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중징, 한국 및 세계 주변부에서의 자발적 질서의 흥망에 대하여
류중징 (刘仲敬) 인터뷰 052 @ 2019년 8월 28일
한국 및 세계 주변부에서의 자발적 질서의 흥망에 대하여
2019년 9월 3일
천(陈) 의사와 류중징(刘仲敬) 인터뷰 제52회 정리 원고
진행자: 타이완 천이홍(陈易宏) 의사
공개일: 2019년 9월 3일
정리자: 산마 형제(三马兄)
[00:15]
진행자: 앞서 선생님께서는 한국이 대륙에 위치한 만큼 지정학적으로 안전하지 않다고 하신 바 있습니다. 지난주, 대한민국은 일본과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더 이상 갱신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때 선생님께서는 트위터에서 이것이 한국이 대륙 체제로 기울고 있다는 위험한 징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국제 사회 대부분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정하면서 대만의 주권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또 한국에는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지만 대만에는 없고, 인구나 경제 규모도 한국이 대만보다 약 세 배 정도 큽니다. 전후 한국의 상층 계층은 미국과도 긴밀히 협력해 왔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이점이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을 신뢰하거나 보호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려면, 한국이 어느 정도 선까지 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한국은 반도체 제조업, 자동차 제조업, 대형 조선업 등에서 강한 경쟁력을 보이며, 이는 전 국민적 동원 체제의 반영으로 보입니다. 만약 한국이 정말로 대륙 체제로 기운다면, 미국-일본-대만 세 축이 포위하려는 중국 제조업에 첨단 부품을 공급하게 될까요? 예컨대 옛 소련의 자동차는 대부분 점화 플러그를 동독에서 들여왔고, 정밀 부품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들여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중공(贵匪)은 또다시 삼십 년을 연명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01:32]
류중징(刘仲敬): 이게 바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인데, 바로 '기호와 실질은 자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장쭤린(张作霖)이 젊었을 때는 자신이 청나라 황제보다 위대하다고는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청나라 황제는 조상 덕에 기대어 살아간 반면, 장쭤린은 자신의 후손을 위해 자본을 축적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는 단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권력의 실질과 권력의 형식은 늘 불일치합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세상의 법칙은 매우 단순합니다. “네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 이 말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가 《월든》(Walden)에서 한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결국 얻게 된다. 그러므로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매우 신중해야 한다.” 실제로 세상은 이렇습니다. 핵심은 당신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실질적인 권력을 가진 자는 결국 형식적인 권력도 손에 넣게 됩니다. 반대로, 형식적인 권력을 위해 실질을 희생한 자는 결국 실질적인 권력도 잃게 됩니다.
[02:27]
그래서 이것은 '민족발명학'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만약 한국의 민족발명학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설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실질과 허상의 문제를 수반합니다. 민족의 발명이란 본질적으로는 신화를 통해 지식이 부족한 민중을 결속시켜, 엘리트가 설정한 방향으로 자발적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화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크냐에 따라, 이 민족발명이 성공할 수 있는 선천적 조건이 결정되며, 이는 바꿀 수 없습니다. 실제로는, 한국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실질적으로 저항한 사례가 거의 없습니다. 대다수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 통치를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신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여기서 '귀신을 그리는 건 쉽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로 접근하면, 상대적으로 진실에 가까운 쪽이 거짓말이 많은 쪽을 이기게 됩니다. 물론 어느 쪽도 완전한 진실을 담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귀신을 그리는' 경쟁이 되면, 누가 더 잘 꾸며내느냐가 관건이 됩니다. 결국 잘 꾸며낸 쪽이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03:40]
예를 들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풀리려 해도, 그 성적표는 그다지 화려하지 않습니다. 물론 중국 공산당의 성적표도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공산당은 아예 허공에서 무를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김일성(金日成)은 1945년에 고작 서른셋이었고, 이전까지 이렇다 할 업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백두산에서 수십 년간 유격전을 벌였다는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 역사는 실제로 존재한 적이 없지만 말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성과는 결국 꾸며낸 것입니다. 실사구시로 보면, 임시정부는 몇십 명이 회의만 했던 조직일 뿐 실제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은 그런 조직조차 없었으니, 그래도 임시정부가 조금은 나은 셈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반일(反日) 신화를 부풀리는 상황에서, 누가 더 그럴싸하게 포장하느냐가 중요해집니다. 마음의 거리낌 없이, 거품을 계속 불려나간 김일성 장군이야말로 결국 가장 매끄럽게 만들어낸 쪽이 됩니다. 남한과 국민당은 같은 병을 앓고 있습니다. 공산당처럼 100% 허구를 꾸며낼 용기도 없고, 동시에 실사구시로 말하자면 그들의 역사 또한 그리 떳떳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04:48]
국민당(国民党)의 진짜 역사는 이렇다. 처음에는 일본의 앞잡이였다가, 그다음에는 소련의 앞잡이로, 마지막에는 미국의 앞잡이가 되었다. 만약 실사구시적으로 말하자면 이렇게 체면을 내려놓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개로서 살아온 세월이 3분의 2쯤 되고, 우리가 맡은 개의 역할은 공산당보다 훨씬 고귀했다. 공산당은 태초부터 소련의 개로 살아왔고, 분명히 미국이나 일본의 개가 소련의 개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하지만 이건 그들이 '체면 차리기'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를 예로부터 줄곧 혁명가였다고 선언하려 든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 중 일부는 결코 지울 수 없기에 곤란한 입장에 처한다. 두 입장을 다 만족시키려다 보니, 결국 제임스 국왕이 영국 국교회를 두고 했던 말을 떠올리게 된다. "너희는 가톨릭을 비판할 땐 청교도 논리를 쓰고, 청교도를 비판할 땐 가톨릭 논리를 쓴다"고 했지.
[05:39]
내가 수년 전, 아마 2012년이나 2013년쯤에 국민당 지지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너희는 북양정부(北洋政府)를 비판할 때는 공산당의 논리를 쓰고, 공산당을 비판할 때는 북양정부의 논리를 쓴다. 공산당이 입헌이냐 아니냐 따지는데, 입헌정치를 한 건 명백히 북양정부지 너희가 아니다. 너희도 당국가(党国) 체제지만 다만 성공하지 못했을 뿐이고, 공산당은 같은 당국가를 좀 더 성공적으로 만든 것일 뿐이다. 그런데 왜 너희는 공산당을 반대하느냐? 북양정부를 반대하면서, 그들이 조약 체계를 지키고 굴욕적으로 국익을 팔았다고 하는데, 네가 진짜로 외교 혁명을 하려면 관세 좀 올리는 걸로는 부족하지 않느냐? 제국주의 기업 전부 몰수하면 될 것 아니냐? 너희가 북양정부를 비판했던 논리로 보면, 오히려 공산당이 옳고, 국민당 같은 어정쩡한 혁명은 혁명을 배신한 행위다. 반대로, 공산당을 비판했던 논리로 보면, 너희는 공산당의 공범이며, 민주주의와 입헌주의를 지키려 했던 북양정부는 너희와 공산당의 합작으로 전복된 셈이다. 너희는 어느 쪽이든 답이 없는 거다."
