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우파와 탈민족주의에 대한 페북 글에 대한 개인적 비평 feat. 신반동주의

 한정석의 한국 우파와 탈민족주의에 대한 페북 글 링크: https://www.facebook.com/share/p/1BHNfgJji9/


현대 한국 보수주의가 직면한 정체성 위기는 단순한 정치적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철학적 토대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 신반동주의적 관점에서 현대 보수주의는 진보주의의 속도를 늦추는 데 불과하다는 비판은 한국 맥락에서도 적용되는 것으로 보여짐. 한정석 아재가 한국 보수주의가 직면한 중요한 갈림길을 포착했지만, 이를 신반동주의적 시각(그리고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도 덧붙여서)에서 더 깊이 분석할 필요가 있어 보여 적어보는 비평 글.


우선, 한정석 아재의 원문에서 "미국의 보수주의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없다"라고 주장한 부분을 분석해보자. 사실 이 주장은 미국 보수주의의 본질에 대해 오해의 소지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보충설명도 필요해보이고.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미국 보수주의의 국가관과 공동체 인식을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음. 그러니 바로 설명해보겠음.


미국 보수주의는 유럽식 민족주의와는 다른 형태의 국가 개념을 발전시켰음. 이는 단순히 '민족'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임. 민족이라는 단어가 혈통적인 민족과 동질적인 유래, 전통 언어를 지니고 국민국가수립할 여건이 되거나 이미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인 네이션이라는 서로 다른 개념이 혼동되어 사용되는 걸 고려하면 더더욱), 미국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국가 정체성을 구성했다는 의미. Ethnicity을 통한 민족주의는 아닐 지언정, 미국식 nation을 구성했다는 얘기. 애당초 미국은 다민족 국가니. 미국 보수주의 전통에서는 다음과 같은 국가 개념의 요소들이 발견됨.


첫째, 언약적 국가관(Covenant Nationhood). 미국 보수주의는 국가를 단순한 행정 단위나 민족적 집단이 아닌, 공통의 가치와 원칙에 기반한 언약 공동체로 인식함. 이는 청교도 전통에서 기원하며, 국가가 단순히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라 도덕적 목적을 위해 결합된 공동체라는 관점을 반영함.

 

둘째, 헌법적 애국주의(Constitutional Patriotism). 미국 보수주의는 헌법과 건국 원칙에 대한 충성을 강조함. 이는 혈통이나 민족성에 기반한 유럽식 민족주의와 구별됨. 러셀 커크와 같은 미국 보수주의 사상가들은 미국의 정체성이 헌법적 질서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음.


셋째, 문화적 응집력(Cultural Coherence). 미국 보수주의는 공유된 역사, 전통, 관습, 언어가 국가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고 봄. 이는 '신이 주신 질서'에 대한 추상적 복종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화적 기반을 인정한다는 얘기.


그리고 미국 보수주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공동체를 인식함.


첫째, 유기적 사회관(Organic Society). 에드먼드 버크의 영향을 받은 미국 보수주의는 사회를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이 아닌 유기적 전체로 봄. 이는 사회가 세대 간의 계약이며, 과거, 현재, 미래 세대를 연결하는 연속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소리.


둘째, 중간 집단의 중요성(Mediating Institutions). 미국 보수주의는 가족, 교회, 지역 공동체, 자발적 협회 등 중간 집단의 중요성을 강조함. 이러한 집단들은 개인과 국가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며, 국가 정체성의 중요한 구성 요소.


셋째, 예외주의적 사명감(Exceptionalist Mission). 미국 보수주의는 미국이 세계에서 특별한 역할과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예외주의적 관점이 있음.(네오콘뿐만 아니라 팔레오콘도 은근히 그런 구석이 있음. 네오콘식 개입주의건 팔레오콘식 주권주의(sovereigntism)건 그 심층 영역에는 바로 이런 정신이 있음.) 이는 단순한 개인주의나 보편적 질서에 대한 복종을 넘어서는 집단적 정체성과 목적의식을 나타냄.


사실 신반동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현대) 미국 보수주의의 국가 개념은 진보주의적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보여짐. 그러나 이 말은 미국 보수주의에 국가 개념이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현대 리버럴적 흐름에 의해 약화(내지는 오염)되었다는 소리. (리버테리언적 관점에서 볼 때 미국은 리버럴이건 콘서버티브건 할 것 없이 국가주의가 강해서 탈.)


원래의 미국 보수주의 전통은 개인의 권리만큼이나 공동체적 의무와 질서를 강조했음. 이는 단순히 "신이 주신 질서에 만인이 복종해야 한다는 관점"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문화적, 제도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국가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었음.


