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ndrell, 레닌주의와 생물학적 레닌주의 (Leninism and Bioleninism)
레닌주의와 생물학적 레닌주의 (Leninism and Bioleninism)
작성일: 2018년 1월 21일 – Spandrell
본 텍스트는 현대 좌파의 조직 원리로 제시된 ‘바이오레닌주의(Biological Leninism)’에 관한 세 편의 연재 글 가운데 세 번째 글이다.
이전 글들(제1편 및 제2편)은 각각 [여기]와 [여기]에서 확인 가능하며, 본 주제에 대한 필자의 부가적 견해를 담은 인터뷰 역시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
새해가 밝았다. 지난 글의 말미에서 다소간의 서스펜스를 남긴 바 있으며, 며칠 내로 이를 해소하고자 했으나, 일정상 바쁜 상황이 지속되었고, 장문의 서술을 작성할 만한 심리적 동기도 충분치 않았다.
이 점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본 블로그가 어디까지나 무료로 운영되는 사적 플랫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우선순위가 필자의 시간 자원 내에서 다소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점은 독자들도 이해 가능할 것이라 판단된다.
참고로, 블로그 사이드바에는 비트코인 주소가 명시되어 있다. 만일 독자가 본 블로그의 글 생산 빈도가 증가하기를 바란다면, 해당 수단을 통해 어느 정도의 조율은 가능할 것이다.
2017년은 실로 사건이 많은 해였다. 그러나 그 전반적 정조는 실망(disappointment)에 가까웠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Trump)는 아무것도 이루어내지 못했고, 앞으로도 뭔가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유럽은 난민 유입(refugee invasion)을 다소간 늦추는 데 성공했지만, 그 폭은 크지 않았다. 중국은 인공지능(AI)이 국가 통제(state control)를 획기적으로 용이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검열(censorship)과 군중 통제(crowd control)의 모범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중이다.
중국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서구에서도 머지않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다만 하나 차이가 있다면, 서구의 국가들은 이러한 전체주의적 도구를 ‘생물학적 레닌주의(Bioleninism)’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야기가 나왔으니, 지난 포스트의 내용을 이어가 보자. 당시 마지막으로 다뤘던 부분은 서구 자유주의적 의회 시스템(Western liberal parliamentary system)의 초기 진화 양상에 관한 것이었다.
경제학에는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라는 유명한 개념이 있다. 자유 환경(free environment) 속에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것을 실현할 방법을 찾아낸다는 발상이다.
정치도 이와 동일한 원리로 작동한다. 자유로운 정치 환경(free political environment)에서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장악할 방법을 반드시 찾아낸다. 요컨대, 경제와 정치는 본질적으로 매우 유사한 체계이다.
경제 이론 중에는 기업 이론(theory of the firm)이라 불리는 분야가 있다. 즉, 왜 기업(corporation)이 존재하는가? 모두가 자영업자로 살 수는 없는가?
이는 중세 길드(guild) 시절에 가까운 방식으로 어느 정도 구현된 적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거의 모두 거대 기업(corporate behemoths)의 종속 하에 놓여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의견은 분분하지만, 표준적인 설명은 ‘거래 비용(transaction costs)’ 때문이다. 자유 시장(free market)에서는, 개별 경제 행위자들은 서로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그럴 만한 이유도 충분하다. 사람이 너무 많고, 누가 믿을 만한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위계적(hierarchical) 기업 구조는 사회적 관계를 고정시키고, 신뢰와 책임의 구조를 설정함으로써 경제적 행위의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확보한다.
고전적 자유주의 정치 이론(standard liberal theory of politics)에 따르면, 모든 정치 행위자는 기본적으로 ‘자영업자(self-employed)’처럼 활동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그러나 예외는 곧 드러났다.
정치적 조직체, 즉 정당(political firms 혹은 political parties)이 개별 정치인들보다 정치적 행동 능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하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이는 경제에서 기업이 전통적 장인(individual craftsman)과는 다른 특정한 유형의 인간을 선호하는 것과 유사하다. 정치 정당 또한 특정한 인간형을 선별한다.
바로 복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레닌주의(Leninism)의 씨앗은 이 지점에서 뿌려졌다. 그리고 그 씨앗은, 예상 이상으로, 대단히 풍성하게 자라났다.
기업이나 그 어떤 조직(firms, or any organization)도 마찬가지지만, 그 성장의 한계에는 고정된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은 점점 더 커질 수 있으며, 점점 더 많은 기능을 흡수할 수 있다.
국가(state)란 결국 ‘남자들의 조직된 폭력집단’(gang of dudes)에 불과하다. 이들은 처음엔 그냥 맥주 마시고, 간헐적으로 상인 대상 행패나 부리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점차 군대로 성장하고, 영토를 정복(conquer)함으로써 완전한 국가 체계로 진화한다.
