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과 국민국가(nation state)
군인과 국민국가(nation state)
총을 쥐어주는 것으로 국민국가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청년들은 국가를 위해 몸을 바쳤지만, 그들이 국가의 주인공이었던 적은 없다
독자여, 다시 한번 가장 현대적인 역설을 들여다보자—
공화국은 젊은이들에게 총을 들고
국경과 시민, 그리고 위태로운 평화를 수호하라고 엄숙히 요구한다.
그들에게는 경계심과 절제, 살상의 기술을 철저히 훈련시키면서도—
정작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위해 복무하는지는 놀라울 만큼 모호하게 남겨둔다.
“너희는 국민을 섬긴다.” 국가가 단언한다.
그러나 그 ‘국민’이 누구인지 묻는 일은 감히 하지 않는다.
“너희는 국가를 지킨다.”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 ‘국가’가 무엇이 되었는지는 끝내 정의하지 않는다.
한편, 그 구분은 점점 분명해진다.
징병된 자들은 거의 대부분 남성이며,
그중 상당수는 건강하지 못한 채로 불려간다.
청춘은 마치 기계의 예비 부품처럼 뽑혀 나가고—
건강한 이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종종 그 짐을 면제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 투표권을 가진다.
양쪽 모두 국가의 혜택을 요구한다.
양쪽 모두 공화국의 거리 위를 법적으로 동등한 시민으로서 활보한다—
그러나 단 한쪽만이 그 공화국을 위해 피 흘릴 것을 강요받았다.
전투복을 입은 노동자
징병된 자는 단지 군사 훈련에만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평시의 허드렛일에도 동원된다:
홍수 복구,
산불 진압,
제설 작업,
쓰레기 수거,
그리고 각종 공공 행사에서의 경계 근무.
그는 군인이지만 군인이 아니다.
그는 전투복을 입은 무상 노동력이며,
(상급자가) 원하는 대로 소환되고,
(상급자의) 기분에 따라 보상받는다.
그에게 지급되는 것은 정당한 임금이 아닌 소정의 수당이며,
비좁은 식당에서 끼니를 때우고,
전역할 때 받는 것은 악수 한 번과
구닥다리 프린터로 출력된 전역증 한 장이 전부다.
가짜 주권의 신파극
병사에게 경외심은 없다—
있는 건 감상적인 포스터 캠페인과
얄팍한 명절 행사뿐이다.
실제로, 겉으로는 점잖은 사회의 일부에서는
그는 존중받지 않는다—조롱받는다.
그는 폭력적이라 여겨지고,
징징대는 소년 취급을 받으며,
가부장제의 낡은 유물로 간주된다.
공화국의 봉사자가 아니라.
그런 와중에도, 제복을 입지 않은 그의 동년배 여성들은
시민적 덕목을 실천한다며 칭송받는다—
SNS에서 바른 말을 하고,
바른 방식으로 투표하며,
깊은 관심을 표현한다는 이유로.
한 사람은 피를 흘린다.
다른 사람은 트윗을 남긴다.
그리고 국가는 이것을
평등이라 부른다.
병사의 빈 자리
그렇다면, 병사는 무엇을 위해 돌아오는가?
명예도 아니고,
보상도 아니며,
권력은 더더욱 아니다.
부를 땐 국가의 아들, 다치면 당신의 아들, 죽으면 누구였는지도 모르는 사회로 돌아올 뿐이다.
그 사회에서 제복은 연대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짐이며,
총은 상징적일지언정
결코 성스러운 것이 아니다.
징병은 법적으로는 허용되지만,
정당성은 부재하다.
그리고 공화국을 지킨 그 남자는
동년배 여성들에게 다시는 그 경험을 자랑스럽게 입 밖에 내지 않기를
조용히 강요받는다.
행정 군대
한국—비효율적이고, 전근대와 근대 사이를 방황하며, 무능한 관료에 의해 관료화된 한국에서
군 복무는 국가를 지키는 어른으로서 거듭났다는 통과의례가 아니라
일종의 행정적 징발에 가깝다.