[06:37]
대한민국의 역사 창조 역시 마찬가지다. 김일성 장군(金将军)처럼 백지 상태에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용기도 없다. 귀신을 그리는 일은 가장 쉬운 법이다. 백 퍼센트 허풍을 떨 수 있다면, 태양신의 후손이라 주장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다. 지금 그들이 내세우는 이론과 비교하면, 김씨 일가가 태양신의 후손이든 이집트인의 후손이든 다 문제가 될 게 없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발명학은 모순된 상황을 만들어낸다. 한편으로는 그 엘리트 계층이 실질적으로 일본이 양성한 사람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일만이 정당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이 점이 매우 심각하며, 중국의 국영 기업이나 기관에서 자주 보게 되는 현상과 흡사하다.
[07:17]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자들은 모두 잡범과 불량배들이다. 그들 중 가장 나은 이들이 소자산계급 지식인인데, 상하이 상인을 위해 광고 쓰는 걸 거부하면서 하루 종일 “나는 천하를 경륜할 재능과 나라를 다스릴 포부가 있는데, 제국주의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내 학문은 전부 무용지물이다”라고 떠드는 부류다. 이런 사람이 좌파 중에서는 가장 엘리트에 속한다. 반면 좌파의 최하층은 일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아무 기술도 없는 불량배들인데, 정치적으로는 이들이 옳다고 여겨진다. 반대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정치적으로는 전부 틀린 사람들이다. 중국의 국영 기관이나 기업체는 대체로 이렇다. 일할 수 있거나 유능한 사람은 전부 매국노 취급을 받고, 애국자는 하나같이 불량배거나 기회주의자다. 최근 있었던 사건도 그랬다. 어떤 ‘훌륭한’ 학생이 네 가지 위대한 발명(四大发明)에 대해 논문을 쓰겠다고 주장했는데, 교수는 이것이 너무 황당하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학생은 교수를 신고했고, 교수는 끝장났다. 모든 학교와 기업, 기관은 이런 황당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08:19]
이러한 상황의 결과는 바로 ‘천장이 낮다’는 데 있다. 굶어죽기 직전일 때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닌 듯싶고, 그럭저럭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고 여긴다. 하지만 체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려 할 때, 이 천장은 심각한 장애물이 된다. 한국이 바로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 이는 마치 전설 속 서커스 단장이 항아리 속에서 키운 아이와 같다. 어릴 때는 그럭저럭 자란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서 기형적으로 성장하게 되며, 결국 키도 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자랄 수 있는 천장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는 필연적으로 분열로 이어진다. 우파, 즉 실제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네가 멋진 말을 몇 마디 했다고 내가 피땀 흘려 번 것을 너에게 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에 걸맞은 명분 있는 논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반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생각이 부족한 평범한 소시민이나 무산 계급은 언론에서 뭐라고 하느냐에 따라 쉽게 휘둘린다. 이들은 미국의 우파처럼 이념과 현실의 이해관계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단단한 기반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명박 같은 인물은 임기를 마친 뒤 감옥에 간다. 한국 대통령은 모두가 불행한 최후를 맞는다. 하지만 실질적 권력은 여전히 그들 손에 있다. 좌파가 집권하더라도, 그들은 역시 그 좌파를 결코 평안하게 두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분열 상태다.
[09:31]
분열 상태에서는, 결국 자신이 어느 위치에 놓여 있느냐가 관건이다. 솔직히 말해, 모든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민족 신화는 분열된 상태 속에 있다. 발칸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외부 환경에 따라 다르다. 라틴아메리카 국가는 미국이 보호해주기 때문에, 내부 사정이 아무리 나빠도 크게 망가지지 않는다. 영국이 개입하면 미국이 영국을 몰아내고, 독일이 개입하면 미국이 독일을 몰아내고, 소련이 개입하면 역시 미국이 소련을 몰아낸다. 그래서 내부 문제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지지 않는다. 그 결과로 볼리바르(Bolívar) 시대 이후 수십 년 동안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영토는 기묘하게도 유지되어 왔다. 사실 라틴아메리카는 많은 동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취약한데도 말이다. 이건 지리적 문제다. 예를 들어, 그리스 공산당과 이탈리아 공산당은 분명히 폴란드 공산당보다 훨씬 강력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이 강제로 억눌러 눌러버렸다. 반면, 폴란드 공산당은 자국 내에 아무런 기반이 없었지만, 소련이 억지로 위로 올려놓았다.
[10:22]
한국이 처한 상황이 필리핀 같은 위치였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 조금만 치우쳐도 전부를 잃을 수 있다. 중심부에 자리하면 애초에 움직일 수조차 없지만, 경계선에 위치하면 조금만 움직여도 판이 뒤집힌다. 예를 들어, 핀란드가 소련에게 점령당한다 해도 그다지 이상할 게 없고, 체코가 1948년에 공산화되지 못했더라도 이상할 게 없다. 이들 국가 모두 국경선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국경선에 위치한 나라다. 필리핀이 한국의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히 망했을 것이고, 한국이 필리핀 자리에 있었다면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민족 신화가 분열된 상태이며, 몇십 년에 걸쳐 이를 정비할 시간도 없다.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건, 해양의 보호를 받지 못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11:17]
이미 각자는 자신이 믿는 신화를 통해 기득권을 형성해 놓았다. 따라서 그 신화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존하는 분열을 더욱 확대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1926년 유상(刘湘)이 겪었던 상황과 비슷해진다. 당시 영국인에게 상하이는 이미 변방이었고, 충칭(重庆)은 더더욱 무의미한 곳이었다. 충칭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은 양쯔강을 항해하는 데 드는 군비도 못 댈 수준이었다. 애초에 그곳에 머물 생각도 별로 없었다. 이때 유상이 공산당을 강경하게 진압했다면, 영국이 머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영국은 ‘이런 귀찮은 곳은 가치가 없다’며 떠났다. 영국이 떠나고 난 후, 진짜 공산당이 들이닥치자 유상은 결국 국민당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당시 유상의 이야기다.