이 같은 패턴은 중국 역사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된다. 좀 더 익숙한 사례로는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가 있다. 처음엔 단지 향신료 무역을 하던 민간 회사에 불과했지만, 결국 4억 명의 인구를 통치하는 실질적 제국 행정기구로 변모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과정의 각 단계마다—약간씩이라도—더 많은 수익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들어 정당(political parties)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면서, 이와 같은 과정이 정치에서도 동일하게 전개되었다.
정당은 의회 권력(parliamentary power)을 장악하기 위해 결성되었지만, 일단 권력을 쥐는 기계(machine to grab power)가 생겨난 이상, 거기서 멈출 이유는 없었다.
헌법이 뭐라 하든, 의회 밖에도 엄청난 권력(power)이 존재한다.
우선 행정부(executive)와 사법부(judiciary)가 있다. 그리고 언론(the press), 곧 여론을 형성하는 권력, 교육(education), 곧 어린이의 정신과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권력이 있다.
사회 곳곳에는 무수한 소셜 그룹(social groups)이 존재하고, 그들 역시 각자의 권력 관계(power dynamics)를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것들까지 흡수하지 않는가? 쥘 수 있는 권력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누군가는 그것을 쥘 것이다.
그리고 본래 자유주의 혁명(liberal revolutions)이란 그 권력을 공개된 장(場)에 노출시키고, 누구든 쟁취할 수 있도록 만들자는 운동이었다.
놀랍게도—혹은 어쩌면 전혀 놀랍지 않게도—사람들은 실제로 그 권력을 쟁취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제에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내버려 두면 효율적 경제 체계가 자연히 구축되듯, 정치의 영역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은 그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경제 기업(economic firms)은 이윤 추구(profit-seeking)를 중심으로 조직되며, 주식회사(joint-stock corporation)라는 형태를 통해 성장했다. 반면, 정치 정당(political parties)은 저지위 계층(low-status people)이나 혹은 취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compromised, 즉 잠재적 저지위)을 조직하고, 권력 획득 이후 고지위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통해 세를 확장해왔다.
이윤을 추구하는 메커니즘이 얼마나 정교하고 효율적으로 진화해왔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자유주의 정치(liberal politics) 또한 마찬가지로,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진화할 수 있는 원시적 수프(primordial soup)였던 셈이다.
그리고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곧 강력하고, 안정적이며, 전염성까지 지닌 메커니즘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Socialism)다.
사회주의는 늘 존재해 왔지만, 마르크스(Marx)가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를 발표한 해는 1848년, 즉 자유주의 혁명(liberal revolutions)이 유럽 전역의 군주제(monarchies)를 몰락시키던 바로 그 해였다.
사회주의는 자유주의 정치를 정제했다. 마치 복식부기(double-entry bookkeeping)가 상업 회계를 정제한 것처럼.
선거 정치(electoral politics)의 기본 작동 원리는, 저지위 계층에게 고지위를 약속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틀을 받아들이면서, ‘부분적으로 동화된 유대인(semi-assimilated Jew)’이 자국 사회의 은밀한 위선을 간파하지 못하는 전통을 따랐다.
그는 자유주의 평등주의(liberal egalitarianism)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을 논리적 종착지(logical conclusion)까지 몰고 갔다.
원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농담이라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자유(Liberty)와 평등(Equality)? 좋아, 그럼 사유재산(private property)을 폐지하자.
잠깐만요, 뭐라고? 사유재산을 폐지한다고?
그가 진심이었을 리는 없었다. 제정신이라면 말이다. 사유재산이란 문명(civilization)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농경 이전의 부족(pre-farming tribes)조차 사유 개념을 지녔으며, 심지어 원숭이들조차 물건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사유재산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다니, 도대체 얼마나 정신이 나가야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그런 운동에 동참하겠는가? — 그런데, 놀랍게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주의(capitalism)는 당대의 세상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거대한 사건이었다. 사회의 작동 방식 전반이 변화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본주의는 누가 고지위 계층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가를 완전히 재편했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상인(merchant)이 지배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품게 되었다.
"당신은 ‘자본가(capitalist)’라는 말이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듯하군요. 어쩌면 당신이 그 체제 안에서 성공할 능력이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하진 않았을지도 모르죠. 그냥 한 번 추측해봅니다…."
— Dr. Jordan B. Peterson, 2018년 1월 8일
[출처: https://web.archive.org/web/20220207044831/https://twitter.com/upfitwriter/status/950221409892163584]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공할 능력이 없다.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은 서로 다르다.
갑자기 말도 제대로 못하는 촌락 유대인(shtetl Jew)이 돈을 잘 벌게 되어, 이제는 자기보다 1000배쯤 더 높은 지위를 누리게 된 상황 — 단 100년 전만 해도 그 사람은 봉건 사회(feudal society)에서 나름 괜찮은 지위를 갖고 있었을 것이며, 그 유대인은 온갖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무언가에 재능이 없다는 것은 끔찍한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니, 당연히 사람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사회주의(socialism)는 바로 그 분노를 정확히 겨냥했다.
