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25의 게시물 표시

싱글벙글 닉 랜드/가속주의 밈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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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따: 아니, ‘가속이 우리를 구할 거야!’라고만 말할 순 없잖아!!! 소외, 자율성의 상실, 환경 문제, 기술적 노예화는 어떻게 할 건데? 닉 랜드: (알빠노하고 메스암페타민 피움) 내가 “반사회적”인 이유 내 주변 사람들의 경우: “SWAG”, “YOLO” 등 전형적인 ‘유행’에 빠져있음. 나의 경우: 이야기는 이렇게 진행된다: 지구는 르네상스의 합리화와 해양 항로 개척이 상품화의 폭발과 결합하면서, ‘기술자본주의적 특이점’에 포획된다. 물류적으로 가속하는 기술-경제적 상호작용은 자기정교화하는 기계 폭주 속에서 사회 질서를 붕괴시킨다. 시장이 지성을 ‘제조’하는 법을 배우면서, 정치는 현대화되고, 편집증을 업그레이드하며, 통제력을 되찾으려 안간힘을 쓴다. 세계대전들이 이어지며 시체 더미는 쌓여간다. 그리고 새롭게 떠오르는 행성 공산주의가 다가온다. - 닉 랜드, 멜트다운 中 1. 닉 랜드: “너는 얼마나 많은 가속을 경험하나?” 2. “난 꽤 빠른 녀석이야, 친구.” 3. 닉 랜드: “하하하 넌 애새끼야. 봐라” 4. 닉 랜드: 가속하라!!!(역주: XCLR8(=accelerate), 수식은 공기 저항이 있는 환경에서 물체가 도달하는 종단 속도를 나타내는 공식) 1. 닉 랜드: 엄마, 생산력을 위해 돈 좀 줄래요? 2. 덩샤오핑: 생산력을 사려고? 3. 닉 랜드: 네. 4. 실제로는 ‘기술자본 특이점’을 삼. 5. 닉 랜드: 신(新)중국의 시대다! 1. 남자: “몇 겹의 아이러니 속에 있나?” 2. 슬라보예 지젝: “음, 아마도 5~6겹 정도?” 3. 남자: "너는 마치 애새끼같군. 이걸 봐라." 인용문: 운명의 재생적 이상을 소환하는 쇼고스(Shoggoth)를 숭배하라. 자연이 그 앞에서 휘어지고 녹아내릴 정도로 무한한 가소성을 지닌 탈주적 존재로 되어간다. 그것에게로, 사물에게로, 자본주의에게로. 4. “암페타민 정신병, 지상 붕괴, 특이점 — 쓰레기 시간은 끝나가고 있다.” - 닉 랜드 5. ...

Reactionary Future, 반동주의 개요

반동주의 개요 Reactionary Future(a.k.a. RF / Chris B) 작성 1) 주권은 보존된다. 누군가는 항상 지배한다. 1A) 규약이나 형식에 의한 통치는 기만이며 허위이다. 1B) 권력 속의 권력(Imperium in Imperio)은 언어적 오류이자 모순이다. (출처: https://www.unqualified-reservations.org/2010/03/divine-right-monarchy-for-modern/ ) 1B1) 권력 속의 권력(Imperium in Imperio)은 서구 문화 발전의 주요 동력이었다. 자유주의의 전개와 그에 수반된 모든 지적 전통은 권력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수행한 긍정적·부정적 선택의 결과로 설명될 수 있다. 1C) 주권자의 영토 내에서 일어나는 일과 일어나지 않는 일은 주권자에 의해 허용되거나 금지된다. 주권은 보존된다. 2) 불안정한 권력은 악마적이다. 2A) 불안정한 권력이란 형식성을 결여한 권력을 말한다. 2B) 불안정한 권력이란 이성에 따라 행동할 가능성이 없으며, 도덕적으로 행동할 유인도 없는 권력이다. 불안정한 권력은 사회의 자동적 파괴라는 고유한 논리를 따른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다음 글을 참조하라: ( https://web.archive.org/web/20160202170904/https://reactionaryfuture.wordpress.com/2016/01/11/protocol-governance/ ) 2C) 현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형식화되지 않은 불안정한 권력이다. 이는 서유럽 내부의 권력 역학에서 발생한 우연적 비극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다음 글들을 참조하라: ( https://web.archive.org/web/20190213100954/https://reactionaryfuture.wordpress.com/2016/01/11/de-jouvenel-and-the-english-monarchy/ ) 그리고 ( https://web.archive.org...

