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국가관:기술윤리 기반 국가설계주의 - 질서국가주의를 향하여

 제2장. 국가관 


기술윤리 기반 국가설계주의 - 질서국가주의를 향하여


기능하지 않는 전통은 폐기하며, 작동하는 정의를 윤리적 구조로 복원하는 탈신화적 국가론. 


질서 없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으며, 질서 없는 국가주의는 존재할 자격이 없다. 


서론: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는 단순히 혈통의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태어남으로써 소속되는 운명이 아니라, 구조와 목적의 질서로써 형성되고, 책임과 헌신에 의해 재생산되는 체계다. 그 어떤 민족도 국가를 "자연적으로" 갖지 않는다. 국가는 언제나 만들어진 것이며, 더욱이 잘못 만들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오래도록 많은 이들이 국가와 민족을 혼동해왔다. 특히 특정 문화권에서는, 민족이란 단어가 단일 혈통, 동일 언어, 연속된 역사라는 신화적 조건 위에 구성되었고, 이에 따라 국가도 그 신화 위에 자동적으로 존재해야 할 것으로 착각되었다. 그러나 민족이 설화라면, 국가는 구조다. 민족이 감정의 근거라면, 국가는 기능의 장치다. 감정은 국가를 만들지 않는다. 설계만이 만든다. 

진정한 국가는 우연적 출생을 넘어서, 공동의 미래를 구성하기 위한 의지적 질서다. 따라서 그것은 언제나 인간의 행위와 책임에 달려 있다. 국가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것, 그리고 계속 유지하고 보완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국가는 하나의 기술이며 동시에 윤리다. 우리는 국가를 설계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설계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지키며’,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 것인가? 

이 질문은 단지 헌법학이나 행정론의 영역이 아니다. 이것은 곧 인간과 공동체, 충성과 보상의 문제이며, 정의와 질서의 문제이기도 하다. 국가란 국경 안의 모든 인간이 자기 피와 노동을 헌납할 수 있는 가장 정당한 이유여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국가는 감정의 유물이거나, 의심스러운 강제 장치로 전락했다. 그것은 특정 정권의 기호에 따라 해체되고, 특정 담론의 이념에 따라 해명되며, 때로는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떠맡기기 위한 장부상의 주체로만 남는다. 

국가는 감정을 먹고 자라는 나무가 아니다. 국가는 설계도와 기술, 윤리와 질서를 먹고 자라는 건축물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말하려는 국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건축적 과제이며 철학적 주제다. 


종족주의(種族主義, tribalism)의 오류와 국가주의(國家主義)의 정당성 

국가를 말하면서 ‘종족’을 앞세우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민족’이란 대개 상상 속의 혈통 공동체이거나, 계급투쟁의 깃발로 다시 물들인 피 묻은 허깨비일 뿐이다. 

 민족은 언제나 정의되지 않은 채 호출되고, 국가는 그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자동적으로 정당화된다. 그리고 그 민족이라는 허상은 언제나, 어떤 자들에게는 혜택의 근거가 되고, 다른 자들에게는 침묵의 명분이 된다. 

 이른바 혈통적 민족주의는 인류학적 사기다. 모든 국가는 잡종이며, 모든 문명은 혼혈이다. 단일한 혈통이란 없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결국 자기들만의 피 안에서 폐쇄된 질서를 돌려막다가 역사 속에서 멸종해왔다. 

 그렇다고 ‘해방된 민족’이나 ‘투쟁하는 공동체’ 따위를 부르짖는 좌익 민족주의가 대안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결국 국가를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 동원구호일 뿐이며, 그 종착지는 ‘노동자 민족국가’라는 이상하고 괴기한 물건이었다. 

 이 두 가지 민족주의(우익적 종족주의와 좌익적 민중주의)는 서로 적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한몸이다. 하나는 본능과 신화를 팔고, 다른 하나는 계급과 감정을 팔 뿐, 둘 다 ‘국가’라는 설계의 책임으로부터는 도망치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글로벌리즘(globalism, 世界化主義)은 대안인가? 