물론 사회주의가 굳이 사유재산의 전면 폐지(abolition of private property)를 직접적으로 주장할 필요는 없었다. 봉건 사회조차 사유재산을 인정했다.
그러니 그냥 누진세(progressive taxation)나 보편적 복지(welfare), 고리대금 금지(usury laws) 같은 “합리적인” 주장을 했어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중요하지 않다면, 굳이 합리적일 필요가 있을까?
정당(political party)은 공약을 이행할 의무가 없다. 그 중에서도 좌파 정당(leftist party)은 더욱 그렇다. 왜냐면, 그들은 체제에 맞서 싸우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모든 책임을 기존 권력(the powers that be)에게 떠넘기면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걸 믿는다.
왜냐고? 기존 권력은 실제로 권력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또한 관성(inertia)은 현실이다. 사람의 기억은 부정확할 수 있고, 그 기억을 굳이 업데이트할 유인이 없다면, 더더욱 그렇다.
정당은 거짓말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정치 운동(political movement) — 즉, 정당의 애매하고 미숙한 형태는 살인을 저질러도 무사할 수 있다.
이들은 공약을 실현할 필요도, 합리적일 필요도, 논리적으로 일관될 필요조차 없다.
단 하나 필요한 것은 — 헌신적인 사람을 끌어모으는 능력.
그리고 놀랍게도, 비합리성(unreasonableness)은 합리성(reasonableness)보다 더 많은 충성스러운 추종자를 만들어낸다.
왜 그런가? 이유는 간단하다. 합리적이고, 잘 적응된(normal) 인간은 선택지가 훨씬 넓기 때문이다.
그들은 굳이 미친 계획에 인생을 걸 필요가 없다. 그냥 취직해서 평범하게 살아도 된다.
하지만 비합리적이고, 부적응하고, 괴이한 인간은 삶에서 가능한 선택지가 훨씬 적다.
그렇기에, 사회를 가능하게 만드는 핵심 구조 자체를 파괴하자는 어떤 미친 정치 운동에 가담하는 것은, 그들이 인생에서 고지위(high status)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기회일 수 있다.
그러니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 “그래, 공산주의(Communism)다!”
물론, 비합리적이고 부적응적인 인간의 유형에도 여러 가지 버전이 존재한다. 일부는 그저 자본주의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건 본인의 잘못이 아니다. 타고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예컨대, 작가(writers), 언론인(journalists), 중간 수준의 변호사(middling lawyers). 이들이 좌파적 성향을 보인다는 사실은 이미 수많은 잉크가 낭비될 만큼 논의되어 왔다. 그리고 이것은 다소 기묘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공산주의(communism)는 실제로 지식인(intellectuals)에게 그다지 우호적인 체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정확히 그 반대 유형의 인간,
즉 상인(merchant)에게 고지위를 부여하며, 지식인들은 그 사실을 증오한다.
그들은 자연스러운 사회주의자(natural socialists)다. 대단히 열렬한 사회주의자(eager socialists)다.
간단한 휴리스틱(heuristic)을 제시하자면, 정치 운동(political movement)의 자연스러운 기반층(natural constituency)은 그 운동이 권력을 잡았을 경우, 사회적 지위(social status)에서 상승을 경험하게 될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초기 사회주의자들 역시 사회주의가 권력을 잡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몰랐다. 그들은 안다고 말했지만, 아무도 미래를 알 수는 없다.
불확실성(uncertainty)은 인간 삶의 상수이며, 그에 반하는 모든 주장들은 속된 말로 개소리(bullshit)고, 좀 더 과학적 용어로 말하면 ‘시그널링(signaling)’일 뿐이다.
현실적인 기준은 오직 현재(the present)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반체제 정치 운동(dissenting political movement)의 자연 기반층은 바로 지금, 이 현재 시점에서 인간 사회의 제로섬 게임(zero-sum game of human social status)에서 실제로 패배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분노하고 있고, 원한을 품고 있으며, 현재 사회 체제를 교란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무엇이든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럴 만한 이유도 충분하다.
인생은 짧고, 기회는 단 한 번이다. 누구도 사회적 지위에서 밀려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 결과는 실로 혹독하다.
서열 경쟁(pecking order)에서 뒤처진다는 것은, 동물학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저품질의 짝짓기 기회 혹은 짝짓기 기회 자체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러니 그 모든 지식인들(intellectuals)이 분노했고, 자본주의(capitalism)를 타파하고 그 비열한 졸부들(fat cats)을 처단해주겠다는 그 어떤 운동에라도 기꺼이 몸을 던진 것이다.
설령 그 운동이 삶의 모든 좋은 것들을 앗아간다 해도.