자, 이제 다음 부분도 분석해보자. 한정석 아재의 원문을 보면 독일 보수혁명의 실패를 "피와 대지의 결합" 논리가 나치즘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함. 이러한 분석은 민족주의적 요소가 나치즘에 악용된 측면을 포착했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타당하다고 볼 수 있음. 그러나 이는 보수혁명의 실패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음. 그래서 보충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


신반동주의적 관점에서 독일 보수혁명의 실패는 더 근본적인 모순에서 비롯되었음. 


첫째, 현대성과의 불가능한 타협. 보수혁명 운동은 근본적인 모순을 안고 있었음. 한편으로는 전통적 질서, 위계,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적 수단과 방법론을 수용했습니다. 이들은 대중 동원, 혁명적 수사, 현대 테크놀로지에 대한 찬양 등 근대성의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음.


둘째, 혁명적 방법론의 채택. 보수혁명이라는 명칭 자체가 내포하는 모순('보수'와 '혁명'의 결합)은 이 운동의 근본적 딜레마를 드러냄. 신반동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진정한 전통의 회복은 혁명적 방법을 통해 달성될 수 없음. 혁명적 방법론은 전통적 질서의 점진적이고 유기적인 본질을 부정하는 점이 있음. (다른 의미에서의 혁명이라면 모르겠지만)

보수혁명가들은 대중 정치와 선동적 수사를 활용하면서도 엘리트주의와 위계질서를 옹호했음. 이러한 모순은 결국 나치즘과 같이 대놓고 대중 혁명 운동을 주장하는 사상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음.

셋째, 민주주의 시대의 대중정치 수용. 신반동주의에서는 민주주의적 대중정치의 틀 자체를 근본적 문제로 봄. 보수혁명가들은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민주주의 시대의 대중정치라는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였음. 그들은 대중의 지지를 동원하고 정치적 운동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음.

바로 이 대중정치의 판에서 게임을 하려한 것 자체가 치명적인 오류였음. 전통 질서의 회복은 민주주의적 과정이나 대중 동원보다는, 엘리트 중심의 권위 구조 재건을 통해서 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높음.

결국, 독일 보수혁명가들이 나치즘에 흡수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 수 밖에 없었음.  보수혁명가들이 추구한 목표(전통 질서 회복)와 그들이 채택한 방법(현대적 대중 동원)의 근본적 불일치는 결국 방법이 목표를 압도하는 결과를 낳았음. 나치즘은 보수혁명가들이 추구한 민족적, 문화적 요소들을 차용하면서도, 그들이 거부했던 대중 혁명의 역동성을 완전히 수용했음. 보수혁명가들이 나치즘에 흡수된 것은 그들의 사상이 변질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접근법에 내재된 모순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결과란 소리. 

흠...근데 신반동주의도 현대적 방법으로 전통적 질서를 구현하고, 기술발전에 호의적이다 못해 기술광스러운 면모가 있지 않나 하는 의문도 들 것임. 그리고 일부 신반동주의자들의 극단성을 보면 이들도 혁명적인 부분이 있지 않나 생각도 들 것이고.


신반동주의도 독일 보수혁명 운동과 유사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얘기. (물론 완벽한 사상이란 없으니 실제로 모순일 수도 있겠다.)

즉, 신반동주의(NRx)가 현대적 방법과 기술 발전에 대해 취하는 태도의 복잡성에 대해서도 부연설명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설명해보겠다.

신반동주의와 독일 보수혁명 운동의 주요 차이점은 바로 이것들임.

첫째, 기술적 접근방식. 신반동주의는 기술 자체를 거부하지 않음. 오히려 커티스 야빈(Mencius Moldbug)이나 닉 랜드, 그리고 일론 머스크나 피터 틸과 같은 사상가들은 기술적 발전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통해 민주주의적 구조를 우회하는 방식을 모색함. 그들은 '종료와 탈출(Exit)'이라는 개념을 통해 기존 체제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하며, 이는 보수혁명가들의 체제 내 변혁 시도와 다름. 다시 정리하자면 보수혁명가들(특히 융거)은 기술을 민족적 동원과 재활성화의 수단으로 봤음. 그에 반해 신반동주의자들은 기술을 주로 기존 체제로부터의 탈출과 대안적 공간 창출의 도구로 본다는 소리.