[12:00]
주한미군의 존재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미국 외교의 중대한 실패였다. 당시 조지 케넌(George F. Kennan)은 차라리 일본이 싸우는 게 낫다고 보았다. 원래 만주와 한국은 일본이 만든 체제였다. 지정학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은 전적으로 미국이 일본 제국을 해체하면서 거대한 정치적 공백이 생긴 탓이며, 결국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국 군대가 직접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크림 전쟁 이래, 그런 중요하지 않은 지역에서 자국 병사를 전쟁에 내보내는 일을 절대 하지 않았다. 반면 미국은 사상자가 대규모로 발생한 전쟁을 그다지 겪어본 적이 없다. 한국전쟁은 사망자 수 기준으로 미국 역사에서 아마 세 번째나 네 번째에 해당한다. 남북전쟁, 두 차례 세계대전, 그리고 베트남전쟁을 제외하면, 이 정도로 많은 미국인이 죽은 전쟁은 한국전쟁뿐이다. 이는 제국의 원칙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일이며, 미국 외교가 얼마나 순진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는 윌슨주의의 유산이며, 영국이나 로마의 노회한 외교 전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12:55]
사실상, 한국은 철저히 미국 군인의 보호 아래 세워진 국가다. 일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린 뒤, 일본이 남겨둔 인물들을 얼굴도 들지 못하게 만들고, 공산당의 등장을 억제한 상태에서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한국이라는 국가는 유지될 수 없었다. 정치적으로는 옳지 않다고 여겨질 수 있으나, 현실 세계에서는 대부분의 인구가 미국 민주주의 이론에서 말하듯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시민이 아니다. 그런 시민은 로마, 아테네, 혹은 아메리카 식민지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등장한다.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에서는, 일반 민중은 흐름에 휩쓸리는 존재이며, 엘리트 책임을 질 능력이 없다. 결국 어떤 엘리트 집단이 권력을 잡느냐가 핵심이다. 일본이 길러낸 이들이 권좌에 오르지 않았다면, 결국 소련이 길러낸 공산주의자들이 올라섰을 것이다. 미국은 여기에 끼어들어 잠시 완충 시간을 만들어 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완충 시간도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다.
[13:53]
미국은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려가며 한국을 얻었다. 만약 한국이 그에 대해 절실히 매달리며, 국방비를 절반씩 분담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면 아직 유지되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설령 한국이 절반을 부담하더라도 미국 입장에서는 여전히 손해다. 대륙을 방어한다는 건 미국에게 결코 이득이 아니다. 영국은 절대 크림반도나 콘스탄티노플에 자국 군대를 주둔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다. 튀르키예가 그 지역을 지킬 수 있다면, 튀르키예 스스로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없다면 그것은 영국과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은 제국주의에 맞선 애국 민족주의 이론을 유지하기 위해, 도리어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손해만 보고 있다. 미국은 자국 이익 때문에 한반도에 주둔하면서도 우리에게 비용을 요구한다.” 이런 식이라면, 미국은 군대를 철수시키고 바다만 지키는 편이 훨씬 비용이 적게 든다. 트럼프(Trump) 시대에는 이 점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스스로 방어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혹은 북한과 통일해서 핵무기를 손에 넣고, 일본과 대등한 강국을 만들어야 한다.
[14:43]
물론 이것은 중국에게는 기회다. 조공무역 체제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다. 한국이 일본과 대등한 지위를 원한다는 건 애초에 성립이 안 된다. 마치 체코나 핀란드가 독일처럼 중부 유럽의 강국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중부 유럽에서 강국이 될 수 있는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폴란드이거나 독일일 것이다. 이 둘을 꺾기만 하면, 중부 유럽은 반드시 소련 손에 넘어가게 된다. 소련은 어떤 경우에도 체제를 십 년 이상 유지하기 어렵다. 전후 그나마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독일의 잔존 자산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도 만주와 상하이가 없었다면 십 년조차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매우 좋은 기회다. 서쪽에서는 이란의 석유를 장악하고, 동쪽에서는 한국을 붙잡고, 동남아에서는 틈새를 찾는다. 사방에서 구멍을 뚫는 것이다. 소련의 방식만 받아들인다면, 그중 일부는 반드시 손에 넣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두려움 없이 행동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업그레이드되었다고 느낀다. 사실상 소련의 지위를 계승하여 미국 외에 제2의 국가가 된 셈이며, 이는 한 번도 누려본 적 없는 위상이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결국, 이는 냉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외교 지형의 재편으로 이어질 것이다.
[16:00]
그리고 남은 문제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이것이다. 소련은 체코와 독일을 손에 넣은 뒤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는데, 중국은 한국, 캄보디아, 라오스, 이란, 파키스탄을 아우르는 라인을 확보했을 때 과연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까? 이것은 본질적으로 시간축의 문제다. 스탈린이 체제를 연장할 수 있었던 핵심은 그 시기가 1930~40년대였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는 동방정교 신자들의 구세대가 아직 살아 있었고, 농민도 대량으로 존재했다. 하지만 만약 스탈린이 같은 정책을 1980년대에 펼쳤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 중국이 안고 있는 문제는, 사회 내부가 이미 텅 비어 있다는 점이다. 남아 있는 것은 극도로 이기적이고 완전히 원자화되어 있으며, 심지어 핵가족조차 구성하지 못하는 청년 무산계급뿐이다.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자산은 국유 기업과 공공기관에서 남겨진 껍데기뿐이며, 그 껍데기 안에 있는 구식 관리자와 기술자들이 수정주의 노선을 따라가고 있으며, 그들의 업무 습관이 존재할 뿐이다. 이들이 쇠퇴하고 사라지면, 더 이상 의지할 기반이 사라진다.
한국이 제공하는 기술도 중국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소련은 독일 기술을 소화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차르 시대부터 독일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중국에서 양산된 신세대 대학생들로는 그 기술을 다룰 수 없다. 확신하건대, 예컨대 TSMC의 기술자를 통째로 빼오지 않는다면, 설사 기술을 손에 넣는다 해도 그것을 활용할 수 없다. 고속철도는 대표적인 예다. 모방과 기술 절취의 전형이지만, 실제 운영 상태를 보면 엉망이다.
[17:27]
결국 ‘와팡디엔화(瓦房店化)’에도 등급이 있다. 완전히 퇴화하여 외세의 대리인(買辦)조차도 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면, 오로지 이데올로기로만 먹고살게 되고, 그마저도 되지 않으면 새롭게 외래 요소를 도입해야 한다. 그것은 왕조 교체나 이민족 침입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를 통해 다시금 ‘와팡디엔화’가 이루어진다. 러시아, 몽골, 투르크, 중국으로 이어지는 이 계열은 위계가 뚜렷하다. 러시아는 유럽보다 낮지만, 몽골·투르크보다는 높고, 몽골·투르크는 다시 중국보다 한 단계 높다. 따라서 러시아가 버틸 수 있는 것을 오스만 제국은 버티지 못하고, 오스만 제국이 버틸 수 있는 것을 중국은 감당하지 못한다.