좌익 글로벌리즘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국경 없는 연대를 외치지만, 실상은 질서 없는 무책임을 도덕으로 포장할 뿐이다. 공동체를 해체하고, 권위와 헌신을 불의로 낙인찍으며, 끝내는 국가를 '억압의 구조물'로 간주한 채 그 폐허 위에 이상한 놀이공원을 지으려 한다. 좌익 글로벌리즘은 혁명이 아니라 해체다. 그것은 공동체에 대한 암묵적 증오다. 

한편, 네오콘(NeoconNeoconservatives)식 글로벌리즘 역시 진심으로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들은 국가를 수단화한다. 국가의 자율성은 '시장 접근성'과 '국제규범'이라는 이름 아래 순치되고 조정된다. 그들의 '자유주의'는 사실상 단일화된 전 지구적 체계에 편입시키기 위한 허황된 전략이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선물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요구하는 건 자원, 관세, 그리고 복종이다. 

이 모든 거짓의 말잔치 속에서,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만이 이 세상에 남아야만 한다. 

혈통이 아니라 정신의 결속으로, 감정이 아니라 기능의 설계로, 그리고 유토피아가 아니라 질서와 희생의 정의로 세워진 국가. 

이 내셔널리즘은 주어진 민족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당성을 스스로 입증해낸 공동체 위에만 세워질 수 있다. 

그 국가가 ‘누구의 것인가’를 따지기 전에, 그 국가가 ‘무엇을 지킬 수 있는가’를 먼저 묻는 정신. 

그것이 오늘 우리가 다시 세워야 할 진정한 국가주의, 그리고 우리가 설계해야 할 국가 자체의 윤리와 건축적 형식이다. 


국가에 소속감을 갖지 못한 개인은 무엇을 지키는가? 

국가에 소속감을 갖지 못한 개인은 누구의 자유를 지키는가. 국가의 책임으로부터 유리된 시민은 무엇에 헌신하는가. 충성할 수 있는 공동체를 갖지 못한 청년은 누구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가. 


우리는 종종 ‘자유’, ‘권리’, ‘개성’, ‘존엄’과 같은 단어들을 어떤 실체도 없이 공중에 띄워놓고, 그 단어들 자체가 개인의 안전망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공동체가 사라지고, 국가가 기능을 상실할 때, 그 단어들은 한낱 광고 문구보다도 덜 신뢰받는 기표(記表)로 전락한다. 
  
국가가 작동하지 않으면, 개인의 권리는 국제 규범이라는 불특정한 구름 위에 걸쳐진 허상에 불과해진다. 개인의 자유는 플랫폼이나 자본의 판단에 종속되고, 시민의 자격은 기록되고 분석되는 데이터로 환원된다. 
  
특히 병역의 의무가 존재하는 어떤 체제에서, “총은 있으나 충성은 없는 병사”는 더 이상 은유가 아니다. 
  
그는 총을 들었으나, 지켜야 할 국가가 명확하지 않고, 소속된 공동체도 없으며, 죽을 만한 신념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는 형식적 시민이며, 기능을 부여받지 못한 병사이며, 장례도, 복원도 불가능한 국가의 유물이다. 
  
그리고 그가 돌아올 자리는 존경받는 청년의 자리도, 책임 있는 군인의 자리도 아니다. 그는 돌아오면, 침묵을 강요받는 피해자로만 간주되며, 어떤 대의도, 어떤 사명도 부여되지 않는다. 


국가가 필요할 때만 호출되는 의무 장치로 전락할 때, 시민은 결국 ‘합법적인 소비자’ 외의 의미를 잃는다. 시민은 이 땅에 살되, 이 땅을 지킬 이유는 갖지 않게 된다. 
  
청년은 시험과 경쟁과 수탈의 회로에 갇히고, 군인은 싸움은 요구받되, 명예는 허락되지 않는 존재가 된다. 공무는 천대되고, 헌신은 모욕받고, 국가는 마치 ‘세금 영수증이 찍힌 거대한 관청’처럼만 여겨진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단지 행정의 부실이나 제도의 결함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국가라는 실체’에 대한 철학적 붕괴에서 비롯된다. 국가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고,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스스로 회피하고 있다. 
  