근데 이 '종료와 탈출(Exit)'이라는 개념이 이해가 잘 안될 수 있음. 그러니 이에 대해서도 부연설명을 하겠음. 종료와 탈출 개념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기존 정치체제나 사회구조로부터의 분리와 대안적 시스템 구축을 의미함.

종료와 탈출 개념의 핵심 요소들은 바로 이것들임. 

첫째, 발언(Voice)과 탈출(Exit)의 구분. 알버트 허쉬만(Albert O. Hirschman)의 구분에 기반하여, 신반동주의자들은 민주주의적 과정을 통한 '발언'보다 시스템으로부터의 '탈출'이 더 효과적인 저항 형태라고 생각함. 발언은 기존 시스템 내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것인 반면, 탈출은 시스템 자체를 떠나는 것임.

둘째, 기술적 탈출. 기술을 통해 기존 국가 구조와 민주주의적 과정을 우회할 수 있다는 생각임. 암호화폐, 분산 네트워크, 사이버네틱스 등의 기술을 통해 국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포함함.

셋째, 패치워크(Patchwork). 야빈이 제안한 개념으로, 단일한 국가 대신 다양한 작은 정치단위들(도시국가나 기업국가 형태)로 구성된 세계를 말하는 것임. 이러한 단위들 사이에서 개인들은 자유롭게 이동하며 자신이 선호하는 통치 형태를 '선택'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

넷째, 물리적/공간적 탈출. 해상도시(seasteading. 패티 프리드먼이라는 사람이 이 프로젝트에 적극적이고, 피터 틸이 해당 사업에 투자를 하기도 했었으나 결국 기술적 문제나 비용 문제 때문에 현재 피터 틸은 시스테딩에 흥미를 잃었음), 우주 식민지 건설(화성 갈끄니까.), 특별경제구역 등 물리적으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여 기존 국가의 영향력 밖에서 새로운 정치체제를 실험하는 것을 포함함.

다섯 째, 메타정치적 의미. 탈출은 단순히 물리적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기존 정치적 패러다임으로부터의 인식론적, 개념적 탈출도 포함함. 민주주의, 평등, 진보와 같은 현대 정치의 핵심 개념들에 대한 근본적 재고를 요구한다는 소리.

아.. 부연설명이 참 길었다. 신반동주의와 독일 보수혁명 운동의 두 번째 차이점은 바로 역사에 대한 태도임. 보수혁명가들은 특정 역사적 시점(중세 또는 전근대적 통치체제)으로의 회귀나 그 정신의 복원을 추구했음. 그에 반해 신반동주의는 역사의 특정 지점으로 돌아가려 하기보다 완전히 새로운 통치 형태(신기업주의, 패치워크 등)를 구상함.

그리고 신반동주의와 독일 보수혁명 운동의 세 번째 차이점은 대중에 대한 태도. 이게 가장 뚜렷한 차이점임. 보수혁명가들은 대중을 동원하고 그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으며, 민족적 재생의 주체로 간주했음. 신반동주의자들은 대중민주주의 자체를 문제로 보며, 대중정치보다는 기술-엘리트 중심의 해결책을 선호함.

네번째 차이점은 민족주의와 정체성임. 보수혁명은 본질적으로 독일적 정체성과 독일 민족의 특수성에 뿌리를 두고 있었음. 신반동주의는 훨씬 더 보편적이고 탈민족적인 접근을 취하며, 효율성과 기능성을 기반으로 한 통치 시스템을 추구함.

다섯 번째 차이점은 혁명적 방법론. 보수혁명가들은 정치적 변혁을 통한 체제 전복이나 변화를 추구했음. 신반동주의자들은 체제 내 혁명보다는 체제로부터의 점진적 탈출과 대안적 구조 구축을 선호함. 


여섯 번째 차이점은 철학적 기반. 보수혁명은 주로 독일 낭만주의와 니체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음. 그에 반해 신반동주의는 사이버네틱스, 시스템 이론, 진화심리학, 경제학 등 다양한 현대적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도 주요 차이점. 


후... 무척 길었다... 이번엔 한국 보수주의를 위한 거짓 이분법에 대해 논해보자.


한정석 아재의 원문에서는 한국 보수주의가 "독일식 민족주의와 결합된 질서주의"와 "개인에 바탕한 영미식 질서주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함. 


이것은 거짓 이분법으로 보여짐.


진정한 반동은 현대성의 모든 가정을 거부해야함.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현대적 민족주의는 모두 같은 혁명적 사고방식의 산물임. 두 가지 모두 전통적 질서와 자연적 위계를 부정하는 현대성의 다른 표현에 불과함.