중국이 소련의 모델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은, 한국이 일본과 동등하게 서려는 것만큼이나 무리한 일이다. 애초에 체질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에 제국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몽골, 투르크 같은 중앙아시아의 정복자들뿐이다. 이들이 역방향으로 식민화되는 것은 감당이 안 된다. 역방향 식민지화가 진행된다면, 규모를 축소해야 하며, 송나라와 명나라처럼 만리장성을 넘지 않고 그 내부에서만 작은 판을 유지해야 한다. 소련 같은 대규모 체제를 유지하려 한다면, 그 기본 체력이 부족하다. 한국도 포함해서, 그런 판을 감당할 수 없다.
[18:39]
한국이 현재 이 모양이 된 것은 ‘원근감의 착각’ 때문이다. 일본과 북한처럼 가까운 이웃은 악취처럼 느껴지고, 먼 곳은 향기처럼 느껴진다. 지금은 일본과 북한을 상대하고 있지만, 만약 중국을 상대하게 되면, 반드시 홍콩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아마 잊었겠지만, 1980년대 중반만 해도 홍콩 민주파는 반영(反英)이었다. 그들은 민주적 ‘귀속’을 요구했다. 당시 민주파는 지금의 건제파(建制派)와 다르며, 사토화(司徒華)를 중심으로 한 6·4 시기에 ‘참새 작전’을 주도한 홍콩 민주파가 그 주체였다. 1960년대에 배를 굶으며 중국에서 탈출해 홍콩에 온 사람들이 그들 곁에 있었음에도, 이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중국은 민주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 홍콩이 겪는 결과는 바로 그런 역사 경로의 누적 결과다.
한국이 중국과 친하게 지낸다면, 결과는 지금의 홍콩보다 훨씬 심각해질 것이다. 이는 체코가 범슬라브 정서를 기반으로 소련과 연계된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19:37]
게다가 중국은 소련처럼 러시아 병사의 군사 전통을 가진 나라도 아니다. 이란이든 캄보디아든 한국이든, 어느 방향으로 가든 군사적으로는 제압 능력이 없다. 제국의 핵심 요소는 언제나 ‘싸울 수 있는 병사, 고된 노동을 견디는 인내심, 기꺼이 희생할 각오’다. 그러나 중국의 페이라(费拉, 무기력한 대중)는 고된 노동은 견딜 수 있어도, 결코 희생은 감내하지 못하는 유형이다. 이런 이들은 전장에 나갈 수조차 없는 인물들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제국주의가 외부로 확장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이다.
스탈린은 비록 그루지야인이었지만, 러시아인의 본능적인 제국주의 성향과, 베를린과 파리를 향해 돌진하기 위해 어떠한 고난도 감내했던 러시아 병사의 정신에 의존했다. 하지만 중국의 페이라는 도저히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중일전쟁 당시에도 후방에서 장제스를 욕하던 사람은 많았지만, 그들이 전선에 나서는 일은 결코 없었다.
결론적으로, 전쟁을 치를 수 없는 제국주의는 수명을 오래 유지할 수 없다. 처음에는 운동(운동전, 공세) 속에서 잠시 굴러가지만, 단 한 번이라도 치열한 전투를 맞닥뜨리면 퇴각이 불가능해진다. 지금 홍콩이 바로 그 상태다. 중국은 지금 홍콩에서 물러설 수 없는 지점에 와 있다.
[20:56]
진행자: 현재 한국의 재벌과 기업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는 것은 일본이 길러낸 엘리트들입니다. 이들이 한국이 대륙 체제로 기우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요?
[21:12]
류중징(刘仲敬): 그건 꼭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상하이 자산계급은 장제스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결국 모조리 탈출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결국 ‘이데올로기 작업’의 중요성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저는 남의 이데올로기 작업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을 매우 혐오합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이 그걸 업으로 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더구나 중국의 사대부 문화는 애초부터 허구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이들은 이미 말기 아편 중독자처럼 허약해져서, 이제는 무책임한 진통제 같은 언사를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이데올로기가 전혀 쓸모 없는 것도 아닙니다. 방향이 잘못되면, 지금까지 쌓은 자산을 전부 날릴 수도 있습니다.
한국은 수십 년 동안 민족발명학의 영역에서 좌파 지식인들에게 완전히 끌려다녔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수준이 높지 않다는 증거이며, 결국 한국인은 아시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폴란드인이나 체코인은 말할 것도 없고, 발칸 반도의 루마니아인과 불가리아인 같은 이들조차도—비록 본질적으로는 터키인과 다를 바 없지만—20년쯤 시간이 주어지면 스스로 새로운 민족 신화를 창조해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은 지금까지도 별다른 신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다는 건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22:28]
진행자: 이전에 선생님께서 원세개(袁世凯)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제국주의의 길을 따라 세계 체계의 변두리에서 제국을 운영할 경우, 역사적 요인이나 상업적 요인으로 인해 강한 독립 의지를 가진 작은 지역들이 결국 분리되어 하나의 작은 실체로 남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컨대 한커우(汉口)의 관세 구역이나, 오늘날의 대만·펑후·진먼·마쭈(台澎金马) 관세 구역처럼 말입니다. 이들은 분명히 당시 대영제국이나 지금의 미국 같은 강대국에 귀속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세계 체계가 작동할 수 있는 범위에도 시대를 막론하고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상한선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영국이 대단하다 해도 통제할 수 있는 지역과 인구에는 한계가 있으며, 미국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전 세계 70억 인구를 전부 감당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23:30]
류중징(刘仲敬): 그것은 결국 비용의 문제입니다. 변방일수록 비용은 점점 상승하고, 이익은 점점 줄어듭니다. 이 균형점은 지속적으로 흔들리며, 균형점의 이동에 따라 변방 지역도 함께 이동합니다. 예를 들어 키프로스(Cyprus)의 경우, 터키에 속할 것인가 아니면 베네치아에 속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상업적 과두 세력은 베네치아를 지지했고 농민은 터키를 지지했습니다. 농민은 비록 동방정교 신자였지만, 자치를 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베네치아 자본주의 하에서 화폐 세금을 내느니, 차라리 오스만 제국 아래에서 소작료처럼 곡물 세금만 바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여겼습니다. 반면 항구 지역의 상업 자산계급은 그와는 정반대 입장을 가졌습니다.
