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25의 게시물 표시

존 O. 맥기니스, 보수주의의 기원

보수주의의 기원 진화론적 이론들은 보수적 정치가 타락한 인간을 통치하는 데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존 O. 맥기니스(JOHN O. MCGINNIS), 1997년 12월 22일 오늘날 사회과학을 재편하는 혁명이 진행 중이다. 지난 20년간 심리학, 경제학, 인류학, 언어학 분야의 이론가들은 인간이 문화를 통해 사회 세계를 창조한다는 전통적인 사회과학 모델을 폐기하기 시작했다. 대신 그들은 진화생물학(evolutionary biology)으로 눈을 돌려 모든 문화를 생성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더욱 정밀하고 강력한 설명을 도출하고 있다. 그들의 발견 결과는 이제 대중 의식 속으로 스며들고 있으며, 언론은 성별 간의 관계와 같은 근본적인 주제들을 생물학적 프리즘을 통해 보도하고 있다. 진화생물학이 인간에 대한 유익한 그림을 제공하고 시민들이 그 이미지를 빠르게 흡수하고 있기 때문에, 성공을 기대하는 어떤 정치 운동도 다윈주의(Darwinism)의 두 번째 부상과 타협해야 한다. 보수주의는 진화생물학과 통합하는 것이 자유주의보다 확실히 더 쉬울 것이다. 우리의 생물학적 본성이 지닌 제약은 좌파의 가장 집요한 망상, 즉 인간이 정치적 행동을 통해 재형성되거나 변형될 수 있을 만큼 가소성이 크다는 환상을 폭파시킨다. 대조적으로, 다윈주의에서 나타나는 우리 종에 대한 묘사 --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면서도 가족과 친구에 대한 이타심을 발휘할 수 있는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능력에서는 불평등하지만 열망에서는 놀랍도록 유사한 -- 는 보수 사상의 근본 전제와 부합한다. 따라서 새로운 생물학적 학문은 다른 어떤 새로운 지식 체계보다 보수주의에 더 강력한 지지를 제공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순수 자유지상주의(pure libertarianism)와 같은 우파의 일부 지적 전통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며, 그 방법론은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 보수 연합이 다가오는 세기의 지적 토양에서 번성하려면 이러한 긴장을 해소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다...

존 더비셔, 정명(正名)

"정명(正名, The Rectification Of Names)"—중국은 국가 문제와 씨름한다 존 더비셔(John Derbyshire) 저, 2015년 1월 16일, 오후 10시 37분 정체성, 민족성, 국가, 인종이라는 가시 돋친 얽힌 문제들은 유토피아적 환상 과 현실 부정 에 기반한 국가 이데올로기 하에서 더욱 가시 돋친 것이 된다. 익숙하게 들리는가? 그래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VDARE.com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머리를 맑게 하는 훈련으로서, 가끔 우리의 국내 분쟁에서 한 걸음 물러나 다른 곳에서 일들이 어떻게 관리되거나 잘못 관리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내가 쓴 서두의 문장은 미국(U.S.A.)만큼이나 중국(China) 에도 정확하게 적용된다. 그들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잘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공식 영문 명칭이 중국민족대학교(Minzu University of China) 로 번역되는 중국의 고등교육기관을 고려해 보라. 무슨 대학교라고? "민족(Minzu)"은 지명처럼 보이지만 지명이 아니다. 이것은 중국어 단어로, 『매튜스 중한영 사전(Mathews' Chinese-English Dictionary)』 (1931)에서는 "인종; 민족들; 부족; 국민이라는 의미에서의 국가"로 번역된다. ( 현대 온라인 사전들 도 동의한다.) 만약 "-주의(-ism)"를 뜻하는 중국어인 "-zhuyi"를 접미사로 붙이면, "민족주의(nationalism)" 를 의미하는 중국어 단어가 된다. 좋다. 그런데 그것이 중국어 단어라면, 이 기관의 공식 영문 명칭 에 무엇 때문에 들어가 있는가?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30년 전 내 중국 생활 시절에 이곳은 공식적으로 중앙민족학원(Central Institute of Nationalities)이었다. 외국인들은 영어로 이곳을 민족학원(Nationalities In...