윤리적 소속감을 상실한 시대에, 병사는 누구를 지킬 것인가? 책임을 공유하지 않는 시대에, 시민은 무엇을 위해 존재할 것인가? 
  

이 질문을 외면한 채 ‘의무 없는 권리’만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공동체를 위한 건설자가 아니라, 그 공동체의 해체를 가속화하는 자들이다. 

전통의 곡해와 현대적 국가 붕괴 현상

어떤 전통은 보존되어야 한다. 어떤 전통은 파괴되어야 한다. 문제는 단순히 무엇이 ‘전통’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현재를 구성하는 데 작용 가능한 힘인가다.

전통은 무조건적인 계승의 대상이 아니다. 때로는, 전통은 공동체의 생존을 해치는 독소다. 그리고 불행히도 많은 이들은 전통을 ‘무엇을 복원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구의 말을 정당화할 것인가’의 도구로 사용해왔다.

누군가는 국가라는 말을 입에 올리며 사극의 예복과 선비의 말씨를 흉내 낸다. 누군가는 민족을 말하며 혈통도, 문화도 아닌 추상적 '정통성'에 집착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유를 말하며 국가를 시장의 보조자, 혹은 양심의 감시자로만 취급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유교적 가부장제를 교묘히 왜곡한 페미니즘, 전통을 모방한 탈전통, 공동체를 파괴하는 '진보', 주체를 지우는 ‘해방’을 목도해야 했고, 마음속에서 국가라는 말만 되뇔 뿐, 그 실체는 점점 공허해진 현실을 맞이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관념적 국가, 혹은 형해화(形骸化)된 국가다.

법률은 종이 위에 적혀 있으나, 국민들은 법률을 읽지 않고, 국가는 법률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 결과, 법률은 작동하는 질서다 아니라, 무관심 속에 방치된 문장 집합일 뿐이다.

국가는 이제 비상 상황 시 호출되는 장치 역할도 못 해내게 된다. 국민의 헌신은 공동체 내 집단 간에 강요되고, 존재는 통계로만 취급되며, 의무는 남지만, 존엄은 지워진다. 그런 국가에서 국민은 동등한 구성원이 아니라 노비처럼 쓰이고 사라지는 기계의 부속이다. 이 국가는 이미 국가가 아니다. 그것은 해체된 책임의 잔해이며, 설계되지 않은 권력의 무분별한 폭력일 뿐이다.

이런 국가의 붕괴는 철학의 해체와 제도의 해체가 겹쳐 나타나는 현상이다. 국가가 주체성을 상실할 때, 위기 앞에서 '책임의 주소'를 제시하지 못하고, 윤리적 권위도, 물리적 신뢰도 스스로에게 부여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의 국가’가 아니다. 그것은 불편울 처리하기는커녕, 불편을 유발하고도 책임을 회피하는, 윤리 없는 행정의 파편들을 긁어모은 집합체일 뿐이다.

오늘날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국가가 폭력을 휘둘러서라기보다, 국가가 더 이상 자신을 지킬 준비도, 자신을 정당화할 철학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국가라는 단어는 기표(記表)를 가졌으나 기의(記意)를 잃었고, 외형은 존재하나, 그 안에는 책임도 설계도 없다. 그것은 단지 무너진 구조물일 뿐이며, 윤리 없이 방치된, 공허한 시스템이다.

설계적 국가주의의 설계 원칙 

국가는 혈통으로서만 맺어지지 않는다. 국가는 결국 설계로 완성된다.

혈통, 감정, 기념일, 민요. 이것만으로는 국가를 세우고 또 유지할 수 없다. 

나는 생물학적 유산과 가족의 구조를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한다.

생물학은 기초다. 나는 인류의 진화, 특히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을 긍정한다.