중세 말기 키프로스에서 벌어진 일은 매우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즉, 당신은 상업 자본가와 제국주의적 매판 계급에게 착취당하길 원하는가, 아니면 관료제가 지배하는 국가의 관리에게 착취당하길 원하는가 하는 선택입니다. 이 문제는 정적인 시점에서 보느냐, 동적인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역동적이고 야심 있는 자산계급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자식은 언젠가 달마티아(Dalmatia)의 작은 베네치아 같은 나라를 세울 것이다.” 따라서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반면 관료 계급은 “나는 대대로 작은 지주로 살며 가급적이면 세금과 부역을 줄이고 싶다”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그에겐 터키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러한 가상의 후손들은 모두 이데올로기적 상상에 기반한 것이며, 당신의 이데올로기 구성은 자손의 성장 경로를 제약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 자손들은 서로 다른 사람이 됩니다. 물론, 키프로스 같은 지역은 오셀로(Othello) 같은 해군 지휘관이 한 번 더 전투에서 이겼다면 베네치아령이 되었을 것이고, 한 번 덜 이겼다면 실제 역사처럼 터키령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러시아와 같은 변방 지역 사람들이 “만약 몽골인 때문에 우리가 지체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쯤 유럽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400년을 낭비했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400년의 낭비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키프로스가 400년을 허비한 뒤, 나폴레옹을 낳은 코르시카 섬과 비교하려 해도 더 이상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침략하기 전이라면, 키프로스는 아마 코르시카보다도 더 발달한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25:44]
진행자: 예전에 선생님께서 진(晋)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조(赵)나라가 진(秦)나라에게 멸망한 뒤, 진나라의 호적 제도에 편입되기 싫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흉노(匈奴)로 탈출해 흉노인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후에 조나라 땅에서 살던 사람들은 춘추전국 시대에 그곳에 살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인구 구성이 되었다고요. 그럼 가정해봅시다. 만약 대만이 정말 중국에게 병합되거나, 혹은 홍콩이 정말로 일국일제(一国一制)가 된다면, 수십만, 어쩌면 수백만 명이 세계 각지로 이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이른바 '이치국가(吏治国家)'에 의한 정화가 일어난다면, 결국 그 지역은 다시는 고유한 전통을 형성하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26:25]
류중징(刘仲敬): 그 지역은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암스테르담(Amsterdam)의 상업 계급 다수는 원래 안트베르펜(Antwerp)에서 망명해 온 이들이었습니다. 원래 안트베르펜이 지금의 암스테르담이 맡고 있는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지요. 당시의 저지대(尼德兰)는 다중 구조의 사회였고, 크고 작은 도시국가들이 어느 정도 유사한 조건에 있었으며, 그중 안트베르펜이 가장 컸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스페인의 절대주의가 이들에게 편을 고르도록 강요했고, 스페인 편에 서거나 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지역은 억압되어 점차 낙후되었습니다. 반면 네덜란드 연합공화국 쪽에 남은 지역은 점차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구 측면에서 보면 실질적으로 분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종교개혁과 절대주의 전쟁이 겹쳐 일어난 결과, 당시 누군가가 스스로를 개신교도라 칭한다면, 이는 곧 자본주의적 인격을 지닌 인물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조상이 대부분 가톨릭이었다 해도, 그는 선택적으로 개신교 측에 가담한 것입니다. 개신교 가문의 자식이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서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당시엔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마치 1945년 즈음에 자산계급 자제가 공산당에 입당하거나, 공산당원이 서방으로 망명하는 일이 교차되었던 것처럼요. 시간이 지나면 국경이 안정되지만, 과거의 분쟁이 점차 의미를 상실하면서 종파 간 구분 역시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는 원래의 의미를 잃게 됩니다. 오늘날의 개신교도나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이미 엘리자베스 시대의 모험심 강한 자본주의 인격을 더는 대표하지 않습니다.
물론 인구는 항상 분화합니다. 마치 원심분리기처럼, 각자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방향으로 점점 흘러가고, 마침내 각자에 맞는 층위를 형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층위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느냐는 사실 매우 우연적인 역사적 사건에 따라 정해집니다. 예컨대 매우 모험심이 강한 인물은 명나라를 떠나 변방으로 나가 몽골에 귀순하기도 했는데, 당시 그는 스스로를 백련교도라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소아시아에서는 스스로 무슬림이라 여겼을 것이고, 스페인에서는 그와 반대였겠지요. 수백 년이 흐르고 나면 원래의 정체성 표지가 의미를 잃게 되고, 그 자손은 또다시 선택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집단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유동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28:45]
진행자: 지난주(2019년 8월 20일) 선생님께서 “상등인의 조언”에 대한 트윗을 올리셨는데, 참으로 시사점이 많았습니다. “상등인은 반드시 해야 할 일과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 몇 가지 있지만, 그 외 대부분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다.” “하등인은 상등인과 교류할 때 늘 이런 문제에 봉착한다. 즉, 상등인의 이익과 조언을 분간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경우, 상등인은 귀찮은 일을 싫어하고, 그저 경험과 지식이 풍부해서 선의로 조언을 할 뿐이다.” 상등인의 조언은 “언제나 상대방의 이익을 위한 것이며”, 상등인은 “하등인이 그 조언을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그 책임을 상등인에게 전가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등인은 반드시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 조언에는 반드시 자신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그리고 연기하고 왜곡해온 세계관을 파괴하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자기 거짓말을 유지하려다 사탄에게 점점 더 끌려가게 된다”고도 하셨습니다. 방금도 계층의 분화와 이동, 형성에 대해 언급하셨는데요,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동료나 배우자,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어떻게 그런 유익한 직관을 기를 수 있을까요? 즉, 누가 상등인인지, 그들의 이익과 조언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런 조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심리적·사회적 기반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지에 대해 여쭙고 싶습니다.
[29:55]
류중징(刘仲敬): 그것은 결국 ‘내가 그를 더 필요로 하느냐, 아니면 그가 나를 더 필요로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사실 이건 판단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은 위를 향해 있습니다. 자신과 무관한 상등인의 일은 굳이 찾아서 신경 쓰지만, 같은 일이 하등인에게 일어나면 거의 신경조차 쓰지 않지요. 또한 현대 민주주의 이론과는 달리, 하등인에게 가장 유리한 이론은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에게 동일한 기회가 있다’는 민주주의 이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확히 누가 자신보다 높고 누가 자신보다 낮은지를 아는 봉건주의 이론이 가장 유리합니다. 상등인에게는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평등을 오해하면 오히려 자기 기회를 망치게 됩니다. 당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자신과 동등한 존재로 여기고, 본인에게만 유리하고 다른 이에게는 별 가치가 없는 무언가를 마치 협상 카드인 양 여긴다면, 공동체를 유기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파괴하는 셈이 됩니다.