매년 수만~수십만 명이 알고리즘에 의해 선발되고,
서류로 분류되며,
막사로 주입된 뒤,
18개월 후에는 되뱉어져 나온다—
조금은 더 냉소적으로,
조금은 더 망가진 채,
그리고 여전히 무엇을 지켰는지는 모른다.
이것은 영광스런 의례가 아니다.
성스러운 희생도 아니며,
심지어 범죄자에 대한 처벌조차 아니다.
그저 절차를 위한 절차일 뿐이다.
그리고 절차란, 독자여,
국가가 왕이 아닌,
심지어 관리자조차 아닌—
엑셀 스프레드시트에 의해 통치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의미의 부재
병사는 명령에 복종한다.
그는 사격하고, 행군하고, 구령을 외친다.
하지만 그에게 묻자—
무엇을 지키는가?
그는 자랑스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가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국가가 자기 스스로를 보호받아야하는 정당성을 스스로 파괴했기 때문이다.
신화는 없다.
건국의 아버지도 죽었고,
옛 왕조도 우스꽝스럽게 몰락했으며,
(그리고 한반도 북부에는 새로운 우스꽝스러운 왕조가 세워졌다.)
피로 쓰인 신성한 문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남아 있는 것은
전문하사 지원에 대한 부드러운 안내문,
얼토당토않은 젠더 평등 교육,
가혹행위 금지 포스터뿐이다.
“국가를 수호하라,”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어떤 국가를?
너를 수치심에 빠뜨리고,
세금을 뜯어가며,
비웃는 그 국가를?
병사가 배우는 것
한국은 제복을 입은 아들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너의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결코 기려지지 않는다.
너의 충성은 당연히 요구되지만, 결코 되돌려지지 않는다.
너의 고통은 행정 문서에 기록된 뒤, 잊혀진다.
그리고 전역할 때, 국가는 너에게 애매한 수료증 한 장,
엉망이 된 이력서,
그리고 너 자신이 국방부 예산표에 찍힌
숫자 하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남긴다.
이것은, 독자여, 진정한 의미의 군 복무가 아니다.
의례화된 소외다.
그리고 그 대가는?
사기 저하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주권의 상실이다.
이유 없이 복무하고,
의미 없이 피 흘리는 병사는
공화국의 수호자가 되지 않는다.
그는 결국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대성당(The Cathedral)과 소총
(대성당(The Cathedral)은 언론·학계·문화산업·관료집단 등으로 구성된 선출되지 않은 도덕 권력 체계이며,
민주주의의 틀 안에 있지만, 그 규칙으로부터는 독립된 권위로 작동한다.
그들은 직접 법을 만들지도, 국방을 지휘하지도 않지만
국민이 무엇을 믿어야 ‘착한 사람’인지,
어떤 말을 하면 퇴출당할 것인지,
어떤 감정을 가져야 안전한지를 끊임없이 주입한다...)
민주주의—이건 중요하다—는 병사를 경멸한다.
물론 말로는 아니라고 한다.
말로는 용기와 무훈을 찬양하는 찬송가를 부른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자신이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칼을 불편해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군대를 거세한다.
목적이 아니라 절차로 만들고,
위험이 아니라 다양성으로 포장하며,
주권이 아니라 감수성을 훈련시킨다.
죽음을 각오하는 대신 눈물을 훈련받는 병사.
지휘가 아니라 정치질을 하는 장군.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질문을 감히 하지 못하는 군대다.
이 나라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왜냐하면,
한 번 총을 든 자들이 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그 끝은 언제나 파국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붕괴
자신의 병사들에게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국가는
오래도록 병사를 유지하지 못한다.
가장 뛰어난 이들은 도망칠 것이고,
평범한 이들은 안에서 썩어갈 것이며,
분노한 이들은 그 기억을 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은—전쟁은 언제나 오기 마련이기에—
그 날이 오면 국가는 주위를 둘러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 피 흘릴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왜인가?
(적어도 87체제 이후로) 국가는 단 한 번도
청년들에게 이 체제가 청년들의 것이라고 믿으라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청년들의 것으로서의 속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오직 복종하라고만 했다.
그러나 복종은 귀속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든 철회 가능한 조건부 순응에 불과하다.