중요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파괴성은 그 운동을 더욱 매혹적이게 만들었다.
다만, 다시 말하지만, ‘지위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인식(perception of losing out)은 지극히 주관적(subjective)이다.
어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며 부적응적이고, 절대 권력과 2천 명의 여인을 거느린 하렘이 아니면 만족하지 못한다.
정치 운동은 이런 극단적 성향의 인물들을 불균형적으로 많이 끌어안는 경향이 있다. 동시에, 정말로 손해를 보고 있으나 그것이 본인의 잘못이 아닌 사람들도 포함한다.
물론, 일부는 인생 초기에 내린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손해를 보고 있다. 예컨대, 유용한 전공 대신 꼭두각시학(puppetry)을 전공한 경우.
그들은 지금 손해를 보고 있지만, 그건 자업자득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그 사실을 어쩔 수 없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반체제 운동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여기서 핵심은 누가 반체제 진영(opposition)의 대열을 구성하는가가 아니다. 핵심은,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그 반체제 세력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탈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그럴 자유(freedom)가 주어져 있고, 심지어는 그 권력 탈취를 장려(encouraged)받기까지 한다.
그러므로, 정치적 수완이 있는 행위자(political agent)라면 누구든 이 사람들을 조직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이는 곧, 상업적 수완이 있는 행위자(commercial agent)라면 반드시 돈을 벌어낼 수단을 찾아내는 것과 동일한 메커니즘이다.
항상 누군가는 등장한다. 진화적 과정(evolutionary process)은 그들을 반드시 산출해낸다.
그리고 그 결과, 분노하고 원한을 품은 자들(the resentful)이 승리하게 된다.
왜냐하면 상승 이동성(upward mobility)은 극히 강력한 동기 부여 요소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두려움을 이긴다. (Hope really does trump fear.) 지위 상승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은 지금 가진 것을 지키려는 사람보다 언제나 더 치열하게 경쟁하고, 결국 앞서 나간다.
진입로는 다양하지만, 결론은 분명하다. ‘자유 사회(free society)’에서의 정치란, 항상 좌편으로 움직인다. 항상.
물론, 좌편으로의 이동 강도(degree of leftward movement)는 정치 과정의 자유도(freedom of the political process)에 따라 달라진다.
가장 먼저 좌편으로 이동하는 것은 입법부(the legislature)다. 왜냐하면 이 영역이 정치 구조 중 가장 개방적(open)이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권력 구조에는 입법부 외에도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한다.
관료(bureaucrats), 법조인(lawyers),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에게 담론의 주제를 제공하는 언론(the press), 이들을 포함해 그 자녀까지 길러내는 교육 시스템(education system).
어떤 정치 행위자가 전면적 권력(absoute power)을 장악하려 한다면, 단순히 의회(parliament)만 점령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영역까지 장악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단순한 의원들(MPs)보다 훨씬 다루기 까다로운 존재들이다.
앞서 보았듯, 정치인이 좌편으로 이동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정당은 충성심(loyalty)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고, 저지위 계층(low-status people)은 선택지가 적기 때문에 더 충성스럽게 명령을 따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관료(bureaucrat)나 판사(judge)는 그렇게 간단히 조종할 수 없다.
우선, 그들은 더 똑똑하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그들은 실제 업무를 수행해야 하며, 국가는 그 자리에 유능한 인재(smart people)를 임용하려 한다.
예컨대 중국(China)은 관료와 판사를 겸직하게 만들었으며, 행정과 사법의 분리를 신뢰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을 뽑기 위해 악명 높은 과거 시험(hard exam system)을 도입하였다.
오늘날에도 대다수 국가에서 관료는 여전히 시험을 통해 선발되며, 판사나 변호사(judges and lawyers)는 말할 것도 없이 변호사 시험(the bar)을 통과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관료, 판사, 언론인, 교육자 등 비선출 권력층)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정치인들처럼 노골적인 방식(overtly)으로 다룰 수는 없다. 그들을 정식 정치 정당(formal political party)으로 조직할 수도 없다. 규정 위반이다.
이 점이 매우 핵심적인 지점이다. 즉, 선출되지 않은 권력 구조의 일부가 선출된 권력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좌파 권력기계(Leftist Power Machine)는 두 갈래로 분기하게 된다.
이를 필자는 형식적 레닌주의(Formal Leninism)와 분산적 레닌주의(Distributed Leninism)의 분기(branching)라 부르며, 역사적 경로에 따라
이것은 각각 고전적 레닌주의(Classical Leninism)와 생물학적 레닌주의(Biological Leninism)로 변형되었다.
이 두 갈래는, 역사적으로도, 몰드버그(Moldbug)가 지칭한 ‘앵글로-소비에트 분열(Anglo-Soviet split)’ 구도와 거의 정확히 대응한다.