르네 게농, <현대 세계의 위기> 1장. 암흑시대

현대 세계의 위기 1장. 암흑시대 힌두 교리(Hindu doctrine)는 인간의 주기, 즉 만반타라(Manvantara)가 네 개의 시기로 구분된다고 가르치는데, 이 시기들은 원초적 영성이 점차 더욱 더 가려지는 단계들을 나타낸다. 이 시기들은 서양의 고대 전통이 황금기(Golden Age), 은의 시대(Silver Age), 청동기(Bronze Age), 철기(Iron Age)라고 불렀던 시대들과 동일하다. 우리는 현재 네 번째 시대, 즉 칼리 유가(Kali-Yuga) 또는 '암흑시대'에 있으며, 이미 6천 년 이상 이 시대에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고전적' 역사에 알려진 어떤 시기보다도 훨씬 이전이다. 그 시대 이후로, 이전에는 모든 이에게 도달 가능했던 진리들이 점점 더 은폐되고 접근하기 어려워졌다. 그것들을 소유한 자들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으며, 모든 시대에 앞서 존재했던 '비인간적(non-human)', 즉 초인간적(supra-human) 지혜의 보고는 결코 상실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점점 더 뚫을 수 없는 장막에 둘러싸여 인간의 시야로부터 숨겨지고 발견하기 극도로 어렵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도처에서 다양한 상징들 아래 동일한 주제, 즉 무언가가 상실되었다는-적어도 외양상 그리고 외부 세계에 관한 한-주제를 발견하는 이유이며, 진정한 지식을 열망하는 자들은 그것을 재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이렇게 숨겨진 것이 주기의 끝에서 다시 가시화될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모든 것을 함께 묶는 연속성 때문에 이는 새로운 주기의 시작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주기적 발전이 왜 이러한 방식으로, 즉 상위에서 하위로 하향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 의문이 제기될 것인데, 이는 근대인들이 이해하는 진보 개념과 완전히 대립적임이 즉시 인식될 것이다. 그 이유는 어떤 현현(manifestation)의 발전도 필연적으로 그것이 유래하는 원리로부터 점차 증가하는 거리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최고점에서 출발하여, 그...

정치학 뒤에 숨은 진화심리학 제2장 정치 이데올로기의 정의

정치학 뒤에 숨은 진화심리학 제2장 정치 이데올로기의 정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정의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이 투입되어 왔다. 이데올로기의 생물학적 기원에 대한 이해가 부재한 상황에서,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스펙트럼 양측의 당파주의자들에 대한 관찰과 분석을 축적해왔다. 이는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이 쟁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특성화하려는 시도로서, 정보로부터 어떤 근본적인 주제가 자발적으로 나타나 다양한 쟁점 입장들 간의 논리적 또는 심리적 연관성을 설명하기를 기대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들의 정확성은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에 의해 빈번히 의문시되어 왔으며, 그들은 종종 연구자들을 무의식적 편향으로 비난해왔다. 일부는 연구자들의 좌향적 성향이 보수주의(conservatism)를 일종의 사고 질병으로 병리화하도록 이끌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연구들은 보수주의가 적절히 예방접종을 받은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서만 지적 글러브박스(glovebox) 안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 작업에 착수하려 한다면, 이러한 연구자들이 주장해온 바를 검토할 가치가 있다. 제시 방식에 편향이 있더라도, 이러한 분석들은 쟁점 입장과 이데올로기의 연관성에 대한 독립적인 주장을 제공할 것이다. 실제로 알테마이어(Altemeyer)의 연구처럼 명백히 편향된 경우에도, (좌파) 연구자가 어떤 쟁점을 구분점으로 주목한다는 사실 자체(예를 들어, 신(God)에 의해 정의된 전통적 결혼 대 비전통적이고 덜 제한적인 성적 역할)가, 반대 관점의 이데올로기 신봉자가 그러한 인식적 차이를 중요하게 인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종종 그들은 이를 뒷받침하는 상당한 양의 데이터도 축적했을 것이다. 이는 연구에 관한 어떤 의문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이데올로기를 검토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선행 연구는 우리의 목적에 충분히 부합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치 이데올로기는 스펙트럼 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스펙트럼의 우측에는 오늘날...