모병제도, PMC도, 공동체 의식 없이 국가는 애국적인 전사(Warrior)를 만들 수 없다
한국은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소속감은 없다.
그러면 이제 사람들은 말한다—"그렇다면 모병제로 가자."
혹은 더 나아가 말한다—"돈을 주고 용병을 고용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잊지 말라. 군대란 단순한 전투력이 아니라,
누구의 편에 서서 피를 흘릴 것인가에 대한 ‘정체성의 선택’이다.
PMC(Private Military Company), 즉 민간 군사 기업은 계약에 따라 움직인다.
그들은 전투에 참여한다. 그러나 죽음은 선택사항이다.
적어도, ‘그 나라를 위해서’는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신화도, 충성할 국체도, 믿고 서 있을 공동체도 없다.
그들은 ‘전투 기술’은 제공하지만, 나라를 위한다는 감각은 제공하지 않는다.
한국은 그런 정신적 기반이 결여된 나라다.
PMC를 부를 돈은 있지만,
그들이 ‘왜 싸워야 하는지’ 설득할 공적 서사가 없다.
그리고 한국은,
돈은 약속하지만
늘 임금을 떼먹는다.
지속적 계약을 이행하는 대신,
단기성과를 내고자 초급 간부를 갈아 넣는다.
“부려먹고, 나가면 잊는다.”
그 대상이 한국 청년이면 복무,
외국 용병이면 계약.
단어만 다를 뿐, 인간을 대하는 방식은 같다.
모병제를 도입하면 모든 게 나아질까?
그럴 리 없다.
한국 사회는 자국민 병사조차 공동체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의 희생은 국가의 기억이 아니라, 정치적 자산으로 환산된다.
그리고 PMC는,
그 나라의 상징이 되지 않는다.
그는 국가의 깃발이 아니라 회사의 로고를 달고 싸운다.
그는 애국적인 전사(Warrior)가 아니다.
계약직 무장 노동자다.
결국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국가는 병역의 주체를 자국민에서 외부인으로 바꿀 수 있는가?”가 아니라—
“이 국가는, 누구든 자기 편으로 만드는 능력을 여전히 갖고 있는가?”로.
한국은 그 능력을 잃었다.
자국민 병사에게 소속감을 심어주지 못했고,
외국 용병에게도 정체성을 부여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 남는 건 하나다—장비만 있고, 싸워줄 이는 없는 군대.
총은 많지만,
그 총을 들 자는 점점 줄어든다.
그리고 그 총이 누구의 편에 서 있는지,
그 누구도 설명하지 않는다.
진정한 징병제
그러니 이제 징병제가 공정한가를 묻지 말라.
대신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징병제가 국민국가를 만드는가?
그리고 오늘날 그 대답은 분명하다: 아니다.
한국은 육체를 징병하지,
정신을 징병하지 않는다.
손에는 장비를 쥐여주지만,
가슴에는 아무것도 새기지 않는다.
그 군대는 무장을 했지만,
훌륭한 주인은 없다.
청년들은 훈련을 받지만,
신뢰는 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 총은?
총은 장전되어 있다.
그러나 그 총구는 어디에도 향하지 않는다.
북쪽을 겨눌 수 없다. 그것은 도발이니까.
중국을 향할 수 없다. 그것은 경제적 자해니까.
적은 명확히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겨눌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도발하고, 미사일을 쏘고, 위협을 반복한다.
그러나 병사는 정지한 채, 정책의 이름으로 가만히 있다.
국가는 이 적들을 선거철에는 기억하고,
외교적 비용 앞에서는 잊는다.
그래서 총은,
방향을 잃고, 의미를 잃고,
다시 자기 안으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생각 속에서,
그다음은 문화 속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침묵 속에서.
국가를 지키라고 쥐어진 총이
방어할 대상을 상실하는 순간—
그 병력은 더 이상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다.
그는 기능적으로 존재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소속되지 않은 병기다.
충성으로 묶이지 않은 소총은
결코 스스로를 내려놓지 않는다.
그는 명령을 기다리며 남아 있을 뿐,
공동체의 외곽에서 유예된 권력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권위가 사라질수록,
그 총은 점점 더 집단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을 향해 조용히 기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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