러시아의 좌파(leftism)는 오랜 기간 동안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확장되어 왔다. 표면적으로 러시아는 황제가 다스리는 전제적 절대왕정(absolutist autocracy ruled by the Tsar)이었지만, 19세기 들어 나라가 다소 개방되었고, 자본주의(capitalism)가 진입하면서, 그 하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는 계층들 사이에서 좌파 사상도 함께 성장했다.
예컨대 도스토옙스키(Dostoyevski) 유형의 인물들.
러시아에는 그런 이들이 부족하지 않았다.
사실, 러시아는 좌파의 밀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네덜란드처럼 유기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매우 전통적이고 경건한(pious) 사회에 불쑥 난입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수세기 동안 충실한 신민이자 모범적 기독교인이 되도록 사회화된 이들로서는, 갑자기 공장 지으며 돈을 버는 자유가 주어진다고 해서 그걸 반길 리 만무했다.
오히려 그들은 전체 체제를 혐오하게 되었고, 러시아는 선거 정치를 경험하기도 전에 가장 광기 어린 유형의 좌파들을 대량으로 배출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하여 레닌(Lenin)이 등장한다. 그는 정식 공산주의자(formal communist)로서 쿠데타를 감행하고 권력을 탈취했다.
레닌은 무엇을 했는가? 그는 절대 권력(absolute power)을 원했다. 그 점에선 모든 권력 지향자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실현해낼 의지와 배짱이 있었고, 실제로 실행했다.
레닌의 전략은, 바로 앞서 말한 “하면 안 되는 방식”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즉, 모든 통치 계급(ruling class)을 자신의 정당—공산당(Communist Party)—안에 통합한 것이다.
판사, 관료, 교사, 언론인, 모든 조직을 정당 내부에 편입시켰다.
기억하자. 정당(political party)이라는 제도는
원래 선거 정치에서의 조직과 규율(discipline and organization)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로 생겨난 것이었다.
레닌은 이 아이디어를 러시아의 모든 권력 기관에 그대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그건 통했다. 완벽하게.
물론, 그 과정이 쉬웠던 것은 아니다. 결코.
장기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필요했고, 연속적인 숙청(purges)이 이어졌으며, 전체 사회를 공포로 압도하는 체계적인 테러, 그리고 또다시 숙청이 이어졌다.
그러나 약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스탈린(Stalin)은 그것을 완성했다. 그는 절대 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는 당을 장악했고, 당은 모든 것을 장악했다.
이것이 바로 고전적 레닌주의(Classical Leninism)다. 이에 관한 문헌은 방대하므로, 더 알고 싶다면 얼마든지 참고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원리가 적용되는 국가가 있다. 중국(China)이다. 특히 시진핑(Xi Jinping)이 권력의 나사를 다시 조이기 시작한 이후로는 더욱 그렇다. 이는 중국 공산당(Chinese Communist Party)이 지난 수십 년간 느슨하게 방치해둔 몇몇 권력 영역을 다시 재편하고 통제하는 과정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레닌주의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절대 권력(absolute power)이 달성된 이후에는 좌파적 톱니바퀴(leftist ratchet)가 멈춘다.
즉, 국가는 더 이상 좌편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새로운 사상도 없다. 저지위 계층(low-status people)을 다시 동원하여 정권을 전복하려는 정치적 선동도 없다. 그 어떤 것도 없다.
지속적으로 전진하던 좌파 운동(leftist movement)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 목적은 권력이었다.
권력이 달성되면, 좌파성은 해체된다.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잔류물(residue)이 남는다.
국가는 자신들이 건국 당시 표방했던 이념과의 일관성을 정당성 유지 차원에서 유지하려 들기 때문이다. 중국 왕조에서는 이를 ‘조종(祖宗)의 도’를 계승하는 효(孝)로 형식화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적 관성(inertia)에 불과하다.
반면, 서유럽(Western Europe)과 북미(North America)의 경우는 사뭇 달랐다. 서구에서는 어떠한 좌파 정당도 절대 권력을 획득한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시도는 많았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필자가 예전에 제시한 하나의 이론이 있다.
즉, 자본주의가 점진적으로 발전한 국가들은 근대화에 갑작스레 투입된 농업 제국(agrarian empires)들에 비해 덜 분노한 패배자(less resentful losers)를 배출한다는 가설이다.
이 이론이 순전히 필자의 독창적 산물은 아니다.
어디선가 읽은 바 있고, 혹시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면 알려주기 바란다.
어쨌든, 러시아와 중국에서 레닌주의가 성공한 것은 어느 정도 우연성(chance)의 작용도 있었다.