멘시우스 몰드버그, 형식주의 선언문

형식주의 선언문(A formalist manifesto) 멘시우스 몰드버그(Mencius Moldbug) · 2007년 4월 24일 얼마 전 나는 차고에서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다가 새로운 이데올로기(ideology)를 만들어 보기로 결심하였다. 무슨 말인가? 내가 미쳤다는 것인가? 우선, 이데올로기란 애초에 즉석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라자냐 조리법처럼 세대를 거쳐 전승되는 것이다. 그것은 버번 위스키처럼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라디에이터에서 갓 흘러나온 것을 바로 마실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시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세계의 모든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이데올로기다. 부시(Bush)와 오사마(Osama)가 공통으로 가진 것은 무엇인가? 둘 다 이데올로기적 광신자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가 더 많은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인가? 더 나아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창조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류는 예수(Jesus) 시절 이래로 적어도 이데올로기에 관해 논의해 왔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개선할 수 있다는 말인가? 대학원조차 중퇴한, 그리스어나 라틴어도 모르는, 인터넷에 떠도는 무명의 개인이? 내가 대체 누구라고, 월리스 숀(Wallace Shawn) 이라도 된단 말인가? 모두 타당한 반론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것들에 답하고, 그 후 형식주의(formalism)에 대해 논하도록 하겠다. 우선, 인터넷은 오늘날 우리에게 정교한 세부 사항까지 전해주는, 오랜 세월 숙성된 두 가지 전통적 이데올로기를 보여준다. 명칭은 다양하지만, 여기서는 그것들을 진보주의(progressivism) 와 보수주의(conservatism) 라 부르기로 한다. 진보주의에 대한 나의 불만은 지난 최소 100년간 대부분의 저술가, 사상가, 그리고 일반적으로 똑똑한 사람들이 진보주의자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2007년의 어떤 지식인—만약 인터넷 시공간 왜곡 같은 일이 일어나 내 말이 폭스 뉴스(Fox News)에서 생중계되지 않는 한, 지금 이...

darreact, 21세기 사회보수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

자유주의의 자멸적 가치에서 벗어나기: 21세기 사회보수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 darreact, 2025년 9월 15일 십여 년 전 필자는 "셰이커교도들, 자멸적 가치, 그리고 자율성(The Shakers, Deathwish Values, and Autonomy)" 이라는 글에서 "자멸적 가치(deathwish values)"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간단히 말해서, 자멸적 가치란 그 가치를 지닌 사람들로 하여금 소멸하게 만드는 가치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가치 집단(value class)은 특정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자멸적 가치란 그 가치가 출산율에 미치는 영향으로 인해 해당 집단이 시간이 지나면서 소멸하게 만드는 가치를 의미한다. 금욕주의를 실천했던 셰이커교도들(Shakers)이 쉬운 예시였다. 하지만 특정 집단이나 부류의 소멸을 야기하는 단일한 가치를 지적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개인들은 서로 겹치는 여러 가치 집단에 속하며, 각각의 가치가 출산율을 약간씩 감소시킬 수 있고, 오직 가치들의 총합만이 그것을 임계점 너머로 밀어낼 수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확산되는 모든 곳에서 출산율이 붕괴하고 있는 2025년 현재, 그러한 가치들의 집합체가 자멸적 가치에 해당한다고 말하는 것은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한 세기 동안 패배만을 거듭해온 사회보수주의의 21세기 과제는 자유주의(liberalism)의 자멸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삶의 공간을 창조하고 개척하는 것이어야 한다. 1980년대 사회보수주의의 구호는 문화를 되찾는 것이었다. 그들은 1960년대/70년대의 변화를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에 의해 되돌릴 수 있고 보수적 가치가 다시 한번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족 가치에 대해 큰 소리로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문화의 새로운 동력을 되찾거나 창조하지 않았다. 할리우드(Hollywood), 교...