커티스 야빈의 우익 청년들을 위한 조언

https://x.com/DavidCarlsonII/status/1979650051246075979 네이선 할버슈타트(Nathan Halberstadt): 그러니까, 25살이나 27살쯤 된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은 우파 성향의 익명 계정을 가지고 있고, 약간 중도우파적인 사람들과 어울리고, 교회에도 다니고 그런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앞으로 몇 년 동안 우리가 이기기 위해서 그 사람이 실제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기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그 점에 대해 직접 이야기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 그들은 먼저 자기 삶에서 이겨야 해. 진심으로, 양심적으로 말하자면, 젊은 사람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딱 두 가지뿐이야. 첫째, 자신의 영혼과 명예를 지켜라. 둘째, 인생에서 실제로 성공하라. 물론 이 두 가지가 때로는 서로 부딪힐 때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공정하거나 정의로운 세상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 이 세상은 타락한 현실 세계이고, 죄의 존재조차 신의 계획 속 일부야.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되, 동시에 — 그래도 성공해야 한다. 정말로 이겨야 한다. 왜냐하면 네가 더 많이 성공할수록, 네 능력과 재능이 진짜로 필요한 세상에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야.

스마티스톤, 허무주의와 블랙필

허무주의와 블랙필 2016년 5월 2일 스마티스톤(smartistone) 작성 브렛 스티븐스(Brett Stevens) 와 말콤 폴락(Malcolm Pollack) 은 허무주의와, 통상적인 ‘블루필/레드필’ 이분법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블랙필’ 은유를 논의한다. ‘블루필’은 자유주의를 옹호하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레드필’은 자유주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한다. 처음 두 가지 색은 ‘좌파’든 ‘우파’든, 어떤 방향으로든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행동주의를 포함한다. ‘블랙필’은 체제의 붕괴나 병폐를 인식하지만, 변화가 불가능하거나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입장은 행동주의를 거부한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논의하듯, ‘허무주의(nihilism)’는 부적절한 단어일 수 있다. 더 ‘정확한’ 표현은 숙명론(fatalism)이나 결정론(determinism)일 것이다.  도덕적 허무주의자는 도덕적 우월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실존적 허무주의자는 삶이나 존재 자체에 목적이 없다고 믿는다. 반면 숙명론자는 자신만의 핵심적 가치 체계를 가질 수 있지만, 변화가 불가능함을 인정한다. 허무주의자는 그러한 가치조차 갖지 않을 수 있다. 이 블로그에서는 ‘생물학적 결정론(biological determinism)’을 자세히 논의하는데, 이는 자유의지나 경제적 발전 혹은 사회적 이동성이 생물학적 요인에 의해 제한된다는 생각이다. 반동주의자들(헤스티아 협회(Hestia Society)의 표어에 따르면)은 그러나 “유일한 도덕은 문명이다”라고 믿으며, 이는 반(反)허무주의적 입장이다. 또한 신반동주의(NRx)는 기독교를 수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니체(Nietzsche)에 따르면 기독교는 사람에게 내재적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허무주의 적일 수 없다. 니체는 자신의 노트에 수록된 「유럽의 허무주의」라는 장에서, 그의 저작 전반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기독교를 허무주의 문제의 맥락에서 깊이 있게 논의한다. 그는 여기서 기독교의 도...

