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랜드, 극단적 선택적 자유지상주의
극단적 선택적 자유지상주의
(원제: Suicidal Libertarianism)
고백 1: 나는 대체로 돈 부드로(Don Boudreaux)의 글을 무척 좋아한다.
고백 2: 하지만 이번 글은 그냥 미친 소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걸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
부드로는 먼저 "내가 가장 존중하는 몇몇 친구들"이 갖고 있는 우려를 설명한다. 그 우려란, "이민자들이 점점 커지는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정부의 개입을 늘리고 개인의 자유를 덜 존중하는 정책에 투표할 것이다"라는 것. 믿기 어렵다고? 특히 — 음, 캘리포니아 주 같은, 하찮은 사례들을 무시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상황은 점점 더 이상해진다. 부드로는 "이민자들의 투표 성향에 대한 우려는 새로운 게 아니며, 과거의 그런 두려움은 2013년의 시점에서 보면 정당화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쯤 되니 내 신경계를 내 비꼼으로 중독시킬 것 같아서, 그 대신 최대한 정중하게 이렇게 묻겠다:
미국이 “더 개입적인 방향, 개인의 자유를 덜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는 도대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그건 혹시 — 우리가 1965년 이민 및 국적법(Immigration and Nationality Act) 통과 이후부터 지금까지 겪어온, 그 급가속된 흐름과 닮은 모습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어지는 건 자유지상주의적 자살 본능에 대한 대놓고 축하하는 듯한 찬양이다:
"하지만 잠시 가정해보자. 오늘날의 이민자들—최근에 들어온 이들이나, 보다 자유화된 이민 체제 하에서 들어오게 될 이들이—실제로 내 우려하는 친구들이 걱정하듯, 미국의 경제 정책을 훨씬 더 국가주의적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압도적으로 투표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자.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나 역시 전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동의하건대, 매우 나쁘다. 정말. 매우. 나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이민 개방을 지지한다.
"나는 내 기본 원칙에 대한 지지를, 단지 그 원칙을 따르는 것이 치명적일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할 수 없다."
문제는, 그게 실제로 치명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신반동(neoreaction, 新反動)'이 생겨난 것이다.
극단적 선택적 자유지상주의 (D'oh 편)
(원제: Suicidal Libertarianism (Part D’oh))
자유지상주의적 극단적 선택 레이스에서 브라이언 캐플런(Bryan Caplan)은 돈 부드로(Don Boudreaux)를 먼지 속에 남겨두고 질주한다.
캐플런은 '비공격 원칙(Non-Aggression Principle)'을 들고 전력으로 내달린다. 방향은? 최대 속도로 달리는 자기 파괴적 컬트 집단. (물론 여기서 ‘자기 파괴적’이라는 건 이념적인 의미에서다.)
특히 이 책의 여러 장점을 고려하면, 이런 결말은 참으로 안타깝다.
미국의 자유지상주의는 오래전부터 네오-청교도적 정신적 과잉이라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
캐플런은 이 경향을 체계적으로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그의 논의는 현실적인 결과 예측과 완전히 결별한 채, 스스로를 일종의 의무론적 도덕 광신으로 변모시킨다.
그의 세계관에서는 자기방어, 보복, 경계 설정 따위는 철저히 금지된다.
자유지상주의자는 오직 일방적 이타주의만이 허용된 게임 속에서 플레이해야 한다.
그와 함께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몇 판 해보면 참 재미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정치적 결과와 무관하게 국경 개방을 무조건 지지하는 문제에 있어, 캐플런은 부드로를 신속히 옹호하고 나선다.
친절하게도 그는 자신이 작성한 관련 글 모음집을 링크해주는데, 반복적인 글들로 구성된 시리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를 보라 — 아무거나 하나만 읽어도 충분하다).
아마도 캐플런은 자신의 주장을 진심으로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는 스스로를 미쳐버리게 만든 셈이다. 만약 이 말에 잠깐이라도 의문이 든다면, 그 ‘잠깐’은 정말 순식간일 것이다 — 다음 예시를 보자:
“이민자들을 자국민만큼 중요하게 여긴다면, 그것이 이민에 반대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다음 예를 생각해보자.