브렛 스티븐스, 로버트 콘퀘스트의 정치학 3법칙

로버트 콘퀘스트의 정치학 3법칙(Robert Conquest's Three Laws Of Politics) 2017년 5월 3일, 브렛 스티븐스(Brett Stevens) 작성 존 더비셔(John Derbyshire)가 내셔널 리뷰(National Review)에서 일했을 당시, 그는 로버트 콘퀘스트의 정치학 법칙(Robert Conquest's Laws of Politics) 에 대한 요약을 포함하여 몇 가지 훌륭한 글을 썼다: 기억하는 바로는 다음과 같다: 1. 모든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분야에 대해서는 보수적이다. 2. 명시적이고 본질적으로 우파가 아닌 모든 조직은 조만간 좌파가 될 것이다. 3. 모든 관료적 조직의 행동은 그 조직이 적들의 비밀 도당에 의해 통제된다고 가정할 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두 번째 법칙이 가장 많이 논의되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오직 우파가 되도록 설계되지 않은 모든 조직은 좌파로 표류하게 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더 광범위한 원리를 지적한다: 모든 조직이 좌파로 변하는 압력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일반적으로 브로콜리보다 치즈버거와 도넛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좌파주의(Leftism)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좌파적 사상은 평화주의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갈등과 위험 대신에, 단순히 부를 공유함으로써 평화로운 공존을 약속한다. 이것의 문제는 기여자가 되는 것보다 무임승차자가 되는 것이 더 효율적이게 만들어서, 이 길을 택하는 문명들은 스스로를 집어삼킨다는 것이다. 문명의 생존을 바라는 이들에게 이것은 평화주의와 평등, 다원주의, 관용, 개인의 자유와 같은 관련 사상들에 대해 지속적인 부정적 압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다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경향은 엔트로피를 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콘퀘스트의 두 번째 법칙에 새로운 복잡성을 추가한다. 조직이 개인의 선택보다 목적에 전념하지 않는 한, 그 조직은 퇴행하...

[펌] 유교좌의 여자들이 주작글 쓰는 이유 분석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hirdposition&no=44978&page=1 [일반] 여자들이 나 남잔데 형식으로 주작글 쓰는 이유 제3갤러(140.248) 2025.09.25 14:13:54스크랩 조회 164 추천 11 댓글 3 여자는 여자의 세계에 종속되어 있음 여자는 유행을 선도하는 여자를 따라함 여자는 여자들끼리 계속 비교함 여자들은 자기들이 같은 여자 눈치를 보고 유행이면 순응하듯 남자도 남자 눈치를 보고 유행이면 순응할 거라 보고  계속 ‘나 남잔데’ 글로 바이럴을 돌리며 남초 여론을 만들어내려 듦 이기론으로 설명하면  여자는 기 중심이고 남자는 리 중심  남자는 남들이 백날 명품 가방이라 한들 그래서 어쩌라고 왜 좆만한 가방을 5백씩 주고 사냐 노이해가 기본값 이게 각자의 주관이 강하다, 합리성이 강하다, 리가 강하다는 얘기 반면 여자는 물질의 가치를 각자 평가하는 게 아니라  사회가, 제니 같은 인플루언서가, 여자 세계 전반에서 평가하는 것임  그리고 그렇게 평가된 현실(기)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편 리가 작용을 덜 함, 여자가 사회성이 높다는 말도 이래서 나옴 남자는 왜 명품가방 500씩 주고 사는게 필요한지 나는 이해안되지만 다만 난 너를 따먹기 위해 가방사줄게, 그렇게 해서라도 내 여자가 여자들 세계에서 경쟁에서 이겨봐라가 일반적인 태도가 되는 거임 (남자가 명품을 구입하는 일반적 메카니즘을 얘기한 거지 모든 남자가 그런 방식을 취한다는 건 아님) 남자는 누구 따먹을 일이나, 가족애(맘, 와이프, 딸) 없으면 명품가방 구입할 일이 없음 명품가방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용을 느끼는 게 없음 그런데 여자는 다르지 여자는 명품가방의 효용을 어떻게 느끼냐면  내가 다른 여자와 다르다 차별화된다, 내가 저 여자보다 급이 높다를 다른 여자에게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됨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다른 여자를 이기기 위해 명품가방을 ...