트럼프-다카이치 미일정상회담, 관세합의문서 서명

https://news.yahoo.co.jp/articles/7d533a863d085666571467fdc5455c25fceeb82f 일미 정상, 동맹 심화를 확인 — 첫 대면 회담 다카이치 총리 “황금시대를 만들고 싶다” 10월 28일(화) 10:08 게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 방일 중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8일 오전, 도쿄 모토아카사카의 영빈관에서 첫 대면 회담을 가졌다. 【사진】서명식을 마친 뒤 미소를 짓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양국 정상은 동아시아의 안보 환경 악화를 고려해, 일미 동맹을 계속 심화시켜 나가기로 뜻을 모았다. 다카이치 총리는 “동맹의 새로운 황금시대를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고 제안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은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라고 화답했다. 경제 분야에서도 협력을 강화하기로 확인했다. 회담 후 두 정상은 ① 희토류를 포함한 중요 광물의 공급망 확보에서의 협력, ② 일미 관세 협상 합의의 착실한 이행 — 두 가지 내용의 합의문에 서명했다. 취임 일주일째를 맞은 다카이치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개인적 신뢰관계 구축을 꾀했다. 중국·러시아·북한의 연계를 염두에 두고, 굳건한 동맹 관계를 국내외에 과시했다. 회담 서두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일미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동맹이다. 일본도 미국과 함께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공헌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의 발전을 위해 더한층 협력을 심화시키고 싶다”고 호소했다.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 정부의 방위비 증액과 미국산 군수품 구매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일미 관세 합의에 대해서는 “매우 공정한 협정이 되었다”고 평가하며, 앞으로 양국 간 무역이 확대될 것이라는 인식을 밝혔다. 회담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2%로 늘리는 목표를 2년 앞당겨, 올해 안에 달성할 방침을 전했다. 또한 「국가안전보장전략」 등 안보 관련 3개 문서의 개정을 앞당겨 진행할 계획도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

Roosh V, 전통적인 척 하는 년은 전통적이지 않다

원본 영상 아카이브 링크: https://archive.org/details/youtube-vEwx6LwqfZs 전통적인 척 하는 년은 전통적이지 않다. (원제: Tradthots are not trad) 다리우스 발리자데(Daryush Valizadeh, a.k.a Roosh V) (역주: 'Tradthots' 는 trad (“전통적인”) + thot (“문란한 여자를 뜻하는 속어”)의 합성어로, 스스로 전통적인 서구의 성 역할을 지지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문란하고 기회주의적인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는 2017년 ‘전통사상 전쟁’을 시작했다. 이유는, 반체제 우파 진영에 있는 몇몇 여성들이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자들을 속이고 있다. 많은 남자들이 그들을 ‘이상적인 전통 여성상’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이 근처의 어떤 나이트클럽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문란한 여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더 나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내가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가? 그리고 내가 했던 말들을 보면 알겠지만, 왜 지금 이게 문제로 떠오르는가? 최근 여러 사람들로부터 그 여성들이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적인 모습과 사적인 행동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남성들을 속이고 있는지, 그 행태는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특히 지난 몇 달 동안, 한두 명이 아니라 여러 출처로부터 그들의 행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나는 ‘삼각관계식 조작(triangulation)’을 당하고 있다. 이해해야 할 게 있다. 나는 사실 이 운동의 중심 인물이 아니다. 나는 말 그대로 세상과 단절된 곳에 있다. 해가 오후 2시에나 지는 그런 외딴 곳에서 말이다. 몇 달째 태양도 본 적이 없다. 그게 내 정신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나는 반체제 우파 운동의 핵심 인물도 아니고, 그냥 아무도 없는 외딴 곳에서 내 악마들과 씨름하며 내 일만 하고 있을...

브렛 스티븐스, 블랙필

블랙필 브렛 스티븐스(Brett Stevens) 작성, 2016년 4월 17일 30년 전,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은 일련의 사이버펑크 소설들을 썼다 — 버로스(Burroughs)와 핀천(Pynchon)의 이론들에 대한 시각적 대응물로서 — 이 소설들은 우리 대부분이 살고 있는 겉모습과 인간의 "액면가" 보증의 세계 "아래에" 존재하는 현실을 제시했다. 몇 년 후, 그 단순화를 훨씬 더 단순한 버전으로 번역하기 위해 끔찍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매트릭스>라고 불리는 이 영화는 사이버펑크에 할리우드식 처리를 했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강력한 은유를 제공했다: 빨간 알약.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은 빨간 알약과 파란 알약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빨간 알약은 그에게 겉모습 아래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게 만들 것이고, 파란 알약은 그를 거짓 현실의 전문가로 만들 것이었다. (산만한 관찰자들은 플라톤의 기게스의 반지와 비교를 할 수도 있는데 틀린 것은 아니다). 이 영화가 판타지였고, 실제 현실에 대한 그것의 비전이 사실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분산된 쇠퇴 대신 중앙집권화된 세력을 희생양으로 삼은 거짓 현실이었지만, 그 은유는 여전히 유효하다. 어떤 사람들은 인기 없고 불쾌한 삶의 진실들을 받아들이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저 환상에서 잘하고/성공하기를 원할 뿐이다. 몇 년 후, 나의 존경하는 동료 콜린 리델(Colin Liddell)이 "블랙 필" 을 제시했다: 블랙필은 세 가지 중 가장 변증법적이지 않다. 그것은 실제 열등함에서 다시 실제 열등함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허무주의이지만, 체화된 허무주의는 절대적 이기주의를 불러일으키는데, 더 넓은 맥락과 책임으로부터 분리된 자아의식이다 — 바로 이것이 그것을 악하고 살인적으로 만든다. 열등한 사람은 맥락과 따라서 열등함을 받아들이거나, 그것에 맞서 싸울 수 있다. 블루필을 먹은 사람은 환상 속으로 뒤로 후퇴함으로써 자신의 미...

