳐(callout culture)라는 형벌이 부과되곤 한다. 즉, 신은 사라졌지만 심판의 기능은 다른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다섯째, 신념의 확산 방식에서도 유사한 구조가 드러난다. 기독교는 복음을 전파하며 이웃을 전도(傳道)하려는 강한 선교적 충동을 가지고 있고, 무신론적 진보주의자들 역시 교육, 캠페인, 사회운동, 정치적 개입 등을 통해 계몽과 의식화(ideological conversion)를 시도한다.


여섯째, 이단 심판의 메커니즘도 유사하게 존재한다. 기독교는 배교자나 이교도에게 지옥의 형벌을 예고한다면, 무신론적 진보주의는 ‘극우’, ‘혐오주의자’, ‘반지성주의자’ 등으로 낙인찍힌 이들을 단순한 비판을 넘어서, 직업적 기회, 사회적 평판, 공동체 내 입지 등에서 상대를 철저히 배제하려든다즉, 신이 죽은 사회에서도 여전히 이단자에 대한 제명과 추방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로 미루어볼 때, 오늘날의 무신론적 진보주의가 비록 인격신을 부정하지만 그 정신적 틀과 윤리적 작동 방식에서는 기독교의 세속적 유산을 강하게 계승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이 사실이 기독교 우파에게는 마냥 달갑게 여겨지지는 않을 것이다.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 a.k.a mencius moldbug)은 이 구조적 유사성을 더 급진적으로 설명했다. 야빈은 『How Dawkins Got Pwned』(어떻게 도킨스가 몰락했는가)라는 글에서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현대 무신론자들을 “청교도 무신론자(Puritan atheist)”라고 부른다. 그들의 사상은 실제로 17세기 영국 내전기의 비국교도들(Leveller, Quaker, Fifth Monarchist 등)의 구조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야빈에 따르면, 이 청교도적 사상은 미국에 이주해 신정적 식민지를 만들었고, 이후 독립전쟁, 남북전쟁, 세계대전, 냉전 등을 거치며 세계적 패권 이데올로기로 발전했다. 다음은 야빈의 중 일부다.


내 생각에 리처드 도킨스 교수는 단순한 기독교적 무신론자가 아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무신론자(Protestant atheist)다. 아니, 칼뱅주의적 무신론자(Calvinist atheist)다. 더 정확히는, 앵글로-칼뱅주의 무신론자(Anglo-Calvinist atheist)다. 다시 말해, 그는 청교도적 무신론자(Puritan atheist), 비국교도적 무신론자(Dissenter atheist), 비순응주의 무신론자(Nonconformist atheist), 복음주의 무신론자(Evangelical atheist) 등으로도 불릴 수 있다.


이 분류학적 족보(cladistic taxonomy)는 도킨스 교수의 지적 계보를 약 400년 전, 영국 내전(English Civil War)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무신론이라는 주제만 제외하면 말이다. 도킨스의 핵심 사상(kernel)은, 랜터(Ranter), 레벨러(Leveller), 디거(Digger), 퀘이커(Quaker), 제5왕국주의자(Fifth Monarchist), 혹은 크롬웰 시대의 간헐적 무정부 상태(Cromwellian interregnum) 동안 번성했던 영국의 극단적 비국교도 전통(English Dissenter traditions)들과 놀라울 정도로 잘 들어맞는다.


솔직히 말해서, 이 자들은 완전히 미쳤었다. 맹목적인 광신도들(maniacal fanatics)이었다. 17세기, 18세기, 19세기 어느 시대의 주류 영국 사상가라도 이 전통(혹은 그것의 현대적 후손)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지배적인 기독교 교파가 되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건 종말이 가까웠다는 징조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당신이 그들이 틀렸다고 확신한다면, 당신은 나보다 더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이다.