한국 보수주의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이 두 가지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유대와 자연적 위계를 인정하는 유기적 사회 질서의 회복임. 이는 단순히 서구의 모델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서, 한국의 고유한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올바른 질서를 재발견하는 게 중요하다는 소리. (작금의 87체제를 버리기 싫어하는 부머 세대 좌우파 입장에서도 막상 듣기 싫은 소리겠다만, '한국스러운 것 자체'를 혐오하는 사대주의자 입장에서는 더더욱 혐오할 소리. 하하하.)


그나마 한정석 아재의 원문에서 가장 통찰력 있는 부분은 일본에 대한 한국 보수주의의 태도에 관한 분석임. "일본을 민족주의 유산에 바탕해 여전히 적대시하는 반일 우파 보수"의 모순을 정확히 지적했음.


신반동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모순은 더욱 명확해집니다. 민주주의 시대의 역사적 불만은 결코 해결되지 않도록 설계되었다는 신반동주의적 시각은 한국 상황에 적용될 수 있음. 민족주의적 역사 해석에 기반한 반일 감정은 한국 보수주의가 "대성당"(The Cathedral)—즉, 진보적 이념을 전파하는 학계, 언론, 문화계의 네트워크—에 의해 조종당하게 만듬.

한정석 아재가 지적한 대로, 이는 한국 보수주의가 "좌파와 진보에 계속 항일과 반일에 가스라이팅 당하면서 결국 자기 모순에 빠져들" 상황을 초래함. 신반동주의적 관점에서 이는 자연스러운 결과. 보수주의가 진보주의의 프레임워크 내에서 작동하는 한, 그것은 결국 진보주의에 패배할 수밖에 없기 때문!

다만, 한정석 아재의 글에서 간과된 중요한 측면이 있음. 바로 주권의 문제임. 신반동주의에서는 명확하고 분할되지 않은 주권을 강조함. 신반동주의적 관점에서 권력은 분할될 수 없으며, 분할된 권력은 곧 경쟁이고, 경쟁은 갈등을 낳는다고 생각함.

한국 보수주의가 직면한 진정한 과제는 경쟁하는 이념적 프레임워크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주권과 결정 구조를 확립하는 것임. 이는 민주주의적 과정을 통해 달성할 수 없으며, 대신 더 근본적인 사회적, 정치적 재구성을 요구함. 

잠깐! 신반동주의의 패치워크 개념은 권력의 분할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음. 패치워크(Patchwork) 개념과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모순이 있음. 패치워크는 표면적으로는 권력의 분할처럼 보이지만, 신반동주의적 관점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바라봄. 

1. 각 패치(영역)는 자체적으로 명확하고 분할되지 않은 주권을 가짐. 즉, 각 패치 내에서는 권력이 분산되지 않고 통합되어 있음.

2. 패치워크는 경쟁하는 다양한 통치 형태를 허용하지만, 각 패치는 자신의 경계 내에서 완전한 주권을 행사함.

3. 이것은 "출구(exit)"라는 개념과 연결됨. 시민들은 한 패치에서 다른 패치로 이동할 자유가 있지만, 각 패치 내부의 통치 형태에 대해서는 발언권(voice)보다는 퇴장(exit)의 권리가 우선시됨.

요약하자면, 패치워크는 표면적으로는 권력의 분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각 패치 내에서 단일하고 분할되지 않은 주권을 강조하는 시스템. 국가 내 권력 분립(삼권분립 등)과는 다른 개념으로, 오히려 여러 개의 작은 주권 국가들이 공존하는 형태에 가까움.

자..무척 긴 길이었다. 이제 슬슬 한정석 아재의 글에 대한 비평의 결론을 내보자. 

한국 보수주의가 당면한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은 현대 민주주의의 틀을 넘어서야 할 것임. 이는 단순히 독일식 또는 영미식 보수주의 모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질서와 위계를 회복해야한다는 소리.

역사는 진보하지 않고 순환한다고 볼 수 있음. 한국 보수주의가 나아갈 길은 현대성의 환상을 버리고, 기능적이고 안정적인 사회 질서의 기본 원칙을 재발견하는 것임. 이는 민족주의적 감정이나 추상적 개인주의가 아닌,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와 명확한 권위 구조에 기반해야 함.

한국 보수주의의 진정한 과제는 단순히 "민족 개념과 독립의 개념을 탈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보편적 가치로 해석하는 작업"을 넘어서서, 현대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결함을 인식하고 더 안정적이고 기능적인 사회 질서를 위한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함.

부디 그러길 바라며 매우매우 긴 글을 마치겠음.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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