두 나라가 있고, 인구는 동일하다. 정책의 질은 0에서 10 사이로 측정되며, 10이 가장 좋다.
국가 A에서는 ‘행복 점수(bliss point, 사람들이 선호하는 정책 수준)’가 2에서 6 사이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국가 B에서는 그 점수가 4에서 8 사이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민주주의 경쟁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다음과 같다:
두 나라가 독립적으로 존재할 경우, A는 중간값인 4의 질을 가진 정책을 갖게 되고, B는 중간값인 6을 얻게 된다.
사람들이 사는 평균 정책 질은 50%*4 + 50%*6 = 5이다.
이제 국경을 개방하고, 모든 사람이 더 부유한 나라 B로 이주한다고 가정해보자. 전체 분포의 중간값은 5가 된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민자들은 더 나은 정책 하에 살게 되고, 원래의 국민들은 더 나쁜 정책을 겪는다.
하지만 전체 평균은 5로 변함없다.”
말문이 막히는가? (나는 블로그 글을 쓰는 중이니, 말문이 막힐 여유가 없다.)
이 주장의 요지는 이렇다: 인류 전체의 평균적인 정치적 어리석음 이상의 체제 하에서 살아가려는 시도는 심각한 인권 침해이다.
파키스탄인들이 자기 나라를 어떻게 운영하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안타깝지만 참아야 한다.
캐플런식 자유지상주의에 따르면, 세계 정치 문화의 획일화를 촉진하는 것이 당신의 의무다.
왜냐고? 당신 쪽에 무언가 좋은 게 있다면, 그걸 나눌 때 파키스탄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해할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결국, 심각하게 퇴행한 자유주의 자본주의와 이슬람 봉건주의가 휘저어진 죽 같은 세계로 향하는 것이, 평균적으로 보았을 때 모두에게 가장 좋은 결과라는 주장이다.
그 맛이 이상하게 느껴진다면, 아직 아프리카 부족 간 전쟁이나 폴리네시아 식 인육 수집을 충분히 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싱가포르와 방글라데시를 인간 퓨레로 섞는 건 어떨까? 그 이하의 선택은 집단학살과 다를 바 없다.
이 주장은 너무나 황당해서, 진지하게 반박하려는 순간 약간 입안에서 토가 올라올 지경이지만, 의무는 의무다.
캐플런이 스스로를 자유지상주의자라고 주장하는 만큼, 비판은 그 원칙에서 시작해야 한다 — 경쟁.
어떤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그것은 경쟁을 통해 통제되는 구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런 경쟁이 작동하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 그 어떤 것도 획일화와는 양립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 실험적 다양성,
- 비교를 가능하게 하는 차등적 지원,
- 결과를 국지적으로 흡수하는 구조,
- 실패를 제거함으로써 작동하는 선택 메커니즘.
두 회사를 생각해보자: 이펙티브 주식회사(Effective Inc.)와 루저범 주식회사(Loserbum Corp.).
두 회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기업 문화가 완전히 다르다.
시장 환경에서는 루저범이 이펙티브에게서 뭔가를 배우거나, 아니면 그냥 망한다.
양쪽 모두 결과적으로 세계에 끼치는 영향은 순이익이거나, 최소한 큰 손실은 아니다.
하지만 이때 캐플런이 등장한다.
그는 이펙티브의 주주, 경영진, 직원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친다.
“당신들 괴물들! 루저범 사람들에 대해 전혀 신경도 안 써? 그들도 당신들과 동등한 도덕적 지위를 가졌다는 걸 몰라?
자, 진짜 급진적인 자유시장 계획을 알려주지. 루저범의 관리자들과 직원들 전부, 이펙티브로 들어가게 하자.
같이 일하면서 자기네 사업 전략과 업무 방식도 도입하게 해.
그러다 보면 결국 균형에 도달하겠지. 균형이야말로 시장의 본질이니까. 알겠지?
물론 이펙티브는 상당히 퇴보할 거야.
하지만 루저범들이 얻는 효용을 생각해 봐. 결국엔 다 똑같아지는 거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국가는 회사가 아니다.”