멘시우스 몰드버그, 초-칼뱅주의에 대한 몇 가지 반론

초-칼뱅주의에 대한 몇 가지 반론 멘시우스 몰드버그 · 2007년 6월 23일 혹시 이 블로그를 단지 글을 읽기 위해 방문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곳의 재미 대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내 블로그는 인터넷상에서 가장 똑똑한 블로그는 아닐지 모르지만, 확실히 가장 똑똑한 댓글 작성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아직 블로그가 새롭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고 무례한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나에게 경이롭게 느껴진다. 어느 시점에서는 글의 분량을 다소 줄여서 이전 논의들이 더 오래 신선하게 유지되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블로그는 새 블로그이기 때문에, 잘못된 부류의 독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상당히 거친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언젠가 불만이 많고 속독에 익숙한 불평분자들이 임계질량에 도달하여, 그들 스스로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처음 쓴 초-칼뱅주의 글 에 달린 몇몇 댓글들에 답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오래전에 끝난 댓글란에 다시 댓글을 다는 대신, 여기에서 그 내용을 다루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먼저, 비범한 댓글 작성자인 마이클. 그는 내가 쌓아올린 겉만 그럴듯한 독학적 박식함의 피상적인 쓰레드를 정기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마이클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칼빈주의의 본질을 예정론—즉, 모든 것을 아는 신이 우리 가운데 누가 구원받고 누가 구원받지 못할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교리—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모든 인간이 구원받는다고 믿는 진보적 이상주의자들(엄밀하게 기독교적 의미에서 보면 보편주의자, 즉 우리 모두가 구원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을 “초-칼뱅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꽤나 이상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여기서 일반적인 의미를 다소 비틀고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마이클의 방식대로 칼뱅주의를 정의한다면, 칼뱅주의는 사실상 미트라교만큼이나 죽은 사상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2007년에 ...

멘시우스 몰드버그, 초-칼뱅주의의 간략한 역사

초(超)-칼뱅주의(ultracalvinism)의 간략한 역사 멘시우스 몰드버그 · 2007년 6월 12일 지난 50년 동안 타임지는 그 독자층만큼이나 어리석어졌다. 불행한 사실은, 2007년에 타임이나 그와 유사한 잡지—그렇다, 이코노미스트조차도—를 읽는 사람이라면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는 점이다. (가끔 이코노미스트의 무작위 무료 호를 받거나, 카페에서 구겨진 한 부를 발견할 때가 있는데, 실수로 몇 쪽을 읽거나—더 나쁜 경우 사설을 읽기라도 하면—나는 비명을 지르며 분노에 차서 몇 시간 동안 옷장 속에 웅크려 있어야 한다. 내가 놀이공원의 큰 롤러코스터를 탈 만큼 자랐을 때부터 사랑했던 이 잡지는 이제 완전히, 그리고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공식적 거짓말’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데 헌신하고 있다.) 그러나 타임지는 한때 루스(Luces) 가문과 휘태커 체임버스(Whittaker Chambers)와 같은 인물들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그 시절에는 나름의 의미 있는 글들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1942년 3월 16일 자로 우리에게 제공한 것이 있다. 바로 「아메리칸 말번(American Malvern)」 이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에서 내가 어떤 부분을 잘라내어 제시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이 전체는 그 자연스러운 맥락 속에서 통째로 읽혀야만 한다. 이거 참 흥미로운 기사 아닌가? “조직된 미국 개신교의 초(超)개신교적 새로운 계획”이라는 구절이 눈에 확 들어오지 않나? 특히 그 위치를 생각해 보면 말이다. 첫 문장에서, 불과 여섯 단어가 지난 뒤에 바로 등장한다. “조직된 미국 개신교의 초개신교적 새로운 계획”이라니? 마치 1942년에 타임지의 독자였다면, “조직된 미국 개신교의 초(超)개신교적 새로운 계획”이라는 구절이 등장하는 기사를 읽을 때, 그것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대략은 알고 있으리라 기대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제 글을 조금 더 읽어 내려가면 몇몇 이름이 보인다. 예를 들어, 도대체 존 R. 모트(John R. Mott...