[30:54]
진행자: 현대 사회에서, 어떤 인간관계가 이런 봉건적 게임이나 구도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31:06]
류중징(刘仲敬): 사실상 그런 봉건적 관계에 가장 가까운 것은, 역사적 연속성을 가진 모기업과 자회사 간의 관계, 그리고 세대를 넘어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지역 공동체, 즉 이웃 간의 관계입니다.
[31:30]
진행자: 방금 '누가 누구를 더 필요로 하느냐'는 말씀을 듣고, 최근 대만에서의 시대역량(时代力量)과 커원저(柯文哲) 사례가 떠올랐습니다. 대만에는 커원저나 시대역량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민주진보당(民进党)이 이런 신생 정치세력에게 매우 불친절하다고 불평합니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국가 멸망의 위기'라는 감정으로 유권자를 협박하여 정책에 대한 합리적 논의를 억압한다고 생각하고, 자신들과 같은 중도세력이 선거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통일전선의 핵심 자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기회주의 세력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느끼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이들을 끌어안는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상황은 어떻게 처리되었습니까? 투표와 통일전선에서는 필요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총을 들고 함께 싸워줄 가능성은 없는 이들—이런 세력은 선거 때 일단 품고 가는 것이 나은가요, 아니면 다른 전략이 있을까요?
[32:30]
류중징(刘仲敬): 사실 가장 좋은 전략은 아예 신경 쓰지 않는 것입니다. 상등인과 하등인의 관계는 본래 불균형입니다. 하등인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그에게 과도한 지위를 부여하게 됩니다. 상등인에게 중요한 것은 원칙을 지키는 것이고, 이는 '원칙을 위해 희생하라'는 민주주의적 도덕주의의 논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상등인에 가까울수록 원칙이나 보편 규칙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이익에 부합합니다. 반대로 기회주의적 태도는 상등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상등인의 특징은 이해관계가 다방면에 걸쳐 있고, 그 폭이 넓기 때문에, 속된 말로 '뒷문을 통하거나' 부패한 방식은 오히려 손해라는 점입니다. 부패는 관료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황제에게는 전혀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황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공정함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一秉大公)'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문제를 판단할 때 모든 사람의 이름을 가린 채, 어떤 방식이 가장 타당한지를 먼저 판단하고, 그 이후에 이름을 채워 넣는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성경에서 다윗 왕과 선지자의 이야기처럼 말이지요.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어떤 사람이 부하의 아내를 빼앗았다”고 말하자, 다윗은 “그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답합니다. 그러자 선지자가 “그게 바로 당신입니다”라고 말하지요. 먼저 원칙에 따라 판결을 내리고, 그 후에 구체적 사례를 밝히는 것입니다.
[33:48]
진행자: 그럼 만약 선생님께서 지금의 민진당 선거 전략팀에 조언을 한다면, 과거 이들 소당의 이념이나 인물을 따지기보다는, 향후 몇 년간 선거나 지방 이권의 연합 구도 속에서 이들이 민진당에게 제공할 수 있는 명확하고 예측 가능한 자원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고려하라고 말씀하시겠군요?
[34:21]
류중징(刘仲敬):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소당이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 자체는 예상하되, 구체적으로 어떤 당이고 그들이 무엇을 할지에 대해서는 애초에 알 수 없다고 전제한 채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결정을 내린 후에는, 실제로 어떤 세력이 나타나든 상관없이,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면 됩니다.
[34:43]
진행자: 예전에 선생님께서 트위터(2019년 8월 19일)에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 가장 좋은 조합은 '싸울 줄 알고 이성적으로 말도 통하는 사람들(즉 상등인)'이고, 그다음은 '싸울 줄은 아는데 말은 안 통하는 사람들(대부분의 제국이 여기에 해당)', 그다음은 '싸울 줄은 모르지만 이성적인 사람들(이른바 백좌, 좌파 인도주의자들)', 가장 나쁜 조합은 '싸울 줄도 모르고 이성적으로 말도 안 통하는 사람들'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순서, 특히 중간 둘에 대해 온라인상에서는 이견이 많았습니다. 이와 같은 순서를 설정하신 논리를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35:17]
류중징(刘仲敬): 사실 ‘이성(理)’이라는 것은 게임 이론적 상호작용 속에서 생겨난 추상 개념입니다. 이성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항상 인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관습법입니다. 관습법은 실천되는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실재하지만, 지식인들이 이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람들이 그것의 존재를 인식하고 추상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되면, 마치 ‘이성’과 ‘힘(力)’ 사이에 분열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 이 둘은 여전히 내적으로 일치합니다. 이성과 힘이 마치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이성을 말하지만 힘은 행사하지 않는다” 혹은 “힘을 쓰지만 이성은 따르지 않는다”는 상황이 벌어지는 시점은, 이미 도술이 천하를 갈라놓은 상태입니다. 이때가 되면 지식인은 자신들만의 이익집단으로 변해 있습니다.
[35:54]
이성은 있지만 힘이 없는 상태—이건 고대 로마의 원시민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고대 로마인의 관점에서는, 신의 총애를 받는 자는 반드시 행운아여야만 했습니다. 예컨대 카이사르(Caesar)는 연설할 때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그대들은 나보다 더 운이 좋은 자를 본 적이 있는가? 내가 신들을 진심으로 섬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토록 행운이 따랐겠는가?”
즉, 후세 지식인들처럼 “누가 억울하게 실패했다”, “누가 불공정하게 성공했다”는 식의 논리는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논의가 가능하려면 이미 성문법과 관습법이 분리되어야 하고, 더 나아가 ‘도덕주의’가 발생해야 합니다.
도덕주의란 도덕의 반대입니다. 마치 과학주의가 진짜 과학과는 다르듯이 말입니다. 도덕주의란 도덕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에서 이탈해, 일종의 사제적 계급이 독점하고 휘두르는 도구로 변모한 것입니다. 이들은 도덕적 재판을 통해 마치 법률 재판을 하는 판사처럼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36:50]
‘이성도 있고 힘도 있는 상태’란, 유기적 공동체가 아직 젊고 건강한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때는 이성과 힘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부패하면, 두 요소는 분열되기 시작합니다. 순전히 이성만을 말하고 힘은 무시하는 태도는 바로 사대부 계층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꼭 백좌(白左, 좌파적 휴머니스트)들이 이렇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많은 백좌들은 사실 초기 기독교도와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도는 대개 야만족 족장들이었고, 살육을 일삼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약해서 개종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애가 더 낫다고 믿었기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마치 아쇼카(阿育王)가 불교에 귀의한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후기에는 반대의 유형이 나타납니다. 더는 싸울 힘이 없는 사람이, 정신승리를 통해 “나는 싸우려 하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고귀하다”고 착각하며 그들의 계급적 지위를 도둑질하려 드는 것입니다. 결국 지식인들이 등장해 도덕주의를 독점하게 되면, 사회는 이미 분열과 부패가 극심해져 “누가 옳고 그른가” 자체가 의미를 잃게 됩니다.