레닌이 권력을 잡지 못했을 수도 있었고, 내전에서 패배했을 수도 있었으며, 그를 생존시키던 ‘월스트리트 유대인 자본(Wall Street Jewish money)’이 없었다면 아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소련(Soviet Russia)이 없었다면 공산주의 중국(Communist China)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일은 일어났고, 실제로 권력을 잡았든 아니든, 사회주의(socialism)는 그 지역들에서 대단히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렇다면, 서구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이에 대해 매우 깊이 있는 사유를 남긴 인물이 있다. 매우 오랫동안. 주로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를 공부할 시간이 많았던 인물이다.
그가 바로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다.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선동가(communist agitator)로, 무솔리니(Mussolini)에게 체포되어 감옥에서 썩는 신세가 되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도대체 왜 내가 감옥에 있는가? 왜 나는 실패했는가? 젠장, 레닌은 쿠데타(coup d’état)를 성공시켜지금 권력을 손에 넣었는데, 나는 여기서 썩어가고 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그람시는, 그리고 이는 정당한 이유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통찰이지만,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권력 구조(power structure)는 스스로를 재생산하고 유지하려는 경향을 지닌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갈아엎고 자신의 인맥(“your boys”)으로 대체한다고 해결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선거 정치(electoral politics)에 뛰어들 수는 있다.
하지만 사유재산(property)처럼 사회 생활의 기초 그 자체를 폐지하자는 주장에 기꺼이 표를 던질 만큼 분노에 찬 유권자(resentful fucks)의 수는,
적어도 적당히 풍요로운 서구 국가들(moderately prosperous Western countries)에서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러한 조건에서 절대 권력(absolute power)을 획득하고자 한다면, 기존 권력 구조를 매우 천천히, 점진적으로 잠식(colonize)해 나가야 한다. 그들의 정신을 흔들어야 하며, 문화를 바꿔야 한다.
이런 방식은 얼핏 보면 신비주의적이고 영적(esoteric and spiritual)인 것으로 들릴 수 있으나, 그람시의 주장은 매우 현실적인 권력 전략이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언론(the press)과 교육 체계(education system)를 장악하고, 그 영향력을 바탕으로, 모든 권력 있는 제도(institutions with some power) 안에서 정당이 하는 일을 똑같이 실행하라.
정당은 무엇을 하는가? 충성심(loyalty) 있는 사람을 고용한다. 낮은 사회적 지위(low-status)에 기반한 의존성과 헌신을 이용해 명령을 따르는 인재 풀을 구축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모든 학교, 모든 신문사, 모든 관료 조직, 모든 사법 위원회의 인사부(HR)에 침투하라. 그리고 똑같은 일을 실행하라.
이것이 바로 분산적·은밀한 레닌주의 정당(distributed covert Leninist party)의 작동 방식이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장악할 때까지 운용하라.
들어보면 쉬운 것처럼 느껴지는가? 전혀 아니다. 말 그대로 지옥처럼 복잡한 작업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결국, 영향력 행사(influence peddling)에는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가 존재한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통해 영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된다.
20세기의 진정한 발견은 원자력도, 달 착륙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파벌(clique)의 힘’이었다.
권력 있는 자리에 있는 소수의 인물들이 서로 똘똘 뭉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다.
그들은 거짓을 진실로 만들 수 있으며,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팔 수 있으며, 여성을 전투병으로 투입할 수 있다.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사회주의자들이 언론(media)에 손을 대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언론인(journalists)은 태생적으로 사회주의자(natural socialists)이기 때문이다.
돈 버는 재주는 없지만, 글을 잘 쓰는 그럭저럭 똑똑한 사람(smart-ish guys).
교사(teachers)도 마찬가지다. 교직은 박봉이고,
심신을 소모하는 직업이다.
그런 직업을 누가 하고 싶어 하겠는가?
사회주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바로 그것이 이유다.
사회주의자들이 교육 체계를 잠식하고 나서, 그람시식 분산 레닌주의 정당(Gramscian distributed Leninist party)은 사실상 전체 과업의 대부분을 달성한 셈이었다.
결국 학교란, 서로 다른 권력 중심들(power centers)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몽테스키외(Montesquieu)는 입법자, 관료, 판사는 상호 독립적이어야 하며 끊임없이 갈등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래, 이론상 맞는 말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자기 아이들을 어디에 보내는가? 똑같은 학교에 보낸다.
그럼 묻자, 친애하는 몽테스키외 후작(cher Marquis), 같은 학교에서 자라고, 같은 공간에서 성장하고, 서로 결혼하고, 자녀까지 다시 같은 교육을 받는 판사, 관료, 입법자, 교사, 언론인, 은행가, 산업가들이 어떻게 서로를 견제(check)하고 균형(balance)하겠다는 것인가?
그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결혼하고, 자녀를 같은 사립학교에 보내며, 그 속에서 형성된 폐쇄적인 통치 계급(endogamic ruling class)을 서로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그래, 그들은 때때로 정치적 쇼(political theater)를 하거나 연극처럼 정치적 갈등을 연출할 것이다.