가족은 인간 공동체의 가장 안정된 토대이며, 혈연과 유전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러나 국가의 질서가 유전적 혈통이나 감정적 유대만으로 설계될 수는 없다. 가족은 자연의 구조지만, 국가는 윤리의 구조, 책임의 구조, 기여의 구조여야 한다.

혈연은 기여를 대체하지 못하고, 유전(遺傳)은 책임을 보장하지 않으며, 소속은 헌신 없이 증명되지 않는다.

국가는 설계의 대상이며, 그 설계는 반드시 보편성과 기능, 헌신과 보상, 정의와 권위의 구조를 가져야 한다.

진정한 국가는 특정 종족, 특정 계급, 특정 이념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작동함으로써 정당화되며, 정의(正義)라는 기준 안에서 기능하고, 보편(普遍)이라는 원칙 아래 움직인다.

국가란 공공의 질서가 작동하는 구조다. 누구든 그 구조 안에서, 기여한 만큼 보상받고, 침해한 만큼 처벌받으며, 기능한 만큼 이름을 남긴다.

국가가 단순히 누구의 것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지켜내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기능 없는 의례, 책임 없는 분배, 보상 없는 의무—이것들은 국가의 이름을 가장한 기형적 장치들이다.

그런 체제는 국가가 아니라, 노동을 착취하고 거짓 감정을 포장하는 거대한 행정 연극일 뿐이다.

국가는 공동체적 헌신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헌신이 단지 희생으로만 소비되어선 안 되며, 그에 상응하는 설계된 보상과 책임의 공유가 뒤따라야 한다.

전쟁터에 내몰린 청년이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하는 것이 조롱과 침묵이라면 그 국가는 가장 기본적인 통치윤리를 포기한 셈이다.

공공을 위해 일한 자에게는 권위가 부여되어야 하고, 공동체를 위해 봉사한 자에게는 명예와 자원이 돌아가야 한다.

‘보상이 없는 헌신’의 강요는 폭력이다. 그리고, ‘의무의 이행없이도 부여되는 권리’는 기생이다.

국가는 의무와 권리를 균형 있게 매개하는 윤리적 메커니즘이어야 한다.

정의로운 국가란 무엇인가?

정의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질서에 맞닿은 실천이며, 국가라는 구조 안에서 구현되는 법적 의지다.

정의로운 국가는 힘 있는 자에게 굴종하지 않고, 가난한 자를 선전 도구로 삼지 않으며, 평등을 명분 삼아 모든 질서를 허물지도 않는다.

그러나 국가는 단지 정의롭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라는 구조를 통해 지속 가능해져야 한다.

정의는 목적이자 조건이며, 그 위에 설계된 질서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보편제국(普遍帝國, Universal Empire)의 가능성과 기능적 국민국가(國民國家, Nation-State) 

내셔널리즘은 필요하다. 그러나 고립주의(孤立主義)는 필수 옵션은 아니다. 우리는 국가를 지키고자 하는 본능을 이해한다. 그러나 그 본능이 두려움에서 출발할 때, 국가는 오히려 닫힌 섬이 되고 만다.

일부 국가들에겐 고립주의가 가능하다. 그들은 지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이들은 해양으로 둘러싸여 있고, 내부 시장이 방대하며, 자체 무력 투사 능력도 갖추고 있다.

그들에게 고립주의적 내셔널리즘은 곧 전략적 사치다. 자신을 닫아도 무너지지 않으며, 심지어는 폐쇄 속에서 안정과 번영을 누리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국가가 그럴 수는 없다. 특정 국가들은 지정학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항상 외부의 충격에 노출되어 있으며, 내부의 통합만으로는 결코 자립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러한 국가에 있어 고립주의는 단순히 국가주의라기보다는 자살(自殺)의 뒤틀린 미학이다. 그것은 스스로 국경을 철조망으로 감싸고, 그 안에서 천천히 질식하는 방식의 변질된 충성이다.