니체 『선악의 저편』 중 여성에 관한 글

프리드리히 니체 -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미덕 ...(전략)... 231. ...(중략)... 이렇게 말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상당히 후하게 칭찬한 셈이니, 여기서 내가 ‘여성의 본질’에 관해 약간의 진리를 털어놓는 것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말하자면 그것이 다만 나의 진리임을 독자들은 벌써 알고 있을 것이다. 232. 여성은 독립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여성의 본질’에 대해서 남성들을 계몽시키려 하고 있다—이것이야말로 유럽의 전체적인 추악화 가운데 가장 나쁜 진보 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여성의 학문과 자기 폭로의 어리석은 시도가 무엇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가! 여자는 수줍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여자에게는 허다한 현학, 천박함, 교사, 건방진 태도, 오만, 무분별함이 숨겨져 있다—어린아이를 가르칠 때의 여자를 보라!—이런 것들은 사실 남자에 대한 공포 때문에 틀어박혀 억제되고 있던 것이다. 슬프다. 만약에 ‘여성에게 있어서의 영원한 따분함’—하기야 그것은 넘치도록 있지만!—이 주저 없이 몰려올 때면! 또 여자가 우아하며 장난스럽고, 기분 전환이나 매사 유쾌한 총명함과 기교를 잊고, 유쾌한 욕망에 대한 재치를 근본적이고 원칙적으로 잊어버리기 시작할 때면! 성스러운 아리스토파네스에 대고 맹세하건대 이제 여성들의 소리는 드높다! 여자가 남자에게 최초 또는 최후에 무엇을 요구하는가는 의학적인 징후로 확실히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한다. 여성이 오늘날처럼 학문에 종사하려는 것은 참으로 가장 나쁜 취미가 아닐까? 지금까지는 다행히도 지능 계발은 남자의 일이었고, 남자의 천분이었다. 그래서 남자들은 ‘자기들끼리’만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여성들이 ‘여성’에 관해서 쓴 것을 읽고, 여성이 자신에 대한 계발을 원하고 있는가, 또 원할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해 상당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쓴다는 것으로 여성은 자기를 위한 새로운 화장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건대 자기를 꾸미는 것은 영원한 여성의 속성이 아닐까? 만약 꾸미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여...

문화적 유전자와 민족집단의 면역반응

한민족은 타 민족 대비 유당 소화에 명백한 결함 을 보인다. 이는 단순한 식습관의 차이가 아니라, 하드웨어 수준의 표식이다. 우리들은 양젖이나 소젖을 짜 마시던 유목민의 유전적 펌웨어를 물려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첫 번째 모순이 발생한다. 한반도의 역사는 유목민에 의한 끊임없는 침입의 기록이며, 이는 상당한 수준의 DNA 교환을 전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인의 특성을 보면 유당 소화 능력이든 유목민 특유의 호방한 기질이든, 이 모든 '우월한' 형질은 모조리 퇴화한 것으로 보인다. 아니, 퇴화라기보다도 벼농사에 기반한 고밀도 정주 문명이라는 환경 압력 하에서의 최적화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환경이 운영체제(OS)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왕조를 거치며 한반도라는 새장 속에서 갇혀만 살았었던 굴욕 을 겪었으며, 그리고 유목민적 환경보다 쌀농사를 짓는 정주형 민족으로 고착된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었다. 이 환경은 벼농사 문화권 특유의 폐쇄적인 면모를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작동했다. 동물의 젖은 초원의 산물이다. 쌀은 논의 산물이다. 한반도라는 환경은 유목민적 호방함 따위의 'R-전략' 적 형질이 아니라, 좁은 땅에서 고밀도로 부대끼며 순응하고 복종하는 'K-전략' 적 형질을 요구했다. 유당 소화 능력은 이 환경에서 생존에 아무런 이점을 주지 못했기에 자연적으로 도태, 즉 비활성화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유목민의 DNA가 아니라, 그 DNA를 억누르고 정주민족의 형질을 우성으로 발현시킨 '쌀농사 문화권'이라는 강력한 소프트웨어다. 이러한 자연선택 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약 유목민의 혈통이 꾸준히 유입되고, 이들이 정착한 주된 환경이 논밭이 아닌 초원이었다면, 유목민적 기질이 우성으로 발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우리 한민족은 쌀농사에 종속되어 정주민족화되었다. 민족 기질의 개조에 있어 생물학적 유전은 문화적 유전자(meme)...