[37:54]
이 시점이 되면, 문명 주기의 단계로 볼 때 송나라 말기의 사대부 시절과 비슷해집니다. 아직까지는 ‘이성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았습니다. 힘이 없는 하등인은 일반적으로 전쟁터에 나설 위험을 감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명이 명나라 이후 완전히 몰락한 시기에는 마침내 의화단(义和团) 같은 존재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실상 전투력이 떨어지지만, “나는 구호를 외칠 줄 안다. 저들은 나처럼 외치지 못한다”고 믿으며, 약간의 이익을 챙기려고 합니다. 이런 이익은 아주 짧은 시간만 지속되며, 곧 자신에게 파국을 가져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하층의 무산계급에게는 이런 눈앞의 이익조차 충분히 매력적인 것입니다. 이들도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부수고 약탈하지 않으면, 나중에 하방(下放)될 때 내 몫은 없을 것이다. 그럴 바엔 지금 한탕하는 게 낫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대량으로 출현하는 시점은 문명이 마지막 단계에 진입했음을 뜻합니다.
문명이 마지막에 도달하면, 과거의 ‘좌파’였던 지식인이 오히려 사회 엘리트처럼 보이고, 심지어 ‘우파’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지식인이 우파로 보이는 사회는 이미 치유 불가능한 상태이며, 내부 개혁으로는 구제될 수 없습니다. 이 사회는 그 자체로 삭제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39:06]
최근 칠레에서 있었던 사건처럼, 중국 이민자 일부가 칠레에서 대만인을 폭행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장담하건대, 만약 모두가 거리로 나와 실제로 싸운다면, 이들 중국 이민자들은 칠레 현지인이나 칠레의 인디언 추장, 혹은 대만인과 싸워서도 결코 우위를 점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상대가 스스로를 문명인이라 여기며 싸우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뿐입니다.
이들은 ‘싸울 줄도 모르고, 이성적으로 말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에 해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나서고 싶어 안달이며, 구호 몇 마디만 외치면 남들이 자신을 무서워할 거라 착각합니다. 사실 이런 사람 자체는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해서 생겨날 수 있었느냐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문명 상태에서는 이런 인간형이 애초에 탄생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인간이 탄생했다는 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를 만들어낸 사회가 이미 전체적으로 ‘삭제 직전’의 상태에 도달했다는 뜻입니다. 사회를 개선한다는 것은 원래 전체를 보존하고 일부만 걸러내겠다는 발상이지만, 이 단계에 이르면 그런 선택이 불가능해집니다. 전체가 폐기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이 진화 시스템에서 반드시 수행해야 할 기능이라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40:09]
진행자: 방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도술로 천하가 갈라진다’는 시기에 관습법이 성문법으로 전화하면서 두 부류의 사람이 생겨납니다. 하나는 ‘싸울 줄 알지만 이성적으로 말하진 못하는 자’, 또 하나는 ‘싸울 줄은 모르지만 도덕주의를 앞세워 말할 줄 아는 자’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분열 과정에서 전자를 더 상위에, 후자를 더 하위에 놓으셨는데요. 이 순서는 그들의 원래 사회적 계급 때문인가요? 아니면 외부에서 볼 때의 객관적 기준 때문인가요? 예컨대 ‘싸울 수 있는가 없는가’는 객관적인 기준이므로, 싸울 수 없는 사람이 자신을 싸울 수 있는 사람처럼 속일 수는 없고, 금세 드러날 테니까요. 그런 이유에서인가요? 아니면 애초에 두 집단의 사회적 위상이 달랐던 것인가요?
[40:57]
류중징(刘仲敬): ‘싸울 줄 알지만 이성적으로 말하지 않는 자’라는 표현 자체가 당신이 그들을 외부에서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 공동체 내부에 있었다면, 싸울 줄 아는 사람은 당연히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이성적이지 않은 사람이 혼자서 어떻게 싸우겠습니까?
명나라 시절 왜구와 전투를 벌일 때 ‘무림 고수’들을 모집한 일이 있었는데, 전혀 쓸모가 없었습니다. 전쟁은 ‘협동’이 핵심입니다. 축구팀과 같은 것이죠. 무림 고수가 혼자 힘으로 조직된 군대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무슬림이 ‘이성적이지 않다’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무슬림이 어떻게 당신을 괴롭혔습니까? 그들은 샤리아(Shariah)를 믿습니다. 샤리아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도덕성—즉, 공동체 내부 질서—가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아니면 어떻게 단결하겠습니까? 아무리 아훈(이슬람 성직자)이 훌륭해도 그 혼자서 전투를 할 수는 없습니다.