미국인들이 말하듯 “가부키(Kabuki)”를 보여줄 수도 있다. (마치 가부키만 가짜이고, 나머지 연극은 다 진짜인 것처럼 굴지만.)
하지만 결국 그들은 폐쇄적으로 혈통 재생산을 하는 지배계급이며, 그 사실을 스스로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람시의 전략은 흔히 “제도 속으로의 장기 행진(Long March into the Institutions)”이라 불린다. 느리지만 확고한 문화 혁명(Cultural Revolution)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1960년대에 이르면 대다수 서구 국가들에서 거의 완결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있다.
아마 그람시의 원래 계획은 그 다음 단계로 고전적 레닌주의(Classical Leninism) 방식, 즉 일종의 프롤레타리아 독재(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로 권력을 직접 장악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회는 이미 서유럽에서 지나간 지 오래였다.
노동자들은 이미 부유해져 있었고, 차를 소유하고,
집을 사고, 스페인이나 플로리다로 휴가를 떠날 여력이 있었다.
그들에게 자본가를 교수형에 처하고
그 재산을 민중에게 분배하자는 선동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당은 이미 가동되고 있었고 작동 중이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사회주의자적 파벌(socialist cliques)은, 공식 정당과 느슨하게 연계된 형태로든 아니든 간에, 다음과 같은 권력 기반들을 장악했다: 대부분의 학교, 대부분의 언론사, 대부분의관료 조직, 대부분의 법원, 대부분의 의회(parliaments).
하지만 이들을 결속시키고, 충성심(loyalty)과 복종(obedience)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동력이 필요했다.
초기 모델—즉 1848년부터 1948년까지 작동했던 방식—은, 자본주의에서 밀려난 패배자들, 즉 노동자들과 관료 성향의 인간들을 동원하여 혁명이 성공하면 고지위를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꽤 잘 작동했다. 실제로 그들은 전 세계 절반을 점령했고, 서방의 상당 부분에서도 권력 장악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1960년대의 서방에서는 사람들을 동원하고, 충성하게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이들이 다시 택한 전략은 본질적으로 같았다. 즉, 저지위 계층(low-status people)에게 고지위(high status)를 약속하는 방식은 그대로 유지하되, 내용을 시대에 맞게 갱신한 것이다.
1960년대의 서구 사회는 1860년대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훨씬 풍요롭고, 훨씬 평등하며, 삶은 전반적으로 훨씬 쾌적했다.
사람들은 하루 8시간 일했고, 자동차와 텔레비전을 가졌으며, 여성들은 이전보다 훨씬 쉽게 성관계에 응했고, 항상 파티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킬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물론 1968년에는 반(反)베트남 전쟁을 명분으로 한 ‘혁명’ 같은 게 있었지만, 그건 사실상 야외에서 열린 대규모 파티였지, 진짜 혁명은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불러야 멋져 보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10대였던 이들이 지금은 권력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사유재산은 폐지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말하자면, 좌파적 톱니바퀴(leftist ratchet)는 특정한 인물 군이 아니라, 하나의 밈 복합체(memeplex)다. 자체적인 생명력을 지닌 시스템이다.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진화한 바이러스,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이 밈 복합체는 자기 목적에 부합하는 이데올로기는 채택하고, 불리한 요소는 폐기한다.
서구에서 경제적 사회주의(economic socialism),
즉 빈곤층을 조직화하는 전략은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기본 원리는 여전히 유효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면 된다.
그리고 그들은 항상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지위는 제로섬(zero-sum)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위에 있는 자가 있고, 언제나 밑에 있는 자가 있다. 심지어 ‘평등주의 사회’에서도.
실제로, 사회주의는 1960년 무렵 서구 사회를
꽤 평등하고 쾌적한 형태로 압박해 왔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이상향에 가까워진다 해도,언제나 저지위 계층은 존재한다.
심지어 사회를 완전히 재설계하여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고, 모든 기존 위계질서를 해체하고, 새로 시작한다 하더라도 — 결국 저지위 계층은 다시 형성된다.
그 이유는 하나 — 생물학(Biology)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키가 크고, 어떤 사람은 작다.
어떤 사람은 잘생기고, 어떤 사람은 추하다.
어떤 사람은 날씬하고, 어떤 사람은 뚱뚱하다.
어떤 사람은 호감이 가고, 어떤 사람은 짜증을 유발한다.
어떤 사람은 세련됐고, 어떤 사람은 어색하고 촌스럽다.
어떤 사람은 똑똑하고, 어떤 사람은 멍청하다.
어떤 사람은 선택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항상 최악의 선택을 한다.
어떤 사람은 법을 지키고, 어떤 사람은 본능적으로 범죄 성향이 있다.
각 쌍의 후자에 해당하는 이들은 지구 어디에서든 저지위 계층으로 분류될 것이다.