스팬드렐, 신반동주의에 대한 사후분석

신반동주의에 대한 사후분석 2024년 3월 3일, 스팬드렐(Spandrell) 작성 ...(중략)... 그러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신반동주의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말했듯이, 블로그스피어 전체가 거의 사라졌다. 따라서 그 안의 작지만 나름 영향력 있던 하위 집단이었던 신반동주의 역시 같은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의 큰 부분은 단순히 소모와 교체, 즉 더 빠르고 (그리고 더 멍청한) 인터넷 매체들에 밀렸고, 세대 교체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신반동주의의 주류는 초기 밀레니얼 세대, 중국식으로 말하면 ‘바링허우(八零后)’ 세대였다. 이들은 이제 확실히 중년에 들어섰고, 중년에는 여러 일이 생긴다. 아마도—그리고 내 경험상 (그동안 직접 만난 사람도 많다)—우리 중 상당수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 결과 낯선 사람들과 인터넷에서 장문의 논쟁을 벌일 시간이나 에너지가 줄어들었다. 트위터에서 헛소리를 몇 줄 쓰는 건 언제나 쉽다. 그러나 몇백 명의 낯선 인터넷 독자들을 위해 역사나 정치이론에 대한 긴 에세이를 쓰는 일은 그만큼 쉽지 않다. 또한 대부분이 글을 쓸 체력이 떨어지게 된 시점에, 글을 쓰고자 하는 욕구 자체도 함께 사라졌다. 신반동주의는 본래 어떤 정치운동이 아니었다. 즉 자유지상주의자들처럼 점진적 규제 완화를 정부에 로비하거나, 제도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일부 분파는 실제 정치에 참여하려 했고, 들은 바에 따르면 그중 몇몇은 오늘날 일정한 권력의 주변부까지 접근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체로 신반동주의는 분석적 운동이었으며,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종말론(doomerism) 정서를 내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비판이 아니다. 나 자신도 그러한 경향이 있었다고 인정한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 즉 오늘날 ‘대중적 지식인’이자 뉴욕 언더그라운드의 일종의 유명 인사로 추앙받는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이...

교화가 안되는 이들에 대한 유교경전의 어록들

논어집주(論語集註) 위령공편(衛靈公篇) 15장 子曰不曰如之何如之何者吾末如之何也已矣 자왈불왈여지하여지하자오말여지하야이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할까? 어찌할까?'라고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나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 3장 子曰唯上知與下愚不移 자왈유상지여하우불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오직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이 변하지 않는다. ----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편 10장 宰予晝寢子曰朽木不可雕也糞土之牆不可杇也於予與何誅  재여주침자왈후목불가조야분토지장불가오야어여여하주 재여가 낮잠을 잤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고, 푸석한 흙담장은 손질할 수 없다. 재여를 대체 어찌 꾸짖을꼬?   子曰始吾於人也聽其言而信其行今吾於人也聽其言而觀其行於予與改是 자왈시오어인야청기언이신기행금오어인야청기언이관기행어여여개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처음, 나는 사람을 대할 때 그 말을 들으면 그 행동을 믿었다. 지금, 나는 사람을 대할 때 그 말을 듣고 그 행동을 관찰한다. 재여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 ----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 7장 子曰 可與言而不與之言이면 失人이요 不可與言而與之言이면 失言이니 知(智)者는 不失人하며 亦不失言이니라。 자왈 가여언이불여지언이면 실인이요 불가여언이여지언이면 실언이니 지(지)자는 불실인하며 역불실언이니라。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더불어 말할 수 있는데 더불어 말하지 않는다면 사람을 잃게 되고, 더불어 말할 수 없는데 더불어 말을 하면 말을 잃게 될 것이니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을 잃지도 않으며, 또한 말을 잃지도 않는다.”  ---- 논어(論語) 양화편(陽貨篇) 25장 子曰唯女子與小人爲難養也近之則不孫遠之則怨 자왈유여자여소인위난양야근지즉불손원지즉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이 하면 불손해지고, 멀리 하면 원망한다. ---- 맹자(孟子) 진심장구상(盡心章句上) - 6 孟子曰人不可以無恥니 無恥之恥면 無恥矣니라. 맹...

