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랜드, 신반동주의적 삼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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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분법 (trichotomy) Nick Land(닉 랜드), 2013년 4월 30일 ‘Spandrellian Trichotomy’(스판드렐리언 삼분법, Nick B. Steves(닉 B. 스티브스)가 명명, 해당 게시글 을 기반으로 함)는 현재 논의를 촉발시키는 강력한 기관(機關)으로 자리잡았다. 이 주제는 논의가 들끓고 있어, 어떤 링크 목록을 정리하더라도 작성되는 즉시 구식이 되어버릴 정도다. 가장 명확한 표지들로는 이것 , 이것 , 이것 , 이것 , 그리고 이것 이 있다. 이 복잡한 논점을 간결하게 지칭할 필요가 있기에, 이를 ‘the Trichotomy(삼분법)’로 약칭하는 것이 Spandrell(스판드렐)의 노벨 평화상 후보 자격을 방해하려는 어설픈 시도로 해석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이미 널리 합의된 바는 무엇인가? (1) 신반동주의(neoreactionary) 내부에는 일군의 공통 인식이 존재한다. 다양한 형태의 ‘혐오받는’ 현실주의적 통찰들이 여기에 포함되며, 특히 사회정치적 결과에 대한 깊은 유산(deep heritage)의 기여를 강조한다. 강조점에는 차이가 있으나, 초(超)버크적(ultra-Burkean) 태도가 암묵적으로 공유되고 있으며, 암흑계몽주의(Dark Enlightenment)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저자들 사이에서는 인간 생물 다양성(HBD, Human Biodiversity)의 중요성이 일반적으로 전면에 놓인다. (2) 신반동주의는 또한 공통의 적을 공유한다. 그것이 바로 Mencius Moldbug(멘시우스 몰드버그)가 정의한 Cathedral(대성당)이다. 이 적의 성격에 관해서는 많은 점이 합의되어 있으며, 특히 그것이 사상적·실천적 차원 모두에서 깊은 유산을 지워버리려는 기획으로 정의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만의 깊은 유산을, 특수한 형태의 심층적 종교 증후군으로서, 지워버린다. 그러나 대성당의 계보를 더욱 세밀하게 해설하는 문제로 들어가면 논쟁이 일어난다. (특히 그것이 기독교(Christianity)와 얼...

군인의 잡역부 취급이 당연시되는 현실에 대한 분석

군인의 잡역부 취급이 당연시되는 현실에 대한 분석 2023년 여름, 폭우가 전국을 덮쳤다. 수해 현장에서 수많은 병력이 동원되었고, 그 과정에서 해병대 제1사단 채수근 상병(사망 당시 일등병이었으며 사망 이후 상등병으로 1계급 추서되었다.)이 복구 작업 중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망 사건 이후, 한국 정부와 군 지휘부는 여론을 의식해 이렇게 흘렸다. “앞으로는 군 사병을 구조 작업에는 투입하지 않겠다.” 그 말은 일시적 안도감을 줬지만, 곧바로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여전히 군 사병들은 복구 작업이라는 이름으로 곳곳에서 동원되고 있었다. 디시인사이드 국내보수 마이너 갤러리의 ‘파스텔’이라는 어느 유저는 이 상황을 보며 이런 글 을 남겼다.  미친나라 채상병 염병떠니까 구조작업에 군인 투입 못하고 복구작업엔 싹 투입시켰네 미친 ㅋㅋㅋㅋㅋ 겉으로는 군대 정책 방침의 모순을 지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뉘앙스를 곱씹으면 전혀 다른 가치관이 드러난다. 파스텔은 군인의 전방위적 동원을 문제 삼지 않는다. 오히려 군인은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언제든 소환되어야 하며, 그것이 구조든 복구든 상관없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왜 구조에는 안 쓰면서 복구에만 쓰느냐”는 식의 질책이 바로 그것이다. 군인이 징집된 존재이든, 위험이 크든, 보상이 미흡하든 상관없이 군인은 그저 움직여야 한다는 당위를 그녀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체제를 비판하는 듯하지만, 실은 군인을 공공재처럼 소모하는 체제의 논리를 오히려 옹호하는 발화다. 민주주의 국가는 겉으로는 “군인을 보호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실상은 언제든 그들의 노동과 생명을 연료로 갈아 넣는다. 파스텔은 그 구조를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연료 공급이 잠시 멈춘 것을 조롱하며, “구조작업에도 쓰라, 왜 멈췄느냐”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녀의 한 마디는 체제의 포식적 본능을 드러내고도, 그 모순을 자각하기보다는 기계에 더 빠른 회전을 요구하는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본문 아래에는 댓글이 이어진다. ...

스팬드렐(spandrell), 신반동주의적 삼분법(The Neoreactionary Trichotomy)