다행히도, 크롬웰(Cromwell) 본인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편이었다. 이 극단적 초(超)청교도 분파들(extreme ultra-Puritan sects)은 호국경 체제(Protectorate) 하에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더욱 다행히도, 크롬웰은 나이를 먹고 죽었고, 그와 함께 크롬웰주의(Cromwellism)도 함께 죽었다. 합법적 정부는 다시 영국에 복원되었고, 영국국교회(Church of England)도 함께 돌아왔으며, 비국교도들(Dissenters)은 다시 사회적 변두리(marginal fringe)로 밀려났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그렇게 퇴장한 건 천만다행이었다. (a damned good riddance)


하지만 기생충은 쉽게 죽지 않는다. 한 무리의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도피하여 뉴잉글랜드의 신정적 식민지(theocratic colonies)를 세웠고,


그로부터 미국 청교도주의(American Puritanism)는 미국 독립전쟁(American Rebellion)과 남북전쟁(War of Secession)에서의 군사적 승리를 발판 삼아 세계 지배를 향한 길을 착실히 밟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냉전에서의 승리는 이 사상적 흐름의 지구적 패권(global hegemony)을 결정적으로 굳혀놓았다.


오늘날 지구상에서 정당하고 ‘주류’라 여겨지는 모든 사상은, 결국 미국 청교도주의, 그리고 그 뿌리인 영국 비국교도 전통(English Dissenters)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즉, 우리가 아는 (그리고 그렇게나 기독교 신도들이 혐오해 마지않는) 진보주의적 무신론은 신을 제거한 청교도주의의 후손이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무신론도 종교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실은 이런 말을 하는 셈이다.


“내가 지키는 고귀한 종교와 네가 믿는 이념은 구조적으로 똑같아.”

→ “그러니 너도 결국 나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셈이야.”

→ “그런데… 그러면 내 종교는 더 이상 고귀하지 않은데?”


결국 그는 무신론자를 조롱하면서 자기 종교의 고유성과 차별성을 파괴하는 자해적 논리를 실행하고 있는 셈이다. 마치 부모가 자기 자식(사생아이긴 하다만)의 얼굴을 보고 침을 뱉는 것처럼.


물론 본 필자는 기독교적 무신론, 또는 사회주의적 무신론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 없는 교리를 또 하나 만들 뿐, 자유로운 사유나 회의 정신을 억압한다고 본다. 물론 종교 그 자체에 대해서도 그닥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종교란 인간의 진화적 역사 속에서 형성된 심리적·사회적 적응 기제이다. 선사시대 인류는 자연현상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고, 생존과 고통 속에서 두려움과 위안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식으로 토테미즘, 애니미즘, 샤머니즘 같은 원시신앙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한 초자연적 사고 방식은 단순한 문화 현상이 아니라, 수십만 년에 걸쳐 축적된 심리적 성향으로 인류의 유전자 속에 일정 부분 각인되었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감흥과 경외심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종교적 감흥에 대한 개인차를 설명하려는 시도로, 신경신학(Neurotheology)에서는 전두엽과 측두엽의 특정 회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힌다. 특히 신비 체험 중 활발히 작동하는 뇌 영역의 반응성이 낮은 경우, 종교적 몰입이나 신앙적 확신을 경험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필자는 애초에 그 회로의 민감도가 낮은 신경학적 특성을 지니고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관련 글들은 다음 링크를 참고하라: https://www.sralab.org/articles/news/new-research-reveals-brains-role-mystical-experiences


https://pubmed.ncbi.nlm.nih.gov/6664802/


https://www.wired.com/1999/11/persinger/


https://www.researchgate.net/publication/7887692_Sensed_presence_and_mystical_experiences_are_predicted_by_suggestibility_not_by_the_application_of_transcranial_weak_complex_magnetic_fields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abs/pii/S0028393215302360


https://en.wikipedia.org/wiki/Hyperreligiosity

)


필자의 관점은 오히려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등장하기 이전, 보다 오래된 회의주의적 전통, 예컨대 고대의 철학자들인 데모크리토스, 루크레티우스, 에피쿠로스 등에 가깝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여하튼 결론은 오늘날의 무신론의 절대다수가 진보주의적 무신론인 동시에 지나치게 기독교를 닮았다는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회주의, 아니 어쩌면 사회주의의 원류가 되는 이념들이 태동하기 이전의 철학으로 완전히 되돌아가지는 못할지언정, 그 고대 철학들을 다시 긍정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주권(主權), 책임, 소유: 공적 이익과 사적 이익 일치의 방법론에 관하여

정치적 자유라는 이름의 버퍼(Buffer)

일본천황 황위 계승권 개정안 통과, 여성 천황 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