뭐, 딱 떨어지진 않더라도, 국가는 경쟁하는 제도이고 — 아니, 그럴수록 더 잘 작동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국가든 기업이든 똑같이 적용된다 —
실패를 외부화하고 집단화할 수 있을수록, 배움은 줄어든다.
제대로 작동하는 세계라면, 루저범 문화는 선택지를 가진다: 배우거나, 망하거나.
그런데 캐플런은 세 번째 선택지를 들고온다 — 공유하기.
즉, 평균화하거나, 획일화하라는 것이다. 그의 수학은 멍청하다.
싱가포르가 세계에 기여하는 바는, 그 조그만 인구가 누리는 효용 따위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싱가포르는 하나의 모델이다 — 다시 말해 이펙티브 주식회사.
이 모델이 세계에 기여하는 방식은, 루저범들에게 “너희는 이런 존재야”라고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에 루저범들을 대거 밀어넣고 파괴해버리면, 이 기능은 사라진다.
만약 이런 일이 1970년대 말 이전에 벌어졌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은 지금도 네오-마오이즘의 지옥에 머물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은 싱가포르에 3억 명의 빈곤 농민을 쏟아붓지 않았다.
대신 모델로부터 배웠다.
그게 제대로 작동하는 세계의 방식이다.
제도적 사례는 중요하다.
그런데 캐플런의 세계는 그런 사례들을 모두 말소시킨다.
그 결과는, 평균화된 삼류 루저범들이 자유지상주의-공산주의의 늪지대에서 서로 꿀꿀대며 사는 모습일 것이다.
그 세계에선 어떤 것도 작동하지 않는다. 배울 수 있는 사례 자체가 사라진다.
물론, 캐플런은 다른 주장도 내세운다.
그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이것이다 —
사회를 망가뜨려서 구성원 간에 혐오가 팽배해지면, 복지국가는 작아진다.
논리는 이렇다:
가난한 이민자들은 보통 자국민보다 더 큰 복지국가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들의 존재는 자국민으로 하여금 복지국가를 싫어하게 만든다.
왜냐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우리 사람을 챙기는” 데는 투표를 아끼지 않는다.
복지국가라는 건 바로 그걸 위한 장치다.
그래서 덴마크나 스웨덴처럼, 빈자와 부자가 문화적으로 매우 유사한 곳에서는 복지국가에 대한 지지가 일관되고 강력하다.
그러나 빈자와 부자의 문화적 거리가 커질수록,
복지국가에 대한 지지는 점점 약해지고 균일성을 잃는다.
이 주장은 너무나 매드맥스(Mad Max) 같아서 오히려 마음에 든다.
세계를 불태우면 복지국가도 함께 불타버린다.
예에에에에에에!!!!
(이 주장에 무슨 문제가 있을지 지적하는 건 더 책임 있는 사람들에게 맡기겠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다른 논거:
“비자국민은 자국민보다 투표할 확률이 확연히 낮다” —
(같은 글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물론 그 외의 글들 전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투표권은 있지만 실제로는 투표하지 않는 반(反)자본주의자들이 대량으로 존재할 경우, 도대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분명히 뭔가 좋은 결과겠지?
가장 인상 깊은 건 마지막 곡예 수준의 비유다:
“30세 미만의 자국민 유권자들이 시장과 자유에 대해 가진 적 없는 이민자들보다 훨씬 더 적대적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그냥 쫓아내면 어떨까?”
오 예스, 오 예스. 제발 좀 그렇게 해봅시다.
아니면 최소한 그들이 투표하는 걸 막자.
좌파 유권자를 대량으로 참정권 박탈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지속적인 쇠퇴 말고는 없다.
그 시작점으로는 연령 제한만큼 괜찮은 출발선도 없겠지.
내 입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민 제한은, 이민자 유권자들이 저지를 수 있는 어떤 일보다 시장과 자유에 대한 훨씬 더 중대한 범죄다.
그놈(Gnon, 자연 질서의 은유)이시여, 다행히도 아무도 자유지상주의자들 말을 듣지 않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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