갈등(Conflict) 2013년 4월 10일, spandrell(스팬드렐) 작성 Nick Land(닉 랜드)가 어제 나를 두고 “내적 갈등을 겪고 있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렇다. 어쩌면 글쓰기에 막혀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사고 흐름을 오래 추적하다 보면, 애초에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지를 놓치게 되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했다면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결론에 도달해버리는 일이 일어난다. 나는 일반적으로 사태를 단순하게 유지하고 싶어하는 편이다. 그러니 한 번 재부팅하고 다시 시작해보자. 우리가 왜 반동주의자(reactionaries)인가? 그 이유는 현대성(modernity)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형편없는가? 그 항목을 세어보자. 1. 여성들은 불쾌하고, 남성들은 남성답지 않다. 2. 외국인들이 어디에나 있다. 3. 역(逆)우생학(dysgenics)이 진행되고 있다. 4. 부패(corruption)가 만연하다. 5. 미적 감각(aesthetic taste)이 붕괴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아사비야(asabiyyah, 집단적 결속력)의 결핍으로 요약될 수 있다. 반동적 사상(reactionary thought)은 현대성(modernity)이 아사비야를 부식시키며, 그 결과 사회적 붕괴와 전반적 비참함을 초래한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반동적 사상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전통주의적 분파(traditionalist branch), 다른 하나는 미래주의적 분파(futurist branch)이다. 혹은 셋이라고도 할 수 있다. 종교적/전통주의적 분파(religious/traditionalist branch), 민족적/국가주의적 분파(ethnic/nationalist branch), 그리고 자본주의적 분파(capitalist branch)이다. 종교적 분파는, 공통된 신앙이 아사비야를 제공하는 이상화된 종교사회로 돌아가길 원한다. Orthosphere(오소스피어, 기독교적·보수적 전통주의자들이 모여 운영하는 블로그 네트워크)를 살펴보라. 이들이 현실...

전통과 그에 대한 회의론(懷疑論)에 관한 신반동주의적 비평

전통과 그에 대한 회의론(懷疑論)에 관한 신반동주의적 비평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과거? 아련한 낭만. 전통? 포근한 질서.”  그러나 임건순이라는 한 동양철학자가 그 기억을 꺼내 들고, 차갑게 해부한다. 임건순 씨가 드러내는 것은 진보도 보수도 애써 덮어온 장면들이다. 이것은 특정 진영의 신화를 공격하는 글이 아니다. 이것은 과거를 미화하려는 모든 진영에 대한 잔혹한 반박이다. 그리고 임건순 씨가 내놓는 결론은 이렇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하는것은 절대로 과거로 돌아가선 안되기 때문.”  하지만, 과거를 부정한 뒤 임건순 씨가 세우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이 바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다. 임건순 씨는 이렇게 글 을 시작한다. 내가 기억하던 남조선의 좋았던 옛날. 정이 넘치고 인심이 넉넉해 너무 살기 좋았던 우리의 과거 과연 좋았던 옛날이었을까? 그 첫 문장을 읽는 순간부터 나는 코웃음을 짓게 된다. 임건순 씨가 꺼내 놓은 첫 문장은 단순한 개인적 추억이라기보다, 사람들이 흔히 공유하던 ‘좋았던 옛 시절’이라는 신화를 일부러 비꼰 것이다. 그리고 임건순 씨는 그 신화를 곧장 뒤집어, 그 시절에 숨겨져 있던 잔혹한 현실을 펼쳐 보인다. 임건순 씨는 첫 번째 예시를 이렇게 적는다. 얼마나 컸나보자며 동네에서 툭하면 남의 집 자식 바지, 팬티 내려서 성기 보는 어른들. 전통적 시골의 ‘정’은 무엇이었나? 아이의 신체는 사유물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의 장난감이었다. 임건순 씨는 이 한 문장에서 전통의 가면을 벗겨냈다.  다음으로 임건순 씨는 이렇게 쓴다. 효도니 우애니 하면서 열심히 사는 형제들 집안 가족들이 기생해서 영혼까지 털어먹던 모습. 효도, 우애. 좌우를 가리지 않고 오래도록 미덕으로 여겨져 온 가치다.  그러나 임건순 씨는 이 단어들이 실제 생활 속에서는 종종 부당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쓰였다고 지적한다. 겉으로는 서로 돕고 정이 넘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실하게 사는 사람을 ‘가족...

열린 마음을 가진 진보주의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제9장 요약 : 멘시우스 몰드버그, 체제에 대한 소프트 리셋과 하드 리셋

  ... (중략) ... 따라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째, 우리가 체계적 허위(systematic mendacity) 속에 살고 있음을 인정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 그러한 상태 속에서 살아왔음을 인식하며, 그것이 나아지기는커녕 악화되고 있을 가능성을 감안하여 그 현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 모색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중한 선택이다. 이는 진정한 지혜, 곧 체념의 지혜이자 건전한 개인적 동기를 보여준다. 다른 한편, 이러한 글을 읽을 시간이 있다면, 해법을 고민할 시간도 충분하다. 어차피 우리는 이미 우리의 신경 조직 중 상당 비율을 정치라는 무의미한 잡음에 투자하도록 요구하는 정부 아래 살고 있다. 그 뇌의 한 부분(腦葉) 은 본래 춤, 문학, 쇼핑 같은 것에 쓰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인간이다. 더 건전하고 긍정적인 사유 외에도, 때로는 분노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가장 유쾌한 반격은 무엇인가? 자신의 정치적 통제 모듈을 다시 프로그램하여, 그것을 이전의 봇 주인(botmasters)을 향해 되돌려 쓰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를 두 범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정책적 질문이다. 미국 정치 체제가 어떻게 하면 대성당(Cathedral)의 지배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인가? 둘째는 군사적 질문이다(전쟁과 정치를 연속선 으로 간주한다면): 대성당이 스스로 권력을 포기할 의사가 없을 때, 어떻게 하면 그것을 포기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이 둘은 본질적으로 분리될 수 없지만, 편의상 따로 논의하는 것이 유용하다. 이 장에서는 첫 번째 문제를 다룬다. 이 결별을 실행하는 기본적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소프트 리셋(soft reset), 다른 하나는 하드 리셋(hard reset)이다. 기본적으로, 하드 리셋은 효과가 있으며 소프트 리셋은 효과가 없다. 그러나 소프트 리셋이 여러 면에서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왜 그것이 작동할 수 없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