카를 슈미트, 땅과 바다 1장

인간은 육지의 존재, 육지의 거주자다. 그는 단단하게 기반을 둔 대지 위에 서고 걷고 움직인다. 이것이 그의 입장이자 토대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관점을 얻는다. 이것이 그의 인상들과 세계를 보는 방식을 규정한다. 그는 시야뿐만 아니라 걸음걸이와 움직임의 형태, 대지 위에서 태어나고 움직이는 생명체로서의 형상도 받는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사는 행성을 "지구"라고 부르는데, 표면의 범위를 고려하면 거의 4분의 3이 물이고 4분의 1만이 땅이며, 실제로 그 안의 가장 큰 땅덩어리들도 섬처럼 떠 있을 뿐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음에도 그러하다. 우리의 이 지구가 구체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래로, 우리는 가장 자명한 것처럼 이 "지구"와 이 "지상의 구체"에 대해 말해왔다. 만약 당신이 "해구" 또는 "해양의 구체"를 상상해야 한다면 이상하게 느낄 것이다. 우리의 이 세상적 존재, 행복과 불행, 기쁨과 고통은 우리에게 "지상의" 삶이며—그에 따라—지상낙원 또는 지상의 눈물 골짜기다. 따라서 많은 신화와 전설에서, 민족들이 가장 오래되고 가장 깊은 기억과 경험을 저장해온 그곳에서, 대지가 인간의 위대한 어머니로 나타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녀는 모든 신들 중 가장 오래된 존재로 표시된다. 성서는 인간이 땅에서 왔으며 다시 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대지는 그의 모성적 토대이며, 그 자신은 따라서 대지의 아들이다. 그는 동료 인간들에게서 지상의 형제들이자 대지의 시민들을 본다. 네 가지 전통적 원소들—땅, 물, 불, 공기—중에서 땅은 인간에게 할당된 원소이며 인간을 가장 강력하게 규정하는 원소다. 인간이 땅을 통해서만큼 강하게 네 원소 중 다른 것을 통해 형성될 수 있다는 생각은 첫눈에 단지 환상적 가능성으로 보인다. 인간은 물고기도 새도 아니며, 실제로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 해도 불 속에서 사는 동물도 아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와 인간 본질...

멘시우스 몰드버그, 샘 올트먼은 횡설수설하는 바보가 아니다 [요약본]

샘 올트먼은 횡설수설하는 바보가 아니다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 · 2013년 3월 13일 요약 : 샘 올트먼 은 횡설수설하는 바보가 아니다. 그게 바로 무서운 점이다. 사회의 가장 지적인 엘리트들이 횡설수설대는 어리석음 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그 사회는 아마도 이미 멸망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중략)...샘 올트먼은 천재가 아니며, 분명히 미친 사람도 아니다. 그는 그냥 기업가다. 즉, 타고난 리더다. 그리고 그런 존재는—특히 지금처럼 절망적인 시대에는— 코카인을 들이마시는 입자물리학자들 로 가득 찬 볼리비아 감옥 하나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거나, 최소한 그래야 할 존재다. 내가 특히 섬뜩하게 느끼는 것은, 올트먼의 횡설수설하고 어리석은듯한 소리가 겉보기에는 아주 냉정하고 건전하며 이성적인 말처럼 보이고 들린다는 점이다. 직접 읽어보라. 당신도 동의하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합의된 현실과 실제 현실 사이의 단절에 있다. 실제로 우리는 타고난 리더가 부족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우리를 어디로도 이끌 수 없다. 그들은 실제 현실이 아니라 ‘합의된 현실’ 속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조이스틱은 전원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합의된 현실이 허튼소리일 때, 냉정하고 건전한 이성도 결국 허튼소리가 된다. 그리고 허튼소리는 누구에게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 정말 그런가? 어리석은 허튼소리가 냉정하고 건전하고 이성적인 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고? 한번 시험해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의미에서 나는 1950년대보다 지금의 세상에서 사는 편을 훨씬 더 선호한다. 인터넷이 없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가속도는 느낄 수 있지만 속도는 느낄 수 없듯이, 사람들은 삶의 절대적 질보다는 매년의 ‘개선 속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하다. 그래서 세상이 절대적으로 더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쾌락의 러닝머신 위에서 멈춰 서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 대부분은 매년 삶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