국가가 진정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한다면, 닫혀 있어선 안 된다. 국가는 능동적으로 외교하고, 연대하고, 규범을 세우고, 심지어 그 규범의 발신자이자 주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기능적 국민국가의 기초다. 기능적 국민국가는 혈통으로만 묶이지 않는다. 그것은 시민권, 책임, 기여, 질서, 보상이라는 명확한 설계 구조로 구성된다.

그 구성원은 그저 같은 핏줄을 공유하기 때문에 국민이 아니라, 같은 법을 따르고, 같은 질서에 기여하며, 같은 가치에 헌신하기에 국민이 된다.

그리고 이 기능적 국민국가는, 궁극적으로 보편제국을 지향할 수 있다.

보편제국이란, 단일 민족이나 종교나 이념의 확장이 아니라, 공동체를 구성하고 지탱할 수 있는 보편 원리의 확장을 말한다.

국가 시스템은 언젠가 스스로를 넘어서야 한다. 자국민을 위한 도구를 넘어, 자신이 이룩한 윤리적 질서를 외부에 적용하거나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질서가 기능적이고 정당하다면, 그 시스템은 언젠가 ‘문명적 설계’의 이름으로 외부에 이식되거나 수출될 수 있다.

이것이 국가가 국민국가(nation-state)에서, 보편적 제국(civilizing structure)으로 진화하는 방향이다.

국가는 형태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깃발, 지형, 혈통, 상징은 모두 부차적이다. 국가는 작동하는 질서이며, 지속가능한 정의의 구조이며, 공동체적 생존을 가능케 하는 기술적 토대다.

국가는 설계이고, 설계는 기능에서 정당성을 얻는다. 오직 기능하는 국가만이 자신을 방어할 수 있고, 다른 공동체의 미래까지 설계할 수 있다.

맺음말: 국가 시스템 설계자는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가.

국가는 특정한 민족이나 계층에 소속된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헌신과 기여를 통해 함께 설계하고 유지해야 하는 공동 구조물이다.

그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기능하느냐다.

그 국가는 당장 명명(命名)할 이름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작동해야 한다. 작동하는 정의, 기능하는 질서, 보상받는 헌신, 이루어지는 의무.

그 국가는 혈통으로서만 이어지지 않는다. 그 국가는 맹세와 구조로, 그리고 국가 시스템 설계자의 철저한 설계도 위에 세워진다.

설계자는 국기(國旗, flag)라는 상징보다 앞에 나서지 않는다.  그는 통치를 위해 설계할 수도 있지만, 먼저 감당해야 할 것은 국가 시스템에 대한 책임이다. 그는 법을 초월하지 않으며, 법이 작동할 수 있도록 그 구조를 다듬는 자다. 그는 국가윤리를 독점하는 자가 아니라, 국가윤리의 첫 번째 복무자다.

그는 자기의 명예보다 국가의 존속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이름보다 국가 시스템의 지속 가능성을 먼저 고려한다.

그는 사상가이자 기술자이며, 구도자(求道者)이자 이름없는 자이다. 그는 영웅이 아니라 책임을 끝까지 감당하는 무명(無名)의 통치자다.

그리고 진정한 국가주의자는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않는다. 그는 기념일을 기획하지 않고, 탁상행정적인 의식을 연출하지 않으며, 휘황찬란한 선언문을 붙이지 않는다.

그는 단지 지속 가능성의 틀을 만들고, 사라진 뒤에도 그 틀이 공동체를 지탱하도록 만든다.

국가주의자는 말을 아낄 줄 알아야 하며, 결단을 할 의지가 명확해야 한다. 그는 대중의 함성을 대행하지 않고, 패배를 인식하고, 망국(亡國)의 조짐(兆朕)을 수치(數値)를 통해 읽고, 다시 설계한 뒤, 그는 고독하게 물러서며 그 질서를 이을 자에게 자리를 넘긴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이 모든 조건을 감당할 자격이 있는 자가 있는가. 그 자는 이 구조를 만들 책임이 있는가. 이 질서를 유지할 결단이 있는가.

국가는 기다린다. 아직 이름도 없이. 아직 설계도(設計圖) 없이.

이제 묻는다. 누가, 그 국가를 세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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