'브렛 스티븐스, 허무주의적 폭력적 극단주의'의 댓글 번역

https://www.amerika.org/politics/nihilistic-violent-extremism-nve/ 댓글 brainrot (6일 전) 하지만 그것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자신의 작품을 링크하는 것은 사기다. Diana de Poitiers → brainrot (6일 전)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쉬고 있는 마음의 징표일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의 업적이다. Gilgamesh's dog → brainrot (6일 전) 결국 다른 사람들이 에볼라, 요키, 스티븐스 같은 인물들을 각주로 활용하여 우리를 파괴로 이끄는 비현실적인 시스템들에 대한 비판을 더욱 발전시킬 것이다. 무질서하고 관성적이며, 주도권을 잡은 로고스의 최악의 사례들 말이다. Francisco Albanese → brainrot (5일 전) 그것은 학계에서는 정상적인 일이다. Brett Stevens (운영자) → brainrot (4일 전) 나는 그 작품들과 그 안의 분석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또한 그것들을 허무주의에 대한 유일하게 합리적인 논의로 본다. 우리는 "오 마이 갓 허무주의자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식의 이야기는 많이 듣지만 "허무주의자들은 거짓된 무언가를 믿기를 거부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듣지 못한다. ============================================== Diana de Poitiers (6일 전, 편집됨) 또다시 군중들이 유행어가 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그들은 허무주의(Nihilism)에서 "nihil"(무)을 이해하지 못한다. 증오, 분노, 그리고 발작적 반응들은 무(nothing)가 아니다. 그것들은 무언가(something)이다. 실수는 인간이 비집착을 통한 허무주의 상태에서 몇 분 이상 지속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니체가 그 공허함을 무언가로 채워야 했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래야 할 것이다. 요점은 군중이 그 채움을 하도...

브렛 스티븐스, 허무주의적 폭력적 극단주의

허무주의적 폭력적 극단주의(Nihilistic Violent Extremism, NVE) 브렛 스티븐스(Brett Stevens) 저, 2025년 9월 19일 허무주의(Nihilism)는 인간의 나쁜 행동에 대한 변명이 되는 다른 희생양들 — 아자젤(Azazel)의 자식들 — 과 함께 사용된다. 인간들은 나쁜 행동을 교정하는 대신 이러한 것들을 탓한다. 이는 인간들로 하여금 옳은 일이 일어나면 자신의 천재성이고 잘못된 일이 일어나면 불공정한 자의적 불의라고 여기는 더욱 완벽한 유아론적(solipsistic) 상태에서 존재할 수 있게 한다. 인간들은 신(God)에 대해 쓰인 책이 없으면 사람들이 도덕적 기반을 갖지 못하거나 삶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믿지 않을 것을 두려워한다. 문화 상대주의자들(Cultural relativists)은 이러한 것들이 문화에 특정적이며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같은 종교조차 다른 국가에서 다르게 해석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더욱 안정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도덕은 문화에서 발생할 뿐만 아니라 그 문화의 목표와 환경에 대한 상식적 적응이다. 인간들은 동일하지 않다. 개인들이 다르지만, 집단들도 다르며, 이는 집단들이 서로 다른 문화를 갖는 이유이다. 이는 그들의 DNA에 새겨져 있다. 성경을 읽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근거, 도덕성, 또는 관점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는 사람은 애초에 기능적 행동을 하는 경향이 없던 사람이다. 신이나 과학 없이도, 기본적인 도덕은 상식이다. 비록 상식이 문화마다 다를지라도 말이다. 허무주의 철학은 인간들이 자신들을 통제하는 성경과 같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다룬다. 심층 탐구 는 인간의 감정과 사회화를 넘어선 삶의 철학 을 드러낸다: 허무주의자들(Nihilists)은 절대적, 보편적, 객관적 형태의 진리, 가치, 도덕, 소통을 주장하는 합의된 환상의 인간적 투영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유일한 "사실"이 세계 자체라고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