소련의 트로츠키(Trotsky) 하 공산주의 체제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그냥 어떤 인간들은 별로다. 그것이 유전자의 작동 방식이다.
그러므로 좌파에게는 풍요를 이룬 이후에도, 노동계급이 해체된 이후에도, 여전히 활용 가능한 ‘소재’가 넘쳐났다.
그리하여 좌파 그룹들은 다음과 같은 사회적 저지위 집단들에 대해 지위 상승(status agitation)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계(African descent), 유대인(Jews), 미혼 여성(single women), 약물 중독자(drug junkies), 성적으로 문란한 여성(sluts), 비만한 사람(fat people), 게이(homos), 레즈비언(lesbians), 공격적인 무슬림(aggressive Muslims), 장애인(disabled), 지적장애인(the retarded), 정신질환자(the mentally insane), 트랜스젠더(trannies).
이들은 서구 사회에서 저지위였고, 어떤 사회에서도 저지위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들은 — 생산성이 낮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타고나기를 키 크고, 어떤 사람은 작다. 어떤 사람은 똑똑하고, 어떤 사람은 멍청하다. 어떤 사람은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어떤 사람은 사이코패스적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어떤 사람은 권력에 굶주린다.
이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그람시(Antonio Gramsci)가 처음 고안했던 “제도 속으로의 장기 행진(Long March through the Institutions)” — 즉 이탈리아 공산당(Italian Communist Party)이 레닌(Lenin)이 했던 일을 반복하게 만들려는 전략 — 은 결국 전혀 다른 형태의 레닌주의 체계를 낳게 된다.
즉, 레닌의 통일적이고 형식화된 권력 장악 모델(formal and unified) 대신, 비공식적이고 분산된(distributed and informal) 형태로, 그리고 마르크스(Marx)가 말한 ‘억울하게 착취당한 프롤레타리아’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장 바닥에 있는 인간 군상들을 그 바닥성(dregs qua dregs) 그 자체로 승격시키는 방향으로 변질되었다.
마르크스는 훌륭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자신의 사상을 일관성 있게 포장하려는 시도는 했으며, 『자본론(Das Kapital)』을 쓰기 위해 실제로 상당한 지적 노동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시대적 조건이 빚은 우연적 산물(contingent accident)에 불과하다. 좌파성(Leftism)은 이해 가능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목표를 달성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목표조차도 사실상 달성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서구 권력 중심부 전체를 관통하는 조직 원리로 생물학적 레닌주의(Biological Leninism)가 기능하고 있으며, 그것은 점점 더 심화되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목표 달성에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목표란 단 하나 — 권력의 집중(concentration of power), 절대 통제의 달성(absolute control)이다.
레닌이 한 일, 정확히는 스탈린(Stalin)이 최종적으로 완수한 그것이다.
스탈린 이후, 좌파의 이데올로기적 내용은 안정화되었다. 크툴루(Cthulhu)는 더 이상 좌편으로 헤엄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대서양 이편, 즉 서구의 경우, 크툴루는 여전히 좌편으로 미친 듯이 헤엄치고 있다. 그리고 점점 더 광기 어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그를 막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대성당(Cathedral)’, 즉 비공식적·분산적 레닌주의 정당이 존재한다. 그들은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자리에 오직 자기 사람들만 올라가도록 매우 효율적으로 관리한다.
그러나 스탈린은 없다. 시진핑(Xi Jinping)도 없고,
심지어 형편없는 푸틴(Putin)조차 없다.
왜 그런가 — 이것은 흥미로운 질문이다.
그 답은 영국 정치의 불문헌법(unwritten constitution of English politics)이 지극히 견고하다는 사실에서 일부 찾아야 할 것이다.
영국적 자유(English liberty). 이 거대한 야수를 한때 제압한 자는 크롬웰(Oliver Cromwell)뿐이었고, 그마저도 잠시뿐, 아주 오래전 이야기다.
그리고 오늘날 서구는 미국의 속국 제국(US vassal empire)이다. 미국은 절대주의(absolutism)를 잘 다루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 그 방향으로 갈 것이다. 이미 거의 다다랐다.
그 유혹 — 즉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유인(return)이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쥘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것을 쥐게 된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 지금의 정세를 반영하자면 ‘그녀’일 가능성이 더 높지만 — 다음과 같이 말하기만 하면 된다: “내게 권력을 달라. 아니면… 너희 모두, 잡무로 시간 때우는 뚱뚱한 여사무원들, 공공재정에 얹혀 사는 외국인들, 그저 불쾌하고 비생산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 — 내게 권력을 주지 않으면 우리는 1959년으로 돌아갈 것이다. 백인인 것이 괜찮다(It’s OK to be white)는 말이 다시 허용될 것이다. 너희 모두는 침대를 정리하고, 방을 청소하며, 실질적인 노동(actual work)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각자도생이다.”
얼마나 오래 걸릴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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