샤리아라는 성문법을 통해 그들이 단결할 수 있다면, 외부에서 볼 때 아무리 이성 없어 보여도, 그것은 당신이 외부인이라서 그렇게 느끼는 것뿐입니다. ‘싸울 줄 알지만 이성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 내부적으로는 충분히 이성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이성’은 샤리아 같은 성문법일 수도 있고, 또는 수많은 수렵부족처럼 성문화되지 않은 관습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보기엔 그들이 마구잡이로 사람의 머리를 자르는 비이성적인 존재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전쟁에서의 살인과 같은 것입니다. 그건 그들 나름의 전사적 명예의 표현이지, 제멋대로 저지르는 짓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 아내의 머리를 자르지 않습니다. 머리를 자르는 것은 특정한 대상에 한정된 행동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들 부족에서 관우(關雲長) 같은 존재이며, 전쟁에서 승리한 공로자입니다. 그들의 공동체 내부에서는 그것이 곧 도덕성의 표현이며, 단결의 근거입니다. 외부인인 당신이 보기엔 이성 없어 보이겠지만, 실상 그들 내부 질서에는 분명한 ‘이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42:12]
이성만 있고 힘이 없다—이건 당신에게 덕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볼테르(Voltaire)나 루소(Rousseau)처럼 훌륭한 지식인일 수도 있다. 당신은 이성적으로 말할 수는 있지만, 싸우지 못한다는 사실은 곧 당신 주변에 당신을 위해 죽을 사람조차 없다는 뜻이다. 당신을 위해 죽을 사람이 없다는 건, 당신에게 덕성이 없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공자 주변에는 그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된 사람이 있었다. 비록 공자 본인은 싸움을 잘하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가? 계몽된 군주, 즉 프로이센 국왕이나 러시아 황제의 보호를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묻겠다. 당신이 프랑스 사람인데, 프랑스 내에서 자리를 못 잡고 러시아 황제의 보호를 구해야 한다면, 당신의 덕성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러시아 황제가 체면을 위해 당신을 보호해준다면, 그건 러시아 황제가 덕이 있는 것이지, 당신이 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당신에게 진짜 덕성이 있다면, 프랑스의 신교도들처럼 피난길에 동지들이 함께 따라올 것이다. 당신 혼자 외롭게 도망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성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은 결코 조작할 수 없다. 싸움은 반드시 집단적인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따라 싸우는 일은 꼭 논리적 이유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본능적인 행동일 수 있다. 예컨대 광둥 지방의 어떤 씨족 자제가 전쟁에 나섰다. 그때 량치차오(梁启超) 같은 지식인이 와서 “너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된다”고 말한다. 논리적으로는 상대가 말이 맞다. 당신도 스스로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다음 번 마을 간 분쟁이 터졌을 때, 당신은 여전히 본능적으로 “이웃들이 다 싸우러 갔는데 나 혼자 빠지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본능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공자가 말한 ‘습관법’이다. 다만 이 행동을 정당화해줄 고급 지식인 집단이 없을 뿐이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당신은 이웃이 모두 나설 때 혼자 물러서는 것은 고귀한 게 아니라 비겁한 도피라는 것을 안다. 이런 본능을 가진 사람을 외부에서 볼 때는 ‘이성 없이 폭력만 앞세운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것은 공동체 내부에서는 덕성의 표현이다.
제국주의란, 제국 체제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힘의 언어’로 보인다. 그러나 내부에는 분명한 규칙이 있으며, 그 규칙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으로부터 복종하게 만든다.
[43:58]
진행자: 올해 6월부터 미국 의회가 홍콩 관련 입법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습니다. 최근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하원의장이 말하길, 미국은 홍콩 인권과 민주주의에 관한 법안을 준비 중이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2025년형 ‘민주주의 수출’이죠. 미국은 홍콩이 적절한 시기에 보통선거를 실시하지 않으면, 홍콩의 독립 관세구 지위를 철회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 법안의 취지는 대략 그런 것입니다.
제 친구 중에 홍콩 독립을 지지하는 대만계 인사가 있는데, 최근 홍콩에 다녀왔습니다. 그는 자신이 명확히 홍콩 독립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에, 입국 당시 조직범죄 혐의로 간주되어 국가안보 담당 관리를 여러 차례 만났다고 합니다. 결국 증거 부족으로 추방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무려 서른 명에서 마흔 명 사이의 인원을 거쳤고, 4~5일 정도 걸렸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미국인이나 대만인이 홍콩 독립에 대한 발언을 했다고 해서, 입국 시마다 이런 심사를 받아야 한다면, 백 명짜리 단체 관광객이 홍콩을 방문하면 그때부터 관광지 전체가 마비되지 않겠느냐?” 이런 비대칭 전술은 과연 가치가 있는 일인가요? 미국이 국회 입법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시도, 그리고 아직까지 홍콩이 이용가치가 있는 시점에서, 이 방식이 적절한 비대칭 전투 방식이라고 보십니까?
[45:22]
류중징(刘仲敬): 비대칭 전술은 결국 당신이 ‘전체 판국’을 기준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신의 소집단’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실 소집단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상황에서도 전략은 간단합니다. 무력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소집단이 어떤 더 큰 판국을 위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며, 훨씬 복잡한 게임이 필요해집니다.
홍콩의 경우 가장 명백한 전략은 해외에 병력을 조직하는 것입니다. 홍콩 자체가 완전히 파괴되어도 상관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합니다. 홍콩이 파괴된 후, 해외 병력이 귀환하여,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복귀전쟁을 벌일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땅에 항구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간다로는 절대 못 간다”고 선언할 수 있어야만 홍콩이 진정으로 파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전략입니다. 다른 방법은 그다지 신뢰할 수 없습니다.
내 생각에 홍콩은 결국 파괴될 것입니다. 미국이 시간표를 설정했다는 것은 곧 모든 세력에게 강력한 신호를 준 것이며, 누구도 이제는 멈출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홍콩은 경제 중심으로서의 지위를 점차 상실하게 될 것이며, 끊임없는 혼란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혼란이 임계점에 도달하면,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는 홍콩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그것이 야기하는 전복과 침투 효과가 더 커졌다고 판단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면적인 무력 진압으로 전환하게 될 겁니다.
이 과정에서 홍콩의 중산층 사회는 생존 기반을 빠르게 상실하게 됩니다. 사실 ‘베이루트식 금융 허브’ 같은 구조는 아주 소수의 사람만으로도 운영이 가능합니다. 수백만 명이 사는 대도시의 생계를 유지할 수는 없습니다.
[46:45]
진행자: 우리가 지금 ‘민주주의’라고 말할 때는 대체로 ‘보통선거에 의한 정치체제’를 의미합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식 민주주의나, 일종의 진화적 봉건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 말씀은, 미국이 홍콩에 민주주의를 수출하고—즉, 홍콩 시민이 보통선거를 실시해 효율적인 자치를 하기를 기대하는 것은—기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뜻입니까?
[47:07]
류중징(刘仲敬): 그렇습니다. 그것은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홍콩 달러와 미국 달러의 연동이 해제되고, 미국은 홍콩을 완전히 포기하며, 홍콩은 ‘베이루트식’ 전복과 혼란의 중심지로 변모합니다. 공산당은 이 전복과 혼란의 중심지를 제거하려 하고, 그 결과 내전이 시리아처럼 중국 본토로 확산됩니다. 전 과정은 이렇게 전개될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공산당은 스스로 모순에 빠져 있습니다. 협상 상대가 없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공산당이 이런저런 위협을 한다 해도, 그것이 효과를 가지려면 ‘홍콩이 하나의 국가’이고, ‘공작이나 국왕 같은 단일한 대표자’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홍콩은 다원적이고, 협상 대상이 없습니다. 만약 어떤 단체가 공산당의 협박에 굴복하면, 군중 속에서 그 단체는 즉시 지도력을 상실하게 되며, 다른 단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이러한 탈중심화의 결과는 결국 협상 상대와 대화 채널 자체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에 따라 책임 있는 해결책이 아예 불가능해집니다. 오히려 의회 안에 ‘홍콩 독립’이라는 정당이 있었다면, 이런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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